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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두 얼굴] 저주받은 혁명가 - 카를 마르크스(4)
마르크스가 산업이 운영되는 방식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파악할 수 없었던 것, 또는 파악하지 않았던 것은 산업 혁명 태동기인 1760-1790년대에 풍부한 자본에 접근했던 유능한 공장주들이 노동자의 작업 환경을 개선하려고 끊임없이 신경을 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장주들은 공장 관련 입법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법률의 효과적인 집행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법률이 그들이 불공정 경쟁이라 간주했던 것들을 제거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작업 환경은 향상됐고, 따라서 노동자들이 마르크스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봉기를 일으키지 않았다. 예언자는 당황했다. <자본론>을 읽어 보면 근본적으로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실패한 정확한 이유는 비과학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몸소 사실을 조사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남들이 조사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활용하지도 않았다. <자본론>뿐 아니라 그의 모든 저작은 진실에 대한 무시, 때로는 경멸에 가깝기까지 한 그의 시선을 시종일관 반영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철학적 시스템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가 자신들이 주장하는 결과물을 낳을 수 없는 주된 이유다.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진리에 대한 사랑이 학자를 표방한 마르크스의 행동 동기가 아니었다면, 평생토록 그를 활동하게 만든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의 성격을 더 자세히 들여다봐야만 한다. 지식인의 광대한 저작들이 두뇌와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개성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약간은 서글픈 일이다. 마르크스는 이런 주장을 입장할 가장 빼어난 사례다. 우리는 그의 철학적 관념이 시적 비전과 저널리즘적 기술과 학구적 태도의 혼합물이라는 것을 이미 살펴봤다. 그런데 그의 철학적 실질적 알맹이는 그의 성격의 네 가지 측면과 연관지어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폭력에 대한 애호, 권력욕, 금전 문제에 대한 무능함, 그리고 다른 그 어떤 성격보다도 강한, 주변 사람들을 착취하는 경향이다.
마르크스주의가 항상 보여준,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정권이 실제 행동으로 꾸준히 보여준 잠재적인 폭력의 분위기는 마르크스 자신의 성향을 투영해 낸 것이다. 극단적인 언어 폭력의 분위기 속에서 평생을 살았던 마르크스는 주기적으로 격렬한 말다툼을 벌였고, 가끔은 육체적 폭력까지 행사했다. 마르크스 가족의 불화는 미래의 아내인 예니 폰 베스트팔렌이 그에게 눈길을 던지게 만든 첫 요인이었다. 본대학에서 경찰은 권총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마르크스를 체포했고, 그는 퇴학당할 뻔했다. 대학이 보관하고 있는 자료에 의하면 학생 간의 싸움에 개입한 그는 결투를 벌여서 왼쪽 눈에 상처가 생겼다. 그와 가족 사이의 다툼은 아버지의 말년에 그늘을 드리웠고, 결국에는 어머니와의 의절로 이어졌다. 예나의 초기 편지 중에 지금도 남아 있는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제발 그렇게 많은 원한을 품고 짜증을 내면서 편지를 쓰지는 마세요.” 그가 끊임없이 벌인 싸움 중 상당수는 글을 쓸 때, 그리고 연설을 할 때 더 많이 사용했던 난폭한 표현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술을 마시고 연설을 할 때는 상황이 더 나빴다. 마르크스는 알코올중독자는 아니었지만, 주기적으로 술을 마셨고 종종 과음을 했으며 때로는 심각한 술 시합에 끼어들기도 했다. 마르크스가 20대 중반부터 늘 외국의 도시에 있는 독일인 망명자 공동체에서 망명객 신세로 살았다는 것은 그가 겪은 고초의 일부였다. 그는 망명자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을 사귄 적은 거의 없었지만, 공동체에 편입하려는 시도도 결코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가 항상 어울렸던 망명자들은 정치적 혁명에만 몰두한 아주 협소한 집단이었다. 이런 환경은 평생에 걸친 마르크스의 좁은 시야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런 집단은 지독한 논쟁을 벌이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기 때문에, 걸핏하면 싸우려 드는 마르크스의 특성에 이보다 큰 영향을 준 사회적 배경은 없었다. 예나에 따르면 브뤼셀에서를 제외하고는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파리의 물랭 가에서 편집 회의를 할 때면 밖에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는 고함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항상 문을 걸어 잠가야 했다.
그렇다고 아무런 목적이 없는 다툼은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교제한 사람 모두와 다툼을 벌였다. 브루노 바우어부터 시작된 이 다툼은 그가 상대방을 완전히 지배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을 때 벌어졌다. 그 결과 행동에 나선 마르크스가 적의를 불태우며 사납게 날뛰는 모습을 묘사한 글들이 많다. 바우어의 동생은 마르크스에 대한 시를 쓰기까지 했다 .
격렬한 분노에 휩싸이 트리어 출신의 새까만 사람
그는 흉악한 주먹을 불끈 쥐고 끝없이 우르렁거리네
수만 명의 악마에 머리카락을 붙잡힌 듯이.
마르크스는 키가 작고 펑퍼짐했으며, 검은 머리에 수염을 길렀다. 피부는 누르스름했으며(아이들은 마르크스를 ‘무어인’이라고 불렀다). 프러시아 스타일의 외눈 안경을 썼다. 바이틀링 “재판”에서 마르크스를 본 파벨 안넨코프는 마르크스의 “두텁고 까만 갈기 같은 머리카락, 털북숭이 손과 단추를 비뚤게 잠근 프록코트”를 기술했다. 예의범절이라고는 마르크스는 “거만했고, 사람들을 약간 얕잡아 봤다.” 그의 “날카로운 금속성 목소리는 사람과 사물에 대해 끊임없이 늘어놓는 그의 급진적 판결에 딱 들어맞았다.” 그가 내뱉는 모든 말에는 “호전적인 분위기”가 배어 있었다. 그가 좋아한 셰익스피어 작품은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로, 그는 이 작품에 나오는 아이아스와 테르시테스의 난폭한 욕설을 즐겼다. 그는 그 욕설을 즐겨 인용했는데, 한 구절(“그대 멍청한 왕이여, 내 팔꿈치에 두뇌가 없는 것처럼 그대에게도 두뇌가 없도다”)의 희생자는 동료 혁명가 카를 하인첸이었다. 하인첸은 분노한 작은 남자를 인상적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그는 마르크스를 “새까만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더러운 피부는 누렇게 뜬”,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추접한”, “고양이와 유인원을 섞어 놓은 인간”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옷과 피부는 날 때부터 흙탕물 색깔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더러워진 것인지 구분이 불가능했다. 작고 사나우며 악의가 서린 눈은 “사악한 불길을 엄청나게 쏟아댔다.” 그는 습관적으로 “자네를 완전히 없애 버리겠어”라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정치적 라이벌과 적수들에 대한 세밀한 서류를 수집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소비했는데,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 같으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경찰에게 서류를 넘겼다. 1872년 헤이그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회의에서 벌인 공개적인 큰 다툼은 훗날 소련에서 일어난 파벌 투쟁을 예고했다. 스탈린 시대에 일어난 사건 중 마르크스의 행동에서 예상하지 못할 일은 하나도 없다. 가끔은 피를 흘리기도 했다. 1850년에 아우구스트 폰 빌리히와 말다툼을 하던 중에 마르크스가 너무 심한 말을 퍼붓자, 폰 빌리히는 결투를 신청했다. 한때는 싸움꾼이었던 마르크스는 “프러시아 장교의 장난에 말려들지는 않겠다”고 말했지만, 젊은 조수 콘라드 슈람이 마르크스의 자리를 대신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조금도 말리지 않았다. 슈람은 평생 단 한 번도 권총을 쏴 본 적이 없었고 빌리히는 1급 사수였는데도 말이다. 슈람은 부상을 당했다. 이 사건에서 빌리히의 입회자는 마르크스의 음흉한 동료로, 예나가 끔찍이도 혐오했던 구스타프 테코프였다. 최소한 동료 혁명가 한 명을 살해한 테코프는 나중에 경찰 살인죄로 교수형을 당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책략에 맞기만 하면 폭력이나 테러리즘을 거부하지 않았다. 1849년에 그는 프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연설을 하면서 으름장을 놨다. “우리는 무자비하며, 당신들에게 조금의 자비도 바라지 않소. 우리는 때가 되면 테러리즘도 감추지 않을 것이오.” 이듬해에 그가 독일에서 유포한 “행동 계획”은 특히 대중 폭동을 부추겼다. “우리는 소위 말하는 난폭한 행위를 반대하지 말고, 증오스러운 인물이나 증오스러운 기억을 간직한 공공건물에 대한 대중의 복수를 용서할 뿐 아니라 도와주어야 한다.” 그는 효과적인 것이면 암살도 기꺼이 지지했다. 1878년에 운터덴린덴에서 있었던 빌헬름 1세 암살 시도가 실패했다는 뉴스를 마르크스와 같이 들은 동료 혁명가 막심 코발레프스키는 마르크스가 분노하여 “암살에 실패한 테러리스트에게 저주를 퍼부었다”고 기록했다. 그런 마르크스가 권력을 잡았다면 엄청나게 폭력적이고 잔인한 일들을 실천에 옮겼을 것이다. 물론 그는 대규모 혁명이나 폭력 같은 것을 실천에 옮길 만한 위치에는 결코 오르지 못했다. 따라서 그의 음울한 분노는 책 속에서 늘 비타협적이인 극단주의의 분위기를 내뿜었다. 그의 책은 많은 구절이 실제로 분노한 상태에서 쓰였다는 인상을 준다. 오래지 않아 레닌, 스탈린, 모택동이 어마어마한 규모로 실천에 옮긴 폭력을 마르크스는 마음속으로 느끼면서 책을 통해 발산했다.
진실을 왜곡하고 폭력을 부추긴 행동에 대해 마르크스가 실제로 어떠한 도덕적 태도를 가졌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그는 한 가지 점에서는 대단히 도덕적인 존재였다. 그의 마음속에는 더 나은 세상을 창조하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일 이데올리기>에서 윤리학을 비웃었다. 그는 윤리학이 “비과학적”이며 혁명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공산주의가 도래하면 인간의 행동이 유사 형이상학적으로 변화하게 되고, 그 결과로 윤리학은 불필요해질 것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는 자신에게는 도덕적 법률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윤리학이 세운 목표와 일치한다고 간주하는 경향이 잇었다. 확실히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이익과 자신의 목적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아나키스트 미하엘 바쿠닌은 마르크스가 “프롤레타리아의 대의에 정말로 헌신했지만, 그 안에는 늘 개인적 허영심이 혼재돼 있었다”고 기록했다. 마르크스는 늘 자신밖에 몰랐다. 그가 젊은 시절에 보낸 편지가 많이 남아 있는데, 겉보기에는 아버지에게 쓴 것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에게 쓴 편지였다. 타인의 감정이나 관점은 그에게는 별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는 그가 관여한 집단은 무엇이든 혼자서 이끌어야만 했다. 마르크스가 <신라인 신문>을 편집할 때, 엥겔스는 “편집인은 마르크스가 지배하는 단순한 독재 조직”이라고 말했다. 마르크스에게는 민주주의를 할 시간도 관심도 없었다. 그는 민주주의라는 단어에 유별나게 뒤틀린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선거라면 어떤 종류든 질색을 했다. 그는 영국의 총선거를 술 취해서 벌이는 난교에 불과하다고 폄훼하는 기사를 썼다.
마르크스의 정치적 목표와 행동에 대한 자료를 다양한 문헌을 통해 모아 보면, “독재자”라는 단어가 대단히 자주 등장한다. 안넨코프는 마르크스를 “민주적 독재자의 화신”(1846)이라고 칭했다. 런던에서 마르크스에 대해 보고한 대단히 영리한 프러시아 경찰요원은 이렇게 기록했다. “그의 성격의 지배적 특성은 한없는 야망과 권력욕입니다….그는 자기가 거느린 일파의 절대적인 지배자입니다…..그는 모든 것을 혼자서 처리하고, 자신의 책임하에 지시를 내리며, 어떤 반대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를 취하게 만들어서 속내를 들여다본 적이 있는 테코프(빌리히의 음흉한 입회자)는 마르크스에 대한 뛰어난 묘사를 남겼다. 마르크스는 “보기 드물게 탁월한 지성”과 “위대한 개성을 가진 남자”이며, “그의 가슴이 그의 지성만큼 뛰어나고, 그가 가진 증오만큼 사랑을 품었다면, 나는 그와 함께 불속에라도 뛰어들겠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고상하지 않다. 나는 가장 위험한 그의 개인적 야심이 그가 가진 모든 장점을 잠식했다고 확신한다…..그가 모든 노력을 기울여 획득하려는 목표는 개인적인 권력 취득이다.” 마르크스에 대한 바쿠닌의 최종 평가도 마찬가지다. “마르크스는 신을 믿지 않고 스스로를 너무나 믿으며 모든 사람이 자신을 위해 봉사하도록 만든다. 그의 가슴은 사랑이 아니라 증오로 가득하고, 인간에 대한 연민이 조금도 없다.”
마르크스의 상습적인 분노, 독재적인 습관과 신랄함은 거대 권력을 정당화하는 그의 의식과 이를 더욱 효율적으로 행사할 수 없는 무능력에 대한 강렬한 좌절을 반영하는 것이다. 젊은 시절, 그는 보헤미안으로서 게으르고 방탕하게 살았다. 중년의 초기에도 그는 분별 있고 체계적으로 일하는 것을 여전히 어려워했다. 자리에 앉아 밤을 세워 얘기를 하다가 낮 시간에는 반쯤 잠든 채로 소파에 누워 지내곤 했다. 중년 말기에는 좀 더 규칙적인 생활을 했지만, 일에 대한 자기절제적인 태도는 결코 습득하지 못했다. 한편으로 그는 자신에 대한 비판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불쾌해했다. 친구와 후원자, 특히 그에게 좋은 충고를 한 사람들과 다투려 드는 경향은 마르크스와 루소가 공유한 특징 중 하나여싿. 그에게 헌신적이었던 동료 루드비히 쿠겔만 박사가 1874년에 그가 좀 더 체계적으로 생활하기만 해도 <자본론>을 완성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말을 했을 때 마르크스는 그와 영원토록 절교를 선언하고는 끔찍한 독설을 퍼부었다.
마르크스의 이기적인 분노의 뿌리는 물질적인 데뿐 아니라 심리적인 데까지 닿아 있다. 그는 유별나게 병약했다. 운동은 거의 하지 않았고, 굉장히 자극적인 음식을 먹었으며, 과식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골초인데다 과음을 했는데, 그것도 독한 에일 맥주를 마셨으므로 그의 간에는 늘 문제가 있었다. 그는 목욕을 자주 하지 않았고, 세수도 잘 하지 않았다. 이런 생활 습관은 그가 섭취한 부적절한 음식과 더불어, 그를 25년 동안이나 괴롭힌 고질적인 종기의 원인이 댔다. 그의 타고난 신경질을 부채질한 종기는 <자본론>을 집필할 때 최악의 상태에 도달했던 듯하다. 그는 엥겔스에게 섬뜩한 편지를 썼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부르주아지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그 작자들이 내 등창에 대해 기억해야 할 이유가 있기를 소망하네.” 개수나 크기, 정도가 다양한 종기가 뺨과 콧날, 글을 쓰기 어렵게 만드는 부위인 궁둥이, 그리고 생식기에 계속해서 생겨났다. 엄청난 분노를 터뜨린 결과, 1873년에는 합병증으로 신경쇠약을 초래하기까지 했다.
그의 분노와 좌절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것, 아마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분노의 근본 원인이 되었던 것은 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그로테스크한 무능력이었다. 마르크스는 그런 무능력으로 인해 젊은 시절에 고리대금업자의 손을 전전했는데, 고리대금업에 대한 격렬한 증오심은 그의 도덕 철학을 가동시킨 진정한 정서적 원동력이었다. 이것은 그가 고리대금업이라는 주제에 왜 그렇게 많은 시간과 지면을 할애했는지, 그의 계급 이론 전체가 왜 반유대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루터의 반유대주의 연설에서 따온 고리대금업을 비난하는 장황하고 난폭한 구절을 왜 <자본론>에 포함시켰는지를 설명해 준다.
대학 시절에 시작된 마르크스의 경제적 곤궁은 평생토록 계속됐다. 곤궁은 본질적으로 그의 어린아이 같은 태도에서 기인했다. 마르크스는 조심성 없이 돈을 빌려서는 탕진을 했다. 그러다가 만기일이 돼서 심하게 할인한 후 이자를 덧붙인 청구서가 날아오면 늘 깜짝 놀라면서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자본에 근거한 어느 체제에서나 필수적인 이율의 변동을 인류에 대한 범죄이며, 그의 전체 사상 체계가 제거하려 드는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의 뿌리라고 봤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관점이었다. 정작 돈 문제를 자신의 사례로 한정지어 보면, 그는 어려움에 처할 때면 손닿는 곳 안에 있는 사람들, 우선은 가족을 착취햇다. 그와 가족 간에 오간 편지의 화제는 돈 문제가 지배적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보낸 마지막 편지는 아버지가 죽어 가던 1838년 2월에 쓰인 것으로, 마르크스가 도움을 청하거나 투덜거리기만 하지 가족에게는 무관심하다는 불만을 되풀이했다. “너는 지금 법학 과정의 넷째 달에 접어들었는데, 벌써 280탈러를 썼다. 내가 겨울 내내 번 돈도 그 정도는 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세 달 후에 사망했다. 마르크스는 장례식에 참석하는 수고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어머니에게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는 친구들에게서 빌린 돈으로 생계를 꾸리고, 가족에게서 정기적으로 목돈을 뜯어내는 생활 패턴을 이미 체득했다. 그는 “꽤나 부유한” 자신의 집안이 그가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돈을 벌기보다는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가끔씩 했던 기자 생활을 제외하면, 마르크스는 취직을 하려는 진지한 시도를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런던(1862년 9월)에서 철도 사무관 자리에 딱 한 번 지원한 적은 있었지만,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악필이라는 이유로 떨어지고 말았다. 마르크스에게 취직할 의향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돈을 보내 달라는 그의 요청에 가족들이 왜 그렇게 동적적이지 않았는지를 설명해 주는 주된 이유이다. 어머니는 아들의 빚을 갚아 주기를 거부했다. 아들이 더 많은 빚을 지게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아들과 완전히 의절했다. 이후 모자간은 거의 왕래가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카를이 자본에 대한 글을 쓰는 대신 자본을 모았으면”하는 씁쓸한 소원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