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사료는 연나라 '동쪽'에 요동과 조선이 있었다고 말하는데 이 기사 하나만으로 요동과 조선이 보정시 지역이 아닙니다. 그러면 연나라가 산서성에 위치해서 그 동쪽인 보정시를 요동, 조선이라고 주장해야 되는데 그러면 산서성에 있던 조나라가 서쪽으로 밀리고, 섬서성의 진나라 또한 서쪽으로 밀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설명할게 너무 많아집니다. 그리고 낙랑군 위치에 대한 사료는 다 요동과 관련이 있는데 지금 보정시는 요동이랑 전혀 상관없습니다. 보정시=낙랑군 주장은 중국 역사지리를 무시한 자의적 주장입니다.
2. 낙랑군 조선현은 기자조선이 있었던 곳입니다. 연나라 사람 위만은 동쪽으로 가는데 이는 발해지역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후 위만이 중원의 한나라을 벗어난 기자조선(낙랑군 조선현)을 차지하고 한나라랑 전쟁을 합니다. 그렇다면 기자조선이 보정시라면 위만이 내륙 지역으로 가서 기자조선을 차지했다는 주장이므로 이 또한 동서남북을 무시하는 것이고 역사지리에 무지한 것입니다.
3. 위만조선의 장수였던 성기가 죽고 왕험성이 함락되어 조선에 4군이 설치되었다고 전하는데 왕험성의 위치는 요동이고 그 부근에 낙랑군이 설치된 것입니다.(내륙 지역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사료적 근거 없음- 뒤에 설명)
4. (기자)조선의 위치에 대해서 전한 시대 문헌 《회남자》 〈시측훈〉은 "동방의 끝 갈석으로 부터 조선을 지난다."고 했고, 《한서》 〈가연지(?~서기전 43년) 열전〉은 "갈석을 지나 낙랑, 현도가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역대 황제들이 전국을 순행할 때 동북 지역의 끝은 갈석인데 경계로 삼을만한 곳은 창려 갈석 말고 없습니다. 낭아산은 갈석이 아닙니다. 진나라때 《태강지리지》는 "낙랑군 수성현은 갈석이 있고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라고 말했는데 종합하면 기자조선(낙랑군 조선현)은 연나라 동쪽, 요동, 갈석 , 연진장성 동쪽과 가까운 곳으로 중국과 조선의 경계가 되는 곳입니다. 중국 사료는 전부 하북성 동부를 말합니다. 평지 지역인 보정시랑 전혀 상관없습니다.
5. 전국시대 말 연나라의 북쪽과 동쪽에 있던 군은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이었고, 연장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진나라, 전한 때 연나라 북쪽에 있던 군현과 장성이 그대로 이어지게 되는데 장성 이남은 낙랑군이 설치될 때도 중국의 땅이었습니다. 이곳을 벗어난 지역에 기자조선이 있었고, 위만조선이 있었고, 낙랑군이 있었습니다. 낙랑군이 내륙인 보정시에 있다는 건 중국 역사지리를 무시한 자의적 주장입니다.
6. 《한서》 〈지리지 연지(燕地)〉에 의하면 연나라 남쪽은 탁군으로 역수랑 관련있는 군현들이고 역수는 보정시랑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낙랑군을 탁군 지역에 겹쳐서 이중으로 설치했다는건 시공간을 무시한 주장입니다. 《한서》 〈지리지〉는 탁군과 낙랑군을 따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낙랑군이 보정시에 있으려면 탁군과 역수가 이동해야됩니다. 역수는 역사적으로 대단히 유명한 곳이므로 이동하는 것 자체가 중국사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7. 보정시가 낙랑군 수성현이 있던 곳이라고 주장하는 사료는 다 후대 사료로 낙랑군 수성현을 한나라 때 무수(武遂)현으로 보고있는데, 무수현은 황하 사이를 말하는 하간국에 있던 현입니다. 《한서》 〈지리지〉는 하간국(河間國)과 낙랑군을 따로 서술하고있습니다. 따라서 하간국은 낙랑군이 아니므로 하간국=낙랑군이라는 것을 증명하셔야됩니다. 하간국은 낙랑군과 전혀 상관없이 중국 역사에 많이 나옵니다. 또한 무수현은 전국시대 조나라 명장이었던 이목이 연나라 남쪽을 쳤던 곳으로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하간국의 속한 현이고 조나라 땅으로 나옵니다. 내륙에 있던 조나라 지역이 기자조선이었고 이곳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고 말하는건 중국 역사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8. 후대 사료가 말하는 수성현은 《수서》 〈지리지 상곡군 수성현〉으로 수나라 때 새로 설치한 현입니다.(주석에 나옴) 이곳은 당나라 때는 역주 상곡군인데 한나라 때 중산국이 있던 곳으로 말합니다.(구당서, 신당서) 수나라 때 상곡군과 당나라 때 역주는 역수랑 관련있는 곳입니다. 사기 주석은 조나라 장수 이목이 연나라 남쪽을 쳤던 무수현을 역주 수성현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때 수성현은 역수와 관련있는 행정구역입니다. 역수와 관련있는 수성현은 낙랑군 수성현과는 이름만 같고 다른 현입니다. 또한 현재 역수 주변 지명은 정사에 그대로 나타나는 곳이 현재도 많은데 이는 역수 주변이 낙랑군과 전혀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론 낙랑군은 고대 요동인 하북성 동부 지역과 관련있지 보정시라는 주장은 역사 지리를 무시한 것이다.
첫댓글 수성진은 하북성 보정시 서수구를 관리하는 진(镇)이다. 遂城镇,河北省保定市徐水区辖镇
수성진은 춘추전국시기에 처음 세워졌고, 옛날에 무수, 수주라고 칭했다.遂城镇始建于春秋战国时期,古称武遂,遂州。
명나라 전에 서수구의 군사 방어 요충지와 정치중심이 되었다.明代前,为徐水区的兵防要地和政治中心。
수나라 개황 8년(596) 수성현이 되었고 현 부서의 소재지이다. 隋开皇十八年(596年),为遂城县县府所在地。
북송시대에 송나라, 요나라 경계 성이 되었다. 北宋时,为宋、辽界城。
금 천회 7년(1129) 수성에 주를 세워 다스렸는데 수주라고 하였다. 金天会七年(1129年),在遂城立州治名遂州。
명나라 홍무 초기에 주에서 낮추어 현이되었고 명 홍무 8년 수성현은 안숙현에 합병되었다. 明洪武初,降州为县;明洪武八年(1375年),遂城县并入安肃县。
청나라 초기 수성향은 서로에 속했고 명말에 수성사로 올라갔다. 清初,遂城乡属西路,清末登遂城社。
바이두가 말하는 보정시 수성진 설명
결론 : 보정시에 수성이란 지명은 낙랑군과 상관없다.
북경지역에 전국시대 연나라가 있었다는 내용은 틀린 내용입니다
이런 잘못된 주장을 믿으니 우리고대사를 제대로 복원할 수 없는 것이지요
북경지역의 연나라는 서기 900년 경 당나라 말의 오대십국 시대의 연나라이지 전국시대 연나라가 아닙니다
한서지리지에 고대 역수 등 탁군의 하천이 하수(황하)로 들어가니
1) 탁군의 위치는 보정시 지역이 아니라 형태시 지역이고,
2) 보정시 지역의 역하는 고대 역수가 될 수 없습니다
전국시대 연나라 위치는
발갈지간인. 발해군(덕주시)과 갈석산(석가장시) 사이이니
하북성 중부 거록현 지역에 전국시대 연나라가 있었습니다
(기자의 후손 조선후의 위치는 예맥조선으로 하북성 중동부 창주시에 있었습니다)
지금의 발해만을 고대 중국인들은 창해라고 했으며, 발해는 발해군을 나타냅니다
석가장시의 중선국 유적은 조선열전의 기록된 진번조선 유적이고요
석가장시의 중산국이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1천리를 빼앗기어 쪼글라 들었고,
그 후에 조무령왕에게 멸망당한 중산국은 석가장시가 아니라
조나라(한단시)와 연나라(거록현) 사이인 형태시 지역입니다
조세가를 보면 조무령왕 초기에
중산국이 조나라(한단시) 동쪽에도 있고요
(조나라 한단시 동쪽의 황하와 박락진을 제나라와 중산국 등 세 나라가 함께 쓰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북경지역에 연나라가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한서 지리지 연지를 보면 연나라의 사방강역이 나오는데요. 연장성의 위치(연나라 동쪽과 북쪽)만 보면 그 연장성 동쪽에 기자조선이 있었어요. 그 위치가 보정시지역이 아니라는게 핵심입니다. 보정시는 역수가 있던 연나라 남쪽이에요.
보정시 지역이 기자조선 위만조선이 있을 수 없다는데 동의합니다
갈석산 동쪽에는 연나라 도성 계가 있고, (연나라 동성 계는발갈지간이니 발해군과 갈석산 사이의 도회지)
연나라 동성 계 동쪽(정확히는 동북쪽) 요동군이 있고,
요동군 동쪽에는 위만조선(낙랑군)이 있고
낙랑군 남쪽에는 마한았고, 위만조선(낙랑군) 동쪽에는 예맥조선(기자의 후손 조선후)이 있습니다
따라서 갈석선에서 --> 동쪽에 연나라 도성 계 --> 동쪽(동북쪽)에 요동군
(1) --> 동쪽에 위만조선(낙랑군) --> 동쪽에 예맥조선(기자의 후손 조선후)
(2) --> 동쪽에 위만조선(낙랑군) --> 남쪽에 마한
입니다
따라서
■ 지금의 진황도시 창려현의 갈석산은 고대 갈석산이 될 수 없습니다
(진황도시 창려현 갈석산이 고대 갈석산이라면 전국시대 연나라는 진황도시가 될 것이고요
발해군은 진황도시 동쪽인 호로도시가 될 것인데 가당치 않은 주장이 됩니다)
■ 지금의 진황도시에는 위만조선(낙랑군)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황도시 지역에 위만조선 낙랑군이 있었다면 낙랑군 남쪽의 마한이 발해만 바다가 될 것입니다)
장성이 일어난 곳에 있는 갈석은 창려 갈석 말고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그리고 유의미한 갈석은 경계로 삼는 갈석인데 이 갈석이 창려 갈석이고요. 갈석의 위치만 가지고 안하더라도 이미 요동이란 위치가 지금 하북성 동부로 고정이 되기때문에 내륙에 요동이나 낙랑군이 있다는 설은 다 사료를 오독하거나 가능성으로 위치 특정한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습니다.
태강지리지를 인용한 당나라 학자의 주장에서
갈석산에서 시작된 장성은 진시황의 만리장성이 아닙니다
진秦나라 장성(서진 이전의 옛날 장성)을 수리한 당빈의 서진장성입니다
1) 당빈의 서진장성은 하남성 온현에서 갈석산까지 삼천여리이니
진시황의 만리 장성이 될 수 없습니다
2) 晉書 卷42 列傳 第十二 唐彬(AD 235-294)』 : 復秦長城塞, 自溫城洎于碣石, 綿亙山谷且三千里.
[해석] 당빈이 옛날 장성(진장성은 진시황의 만리장성이 아니라 옛날장성 임)을 수리 복구했는데,
온성(하남성 온현)에서 한나라 요서군 갈석산(석가장시 찬황현 장석암)까지 이르렀다
긍산 골짜기(하북성 형태시와 산서성 장치시 사이의 골짜기)를 이어 거의 삼천리였다.
장성이란건 외부에 적을 막기위해 막대한 노동력을 들여 쌓는건데요. 진서에 온현에서 지금 갈석까지 쌓는건 봉화로 외부의 적이 침범한 것을 알리기 위해 쌓은것입니다. 석가장에 장성을 쌓을 필요도 없고요. 그리고 내륙 갈석에 대한 기사는 당나라 학자들이 고증했는데 찾을수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리고 진서 지리지 낙랑군 수성현 조만 보더라도 진장성이 일어난 곳이라고 했습니다. 태강지리지와 일맥상통하는 기사입니다. 따라서 지금 조선현이 있던 그 부근에 낙랑군 수성현이 있을것이고 그곳은 창려 갈석말고 설명이 되지않습니다.
석가장시 지역에 한나라 요서군이 있었습니다
서진시대에 산서성은 고조선의 후예인 오환과 선비가 있었고요 고구려 영토였습니다
(고구려 모본왕이 상곡-양천시, 어양-석가장시 남부, 북평-석가장시 남동부, 태원-산서성 임분시 를 공격했음)
따라서 서진은 산서성의 오환과 선비인 고구려 속민을 방어하여
하북성 중남부 지역의 서진영토를 지키려 했겠지요
(서진시대에는 호타하 북쪽의 하북성 중북부는 고구려 영토였습니다)
당나라 학자들의 주장을 무엇을 근거로 믿는지요
신 사대주의자(중국 시대주의자)라면 무조건 믿어도 됩니다
고구려 멸망후의 당나라 학자라면
한고조 유방의 서한이 망하고 700년 이후의 사람들이고요
당나라 시대에는 지금과 같은 지리 정보가 없었던 시대이니,
고대 문헌을 갖고 개인적인 견해를 주장한 것이니
그들(당나라 학자들)이 주장하는 문헌과 문헌해석이 맞는지 틀린지 반드시 확인하고 주장해야 합니다
지금 장성의 위치를 통해서 낙랑군이 어디였나 말하고 있고 저는 고구려 오환 선비에 대한 이야기 한적 없습니다. 그냥 글을 작성하고싶으면 댓글달지 마시고 글을 작성하시면 됩니다.
석가장시에 장성을 쌓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으니
산서성에 오환 선비인 고구려 속민이 있었고 서진이 이들을 방어하기위해 장성을 쌓았다고설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 장성 흔적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석가장시 지역의 태행산맥에서 남쪽으로 산서성 석양현, 화순현, 좌권현 동쪽으로 고대 장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하북성 내륙에 경계로 삼을만한 산이 있다고 보시나요 ? 그러면 역사 지리를 보고 역사를 안하시는겁니다.
무슨 말이지? 어떤것을 이야기하는지 자세히 설명해야 제가 답변 드릴 수 있습니다
하북성의 지형에 대해서 말씀드린겁니다. 하북성은 서쪽에 태행산맥이 있고 북쪽에 연산산맥이 있어서 평지 지형입니다. 만리장성 또한 진장성 조장성 연장성이 연결된 장성으로 지금의 창려 갈석과 연결되는 점이라는것입니다. 진서의 당빈열전과 낙랑군 수성현 조, 태강지리지가 말해주는 거죠. 그리고 수경주에 의하면 또한 만리장성과 연결되는 부분이고요. 핵심은 갈석의 위치가 아니라 요동의 위치가 어디인가 하는 점이고 이곳이 위만조선, 기자조선, 낙랑군과 이어진다는 거죠.
글쎄요
진시황의 만리 장성이 모두 산성일 수는 없고요 모두 산성이지도 않습니다
섬서성(섬서성과 오도로스 사이 구간)의 만리장성 구간도 산맥의 산성이 아닙니다
따라서 연산산맥의 산성이 진시황의 만리 장성일 수 밖에 없다라는 주장도
반드시 진실이 될 수 없습니다
(연산산맥의 장성은 명나라 장성일 뿐입니다)
하북성의 보정시 연남장성(중산국이 쌓은 장성)도 평지 장성이지 산맥장성이 아닙니다
따라서 저는 하북성 호타하를 따라서 전국시대 연나라가 장성을 쌓았고
진시황의 하북성 만리장성 구간은 호타하 강을 따라 쌓은 연장성으로 저는 봅니다
(호타하 남쪽에 전국시대 연나라의 요서군, 요동군, 우북평군, 어양군이 위치했다고 고찰되기에..)
장성을 쌓을때는 그 목적을 살펴봐야된다는 거죠. 그리고 사료로 말해야 되는 부분이죠. 우선 연장성은 호 또는 동호를 막기위해 쌓은거고 진장성 또한 호를 막기위해 쌓은 겁니다. 연장성 서쪽은 상곡이고 동쪽은 양평인데 상곡은 거용관이 있던 북경 서북쪽이고 양평은 공손씨가 할거했던 평주 노룡현이라는건데 하북성 동부 지역이죠. 이 장성이라는게 결국 연나라 북부와 동부의 최대강역인데 동부를 벗어난 곳에 저는 기자조선과 낙랑군이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동의 안하신다면 저는 더이상 할말이없습니다. 그리고 저도 연남장성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고 사기 장의열전에도 나오고 있고 중국에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근데 연남장성은 그 목적이 조나라를 막기위해 쌓았다는 거죠. 그리고 위치 비정할때는 명확하게 그 지명에 대한 연원과 사료를 일치시켜야된다는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네요. 소진열전은 분명히 연나라 남쪽에 호타하가 있다고 했는데 이는 호를 막는 장성이 아님을 알았으면 합니다. 따라서 만리장성과 연결되기 힘듭니다
연장성 서쪽의 상곡이 거용관이다
그쎄요
흉노열전에 연장성 서쪽은 조양(造陽)이고, 동쪽은 양평(襄平)입니다
한서지리지에 양평은 요동군 치소이고요, 조양은 상곡군의 조양(沮陽)으로 보입니다
☞ 史記列傳(사기열전)] 권110.匈奴列傳(흉노열전)
연나라 역시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에 이르는 지역에 장성을 쌓았다.
[원문] 燕亦筑長城, 自造陽至襄平.
한서지리지에 상곡군이 태행산맥의 서쪽에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상곡군의 서쪽에 조양(造陽)이 있으니 (태행산맥 서쪽에 조양이 있어야 함)
태행산맥 동쪽에 있는 지금의 거용관(북경)은 연장성 서쪽 시작점인 조양이 될 수 없습니다
지금의 호타하는 소진열전에 나오는 호타하가 아닙니다
지명의 명칭이 같아서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면
고구려 수도 장안성이 수나라/당나라 수도 장안성이라고 주장도 동이하시는 건가요?
☞한서지리지下 - 연(燕)나라
東有漁陽右北平遼西遼東(동유어양우북평료서료동)
동쪽에는 어양(漁陽)과 우북평(右北平)과 요서(遼西)와 요동(遼東)이 있고,
西有上谷代郡雁門(서유상곡대군응문)
서쪽에는 상곡(上谷)과 대군(代郡)과 안문(雁門)이 있다.
진시황의 만리장성, 그리고 진시황 이전의 진소왕의 진장성은
호지만 오도로스 지역의 임호를 방어하기 위한 장성입니다
☞ 史記列傳(사기열전)] 권110.匈奴列傳(흉노열전)
1) 秦昭王時, 於是秦有隴西、北地、上郡(어시진유롱서북지상군),筑長城以拒胡(축장성이거호)
진(秦)나라 소왕(昭王) 때,
그래서 진나라는 농서(隴西), 북지(北地), 상군(上郡)을 차지하고 거기에 장성을 쌓아 호(임호)의 침입을 막았다.
2) 而始皇帝使蒙恬將十萬之眾北擊胡(이시황제사몽염장십만지중북격호),悉收河南地(실수하남지).
시황제(始皇帝)는 몽염(蒙恬)에게 10만 명의 군사를 주어 북쪽의 호(임호)를 공격하여
황하 이남의 땅(오도로스)을 모두 진나라의 영토로 수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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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추시대에 [ 진 목공 秦穆公 -BC 621년, 진 문공 晉文公 ~ BC 6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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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섬서성 진나라 북쪽 오도로스에는 임호가 있었고, 태원시 서쪽 누번현에는 누번이 있었습니다
2) 하남성 연진현 북쪽인 산서성에는 산융이 있었고, 하북성에는 동호가 있었습니다
■ ☞ 『史記列傳(사기열전)] 권110.匈奴列傳(흉노열전) 』
而晉北有林胡(이진북유림호)、樓煩之戎(누번지융),
燕北有東胡(연북유동호)、山戎(산융)。
그리고 진(晉)나라 북쪽에는 임호(林胡), 누번(樓煩) 등의 융족이 있었고,
연나라 북쪽에는 동호(東胡), 산융(山戎)이 있었다.
■ ☞ 『 춘추좌전(春秋左傳) 노나라 은공(隱公) 』
(魯)隱公 五年 鄭人侵衛牧 以報東門之役 衛人以燕師伐鄭 【注】南燕國,今東郡燕縣.
노 은공 5년(BC 718) 정(鄭)나라가 위(衛)의 교외를 침공하여 동문의 전쟁을 보복하니
위(衛) 나라가 연(燕)의 군대를 거느리고 정(鄭)을 토벌하였다.
[주注] 연(燕)은 남연국(南燕國)인데, 지금(후한)의 동군(東郡)의 연현(燕縣)이다
( 하남성 연진현의 춘추시대 연나라를 남연,
하북성 거록현 지역의 전국시대 연나라를 북연)
네 동의 못하니까 알아서 생각하기기 바랍니다.
1) 간단하게 전국시대 말 연나라 동쪽, 기자조선의 위치, 위만조선의 위치, 낙랑군의 위치(조선현과 수성현)에 대해 말씀을 하면 되는 부분이네요. 한정된 사료를 보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차이인데 사료에 수구리님 해석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2) 연장성의 핵심은 연장성 동쪽 요동군 양평현이 핵심입니다. 결국 조선의 위치가 연장성 동쪽 부근이기 때문에 그 위치가 어디인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제 주장은 석가장이나 보정시 등등 내륙은 아니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저는 전국시대 말 연나라에 대해 말하고 있는겁니다. 그게 진나라, 한나라로 이어져서 조선의 위치가 밝혀지는 부분이니까요.
(연장성 서쪽 거용관을 말씀드린 이유는 한서 지리지 상곡군 조에 상곡군의 거용현에 관(關)이 있다는 주석 때문에 지금의 거용관을 기준으로 상곡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 부근에 조양이 있겠죠. 조양의 위치는 정확하게 밝힐 수 없습니다.)
3) 제가 주장하는 진장성은 명장성이 아닙니다. 대명일통지라는 명나라 시대 사료 보면 장성을 쌓는데 진장성을 보축해서 쌓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장성 동쪽인 갈석 부근에서 산해관까지 연장한게 명장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