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썰렁한 이곳이 맘에 걸렸는데 휴가기간에조차도 아무것도 안 올리면
안될 것같아 제 고백 몇 편을 올려볼까합니다.
돼지저금통 (1)
얼추 3년이 다 돼가는 이야기이다.
햇볓 내려쬐는 토요일 오후 나는 잠시 짬을 내어 쾰른 시내 Neumarkt 에서 대성당(Dom)으로 난 길
Hohestrasse를 거닐고 있었다. 유명 상점들이 잡화점과 먹거리 상가들과 함께 버무려져 있는
복잡한 길이었다. 그 길의 끝자락쯤, 바로 모퉁이만 돌면 유명한 Koelner Dom이 나오고 그러면
나는 잠시의 휴식을 뒤로 하고 지하철 입구로 빨려들어가 다시 동굴같은 유학생의 반나절을
시작할 것이었다.
커다랗게 자리잡은 잡화점을 훓어보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가 곧 반가움과 함께 추억이 성냥불처럼
호르르 하고 이는 것을 느꼈다. 내가 본 것은 돼지저금통이었다.
실은 돼지저금통에 얽힌 애틋한 추억같은건 전혀 없다. 다만 아주 오래 전부터 언젠가는 나도
돼지저금통을 하나 길러봐야지 하고 맘속으로만 벼르고 별러왔을 뿐이다. 그 소망은 뒤늦게
유학을 와서야 마음 바깥으로 기어나와서, 가끔 서울의 가족들과 통화할 때면 문방구에서 파는
빨간색 돼지저금통을 사오라고 주문을 하기도 했었다. 왠 시덥지않은 장난이냐는 식으로 식구들이
받아들여서 한번도 받아보지 못했을 따름이었다.
내가 가장 원한 것은 초등학교 문방구에 먼지 뽀얗게 쌓인채로 묶여있는 빨간색 돼지저금통이었다.
붓으로 그린 듯한 먹빛 눈과 함께 뒤에는 “복”자가 한문으로 씌여있다. 그러나 이런 게 독일땅에 있을 리
없다.
나는 정말 저금통이 갖고싶었지만 그렇다고 Karstadt 같은 데서 파는, 밑에 고무뚜껑이 붙어있는 것
따위나 오리저금통, 원통형 저금통같이 생긴 것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날 운명적으로 만난 돼지저금통은 흙으로 빚어 만든 7마르크짜리 싸구려로서,
옆구리에는 진짜 망치가 달려있고, 한번 와장창 깨진 것을 얼기설기 스카치테잎으로 붙여놓은
모양의 그림과 함께 쪽지모양의 무늬에 “Bitte nicht noch einmal!” 이라고 씌여있었다.
물론 밑에 고무뚜껑 따위는 없었다. 완벽했다.
고이 모시고 와 아내에게 보여주니 역시 좋아한다. 우리는 가난했지만 열심히 먹여댔다.
그것도 1마르크 이상짜리만 주기로 원칙을 정했다. 막상 깨뜨렸을때 묵직했던 느낌의
원인이 5Pfenig, 10Pfenig짜리들 뿐이라면 얼마나 허무할까 생각하면 당연한 처사였다.
오며가며 지나칠 때마다 들어올려봐서 무게를 가늠해 보는 것이 일과가 되어버렸다.
조금씩 무게가 늘어가는 것이 여간 재미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을 깨뜨리는 날이 올때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과연 그 속에는 얼마나 들어있을까?
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 “이걸로 뭘 할까요?” 아내가 물을때면 나는 행여 아내의 입에서
엉뚱한 소리가 나올까봐서, 우리가 이것을 가지고 어떻게 멋지게 써야 할 것인가를 장황하게
설명하곤 했다. 우선은 멋진 레스토랑에 한번 가야 할 것이었다. 언제 남이 사주는 것 외에 우리가
제발로 레스토랑에 간 적이 있었던가. 신발이나 옷같은, 필요했지만 사지 못했던 것들을
그때는 꼭 장만하리라. “CD나 이번기회에 원없이 사야겠다…”
내 머릿속에 휙 하고 스쳐지나가는 생각들, 가령 선교헌금을 할까, 어려운 아무개에게
좀 부쳐줄까 하는 것들은 고개를 흔들며 털어버렸다. 당시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으로는
부족해서 손으로 피아노를 쳐야 하는 아내가 건물 계단청소를 하고 있었다.
이 돈은 “그런데” 써서는 안될 돈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식당에 가지 못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켐닛츠에 직장을 얻게 되었고
그래서 갑자기 이사비용으로 목돈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어쨌든 돼지저금통을 깨는 날 우리는
마치 어린 아이들마냥 흥분했다. 마치 예식을 치르듯 양탄자 바닥 위에 정성껏 신문지를 넓게 깔고
둘이 번갈아 가며 망치로 깨뜨렸는데 구멍뚫린 돼지의 몸통에서 900마르크가 조금 안되는 돈이
나왔다.
그 돈은 한푼도 남김없이 이사와 renovieren값으로 들어가고 저금통은 사라졌다. 이것 참 재밌는데,
켐닛츠가면 또 하나 사서 키워보자. 다음번엔 진짜로 멋지게 한번 써보자. 식당도 한번이 아니라
여러번…(먹는데 되게 집착하네-.-;) 둘이 이렇게 결정은 했으나 그 이후 시들해져서 저금통을 구하려는
시도는 흐지부지… 이렇게 해서 켐닛츠 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두어 달 전 혜지 장난감을 사려고 Mueller에 들렀다가 갑자기 돼지 저금통이 생각나서 찾아보니
1.5 Euro짜리 플라스틱제가 있다. 빨간 것도 아니요 먹빛 붓자국의 눈이나 한문 “복”자도 없었지만
욕심을 부릴 처지가 아닌지라 구멍없이 나중에는 칼로 찢을 수 밖엔 없는 놈임을 확인하고 사버렸다.
그때 쾰른에서 팔던 것을 살 수 있다면 좋았으련만…
후기:
쾰른에서 키웠던 그 돼지는 얼마 전 Hbh 지하의 Nanu Nana 에서 똑같은 걸 팔고있는 것을 알았다.
혹시 저처럼 흙으로 구워만들고 망치가 달려있어서 깨뜨려서 돈을 꺼내게 돼 있는 돼지저금통을
갖고싶은 분은 한번 들러보시기 바란다.
(시덥잖은 글이 엄청 길어져서 읽으시는 분들께 죄송하네요. 본론은 2편에…(-.-)(_._)(-.-);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