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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하나로 뭉칠 그날까지
증 언 자 :박석연(남)
생년월일 :1936. 10. 3(당시 나이 44세)
직 업 :전업사 경영(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9. 4
개요
5일 21일 낮 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무차별 총격 때 오른쪽 무릎 부위에 관통상을 당했다. 네 차례의 수술을 받았으나 오른쪽 다리는 불구가 되어 현재까지 고통을 받으며 살고있다.부상자회를 창설, 현재는 5·18 광주의거부상자회(박옥재회장)에서 지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는 전남 영암에서 2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는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가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대대로 물려받은 농사를 짓고 마을 이장을 하셨다. 당시 시골 살림은 대부분 쪼들리게 살았으나 우리집은 그런대로 넉넉하게 살았다. 그러나 6 · 25 무렵 아버지가 몸이 아파 돌아가시자 우리 집의 형편도 어렵게 되었다. 나는 영암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가서 전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학교에서 배운 기술을 바탕으로 열심히 생활하여 동생을 대학까지 졸업시켰다. 서울에서 4·19와 5·16을 겪었지만 살아가는 데만 열중한 나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1963년에 광주로 내려와 배운 기술을 바탕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1965년에 결혼을 하고 슬하에 2남2녀를 두었다. 사업도 점점 잘되어 1980년 '그 일'을 당하기 전만 해도 광주에서 '전기'에 관한 일이라면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기반을 닦았다. 생활도 넉넉해져 자가용까지 굴리며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았다. 1980년 5월에는 화정동에 '국제전업' 회사를 운영하며 동구청 뒤쪽의 공사를 맡아 하고 있었다. 시내에 일이 있던 나는 당시 시내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 쉽게 알 수 있었다. 5월 16일 대학생들과 시민, 여러 교수들까지 도청 분수대에서 시국에 관한 집회를 열고 횃불시위를 했다. 나는 구경을 했는데, 시위대에서 자주 외친 구호는 '전두환이 물러나라'였다. 전두환이가 누구인데 물러나라고 하는 것인지 몰라 주위 사람들에게 물었다. "젊은 군인인데 대권을 잡으려고 한다"고 했다. 시국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날의 상황을 지켜본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5월 18일 김대중 씨의 구속사건을 듣고 '힘없는 호남 사람이라 또 가둬 버렸구나' 하고 생각했다. 공사장에 나와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그런데 예전에 보지 못했던 얼룩무의옷을 입은 군인들이 시내 여기저기에서 보였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그들의 행동을 목격한 나는 동요가 일어났다. 도로를 지키고 섰던 공수부대는 길가는 젊은 사람이면 무조건 잡아 세워놓고 발로 찼다. 맞는 젊은이들은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또다시 곤봉으로 내려치고 젊은이들을 짐짝처럼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나는 '광주시내 깡패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 주먹은 뒀다 어디다 쓰는지 나에게 소리 안 나는 총이라도 있다면 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날(5월 19일) 여전히 공사장에 나갔다. 시내의 상황이 계속 심각해져 공사를 하던 직원들도 제대로 일을 못했다. 대충 일을 마무리짓고 직원들과 함께 회사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오후 4시경 누문동파출소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파출소 앞에는 사람들이 맡이 모여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교복을 입은 여고생 두 명이 앞가슴이 다 보일 정도로 옷이 흐트러진 채 무릎을 끓고 있었다. 그 여학생들은 공수부대에게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다. '왜 저러고 있을까' 궁금하여 옆사람에게 물어보니 "중앙여고생인 저 여학생들이 나무를 꺾고 있는 공수부대원에게 '자연보호를 하자'고 하니까 그들이 마구 때리며 파출소 앞까지 질질 끌고 왔다"고 했다.아무 잘못도 없는 내 자식 같은 아이들을 저렇게 다루다니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이 광경을 지켜본 시민들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지 항의를 했다.
그랬더니 공수부대들이 시민들에게 덤벼들었다. 시민들은 도망하기 시작했다. 우리들도 얼른 도망을 쳤다. 뒤돌아보니 그들은 각각 한사람씩 정해 놓고 잡으러 가는지 한 목표물만을 쫓고 있었다. 나는 양동시장을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 여고생들의 모습이 아직도 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그때는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공수부대의 만행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팬 것하며 집집마다 가택수색을 해 젊은 사람들을잡아간다는 등 보통 난리가 아니었다. 5월 21일 내가 살고 있던 집이 화정동 서부시장 입구였는데, 그곳은 시위대와 계엄군들의 경계지역으로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나는 화정동 공단 입구에서 "시민들은 도청으로, 도청으로" 하며 외치고 다니는 시위대 트럭을 타고 시내로 나왔다. 이날이 부처님 오신 날이라 원불교를 믿는 아내와 어머니는 시내에 있는 '원불교' 교당을 간다며 나보고 시간이 있으면 그곳으로 오라고 했다. 밥만 먹으면 시내에 가는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던 때라 나도 얼른 시내를 둘러보고 그곳으로 가려고 집을 나선 것이다. 오후 1시경 도청 앞에 굉장히 맡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이 시민들 대표가 공수부대와 뭔가 협상을 하고 있다고 했다.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알고 싶어 전일빌딩 앞에 서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총성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공포탄이라 생각한 시위대는 처음에는 흩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들려오는 것은 분명 총소리였다. 내 앞에서 7, 8명이 푹푹 고꾸라졌다. 나도 얼른 피해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다리가 잘려나간 줄 알고 "사람 살려주시오"라고 외쳤다. 누군가 나를 업고 뛰었다. 한참 후 어느 차에 실려 대인동에 있는 최원섭외과로 갔다. 그곳에서는 상처가 심해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계속해저 피를 흘린 나는 정신을 잃어 버렸다. 후에 들은 얘기로는 곧바로 적십자병원으로 옮겼으나 그곳은 환자들이 너무 많아 다시 기독병원으로 옮겼다고 했다. 내가 정신을 차린 곳은 병원 지하실 식당이었다. 옷이다 벗겨진 채 식탁 위에 누워 수혈을 받고 있었다. 병원에 환자가 많아 식탁 신세를 져야 했다. 복도와 병원 바닥에서까지 치료를 받는 상황이였는데 그것만이라도 다행이었다. 나는 다친 후 48시간 만에 깨어난 것이다. 정신이 들자 가족들이 보고 싶었고 옷이 모두 벗겨져 있어 부끄러웠다. 다른 환자들도 처음에는 모두 옷이 벗겨져 있었다. 상처부위를 찾으려고 옷을 다 벗겨버린다고 했다. 나를 병원으로 데려다준 사람은 전남대학생이라고 했다. 그가 나의 신분증을 보고 집에 연락을 해줘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학생은 날마다 찾아와 병간호를 해주었다.
그러나 어느 날인가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하고 갔는데, 지금까지도 내가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이 학생을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당시에 어찌나 잘해줬던지 나는 그 학생을 사위 삼으려 고까지 생각했는데 어디를 가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 학생은 죽은 것 같다. 살아 있다면 이날 이때까지 한 번쯤 만났을 텐데‥‥ 병원 안에서는 의사들이 환자가 많아 우왕좌왕하고, 병원에 실려온 환자들은 대부분 중상이라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저녁이면 무서워 불을 켜지 못하고 촛불만을 사용했다. 5월 26일부터 계엄군이 광주시내로 들어온다는 말이 병원까지 들려왔다. 계엄군이 쳐들어와 병원까지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날 저녁 겁이 난 환자들은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커튼을 치고 27일 새벽을 맞았다. 거의 뜬눈으로 지샜는데 도청 쪽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했다. 밖에서는 계엄군이 도청을 습격했다는 방송 소리가 들여왔다. 다행히 병원은 무사히 그날을 넘겼다. 계엄군의 도청 장악 후 병원으로 합동수사본부에서 조사를 나왔다. 그들은 환자들에게 시위가담 여부와 부상경위 등을 물어보았다. 환자들은 설령 자기가 시위를 하다 다쳤을지라도 사실대로 말을 했다가는 끌려가기 때문에 거의 우연히 다쳤다고 했다. 시위를 하다 부상당했다고 하면 그들은 여지없이 환자들을 어딘가로 데려갔다. 후에 알고 보니 국군통합병원으로 옮겨져 수사를 받았다고 했다.
또한 각국의 외신기자들이 병원 안의 상황을 촬영하고 환자들을 인터뷰했다. 함석헌씨 등 많은 인사들이 병원을 방문해 위로도 해주었다. 나는 병원에서 네 차례의 수술을 받았으나 오른쪽 무릎부위가 거의 박살이 나 12센티미터나 잘라내었다. 현재까지 오른쪽에는 굽이 높은 특수신발을 신고, 걸을 때는 항상 쇠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뜻하지 않게 불구자가 되니 사는 게 너무나 고통스럽고 불편했다. 화장실을 가더라도 좌변기가 아니면 거의 서서 일을 봐야 하는 등 말도 못 하게 고통스럽다. 기독병원 안에는 부상자들이 216명 있었으나 치료과정에서 스무 명 정도가 죽어나갔다. 부상자들이 아직도 많은 치료를 요하는데도 기관원들이 병원측에 자꾸 퇴원을 종용해 우리는 같은 날 모두 퇴원을 당하고 말았다. 부상을 당한 것도 억울한데 병원에서 강제퇴원까지 당하다니 너무나 억울하고 분했다. 그래서 나는 국방부장관을 상대로 1억 3천7백만 원을 손해배상액으로 청구했다. 그랬더니 보안대, 상무대 등에서 날마다 협박을 하면서 고소를 취하하라고 했다. 시국이 안정되면 민사소송으로 할 수 있다고 종용했다. 공개재판이 열렸으나 기각당하고 말았다.
당시 나의 변호사는 박찬일씨였는데 그 사람도 압력을 받았는지 포기를 하고 말았다. 없는 살림에 70만원의 돈을 만들어가고 말았다.병원에 있으면서 생활이 점차 곤란해지자 내가 운영하던 '국제전업'도 팔아버렸다. 기반도 없이 몸도 불편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하다 재판을 했는데, 그것도 실패로 돌아가니 살아가기가 더욱더 막막했다. 나만이 이런 고통을 당한 것이 아니라 5·18때 다친 부상자들 모두가 이럴 것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상자들만이라도 모이면 큰 힘이 될 것 같았다. 1982년 7월 광주 무진교회에서 정재희, 이광영, 이지현, 김태헌 씨 등 30여 명이 모여 5 ·18부상자회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부상자회가 만들어진 후 기관원들이 자꾸 못살게 하였으나 초대 회장으로 뽑힌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활동했다. 내가 부상자회 회장으로 있을 때 회원이 2백여 명 정도 되었으나, 회원들의 생활은 너무나 처참했다. 한두 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비슷했다. 우선 급한 일이 회원들에게 의료보험증을 만들어주고 생활이 어려운 사람은 영세민카드를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서울에 사는 장모 부상자는 척추부상을 당한 사람인데,그 딸로부터 부상자회로 편지가 왔다. 편지의 내용은, 장씨는 계속 살이 썩어 들어가고 그의 부인은 파출부로 일하니 도저히 생활을 해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전라남도 보험과로 가서 의학계장에게 하소연했다.
그래서 연탄 오백장값과 쌀 한가마값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갔다. 비록 다리가 불편하지만 산꼭대기 달동네까지 찾아가 보았다. 편지를 보고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비참하게 살고 있었다. 나는 물건을 전해 주고 관할 동사무소 등을 찾아다니며 부탁을 했다. 이렇듯 우리 부상자들은 어렵게 살아가고 있으나 정부측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정부에서는 부상자수도 3백명정도라고 발표했다. 우리 회원들은 이에 격분해 광주를 방문하는 국회의장이나 야당 당수들에게 항의했다.광주시내 종합병원 기록카드만 보아도 4개 병원 2백여 명씩 8백여명과 국군통합병원은 한 병실에 70명 정도 되니 최소1천여 명은 된다고 했다. 그러면 그들은 관련자료에는 그렇게 나와 있지 않다며 발행을 했다. 아직도 전국적으로 5·18에 대해 잘 모르고 우리 부상자들의 아픔을 물라주는구나 생각하며 5·18의 홍보활동이 무엇보다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민주화합추진위원회(이하 민화위)에서 증언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민화위의 참석여부를 놓고 부 상자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나는 전국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작은 기회라도 가져야 된다고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민화위에 나가 증언을 한 것은 아주 잘한 일로 여겨졌다. 주위에서도 당시에 반대를 했던 사람들까지 좋은 반응을 보였다. 민화위 이후 광주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국회 광주청문회가 열리고 '어머니의노래', '광주는 말한다'가 텔레비전에서 방영되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민화위의 증언문제를 놓고 부상자들간의 이견이 생겨 결국 1987년 8월에 두 개로 분리되고 말았다. 민화위에 대한 증언문제 이전 그동안에 쌓여왔던 여러 요소들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다. 부상자회가 처음엔 한마음으로 단결이 되었으나 점차 젊은 층과 나이든 사람들의 투쟁방향이 달라져가기 시작했다. 생활이 어려운 부상자나 아직도 부상으로 고통받고 있는 회원들을 보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국가 차원에서 보상을 안 해주니 개인적 차원이라도 기관원들에게 협력을 하라고 했다. 생명이 꺼져가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이렇게 하다 보니 처음과 끝은 같을지라도 풀어가는 과정상 서로간의 갈등이 생긴 것이다.
우리 부상자들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오래 살지 못하고 계속 죽어가고 있다. 작년에 죽은 최강식씨도 아무것도 없이 네 살 된 딸과 아내만 남겨둔 채 떠난 것이다. 집 한칸 없는 그들은 어떻게 살란 말인가. 정부는 하루바삐 광주의거 부상자들에게 4·19,6·25 아웅산 피해자 가족에 버금가는 보상을 해줘야 할 것이다. 작년에 국회 의사당 앞에까지 올라가 국회의장에게 보상을 요구해 확답을 얻었으나 그 결과는 아직도 실현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하루바삐 보상을 해줘야 할 것이다. 우리 부상자회도 언젠가는 하나로 통일돼 그 힘을 함께 해야 될 것이다. 나는 5·18 광주의거부상자회(박옥재 회장)에서 지도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YWCA에 있는 5·18 광주민중혁명부상자동지회(이지현 회장)에도 나가 부상자회가 하나로 잘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조사 · 정리 김정기)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감사합니다.
행복한 저녁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