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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연한 가을, 가족과 함께 잠깐 다녀오기 좋은 여행 코스 |
누구나 달콤한 사랑에 빠지고 싶고,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고, 어디론가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기고 싶은 계절, 가을이 찾아왔다. 뜨거운 여름 햇살을 피해 이제는 편안한 안식을 찾고픈 계절, 문화 예술과 함께 이 가을의 여운을 더욱 깊이 음미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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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지는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본 적 있는지? 길 따라 심어진 은행나무 덕분에 가을이면 온통 노란색 경관을 연출하는 이 길은 꼭 사랑하는 이와 함께가 아니어도 홀로 걸어도 좋을 곳이다. 옛 건물과 현대적인 건물이 묘한 조화를 이루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한껏 풍기는 이곳을 가을에 걸으면 좋은 또 다른 이유는 근처에 정동극장, 정동아트홀, 서울시립미술관 등 다양한 문화 시설이 있어 마음까지 풍요롭게 채울 수 있기 때문.
요즘, 노란 은행잎만큼 아름다운 색감을 자랑하는 미술 전시 하나가 덕수궁 돌담길을 더욱 눈부시게 물들이고 있다. 지난여름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샤갈전’이 바로 그것. 현란한 색채와 형상으로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마르크 샤갈의 그림은 아름다운 가을빛을 자랑하는 정동 돌담길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 도시의 하늘 위를 구름처럼 떠다니는 연인들, 지붕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 벽 틈·교회 탑·거리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염소와 수탉들, 초록색 얼굴의 바이올린 연주자 등 비현실적인 그림들이 전혀 낯설거나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신비롭고 환상적인 매력에 도취되어 하룻밤 아름다운 꿈을 꾸고 나온 듯하다. “우리네 인생에서 삶과 예술에 의미를 주는 단 하나의 색은 바로 사랑의 색이다”라고 말했던 샤갈의 메시지가 올가을 우리 가슴에도 아로새겨질 것이다. ‘샤갈전’은 10월 15일까지 계속되며, 문의는 서울시립미술관(02-2124-8800)으로 하면 된다. 한편, 올가을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전시가 충남 공주시 장군봉 계곡에서 열리고 있다. 흔히 갤러리나 화랑에 가야 미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곳은 상쾌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숲과 계곡에서 미술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그동안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았던 장군봉의 무성한 숲과 야생초를 무대로 전세계 16개국의 자연미술가들 60여 명의 작품이 전시되는 ‘2004 금강 자연미술 비엔날레’가 그것. ‘미술을 통한 자연과 환경 그리고 인간’을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이번 전시는 ‘자연과 미술의 만남’을 꾀하고 있다.
올해로 5회째를 맞는 ‘2004 광주비엔날레’ 역시 닫혀진 미술관을 탈출해 도심 속 한가운데로 들어와 보다 관객과 가까워지고자 한다. 11월 13일까지 ‘먼지 한 톨 물 한 방울’이란 주제로 열리는 이번 광주비엔날레는 단순히 작품을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 생산의 현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참여 관객 제도를 도입한다는 점에서 더욱 눈길을 끌고 있다. 여기에 광주 시내 곳곳에서 퍼포먼스, 거리극, 아카펠라, 재즈 등 다양한 축제 행사가 신명을 돋울 예정. 미술 작품도 감상하고 축제도 즐기다 보면 도심 속 가을 저녁이 더욱 낭만적이지 않을까? 문의는 광주비엔날레 인포메이션 센터(062-608-4114)로.
아마도 촬영현장에서 겪게 되는 가장 신기한 일은 직접 눈으로 바라보는 현장의 모습과 모니터에 담겨진 장면이 너무나 다른 느낌이라는 점이다. 빛을 통해서 셀룰로이드라는 매개체에 기록된 아날로그적인 화면은 뭔지 모를 따스함과 신비스러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영화 속에 기록된 가을 풍경들은 우리가 자연 속에서 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때로는 한 편의 명화처럼 우리 뇌리에 깊이 각인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임권택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그 누구보다도 탁월한 리얼리즘적 영화 언어와 한국적 미학 속에 담아 온 감독이다. 그는 <서편제>(1993)에서 ‘한국적 소리’에 대한 집착과 완성의 꿈을 통해 ‘민족적 이상의 충족과 한의 승화 그리고 여성의 희생을 통한 인간 구원’이라는 알레고리를 성공적으로 구현한다. 한때는 잘나가는 예술가로 대접받던 유봉의 삶은 일본과 서양의 음악에 밀려 판소리가 쇠락해 가는 과정과 나란히 장터나 잔칫집에서 여흥이나 돋우는 소리꾼의 신세로 전락한다. 이러한 과정을 영화는 ‘사라져 가는 것’이 지닌 아름다움 그리고 그러한 상실에 대한 애도를 뒤섞어 더없이 비감하게 기록하는데, 그중에서도 백미는 서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세 가족이 추수가 끝난 늦가을 풍경을 배경으로 각각 앞서거니 뒤서거니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가는 장면이다. 여기에서 전라도 지방의 소리와 어우러진 남도의 풍경은 우리 민족의 고난에 찬 역사와 한(恨) 자체를 공간화하는 것이자 떠돌이 소리꾼들의 고단한 삶을 잠시 동안 위무해 주는 의미를 지닌다.
‘정신대 할머니들’에 대한 3부작 다큐멘터리로 독립영화의 한 장을 연 변영주 감독은 그녀의 첫 장편 데뷔작 <밀애>(2002)에서 몽환적인 분위기와 진청색 바다를 지닌 경남의 남해를 배경으로, 한 여성의 격정 어린 욕망을 우아하게 변주해 낸다. 박광수 감독은 장선우, 정지영 등과 더불어 ‘한국 뉴웨이브 영화’를 이끌어 온 감독으로서 사회적, 역사적 모순을 누구보다 비판적이고 진지한 시선으로 포착해 왔다. 그가 자신의 고향 제주도로 돌아가, 그 섬이 겪어온 비극적 역사의 한 이면을 되살려낸 영화가 <이재수의 난>(1999)이다. 까마귀의 시점으로 보여준 제주도의 풍광으로 시작해서 효수대 위에 걸린 이재수의 머리 위로 까마귀가 날아 앉고 현재의 제주도의 모습이 펼쳐지면서 끝나는 이 영화는 ‘제주 민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충실하게 서술하기보다는 그 비극성과 음울함을 이미지화하는 데 더 집중한다. 그 결과 역사의 흐름을 되돌리지 못한 채 치열하게 싸우다 죽어간 민초들의 모습과 그들을 담담히 바라보는 제주도라는 공간은 전례 없이 강렬하면서도 모호하고, 초월적이면서도 허무감을 배태한 특별한 역사적 이미지로 남게 된다. 그리고 이 이미지는 제주도를 그저 약간은 고급스러운 휴양지 정도로 여기는 우리의 ‘관광자적’ 시선이 지닌 가벼움과 나태함과 충돌하면서 우리를 한순간 또 다른 역사적 자아의 위치로 안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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