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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구(2002). 『교과이론과 교과정책』. 성경재.
pp. 158-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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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너가 주창한] 학문중심 교육과정은, 교과의 근본 이념에 초점을 맞추어 말하면, 교과를 가르치는 근본적인 이유를, 그 교과가 학문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설명하는 이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학문중심 교육과정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원래의 브루너의 생각과는 약간 거리가 있을지도 모르며, 또한 브루너의 주된 관심은 교과의 근본 이념의 문제보다는 어느 편인가 하면 각각의 교과를 이루는 학문의 구조적 성격 자체에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학문의 구조적 성격에 대한 브루너의 관심은 분명히 (‘필요’에 의하여 가감될 수 있는 것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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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차이를 부각시키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서로 다른 교과들이 만나 이루는 교육실제 그 자체에 대한 관심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다시 말하여, 학문중심 교육과정은 필요에 의한 교육을 내세워 교과 상호간의 구분을 무시한 생활적응 교육이론에 대항하여 전통적으로 가르쳐 온 교과들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그 구분을 올바로 부각시키는 데 성과를 거두기는 하였지만, 그렇게 구분된 교과들 사이의 관계, 즉 개별 교과들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한계에서 비롯된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브루너는 개별 교과를 배운 결과로 형성된 마음의 상태, 또는 교과를 가르치는 근본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에 단지 지식의 구조를 가르칠 때 생기는 이점으로서, 이해가 용이하다든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든가, 다른 활동에 전이가 잘 된다든가 하는 것들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설사 학문중심 교육과정이 교과들을 각각의 구조적 성격에 충실한 방식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교과를 가르치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예컨대 과학을 가르치는 근본 이유는 과학 안(과학적 사고방식)에서 찾아야 하고 수학을 가르치는 근본 이유는 수학 안(수학적 사고방식)에서 찾아야 한다는 식으로 교과마다 다르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브루너의 교육과정 또한 위에서 말한 가법적 접근[교육과정의 교과들이 더하기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접근으로, 교과들이 별개의 실체로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이와 달리 교과들이 곱하기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승법적 접근은 교과들이 서로서로를 요청하면서 온전한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고 가정한다]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브루너의 교육과정 이론은 개별 교과들이 무엇에 의해서 하나로 수렴되고 있는가 하는 점을 간과한 채 개별 교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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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비하여 피터즈와 허스트의 ‘지식의 형식’은 교과 상호간의 관계를 승법적으로 파악하는 데에 좋은 단서를 제공한다. 피터즈와 허스트의 ‘지식의 형식’은 브루너가 간과한 교과의 가치를 설명하는 데에 초점이 있으며, 지식의 형식이 시사하는 교과의 가치는 곧 서로 다른 교과들이 공유하는 공통의 기반이 무엇인가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의 형식 역시 이차적 관심은 교과 상호간의 구분을 분명히 하는 데에 있다. 피터즈와 허스트에 의해 제시된 지식의 형식은 이때가지 인류가 성취해 온, 그리고 공적 언어로 기술되고 학습을 통하여 획득되는 경험 이해의 다양한 방식을 가리킨다. 피터즈와 허스트는 그러한 다양한 경험 이해의 방식으로서 수학, 자연과학, 인간과학, 역사학, 종교, 문학 및 예술, 철학을 제시하는 바, 이 각각의 지식의 형식은 나름대로의 개념, 논리, 그리고 판단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구분된다. 그리하여 희랍에서부터 지금까지 ‘자유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쳐 오고 있는 전통적인 교과의 구분은 다름이 아니라 지식의 형식 사이의 차이,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여, 각각의 지식의 형식이 나타내는 독특한 개념적, 논리적, 방법론적 특징의 분석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으로 된다. 허스트는 이런 식으로 교과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밝힌 다음 그러한 교과를 가르치는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Hirst, 1965). 즉,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각각의 지식의 형식 ― 분화된 공적 개념구조 ― 를 배움으로써 합리적인 마음을 획득하게 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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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한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지식의 형식을 추구함으로써 합리적인 마음을 가지는 것이 왜 가치로운 것인가를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 즉, 지식의 형식과 합리적 마음 사이의 개념적 관련으로 말하면 ― 결국 그 질문의 근거를 스스로 묵살하는 것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그 질문은 이미 지식의 형식에 어느 정도 입문되어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라는 점에서 지식의 형식의 한 사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그 질문은 그것이 의심의 대상으로 삼는 바로 그 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성립 가능한 것이다.
지식의 형식이 어떤 점에서 가치를 가지는가에 관한 위의 논의(즉, 선험적 정당화 논의)는 필수교과의 존재 이유 또는 성립 근거를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허스트에 의하면, 교과를 가르치는 근본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식의 추구를 통하여 합리적인 마음을 발달시키는 데에 있다. 이 말은 교과와 합리적 마음이 별개의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 다시 말하여, 교과가 곧 마음이라는 것, 또는 교과가 우리 마음의 내용물에 해당한다는 것 ― 을 시사한다. 교과와 마음이 이러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은 곧, 교과 상호간의 관계는 마음 안에서 각각의 교과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가리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과 상호간의 관계에 대한 승법적 접근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우선, 교과 상호간의 관계가 바로 마음 안에서의 관계, 즉 마음의 구성 요소 사이의 관계를 가리킨다는 것은, 능력 심리학이나 행동주의 심리학의 망령에 사로잡히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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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가법적 접근의 가능성은 배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도, 마음 안에서 각각의 교과들이 서로 어떤 관련을 맺게 되며, 또 마음 안에서 교과들이 관련을 맺게 될 때 마음은 어떤 모습을 지니게 되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즉, 이런 식의 설명은 교과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기준이 되는 그 마음이, 바로 그것이 설명하려는 교과에 의하여 설명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순환론의 전형적인 예에 해당한다. 이 오류는, 아마도 피터즈와 허스트가 따르는 철학사조 때문이겠지만, 진리와 가치의 궁극적 기준을 뜻하는 형이상학적 개념으로서의 ‘실재’를 가정하지 않고 교과와 마음 사이의 관계에만 의존하여 교육을 설명하는 데에서 비롯된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피터즈와 허스트는 마음이 실재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교과와 마음 사이의 관련을 순전히 관념적인 수준에서 규정하는 경우라면 몰라도 그 관련을, 무엇인가 가치로운 것을 전달하는 일로서의 교육과 관련하여 설명하려고 할 때에는 마음의 기준이 되는 실재에 대한 언급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피터즈와 허스트와 같이 실재를 가정하지 않는 한 교과와 마음이 논리적 관계에 있다 하더라도 결국 양자는 동일 평면에 있는 것일 수밖에 없고, 동일 평면에 있는 두 가지 사이에는 원칙적으로 말하여 하나가 다른 하나의 기준이 되는 그런 관계는 성립될 수 없다. 이 점에서 지식의 형식 이론 또한 교과 상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역부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의 형식 이론은 지식의 형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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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한 필수적 조건에 해당하는가 또는 지식의 형식이 마음의 내용물을 구성한다고 할 때 그 내용물은 결국 무엇을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명백히 하는 데 성공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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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서 설명한 대로 교과의 근본 이념이라는 것이 교과 상호간의 승법적 관계에 의하여 드러난다는 점에 유의한다면, 결국 이 두 가지 교육과정 이론은 교과 상호간의 구분을 설명하는 데에는 다소간 성공하고 있지만 교과 상호간의 관련을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그것들은, 엄밀히 말하여, 교과를 가르치고 배우는 일의 의미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데에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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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교육과정 이론이 이러한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는 근본적 원인은 그들이 공통적으로, 의도적이건 아니건 간에, 마음의 형이상학적 측면을 배제하고 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이홍우, 1995). 여기에서의 마음의 형이상학적 측면은 마음의 궁극적 기반으로서의 실재를 말하는 것이며, 이 실재는 또한 교과의 궁극적 기반이기도 하다. 교과와 마음이 실재와 관련을 맺지 못할 때 교과를 가르치고 배우는 일로서의 교육실제는 그 궁극적 기반을 상실하게 된다. 그렇게 될 때 교육은 영원불변의 궁극적 실재를 추구한다는 가장 고귀한 역할을 망각하게 된다. 위에서 언급된 바 있는 ‘공적 전통’, ‘인간경험’, ‘합리적 마음’ 등은, 비록 ‘실재’보다는 우리에게 친숙한 용어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결코 실재를 대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각각은 실재를 표현하는 용어일 뿐 실재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이하에서 밝혀지겠지만, 위의 두 이론에서처럼 위의 용어들로 실재를 대치하려고 하는 한, 교과 사이의 승법적 관계,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드러나는 교과의 근본 이념은 밝혀지지 않는다.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그것들로 실재를 대치하는 경우에는 교과의 근본 이념 또는 교과 상호간의 승법적 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다음에서 살펴 볼 오우크쇼트의 마음 이론 ― 또는 교과 이론 ― 은 교과의 근본 이념을 교과 상호간의 승법적 관계로 설명한 전형적인 사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오우크쇼트는 마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총체와 그 양상의 관련에 비추어 설명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각각의 교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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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체로서의 세계를 어떤 한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드러나는 한 ‘측면’, 오우크쇼트의 용어로는, ‘양상’(mode)을 의미하며 마음은 이러한 교과를 배운 결과로 형성된다(Oakeshott, 1933). 물론, 양상으로서의 교과는 그것이 드러내고자 하는 세계 그 자체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총체로서의 세계를 그 대상으로 하여 그 세계를 특정한 관점에서 추상하여 드러낸다는 점에서 총체로서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국어, 수학, 과학 등의 각각의 교과는 총체로서의 세계의 상이한 부분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총체로서의 세계를 상이한 양상에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총체로서의 세계를 ‘구면체’라고 한다면, 각각의 교과들은 그 구면체에 대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원뿔형 깔때기’를 상이한 방향에서 여러 개 엎어놓은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오우크쇼트에 의하면, 교과를 배운 상태로서의 마음은 교과에 반영되어 있는 총체로서의 세계를 분유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며, 이 점에서 마음은 총체와 다를 것일 수 없다.
사실상 총체로서의 세계는 인과법칙이 지배하는 순전한 물리적 세계도 아니요, 인간의 욕망 충족을 위한 유용한 수단들의 집합체도 아니며, 또 그렇다고 창조주의 뜻대로 질서정연하게 이루어져 있는 세계도 아니다. 이 세계는 앞에서 예시한 세계와, 또 여기서 미처 거론하지 못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그 하나하나가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통일된 유기체처럼 긴밀하게 얽혀 있는 그야말로 ‘총체’로서의 세계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총체’로서의 세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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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직접 경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아닌, 형이상학적 실재에 해당한다.) 유사 이래로 지금까지 이어져 온 지적 유산은 인류가 그러한 총체로서의 세계를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을 경주해 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인류는 총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서로 다른 경험들 ― 즉, 각각 특정 관점에 의존하지 않고는 획득될 수 없는 서로 다른 경험들 ― 을 정리할 수 있는, 서로 다른 개념, 논리, 탐구방법, 검증방법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다양한 사고의 양식을 점차로 발전시켜 왔다. 우리는 이와 같이 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 누적된 서로 다른 사고의 양식을 각각 철학, 과학, 수학, 문학 등과 같은 학문의 명칭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며, 앞에서 말한 필수 교과는 이상에서 설명한 의미의 학문을 직접, 간접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교과의 특이한 위치를 고려해 보면, 교과를 필요에 의하여 정당화하는 경우에서처럼 교과를 마치 칸막이와 같은 것에 의하여 사실적으로 단절된 어떤 실체처럼 파악하는 것, 또는 교과들의 관계를, 당장의 사회적 필요를 이런저런 방식으로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도구들을 가법적으로 한 곳에 모아놓은 상자와 같은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교과를 필요에 의하여 정당화하는 것은 결국, 위의 비유에서처럼 교과가 총체로서의 세계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 못하고 교과가 총체로서의 세계와 단절된 채 그 자체로 성립하는 것처럼 설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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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의 가치를 총체로서의 세계와 단절된 채 설명한다면, 그 유일한 설명방식은 교과를 생활사태 또는 필요와 관련하여 설명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생활사태를 직접 학교 교과로 끌어들이는 것은 가법적 접근에서처럼 교육과 삶의 의미를 어느 한편으로 끌고 가 왜곡하는 것일 뿐 교육과 삶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교과는 생활사태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위에서 말한 의미에서 ‘총체’로서의 세계와 관련되어 있으며, 총체로서의 세계는 교과가 반영하는 양상으로서의 세계를 거쳐서 비로소 우리에게 알려진다. 물론 교과가 반영하는 양상으로서의 세계는 총체로서의 세계 그 자체는 아니지만 우리로서는 그것 이외에 총체로서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점에서 보면, 교과는 분명히 총체로서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 조건에 해당한다. 물론, 총체로서의 세계는 어느 특정한 양상, 즉 특정 교과만으로 온전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희랍의 ‘자유교과’(liberal arts), 중세의 ‘7자유교과’(septem artes liberales), 르네상스의 ‘인문교과’(studia humanitas)에서부터 현대의 피터즈와 허스트의 ‘지식의 형식’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인 교과들은 대체로 7~8개로 구성되어 있다. 이때 7~8개의 수효가 어떤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한편으로 보면 유구한 역사에 걸친 무수한 검증을 통하여 결정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단순한 역사적 우연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인류가 총체로서의 세계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생각이나 포부의 가능성과 한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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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7~8가지로 나누어져 내려온 교과가 드러내는 양상화된 세계는 어떤 시공간을 점유하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 각각은 한편으로 다른 양상과 차별을 이루는 고유한 영역과, 다른 한편으로 서로 공유하는 영역을 가지게 된다. 교과의 이와 같은 이중적 측면은 그것을 배우는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교과가 반영하는, 서로 다르기도 하고 겹치기도 하는 양상화된 세계들은 하나의 전체로서 긴장과 균형을 이루면서 개개의 양상이 총체로서의 세계를 표현하는 데에 있어서 가질 수밖에 없는 결함 또는 한계를 서로서로 보완해 주고 있는 것이며, 학습자는 그러한 의의를 가진 7~8가지 교과를 배움으로써 어느 한 교과 내지 두서너 교과만을 배웠을 때 가지게 되는 편협한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전통적인 교과를 가르치는 일을 지속해 온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학습자로 하여금 세계의 일부분 또는 몇몇 측면에 경도되지 않고 총체로서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관조’의 경지, 곧 총체로서의 마음을 획득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김승호, 1997). 이 일이 어떤 성격의 일인가를 구체적으로 상상해 본다면, 인간이 총체로서의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하는 것은 세계의 미미한 한 점에 지나지 않는 개인의 마음 안에 총체로서의 세계를 온전히 담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주의 신비에 해당한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과장이 아닐 것이다. 마음이 총체로서의 세계와 일치된 상태를 가리켜 ‘全人’ 또는 ‘聖人’이라고 부르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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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상태가 결코 쉽게 실현될 수 없는 교육적 이상에 해당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상,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우리 각자는 위에서 규정한 의미에서의 전인 또는 성인에 결코 도달할 수 없으며, 또 유사 이래로 그러한 기준에 합치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면, 우리 모두는 그러한 마음의 형이상학적 측면을 어느 정도는 실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며, 이 점에서 우리는 이미 전인 또는 성인으로 가는 도상에 들어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교육의 이상을 전인 또는 성인에 두는 것은 또 하나의 목적을 불필요하게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늘 일어나고 있는, 우리의 마음에 내재하는 인간의 본성, 즉 ‘기준’을 분명히 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결코 고정된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얼마나 총체로서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총체로서의 마음을 획득하는가에 따라 그 실현 정도가 결정되는 그런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가 교과를 그 근본 이념에 맞게 제대로 가르쳐서 학생들로 하여금 어느 한 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은 총체로서의 마음을 가지도록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中庸에서 말하는 ‘中’을 실현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며, 일단 이러한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다면, 성리학의 교육원리인 ‘自然’이나 ‘自得’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학생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현재의 삶의 실제에서 요청하는 바에 부합할 수 있을 것이다(이홍우, 1996a, 1996b, 2000). 물론, 이 일은 성인 수준의 삶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적 삶과 교육실제에서 늘 일어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김승호(1997). ‘교과의 근본이념으로서의 여가’, 『교육학연구』 제35권 1호. 한국교육학회.
이홍우(1995). ‘교육내용으로서의 지식’, 김종서 외 3인, 『교육과정이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이홍우(1996a). ‘전인교육론’, 『도덕교육연구』 제8집. 한국도덕교육학회.
이홍우(1996b). ‘인간본성론’, 『교육이론』 제10권 1호. 서울대 교육학과.
이홍우(2000). 『성리학의 교육이론』. 성경재.
Hirst, P. H.(1965). ‘Liberal Education and the Nature of Knowledge’, R. D. Archambault, ed., Philosophical Analysis and Education.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1965.
Oakeshott, M.(1933). Experience and Its Modes, Cambridge University Pr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