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엿보기
고래, 라일락(시인의 일요일)
석민재
부산에서 태어나 2015년 《시와사상》 신인상, 201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하동에서 ‘양보책방’을 운영 중이며 시집 『엄마는 나를 또 낳았다』가 있다.
이 시집의 도처에서 어른들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마주하게 된다. “어른이 실수하면 그냥 넘어가고//애들은 잘못 안해도 매부터 들었잖아”(「피자두」) “어디 갔다가/안 돌아오는 어른들은 어찌 된 것일까요?”(「입동」) “자장가 부른다고 어른이라면/알은 흩어지고/조생아들이 줄줄이”(「쓰다듬으면 가만히 있네요」) “보금자리라는 말이 쓸쓸해진 도시에 굶주림이라는 가장 서글픈 단어가 실시간 떠올라도 눈썹을 밀어 버린 어른들은 읽고 말하고 과거의 두루마리를 풀어 매일 베껴 씁니다”(「넝쿨」) 이처럼 뻔뻔하고 무책임한 어른들을 고발하고 있는 이 시어들 속에는, 짙은 분노와 함께 그들을 향한 강력한 항의가 배어 있다.
손수건으로 닦아 낼 수 없는 일들이
쏟아져도
그래, 라일락
따뜻하고 아늑한 구석에 라일락
어린아이로 등장하는 그 꿈에 라일락
꽃을 잃은 것이 아니라
꽃 이름을 잊은 것이라고
어른들은
뛰어다니고 안달하고 하찮은 말이나 해 대며
불신하고 서둘러도
-「그래, 라일락」 부분
눈물을 흘리지도 못할 만큼 아플 때가 있다. 그렇게 닦아 낼 것도 없는 막막한 슬픔이니까 격려의 손길은 오히려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 “손수건으로 닦아 낼 수 없는 일들”을 겪은 아이들에게는 꽃이, 그러니까 라일락만이 “물고기 떼” 같은 그들에게는 숨 쉴 수 있는 물이고 삭막함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촉촉함이다. 그런데 어른들은 격리는커녕 뛰어다니고 안달하고 하찮은 말이나 해 댄다. 아니, 그들이 저 닦아낼 수 없는 슬픔의 가해자들이면서도 끝내 반성을 모른다. “내 앞에 어른이 있다 그 앞에 어른이 있다”(「민다리」) 어른들이란 기댈 수 있는 언덕이 아니라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벽”이다. 그래서 벽은 어른의 또 다른 이름이다. “입이 총구가 되지 않게/밥이 벽이 되지 않게”(「어떤 경우라도 나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아케이로포이에토」는 “벽”을 “똥칠”, “아버지”와 거듭하여 병치함으로써 어른들의 그 가증스러운 권위를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저주스러운 어른들의 세계에 항거하는 하나의 방식을 권터그라스의 「양철북」에서 볼 수 있다. 주인공 오스카 마체라트는 성장을 거부한다. 그는 어른 되기를 거부함으로써 어른들의 세계를 저주한다. 성장의 거부, 다시 말해 미성숙한 채로 살아가는 것이 성장을 강요하는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하나의 저항이라면, 이 시집에서는 한층 격렬한 방식으로 어른들의 그 요구와 강압에 항거한다. 「조문」, 「능소화가 피었다」에서 보이는 것처럼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것, 자살로서의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자기의 죽음을 통해 스스로의 생명을 지키려는 역설이다.
-전성욱(문학평론가), 시집해설 「슬픈 혀가 하얗게 날아오르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