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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과 정성
거리마다 등들이 알록달록하다. 큰스님께서 빳빳하게 다린 여름 두루마기를 입고 내려오셨다.
“스님들 초파일날 선물주라고 저렇게 많이 갖다놨다.”
하시면서 법공양실에 가득 쌓인 법공양책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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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건강하십시오.” 하고 스님들이 와서 인사를 하시자 “좋습니다 날씨.” 하고 인사를 받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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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탑에 인연되는 비구스님과 비구니스님이 인사를 오셨다.
“절에서 탑불사를 하는데 법공양에 보태겠습니다.”
하고 ‘화엄탑건립발원’이라고 쓰인 봉투를 가져오신 스님은 남화사에서 오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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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창녕에서 19년째 변변한 절 없이 근처에 집하나를 얻어서 사무실겸 절로 쓰면서 탑을 지키고 있다는 비구니스님이 오셨다.
이 스님과 큰스님의 대화가 잘 들리지 않았는데, 집에 돌아와 인터넷을 검색해서 단편적인 스님의 말씀과 맞춰보니 말씀하신 탑은 ‘창녕 술정리 동3층석탑(국보34호)’이었다.
2004년도에 범어사 말사로 등록을 한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부처님 사리 7과가 모셔져 있고, 탑 속의 여러 유물도 박물관에 있다고 했다.
인터넷에 남아있는 기사들을 보니 일선이라고 하는 스님이 ‘탑을 지켜라’하는 부처님의 현몽을 받고 꿈에서 일러준 길을 따라와서 이 탑을 발견했다고 한다. 동네사람들이 오래된 바위같이 방치한 탑주변을 스님 혼자서 몇 년간 청소하고 가꾸다가 국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또 이 탑에 관련된 여러 문헌자료들도 찾아내어서 결국 정부로부터 국보신청을 하고 관리예산을 따내기까지 스토리가 상당하였다.
일선스님은 절과 인연닿자마자 매일 저녁 탑돌이를 하였는데, 탑이 점점 본연의 모습을 찾으면서 마을사람들도 동참해서 탑돌이 하는 분들이 아주 많다고 했다.
비가 올 때는 우산을 받고서라도 1년 365일 저녁 7시가 되면 10분간 탑돌이를 하는데 최근까지 영험과 가피를 본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탑 근처에 있던 신라 때의 절 이름은 인양사라고 했다.
“성당에는 60년이 넘은 유치원이 있고, 통도사도 말사도 14개나 있습니다. 유치원을 하려고 110평 땅을 샀거든예. 변변한 절보다는 저는 유치원을 하고 싶어서.”
“유치원 하고 싶어? 아이 좋은 일이네. 스님은 젊고 생각이 반듯하고 잘생겼네. 그래서 잘 되겠네.” 하고 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들은 법공양을 많이 하는데 저는 적게 했어요.”
하고 비구니 스님이 웃으시자
“앞으로 많이 할거야. 스님이 주인 노릇을 할거예요. 법공양.”
하고 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큰스님과 말씀 나누신 비구니스님이 탑을 발굴한 일선스님인지 아니면 함께 불사하고 계신 가까운 인연 있는 스님인지 사진을 비교해 봐도 헷갈리기만 했다.
그래도 천년이 넘도록 흥망성쇠하며 천천히 진행되는 불사의 현장을 목격한 것 같아서 신비로왔다. ‘창녕 술정리 동3층석탑 국보34호’하고 가보고 싶은 곳 리스트에 메모를 해놓았다. 거기서 1킬로 쯤 떨어진 곳엔, 비구니스님 말씀하시기를 ‘동탑에 비하면 자그마한 아가야 같은 탑’ 서탑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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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학스님이 오셔서 "스님들이 더워해서요,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 하고 창문을 열었다.
큰스님의 등 뒤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오늘도 대방광불화엄경 강설 제 26권이 이렇게 우리 손에 들어왔다.
본 강의에 들어가기 전에 늘 그랬듯이 마음을 담아서 서문을 크게 한 번 천천히 읽는 것으로써 점안의식을 대신하겠다.
서문
불교란 오로지 보시이며, 보시가 곧 불교입니다. 달리 말하면 무엇이나 마음을 다해서 베풀고
나누는 것이 불교입니다. 불교는 베풀고 나누는 이 일 한가지뿐입니다. 세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불교라면 베풀고 나누는 일 외에 달리 무슨 일이 더 있겠습니까?
먼저 법을, 진리를, 진리의 가르침[法]을 베풀고 나누는 일입니다. 다음은 재산[財]이나 물질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무리하지 말고 형편에 따라 베풀고 나누는 일입니다. 다음은 외롭고 두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의지가 되어 주고 편안함[無畏]을 베푸는 일입니다.
잡보장경에서는 무재칠시(無財七施)라 하여 돈을 들이지 않고도 베풀고 나누어 무량대복을 지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부드럽고 자비로운 눈빛으로 사람을 편안하게 대하는 것은 자안시(慈眼施)입니다. 얼굴에 미소를 가득 안고 사람을 대하는 모습은 화안시(和顔施)입니다. 아름답고 공손한 말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언사시(言辭施)입니다. 몸소 행동으로 사람들을 돕는 것은 사신시(捨身施)입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은 심려시(心慮施)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은 상좌시(床座施)입니다. 잠깐이라도 잠자리나 거처등을 마련해 주는 것은 방사시(房舍施)입니다. 이 일곱 가지 보시만으로도 세상은 얼마나 밝고 향기롭고 아름다운 세상이 되겠습니까.
이 모든 보시거리는 실은 사람 사람이 본래로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본래로 가지고 있는 것을 보시하는 것은 곧 회향이 됩니다. 그리고 그 보시를 보다 높은 뜻으로 회향하여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온 우주를 흠뻑 적시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가르침인 진정한 불교입니다. 80권이나 되는 화엄경과 나아가서 8만4천 대장경은 이 보시하여 회향하는 것이 진정한 사람의 길이며 부처님이 가르치신 오직 한 길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보시일법(布施一法)이 총섭제행(總攝諸行)입니다. 베풀고 나누는 이 한 가지 일이 모든 수행을 다 포섭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훌륭한 수행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부디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려면 숨을 쉬듯이, 또 음식을 먹고 배설하듯이, 지식을 배우고 가르치듯이 일체를 보시하여 회향합시다.
2015년 4월 15일
신라 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십회향품이 상당히 길다. 그 요지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선근회향(善根廻向)이다. 좋은 일을 회향하자는 것이다. 내가 좋은 일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좀 더 확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나누고 배려하는 것이 불법이다. 화엄경의 십회향품에서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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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강의할 때 화엄경 외에 다른 불교나 스님에 대해서 가장 많이 이야기 하는 경우는 바로 대만의 증엄스님과 자제공덕회 구호활동이다.
자제공덕회는 천만 명의 자원봉사자들을 대동하고 세계 어느 곳이든지 재난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뛰어가서 구호하고 제일 늦게 그 자리에서 나오는 단체다.
어떤 고준한 선법문을 거론하는 것보다 어렵고 불쌍한 사람, 재난에 처한 사람들을 구호하는 일이 부처님의 진정한 뜻이다. 나는 그것이 진짜 불교라고 본다.
그외 모든 것들은 그런 행(行)을 실천으로 옮기자고 하는 일에 불과하다.
나는 선(禪)에 관한 몇 가지 어록들을 강의도 했고, 해설하는 책도 냈고, 선방에도 십여년 이상 다녔다. 물론 그런 경험들이 다 밑거름이 되었겠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불교라는 것이 세상의 어려움을 구제하는데 참뜻이 있다’라고 결론지어진다. 그러한 일에 세상이 감동을 하고 사람들이 감동한다. 어떤 고준한 선법문을 해봐야 알 듯 말 듯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소리일 뿐’이다. 감동이 없고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첫째는 세상 사람들에게 아무런 보탬이 안된다.
누구에게도 보탬이 안되는 일을 ‘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성인의 가르침이다’라고 해도 되는가? 나는 이런 생각들을 거침없이 말한다. 특히 이 십회향품을 보면서는 더욱 더 그러한 생각이 든다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二十三
十廻向品 第二十五之一
四,十廻向
오늘 공부는 교재 138쪽(화엄경 제2권 민족사 刊) 위에서 두 번째 단락에서 부터 할 차례다.방금 점안한 대방광불화엄경 강설집과 같이 십회향품이다.
이 달은 부처님 오신 달이다.
내가 법공양 사무실에 이번 달을 위해서 특별히 많이 책을 준비해 놓았다. 여러 스님들이 들고 갈 수 있는 데까지 들고 가서 주변에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각자 사찰의 신도님들에게 뭔가 법을 나누는 마음을 쓰시라고 준비한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여러 스님들이 법공양 책들을 잘 가져 가셔서 법보시를 많이 잘하고 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참으로 고맙다는 말씀을 전한다.
개인적으로 법회 전에 와서 인사하는 분들에게 나는 항상 말한다.
‘내가 그 절에까지 들고 가서 해야 할 일을 스님이 대신 합니다. 너무 고맙고 감사합니다.’
그 말이 사실이다. 나는 늘 그런 마음으로 산다.
잘 아시듯이 우리가 화엄경을 공부하는 것을 대만에서도 알고, 그 먼 거리에서 돈을 많이 들여가면서 그 무거운 책을 직접 가지고 이곳에 와서 우리에게 화엄경 한 질씩을 법공양 올렸다. 그런 것을 보면서 달리 무슨 변명이 필요하겠는가?
염화실지에도 그분들이 다녀간 행적을 아직까지 싣고 있다. 앞으로도 몇 번 더 실을 것이다. 우리에게 제일 큰 교훈을 주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은 그런 실천행이다. 말로는 사람이 변화되지 않는다. 그런 감동적인 실천행이 비로소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만든다. 흔히 ‘성취시킨다’라고 하는데 성취, 교화, 성숙, 제도라는 말과도 상통한다. 그런 말들이 다 같은 뜻인데, ‘사람을 사람되게 한다’‘성취시킨다’‘성숙시킨다’는 뜻이다.
말로는 너무나도 잘 하는데 몸소 실천행으로 나아가기까지는 ‘보통 변화가 있지 않고는 어렵지 않나’ 하는 것을 나는 늘 본다.
바, 譬喩로 重明함
何以故오 譬如日天子가 不但爲一事故로 出現世間인달하야 菩薩摩訶薩도 亦復如是하야 不但爲一衆生故로 修諸善根하야 廻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 普爲救護一切衆生故로 而修善根하야 廻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며 如是不但爲淨一佛刹故며 不但爲信一佛故며 不但爲見一佛故며 不但爲了一法故로 起大智願하야 廻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 爲普淨一切佛刹故며 普信一切諸佛故며 普承事供養一切諸佛故며 普解一切佛法故로 發起大願하야 修諸善根하야 廻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왜냐하면 마치 해가 한 가지 일만을 위하여 세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듯이,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한 중생만을 위하여 선근을 닦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이 아니고, 일체중생을 널리 구호하기 위하여 선근을 닦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한 부처님의 세계만 을 깨끗이 하려거나, 한 부처님만을 믿으려거나, 한 부처님만을 뵈오려 하거나, 한 법만을 알기 위하여서, 큰 지혜와 원력을 일으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부처님의 세계를 두루 청정케 하려고, 모든 부처님을 널리 믿으려고, 모든 부처님을 널리 받들어 섬기며 공양하려고, 모든 부처님의 법을 널리 알려고, 큰 서원을 세우고, 선근을 닦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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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譬喩)로 중명(重明)함: 비유를 들어 거듭 해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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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받는 것으로써 중생들을 구호하는 내용이다. 중생들의 고통을 대신 받는다는 의미가 많이 있다. 그것이 십회향 중에 첫회향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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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고(何以故)오 : 무슨 까닭인가
비여일천자(譬如日天子)가 : 비유하자면 일천자가, 일천자는 태양이다.
부단위일사고(不但爲一事故)로: 다만 한 가지 일 때문에
출현세간(出現世間)인달하야 : 세간에 출현한 것이 아니듯이. 태양이 뒤 뜰에 있는 나무 한 그루만을 위해서 저렇게 따뜻한 햇볕을 쪼여 주는 것이 아니다. 태양이 뜨면 온 지구상의 만물이 혜택을 받는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전부 혜택을 받는다. 곡식들은 태양빛이 아니면 영양소가 생기지 않고, 비타민D는 햇빛을 쐬야만 만들 수 있는 비타민이다. 어느 것 하나 태양의 은혜를 입지 않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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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도 : 보살마하살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야: 또한 다시 그와 같아서
부단위일중생고(不但爲一衆生故)로 : 한 중생만을 위해서
수제선근(修諸善根)하야 : 여러 가지 선근을 닦아서
회향아뇩다라삼먁삼보리(廻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이 아니다. 보살이 어찌 한 중생만을 위하겠는가? 보살은 우리 모든 중생들을 위해서 무상정각을 이룬 것이다. 한 사람이 무상정각을 이루고 나면 거기에 따르는 혜택과 그 영향력이 어마어마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보라. 석가모니불 한 분이 그렇게 정각을 이룸으로 해서 지금 26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많고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입고 비로소 사람답게 사는 길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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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위구호일체중생고(普爲救護一切衆生故)로 : 널리 일체중생을 구호하기 위한 까닭으로
이수선근(而修善根)하야: 선근을 닦아서
회향아뇩다라삼먁삼보리(廻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한다.
오늘 읽은 화엄경강설의 서문에도 여러 가지 보시를 소개했었다. 그러한 보시의 정점에는 무상정각이 있다. 무상정각을 이루게 하기까지가 보시의 목적이다.
물론 배고픈 사람에게 밥 한 그릇을 주고 그 사람의 배를 채워주면 일단 작은 목적은 달성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만을 위해 밥 한그릇을 준 것이 아니다.
내가 가끔 말씀 드린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복을 제일 많이 지었는데 그분은 누구에게 밥 한그릇을 보시한 적이 없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렇게 많은 복을 지었는가?
궁극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법보시를 했기 때문이다.
법보시를 많이 했기 때문에 물질도 따라오고,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칭송을 받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사월초파일 되어봐라. 전국 사찰마다 부처님 앞에 돈이 산더미처럼 쌓인다.부처님이 무슨 복을 지어서 그러냐? 법보시한 복을 지어서 그렇다’이런 말을 나는 자주 한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해인사 통도사 불국사 저 모든 훌륭한 사찰들이 전부 부처님 앞으로 등기가 되어 있다. 어느 누구도 함부로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어찌하여 그런 부자가 됐느냐? 법을 보시했기 때문이다.
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 정도의 법에 대한 존중심이 있어야 한다. 법에 대한 가치관이 확실하게 서 있어야 한다. 그런 신념하나로 우리는 불법을 공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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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부단위정일불찰고(如是不但爲淨一佛刹故)며 : 이와 같이 부단히 다만 한 불찰을 청정하게 하지 않으며
부단위신일불고(不但爲信一佛故)며 : 또 한 부처님을 믿기 위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왜 불교를 공부하는가? 왜 수행하는가? 간단하게 표현하면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이다. 우리 개인의 인격을 향상시키고, 나아가서 그 인격을 통해서 사회를 맑고 아름답고 향기롭게 좋은 세상을 만들자고 하는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스님이라고 늘 말하는 대만의 성엄스님은 법문을 할 때 꼭 좌우에 두 마디를 걸어놓고 한다. 그런 것에도 그분의 신념이 다 드러나 있다.
한쪽에는 ‘제승인적품질(提昇人的品質) 자기의 인격을 향상시키는 것’, 다른 한쪽에는 ‘건설인간정토(建設人間淨土)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는 것’을 써놓았다. ‘이 세상을 아름답고 향기롭게, 세상을 살기좋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는 오늘 이 법회를 하노라’라고 써 붙여 놓고 법문을 한다.
그런 글 한 줄을 써 붙여 놓은 것을 볼 때마다 ‘그 스님의 정신이 뭐구나’ 하는 것과 ‘그 스님은 불교를 이렇게 정리했구나’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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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단위견일불고(不但爲見一佛故)며: 다만 한 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한 것도 아니며
부단위요일법고(不但爲了一法故)로 : 다만 한 가지 이치를 알기 위한 것도 아닌고로
기대지원(起大智願)하야 : 대지혜와 원력을 일으켜서
회향아뇩다라삼먁삼보리(廻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이 아니다. 아닐 불(不)자가 여기저기 있는데, 정확하게 새기려면 지금 새기는 것과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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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보정일체불찰고(爲普淨一切佛刹故)며 : 일체불찰 온 세계를 널리 다 청정하게 하기 위한 까닭이며
보신일체제불고(普信一切諸佛故)며 : 일체 모든 부처님을 널리 다 믿기 위한 까닭이며
보승사공양일체제불고(普承事供養一切諸佛故)며 : 일체 모든 부처님을 널리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기 위한 까닭이며
보해일체불법고(普解一切佛法故)로: 일체 모든 부처님의 법을 널리 이해하기 위한 까닭으로
발기대원(發起大願)하야 : 큰 서원을 일으켜서
수제선근(修諸善根)하야 : 모든 선근을 닦고 그것으로써
회향아뇩다라삼먁삼보리(廻向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아뇩다라 삼먁삼보리에 회향한다.
요즘 시내에서 급식 활동을 하는 일들이 많은데 참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그 국수 한그릇 밥 한그릇에도 불법을 담아서 주어야 한다.
기독교인은 아프리카를 가든 어디를 가든 구호활동을 할 때, 교회부터 지어놓고 시작한다. 일단 그 교회에 나오게 시키고 찬송가부터 부르도록 해놓고 나서 그 지역 사람들에게 구호활동을 한다. 그런데 우리 불자들은 실컷 나눠주고 부처님 말 한마디 없이 그냥 와버린다. 그런 것도 보면 참 신기하다.
나는 그런 일을 못해서 크게 주장할 바는 못되지만 ‘국수 한 그릇, 밥 한 그릇을 급식활동 하더라도 거기에 불법 하나라도 담아서 주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누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처음 일지경이라고 해서 A4 용지 한 장에 부처님 말씀을, 인과법문 하나라도 써서 가는 사람 오는 사람에게 나눠줬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밥 한그릇을 줄 때도 급식활동을 할 때도 그렇게 하라고 했다. 물론 나눠준 그 종이를 버리거나 휴지로 쓰는 사람도 있고, 코를 닦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지경 만 장을 가져가면 그 중에 한 사람이라도 그걸 읽고 감동한다. 그러면 만장을 찍은 보람이 있다. 나는 늘 그런 주의다.
그물을 쳐놔서 그 모든 그물눈마다 새가 다 걸리면 또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수천 개의 눈을 가진 그물을 쳐놨는데 거기에 새 한 두 마리가 걸릴 뿐이다.
세상 이치는 그렇다.
그래서 우리 불자들도 아프리카나 동남아에 가서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건 좋은데 불법을 전하지 않고 그냥 좋은 일만 하고 와서는 안된다. 가만보니 우물만 파주고 오는 것 같다. 학교 지어주고 우물을 파주는 일은 참 좋은 일이다.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보시행이고 훌륭한 보살행이고 훌륭한 불법의 실천이다. 그러나 여기 경전에도 나온다.
부처님은 중생이 궁극에 가서는 깨달음을 성취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불자가 하는 모든 보시행의 절정에는 깨달음의 성취가 있다. 우리가 실천하지 못해도, 그렇게 하든 못하든 그 사실만은 알고 있어야 한다.
(4) 廻向하는 心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以諸佛法으로 而爲所緣하야 起廣大心과 不退轉心하야 無量劫中에 修習希有難得心寶하야 與一切諸佛로 皆悉平等이니 菩薩이 如是觀諸善根하야 信心淸淨하며 大悲堅固하야 以甚深心과 歡喜心과 淸淨心과 最勝心과 柔軟心과 慈悲心과 憐愍心과 攝護心과 利益心과 安樂心으로 普爲衆生하야 眞實廻向하고 非但口言이니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부처님의 법으로 반연할 경계를 삼아 광대한 마음과 물러가지 않는 마음을 내고, 한량없는 겁 동안에 희유하고 얻기 어려운 마음을 닦아서 모든 부처님으로 더불어 다 평등하나니, 보살이 이렇게 모든 선근을 살펴보고, 신심이 청정하며, 대비심이 견고하여, 매우 깊은 마음. 환희한 마음. 청정한 마음. 가장 승(勝)한 마음. 부드러운 마음. 자비한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거두어 보호하는 마음. 이익하는 마음. 안락한 마음으로써 널리 중생을 위하여 진실하게 회향하는 것이요, 입으로 말만 하는 것이 아니니라."
*
회향(廻向)하는 심(心):회향하는 마음
*
회향하는 열 가지 마음을 여기서 소개한다.
*
불자(佛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이제불법(以諸佛法)으로 : 모든 불법으로써
이위소연(而爲所緣)하야 : 인연할 바를 삼아서. 모든 부처님 법으로써 인연할 바를 삼아
기광대심(起廣大心)과: 광대한 마음과
불퇴전심(不退轉心)하야 : 퇴전하지 않는 마음을 일으켜서
무량겁중(無量劫中)에 : 한량없는 겁 가운데
수습희유난득심보(修習希有難得心寶)하야 : 희유하고 얻기 어려운 마음의 보배를 수습한다.
마음의 보배가 무엇이겠는가? 영원히 변치 않는 참마음 자리, 진여불성 자리다. 참생명, 진여생명자리다. 남방불교 공부하는 사람들은 ‘무아(無我)인데 무슨 그런 참나를 말하느냐’ 라고 할 지 모르지만 그건 그 사람들의 몫이고 선불교나 대승불교에서는 참나를 빼버리면 아무것도 이야기 할 거리가 없다. 차별없는 참사람이라고 하기도 하고, 진심이라고 하기도 하는 참나를 빼면 대승불교나 선불교는 무너진다. 아무것도 없다. 참나가 아니면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희유난득심보(希有難得心寶)다. 참나는 우리가 늘 가지고 일거수 일투족에 쓰고 있고, 그 마음 아니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지 않지만 정작 그것은 우리 손에 안 잡힌다. 내가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마치 내가 내 그림자를 밟지 못하는 것과 같다. 내 그림자 밟으려면 그만치 가버리고 또 그림자를 밟으려면 저만치 가버린다.
참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눈 앞에 있고 손에 잡힐 것 같지만 정말 그것을 확연하게 알기는 어렵다.
요즘 어떤 법사가 ‘1분 안에 견성하고 1분 안에 참마음 아는 방법’을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있다. 상당히 일리가 있다.
거기에 대해서 또 반론하는 사람도 물론 많기는 한데 참마음은 사실 우리가 떠날래야 떠날 수 없으면서 그러나 쉽게 손에 잡히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진공묘유(眞空妙有)다. 찾아보면 없지만 그러나 모든 일을 다 관장한다. 그 놈이 들어서 모든 일들, 인생사 모든 것을 다 관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도 내가 별을 쳐놨다. 희유하고 난득한 심보 그것을 수습해서
여일체제불(與一切諸佛)로 : 그걸 알면 모든 부처님으로 더불어
개실평등(皆悉平等)이니: 함께 다 같이 평등해진다.
‘부처님 행동을 해야 부처님이지’라고 자주 말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착한 일을 한다고 부처님이 아니라 착한 일을 하든 나쁜 일을 하든 그 참마음의 작용이 한다고 하는 사실을 알 때 그것이 바로 부처의 작용이다. ‘여일체제불로 개실평등이라’ 라고 하는 말이 바로 그말이다. 희유하고 난득한 심보를 수습해서 그걸 닦는다고 표현은 했지만 닦아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건 닦을 수도 없는 것이고 어느 순간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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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이 : 보살이
여시관제선근(如是觀諸善根)하야: 이와 같이 모든 선근을 관찰해서
신심청정(信心淸淨)하며 : 신심이 청정하며
대비견고(大悲堅固)하야: 대비가 견고해서
이심심심(以甚深心)과 : 깊고 깊은 마음과
환희심(歡喜心)과 : 환희하는 마음과
청정심(淸淨心과 : 정정한 마음과
최승심(最勝心)과 : 가장 수승한 마음과
유연심(柔軟心)과 : 유연한 마음과
자비심(慈悲心)과 :자비한 마음과
연민심(憐愍心)과: 연민히 여기는 마음과 위에 비(悲)자도 연민이라는 뜻이 있지만 좀더 확연하게 이렇게 했다.
섭호심(攝護心)과 : 거둬들여서 보호하는 마음과
이익심(利益心)과 : 남을 이익하게 하는 마음과
안락심(安樂心)으로 : 안락하게 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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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위중생(普爲衆生)하야 : 널리 중생을 위해서
진실회향(眞實廻向)하고 : 진실하게 회향하고
비단구언(非但口言)이니라: 다만 입으로 말만 하는 것은 아니니.
비단구언하며에 밑줄 쫙이다. 비단구언.
불교의 수많은 용어 중에서 한마디만을 딱 선택하라면 보리심을 선택할 수도 있다.
심(心)은 우리가 아는 마음이라는 한자지만 보리는 범어인데 무슨 뜻인가?
보리는 지혜와 자비다. 보리심은 지혜와 자비의 마음이고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타심이다. 남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 보리심이다.
달라이라마 스님이 보리심이라는 말을 제일 많이 강조하는데 보리심이라고만 했지 더 이상 풀어서 말하지 않아서 내가 백방으로 찾고 책을 읽고 뜯어 봤다.
그랬더니 보리심은 다름 아닌 이타심이었다. 근래 부산만 하더라도 티벳스님이 절을 세워서 티벳불교를 선양하고 있다. 그 사이트에 들어가면 달라이라마 스님의 법문을 녹취해서 올려놓은 것도 있는데, 그런 데서도 내가 백방으로 알아봤다.
나는 평소에 늘 보리심은 지혜와 자비의 마음이라고 강조했는데 더 간략하게 하면 이타심이다. 남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다. 이 십회향에 있어서는 더욱 더 그렇다.
(5) 廻向하는 願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以諸善根으로 廻向之時에 作是念言호대 以我善根으로 願一切趣生과 一切衆生이 皆得淸淨하야 功德圓滿하며 不可沮壞하며 無有窮盡하며 常得尊重하며 正念不忘하며 獲決定慧하며 具無量智하야 身口意業의 一切功德으로 圓滿莊嚴이니라 又作是念호대 以此善根으로 令一切衆生으로 承事供養一切諸佛하야 無空過者하고 於諸佛所에 淨信不壞하야 聽聞正法하며 斷諸疑惑하야 憶持不忘하며 如說修行하야 於如來所에 起恭敬心하며 身業淸淨하야 安住無量廣大善根하며 永離貧窮하야 七財滿足하며 於諸佛所에 常隨修學하야 成就無量勝妙善根하며 平等悟解하야 住一切智하며 以無碍眼으로 等視衆生하며 衆相嚴身하야 無有玷缺하며 言音淨妙하야 功德圓滿하며 諸根調伏하야 十力成就하며 善心滿足하야 無所依住하고 令一切衆生으로 普得佛樂하며 得無量住하야 住佛所住케하나니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모든 선근으로 회향할 때에 생각하기를 '나의 선근으로써 모든 갈래의 중생들이 모두 청정한 공덕이 원만하여서 파괴할 수 없게 되며, 다함이 없어 항상 존중하게 되며, 바르게 생각하고 잊지 아니하며, 결정한 지혜를 얻고 한량없는 지혜를 갖추어,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업이 일체 공덕을 원만하게 장엄하여지이다' 하느니라.
또 생각하기를 '이 선근으로써 일체중생이 모든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며 공양하여 헛되게 지내지 아니하며, 모든 부처님 계신 데서 청정한 신심이 무너지지 않으며, 바른 법을 듣고 의혹을 끊으며, 기억하여 잊지 아니하고 말한 대로 수행하며, 여래에게 공경하는 마음을 내고 몸으로 짓는 일이 청정하여 한량없이 광대한 선근에 편안히 머물며, 빈궁함을 영원히 여의고 일곱 재물이 만족하며, 부처님 계신 데서 항상 따라 배우고 한량없이 기묘한 선근을 성취하여 평등하게 깨달아 온갖 지혜에 머물며, 걸림없는 눈으로 중생을 평등하게 보며, 모든 상호로 몸을 장엄하여 흠이 없으며, 음성이 정묘하여 공덕이 원만하고, 여러 근(根)이 조복되어 열 가지 힘을 성취하며, 선한 마음이 만족하여 의지한 데 없는 데 머무르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즐거움을 얻게 하며, 한량없이 머무름을 얻어 부처님이 머무시는 바에 머물게 하여지이다'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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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향(廻向)하는 원(願): 회향하는 원(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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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이제선근(以諸善根)으로 : 모든 선근으로써
회향지시(廻向之時)에 : 회향할 때에
작시념언(作是念言)호대: 염언이라고 하는 말은 속으로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는 말이다. 혼자서 중얼거리기를
이아선근(以我善根)으로 : 나의 선근으로
원일체취생(願一切趣生)과 : 원컨대 일체 취생과
일체중생(一切衆生)이 : 일체중생이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 아수라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다 포함해서 말할 때를 일체취생이라고 한다. 이런 것이 다 중생에 포함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익숙한 말은 일체중생이다. 원컨대 일체취생과 일체중생이
개득청정(皆得淸淨)하야: 다 청정해서. 청정이라는 말도 참 쉬운 말이면서 뜻이 무궁무진하다.
공덕원만(功德圓滿)하며 : 공덕이 원만하며
불가저괴(不可沮壞)하며: 가히 무너뜨리거나 막을 수도 없으며
무유궁진(無有窮盡)하며 : 다할 수도 없으며
상득존중(常得尊重)하며: 항상 존중함을 얻으며
정념불망(正念不忘)하며 : 바른 생각을 잊지 아니 하며. 정념은 남방불교에서 제일 좋아하고 제일 많이 사용하는 글자다. 정념을 마음챙김이라고도 표현한다.
획결정혜(獲決定慧)하며 : 확실한 지혜, 결정한 지혜를 얻으며
구무량지(具無量智)하야 : 그 한량없는 지혜를 갖추어서
신구의업(身口意業)의 : 신구의업의
일체공덕(一切功德)으로: 일체 공덕으로
원만장엄(圓滿莊嚴)이니라 : 원만하게 장엄하게 하여지이다. 속으로 그렇게 읊조리는 것이다.
이것이 첫째 생각이고 다음으로 두 번째 생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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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작시념(又作是念)호대 : 또 작시념하되
이차선근(以此善根)으로 :이 선근으로
영일체중생(令一切衆生)으로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승사공양일체제불(承事供養一切諸佛)하야 : 일체제불에게 승사공양해서.‘일체제불’이라는 말은 보현행원품에도 많이 나오는 말이고 대승불교 경전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나는 ‘도대체 무슨 부처님이 그렇게 무량아승지 숫자로 있단 말인가?’하고 궁금했었다. 일체제불은 일체 사람과 일체 생명을 표현하는 말이다. 일체사람과 일체 생명 그들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고 공양해서
무공과자(無空過者)하고 : 헛되게 지나치지 않고
어제불소(於諸佛所)에 : 모든 부처님 처소에
정신불괴(淨信不壞)하야 : 철저하게 믿는다.
증엄스님의 삼대 강령이 있다. 그 스님 약력에 들어가면 ‘나는 언제 출생하고 무슨 공부를 했고’하는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고 삼대강령이 나온다. 보천삼무(普天三無)라고 하는데 ‘천하에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를[普天之下 沒有我不愛的人], 천하에 내가 믿지 않는 사람이 없기를[普天之下 沒有我不信任的人]. 천하에 내가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 없기를[普天之下 沒有我不原諒的人]’ 하는 말들이다.
‘천하에 내가 믿지 못할 사람은 없다. 나를 천 번 만 번 속인다 하더라도 나는 끝까지 그 사람을 믿을 것이다’ 라는 말은 참 대단하다. 설사 거짓말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에 내가 믿지 않는 사람이 없다’ 는 말은 여기나온 정신불괴(淨信不壞) 와 같다. 이 말에는 불법에 대한 정신도 포함되지만 역시 사람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정신불괴 앞에 ‘제불소(諸佛所)’라는 말이 나왔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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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정법(聽聞正法)하며 : 정법을 청문하며. 대승경전에 오면 정법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불법이라는 간판 밑에도 사법이 많고 비정법도 많기 때문에 대승불교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정법이라는 말을 꼭 쓴다. 법중에서도 바른 법을 청문하며
단제의혹(斷諸疑惑)하야 : 모든 의혹들을 다 끊어서
억지불망(憶持不忘)하며 : 다 기억해서 잊지 아니하며
여설수행(如說修行)하야 : 설하는 바대로 수행해서
어여래소(於如來所)에 : 여래의 소에서
기공경심(起恭敬心)하며: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신업청정(身業淸淨)하야 : 신업이 청정하야
안주무량광대선근(安住無量廣大善根)하며 : 한량없이 광대한 선근에 안주하며
영리빈궁(永離貧窮)하야 : 영원히 빈궁한 것을 떠나서, 빈궁한 것을 떠나려면 우리가 복을 많이 지어야 한다. 복 짓는 것이 뭔가? 보시하는 것이다.
칠재만족(七財滿足)하며 : 칠재에 만족한다. 일곱가지 법의 재물을 만족케 한다.
이것은 십무진장품 처음에 열 가지 무진장을 이야기 하는 가운데서 처음 나온 일곱 가지와 똑같다. 일곱가지 법의 재물은 믿음(信) 계율[戒] 참(慙) 괴(愧) 많이 듣는 것[聞] 사(捨)와 혜(慧) 이렇게 신계참괴문사혜(信戒慙愧聞捨慧) 일곱가지 법의 재물이다. 그중에 사는 버릴 사(捨)자를 써서 보시를 말한다.
이러한 법으로써 빈궁함을 떠나야 된다는 뜻이다. 물론 생활상 경제적으로 빈궁함을 떠나는 것도 급한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런 문제로 이야기할 마당은 아니다.
그래서 청복이니 탁복이니 하는 말을 한다.
이 일곱 가지 법의 재물이 만족하면 그 사람은 청정한 복, 청복이 넘쳐나는 사람이다.
우리가 이러한 화엄경 공부 하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도 설사 개인적으로 아무리 빈곤하게 살고 또 사회적인 지위가 없어서 누구하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지금 화엄경을 의지하고 화엄경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당하게 ‘나는 화엄행자다’‘잘하든 못하든 나는 화엄경 공부하는 사람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살기에 우리는 아주 깨끗한 복, 그 누구도 갖지 못하는 아주 훌륭하고 청정한 복을 잔뜩 가진 사람이고 누구보다 청복으로써 부자다.
화엄행자는 그런 것에 대한 신념, 믿음, 자부심, 긍지가 있어야 한다.
현수품에 십신(十信), 믿음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
믿는 마음 같이 큰 재산은 없다. 믿음은 불법에 대한 큰 재산이다.
눈에 보이는 재산은 얼마나 되겠는가. 상당히 있다손 치더라도 크게 믿을 것이 못된다.
그런데 불법에 대한 신심의 재산은 누가 빼앗아 갈 수가 없고 태풍이 불어도 바람에 날려갈 일이 없고 폭우가 쳐도 물에 떠내려갈 리가 없고 불에 탈 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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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불소(於諸佛所)에 :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상수수학(常隨修學)하야 : 항상 따라서 배워서
성취무량승묘선근(成就無量勝妙善根)하며 :한량없는 수승하고 미묘한 선근을 성취하며
평등오해(平等悟解)하야 : 평등하게 깨달아 알아서
주일체지(住一切智)하며: 일체 지혜에 머물며. 모든 것을 아는, 평등과 차별을 공히 아는 지혜 인 일체 지혜에 머물며
이무애안(以無碍眼)으로 : 걸림 없는 눈으로
등시중생(等視衆生)하며 : 중생들을 평등하게 본다.
외형만 보면 전부가 차별을 한다. 평등해야 평등하게 본다고도 한다. 그런데 부처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도 다같이 평등한 부분이 또 있다. 대단한 부분이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차별없는 참사람을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짖은 것이다. 차별없는 참사람. 부처나 보살이나 중생이나 누구나 할 것 없이 차별없는 참사람이기 때문에 정말 평등한 것이다.
그런 입장으로 똑같이 중생을 평등하게 봐야 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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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상엄신(衆相嚴身)하야 : 여러 가지 모습으로써 몸을 장엄해서
무유점결(無有玷缺)하며 : 결점이 하나도 없으며
언음정묘(言音淨妙)하야: 말이 아주 청정하고 미묘해서 공덕이 원만하다.
말도 참 잘해야 된다. 특히 남 앞에서 법문한다든지 아주 짧은 스피치를 하더라도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도록 준비하고 다듬어서 해야 된다.
나는 남 훈수 안들기로 스스로 약속을 많이 하고 눈에 거슬리는 잘잘못을 지적하지 않기로 항상 다짐을 하는데 업이 되어서 또 하게 된다.
불교TV를 보면 판서를 할 때 찍찍찍찍 개미 기어가는 것 같이 자기도 못알아보게 쓰는 스님들이 많다. 글씨를 잘 쓰고 못쓰고는 절대 문제가 아니다. 글씨는 성의있게 써야 된다.
한획 한획을 성의를 다해서 쓰면 그것이 잘 쓰는 글씨다.
그런데 전혀 성의 없이 글씨를 쓰는데 그러려면 차라리 안쓰는 게 낫다.
반대로 칭찬도 한다면 논산의 안심정사에 있는 태고종 스님인 법안스님은 글씨가 얼마나 정갈한지 모른다. 불교TV에 나와서 판서하는 사람 중에 글씨를 제일 깨끗하게 잘 쓴다.
그 글씨가 얼마나 정갈한지 글씨만 봐도 신심이 난다.
명필로 쓰라는 뜻은 아니다. 한 글자를 쓰더라도 성의를 담아서 마음을 다해서 쓰라는 것이다. 조계종 스님으로 또 판서를 괜찮게 하는 스님은 통도사의 지안스님이다.
지안스님은 많이는 안쓰는데 글씨가 괜찮고 아주 얌전하게 깨끗하게 잘 쓴다.
법안스님이나 지안스님이니 전부 눈 안(眼)자가 이름 중에 들어가는 스님이다.
스님들이 그렇게 정갈하게 질서정연하게 글씨를 쓰면 보는 사람이 신심이 난다.
말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글씨도 글씨지만 언음이 정묘라고 했다. 말이 정묘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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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원만(功德圓滿)하며 : 공덕이 원만하며. 그런 말하는 것이나 글씨를 쓰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신심을 내고 환희심을 내면 그 사람은 저절로 공덕이 불어나는 것이다.
공덕이 원만하며
제근조복(諸根調伏)하야 : 제근이 조복되고 모든 안이비설신의 육근이 전부 조복되어서
십력성취(十力成就)하며 : 열 가지 힘이 성취하며 열 가지 힘이 참 부처님이나 보살을 표현할 때 제일 많이 등장하는 것이 십력이다.
선심만족(善心滿足)하야 : 선심이 만족해서
무소의주(無所依住)하고 : 의지하는 바가 없고. 십력(十力) 중에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이 있다. 처비처지력은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을 가려서 아는 지혜의 힘인데 십력 중에 제 1조다.
앉을 자리 설자리 잘 가려서 하라는 말과 같다. 그것 하나만 제대로 알아도 인품이 괜찮은 것이다. 사실 이 힘은 남의 일에 훈수 안두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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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체중생(令一切衆生)으로 :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보득불락(普得佛樂)하며 : 부처님의 즐거움을 널리 얻는다.
득무량주(得無量住)하야 : 또 한량없이 머물 곳을 얻으며
주불소주(住佛所住)케하나니라: 부처님이 머무는 곳에 머물게 한다.
거기에 내가 줄을 그었다. 영일체중생으로 보득불락하며 득무량주하야 주불소주케 한다.
아주 중요한 말이다.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이 무엇을 즐기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알아서 중생들도 그것을 좋아하게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머물 곳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취사선택을 잘 하는가?
참 취사선택을 잘한다. 사람도 취사선택 잘하고 어디 모임이 있다면 ‘거기에 누가 나오나 이름 한 번 열거 해보라’ 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이름이 나오면 ‘아 나 바빠서 못나간다’고 해버리고 만다. 가려고 했다가도 ‘그거 보기 싫어서 안나간다’고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장소가 그렇고 사람이 그렇고 때가 그렇다.
부처님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중생도 부처님이 머물 바에 머물게 한다. 부처님이 어디에 머물겠는가? 극락세계에 머물겠는가? 아니다. 부처님은 중생이 어려운 곳에 머물고 재난이 있는 곳에 머물고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 머문다. 그런 곳이 부처님이 머무는 곳이다.
그런데 또 우리는 반대로 아주 근사하게 왕궁을 꾸며서 높은 자리에다가 부처님을 모셔놓는다. 사실 부처님은 그런 데 머무는 분이 아니다.
부처님은 평생 힘든 사람들과 함께 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깨우쳐 주려고 하면서 살았지, 어디 그들과 동떨어진 근사한 데에 살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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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창녕 술정리 동3층석탑 국보34호...저도 찾아 보려구요^^고맙습니다 _()()()_
신라탑을 좋아하시죠^^
@慧明華 예^^ 신라
층탑...감은사지 석탑도 참 편안해서요


혜명화님 ! 수고많으셨습니다._()()()_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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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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