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에 조종이 울리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이른바 10월 유신을 단행하여 또다시 헌정질서를 짓밟았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은 죽고, 박정희가 모든 것을 장악한 겨울공화국이 시작되었다. 박정희는 1972년 말 도저히 헌법이라 부를 수 없는 유신‘헌법’을 제정하였다. 박정희는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중임 제한 없이 뽑도록 하여 종신집권의 길을 열었고, 국회의원 3분의 1을 자신이 임명하여 국회를 거수기로 전락시켰다. 유신헌법의 긴급조치권은 대통령 마음대로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게 만들었다. 긴급조치는 법관의 영장 없이 시민을 체포하여 군법회의에서 멋대로 재판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으니, 사법부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되었다. 박정희는 유신헌법 안에 사법부의 목을 죄는 여러 가지 독소조항을 심어놓았다. 그는 대법원의 위헌법률 심판권을 박탈하여 신설된 헌법위원회에 넘겼는데, 헌법위원회는 유신체제 아래서 물론 기능하지 않았다. 한층 실질적으로 사법부를 옥죈 것은 법관 재임명 문제였다. 3공화국 헌법에서는 대법원장과 대법원판사가 아닌 법관은 대법원판사회의의 의결을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유신체제 아래서는 대통령이 법관의 임명과 보직권을 모두 장악했다. 헌법의 법관 신분보장에 관한 조항은 법관이 징계처분으로 파면되도록 하여 신분보장 자체가 유명무실화되었다. 그런데도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라는 조항은 유신헌법에 그대로 살아남아 몰락한 사법부를 더 처연하게 만들었다.
박정희는 1973년 1월 23일 법무부 연두순시에서 법원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법원이 지금까지 사법권의 독립이라는 이름 아래 국사범에 대하여 집행유예를 선고하고 정치사범에 대하여 재판을 지연시키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을 내린 사례가 있었고, 변호사나 사건 브로커들이 판사와 결탁했다는 것이다. 대법원장 민복기는 유신헌법 아래서 사법부의 위치가 제3공화국 헌법에 비해 크게 추락했다는 비판에 대해 3권분립의 원리가 훼손된 것은 아니라고 강변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통일과 번영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장 집중적이고 가장 효율적인 국가정치권력의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유신헌법의 본질인 이상, 사법권의 존재양식 또한 이에 발맞추어야 함은 당연한 귀결이 아닐 수 없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민복기는 1973년 3월 14일자로 제6대 대법원장에 새로 임명되었다. 제3공화국 헌법에서 대법원장은 연임될 수 없다고 못박혀 있었고, 임기도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인데 유신은 민복기에게 최장수 대법원장이라는 ‘영광’을 선사했다. 그 대가로 대한민국 사법부가 ‘회한과 오욕’의 시절을 겪었다.
사법살인의 전조, ‘법관 살해’
사법파동 당시 계엄령까지 생각했던 박정희는 진짜 계엄령을 선포한 뒤에 사법부를 손보았다. 박정희는 1973년 3월 말 새 헌법에 따라 모든 법관을 새로 임명했다. 법관의 재임명이라기보다는 정권의 입장에서 볼 때 껄끄러운 법관들을 걸러내는 작업이었다. 16명의 대법원 판사 중 절반이 넘는 9명(사광욱, 양회경, 방순원, 나항윤, 손동욱, 김치걸, 홍남표, 유재방, 한봉세)이 “의원면직” 형식으로 물러났는데, 이들은 1971년의 국가배상법 2조 1항의 위헌 판결에서 위헌 의견을 낸 분들이었다. 일반 판사로는 356명이 재임명되고 41명은 재임명을 받지 못했다. 불행하게도 현재 국가정보원에는 이 당시의 법관 재임명에 관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정권이 탈락시킨 법관들이 어떤 사유로 어떤 과정을 거쳐 누구에 의해 선정되었는지 그 전모를 밝혀주는 자료는 존안되어 있지 않지만, 중앙정보부와 검찰이 기초작업을 했음은 분명하다. 국정원에는 ‘판사비위 관계철’이라는 문서가 일부 남아 있다. 현재 존안되어 있는 자료는 관계철 중 7번째 철뿐인데, 사법파동 당시 대법원장을 찾아갔던 단독판사 7인 중 한 사람인 김인중 판사에 관한 내용이다. 이 문서의 작성 일자가 1972년 9월 12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중정은 유신의 단행을 앞두고 잘라버릴 판사들을 미리 표적으로 삼아 그들의 주변을 샅샅이 캐어 비리의 단서를 포착하려 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인중 판사에 대한 ‘비위’라는 것은 뒤에 살펴보겠지만 털어도 먼지가 안 난 것에 불과하다.
최영도 변호사의 증언에 따르면 대법원에서는 “성격이 이상하다든가 돈관계가 지저분하다든가” 하여 재임명에 적절치 않다고 판단한 법관 18명의 명단을 청와대에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청와대는 1973년 3월 23일 재임명 거부자 54명의 명단을 대법원으로 보냈는데 이 명단에는 대법원이 선정한 18명은 거의 빠져 있었다. 이런 명단이 대법원에 내려왔다는 소문에 기자들이 민복기를 찾아가 “이번에 재임명 거부된 사람들의 이유는 뭡니까”라고 물었더니 “국가관이 없는 판사들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실제 해직된 법관이 41명인 것으로 보아 권력과 줄이 닿은 일부 판사들은 구제된 것으로 보인다. 최영도 변호사는 그날 기자가 헐레벌떡 찾아와 “제퍼슨이 누구냐”고 물어 미국독립선언서를 쓴 토머스 제퍼슨 말이냐고 했더니 아니 그 제퍼슨 말고 ‘사법권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 ‘사법권독립선언서’는 아니지만 ‘사법권독립 침해 사례’를 자신이 썼다고 하자 그 기자는 자신이 재임명에서 탈락되었음을 알려주었다고 증언했다.
‘목 잘린’ 사연
당시의 신문자료 등을 면밀히 분석하면 탈락한 법관 41명 중 절반가량인 20여 명의 탈락 사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사법파동 당시 대법원장을 찾아가 법관들의 의사를 전달한 7명의 판사들은 사법파동의 주동자로 지목되었는데, 이미 법원을 떠난 홍성우, 김공식 판사를 제외한 최영도, 목요상, 김인중, 금병훈, 장수길 등 5명의 판사는 모두 재임명에서 탈락했다. 이들은 대개 최영도 판사처럼 “무죄 선고도 많이 했고 구속영장 거부도 많이 했고 그래서 검찰에서 아주 미운털이 박혔”던 사람들이었다.
서울민사지법의 강모 판사는 좀 황당하게 해직되었다. 민사지법은 사법파동 당시 사표제출자를 가나다순으로 발표했는데, 각 신문은 강 판사 외 몇 명으로 보도했다. 민사지법 판사들의 회의가 있던 날 강 판사는 재판이 늦게 끝나 회의에 늦게 참석하여 문가에 앉았다가 회의가 끝나고 제일 먼저 나오다 사진에 많이 찍혔다고 한다. 법관 재임명 당시 중정의 법원 출입 조정관이 교체되었는데, 신임 조정관이 그런 사정은 모르고 민사지법의 주동자로 그를 지목하여 강 판사가 엉뚱하게 탈락했다는 것이다. 강 판사의 장인은 대법원 판사 재임명에서 살아남았지만, 사위가 억울하게 잘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강모 판사는 후에 복직되어 법원장까지 지냈다. 당시에 탈락한 법관 중에는 고위직인 고등법원 부장판사도 3명이 포함되었다. 대구고법의 이존웅 부장과 변중구 부장은 1971년 대구고법이 시작한 법관정풍운동을 주도했었다. 이존웅 부장은 사법파동 당시 대구고법 수석부장으로 극한투쟁을 불사한다는 선언을 채택한 바 있다. 사법파동 당시 서울민사지법의 수석부장판사(고법부장급)였던 박승호 부장도 해직되었다. 신민당사 농성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내린 양헌 부장이 해직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의 배석판사였던 김성기, 장수길, 임대화 판사 등도 덩달아 해직되었다. 임대화 판사는 후에 복직되어 고등법원장 급인 특허법원장을 지냈다. 지방법원 부장판사로는 백종무, 이석조, 유수호, 김동정 부장 등이 해직되었다. 영등포지원장 백종무 판사는 파월장병 사망자에게 국가배상 판결을 하였으며, 1968년 1월 24일에는 하급심에서 국가배상법이 위헌이라고 판시하여 대법원의 위헌 판결을 끌어낸 바 있다. 그는 또 1971년 김대중 후보 자택 폭발물 사건 범인으로 구속된 김 후보의 조카인 15살의 김홍준을 구속적부심에서 석방하기도 했다. 이석조 부장은 1971년 재일동포 형제간첩단 사건에서 5명이나 무죄를 선고했다. 김동정 부장과 유수호 부장은 각각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판결에서 국가에 패소를 안긴 것 때문에 해직되었을 것이다. 유수호 부장은 1971년 총선에서 공화당원의 선거법 위반을 엄히 다스린 바 있다. 김인중 판사와 이건호 판사는 북에 있는 가족과 단순한 안부편지를 주고받은 사람들의 반공법 위반사건에서 무죄 판결을 내린 것이 중정한테 미운털이 박힌 사유였을 것이다. 이건호 판사와 변모 판사는 부친의 신원이 문제가 되었고, 강인애 판사는 야당의 강골인 형 강근호 의원 때문에 해직된 것으로 보인다. 뒤에 민변 부회장을 거쳐 대법관에 오른 이돈희 판사 역시 이때 해직되었다. <오적>과 <다리> 사건의 목요상 판사 역시 당연히 해직되었다. 이때 해직된 판사들은 대개 법관 경력 10년이 안 된 판사들이었는데, 유신정권은 이들을 변호사 개업지를 제한하는 방식(이 문제는 별도로 다루겠다)으로 못살게 굴었다.
한편 유신헌법 발효에 따른 법원조직법 개정으로 법관 정년이 고등법원장은 65살에서 63살로, 그 이하의 법관은 65살에서 60살로 단축됨에 따라 이재옥 광주고등법원장 등 11명이 자동퇴직 대상이 되었다. 이들 중 7명은 재임명 탈락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이들 외에 1~2년 사이에 정년을 맞게 될 법관 2명도 아마도 고령을 이유로 재임명 탈락자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10여 명의 법관은 탈락 사유를 확인하지 못했다. 성공회대 교수·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