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 병
박 가 경
열기를 머금은 어둠 속에서 쏴아 쏟아지는 빗소리와 더위에 지쳐 힘없이 선풍기가 돌아간다. 잠을 뒤척이다가 글을 써야 하는 압박감에 못 이겨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노트북을 켜고 자판에 손을 얹고 무엇을 쓸지 고민하면서 글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처음 한 문장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고 시간만 축내고 있어 미리미리 글을 쓰지 못한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왜 꼭 일이 닥쳐야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걸까?
“네가 나의 가슴속에 숨어들었기 때문에 나는 큰 병이 났다. 그 까닭을 말할 터이니 너는 잘 들어봐라. 내가 고금의 역사를 살피고 경전을 읽어보니, 게으른 사람은 이루어 놓은 것이 없고, 부지런히 일한 사람은 양식이 넉넉하며, 안일한 사람은 이룬 공적이 없고, 근면한 사람은 업적이 큼을 알았다. (중략) 책이 있어도 읽지 않으니 그 뜻이 애매하고, (중략) 머리카락이 헝클어져도 빗질조차 하지 않으며, 길이 어질러져도 쓸지 않고. (중략) 날로 내 행동은 굼떠 가고, 마음은 바보가 되며, 나의 용모는 날로 여위어 가고 말수조차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 모든 나의 허물은 다 네가 내 속에 들어와 멋대로 한 결과이다 어찌해서 다른 사람에게는 가지 않고 나만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구는가?” 조선전기 문인인 성현 선생의 「조용嘲慵」에서 선생이 언급한 큰 병에 걸렸다. 게으름 병이다.
사서 교육원 다닐 때 과제는 항상 제출일 전날에 시작해서 당일 학교 가기 전에 끝냈고, 시험도 당일 칠 시험 과목을 그 전날부터 공부했다. 같이 공부하는 선생님이 이번 과제 제출일이 기말고사와 겹쳐서 걱정스럽게 말씀하셨다.
“쌤, 이번에는 꼭 미리 과제를 해서 내요. 기말고사도 공부해야 하니까.”
그 말에 원래 과제는 마감날에 내는 것이 제맛이라는 헛소리를 하며 제출일 전날까지 미뤘다. 그날은 과제와 시험공부를 같이 한다고 밤을 새웠다.
게으름은 글을 쓸 때도 나타난다. 수필 수업 시간에 글을 제출하고 발표를 해야 하는데, 항상 무엇을 쓸지 고민이다. 특별한 일이나 한순간 느낀 감정, 눈을 떼지 못하는 압도적인 자연 광경을 보면 그때 느끼는 감정이나 경험을 기록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그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기는 쉽지만, 글로 기록을 하는 건 어려워서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마는 경우가 많다. 글은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이 연필 끝에 전해지는 동안에 불필요한 단어를 걸러내고 어울리는 단어의 짝을 짓는다. 그렇게 다듬어서 완성된 한 문장들이 모여 한 문단이 되고, 그 문단들이 모여 하나의 글이 완성된다. 글을 한 번에 수정 없이 완벽하게 쓰면 얼마나 좋을까? 수십 번 이상을 읽고 쓰고 고쳐야 한다. 글을 쓰는데 긴 시간을 투자해야 하지만, 글을 일주일 전에 쓰거나 마감 전날에 쓸 때도 있다.
글을 제출해야 하는 날, 일이 끝나고 귀가하는 길에 휴대폰을 보니 수필 선생님 성함이 부재중에 떠 있었다. 아직 완성하지 못한 글이 머릿속에 맴돌면서 바로 통화 버튼을 누르기가 망설여졌다. 한참을 길가에 서서 고민하다가 전화를 걸었다. 글을 언제 보내줄 수 있느냐는 말에 뇌세포가 빠르게 회전하면서 상황을 모면할 단어를 찾고 있었다. 몇 초도 되지 않는 시간에 결론을 냈다. “글을 좀 더 수정해서 보내드릴게요. 죄송합니다.”라고 말을 했다. 선생님께서 알겠다고 하셨고 통화를 마쳤다. 이마와 등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긴장했던 근육들이 경직되었다 풀리면서 큰 한숨이 나왔다. 바로 집으로 달려가 노트북 앞에 앉았다.
자정이 지났지만, 글이 완성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 글을 기다리고 계실 선생님을 생각하면 잠을 자지 않고 완성해서 보내야 하는데 꿀잠을 잤다. 아침 일찍 부랴부랴 일어나 어제 쓴 글을 다시 읽으니 말도 안 되는 문장들이 뻔뻔하게 쓰여있었다. 내가 아는 어법과 문법에 맞게 최대한 수정했다. 나머지 모자라는 부분은 수필 수업 때 배우자고 생각하고 선생님 메일로 글을 첨부해서 보냈다.
제때 글을 제출하지 않는 나날들이 계속 이어졌다. 선생님께 전화가 오면 가슴에 바늘이 콕콕 찌르듯이 뜨끔거렸다. 이러다가 문학회 회원 자격도 박탈당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지레 겁이 났다. 평소에 글을 미리 쓰려고 노트북 앞에 앉아도 제목 하나 적지 못했다. 게으름 병 말기인 게 분명하다. 게으름 병에 걸린 이유가 뭘까? 정말 게을러서 그럴까?
삶을 너무 근면 성실하게 살아가다 보면 나 자신을 돌아볼 새도 없이 상황에 끌려가는 것 같다. 과제, 시험, 글 쓰는 일 외에도 신경 써야 하는 일들이 너무 많다. 그걸 일일이 신경 쓰고 해결하려고 하면 매일 전쟁 속에서 사는 것이다. 주변에 아름다운 광경을 놓치고 감정은 점점 메말라 가면서 주어진 일 외에는 관심이 없어진다. 게으름 병은 내가 너무 힘들고 쉬고 싶을 때 생기는 것 같다. 때로는 매일 지키는 생활 규칙 중 몇 가지를 빼먹고 게으름을 피워도 그 시간이 나를 치유할 수 있다면 괜찮은 선택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