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간 정도가 흘렀다. 그의 눈으로 멀리 현자의 관이 보이기 시작했다. 쿡.. 그래. 현자의 관이지. 그 늙은이가 한 때 그렇게 불렸으니.
겉보기엔 유적과도 같은 모습. 신전도 연상시키는 듯한 건물 앞으로 그는 사뿐히 내려앉았다.
급할건 없지.. 하는 생각으로 그는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빛나는 야명주가 붉게 빛나 어두운 복도를 비추고 있었다. 쿡! 악취미란 생각을 하면서 그는 슬며시 웃었다. 물론 자신의 종족인 뱀파이어는 말할것도 없고, 거의 대부분의 마족들이 피를 좋아하긴 한다. 그 늙은 인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이런 빛을 사용했겠지만.. 하지만 우리들은 피흘림을 보는것과 그것에 대한 공포심을 즐기는 것이지 붉은색 자체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뭐, 그것도 개인마다 다 다르겠지만... 자신부터도 피를 좋아하지만 그저 식용으로써 그리고 피에 담겨있는 생체에너지를 얻을 수있는 수단이었기에 좋아하는 것 뿐이었다.
"하긴 뭐, 이것 때문에 손해보는것도 아니니..."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는 생각을 다른것으로 바꿨다.
갑자기 무엇 때문에 그 늙은이가 날 소환한 것일까... 생각해보았지만 특별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물론 또 다른 임무가 주어졌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생각하기로는 크린족을 멸망시키는 일과 녹안(綠眼)의 엘프를 찾는것, 그리고 대륙으로 나가기 위한 병력을 확보하는것.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그러니 내 성격을 잘 알고있는 그 늙은이가 하찮은 일 때문에 불렀을리는 없겠고... 예상도 가지 않는것을 생각하려니 골치가 아파온다. 뭐, 일단 가보면 알겠지. 정말로 하찮은 일에 날 부른거라면 정말로 가만두지 않겠다 늙은이...
그렇게 다짐하며 그는 그 늙은이가 있을 방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영락없는 인간 마법사들의 방이 보였다. 건너편에 있는 휘장을 제외하면 정말 쓰레기장이나 다름없었다. 천장은 온통 그을림에 새카맸고, 정체를 알수없는 물건들이 방안 이리저리로 굴러다녔다. 한쪽 구석에 있는 아궁이에서는 정체불명의 액체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는데 보기만해도 끈적한 거품이 이는 것이 마치 용암이 썩은것 같아서 그는 인상을 찌뿌렸다. 문득 차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러오는 것을 느낀 그는 급히 손으로 코를 막고 인상을 더욱 찌그러뜨려야 했다. 정말 이런곳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던 그는 온갖 오만상을 다 찡그린채 성큼성큼 걸어서 방 반대쪽의 휘장을 확 걷어챘다. 과연 그곳엔 그가 찾던 늙은이가 한쪽 구석에 박혀 이것저것 책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서는 소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에게는 그런것에 별로 관심이 없던 관계로 싹 무시하고 그 인간에게로 다가가 어깨에 턱하고 손을 얹었다.
"응? 어.. 왔나?"
한창 소환진에 대해 연구하고 있던 그 늙은 인간은 뱀파이어가 찾아온것을 보고는 하던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 뱀파이어가 험악하게 인상을 쓴채 코를 틀어막고 있는것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역시 여기서는 대화가 안되겠군. 자리를 옮기세."
감히 내 모습을 보고 웃다니!!
화가 치밀어 올라 멱살이라도 잡아채버리고 싶었지만 코를 감싸쥔 손조차 뚫어버리고 침투해오는 냄새는 정말 그를 미치고 싶게 만들었다. 입을 열면 구토라도 나올것 같은 기분에 그는 즉시 몸을 돌려 밖으로 튀어나와서 문을 쾅 소리나게 닫아버렸다.
바깥 공기가 이렇게 신선할 줄이야... 냄새의 휴우증인지 머리가 다 아파왔다. 저놈의 늙탱이는 저런곳에서 잘도 하루종일 있는군!
"응? 자네 왜 그런눈으로...?"
금세 로브를 갈아입고 나온 그 노인은 입은 떡 벌리고 '당신 대단해!!' 라는 뜻이 담긴 눈으로 자신을 보고있는 뱀파이어를 보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지독했나?
"크... 살다살다 그런 냄새는 난생 처음이군. 자네 인간맞나?"
"흠... 확실히 보통 인간은 오래 있지 못하겠지만.. 자네조차도 진저리치게 만들 정도인줄은 몰랐군."
"....도대체 또 무슨 연구를 하고 있길래 저따위 냄새가 나는건가?"
"아니 특별히 어떤 실험 때문에 냄새가 난다기 보단 말일세. 그게.. 전에 미노타우르스를 해부해보고나서 치운다는걸 깜박해버리는 바람에 말이야... 하하하."
"....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마법사면서 해부 따위는 도대체 왜 해봤다는 건가! 정말 이 영감탱이처럼 엽기적인 인간이 또 있을까. 도저히 이해못할 인간이란 생각을 하며 그는 낮게 혀를 찼다. 그러다가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떠올리고는 노인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왜 또 부른건가? 특별히 일이 또 있지는 않을텐데?"
"아아. 다른일 때문에 부른거라네."
"흥! 도대체 뭐가 그리 급해서 이 몸을 오라가라 한건지 정말로 궁금하군!"
"하하. 그것 때문에 화가 난거라면 좀 참아주게나. 일단 여기서 이러고 있는것도 못하니 일단 다른 방으로 옮기지."
노인이 데려간 곳은 작은 서재였다. 적색이 아닌 보통의 등불로 비추고 있는 이 방은 의외로 깨끗했다. 벽쪽에 좀 낡아보이는 책들이 잔뜩 책장에 꽂혀있는 것을 제외하면 아까와 같은 사람이 쓰는 공간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다. 노인은 그를 앉게 한 후 자신도 맞은편에 앉은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첫마디는 뱀파이어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네 만들었다.
"자네가 좀 찾아 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있네."
"뭐라고!? 겨우 그런것 때문에 날 불렀단 말인가?!"
순간 화가 치밀어올라 그대로 노인을 내려 쳐버릴뻔 했지만 그는 간신히 몸을 추스렸다. 그 대신 노인을 향해 낮게 으르렁 거렸다.
"그래.. 뭐하는 놈 하나 찾으려고 나까지 불러냈는지 참 궁금하구만? 옛날에 돈 떼먹고 도망간 놈이라도 있으셨나?"
비아냥 거리는 어조였지만 노인은 침착하게 말했다.
"일단 앉게. 다 설명해줄테니... 이건 상당히 중요한 문제라네. 혹시 자네 천년 전에 왜 카론님께서 가드... 아니, 아무튼 마계로 강제 송환되셨었는지 그 이유를 아는가?"
"이유?"
자리에 앉으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그 점은 의문점이다. 가드니스가 비록 대단한 놈이었다고는 해도 마왕님에 비할바는 아니다. 비록 인간계였다고는 해도 그 힘의 차이란 거의 천지 차이였을 터.. 천계의 나부랭이들이 무언가를 내려주었다고 해도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마왕님은 그놈에게 패했고, 마계로 강제 송환되어야 했다.
그렇게 송환되어 버리고 난 후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으면서 분노에 미쳐 부하들까지도 마구 죽여버리던 그 때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했다.
오싹!
그때의 일을 생각하며 그는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그 당시에는 차라리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여길 정도로 공포스러웠고, 지금까지도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에게는 그때의 일이 아직도 공포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때, 어째서 그분이 그렇게 되었었는지는 아무도 알지못했다. 당시에 같이 인간계로 나갔던 마족들은 전부 죽어버린 데다가 마왕 본인도 입을 열지 않았으니 당연하기도 했지만...
"잘 모르겠군. 그 이유를 알고있는 건가?"
"그런가. 나도 우연히 알게 되었지. 사실 가드니스의 힘 정도론 당연히 어림도 없는 일이었지만.. 두가지의 변수가 있었다고 하지."
"변수?"
"그 중 한가지가 바로 주신인 하이룬의 권능을 가진 '하이룬의 눈물' 이라고 하는 성물이네."
"'하이룬의 눈물'이라고? 천계가 내려준 물건인 거로군. 하지만 얼마나 대단하길래 마왕님이 패배할 정도란 말이지?"
"...아쉽게도 나도 끝내 그것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네. 하지만 우리에게 위협적인 물건이 될것은 분명할 터! 우리가 먼저 손에 넣는다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겠지."
"만약의 사태라.... 혹시.... 초록눈의 엘프인가?"
"역시 바로 맞추는군! 맞았네. 지금으로서 가장 주의해야 할 놈들이지. 그놈들은 바로 가드니스의 자손들이야!"
"그 놈의 자손들이란 말이로군. 그렇다면 자네는 그것들이 우리에 대해서 알아차렸을때 그 '하이룬의 눈물'인가 뭔가 하는것을 가지고 덤벼들 경우를 우려하고 있는 것이로군."
"반은 맞고 반은 틀렸네."
"뭐가 틀렸다는 거지?"
"내가 말했지. '우리가 먼저 손에 넣는다면' 이라고 말이야."
"음? 그렇다면 현재 그 '하이룬의 눈물'이라는, 이름 말하다 혀라도 깨물것 같은 그것을 그것들이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건가?"
"허허허. 맞네. 당시에 그는 싸움이 끝난 직후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고 하지. 그 자손들조차 그를 보지못했냐며 찾아다녔다고 하니, 당연한 거겠지."
"흐음... 그렇다면... 어딘가에 숨겨놓았을 가능성이...?"
"바로 그것 때문에 자네를 부른것일세."
"응? 사람을 찾으라고 하지 않았나?"
"지금부터 말해줌세. 그걸 말하려면 먼저 두번째 변수를 말해줘야 겠지. 그 변수란 두명의 인간 배신자를 말하네."
"배...신자? 지금 배신자라고 했나!?"
"그렇네. 카론님을 배신하고 가드니스를 도왔던 두명의 배신자! 그때까지 도왔던 마족들을 간교한 흉계로 제거하고 가드니스를 도와 감히 카론님과 맞섰던 놈들!!"
빠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작은 방안에 메아리 쳤다. 배신자.. 배신자란 말이지? 감히!!
짜내는 듯한 음성이 뱀파이어의 입에서 흘렀다.
"....그것들의 이름은?"
"아테온과 피블론! 그리고... 후세를 위한답시고 '하이룬의 눈물'이라는 것을 어딘가에 숨겨놓았다면 가장 깊숙하게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는 놈들이지."
"그렇군. 그 두놈을 찾으면 되는건가? 하지만 천년전의 인간이다. 여태 살아있을거란 생각은 안드는군."
"그렇다면 그 후손이 남아있을지도 모르지. 무언가 남긴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야. 어쨌든 지금으로서 가장 신빙성이 있지 않은가. 가드니스 놈이 만약의 사태를 예견할 수 있었다면 아무런 단서도 남기지 않은채 자손들로 그것을 찾게 할 수는 없을테니."
"큭. 그렇긴 하군. 뭐, 전혀 빗나간 생각이라 해도 알아볼만한 가치는 있겠어."
"그럼 부탁함세. 적격자가 자네밖에는 없어서 말일세. 만약 그들이 살아있다면 맞설 수 있는 녀석이 내겐 없어."
"알았다. 너도 알고 있는것은 많이 없을테니 나 혼자 찾아봐야 겠군."
"부탁함세."
"걱정마라. 알아서 해볼테니. 그럼 이만 나가보지. 시간이 별로 많지 않으니."
"그러게."
그 노인을 뒤로한 채, 뱀파이어는 문밖을 나섰다.
배신자라... 큭! 배신자란 말이지? 설마 그런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는데.. 큭큭큭.. 배신자라... 재밌겠군. 살아있다면 정말 좋겠어. 나 스스로 그분의 복수를 대신 해드릴 수 있을테니 말이야... 자아.. 그럼 움직여 보기로 할까? 그동안 은밀하게 움직여 왔으니 아직은 알아챘을리는 없지만 만약이라는게 있으니.. 흠. 일단 그 꼬맹이는 뒤로 하기로 하지. 급한일도 아니고 그 꼬맹이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있을리가 없으니... 응?
".....!?"
그 때 불쾌한 감각이 그의 감각을 흔들었다. 이건...?!
"젠장! 정말 어지간히 신경을 건드리는 꼬맹이로군."
멍청한 녀석. 위치만 찾고나서 알려오라고 했더니.. 또 죽었군. 하는 수 없군. 녀석이 어떻게 쉐이드를 발견하고 죽였는지는 모르겠다만... 이번엔 힘 좀 써봐야 겠군.
그는 인상을 쓰며 허공을 향해 몇가지 손짓을 했다. 쉐이드를 소환할 때와 다소 비슷한 방식이었지만 좀 더 복잡했고 시간이 오래걸렸다. 잠시 후 그의 손짓이 멈추자 그 자리에는 어둠속에도 확연하게 보이는 마물이 둥둥 떠있었다. 쉐이드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조금 더 크기가 컸고, 훨씬 더 사악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나이트 쉐이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지? 가라!"
-우워어어어.
그의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괴음을 내지른 나이트 쉐이드는 손살같이 밤하늘을 가로 질러갔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뱀파이어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애송이.. 그것도 없앨 수 있을지 궁금하군. 쿡쿡쿡. 자아 그럼 볼일을 보러 가보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