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역에서 -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 지
그리웠던 순간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시집 『사평역에서』 (창작과비평, 1983)
이 시는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시다.
나랏일 한답시고 분주한 분들과 큰돈을 왕창 벌려고 불철주야 고심하는 분들은 모르겠으나 수능시험에도 출제되었고 신춘문예 사상 가장 빼어난 서정시라고 평가받을 만큼 유명한 이 시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시를 모티브로 하여 시인의 친구인 소설가 임철우가 비슷한 제목의 단편을 쓴 바 있는데, 소설에서 1인칭의 화자가 수배 중인 운동권 대학생이었음을 참고한다면 이 시를 읽는 데 얼마간 도움이 되겠으나 꼭 그것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한때 취재한답시고 무턱대고 광주로 내려가서 ‘사평역’을 찾아 헤맨 신문사 문화부 기자들도 있었으나, 사평역은 시인의 고향 부근 간이역을 모델로 빌리긴 했어도 순전히 가상의 공간이다.
역사의 바깥에 내려 쌓이는 눈, 막차를 기다리는 삶에 지친 사람들, 그 사람들 가운데 지펴진 난로, 이와 같은 극적 공간에서 시인은 시적 경구를 생산해 내는데 ‘산다는 것은 때론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이란 아름다운 구절로 귀결된다.
조용히 지난 일을 떠올리며 난로에 톱밥을 던져주는 ‘나는’ 혼자 여행 중이며, 그 여행은 쓸쓸하고 우울하다.
이 장면은 이 시가 이룩한 서정적 성취의 중심이며, 붉게 타오르는 불씨를 삶의 핵심적 시간, 즉 청춘으로 읽는다.
그 위에 던져져 작고 아름다운 불꽃으로 연소하는 톱밥은 시간 위에 꽃피는 아름다운 순간들이다.
침묵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삶의 진정한 실체를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이 시는 우리에게 혼자만의 여행이 주는 응시의 시간에 빠져들도록 한다.
유홍준의 ’문화유산답사기’가 구체적 공간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 여행의 유혹을 느끼게 한다면, 이 시는 설정되지 않은 공간으로 대책 없이 떠나는 영혼의 여행을 부추긴다.
그 여행은 두꺼운 겉옷을 입고 찬바람과 맞서는 이즈음이 어쩌면 적기일지 모르겠다.
철이 지나도 한참 지난 바다, 사람 다 떠나버린 폐광, 그 언저리 나무의자 삐꺽거리는 국밥집, 곱든 단풍 다 지고 풍경만 고즈넉이 흔들리는 산사, 눈 덮인 경사, 새벽 인력시장, 비린내 나는 포구. 그리고 어린왕자가 잠시 다녀갔다던 어느 언덕 봉우리, 소금별이 반짝이는 곳.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