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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ethyst : 대영박물관 - 중국의 동북공정 입김 서린 한국편 | |
2006-05-16 | |
대영박물관의 한국어판 책자에 나온 설명을 올려보겠습니다. 대부분 정확하지만 큰 문제점은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를 따른 흔적이 여실히 보인다는 것입니다. 중국내를 넘어 해외까지 벌써 영향을 미치다니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영박물관은 일전에 한국을 중국의 속국이라고 표현해서 물의를 빚은 바 있습니다.
1) ‘고조선’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음, 단순 청동기 시대로 분류. 2) 한반도 북부가 중국 한족 거주지라고 쓰고 있습니다. (부여, 고구려, 동예, 옥저가 중국 역사가 되는 순간입니다) 3) 발해가 한마디도 나오지 않으며, 연표에도 빠져있습니다. (타국가 설명을 봤을때 역사는 연대순으로 모두 기술) 4) 고구려 벽화가 중국 한나라의 영향을 받았다? -> 이건 정말 어불성설이죠-_- 5) 중국의 모든 것을 전부 모방한 듯한 신라 묘사 -_- 6) 연대표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문제가 된 것과 같은 청동기시대-철기시대(원삼국)-삼국시대로 가고 있습니다.
일본의 연표는 조몬시대(BC 12,500)-야요이시대로 표시되어 있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자료를 보낸것이겠죠? 고조선이 사라진다는건 한민족의 뿌리가 송두리째 없어지는 것입니다. 단군 조선의 존재를 증명하는 많은 자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화라고 치부하고 연구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은 자세입니다. 열번 양보하여 단군 조선은 표시하지 않더라도, ‘고조선’은 명기해야 하고, 발해를 넣어야하며, 나머지 오류들도 수정되어야 합니다.
길지만 끝까지 읽어주시고 많이 퍼트려서 우리 역사를 바로 알리는데 도움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역사에 전문이신 분들 자세히 보시고 왜곡된 부분을 바로 잡아주셨으면 합니다. ------------------------------------------------------------------------------------------- 한반도에서는 이미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살기 시작했으며, 신석기 시대에는 빗살 무늬 토기를 생산했다. 한반도 청동기 시대에는 거대한 석관과 고인돌이 축조되었고 벼농사가 도입되었따. 이 시대에 생산된 청동 유물들은 중국의 유물과는 많이 다르며, 그 중에는 샤머니즘 의식에 사용된 도구들이 포함되어 있다. 기원전 400년 경에는 철기가 생산되었으며, 다수의 철제 무기와 갑옷이 한반도의 남쪽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삼한에 대한 설명으로 봄) 철기 생산에 필요한 높은 온도는 그 시기에 시작도니 단단한 토기 생산과 관계가 있다. 그 시대에 한반도 북부에는 중국 한족의 거주지가 여러 곳 생겨났다.(부여,고구려,옥저,동예가 중국 속으로 사라졌다) 초기의 한국은 네 나라로 나뉘어 있었으나 삼국시대(기원전 57-서기668년)동안 한반도의 남부 중앙 지역에 있던 가야는 남동부의 신라에 합병되었다. 북부에는 고구려가 남서부에는 백제가 자리잡고 있었다. 고구려의 고분은 계단으로 된 피라미드 형태를 하고 있으며, 고분 내에는 중국 한나라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벽화로 장식된 묘실들이 있다. 백제는 바다를 통해 중국 남부와 접촉했으며, 백제의 예술가와 공예가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불교 미술 발달에 기여했다. (백제의 섬세하고 화려한 문화적 특징보다 중국의 남부와 접촉했다는 사실이 중요할까요? 백제에대한 언급은 이 문장 딱 하나인데. 또 단지 일본의 불교 미술만이 아니라 아스카/하쿠오 문화 형성에 기여했다고 확실히 언급되면 좋겠네요.) 가야와 신라의 극적인 장례용 경질 토기들은 샤머니즘식의 장례식에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 고분에서는 화려한 금관과 허리띠, 신발,귀걸이,그릇 등이 발굴되었다. 이 유물들에 새겨진 장식은 중앙 아시아의 스키타이, 시베리아 초원에서 기원된 것으로 보인다. 서기 668년에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중국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의 도시 설계를 기초로 수도인 경주를 호화롭게 세웠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경주가 장안의 카피라는 말로밖에 안들리네요. 얼마나 참고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기술은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네요) 신라 왕조는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중국 관료제를 도입하였으며, 많은 신라인들이 중국이나 더 먼지역으로 여행했다. (인도나 서역으로 여행했다고 쓰면 중국은 이미 포함될텐데요) 통일 신라의 엄격한 신분사회는 고려왕조(918-1392)로 이어졌다. ▶ 설명만 읽으면 마치 중국의 아류 국가같습니다. 중국 없으면 아무것도 못했을듯한 인상의 우리 고대사. ‘중국’이란 단어 : 8번 정작 주인공인 ‘한반도’ : 4번 -_-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력이 커지고 사찰들은 부유해졌다. 이 시대에는 불교를 찬미하는 그림, 채색사본, 조각, 청자 등과 같은 훌륭한 예술품이 많이 생산되었다. 불경의 제작은 공덕을 쌓는 행위로 간주되었으며, 11세기에는 몽골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방어하기 위한 기원 하에 불경 전권이 8만권이 넘는 수공 복판으로 인쇄되었다. 불경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인쇄하고자 하는 열망은 13세기 초반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발명하는 결과를 낳았다. 조선 왕조는 (1392-1910) 불교를 탄압하고 엄격한 유교를 숭상했다. 15세기에는 과학과 기술, 문화가 융성했으나, 16세기 말에 여러 차례에 걸친 일본의 침략으로 문화유산들이 많이 파괴되었다. 도공들이 많이 잡혀가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회복하자마자, 조선 왕조는 다시 중국 청왕조를 세운 만주인들의 침략을 받았다. 그러나 18세기에는 문화적 원숙기를 맞았고, 이 시대의 특성은 당시의 예술에 잘 반영되어있다. ----------------------------------------------------------------------------------------------------- 참고로 고구려 벽화는 한나라와는 무관한 환국-배달국-고조선으로 이어지는 동이족의 발자취이며 우수성에서 한나라의 것과 비교 불가합니다.
고구려 벽화 : 고분벽화는 주로 돌에 그림을 그리는 것인데, 돌을 이용한 무덤의 분포는 산동성, 요동성, 만주와 한반도 등 주로 과거 동이족이 거주했던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 남북조시대 남조의 한족의 무덤에는 고분벽화가 없고, 북조의 것들은 벽돌에 그려진 것이 있을 뿐이다. 또한 요동지방 석실묘의 고분벽화들은 선비족의 것들이 많은데, 선비족은 한족과 다른 동방문화권에서 자라 온 종족이다. 더불어 고구려에서 고분벽화가 가장 발달하여 꽃피워졌다는 사실은 4~7세기 동아시아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크게 발달한 반면, 중국에서는 요동지방에 삼도호묘(三道壕墓)를 비롯한 10여 기의 무덤이 있었을 뿐, 고분벽화가 크게 발전하지 못한다. 북위시대에는 낙양(洛陽)지역에 6세기 초의 무덤이 몇 점 있을 뿐이며, 북위가 멸망한 후 동쪽에 세워진 동위와 북제의 경우는 대략 15기 정도의 무덤이 발견되었으나, 서쪽에 세워진 서위와 북주에는 겨우 4기 정도만이 있다. 남북조의 무덤들은 소재면에서 고구려 고분벽화와 유사한 점이 많기는 하지만, 주로 무덤주인의 연회장면이나, 행렬도 등의 그림이 주가 된다. 청룡과 백호, 신인(神人), 기이한 동물 등의 그림이 있으나,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보는 짜임새와 치밀한 묘사, 생동감, 색채의 화려함 등은 보이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고구려 고분벽화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은 수준이다.
사진설명 1. 정병(쿤디카), 고려 12세기. 백토로 상감하고 유약 처리한 청자. 이러한 정병은 불교 의식에 사용되었다. 병 모양은 인도에서 기원했으며, 반투명의 청자 유약을 만드는 기법은 중국에서 발명되었으나, 도자기의 상감 기술은 한국에서 개발된 것이다. (고려 특유의 기법과 색을 자랑하는 상감청자를 이렇게 들으니 참으로 초라하군요. 일본 도자기 설명과는 대조적입니다.) [참고] 일본 도자기 사진설명: 철쭉 문양 도자기 접시. 이 인상적인 큰 접시는 아리타에서 카키에몬 양식을 창시한 사카이다 키자에몬의 14대 전수자인 인간문화재 사카이다 카키에몬이 만들어 기증한 것이다. 사카이다 키자에몬은 특유한 적황색(일본어로 카키)을 만들어냈는데, 이 감색(카키)이 양식의 이름이 되었다. 카키에몬 양식의 도자기는 17-18세기에 유럽으로 많이 수출되었다. 2. 유학자의 초상화, 조선 18-19세기. 종이에 먹과 채색을 사용. 흰색 한복을 입고 있으며 말총으로 짠 건을 쓰고 있다. 얼굴의 세부 묘사는 북경을 다녀온 한국의 화가 및 사절들이 중국 황실에 머물던 예수회 교단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이 그림말고 세계 최고(古) 목판 인쇄본이나 거북선이 그려진 책자 혹은 12지신도를 넣었으면 좋았을텐데요. 아무런 임팩트를 주지 않는 초상화) 3. 아미타경의 채색 사본, 고려 1341년. 청색 종이에 금은 채색. 부처의 설법은 ‘수트라’ 설법의 주석 및 해설서는 ‘아비다르마’,수행의 계율은 ‘비나야’로 알려져 있으며, 이들은 불교 경전의 ‘3장’을 이룬다. 윗 그림은 이 아미타경 사본에 있는 유일한 그림으로, 부처의 설법 장면을 묘사한다. 4. 말모양 청동 띠고리. 초기 철기시대, 기원전 1-2세기. 동물 모양의 띠고리는 사회적 신분의 상징이었다고 추측된다. 5. 금귀걸이. 삼국시대, 5-7세기. 신라 왕릉에서 발굴된 것으로 추측되며, 서양에서는 희귀한 소장품이다.
↓ 예전에 어떤 분이 올린 연표
비교를 위하여 꽤나 대단하게 묘사되어 있는 일본 부분을 다음 글에 올려보겠습니다.-_- 일본의 경우 대륙의 영향을 받았으나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특유의 문화라는 것이 강조되어 있고 일본 역사뿐만 아니라 문화 전반이 모두 소개되어있습니다. 이 설명만 읽으면 정말 독특하고 풍부한 문화 국가같습니다.-_-
아시겠지만 영국박물관은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각국의 사람들이 매일 찾고 있는 곳입니다. 평일 하루 평균 관람객이 1만 5천명이라고 합니다. 이런 곳의 한국관, 관련 책자는 한국의 대외 이미지 형성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