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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여행10 - 도쿄대학을 찾아 야스다강당에서 옛일을 회상하고 아까몽을 구경하다!
2022년 11월 7일 “도쿄 프리깃푸” 를 사서 야마노테센(山手線) 전철로 구 후루카와 정원과 리쿠기엔
六義園(육의원) 을 구경하고는 좀 전에 내린 고마고에에키 駒込駅 가 아닌 혼고마고에(本駒込 )
역으로 들어가 고이시카와 고라쿠엔 小石川後楽園 을 보기 위해 야마노테센 (山手線) 전철을 탑니다.
전철이 도다이마에(동대전) 에 서기에 계획에는 없었지만 도쿄를 서너번 오고도 아직 도쿄대학교를 보지
못했으니 즉흥적으로 그만 역에서 내려서 도쿄대학 으로 들어가니 한 눈에 보아도 건물들이 중후한
느낌이 드는데 지나가는 여학생에게 아카몽 을 물으니 계단을 올라가라고 하는데 그러고도 한참 걷습니다.
몇년전에 도쿄에서 치도리가후치 (千鳥ヶ淵公園) 공원을 보려고 갔다가 쏟아져 나오는 도쿄대학생들 과 마주
쳤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치도리가후치에 자리한 부도칸(武道館 무도관) 에서 거행되는 입학식 은
한꺼번에 다 하지 못하고 나누어서 하니.... 나오는 학생들과 들어가는 학생들에 학부형들이 섞인 모양 입니다.
부도칸 武道館(무도관)은 이름 처럼, 일본은 무사들이 바쿠후 (幕府 막부) 를 세워 오랫동안
집권했던 나라이니..... 원래는 검도나 유도 및 가라데 같은 운동 경기를 하던 곳 입니다.
세상이 변하니 부도칸 武道館(무도관)도 무도 일변도에서 벗어나 서예 대회 등을 개최하다가
극장으로 변해 유명한 공연 이 열리기도 했으니..... 일찍이 비틀즈 가 이 무대에 섰고
에릭 클랩톤등 전 세계 팝 아티스트들이 무대에 올랐는데 나오키상 수상자 아사이 료 가
그려낸 화려한 무대 뒤 아이돌의 리얼한 이야기 “꿈의 무대, 부도칸” 이란 책의 무대 입니다.
2007년 동방신기 이래 2012년 이승기와 2013년 티아라 그리고 GOT7 이 2017년 일본 전국
순회시 “MEET ME" 라는 이름으로 부도칸에서 공연 을 가지기도 했으며, 2018년에는
2PM 준호와 그후 슈퍼주니어 D&E 등 한국 가수들 이 많이 섰는데.... 1980년 21살 의
가수 야마구치 모모에 가 여기 부도칸에서 은퇴 공연 을 한 것이 최대의 공연 이라고 합니다.
한국계로 14살에 데뷔 해 21살 최절정기 를 구가하던 여가수 야마구치 모모에가 갑자기 은퇴
한다는 뉴스는 일본 열도를 발칵 뒤집어 놓았는데.... 사람들로 인산인해 를 이루었고
"은퇴 공연은 눈물 바다" 였으니...... 함께 출연한 동료 가수들도 공연 내내 눈물을
닦았다니, 그만큼 그녀의 은퇴는 당시 일본 대중 문화계에 엄청난 상실감 을 안겨줬습니다.
야마구치 모모에 (山口百恵) 는 1974년 니시카와 가츠미 감독이 가와바타 야스나리
의 소설 “이즈의 무희 (伊豆の踊子)” 를 영화로 만들때 여주인공 가오루
역을 열연하여 일약 한 스타 반열에 까지 올랐으며...... 훗날 남편이
된 미우라 도모카즈와는 영화에서 주연 을 맡으면서 교제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은퇴 공연에서는 21살 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처연한 눈빛 은 산전수전 을 다 겪어낸
초월자의 눈빛 이었으니 '안녕의 저편' (さよならの向う側) 이라는 노래를 불렀으며
노래를 끝맺으며....... "제멋대로인 절 용서하세요. 행복하겠습니다" 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무대를 영영 떠났는데 미우라 도모카즈와 결혼 생활에 충실 하기 위해서 였다나요?
14살 나이에 연예인 발굴 프로그램에 입상하면서 연예계에 데뷔한 그녀는 우수어린 한 을
담은 허스키한 목소리, 나쁜 소년 같은 중성적 매력, 화려하면서도 슬픈 외모 에
사람들은 매료됐는데, 당시 일본 대중문화 유입을 금지한 한국 에서는 잘 몰랐지만.....
중국이나 대만, 홍콩 에서 인기는 대단했으니 매염방이나 장국영은 그녀의 광팬 이었습니다.
허연 씨는 송풍수월 에서 일본 열도를 뒤흔든 1세대 대형 가수 미소라 히바리 가 그랬듯
모모에도 역시 한국계 라고 말했는데..... 찢어지게 가난한 집 에서 자랐으니 가정에
불성실한 한국계 아버지와 병든 어머니, 그리고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소녀가장
이었으니 처연한 눈빛 이며 스포트라이트를 내던지고 가정을 꾸리는데 집착한 이유라네요?
조선시대 말 부터 구한국말과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해방후 가난했던 질곡의 시절 을 살아
오면서 소설에 보면 “한국인 아버지 = 무능하고 불성실한 가장, 어머니 함티 장사”
이미지는 도식화 되어 있는데, 허연씨는 비로소 그녀의 처연한 눈빛 이 이해가
됐으니 그녀가 그렇게 빨리 스포트라이트를 내던지고 가정을 꾸리는데 집착한 이유 라....
"시모다의 바닷가를 또 만날 날은 올까 / 귀여운 무희 가볍게 흔드는 손가락에 /
흘리는 눈물도 붉은색" 이라는 대목은 야마구치 모모에의 목소리 가
아닌 다른 음색으로는 소화할 수 없을 듯한.... 어떤 절대미 가 느껴진다 고 합니다.
일본 고교생 중에 0.2% 만이 합격 한다는 도쿄대학 입시에서 2015년 기준으로 카이세이
(開成 개성)고 가 무려 34년 연속 최다 진학자 를 기록했으니 185명 이고.....
츠쿠바대 부속고가 107명, 나다(灘)고 92명의 순인데, 개성고는 재학생 중에 46%
합격율 이니... 중고교가 연결된 개성중학교 입시는 도쿄대 입시보다 살벌 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 카이세이 (開成 개성) 고등학교는 우리나라와 인연 이 깊은 학교 이니....
1895년 부산항 경무관 박기종 은 10여명 유지를 모아 일본의 개성학교 를 모델
삼아 서양의 근대 학문 을 가르치는 학교를 부산에 세웠으니 훗날 부산상고 로
이름을 변경하게 되는 開成(개성) 학교 로 한강 이남에서는 최초의 근대 학교 입니다.
1895년 당시 우리나라 조선은 유학을 받들고 쇄국정책 으로 일관했으니 수십년전 부터
유럽과 미국에 유학생들을 보내 서양문명 을 받아들인 일본 과는 달리 서구 학문을
가르칠 선생도 전혀 없고 교재도 없는지라...... 일본 도쿄의 카이세이(開成 개성)
고교를 모방 했으니 교육 과정과 교과서등 일체를 도쿄 카이세이고 에서 가져왔습니다.
게다가 교장을 비롯해 선생 중에 조선인은 습자(한문) 선생 단 한명 에 불과하고 모두
일본인이니 학교 수업도 당연히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 로 했으며..... 심지어 학교
이름도 똑 같은 개성 (開成) 학교 라고 했는데, 일제 강점기에 부산상고 로 바꾸니
고 노무현 대통령의 모교 인데... 지금은 다시 개성고((開成高) 로 교명을 바꾸었습니다.
경상남도 진영에서 태어난 노무현 은 찢어지게 가난한지라 진영 중학교 입학금을 낼수
없어 합격이 취소될 위기에 처하자... 어머니가 중학교 교감 선생님을 찾아가서는
가을 단감 수확때 까지 외상 으로 해 달라고 사정하자 어이가 없어진 교감 선생이
거절하자 노무현은 참지못하고 이런 학교는 다니지 않겠다고 화를 내면서 뛰쳐 나옵니다.
하지만 그렇게 끝낼 일은 아니니.... 다음날 어머니는 아들을 간신히 설득해서는 다시 함께
학교로 찾아가 전날 일을 사과한 다음 사정사정해서 외상 입학 을 했으니 고교 진학 은
엄두도 못냈으나..... 다행히 김지태씨의 부일장학생으로 부산상고 에 진학 하는데 그는
한국생사, 조선견직, 삼화고무, 부산일보, MBC 문화방송 등을 가진 영남제일 거부였습니다.
저 김지태씨는 모교인 부산상고 에 가난한 수재를 유치하기 위해 엄청난 장학금을 지원한
것인데 5.16 쿠데타후 박정희 정권은 김지태를 잡아 가두니 그의 재산을 빼앗아서
설립한게 5.16장학회 이고...... 이후 박정희의 “정” 자와 육영수의 “수” 자를 받아
“정수 장학회” 로 이름이 바뀌니 부산일보 등을 소유한 장학회 이사장은 박근혜 입니다.
박근혜씨가 집 2채에다 한국 문화재단, 남산 어린이회관 육영재단 및 영남대학교 이사장에 부산일보
와 문화방송이 속한 정수장학회 이사장과 전두환 돈 까지 독차지하자, 동생 박근령 씨는 모든걸
언니가 다 차지하고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자...... 우격다짐으로 남산 어린이화관
(육영재단) 을 빼앗아 차지하는 과정에 폭력과 법정 싸움까지 벌어지고 남편은 감옥 에 가게 됩니다.
노무현 은 부산상고를 졸업하고는 남양어망 에 입사해 몇개월을 다니다가 고교 졸업생의
서러움 을 겪은후 사표를 내고 고향 진영으로 돌아와 뒷산에 토굴을 파고 사법고시
시험에 도전해 합격하는데.... 당시는 합격자가 1천명이 아닌 단 1백명 을 뽑을때라!
전국적인 화제 를 모았는데 판사 생활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나와 변호사 개업 을 합니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 사무실을 얻고 직원을 채용했는데 3개월이 지나도 단 한건도 수임을 하지
못하니 죽을 지경 인데, 마침 한 아주머니가 왔기에 해결해 주겠다고 뻥을 치고는
300만원을 받아 밀린 월세 내고 직원 월급 주고 불고기 파티 까지 했는데... 다음날
여자분이 새파랗게 질려서 찾아와서는 돈을 되돌려 달래는데.... 이미 뱃속에 들어가 버렸으니?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닌 상고 졸업생 이요, 판검사를 오래해서 부장 판사로 퇴직한 전관
예우 를 받을 처지도 아닌 6개월 남짓의 판사 출신이라 누가 사건을 맡기겠습니까?
마침 부산상고 수업때 배운 무역과 세관 업무 를 떠올리고는 “세관 통관 업무” 분야를
파고 들어 돈을 번 후에는 노동자들을 위한 인권 변호사로 성장해 대통령 까지 되었다는...
“재학생때 합격되면 사람도 아니다” 라는 도쿄대 입시 에서 2012년에는 야스마사 마유미
(여· 53) 씨가 도쿄대를 목표로 재수하는 아들을 격려 하기 위해 함께 공부 하다가
아들은 떨어지고 본인만 합격해 화제가 됐는데... 그녀는 과거 도쿄대 문과에 진학하기
위해 2차례 도전했지만 실패하고는 대학 졸업 후에도 독학으로 프랑스어 를 공부 했다나요.
그런데 야스다 강당 을 보니 옛날 도쿄 대학 야스다 강당 사건 (東大安田講堂事件) 이 떠오르는데
1969년에 전학공투회의(전공투) 가 도쿄 대학의 야스다 강당을 점거 하고는 농성하니
경시청이 봉쇄 해제한 사건으로 도쿄대학 야스다강당 공방전(東大安田講堂攻防戦) 라고도 합니다.
1960년 ‘안보투쟁’ 에서 패배한 일본 학생운동은 분열을 거듭하며 침체기를 맞았는데 1968년 도쿄대학과
니혼대학에 일련의 학내문제 가 불거지면서 학생운동은 다시 호기를 맞기 시작했으니 당파를 초월한
전공투 (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 에 일반 학생들도 공감하면서 학생운동은 점차 활기를 띄기 시작합니다.
수업료 인상 반대와 학원 민주화 를 요구하는 116개 대학의 전공투(신좌파) 나 학생들이
무력투쟁을 전개한 학원분쟁이 일어났으니 대학 당국과의 단체 교섭에서 강경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고자 했으며 학원분쟁은 전국으로 파급되었고, 도쿄도내
에서만 55개 대학이 바리케이드 봉쇄에 들어갔으며 15개 대학이 이들에 점령 당했습니다.
1968년 1월 29일 인턴제 폐지에 불만 을 품은 도쿄대학 의학부 학생들이 농성을 벌이던 중 학교측
간부가 감금되자 대학측은 17명의 관련 학생을 제명 하니 사태가 악화되어 1968년
3월 12일에는 의학부 총합 중앙관을, 3월 27일에는 여기 야스다 강당을 점거 하면서.....
다음날로 예정된 졸업식이 중지 되었고 6월 15일에 의학부 학생이 야스다 강당을 다시 점거합니다.
오코치 가즈오 총장은 경찰력을 동원하자 학생들의 반발이 커지면서 7월 2일에 야스다 강당은 바리케이드
봉쇄 되었으니 대학 당국은 사건의 해결을 도모했지만 학생들의 반발만 불러와 도쿄 대학 전학부의
학생 파업 이 일어나고, 주요 건물 중 다수가 봉쇄되자 11월에는 오코치 총장 이하 전 학부장이 사퇴합니다.
11월 22일에는 전학 바리케이드 봉쇄를 두고 전공투 계열 7천여명 과 이를 저지하려는 일본공산당
(민청) 계열 7천여명 이 서로 대립했으니...... 전공투 내부에서는 후지와라를 중심으로 전학
바리케이드 봉쇄 반대를 호소해서 결국 전학 바리케이트 봉쇄는 중지 되었는데, 이를 두고
사정을 모르는 학생들은 ‘구리타 함대 수수께끼의 반전’ 이라고 불렀으니, 민청(공산당) 계열에
패배했다기 보다는 민청 계열과 충돌하더라도 강행하고자 하는 의지 가 내부에서 붕괴된 것입니다.
오코치 총장 후임으로 가토 이치로 교수가 총장대행으로 취임하고, 1969년 1월 10일 국립 지치부미야
럭비장에서 ‘도쿄 대학 7학부 학생집회 (東大七学部学生集会)’ 를 열어 민청계(공산당) 와
학원 정상화를 추구하는 논포리 학생과 교섭을 통해 스트라이크 수습을 결의 했지만....
여전히 점거를 지속하는 전공투 학생 과는 의견 일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는 경찰력
도입을 결심, 1월 16일 정식으로 경시청에 기동대에 의한 대학 구내 바리케이드 철거를 요청합니다.
경시청 경비부는 8개 기동대를 동원해 1월 18일 오전 7시경 의학부 총합중앙관과 의학부 도서관에서
바리케이드 철거를 시작했고, 투석· 화염병등 학생들의 저항 을 막으면서 의학부·공학부·법학부·
경제학부등 각 학부의 시설 봉쇄를 해제하고는 야스다 강당을 포위 했으니 오후 1시경에는
야스다 강당의 본격적인 봉쇄 해제가 시작되었지만, 강고한 바리케이드와 학생들의
강한 저항 으로 기동대가 고전하면서...... 오후 5시 40분경 경비 본부는 작업 중지를 명령합니다.
다음날인 1월 19일 오전 6시 30분, 기동대의 봉쇄 해제가 재개 되었는데 학생들의 강한 저항에도 불구
하고 오후 3시 50분에는 돌입한 기동대원이 3층 대강당을 제압 했고, 오후 5시 46분에는 옥상에서
마지막 까지 저항하던 학생 90명을 검거 함으로써 도쿄 대학 야스다 강당 봉쇄 해제는 완료되었습니다.
1968년 7월부터 1969년 1월까지 전개된 도쿄대학 야스다 강당 공방전은 ‘전공투’
운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631명의 학생이 검거 되었고
도쿄 대학은 1969년도 신입생을 모집하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를 초래 했습니다.
학생들은 돌과 화염병 을 들었고 경찰은 헬리콥터를 동원해 최루탄과 물 세례를 퍼부었으니
진압 작전은 이틀만에 학생측의 패배로 종결 됐으며.... 이 공방전 이후 학생
운동은 더욱 과격하게 치달았고 결국 무장투쟁노선을 추구하는 ‘적군파’ 를 탄생
시켰으니 비행기를 납치해 북한 평양 으로 가면서 일본 좌파 학생운동은 종언 을 고했습니다.
그러고는 드디어 우리가 찾던 아까몽(赤門 적문) 을 발견했는데.... 이 붉은 문 은
1827년, 가네자와현 카가번(加賀藩) 의 13대 번주(藩主) 마에다 나리야스
(前田斉泰) 는 11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딸 야스히메를 정실 로 맞게됩니다.
마에다는 당시 3품 이상의 다이묘가 장군가에서 아내를 맞을 때 관례에 따라 붉게 칠한 문 을 만들었으니
에도시대 다이묘가에 전가한 쇼군 가문의 딸이 거주하는 안채 를 고쥬덴(御守殿 어수전) 이라고 합니다.
에도 막부 시절 고쥬덴(御守殿 어수전) 의 문을 붉게 칠하였기 때문에 아카몽 이라고 불리었으며
반면에 정문은 검게 칠하였기 때문에 쿠로몽 이라 불리는데, 저 아카몽은 소실되어도
재건하지 않는 관습이 있어서...... 이 문은 당시의 원형을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문 이라고 합니다.
카가번(加賀藩) 고쥬덴(御守殿 어수전) 의 아까몽(赤門 적문) 은 동해(일본해) 가나자와에서
1877년에 도쿄시의 도쿄 대학으로 이관 되어 1961년에 해체 수리했으며 일본의 국가
중요문화재 로 지정되어 있는데 오늘 우리가 보는 문은 수리중에 있어 드나들수는 없습니다.
첫댓글 허선생님 그간 잘 지내셧죠? 또 하는일 없이 바빠서
모처럼 들럿습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김성길올림
아이구 무슨.......
늘 고맙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