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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1월 26일 주일
[(녹) 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 해외 원조 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선언하시며(2019년 9월 30일), 하느님 백성이 성경을 더욱더 경건하고 친숙하게 대하고, 하느님 말씀의 거행과 성찰과 전파를 위하여 이날을 봉헌하며 장엄하게 지내기를 권고하셨다.
해마다 1월 마지막 주일은 전 세계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나눔을 실천하는 ‘해외 원조 주일’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92년 추계 정기 총회에서 전 세계의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촉구하고자 이 주일의 2차 헌금을 해외 원조 기금으로 사용하도록 결정하였다.
오늘은 연중 제3주일이고 하느님의 말씀 주일이며, 해외 원조 주일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한마음 한 몸이 되어, 질병과 기아, 전 지구적 기후 재난으로 고통을 겪는 세계의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가진 것을 나누기로 다짐하며 미사에 참여합시다.
말씀의 초대
에즈라 사제가 나무 단 위에 올라 백성 앞에서 율법서를 펴자, 레위인들이 하느님의 율법을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 준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펴시고,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신다(복음).
제1독서
<레위인들은 율법서를 설명하면서 읽어 주었다.>
▥ 느헤미야기의 말씀입니다. 8,2-4ㄱ.5-6.8-10
그 무렵 2 에즈라 사제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이로 이루어진 회중 앞에
율법서를 가져왔다. 때는 일곱째 달 초하룻날이었다.
3 그는 ‘물 문’ 앞 광장에서, 해 뜰 때부터 한낮이 되기까지
남자와 여자와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에게 그것을 읽어 주었다.
백성은 모두 율법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4 율법 학자 에즈라는 이 일에 쓰려고 만든 나무 단 위에 섰다.
5 에즈라는 온 백성보다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으므로,
그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책을 폈다.
그가 책을 펴자 온 백성이 일어섰다.
6 에즈라가 위대하신 주 하느님을 찬양하자,
온 백성은 손을 쳐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였다.
그런 다음에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주님께 경배하였다.
레위인들은 8 그 책, 곧 하느님의 율법을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 주었다.
그래서 백성은 읽어 준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9 느헤미야 총독과 율법 학자며 사제인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이 온 백성에게 타일렀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온 백성이 울었기 때문이다.
10 에즈라가 다시 그들에게 말하였다.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 술을 마시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께 거룩한 날이니,
미처 마련하지 못한 이에게는 그의 몫을 보내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2,12-30
형제 여러분,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13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14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15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16 또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17 온몸이 눈이라면 듣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온몸이 듣는 것뿐이면 냄새 맡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18 사실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19 모두 한 지체로 되어 있다면 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20 사실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21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할 수도 없고,
또 머리가 두 발에게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할 수도 없습니다.
22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약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23 우리는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특별히 소중하게 감쌉니다.
또 우리의 점잖지 못한 지체들이 아주 점잖게 다루어집니다.
24 그러나 우리의 점잖은 지체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자란 지체에 더 큰 영예를 주시는 방식으로
사람 몸을 짜 맞추셨습니다.
25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지체들이 서로 똑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
26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28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그다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그다음은 병을 고치는 은사,
도와주는 은사, 지도하는 은사,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29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
30 모두 병을 고치는 은사를 가질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를 해석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의 시작입니다. 1,1-4; 4,14-21
1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는 작업에
많은 이가 손을 대었습니다.
2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
3 존귀하신 테오필로스 님,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본 저도
귀하께 순서대로 적어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4 이는 귀하께서 배우신 것들이 진실임을 알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때에 4,14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15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루카 복음서 서문에 나오는 ‘테오필로스’라는 이름은 상징적인 이름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모든 시대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이 적고 있는 예수님에 관한 일들이 모두 진실임을 선포하고자 한 것이지요. 사실 복음서가 기록되기까지 여러 단계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역사적 실재가 있었지요. 다음으로는 사도들의 증언을 통한 복음 선포가 이어집니다. 그러다 점차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대한 여러 단편적인 구두 전승을 모아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자신들이 만나고 체험한 예수님을 길이 전하기 위해서지요.
그 덕분에 우리는 오늘 복음서를 읽고 묵상함으로써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이 선언은 바로 예수님께서 오시기로 예언된 메시아시요 구세주이심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표현입니다. 당신으로 말미암아 가난한 이들과 눈먼 이들, 무엇인가에 붙잡혀 묶이고 억압받던 이들이 구원과 해방을 체험하게 되었다는, 그래서 많은 이가 주님의 은혜로움을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1독서를 보면,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레위인들에게서 하느님의 율법을 듣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눈물을 흘리며 그 율법이 참되다고 고백합니다. 모진 고생을 통하여 마음의 눈과 귀가 열려 그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는 오직 구약과 신약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오늘도 겸손과 신뢰의 마음으로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 이들이 예수님을 깊이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김동희 모세 신부)
짧고 간략하게 강론하시는 예수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제가 된 후 부모님이 살고 계시던 본당에 가서 처음으로 강론할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참으로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두렵고 떨렸습니다.
나름 감동적인 강론을 한번 해보려고 얼마나 준비에 준비를 거듭했는지 모릅니다. A4지 한 장 정도의 짧은 강론을 며칠에 걸쳐 준비했고, 그걸 또 거울을 보고 수십 번도 더 예행연습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첫 강론을 하시는데, 아마 예수님께서도 마음이 비슷하셨을 것입니다.
요즘 미사 때마다 강론 전에는 성경 말씀이 먼저 선포되듯이, 예수님께서도 강론을 하시기 전에 한 성경 구절을 찾으셔서 읽으셨는데, 정말이지 기가 막힌 성경 구절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은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 1-2)
한 문장 한 문장, 글자 한자 한자가 다 예수님 당신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구절을 봉독하심을 통해 앞으로 펼쳐질 공생활 기간 동안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명확히 밝혀주신 것입니다.
회당 안에 있던 청중들은 이제 성경 말씀이 선포되었으니, 길고도 장황한 강론이 이어지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강론은 딱 한 마디였습니다. 3초밖에 안 걸렸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아마 예수님께서 지금 이 순간 공생활을 하신다 해도, 절대로 강론 길게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핵심 중의 핵심만, 촌철살인의 한 말씀만 하셨을 것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의 예언이 당신을 통해, 당신 안에서 성취됨을 장엄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언의 성취는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 안에 하느님의 영이 머물고 계심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종말론적인 예언자요 하느님으로부터 도유된 분 곧 메시아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도래로 인해 이제 구원의 시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분을 구세주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은 이제부터 하느님 마음에 드는 해, 그분에게 흡족한 해, 주님의 은혜로운 해, 희년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02년 사목국에서 일할 때입니다. 사목국에는 여러 부서가 있었습니다. ‘선교 전례, 교육, 가정, 복음화, 직장, 레지오, 기획 행정’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교구의 사목국에서 일하였지만, 정확하게 우리의 역할과 기능이 무엇인지 성찰하지 못했습니다. 사목국장 신부님과 2박 3일 연수를 가면서 우리는 부서의 역할과 기능이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각 부서를 사람의 몸과 비교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기획 행정은 머리와 같다고 했습니다. 교구의 사목이 어떤 방향이었는지,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연구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는 교육 담당이었습니다. 저는 교육은 심장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장이 신선한 ‘피’를 끊임없이 공급해 주어야 사람은 살 수 있습니다.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해서 공급할 때, 교구와 본당이 소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직장과 레지오는 발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복음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가정과 선교 전례는 뼈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몸은 뼈가 있어서 균형을 잡을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가정과 선교 전례는 교회를 지탱하는 뼈와 같기 때문입니다. 복음화는 눈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복음화를 통해서 교회가 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2박 3일 동안 연수를 통해서 각 부서의 역할과 기능을 고민했고, 우리는 교구 사목국이라는 몸의 지체로 기쁘게 일하였습니다.
2025년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을 ‘자동차’와 비교해 보았습니다. 사제는 ‘핸들’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교구장으로부터 권한과 책무를 받은 사제는 교회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날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수도자는 먼지와 빗물을 닦아내는 ‘와이퍼’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수도자는 가난, 정결, 순종의 와이퍼로 교회의 유리에 붙어있는 권위, 욕망, 시기의 먼지를 닦아내기 때문입니다. 사목회는 ‘엔진’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사목회에서 행사를 기획하고, 집행하기 때문입니다. 재정평의회는 ‘기름’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자동차가 움직이려면 기름이 있어야 하듯이, 재정평의회에서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실은 ‘의자’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새로 온 신자들에게 구역과 반을 안내하기 때문입니다. 신심 단체는 ‘바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신심 단체의 카리스마와 영성으로 복음을 실천하고, 전하기 때문입니다. 쉬는 분들과 아픈 분들은 트렁크 아래 있는 ‘스페어타이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본당에서 잘 볼 수는 없지만 그분들에게도 주님의 사랑이 전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퀴에 문제가 생기면 스페어타이어로 교체하듯이, 쉬는 분들과 아픈 분들이 건강을 회복하면 다시 공동체에서 봉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른다면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성당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의 신앙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의 신앙을 ‘몸과 지체’로 설명하곤 합니다. 우리의 몸은 인격과 정신이 있습니다. 또 우리의 몸은 많은 지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지체들이 원활한 활동을 하도록 산소, 영양분, 물을 공급해 줍니다. 우리 몸의 지체들은 보고, 듣고, 말하고, 먹고, 느끼고, 만지고, 걸을 수 있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이 통합된 판단과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 우리의 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예수님의 눈, 예수님의 발, 예수님의 손, 예수님의 입, 예수님의 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들이 받아야 할 영양분은 예수님의 말씀, 삶, 표징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다운 통찰입니다. 중국의 한 대나무는 심으면 7년 동안은 거의 자라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8년째 되면 크게 자란다고 합니다. 7년의 세월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7년의 세월은 성장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준비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준비는 소홀하게 됩니다. ‘건강, 가족들의 사랑, 친절, 자선’과 같은 것들의 성과는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정말 필요한 것들입니다.
균형 잡힌 삶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바오로 사도는 말해주고 있고, 그런 균형 잡힌 삶은 말씀에 충실할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고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기에 앞서서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읽으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하느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해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은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오늘 이루어지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0)
사랑이 오시니
사랑으로
오늘을 살아
끝없이 서로 죽이는
게걸스러운 분노를 녹여
오늘 사랑이다
늘 사랑이다
해방이 오시니
해방으로
오늘을 살아
무릎을 꿇리려 날뛰는
겁에 질린 광란의 총칼에 맞서
오늘 해방이다
늘 해방이다
기쁨이 오시니
기쁨으로
오늘을 살아
살맛을 삼켜버리는
잿빛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오늘 기쁨이다
늘 기쁨이다
희망이 오시니
희망으로
오늘을 살아
희뿌연 어둠 속
강요당한 무기력을 떨치고
오늘 희망이다
늘 희망이다
살림이 오시니
살림으로
오늘을 살아
죽임이 살길이라
유혹하는 검은손을 뿌리치고
오늘 살림이다
늘 살림이다
오늘의 성인
성 티모테오(Timothy)
신분 : 바오로의 제자, 주교, 순교자
활동지역 : 에페수스(Ephesus)
활동연도 : +97년경
같은이름 : 디모떼오, 디모떼우스, 디모태오, 디모태우스, 디모테오, 디모테우스, 티모시, 티모테우스
리카이니아(Lycaenia)의 리스트라(Lystra) 태생인 성 티모테우스(Timotheus, 또는 티모테오, 디모테오)는 그리스인 아버지와 유대교에서 개종한 에우니케(Eunice)의 아들이다. 그는 성 바오로(Paulus)가 리스트라에서 설교할 때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 후 성 바오로의 친구이자 오른팔 역할을 하였다(사도 16,1-4). 그는 혹시 말썽이 날까봐 할례를 받은 후 바오로의 제2차 전교 여행을 수행하였다.
바오로가 유대인의 적개심 때문에 베레아(Berea)를 몰래 빠져나갈 때, 성 티모테우스는 그대로 남아 있다가 테살로니카(Thessalonica)로 파견되어 그곳의 상황을 보고하고, 또 박해 중의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였다. 58년 성 티모테우스와 에라스투스(Erastus)는 마케도니아(Macedonia)로 파견되었으며, 그 후 코린토스(Corinthos)로 가서 바오로의 가르침을 명심하라는 권고를 하였다.
바오로가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투옥되고 또 로마(Roma)로 이감되었을 때, 성 티모테우스도 같이 있었음이 분명한데, 그 후 그는 에페수스로 가서 그곳의 초대주교로 봉직하였다. 그는 디아나(Diana)를 공경하는 카타고리아의 이교 축제를 공식적으로 반대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티모테우스에게 보낸 바오로의 두 편지는 65년경에 마케도니아에서 썼을 것이다.
성 티토(Titus)
신분 : 바오로의 제자, 주교
활동지역 : 크레타(Creta)
활동연도 : +1세기경
같은이름 : 디도, 디또, 티투스
성 티투스(또는 티토, 디도)는 사도 바오로(Paulus)에 의해 개종한 후 그의 비서가 되어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하였다. 사도 바오로는 그를 코린토스(Corinthos)로 파견하여 오류를 시정케 하면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신자들을 위한 헌금을 모금하게 하였다. 그 후 그는 사도 바오로에 의하여 크레타(Creta)의 주교로 축성되어 바오로의 사업을 이어나갔다.
그 후 그는 달마티아(Dalmatia)를 방문한 뒤 크레타로 돌아와서 운명한 듯하다. 그는 법률가 제나가 쓴 “티투스행전”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가 성 바오로로부터 받은 편지의 주요 내용은 영적인 권고를 비롯하여 착한 목자가 지녀야할 자질 및 크레타 신자들에게도 엄격한 규율이 필요하다는 것 등이다
성녀 바울라 (Paula)
활동년도 : 347-404년
신분 : 과부
지역 : 로마(Roma)
같은 이름 : 빠울라, 파울라
이탈리아 로마의 부유한 귀족 가문이자 그리스도교 신자 가정에서 태어난 성녀 바울라는 15세 때인 362년 율리아 가문의 이교도 톡소시우스(Toxotius)와 결혼하여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들은 이상적인 부부로 존경받았는데, 379년에 남편이 사망하자 그녀는 엄격한 절제생활과 더불어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녀는 성 에피파니우스(Epiphanius)와 안티오키아(Antiochia)의 바울리누스(Paulinus)를 통하여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 9월 30일)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히에로니무스의 사업에 적극 가담하여 후원하였다. 384년경 그녀의 큰딸인 블레실라의 죽음으로 한때 비통에 잠겼으나, 다음 해에 그녀는 둘째 딸 성녀 에우스토키움(Eustochium, 9월 28일)과 함께 로마를 떠났고, 성 히에로니무스와 더불어 성지를 순례한 뒤 그의 지도를 받으면서 베들레헴에 정착하였다. 성녀 바울라와 에우스토키움은 구호소와 수도원을 세웠는데, 바울라는 수도원을 지도하였다. 그녀는 성 히에로니무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보조자였으며, 성서 사업에 큰 공헌을 하였다. 성녀 바울라는 402년경에 병에 걸려 2년 후인 404년 1월 26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성녀 바울라는 과부들의 수호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