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으로 들어가면, 21장에서 묘사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환상이 계속 이어집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1 천사는 또, 수정과 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와서,
2 도시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흘렀습니다. 강 양쪽에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내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 쓰입니다.
3 다시 저주를 받을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그 도시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도시 안에 있고,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예배하며,
4 하나님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고,
5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주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추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하도록 다스릴 것입니다.
여전히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 본문은 21장 뒤에 붙였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6절 이하의 본문은 요한계시록의 결말 부분입니다. 요한은 천사와 대화를 나눕니다. 환상을 통해서 요한이 본 모든 것이 정확히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던 천사가 갑자기 “나는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끝이다.” 라고 예수님으로서 말을 합니다.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서술상의 문제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에는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 요한과 대화를 나누다 대화의 중간에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 것이라면, 독자들이 착각하지 않도록 정확히 그 부분을 표현하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저자의 실수거나 한계일 것이고, 이런 정도의 실수나 한계는 성서에서 무수히 발견됩니다.
어쨌든 본문의 예수는, 이 책에 기록한 예언의 말씀에 무엇을 덧붙이거나 없애버리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 책에 기록한 재앙들을 덧붙이거나, 이 책에 기록한 생명나무와 그 거룩한 도시에서 누릴 몫을 없애버릴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매우 유감스럽게도,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런 학문적이고 과학적인 해석을 거부하는 문자주의자와, 성서무오설을 신봉하는 사람들과, 기도만 하면 하나님은 신령한 환상으로 모든 비밀을 알려주신다고 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지금도 이 본문을 자주 인용합니다.
이제 요한계시록 본문에 대한 강해는 다 마쳤고, 정리를 좀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마다 종말의 시기를 점치는 사람들에게 자주 이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2000년 후의 먼 미래를 예언한 책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기록된 그때 당시의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쓰여진 묵시문학서입니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에, 또한 성서에, 먼 미래에 대한 예언은 전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예언하는 미래의 세계는 결코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성서가 바라보는 궁극의 목표는 예수사람들의 믿음과 참여로 완성되어가는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악과 불평등, 압제와 핍박이 종말을 고하고, 사랑과 정의, 평화와 화해의 시대가 새롭게 열리는 하나님의 나라, 그것이 바로 모든 예언자들이 예언한 예언의 궁극적인 목표이고 목적입니다.
모든 예언자들은 오직 그것을 예언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반드시 오리라’ 라고 예언했을 뿐입니다. 어느 개인이나 국가의 길흉화복을 구체적으로 점치는 것은 성서적인 예언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런 게 예언이라면, 기독교는 예언의 종교가 아니라 운명의 종교로 떨어지고 맙니다.
성서는 이렇게 역사의 종말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예언하지만 미래의 운명을 예언하지 않습니다. 정해진 운명이란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택이 미래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심으면 사랑의 세계를 낳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폭력을 심으면 폭력의 세계를 낳게 될 것입니다. 예수 사람들이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앞장서서 하나님의 나라의 주체자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