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로(李仁老)는 고려 명종 때의 학자. 문인으로 호는 쌍명재(雙明齋)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다. 저서로 『은대집(銀臺集)』 20권과 『파한집(破閑集)』 등이 있다고 하나, 현재 파한집만이 남아 있다. 이인로는 1170년 나이 19세 때 정중부가 무신난을 일으키자 피신하여 불문에 귀의했다가 그 뒤에 환속했다고 한다.
정중부의 난
1170년(의종 24년) 정중부 등의 문신 귀족정치에 반발하여 일으킨 난, 예종 때 여진의 정벌, 인종 때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등으로 무신의 지위가 크게 상승했으나 문존무비(文尊武卑)의 풍조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횡포는 더욱 심해졌따. 군사 행동에서도 문신이 지휘관이 되고 무신은 그 아래서 지휘를 받았따. 군인들이 적과 싸워 공을 세워도 불력(佛力)에 의한 것이라 하여 그 공을 부처에 돌리곤 하였다. 특히 난이 일어날 무렵 문신귀족의 수탈과 횡포는 농민반란이 일어나는 등 농촌 경제를 크게 압박해 유민이 속출하고 사회가 크게 동요되었다.
1170년 놀이에 나선 의종은 호종하는 문신들을 거느리고 장단 보현원에 이르렀다. 이때 왕을 호종하던 대장군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가 반란을 일으켜 왕을 호종하던 문신 대부분을 학살했다. 그리고 그날 밤 왕을 데리고 개성에 돌아와 문신 50여 명을 또 학살했다. 문종 때 중앙 문관의 정원이 532인이었는데 학살된 문인은 100여 명 정도였다 한다.
이에 의종은 아들의 직위를 승격시켜 무마하려 했으나 반란세력은 거사 3일째 되는 날 왕을 거제도로 보내고 왕의 아우 익양공 호(晧)를 왕으러 삼았는데, 이가 바로 명종이다. 명종은 즉의해 곧 정중부, 이의방, 이고를 벽상공신(壁上功臣)에 봉하고 대사령(大赦令)을 내리는 등 인심 수습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 후 정치적 실권은 반란 세력의 수중에 들어가고 무신정권의 시대로 옮겨 가는 중대한 국가 사회적 변혁이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