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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록 실중어요(室中語要) 20, 나를 바보로 만드는군
[스님께서 어느 땐가 말씀하셨다.
"저것 좀 보아라. 법신(法身)이 등불로 변하니 불조(佛祖)를 초월하는 이야기가 그대들 발밑을 지난다."]
“운문스님께서 어느 땐가 말씀하셨다.”라고 적고 있는 것은 과거이지만 항상 과거 현제 미래을 나누어 삼세를 말하지만 이것은 과거심도 지금 여기에서 말할 수있으니 “어느 땐가”라고 표현한 것이다
“저것 좀 보아라”라고 왜 지것이라고 했을까?
항상 언제 어디서나 지금 여기인데 저것이라고 말씀을 쓰실까?
이것이라고 해야 하는데 저것이라고 칭하는 것은 상대성일 것이다.
이것이라고 하면 지금 여기인 것이니 누구나 다 알아찰릴 수 있는 것이지만 저것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것과 저것은 역순이라는 뜻이다. 즉 보이는 경계라면 이것이라고 해야 맞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할 때는 저것이라고 표현하는 순리와 역리의 상대성에서 저것이라는 드러나지 않는 일을 말할 때는 저것이라는 상대성을 드러내는 말일 것이다.
“법신이 등불로 변하니”라고 하신 것은 법신이 무엇을 말합니까?
법신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여래장이라 했어 우리 마음의 근본식이 아뢰야식이라고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깨달은사람의 의식에는 아마리식이라는 제 9식을 설정하여 말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럼 아마라식에 대하여 먼저 좀 알아보고 가겠습니다.
아마라식(阿摩羅識)은 제9식(第九識), 실성(實性), 암마라식(菴摩羅識), 진실성(眞實性), 전의(轉依), 여여지(如如智), 아마라청정심(阿摩羅淸淨心), 구경유일정식(究竟唯一淨識),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법계(法界), 진여(眞如), 실제(實際), 무구식(無垢識), 본각(本覺), 여래장(如來藏), 법신(法身) 요약 아말라식(阿末羅識)은 인도 출신 역경승 진제(眞諦, 499~569)의 교설이다. 진제는 전6식, 아타나식, 아리야식에 아말라식을 더한 9식을 설하였는데, 이 중 아말라식은 번뇌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마음을 의미한다.
아마라식(阿摩羅識)은 산스크리트어로 추정된다. 아말라식(阿末羅識), 암마라식(菴摩羅識) 등으로 발음하기도 한다. 제9식(第九識)이라고 하며, 무구식(無垢識)으로 의역(義譯)된다.
진제(眞諦)는 자신이 번역한 세친(世親)의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등에서 제8 아뢰야식을 '번뇌에 물든 현실 세계를 낳는 동요하는 마음인 나식(亂識)'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이에 진제는 아뢰야식과 별개로 수행의 궁극적인 경지인 '진여(眞如)를 인식의 대상으로 하는 능연(能緣) 번뇌에 물들지 않은 무구(無垢) 청정한 마음'을 제9아마라식으로 분리해 판단하였다.
진제가 번역한 책에서 아마라식은 대부분 수행의 궁극적인 경지를 의미하는 다양한 말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진제는 인식 대상인 경(境)을 우리의 마음이 허구로 만들어 낸 것이라는 의미에서 소집성(所執性)으로, 우리의 마음인 식(識)을 허구의 대상을 인식한다는 의미에서 분별성(分別性)으로 각각 파악한다. 그리고는 '비존재인 외적 대상인 외경(外境)'과 '그것이 실재한다고 잘못 인식하는 마음인 허망식심(虛妄識心)'이 수행을 통해 모두 소멸한 궁극의 경지인 실성(實性) 또는 진실성(眞實性)을 아마라식이라 불렀다. 이 경우 아마라식은 전의(轉依), 여여지(如如智), 아마라청정심(阿摩羅淸淨心), 구경유일정식(究竟唯一淨識) 등과 같은 의미가 된다.
한편 진제는 아마라식을 수행의 근원적 기반을 의미하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십팔공론(十八空論)』에서 진제는 아마라식을 '본질적으로 자성(自性) 번뇌(煩惱)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부르며, 동시에 선정(禪定) 등 수행의 항목과 구별되는 근원적 기반이라는 점에서 법계(法界)라고 부른다.
현재 남아있는 산스크리트본에서 아마라식의 원어를 사용하는 사례는 발견되지 않았다. 학자에 따라서는 진제가 이야기한 아마라식이 대중부(大衆部)의 순수 의식을 거쳐 『보성론(寶性論)』 계통의 여래장(如來藏) 사상으로 전개된 교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또한 진제의 저술 내에서도 특히 전의(轉依) 개념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서 아마라식이 유식학의 원의를 벗어난 것은 아니나, 궁극적 존재의 무변이성(無變異性)과 그 근거를 강조하기 위해 진제가 새롭게 고안한 용어일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편 진제의 아마라식을 자세히 논구(論究)한 원측(圓測, 613~696)에 따르면, 진제의 아마라식은 그 본질이 진여 또는 본각(本覺)이다. 또 거기에는 인식 대상인 소연경(所緣境)과 인식 작용인 능연(能緣)이라는 두 층위가 존재한다. 전자일 경우 진여(眞如) · 실제(實際) 등과 등치될 수 있고, 후자를 의미할 경우 무구식 · 본각(本覺) 등으로 불린다고 한다. 또 수행의 경지에 따라서도 번뇌에 속박되어 있을 때는 여래장(如來藏)으로, 번뇌로부터 자유로웠을 때는 법신(法身)으로 양자를 구별하고 있다. 요컨대 진제의 아마라식은 진여, 전의, 여여지, 실제 등의 동의어로서 수행의 궁극적 경지를 나타낸다. 또 이와 함께 자성청정심, 여래장, 본각의 동의어로서 수행의 근원적 기반인 청정한 마음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로 본다면 신라 승려 둔륜(遁倫)의 『유가론기』에서 볼 수 있듯이 현장(玄奘)의 신역(新譯) 경론을 따르는 사상가들은 진제가 말한 아마라식의 여러 의미 중 인식 작용으로써 제9아마라식을 부정하고 그것을 제8알라야식 안의 청정한 부분인 정분(淨分)으로 귀속시킨다. 특히 원측은 제8식으로 환원된 아마라식을 '성불(成佛)의 기반인 의지일계[(依止=界)로 보고 있다. 이처럼 아마라식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현장 계열 유식 사상가와 진제 계열의 섭론사(攝論師)를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사상사적 의미가 있다.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선사들의 어록에서 보면은 황벽스님은 이 앎의 성품의 당체를 영각성(靈覺性)이라고 하였습니다.
"저것 좀 보아라. 법신(法身)이 등불로 변하니 불조(佛祖)를 초월하는 이야기가 그대들 발밑을 지난다."]에서 “법신(法身)이 등불로 변하니“하시는 것은 법신(法身)이라는 형상없는 마음이 작용면에서 본다면 다 그려 낼 수 있는 것이니 등불로 변하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이며 허공 꽃이다 라고 하는 말과 같으니 여기서는 법신이 등불로 변하니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조(佛祖)라고 하는 것은 석존과 역대 조사를 뜻하는 말이니
“불조(佛祖)를 초월하는 이야기가”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부처님과 조사들은 몸이 있었으니 이른 신통변화를 나툴수 없지만 이 마음의 본체인 법신은 몸을 마음되로 변화시킬 수 있으니 천태만상을 스스로 그려 낼 수도 형상을 바꾸어 낼 수도 있는 것을 비유법으로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대들 발밑을 지난다.”라고 하신 것은 법신은 모양도 없고 형상도 없으니 어디에도 걸림없이 해탈의 경계를 말하는 것이니 “그대들 발밑을 지난다”라고 하신 것은 들어나지 않은 것이 진리이니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 마음을 변형하도 발밑을 지나나 발위를 지나나
처소와 장소가 없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 바로 그 말은 그대로 받아쳐서 마치 조사가 말씀하시니 이것이 진리이다 하여 이렇게 말을 합니다.
[어떤 스님이 말하였다.
“발밑에서 알아차렸을 땐 어떻습니까?"]라고 묻습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무거무래(無去無來)가 역무주(易無住)라고 했습니다. 즉 마음은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으며, 역시 주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법신이니 법신이 하는 일은 아무도 모르는데 말이 실성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여 이렇게 묻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럴 때 회광반조하여 들어 나지도 않고 형상도 없고 모양도 없지만 다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라고 한 생각 아~~~~~~이것이 마음을 보고하는 말씀이구나 하고 알아치려 바로 깨달아야 하는 것인데 말에 따라 가버리니 어리석은 천체인 것입니다.
그러니 운문선사는 말을 따라 훈숩되어 집착하는 이 학인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나를 바보로 만드는군."]이라고 아주 인상를 찡그리며 이런 맹추야 어떻게 말의 깊은 현지를 찾아야지 언어도단이라 말하지 말아야 할 선사가 말을 할때는 이것이 역순으로 어떤 한 물건을 알아치리라고 던진 말인데 그 말속의 깊은 현지를 찾아 내라고 수수꺼끼같이 하두로 던진 것인데 개에게 흙덩이를 던지면 개는 흙덩이를 따라가고 사자에게 흙덩이를 던지면 영리한 사자는 그 흙들이를 던진 사람에게 달려 들 듯이 그 원인과 근본을 볼수 있는 안목이 있으야 하는데 그대는 아직 개와 같이 내가 던지 화두를 덥석 물었으니 그대는 개와 같다 보인다. 그런 물음도 선문답이라고 하고 있느냐 이렇게 견처가 없는 사람은 나를 비웃고 바보로 만들 뿐이지 진정한 선문답이 무었인지도 모른다. 라고 꾸짓고 있는 말인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학승은 또 말에 끌려 든다 그 말이 무엇을 말하는 것도 모르니 들을 줄 알면 성문이요 든고 생각하면 연각이요 한 생각 돌이켜 회광반조 하여 깨달아 행동하면 보살이라고 하였는데 이 학숭은 안목도 견처도 없이 개와 같이 알아듣고 개같이 행동을 한다.
그래서 이 학승은 다음과 같이 또 물고 늘어진다.
["그렇다면 여기와는 까마득하겠군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여기를 떠나 무엇이 있단 말인가 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왜 하는지도 모른다. 모르면 모르겠습니다. 라고 진솔되게 말하면 가리켜 줄려고 다른 비유를 들어 말씀하실 것인데
이렇게 말귀도 못알아차리니 아주 대기설법으로 더 낮추어 말후구를 날립니다.
["10만 8천리이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십만8천리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서유기에 나오는 근두운은 손오공이 타고 다니는 구름으로, 10만 8천 리를 한 번에 날아갈 수 있다고 묘사됩니다.
여기서 '리'는 중국 전통 도량형 단위로, 시대에 따라 그 길이가 달랐습니다. 10만 8천 리는 과연 몇 킬로미터일까요?
전통적인 중국의 '리'는 시대에 따라 그 길이가 달랐지만, 대략 400~500m 정도로 계산할 수 있습니다.
10만 8천 리를 km로 환산해 본다면 만약 1리를 500m로 계산한다면, 10만 8천 리는 54,000,000m, 즉 54,000km가 됩니다. 이는 지구 둘레(약 40,075km)보다도 훨씬 긴 거리입니다.
하지만 서유기는 신화와 전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므로, 근두운이 실제로 54,000km를 날아간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는 과장법을 사용하여 손오공의 초인적인 능력을 강조한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서유기에 나오는 근두운이 10만 8천 리를 날아간다는 것은 손오공의 뛰어난 능력을 과장하여 표현한 것이며, 실제 거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10만 8천 리를 km로 환산하면 약 54,000km가 되지만, 이는 현실적인 수치가 아님을 알아차려야 하듯이
이 말씀은 지금 여기의 이 학승은 꿈을 꾸고 있구나 무어라고 해야 알아차리겠는가 부디 꿈에서 깨어나라고 이렇게 한 마디 호통을 치는 것입니다
["10만 8천리이다."그러니 그대가 생각하는 꿈속같은 망상은 다 그대 스스로 만들어 내는 망상이라고 꾸짓고 있는 것입니다.
성불인연 맺어소서 옴 바아라 믹~~~!!!!!!!!!!!!!
조사선(祖師禪) 운문록(雲門錄)을 들어시어
인연성불(因緣成佛) 하시어서 붓다(佛陀) 같이 살아가소!
일승법문을 시절인연삼아 인연성불 하옵시고 대원성취 하옵소서 !
원오선원 명상쉼터 천안시 두정동 611_1번지 5층(041)551 8546
무명 납승 원오선사 010 8748 6006 옴~바아라 믹!!!_()_
탁발성원 보시구좌 농협 351 1042 1598 93 대한불교 정토회

첫댓글 운문록을 통하여 인연성불 요인성불하시어서 본불본락 하옵소서 옴~바아라 믹!!!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