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상과 옥계 사이 / 박세현
1
가을 밤 65번 동해고속도로 위
차 한 대 없다
모두들 지나간 끝물에 나 혼자?
괴기스럽고 숭고한 지경이다
(설마 동해시장님이 시인을 위해
길을 비웠을 리는 없고!)
못 믿겠다면 당신도 밤 아홉시 시월 중순쯤
이 도로를 타보라
망상꽃을 피울 수도 있을 것이다
2
식은죽같은 공연을 끝내고 나니 객석 끝에
소설가 박문구가 지방신문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다
시청 옆에서 맹물같은 표준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허벅지를 꺼내놓고 대로에 앉아 네온빛을 쬐고 있던
가출 중인 여고생 일반을 추상했고
여기가 묵호와 북평 사이에 있는 천곡동이라는 사실
수령 400년 된 예술관 앞뜰 배롱나무를 감탄했으나
문학에 대해서는 일언반구하지 않았다
사랑을 확인하지 못한 연인처럼
톨게이트에서 우리는 군말없이 헤어졌으니
3
망상과 옥계 사이를 지나며
온갖 답이 없는 생각을 맺었다 풀었다 하며
오매불망 나의 꿈이요 존재론적 삐끼였던
거시기에 관한 결정적 과대망상을 포기한다
밤바다 옆에 있는 옥계휴게소를 거치지 않고
망상과 옥계 사이 밤파도 뒤채는 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폭음처럼 과속하며
그 밤을 빠져나왔다 훗날이여 오늘의 나를
기억하지 말고 단칼에 지워다오
시집 『본의아니게』(문학의전당, 2011) 중에서
시는 무슨 시 _ 박세현
시 쓴답시고 양수리 이종 사촌의
카페에 주저앉아
호화판 부르주아 흉내를 내고 있지
배지 않은 애를 낳으려고 힘쓰는 폼이
숫제 몸부림이지
이게 바로 생지랄이지, 딴 게 있겠어
강 건너 춘천행 기차가 보기 좋아
거기 한눈 팔다가 테라스에 나가
북한강의 본심을 적시는 노을에 빠지다가
화야산 길맛에 취하다가
그냥 몇 날을 허송시켰어
어쩌다 지나가는 시를 붙잡고 윙크해 보지만
인연이 닿지 않는 언어들인지라
보기 좋게 유산하고 말았어
카페 앞뜰에 핀 능소화 자궁 속으로
엉겁결에 빨려들어가는 노을 한 자락이 볼 만했어
시의 자궁 속을 헤매다가 헛물만 켜고
힘이 쭈욱 빠져 새벽녘에 잠들었지
시는 무슨 시
『사경을 헤매다』, 열림원, 2005년.
다음부터 - 박세현
다음이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어딘가 근지러워 남 모르게 몸을 꼰다
다음에 또, 그럼 다음에
그래서 다음에는 가보지 못한 길이 있고
달달한 사랑도 있고 전하지 못한 안녕도 있다
갚아야 할 말빚도 기다리고 있지
읽다 남겨 둔 에세이도 있고
밤새 들어보고 싶은 음악도 있을 것이다
한 잔 하자는 약속도 멀쩡히 살아 있다
정말은 정말 다 다음에 묻어두는 게 아닐까
다음은 모든 이의 어쩌지 못한 꿈이다
다음에는 없는 것이 없다
있다 다음에는 딱 한 가지
지금이라고 말하는 이 순간만은 없고 또 없다
다음이라고 말할 때 부디 조심하자
다음부터!
겨울 편지 / 박세현
첫눈을 맞으며
세상의 나이를 잊으며
저벅저벅 당신에게 걸어가
기다림의 사립문을 밀고 싶습니다
겨울밤 늦은 식사를 들고 있을 당신에게
모자를 벗고 정중히 인사하고 싶습니다
우리들 해묵은 안부 사이에
때처럼 곱게 낀 감정의 성에를
당신의 잔기침 곁에 앉아 녹이고 싶습니다
부당하게 잊혀졌던 세월에 관해
그 세월의 안타까운 두께에 관해
당신의 속상한 침묵에 관해
이제 무엇이든 너그러운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첫눈을 맞으며
세상의 나이를 잊으며
저벅저벅 당신에게 걸어가
당신의 바람벽에 등불을 걸고 싶습니다
지극한 그리움 / 박세현
살려고 할 때 밤이 오고
절망할 때 아침이 온다
깨끗이 살려는 마음은 형체 없이 사라지고
더 높게 살려는 의지는 말라버렸다
어쩌느냐 받아놓은 아침에
마음속 저 깊은 데 가라앉아 혼자 삭고 있는
마음 부스러기를 긁어모아 불을 지펴야 하느냐
마음은 자꾸 한쪽으로 기울고
산 넘어가는 석양은
무거운 마음을 받쳐주지 못하지 않느냐
나무라지 마라
마음은 어젯밤 흘러가던 물소리에 떠내려가고
나는 빈 몸을 지키느니
이것도 지극한 그리움이 아니더냐
아름다운 것들아 - 박세현
러시아국립교향악단이 연주한 김민기의
「아름다운 사람」은
독한 아름다움에 관한 연주이자
순수한 슬픔에 관한
피할 수 없는 러시아식 번역이다
어떻게 해도 번역되지 않는 것들아
그러나 아름답고 쓸쓸한 조각들아
내가 네게로 가서 너의 몸이 될 것이다
나는 외롭더라 - 박세현
모르는 사실을
아는 듯이 말하고 있을 때
나는 외롭더라
죽음에 대해서
득도에 대해서
내가 손수 만지고 허문
삶에 대해서 말할 때는
더 그렇더라
사랑에 대해서
굴욕에 대해서
시집 『본의아니게』(문학의전당, 2011) 중에서
어떤 봄밤
손끝이 떨리고
가슴엔 파뿌리 같은 실금이 번진다
꽃피워본 적 없는 난초가
말라 죽은 제 이파리를 돌아보는 시간
창 밖의 목련도 급히 자신을 수습하느라
좋던 꽃봉오리 몇 놓쳐버린다
격렬비열도에 잠복하고 있던 바람이
비상등을 켜고 일제히 서해를 빠져 나가는 밤
11층 베란다 창을 활짝 열고
한 걸음만 내딛고 싶던
별쇄본 봄밤 / (박세현)
C도로에서 좌회전, 국민은행 옆에 차 바고, 청명
에 섞이는 봄저녁의 어둠발 소주 한 잔에 모
련이 핀다 내일 첫시간 강의는 잠시 잊고 쪼
옥 빨아당기는 금년판 봄을 구상한다 이
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무실동 원주에서 소초면까지
걸어갔다 봄밤이 그렇게 시켰다 노래 한 곡만 남기고 사라진
가수들이 내게 와서 클래식이 되는 밤 시
인은 몇 살에 죽어야 적당한가
앙리꼬 마샤스의
‘녹슨 총’을 빌려서 한 방, 저 밤의 속을 향해
한 방, 또 한 방 블루스 탱고
재즈 샹송 트롯 협주곡까지 비벼서 먹는 이
밤이 내게는 별쇄다
시월 - 박세현
아내를 따라 주택은행에 가서 멍하니
로비에 앉아 있는데
벽에 걸린 달력이 눈으로 걸어들ㅇ온다
알맞게 익은 기둥과 순한 처마와
주인의 속내 같은 붉은 곶감을
줄줄이 매단 초가집
그렇고 그런 상투성에 안심한다
그림 속 좁은 마루 끝에
걸터앉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나보다 먼저 무릎발로 기어간다
마당 위로 연한 그림자 드리웠는데
나는 오래도록 그림자를 주목했을 것이다
단말기 자판을 두들기고 있는
보조개가 맑은 여직원을 보다가
다시 달력 속에 살아 있는 그림자를 보았을 것이다
실체보다 진한 그림자의 윤각
저게, 삶이었을까
박세현 시집 『 사경을 헤메다 』,《열림원 》에서
지극한 그리움 - 박세현
살려고 할 때 밤이 오고
절망할 때 아침이 온다
깨끗이 살려는 마음은 형체 없이 사라지고
더 높게 살려는 의지는 말라버렸다
어쩌느냐 받아놓은 아침에
마음속 저 깊은 데 가라앉아 혼자 삭고 있는
마음 부스러기를 긁어모아 불을 지펴야 하느냐
마음은 자꾸 한쪽으로 기울고
산 넘어가는 석양은
무거운 마음을 받쳐주지 못하지 않느냐
나무라지 마라
마음은 어젯밤 흘러가던 물소리에 떠내려가고
나는 빈 몸을 지키느니
이것도 지극한 그리움이 아니더냐
* 끔찍한 미래 - 박세현
나 이제 부러워할 것이 없어졌다
부러워할 것이 없으니
부끄러워할 일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고대하던 민주 시대는 대강 와버린 것 같고
개혁 잔치도 얼렁뚱땅 끝난 것 같기에
나는 턱이나 괴고 세상을 보는 수밖에
그게 또한 나의 본업이 아니었던가
한때는 외국 작가의 소설이 부러워 잠을 설치기도 했고
어떤 여배우의 인터뷰를 보면서 그녀를 존경하기도 했다
당당한 신념으로 감옥을 향하던 지사의 신념도
내가 넘어설 수 없는 길이기에 부러운 품목이었다
내가 가지 못하던 길 위에서 일가를 이루던
사람들의 쾌주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었더냐
이제 세기말의 골목길에서 그러나 더 무엇을 부러워하며
나머지 인생을 축내며 살아가야 할 것이냐
나 이제 부러워할 것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어떤 것은 자살하고 어떤 것은 체포되고 어떤 것은 실종되고
어떤 것은 해체되어 드디어 커다란 혼음의 시대가 도래했다
소련이 망하고 성수대교가 붕되되듯이
한 순간에 모든 기준이 사라져갔다
이제 단 하나도 시샘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따라서 나는
문민 정부의 새벽 한시에서 두시 사이
저 창밖에 내리고 있는 말수 적은
빗소리를 받아적으며 늙어가야 하는가
* 출가 - 박세현
터미널에 나가
초가을의 뒷줄에 서서
원주행 직행버스를 끊고
좌석에 몸을 앉히고 안전벨트를 조이니
일찍 지던 해가 창에 몸을 숨긴다
일본제 라디오를 귀에 바짝 대고 있는
젊은 수녀의 손목에 걸린 묵주에도
가을 빛이 몇 올 위태롭게 건들거린다
이천을 건너뛰고
여주를 흘러갈 때
좌석에 묶여있던 몸이 벌떡 눈뜨고
가을 볕에 몸 비비며
얹혀간다는 느낌을 덜고자
제몸 안에다 부력을 마구
집어넣는 안쓰러운
가을 나들이
이 몸만의
출가
* 봄날 - 박세현
그런 게 있다,봄날
어떻게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어른들은 손살이 풀렸다고 하던데
그런 순간이었을까
탤런트 이정섭이 잘 부르던
봄날은 간다를 듣고 싶을 때
그도,아낄 게 있어야 한다며
함부로 부르지 않고 뺄때
그나이 든 귀여움처럼
아낄 게 있으면 좋겠고
빼고 싶은 일도 있었으면 싶은
순간에
잠시 빼는 시늉을 하며
능청스런 탐미주의의 한 극점을
한영애의 목소리를 빌려 들을 때
하르르 끼쳐오던 관능을
손으로 저어 뿌리치며
벚꽃 혼란히 흩어지던
정선 아리랑의 숨겨진 구절을
느리게 돌아나오다 갑자기
눈앞에서 모든 게 딱 정지되며
천천히 다가와 엉기는
그런 삶을 다시 연습하는
* 정직한 사람 - 박세현
잿빛 슬래트 지붕들이 다닥다닥 붙어
서로 가녀린 정을 이어붙이며 살아가는 나라
떠나는 사람은 또 어디론가 훌쩍 떠나가고
다시 오는 사람은 또 그만그만한 인생을 앞세우고
방 둘 부엌 하나인 사택으로 접어들어 살 같은 이웃이 된다
아직도 비어 있는 17호 사택의 벽바닥엔
정직한 사람이라고 씌어진 낙서와
그림책에서 오려낸 티티새 두 마리가
떠나간 주인의 생활을 회상하고 있다
* 그래 바로 그거야 - 박세현
공연히 마음 헤퍼지는 날
황당한 장소로 날아가고 싶다 그러나
날개를 달고 싶은 거냐 정말
그런 날은 가슴에 녹슨 칼을 품고
허름한 점퍼 속에 날개를 감추고
그래 바로 그거야
강문 바닷가쯤에서 솔바람 소리 바다 소리에 귀를 달고
먼바다에서 투항한 돌가재미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씹으며
칭얼대는 애인 같은 파도를 껴안는다? 아니면
마음 갈피에서 솟아난 유혹에 저주는 체 눈 한번 질끈 감고
초로에 접어들었을 옛 여자에게 전화를 걸어
수화기를 통해 꿀꺽꿀꺽 넘쳐나는 마음의
헛구역질을 참으며 무딘 날개를 퍼득여보리라
(더 늦기 전에 더 삭기 전에)
짐짓 가볍고 명랑한 어조로 감정을 던지리라
능청스럽게 삶의 표면을 가장해볼 수도 있으리라
그래 바로 그거야
눈썹을 휘날리며 사는 사람들이 일순간
가벼운 해학의 그림의 되지 않더냐
지난 가을에 입던 양복저고리 속주머니 같은 데
3.5인치 플로피 디스크 같은 곳에 나를 입력시켜두고
(단, 문서명과 암호는 아예 삭제할 것)
목성쯤에서 근사한 호프집이나 낼까
보고 싶은 놈들에게 삐삐나 빵빵 치면서
그러면 날개 없이도 한동안 너끈히 살겠다 안 그러냐?
* 정선가는 길 - 박세현
청량리역은 사람의 바다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 선 사람 앉은 사람. 기차시간이 임박하자 운명의 종이 울린 듯 겨드랑에 날개를 단 사람들은 분망하게 솟구친다. 시계탑의 시계가 현재의 시각과 현재 서울의 인구를 기록하고 있다. 숫자는 눈부시게 갱신된다. 정액의 총량.쾌락의 국민총화. 그 도저한 숫자 중의 한 방울이 역 구내로 들어선다. 그는 숫제 보이지도 않는다. 그는 없다. 앞뒤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말소리와 몸짓들이 그를 전송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사내가 사람들을 집단으로 전송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는 자기가 타야 할 기차앞에서 담뱃불을 붙이기 위해 허리를 굽힌다. 바람때문에 실패하자 그는 그대로 차에 오른다. 우리는 이 쇠약한 사내에게 약간의 여행비와 적당한 피로와 휴가를 함께 주면서 미지의 땅을 돌아오기를 권유한다.
1
걸어서 가보아야 할 땅
죽기전에 가보아야 할 지명
신작로를 따라 터벅대며 가보아야 할 국토
작은 절망 큰 절망
풀뿌리처럼 엉겨 사는 곳
봄이 오면 잊었던 꽃들 되살아오고
사람들 비탈진 밭에 나가 씨앗을 뿌리는 나라
씨앗은 그들의 한 됫박 숨찬 꿈이;다.
강원도 정선
사람의 이름으로 가보아야 할 마을
도라지꽃 같은 땅
삭은 부처 토막 같은 땅
자 이제 떠나자
우리의 여행에 끝없는 새 길이 열리기를
2
청량리발 정선행 10시 30분
사람들은 떠난다 손을 흔들며 손을 접으며
고개를 들고 고개를 숙이고 서울을 나간다
사내는 그들 틈에 끼어 떠나면서
다시 돌아올 기약을 잊는다.
가자. 떠나는 자가 남아있는 자들을 전송하리라
죽은 자가 산 자를 제사지내리라
가자. 오늘은 저 멀리 더 멀리 멀리까지 달려가자
다시 돌아오지 못할 심연의 끝으로 다가가듯
미지의 땅에서 마침내 소멸하고 싶은 마음으로
차창 밖을 향하면 서울은 오월이고 화창하다
여전히 버스와 승용차들은 빨리 달리기를 하고
공장의 굴뚝이 구역질을 토하고 있는 낙원
사람들은 오늘의 주식 시세에 귀기울이고
머리띠를 바꿔 맨 시위대는 새로운 팀웍으로 진출하고
탤래비전은 체육 중계에 여념이 없다
빌어먹을 서울 서울 서울
물러가라 소리쳐도 아무도 물러가지 않는 도시
저 쓸쓸하고 씩씩한 사람들 틈에서 내가 살았던가
늙은 개처럼 쓸쓸하게 살았단 말인가
경상도에서 전라도에서 강원도에서 허겁지겁 올라와
집을 짓고 사무실을 개설하고 창녀가 되고
돈을 만들고 돈을 위조하고 말을 만들고 말을 조작하고
물심양면으로 나누었던 아기자기한 악의 협동
나는 이제 떠나간다 떠나리라
잠시인지 영원인지 기약없는 채로
올동말동한 여행의 출발점에서
지도의 한 지점으로 달려간다 달려가리라
안녕. 서울. 안녕. 사람. 안녕. 도덕. 안녕. 꿈
안녕하라 급조된 서울의 발가벗은 평화여
그대들 인간적인 위선의 애드벌룬이여
늙은 노동자처럼 씩씩대는 기차의 등골위로 해가 진다
떠나자 떠나자 그러나 유혹이듯 등허리에 대고
속삭이는 다정한 이웃들
조용한 방 있어요 쉬다 가세요
기본이 만원입니다 영계 있어요
입구에서 대머리를 찾아주세요
남녀파트너 짝지워줍니다
영계라니 어린 병아리 말이냐
서울을 비우는 동안 당신들은 삼계탕이나 끓이고 있거라
안녕. 기차의 긴 울음이 도시의 마지막 호흡인 양 거칠다
3
정선으로 가는 길
자잘한 꿈들을 잠재우고 태백선 열차에 오르는 순간
나의 숙맥 같은 혈기는 풀대궁이 되어 흔들린다
어디에 꽂힌들 이 국토의 한구석이라면
쉬 잠들지 못하랴
37도 5분의 체온이 스며 있는 땅이라면 어김없이
달려가야 한다
이 땅에서 느낀 소외와 수모와 순간순간의 절망감을
쓰러뜨릴 수 있는 땅이 혹 있다면
기차가 닿고 완행버스가 닿고 지친 저녁이 다다르는 마을
그 감격의 땅으로 가야 한다
피로하고 지친 육신과 마른버짐 같은 꿈을 풀어놓으리라
시계는 10시 50분
지상의 시간 인간의 시간 문명의 시간
사람들이 합의하여 계산한 시간 너머로
껑충껑충 건너뛰며 달려가자
아직 꺼지지 않고 있을 등잔불의 마을을 향해
태백산맥의 깊은 계곡을 향해
자 가자.
* 선운사 - 박세현
동백꽃 보겠다고 떠난 길
인간적으로 굽어지던 호남고속도로 위에
때마침 분분하던 벚꽃 이파리들
마음 몇조각 흩뿌리며 선운사에 당도하니
일찍 핀 꽃들은 수삼 일 전에 져버렸고
방금 망울 맺힌 것들은 되레 나를 보겠노라 동동거린다
멀거니 동백꽃 떨어진 자리를 쳐다보고 섰자니
새끼 동백들의 키득대는 소리가 동백숲 그늘을 흔들고
몸을 빠져나가는 가슴 마르는 소리
계곡물 소리에 얹혀 급행으로 사라진다
내가 세상을 거들지 않으니
세상이 나를 거들리가...
* 빈 무대 앞에서 - 박세현
자정이 넘도록 술집
빈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여자 가수의 노래를 들었다
빌어먹을 년
고작 3인조 밴드에 마주어
그것도 변두리에서 하릴없는
월급쟁이들의 딱한 가슴에 제발
무엇을 호소하겠다는 것인지
상처뿐인 가슴에 다시는 아픔을
주지 말아 주세요 부탁이예요
잘 한다 니 팔자나 내 팔자나
쉬지 않고 다섯 곡을 불러대는
그녀의 짧은 생애와 긴 과거가
그녀의 머리칼만큼이나 길게 늘어지고 있을 때
그녀의 머리칼 올올이 솟구치는 뜨거운 거시기를 보면서도
나는 행복하지만 자정이 넘도록 술집
빈 무대 앞에서 나는 행복하지만
* 돌산 - 박세현
저렇게 무더기 지어 고스란히 쌓일 수 있다니
바람만 불어도 주르르 흘러 내릴 것 같으다
방안까지 굴러들어와 집 - 하고 물음을 토할 듯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뱉어 있는 검은 돌산
즘생처럼 살다 풀처럼 사위어버린 민초들이
속태우다 남긴 참숫덩이가 산을 이루다니
그들의 진신사리가 오로지 산을 이루다니
* 11 월 - 박세현
짧은 해 빨리 지는 겨울산에서
분분하게 나무를 떠나는 잎들이
바람 속에서 은근히 몸 바꾸며
새떼로 환생하는 풍경을 보았지요
숨길 수 없는 황홀감에 마음
한구석을 밀어 빈자리를 만들었지요
마음붙일 데 없는 새 한 마리
바람부는 내 마음밭에 와
마음마저 쪼아먹거든
나도 그놈의 부리 속에서
갈 길을 아는 새로 환생하고 싶었지요
* 가을저녁 - 박세현
똑 똑 똑
밤이 왔다
현관 앞에서 서성이는 잠의 등 떠밀고
어둠 엷게 탄 커피를 마신다
나뭇잎 지는 소리 사이로
가을 저녁을 마감하는 바람이 분다
마음 식는 소리
꿈도 저만큼 물러서거라
* 고도를 기다리며 - 박세현
사람을 기다리다 지쳐
누구를 기다리는지조차 잊음직할 때
테이블 위에 시키잖은 홍차가 배달되었다
찻잔 속에 무언가 가라앉은 형체가 보여
장난기 섞어 스푼으로 꾹 눌러본다
약간의 탄력으로 저항하다 스푼을 떼자
본모습으로 다시 돌아오는 물먹은 감정
나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화요일 저녁 한양대 앞 셀프서비스 찻집
인문대 쪽으로 오르다 발목을 삔 바람이
응급실 쪽으로 걸음 바꾸는 걸 보았다
* 치악산 - 박세현
날마다 아파트 문을 밀고 나아가니
到處, 발끝이 닿지 않는 허공이라
몸이 마음 떠밀지 못하고
마음이 몸을 이끌지 못하는 긴 항해
상한 마음 한 점 물고 급한 칠부 능선을
미끄러져 내리는 까마귀를 보니 낯선 얼굴가림이 내 길이요 꿈이었으리
살 발라내고 맨몸으로
자신을 供養하던 개옻나무가
자신의 가시로 제 살을 찌르는
不通의 세월,
망설이는 침묵이
내 안에서 저 산을 이루었으리라
* 원주 가는 길에 - 박세현
미탄에서 영월 사이
소나무 몇은 숨을 멈춘 채 죽어 있고
남은 여생을 어떻게 수습할지 모르는
잡목들이 집단으로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링거를 꽂고 있는 소나무 죽은 가지 위로
주민등록 없는 참새떼가 날아오른다
넋나간 영혼이, 죽은 나무의
혼백이 참새의 무등을 타고
미탄에서 영월 사이
생(生)으로 휘어진 길을 돌아가는데
길보다 크고 깊게 휘어지던 마음
내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내 것이다
미탄에서 영월 사이
싱겁게 터져버린 마음 골자기에 던지고 나니
마음 빠져나간 자리 큰바람 불어오더라
* 비 오는 날은 - 박세현
비 오는 날은 광릉내에 가
수목원 입구에서 정중하게 입장료 내고
숲으로 들어가서
하루쯤 나무가 되어보자
金宗三 詩碑 옆에서 서성대다가
담배 한 개비 태우고
자판기 커피 한 잔 뽑아 마시고
그러다가 그냥 돌아오자
젖은 떡갈나무에 얹힌 하늘을 쳐다보다가
코스모스 종종걸음치는 구식 풍경이 정겨운
꼬불꼬불 2차선 도로를 따라오며
위험한 삶의 속도를 시험받아도 괜찮다
비 오는 날은 무엇보다 광릉내에 가서
애티 나는 의경에게 불심검문당하며
삶의 알리바이를 검증받아도 즐거우리
비 오는 날 하루쯤....
* 시를 기다리듯이 - 박세현
한 편의 시를 위해서는
오지 않는 애인을 기다리듯이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할 것이다
한 편의 시를 위해서라면 잔머리 굴리지 말고
시의 싹을 틔우며 가꿀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어느 날 시가 내 앞에 왔을 때
얼른 일어나 맞이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열매 맺지 못하고 무심히 지나가는 시상이 있더라도
지나치게 시를 나무라서는 안 될 것이다
집 나간 마음을 기다리듯이
변심한 애인을 기다리듯이
마치 한 편의 시를 기다리듯이
지금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 박세현
사경을 헤매다 - 박세현
구름들, 치악산 능선 타고 흐르던 시간에
몸을 앞세우고 구룡사에 다다르다
대웅전 섰던 자리에
저런! 한순간,
장엄스럽던 종교는 불타버리고
불에 그을은 주춧돌만
익은 감자덩어리처럼 웅크린 채로
포복하듯이 햇살 속에 엎드려
미처 소진하지 못한 뜨거움 식히려
몸을 들썩이다
잿더미에 묻힌 풍경을 집었더니
바람소리, 무거운 쇳덩이몸을 버리고
맑은 얼굴, 느린 박자로
산문을 벗어나다
법당 어딘가를 일념으로 떠받치다
뜨거운 불 끝내 못 견디고 검게
녹아버린 대못 하나
외로운 아상(我相)을 게워내고
비로소 착해진 물건을 받쳐들며
묵념에 빠지다
아랑곳없이 산으로 몰려가는
단풍객들 헤치며 하산하려니
물소리에 젖은 단풍그림자
천천히, 내 안에서 불붙기 시작하다
『사경을 헤매다』, 열림원, 2005년.
본의 아니게 - 박세현
망상 해변이 늦된 철학개론서의 번안 같았습니다
아무도 못 보는 사이
잔파도 몇 소소롭게 부서지는 거 보았습니다
-나, 무사합니까?
-그 연세에 무사해서 뭣 혀?
수평선 흐트러질까봐 조심히 떠 있는
화물선 한 척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몸 가누듯이
겨우 정신 붙들고 내 곁으로 오는 거
생각 없이 그냥 보게 됩니다 배는
내 배에다 짐 부려놓고 등 뒤로 흘러갔을 겁니다
망상 해변에 서서 이 모든 상황 속에
본의 아니게 나를 꾸역꾸역 집어넣었습니다
이 시는 그 상황에 담기지 못하고
뭉개져 흘러나온 물건일 뿐입니다
본의 아니게 그날 빗방울도 몇 점 떨어졌습니다
*박세현 시집 『본의 아니게』
안식일 교회 - 박세현
증산역에서 사북읍으로 들어가다 보면
왼쪽 산 언덕배기에 허름한 나무십자가를 단
교회가 보인다
이제 아무도 구원할 수 없다는 듯
늙은 광부의 표정을 닮은 교회
오늘날 대개의 광부와
그 가족들이 교회를 구원하고 있다
참으로 종교적인 풍경이여
사경을 헤매다
구름들, 치악산 능선 타고 흐르던 시간에
몸을 앞세우고 구룡사에 다다르다
대웅전 섰던 자리에
저런! 한순간,
장엄스럽던 종교는 불타 버리고
불에 그을은 주춧돌만
익은 감자덩어리처럼 웅크린 채로
포복하듯이 햇살 속에 엎드려
미처 소진하지 못한 뜨거움 식히려
몸을 들썩이다
잿더미에 묻힌 풍경을 집었더니
바람소리, 무거운 쇳덩이몸을 버리고
맑은 얼굴, 느린 박자로
산문을 벗어나다
법당 어딘가를 일념으로 떠받치다
뜨거운 불 끝내 못 견디고 검게
녹아버린 대못 하나
외로운 아상(我相)을 게워내고
비로소 착해진 물건을 받쳐들며
묵념에 빠지다
아랑곳없이 산으로 몰려가는
단풍객들 헤치며 하산하려니
물소리에 젖은 단풍그림자
천천히, 내 안에서 불붙기 시작하다
―「사경을 헤매다」 전문
박세현 시인
1953년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 관동대 국어교육학과와 한양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에서 '김유정 소설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 받음. 1983년 《문예중앙》 여름호에 〈오랑캐꽃을 위하여〉를 포함해 10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 지은 책으로 『꿈꾸지 않는 자의 행복』, 『길찾기』, 『오늘 문득 나를 바꾸고 싶다』, 『정선 아리랑』, 『치악산』, 『본의아니게』 등의 시집과 연구서 『김유정의 소설세계』, 산문집 『설렘』 등이 있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