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트르 1세(Пётр I Алексеевич, 1672년 6월 9일 ~ 1725년 2월 8일)는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황제(재위 1682년 ~ 1725년)였다. 표트르 대 제(Пётр Великий 표트르 벨리키)로 불리기도 한 다. 표르트 1세는 현대화 정책과 영토 확장으로 루 스 차르국을 러시아 제국으로 성립하였다.
생애
초기
정치적 야인시대
1672년 표트르는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차르와 그의 두 번째 황후인 나탈리아 키릴로브나 나리시 키나 사이에서 알렉세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고, 형인 표도르 3 세 또한 일찍 죽자 정신지체 장애인인 둘째 형 이반 5세 대신 귀족과 러시아 혁명 전까지 러시아 정치와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던 러시아 정교회의 지지를 얻어 차르에 올랐으나, 이복누이 소피야 공주가 주 동한 쿠데타로 표트르를 지지한 귀족들이 숙청된 탓에 실권을 잃고 소년기와 청년기를 크렘린 밖에 있는 외인촌에서 지내야 했다. 그래서 화려한 의식 이나 불합리한 전통을 싫어했고 실리적이며 과학적 인 것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외인촌 생 활은 영국, 네덜란드등 서유럽 선진국가들에서 온 기술자들과 접촉하면서 최첨단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12살 때에는 석공술과 목수일을 배우는 데 많은 시 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때문에 젊은 나이에 말에 편 자를 박는 일, 대포를 주조하는 일 등 벌써 십여 가 지 이상의 전문적이고 특수한 기술을 많이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여러 방면에 관심을 쏟으며 생활하던 그는 1689년 모스크바 대귀족의 딸 로푸 하나와 결혼했다. 이 때부터 러시아 전통에 따라 성 년의 시기를 맞이하였으나 국사에는 참여하지 않았 다. 소년병들과 군인놀이를 하거나 기계를 관찰하 는 일이 생활의 전부였다.
전제군주가 되다.
그러던 중 1689년 모스크바 대공국은 흑해 진출로 를 확보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 즉, 터키와의 전쟁을 시작했으나 패배했고, 이를 계기로 귀족층이 소피 야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것을 기회로 자신 을 따르는 소년병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소 피야를 정교회 수녀원에 유배보내고 국사를 장악하 게 된다. 1695년 오스만 제국과 재개된 아조프 전쟁 을 계기로 표트르는 실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모스크바군이 전쟁 초기에 돈 강 하구의 오스만군 요새 아조프를 포위할 때 포병의 신분으로 참여했 다. 이 전쟁에서 아조프 포위 작전은 3개월이나 계 속되었지만 쉽사리 요새를 공략할 수가 없었다. 오 스만 제국은 당시 함대를 이용하여 탄약이나 식량 공급은 물론 보충 병력까지도 바다를 통해 지원했 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함대를 갖고있지 않은 모 스크바 대공국으로서는 이를 저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바다를 가까이 해왔고 특히 백해에 있을 때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선장들로부터 항해술 및 선박에 관한 제반 지식을 습득했던 표트 르는 이러한 난국의 타개책으로 함대 건설을 생각 하게 되었다. 그는 우선 함대 건설 기지를 위한 적정 장소를 물색했다. 그 결과 보로네즈가 선정되었고, 구체적 세부계획이 완성되자마자 바로 기지 건설에 착수했다. 그는 빠른 속도로 함선을 건조하면서 한 편으로는 해군을 조직하기 위해 수천 명의 젊은이 들을 강제로 끌어들여 훈련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리고 1696년 봄 해군을 편성하여 다시 아조프를 공 략해 쉽게 함락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오스만 제국 과의 전쟁은 일단락되었고 이 전쟁으로 표트르는 유럽 여러 나라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같은 해 표 트르의 형 이반 5세가 죽었다. 이 때부터 표트르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유일한 전제군주가 되었다.
통치와 개혁
서유럽의 기술공부
표트르는 오스만 제국의 압력에 맞서 좀 더 강력하 게 대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외국과의 동맹 을 계획했다. 이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 서유럽 여 러 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했고, 이때부터 서유럽의 기술도 배워올 수 있도록 사절단에 젊은 귀족들을 포함시켰다. 표트르 자신도 표트르 미하일로프라는 가명을 쓴 채 이 사절단에 합류하여 행동을 같이했 다. 표트르는 프로이센에 가서 포병 부사관으로 가 장하여 프로이센군 고위 지휘관에게 대포 조작 기 술을 익혔다. 그리고 네덜란드로 가서는 목수 신분 으로 선박 건조 기술을 익혔으며 영국에 가서는 수 학과 기하학을 친히 배웠다. 그는 곧 여러 분야에 걸 쳐 지식을 쌓게 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실제 그 일 에 종사하는 전문가보다 더 뛰어나기까지 했다. 또 한 관심의 폭을 넓혀 해부학과 응용과학에까지 손 을 뻗쳤다.
서유럽화 정책
그는 아직 몽골의 잔재가 남아 있던 러시아를 서유 럽화하는 것을 중히 여겼는데, 서유럽보다 발전이 늦은 러시아를 근대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표트르 는 서유럽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여성에게는 러시 아 전통의상인 긴 치마를 서유럽식으로 짧게 자르 라고 하였고, 무도회에 나와 술을 마시게 했다. 동 양의 영향으로 긴 수염을 기르는 사람에게는 수염 세를 매겼다. 또한 무질서하고 비능률적인 러시아 의 전체적인 행정기구를 그 기능상 좀 더 효율적인 임무 수행이 가능하도록 개혁하기 위해 유럽의 여 러 제도를 면밀히 조사하도록 한 뒤, 스웨덴을 모델 로 삼아 상설 행정 기구(12행정원, 군무성, 해군성 등)를 만들고 관리들의 관등을 정한 관등표를 제정 했으며, 성문법전을 만들었다. 또한 서구의 발달된 학문을 러시아에 소개하고 번잡하던 키릴 문자를 간소하게 개혁하여 문자를 쉽게 익힐 수 있게 하는 한편, 학술원을 세워 학문을 장려하였다. 또한 젊은 이들은 유럽으로 유학 보내서 서유럽의 학문을 익 히게 하였고, 유럽인을 초빙하여 유럽의 문화와 기 술의 도입에 힘썼다.
전쟁
스웨덴과의 대결
바다로의 교역로를 열기 위해 발트 해로의 진출이 필요했던 표트르는 1700년 스웨덴의 칼 12세에 대 항하여 덴마크, 폴란드가 맺은 동맹에 참가하여 스 웨덴과 대북방전쟁에 돌입했다. 전쟁 초기에는 전 사 왕(戰士 王)으로 자칭할 정도로 군사적인 재능이 뛰어난 칼 12세의 스웨덴 군에게 크게 패했으나 (1700년 나르바 전투), 표트르는 포기하지 않고 군 을 재정비하여 다시 스웨덴에 도전, 1709년 폴타 바에서 칼 12세가 친히 지휘하던 스웨덴 군에게 결 정적인 패배를 안겼다(폴타바 전투). 스웨덴으로의 퇴로가 끊긴 칼 12세는 남쪽 오스만 제국으로 도주 하여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었고, 이에 따라 1710 년 오스만 제국은 모스크바 대공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표트르는 1711년 오스만 제국의 도전에 맞서 기 위하여 남쪽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이때 표트 르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분에 몹시 들 떠 자신을 과대 평가하고 있었다. 그는 오스만 제국 의 속국인 왈라키아(루마니아), 세르비아, 몰다비아 등이 자신을 지원해줄 것으로 믿었으나, 그가 병력 을 이끌고 다뉴브 강에 도착했을 때 누구도 지원 병 력을 보내주지 않았다. 마침내 프루트 강변에서 오 스만군에게 포위되자 그는 희생을 줄이기 위해 항 복하는 대가로 아조프와 흑해 함대를 넘겨주었다. 망명 중이던 스웨덴의 칼 12세도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칼 12세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피해가 늘 어남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10여 년이나 계속했다. 본국으로 돌아온 표트르는 새 수도 상트페테르부르 크와 근처의 요새들, 그리고 크론슈타트의 조선 소에 강력하고 현대적인 대규모의 해군을 조직할 것을 명령했다. 표트르가 새로이 구축한 해군은 1719년 당시 ‘해상의 왕자’라 불리던 영국마저 두려 워할 정도였다. 표트르는 이 함대로 항코 해전(1714 년)에서 스웨덴 함대를 격파한 뒤 곧바로 육군을 동 원하여 핀란드를 강타하였고, 여세를 몰아 스웨덴 본국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숙적 칼 12세도 1718년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전사하였고, 스웨덴 왕위를 물려받은 칼 12세의 처남 프레드리크 1세는 모스크 바에 강화를 요청하여 1721년에 대북방전쟁은 모 스크바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스웨덴을 정복한 결과 고대 노브고로드의 영토를 회복했고 발트 해 연안에서는 강대국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그리고 이것을 발판으로 유럽 여러 나라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부터 모 스크바 대공국은 러시아 제국으로 선포되었다. 표 트르에게는 임페라토르(황제)라는 칭호가 붙여지 게 되었다.
만년
토목공사와 철권통치
만년에 표트르는 새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설 에 몰두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북방전쟁의 결 과로 획득한 발트해의 바닷가 불모지에 1703년부 터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바닷가의 황량한 불모지 에 건설되는 도시라 건설이 어려웠으나, 표트르는 옛 수도 모스크바를 벗어나 서구 유럽 어느 나라에 도 뒤지지 않는 화려한 수도를 건설하기를 원하여 많은 인명과 물자의 손실을 감수하면서 수도 건설 을 진행하였다. 토목공사에 지친 민중들의 마음이 사나워져서 반란이 일어나자, 표트르는 비밀경찰을 통해 많은 반대자들을 처형하였다. 반란에 가담한 자들중에는 표트르 황제의 외아들 알렉세이 황태자 도 포함되어 있었다. 알렉세이 황태자는 아버지 표 트르 황제가 러시아의 정신을 서유럽에 팔아넘긴다 고 생각해 암살하려다 발각되자 빈을 거쳐 나폴 리로 망명하였다. 하지만 표트르가 보낸 사신의 거 짓말에 속아 귀국하여, 재판을 받고 황태자 직을 박 탈당하였으며 1718년 고문 후유증으로 옥중에서 죽었다.
권력승계
제위는 알렉세이의 아들 표트르(뒷날의 표트르 2 세)가 상속받아야 했으나, 그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 로 표트르는 두 번째 황후 예카테리나를 제위 계승 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이는 여성의 제위 계승권을 부인하는 러시아 전통에도 맞지 않았고, 예카테리 나 황후의 혈통(발트해 지방의 독일계 평민)도 문제 가 되었으나 표트르는 강권으로 이를 밀어붙였다. 그러던 중 1724년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 현 장을 배를 타고 순시하던 표트르는 한 병사가 물에 빠진 것을 보고 그를 구하려고 친히 물에 뛰어들었 다가 폐렴에 걸린 것이 원인이 되어 다음해 2월 8일 사망하였다. 황후 예카테리나가 제위를 계승하여 예카테리나 1세로 즉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