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은 삶의 곤핍성을 청승맞게 드러내는 정서적 등가물이다. 몸이 뿜어내는 이 투명한 진액은 근대 한국인의 심혼에 내장된 절망과 원한을 암시하는 것일텐데, 삶을 부대끼게 만든 역사적·사회적 격랑의 근원성을 따져보지 않고, 단지 현대 한국시에 눈물과 슬픔이 지천이라고 해서 그것을 폄하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국권 상실, 일본 군국주의의 가혹한 수탈, 전쟁, 가족공동체의 해체, 가난이 실존의 보편적 양상으로 굳어진 사회에서 그로 인한 고통과 장애를 개별자의 도덕적 불성실과 연결짓는 것이 부당한 것과 같은 이치다.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어 흘리는 눈물과 슬픔은 체념과 달관으로 매개되는 도덕의 피안이자 도취의 한 영역이다. 그것은 제 생명과 제 식솔의 실존을 이어가기 위해 먹이를 구하는 일의 지난함에 빠져 있는 자가 불가피하게 살아내야 하는 삶의 곤핍성에 대한 정서적 응전으로 그 도덕적 정당성의 기반을 만들어낸다. 눈물과 슬픔을 수락하는 것은 개별자의 의지를 부당하게 꺾고 짓밟는 체제 구조와 타협하며 그 안에서 점진적 갱생을 이루겠다는 순응의 신호다.
어룰없이 지는 꽃은 가는 봄인데
어룰없이 오는 비에 봄은 울어라.
서럽다, 이 나의 가슴 속에는 !
보라, 높은 구름 나무의 푸릇한 가지.
그러나 해 늦으니 어스름인가.
애달피 고운 비는 그어오지만
내 몸은 꽃자리에 주저앉아 우노라.
라고 김소월이 「봄비」에서 노래할 때,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라고 서정주가 「문둥이」에서 노래할 때,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悲哀를 알고 있느냐
라고 김수영이 「비」에서 노래할 때,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라고 박재삼이 「울음이 타는 가을 강」에서 노래할 때, 그 “주저앉아 욺”, “붉은 울음”, “움직이는 비애”, “울음이 타는 가을 강” 등에서 넘쳐흐르는 눈물은 슬픔이 한국 현대시의 보편적 정서 현상임을 드러낸다. 한국시에서 눈물과 슬픔의 심미성은 그것을 낳은 사회적 조건의 잔혹성에서 대한 관찰이 아니라 그것이 보다 복잡한 삶의 구체적 양상 속으로 삼투하여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길항하는 힘으로 작동할 때 선명해진다. 한국인의 독특한 정서인 한은 눈물과 슬픔의 뿌리다. 그것은 외부 조건에 의해 피동화된 주체의 내면에 구조화된 거듭된 좌절의 결과물이자 인격을 규정하는 억압적 요소이지만, 모순을 끌어안는 역동성을 갖고 있다. 죽을 처지에서 오히려 그 죽을 처지를 조용히 수납함으로써 삶의 처지로 바꾸는 힘이 곧 한이다. 김소월이 「진달래꽃」에서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라고 노래할 때, 혹은 김수영이 「여름 아침」에서 “江물은 滔滔하게 흘러 내려가는데 / 天國도 地獄도 너무나 가까운 곳 / 사람들이여 / 차라리 熟練이 없는 靈魂이 되어 /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가래질을 하고 고물개질을 하자”라고 읊을 때 한은 주체를 피동화되는 정서가 아니라 현실의 모순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한을 빚어낸 정황과 모순은 흘러가 사라지지만 한은 살아 있는 동안 계통발생적 기억의 유구한 흐름으로 삶의 저변을 적신다. 그것은 “도도하게” 흘러가는 강물이다. 그것에 숙련되려고 애쓰기보다는 차라리 “숙련이 없는 영혼”이 되어 “씨를 뿌리고 밭을 갈고 가래질을 하고” 삶을 살아내는 게 도덕적으로 옳다. 박재삼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에서는 “서러운 사랑 이야기”와 “가을 햇볕”이 만나 “눈물”이 되고,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이 된다. 이 시의 핵심은 친구의 애련한 첫사랑의 이야기가 시적 화자의 정서적 공유물이 됨으로써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처음”으로 발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 있다. 소극적 체념이 아니라 자연의 거대한 흐름이 예시하는 절대 긍정 속에서 슬픔이 기쁨으로 전환되는 계기를 찾아냄으로써 한의 독특한 윤리성과 심미성이 나타난다. 도도하게 흐르는 해질녘의 강물 위로 일몰의 빛들이 자글자글 타오르고 있다. 강물이 태우는 것은 다름아닌 시적 화자와 친구의 “서러움”이며 “울음”이다. 이 시 전체를 감싸는 밝은 기운은 부정적인 슬픔을 정화시킨 뒤 찾은 긍정의 힘 때문이다. 이렇듯 한은 기쁜 슬픔, 혹은 웃음을 머금은 울음이다.
한은 한국문학의 DNA다. 한은 김소월·한용운 이래로 기형도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시의 가장 탁월한 미학적 성취들 속에서 한결같이 시린 삶에 대응하는 우성인자로 발견된다. 그것이 외부에서 주어지는 거듭된 수난과 고통에 대한 주체의 비애나 허무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상식에 속하는 지식이다. 그러나 한은 그렇게 단순한 이해에 의해 그 실체가 포획되지 않는다. 그것은 소극적·자폐적 정서의 침전물이 아니다. 한은 民族誌學의 맥락에서 그 실체가 드러나는데, 그 연원은 아주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연대를 확정지을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이 근대 이후 한반도인의 삶이 고통과 구조적인 폭력 속에 고스란히 노출되면서 더욱 또렷해졌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채이고, 밟히고, 찢기고, 꺾이고, 빼앗기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식민지 지배체험, 전쟁과 분단, 군사정권의 폭압 속에서 겪은 생명의 危害에 대한 경험들은 내면에 불행의식과 함께 비애의 정서를 누적시키며 그 부피를 키워왔다. 굶주림, 질병, 전쟁, 감금, 고문들이 일상화된 세계 속에서 죽음과 소멸은 늘 가까이 있고, 평안과 지복의 꿈은 실현불가능한 아득한 것으로 멀리 있다. 이 누적된 내면의 비애, 즉 슬픔과 원한의 결정체에 신명이 결합하면서 화학적 변화가 일어난다. 존재와 부재 사이에서 잉태하는 무상한 슬픔에 사랑과 긍정의 힘들이 배어들면서 그것은 비상한 활력과 생동감을 갖게 되었다. 본디 한의 발생론적 근거는 피지배 계층의 내면에 응어리진 외상성 기억이지만, 한반도인의 낙관적인 기질과 결합하면서 기억앙진과 기억상실의 사이에서 그 부정적 영향력을 지우고 신생을 향해 밀고 나아가는 생명의 원초적 활력이자 충동으로 전환되었다. 비극에 대한 개체의 경험을 계통발생학적 기억으로 수렴하면서 한은 그것을 낳은 구체적·개별적 ‘기억’을 배제하고 민족적 정서로 공용화함으로써 한반도인의 내면에 생리와 기질로 굳어진 것이다.
2. 전라도의 문학지리학
강물도 담벼락도
돌무더기도 불이 붙는
이 척박한 땅에 귀는 짤리고
바람은 일어
돌개바람 햇빛을 가려
칼날선 황토에 눈멀었네
뜨거운 남쪽은
반란의 나라
거역하다 잘린 목이 다시 웨치다
웨치다 찢긴 팔이
다시금 거역하다
쇠사슬채 쇠사슬채 몸부림치다 이윽고
멈춰버린 수수밭
멈춰버린 멈춰버린 아아 멈춰버린
시퍼런 하늘아래 우뚝 우뚝 타버린
장승이 우네
뜨거운 남쪽은 반란의 나라.
김지하, 「남쪽」
전라도는 삼한의 땅, 그리고 백제의 땅이다. 백제가 망한 뒤에는 그 유민들이 신라와 당나라에 저항했고, 후백제는 고려에 항거했다. 삼별초군이 몽고와 맞선 싸운 곳도 전라도다. 임진왜란 때 의병 항쟁과 의병을 돕는 일이 가장 활발했던 곳도 전라도다. 권력과 지배세력에 대한 저항과 거역은 전라도가 내면화하고 있는 아주 뿌리깊은 지역적 정서다. 김지하의 초기시인 「남쪽」을 읽으면 김지하의 내면에 각인된 전라도 사람이라는 자의식을 엿볼 수 있다. 한반도의 서남쪽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 ‘남쪽’은 “척박한 땅”, “반란의 나라”다. 전라도는 “귀는 짤리고”, “칼날선 황토에 눈”머는 곳, “거역하다 잘린 목”, “웨치다 찢긴 팔”의 땅, 쇠사슬에 묶인 채 몸부림치는 곳이다. 어느 정도 시적 과장이 섞여 있긴 하지만, 이렇듯 전라도는 한많은 땅이다. 억누름과 빼앗김, 그리고 따돌림의 세월을 건너오는 동안 전라도는 한많은 땅이 되었다. 전라도가 한많은 땅이 된 데는 전라도 사람들에 씌워진 부당한 멍에 탓이다. 그것은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다. 그 그릇된 이해의 핵심은 전라도 사람들의 성정이 다른 지역의 사람들보다 특별히 더 나쁘고 비루하다는 편견이다. 그 편견은 오랜 세월 동안에 사실로 굳어져 전라도 사람을 차별하고 따돌리는 것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한다. 잘못된 오해와 편견이 ‘호남 차별’의 발단이며 핵심이다. ‘전라도’라는 지명은 땅을 식별하는 기호가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 깃든 천박한 성정, 즉 기만과 술수, 배신과 간사함의 기호가 되었다. 그런 차별과 따돌림은 당하는 사람의 내면은 슬픔과 치욕, 분노와 한, 자학과 청승으로 물든다. 가장 나쁜 것은 피해자들이 가해자들의 주장을 내면에 원죄로 각인하고, 그것을 자학과 체념, 자기혐오의 정서적 근거로 고착화시킨다는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한많은 땅의 사람들이 그 한많음을 서로 기댈 수 있는 도덕적 당위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승화는 현실 원칙들을 사회적으로 공인되는 가치들로 끌어올리는 것을 뜻한다. 광주에서 나고 자란 시인 李盛夫(1942 ~ )의 초기시편들인 「전라도」·「백제」연작시편들은 전라도 사람의 정체성을 시적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벼는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산다.
이성부, 「벼」
그 “서로 어우러져” 기댐은 차별과 수탈로 인해 열악해진 사회적 조건에 대응하는 윤리적 당위를 말해준다. 쓰러지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는 힘에 윤리적 당위를 부여하는 것은 “노여움”, “넓디넓은 사랑”, “피묻은 그리움”, “넉넉한 힘” 따위이다. 억눌림과 따돌림은 불가피하게 개체적 생존을 제약하는 부당하고 불합리한 사회적 모순이지만, 전라도 사람들은 이것으로 인해 알게 모르게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적 모순이 전라도 사람의 내면에 분노와 연대에의 열정, 그리고 자기연민을 촉발하고 키웠을 것이다. “서로 어우러져 기대고” 사는 “벼”의 이미지에서 더불어 평등하게 사는 삶의 이상적 실천을, 즉 윤리적 당위를 발견하게 한 것은 전라도가 멸망한 백제 殘氓의 땅이라는 향토적 자의식, 혹은 운명애일 터다.
전라도는 한반도의 서남부에 위치해 있는 땅이다. 노령산맥이 전라남도-북도의 경계를 이루며 서해 쪽으로 뻗어나간다. 소백산맥은 두 줄기로 뻗어 이 땅의 중요한 산계를 이루는데, 한 줄기는 곡성의 설산을 기점으로 광주의 무등산, 영암의 월출산, 해남의 두륜산 등을 일으켜 세운 뒤 남해로 빠지고, 도의 동쪽으로 뻗어 달리는 다른 한 줄기는 지리산으로 우뚝 솟아 경상남도와 경계를 짓는다. 지리산은 높이 1,915미터의 주봉 천왕봉을 비롯해 , 반야봉, 노고단, 엄천봉, 화엄봉, 구룡봉, 중봉, 창불대, 좌고대 따위의 봉우리를 거느린 남한의 명산이다. 전라북도의 남원군, 경상남도의 함양군과 산청군, 전라남도의 구례군에 걸쳐져 있는 지리산은 신라 때는 중악인 공산, 동악인 토함산, 서악인 계룡산, 북악인 태백산과 함께 남악으로 다섯 명산 중의 하나에 들었다. 조선 시대에도 중악인 삼각산, 동악인 금강산, 서악인 묘향산, 북악인 백두산과 남악으로 꼽히며 명산 반열에 들었다. 전라남도의 중요한 수계는 섬진강, 영산강, 탐진강을 중심으로 발달되어 있다. 섬진강은 지리산계에서 발원해 산과 산 사이를 굽이쳐 내려와 동북부에 위치한 곡성의 창고평야와 구례평야를 적시고 흘러간다. 영산강은 도의 동북쪽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구릉지대를 이루고 있는 담양, 광산, 나주, 영암 등 서남부의 너른 들을 휘감고 흐른다. 세 강 중에서 가장 남쪽에 자리한 탐진강은 장흥과 강진을 가로질러 남부 평야에 물줄기를 대주며 흘러간다. 전라남도의 또 다른 지형적 특징은 서쪽과 남쪽으로 바다를 품어 긴 해안선을 끼고 있고, 2,900여개를 이루는 전국 섬 중에서 65퍼센트에 해당하는 1,891개의 무인도와 유인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전라도는 땅이 기름지고 대체로 해양성 내륙기후의 특징을 보이는 날씨는 연간 강우량이 풍부하고 온난하여 농사짓기에 적당해서 농산물이 풍부하고, 서남 연안으로 바다를 끼고 있고 크고 작은 섬들이 많아 해산물도 넘쳐난다. 『택리지』에서도 생선·소금·벼·깁[絲]·솜·모시·닥·대나무·귤·유자 등이 풍부하게 생산된다고 일렀다. 농경시대의 전라남도는 천혜의 자연조건과 사람들의 부지런함이 더해져 사람살기에 두루 넉넉한 땅이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이 소출을 풍부하게 내는 비옥한 땅에 살면서도 살림이 곤궁했던 것은 봉건 왕조 세력의 가혹한 조세와 부패한 관리들의 그악스런 수탈 때문이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듯이 조선 왕조 후기에도 조정과 관리들은 전정과 군정과 환곡을 통해 농민 수탈을 그치지 않았다. 조세라는 명목으로 소출의 사오할을 뜯어가고, 지방 관리들은 부임과 이임의 때에 맞춰 축하금이다 전별금이다 하며 갖가지 구실을 대어 훑어가니 농민들은 앉은 자리에서 눈뜨고 소출의 대부분을 빼앗기는 형편이었다. 양반 토호들은 대토지를 점유하고 농민들을 소작인으로 전락시켰으니 이래저래 살기에 어려워진 많은 농민들이 농토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화전민이나 산적떼로 변신한다. 봉건 왕조가 무너진 뒤에도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 통치 기간 중에 수탈은 더욱 조직적이고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역사학자 조동걸이 지은 「일제하 한국 농민 운동사」에 따르면, “지주의 횡포는 소작권을 주거나 빼앗는 것을 무기로 하고 있었고, 농감 또는 사음의 중간착취도 잔학하기 그지없었다. 소작인은 때로는 그의 아내까지 바쳐 가며 소작권을 부지해야 했고, 아니면 죽거나 살기의 판가름을 놓고 소작쟁의를 벌여야 했다.”고 그 참상을 밝히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나고 자란 땅을 버리고 떠나 타관을 떠돈 것은 수확한 곡식을 거의 다 빼앗기고 풀뿌리와 나무뿌리로 연명해야 하는 잔혹한 가난의 현실 때문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근대의 산업화 과정에서 농업 자원들이 새로운 투자 자원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정책적으로 따돌림을 당하면서 여염집 살림은 팍팍해져 1960년대 이후 가난에 지친 사람들이 농토를 버리고 떠나는 離農 현상이 가장 광범위하게 나타난 땅이 되고 말았다.
전라도는 오랜 세월 동안 따돌림과 억눌림, 즉 비호감과 혐오의 땅이었다. 정치 권력의 소외로 인한 푸대접과 집단적 따돌림은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면서 시작되었으니 그 연조가 꽤나 깊은 셈이다. 정복자 신라는 백제 유민을 푸대접했고, 그 전통은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견훤을 평정한 뒤에도 이어졌다. 거려 태조는 「태조 훈요 십조」에서 “차령 남쪽과 금강 아래 지역은 산의 모양과 땅의 형세가 거슬리게 뻗어서 인심도 그와 같다. 그러므로 그 아래 지역 사람들이 조정에 들어와서 왕가나 왕의 인척과 혼인하여 나라의 권세를 잡으면 나라를 어지럽게 하거나 백제 통합의 원망을 품고서 임금을 범하기도 하고 난을 일으키기도 할 것이다. 또 그 전에 관가에 매여 있던 노비나 잡직의 천한 무리들이 권세가에 기대서 빠져나가려 하거나 또는 왕가에 붙어 간교한 말로 권세를 농락하고 정사를 어지럽혀서 재앙을 불러오는 놈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러니 비록 양민일지라도 벼슬자리에 있으면 정사를 보게 해서는 안된다.”라고는 말을 남겨 전라도 사람들을 권력의 핵심에 등용하는 걸 철저하게 배제하게 했다. 「훈요 십조」에서 눈여겨 볼 대목은 풍수지리를 나라의 지배이데올로기로 삼았다는 점이다. 이는 지방 호족들의 느슨한 협력과 타협, 혼인을 통한 擬制家族的인 관계에 기반한 연합적 성격을 가진 고려의 취약한 왕권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태조는 전라도의 산과 땅의 형세가 逆像이라 이곳 사람들의 인성과 기질에 배인 반역의 기운이 나라를 어지럽힐 것이라고 염려했다. 허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백제인들의 끈질김과 진취적인 기질은 산이나 땅, 혹은 물과 같은 자연지리의 順逆과 상관없는 일이다. 전라도 사람을 정치 권력에서 배제한 것은 후백제의 끈질긴 저항에 질린 태조가 이곳 사람들의 진취적인 기상에서 비롯되는 혁명과 개혁의 기운을 아예 싹도 내밀지 못하게 누르려는 책략이었다. 전라도 사람을 정치 권력의 방외로 내친 옹졸한 봉건 집권 권력의 이러한 비이성적 따돌림과 푸대접, 그리고 억누름은 조선 왕조 중기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이어졌다.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오랜 세월의 소외와 편견과 수탈이 남긴 것은 풀지 못한 원한과 저항하는 기질이었을 것이다.
아침 노을의 아들이여 전라도여
그대 이마 위에 패인 흉터, 파묻힌 어둠
커다란 잠의, 끝남이 나를 부르고
죽이고, 다시 태어나게 한다.
짐승도 藝術도
아직은 만나지 않은 아침이여 전라도여
그대 심장의 더운 불, 손에 든 도끼의 고요
하늘 보면 어지러워라 어지러워라
꿈속에서만 몇 번이고 시작하던
내 어린 날, 죽고 또 태어남이
그런데 지금은 꿈이 아니어라.
사랑이어라.
光州 가까운 데서는
푸른 삽으로 저녁 안개와 그림자를 퍼내고
시간마저 무더기로 퍼내 버리면
거기 남은 끓는 피, 한 줌의 가난
아아 사생아여 아침이여
창검이 보이지 않는 날은
도무지 나는 마음이 안 놓인다.
드러누운 山河에는
마음이 안 놓인다.
이성부, 「전라도 2」
다시 읽어보니 「전라도」·「백제」연작시편들은 상당히 추상적이다. 「전라도 2」에서 “이마 위에 패인 흉터, 파묻힌 어둠”, “커다란 잠의, 끝남”, “심장의 더운 불, 손에 든 도끼의 고요”, “푸른 삽으로 저녁 안개와 그림자를 퍼내고”, “거기 남은 끓는 피, 한 줌의 가난” 들은 차별과 억누름에서 비롯된 고통에 대한 모호한 은유에 그치고 있다. 어쨌든 이 시는 전라도라는 장소에 대한 자의식을 모호하게나마 드러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성부의 내면에 각인된 전라도는 흉터이며 어둠이고, 끓는 피며, 한 줌의 가난이다. 시인은 정신의 퇴적층 속에 새겨진 전라도라는 상처와 원죄를 발굴하며 그것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촉구한다. 이성부는 전라도를 우리 시의 뜨거운 상징으로 새기며 문학지리학에 등재하는 데 기여를 한 시인이다.
3 無等의 땅, 화엄 광주
한 나라가 다시 살고 다시
어두워지는 까닭은
나 때문이다. 아직도 내 속에 머물고 있는
광주여, 성급한 목소리로 너무 말해서
바짝 말라 찌들어지고
몇 달 만에 와보면 볼에 살이 찐,
부었는지 아름다워졌는지 혹은 깊이 병들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고향, 만나면 쩔쩔매는
고향, 겁에 질린 마음을 가지고도
뒤돌아 큰 소리로 외치는 노예, 넘치는 오기
한 사람이, 구름 하나가 나를 불러
왼종일 기차를 타고 내려오게 하는 곳
기대와 무너짐, 용기와 패배,
잠, 무서운 잠만 살아 있는 곳, 오 光州여.
이성부, 「光州」
전라도의 핵은 광주다. 본디 전라도라는 이름은 전주와 나주의 머릿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광주는 전라남도의 중심 지역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광주는 물길과 넓은 농토를 끼고 있는 나주에 비해, 그리고 외래 문물의 반입창구 역할을 하는 목포에 비해 지역의 지리적 구심점으로 발전하는데 지정학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갖고 있다. 그런 까닭에 광주가 조선시대 말까지 나주나 목포에 비해 발전이 뒤쳐진 사실은 당연하다. 광주가 전라남도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된 것은 해방 뒤의 일이다. 광주는 백제 시대에는 무진주로, 통일 신라시대에는 무주라는 이름을 가졌었다. 광주가 광주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고려 태조 때인 서기 940년경이다. 광주에 전라남도의 도청이 들어서고 호남의 정치, 경제, 상업의 중심도시가 된 것은 그리 긴 역사가 아니다. 그 광주가 한국 현대시문학의 가장 중요한 상징공간으로 떠오른 것은 1980년 광주 시민항쟁을 겪은 뒤의 일이다. 1970년대의 들머리에 씌어진 이성부의 「光州」는 10년 뒤쯤에 다가올 광주 항쟁에 대한 예언시처럼 읽힌다. “기대와 무너짐, 용기와 패배, / 잠, 무서운 잠만 살아 있는 곳, 오 光州여.” 이성부의 미적 감수성이 선취한 직관과 예지력은 전율을 느끼게 한다. 시인은 광주에 내재된 선험적 조건들을 미래적 前兆들로 변환해 읽어낸 것이다. 군사정권의 폭압 정치가 자유와 민주화에의 열망을 억누르자 나라는 마치 증기 구멍이 막힌 압력밥솥 같은 진공 상태에서 내압이 높아져간다. 고문과 불법감금, 의문사가 속출한다. 박정희가 측근에 의해 제거되며 숨통이 트이는가 기대를 했는데, 이내 신군부라는 또 다른 독재자들이 그 빈자리를 꿰차고 앉는다. 그리고 광주항쟁의 유혈진압과 인권유린이 이어진 것이다. 시인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민주화 항쟁과 민간인 학살이 있기 전에 이미 광주에게 뜨거운 정치적 상징의 옷을 입히고 있다.
숱한 민란에서 동학농민혁명, 일제에 항거한 광주학생운동, 그리고 1980년 광주 시민항쟁까지 숱한 파란과 피의 역사를 광주를 지어미처럼 품고 있는 無等山은 광주의 母山이자 표상적 공간이다. 무등산의 ‘無等’은 『반야심경』에 나오는 ‘無等等’에서 연유한 것이다. 무등산이란 이름은 부처가 깨쳤다는 절대 평등, 완벽한 평등이란 속뜻을 품고 있다. 무등산은 해발 1,187미터의 높이를 가진 제법 큰산인데, 그 능선은 완만하면서도 넓은 고원을 품고 있어 전체적으로 밋밋한 형상을 하고 있다. 무등산은 흙산이다. 그러나 산 정상을 이루는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은 우람한 바위로 덮여 있다. 남쪽으로 해발 8,9백미터의 장불재가 자리하고 있는데 고원성 산지를 이루고 있고, 장불재에서 천제등을 넘어 바람재와 향로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험란하지 않은 굴곡을 그리며 광주 시가에 잇닿는다.
가난이야 한낱 襤樓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山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靑山이 그 무릎 아래 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수밖엔 없다
목숨이 가다 농울쳐 휘여드는
午後의때가 오거든
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어라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럼히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어느 가시덤풀 쑥굴헝에 뇌일지라도
우리는 늘 玉돌같이 호젓이 무쳤다고 생각할일이요
靑苔라도 자욱이 끼일일인것이다
서정주, 「無等을 보며」
점심 시간에 몰려나와 개고기를 먹는
뻘 뻘, 물수건으로 얼굴을 닦아가면서
저 뜨거운 佛性을 우그작우그작 먹어치우는
빤들빤들한 健康體들이 내 눈에는, 허깨비 같다
허깨비 같다, 훅 불면 바슬바슬
진흙먼지 흩어지는
몸의 일부들이
全南大學 大學病院 로터리 한켠
湖南義手足館 유리 진열대에 놓여 있다
볼트로 관절을 연결한 플라스틱 다리들, 팔뚝들
그리고 자잘한 손금이며 퍼런 실핏줄하며
분홍빛 손톱의 흰 초승달가지
영락없이 ‘살아 있는’ 사람 손 같은 살색 고무손,
前生代 얼음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저기, 아직도 구멍 흔적이 남은 대학병원 붉은벽돌 앞
히말라야소나무를 가리킨다, 가리키는 듯하다
링겔병을 꽂은 채 환자가 소나무 아래
휠체어에 앉아 있다
아, 아픈 사람만이, 實感난다, 사람 같다
비로소 사람에 가까워지려 저렇게 끙끙거리는
푸른 세로줄 무늬 환자복이 휠체어를 밀며
히말라야山으로 가고 있는 사이
또 錦南路에 대학생이 나타났는지
十方으로부터 길이 방사선으로 들어오는 로터리,
꽉, 막혀 있다
목에 쇠가시가 걸린 듯
무쇠 말들이 車線에서 크락션 방귀, 빵빵거리면서
헛 時間을 뀐다
하루하루 삶이 그저 日當이지만
삶, 바로 그것이 時間性이기 때문에
축 늘어진 사람을 업고 누군가 응급실 쪽으로 뛰어가고
湖南義手足館 건너편 보신탕집 앞
르망, 스텔라 들이 금덩어리 개새끼처럼
땡볕 아래 무릎을 꿇고 있다
황지우, 「湖南義手足館 」
1980년 이후 광주에게 덧씌워진 장소적 정체성은 피의 代贖과 정치적 희생양, 그리고 야만과 불의, 죽임과 억누름에 대항해 일어서는 비타협적 항쟁이라는 것이다. 이 땅에서 광주란 지명은 더 이상 호남 내륙에 있는 단순한 행정지명이 아니라 피로 씻긴 땅, 피로 씻겨 聖化된 정서와 이념의 상징이 되었다. 巨惡에 의해 짓밟혀 초토가 된 땅은 그것에 내재된 세속성에도 불구하고 율도국, 이상향, 화엄의 세상으로 거듭난다. 광주는 그냥 광주가 아니라 민주와 평등이라는 이념에 의해 성화된 ‘화엄광주’(황지우)인 것이다. 시인들은 그런 광주를 다투어 호명했다. 김준태가 호명하고, 고정희가 호명하고, 황지우가 호명하고, 임동확이 호명한다. 소설가 임철우가 호명하고, 정찬이 호명한다. 아니, 그들이 광주를 호명한 것이 아니라 광주가 그들을 찍어 호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서정주의 「無等을 보며」와 황지우의 「湖南義手足館」의 사이에 가로놓인 이념적 거리는 크고 넓다. 서정주의 광주를 감싸 안고 있는 무등산과 그 아래 광주를 상상력은 비정치적이다. 서정주는 가난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靑山이 그 무릎 아래 芝蘭을 기르듯”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의 숭고함을 수락하라고 속삭인다. 삶에 관여하고 그것을 규정하는 큰 테두리에 대한 반성적 이성을 배제하고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럼히 우러러보고 /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라고 하는 것은 몰정치적이고 역사순응주의적인 태도다. 그 의도적 비정치성은 역설적으로 이 시를 정치적 함의라는 틀 속에 놓고 읽게 만든다. 순수하다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불순한 것이다. 반면에 황지우가 그려내는 광주의 풍경은 시대적 약호로서의 이념과 정치적인 색채로 착색되어 있다. 황지우의 시적 화자는 무연한 시선으로 물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개고기를 먹는 세속의 풍경, 대학병원, 링거를 꽂은 채 휠체어를 밀고 가는 환자, 보신탕집과 그 건너편의 호남의수족관, 금남로, 차들로 꽉 막혀 있는 도심 로터리를 훑어간다. 이 시의 중요한 시대적 약호는 대학병원 붉은 벽돌 담에 아직도 남아 있는 “구멍 흔적”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는 1980년 5월 항쟁의 흔적일 것이다. 아마도 대학생과 민간인들의 시위에 무력진압을 시도했던 계엄군들이 발사한 총알이 남긴 흔적일 것이다. 그 총알이 대학병원 붉은벽돌 담에만 남겨놓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총알은 사람의 머리를 뚫고 지나가고, 어떤 총알은 사람의 배를 뚫고 지나갔을 것이다. 사람들은 어느덧 그 민간인 학살이라는 끔찍한 기억을 저의 뇌에서 밀어내고 범속한 삶으로 밀려나간다. 그 총알이 새겨놓았을 대학병원 붉은 벽돌 담의 “구멍 흔적”과 “호남의수족관”의 “플라스틱 다리들, 팔뚝들”, “살색 고무손”은 의미의 맥락에서 상호조응한다. 그것들은 서서히 망각되어가는 1980년 5월 광주항쟁이 남긴 죽음과 상처들, 훼손된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보라고, 잊지 말라고 말한다.
희망이 없는 곳에
‘희망’이 있다 했지
그 ‘희망’을 면회하러 온 가족들이
교도소 입구
‘담요 이불 한복’이라고 쓰인 집들 앞에
서성이고 있다
시국 사범 가족들은 그래도
당당하고 어딘가
고상한 態가 나지만
우연한 싸움으로 남을 죽인 자
남의 가정을 파괴하는 자를
자식으로
남편으로 둔 사람들
바깥에서 ‘꼽’으로 죄인들이다
멀리 미류나무 숲에
까치 둥지처럼 앉아 있는 흰 망루
그래도 그 둥지 안에 든 내 새끼에게
늦은 한복 한 벌 넣어주고 나오는
가난하고 흉악한 罪의 어머니,
‘희망’이라고 쓰인 버스 정류장에 서서
무엇인가 기다리고 있다
황지우, 「광주교도소」
황지우의 「광주교도소」는 교도소 입구의 정경을 묘사하고 있다. 교도소 입구는 시국사범 가족과 잡범들의 가족들이 뒤섞여 법석인다. 교도소 안/밖은 어떤 숭고한 대의도 머금을 수 없는 비천한 삶의 자리다. 시인은 광주에 또 다른 상징기호의 옷을 입히는데, 그 옷은 ‘교도소’라는 이름의 언표적 표상이다. ‘큰 정치’가 규정하고 포획한 ‘작은 삶’들로 북적이는 곳, 강제적 통제의 권력에 의해 움직이는 교도소는 인생의 막장, 의미 零度의 공간이다. 수난과 고난을 겹으로 견뎌내야 하는 광주에서 삶을 이어가는 일의 지난함을 드러내기 위해 시인은 광주라는 시공간에 교도소라는 무의식적인 은유를 슬쩍 입혀놓는다. “內航船이 배때기로 긴 자국 / 지나고나니 길이었구나”(「길」)와 같은 시구는 삶을 살아내는 일의 고단함을 엿보게 한다. 광주는 교도소와 같은 극지, 차별과 따돌림의 땅, 그래서 더욱 척박한 곳이다. 그 광주에서 의미 있는 삶을 세운다는 것은 그 고단함이 겹이 된다. 광주가 교도소라면 그 바깥에 있는 사람은 “가난하고 흉악한 罪의 어머니”이며, 교도소에 갇혀 있는 흉악한 수인이다. 시인은 광주는 오직 희망 없음을 통해서만 삶에 희망 있음을 확인하며 내재적 초월을 꿈꾸고,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자리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잔뜩 바람 먹은 떡갈나무숲 위로 펄럭이던
天幕 갑자기 暗轉되던 날
사람 대가리가 뽀개진 수박 덩이처럼 뒹굴고
사람이 없어졌으므로
부처도 없어졌네
터져나온 내장은 저렇게 순대로
몸뚱어리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다만
대가리만 푸욱 삶아져
저렇게 눈감고 소쿠리에 臥禪하고 있는 거이네
떡갈나무숲 공원 광장 건너편 순대국집들 앞
아저씨는 프로판가스 화염 분사기로 돼지머리를
지지고 아주머니는 합성고무 다라이에 든
출렁출렁한 내장들 피를 씻어낸다
그 핏물 광주천으로 흘러내리고
그 검은 궁창, 멀리 하남 땅
흰 극락강으로 가고 있다
황지우, 「華嚴光州」
「華嚴光州」는 억울하게 죽어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을 위한 추도와 진혼의 시다. 이제 “뽀개진 수박 덩이”처럼 뒹구는 머리들, “터져나온 내장”, 으깨진 얼굴들은 없다. 사람들은 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의 잔상들마저 지우려고 애쓴다. 이 끔찍한 희생의 현장과 이에 대한 기억은 감쪽같이 증거 인멸되고, 그 자리를 시니피에 없는 시니피앙으로 채운다. 이를테면 이런 풍경, “무등 경기장 왼쪽 외야석 상공 / 새털구름 깃털에 노을이 살짝 비낀, / 부끄럼타는 듯한 아름다운 서광을 / 프로야구 중계 화면이 전국에 보여주기도 하네”(「華嚴光州」). 프로야구 중계 화면을 통해 전국에 중계된 “새털구름 깃털에 노을이 살짝 비낀” 이 하늘의 아름다운 풍경이 음란한 것은 있었던 일을 마치 없던 것처럼 위장하는 까닭이다. 중계 카메라에 잡힌 이 우연한 심미적 풍경은 이미 계통발생의 기억 안쪽에 각인된 ‘그 일’을 없던 일처럼 덮어버리고 싶은 파렴치한 우리의 욕망을 알아서 덮어준다. 우리 모두는 ‘그 일’의 무의식적인 공모자들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혹은 그 현장에서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 죄악에 대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연루자들이다. 우리 안에 죄의식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광주 항쟁의 피해자들에게만 트라우마가 있는 게 아니다. 그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 가해자도 피해자도 될 수 없었던 이들의 내면에도 아무런 기의가 깃들 여지가 없는 압도적인 기표, 즉 트라우마가 생겨 가위 눌리는 것이다.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상징적 재화와 물질적인 보상에 나서고, 광주를 민주화 운동의 성지로 기리는 것은 피해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닌 우리의 집단적 무의식에 각인된 트라우마를 지우기 위한 것이다. 광주를 추도하고 진혼하며 華嚴化하는 것 역시 치욕스럽게 살아남은 자들이 제 안의 죄의식을 씻어내기 위한 일종의 씻김굿이다. 가끔씩 광주를 찾는 정치가들이 망월동 묘역을 들러 참배를 하고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탑 앞에 서기도 하는 모습을 텔레비전 화면에서 본다. 그들은 거기서 무엇을 보았을까 ? 죽은 자들의 원혼은 씻김을 받았을까 ? 죽은 자들이나 살아 있는 그들의 가족은 가해자들을 용서했을까 ? 용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용서는 정의라는 힘을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 아마 이런 상념들을 반추할지도 모른다.
망월 가는 이맘때쯤이면
아카시아 꽃봉지 들고 다가오는 산 전체에서
막 양치질한 딸아이
입내 같은 것이 났지
꼭 죽음이 아니어도
이렇듯 신성이 찰나에 임하는,
잎새로 噴射되는 햇살 샤워 ;
낯뜨거워라
치약처럼 화한 꽃 한움큼 입에 털어놓고
멀찍이서 묘역을 대하는데
죽어서 받은 거룩함도 살아 있는 날의 우연성, 덧없음,
어처구니없음에 잠깐 일어난 정전기 같다 할까
사실 벌거지만도 못한 삶이었는데
커다란 거품인 무덤들 둘레를
명함 돌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둘러싼다
聖 오월 ; 아카시아꽃은 갑자기 재채기하고 싶은
흰 손수건을 흔들고
황지우, 「聖 오월」
‘광주’와 ‘오월’은 이미 聖化되었다. “죽어서 받은 거룩함”과 “살아 있는 날의 우연성, 덧없음”은 등가화되고, 성역화된 그곳은 “명함 돌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점령당한다. 항쟁의 희생자들은 민주화 운동의 유공자라는 칭호를 받으며 명예를 회복하고, 광주라는 지명은 거룩한 항쟁과 희생을 치른 민주화 운동의 성지라는 시대적 약호로 덧씌워지고 코드화될 때 가해자들과, 그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래서 죄의식을 가졌던 익명의 사람들에겐 면죄부가 주어진다. 남은 것은 장소를 성역화하고 죽은 자들을 기념하는 것을 하나의 의례로 정착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산 자들은 의무를 다한 것으로 여긴다. 황지우의 「聖 오월」은 산 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죽은 자 떠받들기가 의례적인 것임을 밝혀 드러낸다. ‘광주’의 성역화는 궁극적으로 죽은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산 자들의 알리바이를 위한 것이다. 시인은 아카시아꽃 만발한 계절에 벌어지는 희생의 숭고함을 기리는 祭儀조차 정치가들의 명분 만들기에 이용당하는 세태에 대한 씁쓸함을 되새긴다. ‘성 광주’는 자본주의사회에서 광고가 만들어내는 기표적 기호 소비와 같은 효과를 만들 것이다. 광고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면서 신화를 전유하듯, ‘성 광주’는 민주화 항쟁의 이미지를 전유한다. 그것의 효과는 오로지 修辭의 효과며 상상적 가치의 효과다. 우리는 이제 ‘성 광주’를, 그 기호를, 그 이미지를, 그 수사의 효과를 소비하게 될 것이다. ‘성 광주’가 만드는 혜택은 역설적이게도 ‘성 광주’를 이끌어낸 주역들을 소외시키며, 그 바깥에 있는 자들, 소수의 가해자들, 이를테면 전두환과 광주에 투입한 계엄군의 지휘계통에 있던 자들, 그리고 다수를 차지하는 익명이 미필적 고의에 의한 방임자들에게 골고루 미친다. ‘성 광주’는 희생의 피가 묻은 소수의 가해자들에 대한 도덕적 단죄의 압력에 김이 빠지게 만들 것이며, 다수의 방임자들에게는 죄의식에서 벗어나게 하며 도덕적 면죄의 알리바이를 줄 것이다.
한 장소에 내재된 시대적 약호를 찾아내고 그것에 의미 부여를 해서 공공 기념물을 짓고 성역화하는 것은 인공적인 장소 만들기에 해당한다. 장소 만들기는 대개 역사의 보전과 재구성이며 장소의 박물관화다. 그렇기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 장소가 본디 가지고 있는 경관적 요소의 해체와 재구축이 따라야 한다. 장소의 공공화, 혹은 타자지향화는 장소의 고유성과 다양성을 깎아내거나 지우고 상징화·표준화시키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또 다른 경관 파괴와 장소 해체로 이어진다. 성화된 장소들은 오락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만든 디즈니랜드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장소를 삶을 심오한 방식으로 경험하고 심미적 취향을 고양시키는 곳이 아니라 이질적이고 무감각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기념비들이나 공원으로 가꾸어진 묘역들은 참배나 관람의 대상이 될지는 모르지만 실질적 거주와는 무관하다. 사람과 장소의 본질적 관계는 아름다운 경관에 대한 소비가 아니라 거주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광주를 성역화하면 할수록 광주는 정치화된 상징의 미적 가치는 높아지겠지만 그만큼 우리에게서 멀어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