궂은 일부터 경험---몸집이 큰 새, 교대근무자
1989
발전소 엔지니어는 대체로 입사 초기에는 교대근무를 했다. 사람들이 24시간 전기를 쓰기 때문에
발전소는 24시간 전기를 생산해야 한다. 많이 만들어 저장할 수 없는 전기니 필요한 만큼 만든다.
한 사람이 24시간 내내 일할 수 없으니 3교대 근무를 한다. 신입사원이 발전소 현장에서 교대근무를
하면서 발전소 구성과 운전 원리를 꿰게 되면, 그 후에 어떤 일을 하더라도 척척 해낼 수 있다.
연륜이 쌓여 직급이 높아져도 결국 교대근무가 기반이 된 지식 위에서 일을 하게 된다. 교대근무
는 발전 지식의 원천이자, 회사의 잠재력이다.
직장에서 퇴근시간이 색다른 사람들 중에 우리 발전소를 운전하는 교대근무 직원들이 속해 있다. 어떤 날은 일반인들이 잠자리에 들 시간에, 어떤 날은 출근하는 시각에 퇴근해야 한다.
남들은 흰 와이셔츠 옷깃을 세우고 좋은 사무실에 앉아서 위세 등등하게 근무하는데, 우리의 발전소 교대근무자들은 후질구레한 작업복을 입고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밤낮이 헷갈리는 교대근무를 하고 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낮에도 출근하고 밤에도 출근하는가 하면, 낮에도 퇴근하고 밤에도 퇴근한다”고 한다. 교대근무자들은 불규칙 생활과 소음과 분진, 냄새와 열기와 싸워야 한다. 더 겁나는 것은 춥지도 덥지도 않으며 소리도 안 나고 냄새도 안 나는 잠과 싸워야 한다는 점이다.
좀더 무서운 것은 긴장감이다. 취급하는 설비는 수천억 원에서 1조원을 넘는 막중한 재산이고, 자칫 잘못하면 엄청난 손실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5초 동안의 판단으로 일을 잘 처리하면 본전이고, 잘못하면 너무나 큰 정신적 부담을 입는 정말 외로운 싸움이다.
정말 더 무서운 것은 그것도 저것도 아닌 주위와 사회의 말없는 냉대다. 끗발 없고 별 볼일 없는 남자라는 주위의 인식이 두렵고, 남처럼 당당하지 못한 가장이라는 아내와 가족들의 눈빛도 두렵다.
1967년 말에 한전에 입사한 나는 삼척화력발전소에서 일할 때 발전소 기초지식을 많이 배웠다. 비록 도시락 뚜껑을 열면 내 젓가락보다 탄가루가 먼저 밥에 닿았지만(당시로서는 정말 사실이다), 그런 환경에서도 발전소 일을 배웠다.
발전소 통근차는 버스가 아니고, 천막을 씌운 ‘半트럭’으로, 비포장 도로를 달려 회사에 도착하는 도중에도 흙먼지 때문에 마스크를 안 쓰면 숨을 쉬기 곤란했다. 오죽하면, 자전거 통근이 통근차 통근보다 훨씬 나은 일이었을까!
부산화력으로 전근하여 3,4호기 시운전을 하다가 군대에 입대했는데, 그 후 준공식에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하여 송도에서 감천까지 도로포장이 되어, 휴가를 나오니 정말 세상이 달랐다. 높은 사람은 이래서 필요한 거 같았다.
3부 이자로 돈을 빌려 열 달이 지나면 다 사그라지는 사글셋방에 살면서도, 초급간부가 되어 사택에 들어가야 한다는 간절한 염원으로 시험에 합격하여 간부가 되었고, 사택에 입주했다. 집세 걱정에서 해방된 기쁨이란!
간부시험 합격이 기술을 간부급으로 일거에 올려준 것도 아니고, 인격을 한 계단 간부답게 올려준 것도 아니지만, 간부가 되니 책임감이 커져서, 더 많은 조심과 수범과 공부를 해야 했다.
우리는 큰 새가 날아갈 때의 모습을 안다.
찻찻찻차! 두 날개로 물을 차고 텀벙거리며 뛰어가다가 그 큰 몸집을 겨우 떠올리는 새의 날갯
짓을 보았다. 보잉 747도 그렇다. 활주로를 얼마나 달리는가? 그렇게 달리다가 급기야 육중한 동체를 하늘에 띄운다. 그렇게 우리의 교대근무자들은 비상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곧 이륙할 큰 몸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분이 말씀하셨던 “보석같은 교대근무자” 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바로 한국전력의 보석이요 잠재력이다. 큰 몸집속에는 한없는 잠재력이 들어있다. 발전소라는 저 거대
한 종합기술체를 운전하는 것은 남모르는 노력과 기술축적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하다.
밤잠 못 자고 국제선을 운항하고 돌아와 가방 하나 들고 땅에 발을 디디며 흐뭇해하는 파일럿
처럼, 기나긴 항해 끝에 무사히 파도를 넘고 외로움을 이기고 돌아온 보람찬 마도로스처럼, 우리
의 발전소 교대근무자들은 귀중한 엔지니어다.
간밤에는 고장이 생겨 발전소의 숨이 넘어갈 뻔했던 순간을 이겼다. 흰 옷깃을 세운 사람이 그 일을 처리할 수 있었을까? 누가 할 수 있을까? 교대근무자들이 그런 일을 한 것을 누가 알까?
“각광받지 않아도 좋다. 위신이 안서도 좋다. 우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실수없이 해내지
않았느냐! 당연한 일이라 해도 얼마나 보람된 일을 했는가!
퇴근하는 이 길로 긴장감에서 해방되어 편안히 잠을 잘 수 있게 되었으니 비록 야근에 피곤하고 지쳤지만 무엇을 더 바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