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받든다며 현 선거구제 고집하면 이상한 사람
문희상(73) 국회의장은 의욕이 넘쳤다. 지난 24일 전직 대통령과 의회 지도자 묘소를 참배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를 예방했다. 하루 전 유명을 달리한 노회찬 의원 빈소에 조문했다. 25일 오후 인터뷰를 위해 의장실을 찾았을 때도 최근 평양을 방문한 김홍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 상임의장을 만나고 있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에는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대위원장의 방문을 기다리는 기자들이 대기실에 진을 치고 있었다.
○선거제도
노 전 대통령, 선거구제 개혁에 관심
득표수만큼 의석 가져가야 합리적
○정치자금
눈먼 돈·쌈짓돈 없어져 투명해져야
국회 특활비 내년엔 절반 줄일 것
○개헌
‘대통령 싫어하니 안 된다’는 잘못
개헌은 블랙홀이란 건 박근혜 논리
○협치
4당체제는 협치하라는 국민의 뜻
한 달 내에 대표·중진들 회동 준비
문 의장은 취임 이후 ‘협치’(協治)를 강조해왔다. 그는 “국회의장이 협치의 주도권을 쥘 수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을 부지런히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달 내에 4당 대표, 또 4당 원내대표, 4당 중진들이 각각 모이는 자리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노회찬 의원의 소식을 듣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렸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픈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하고 똑같은 그런 감정이더라고요. ‘실장님, 작고하셨습니다’라는 전화를 받고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아무 생각이 안 나고 까매지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이번에 ‘노회찬 의원 작고’란 메모가 들어왔을 때도 그랬어요. 그분은 정치의 본령을 알아. 등 시린 사람을 따스하게 하고, 배고픈 사람 배부르게 하고, 억울해서 울고 있는 억눌린 자, 안 가진 자, 없는 자 편에 서서 눈물 닦아주고… 그게 안 되면 같이 울어 주는… 그게 정치의 본령인데, 몸으로 실천했던 대표적인 사람이란 말이야.”
●적폐청산도 길어지면 피로감 생겨
이 계기에 정치자금법을 손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정치자금법을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근원이 있어요. 대가성과 청탁이 애매한 부분이 있지만, 국민 눈높이에 맞춰서 엄격하게 만들어 놓은 거죠. 그렇지만, 지금 당장 그것 때문에 제도를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 법이 만들어질 때처럼 그만한 세월이 축적되어야지.”
노 의원이 발의한 특활비 폐지 법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눈먼 돈이니, 쌈짓돈이니, 이런 개념은 없어져야 해요. 정치자금 자체가 다 투명해야 합니다. 들어온 데가 분명하고, 나가는 데가 분명해야 합니다. 제도적으로 어떻게든 고쳐 나가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쓰는 돈이면, ‘어쩔 수 없이 쓴 돈’. 그거라도 이야기하자 이거지. 국회 운영개선소위에서 원칙과 기준을 잘 마련해 내년 예산에서는 절반 수준으로 줄일 겁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개헌안이 무산됐는데, 다시 개헌을 추진하시나요.
“물론이죠. 개헌이 물 건너갔다, 이건 잘못된 발상이에요. 대통령이 개헌 의지를 분명히 했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제안을 했어. 단, 국회 안을 만들어 합의하면 철회하겠다고 한 겁니다. 지금은 한반도의 평화, 개혁 입법, 그리고 경제·민생문제… 이것을 빨아들이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우려가 대통령보다 그 주변에 있는 것 같아. 개헌의 필요성이 국민 속에서 없어졌다고 하면 논의가 없어져야 해요. 그런데 최근 ‘개헌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80%가 넘어요. 국민이 원하니까 개헌은 국회의 책무예요.”
국회에서 다시 개헌안을 만드나요.
“더 만들 필요도 없어요, 사실. 지금까지 몇 대에 걸쳐 국회의장들이 개헌 전문 자문기구를 띄워 다 만들어놓은 안이 있어요. 대통령이 낸 안은 여당과 다 조율했어요. 또 국회 개헌특위에서 접근한 게 있다고. 이번에 개헌특위만 만들지 않았지 정치개혁위원회에서 다루기로 했어요.”
국회 합의안과 대통령 안은 권력구조 면에서 차이가 있지 않나요.
“차이는 있는데…, 김대중 대통령은 평민당 총재 시절 국회 구성에 관한 원칙적인 협치 모델을 제시했어요. 여소야대가 되었을 때 야당이 모두 나누어 가질 수 있었지만, 의장은 여당이, 나머지는 의석수 비례로 상임위원장을 나눴어요. 똑같은 이치로 집권했을 때도 현행 헌법 아래서 분권(分權)을 한 겁니다. 총리가 야당에서 나온 거고, 장관들도 쪼갰다고…. 노무현 대통령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에게 대연정을 하자고 했어요. 그럼 야당 대표가 총리 되는 거 아니냐고. 총리를 임명할 것인가, 추천할 것인가는 아주 작은 문제예요. 여야가 바로 합의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특검처럼 여야가 두 명을 추천해 대통령이 한 명을 선택한다든지 이렇게 해서 접근하면 못 할 게 없다는 말이에요. 대통령은 언제든지 자기 안을 철회하겠다고 그랬어요. 미리 겁먹고 ‘대통령이 싫어하니 하지 말자’는 것은 잘못된 발상이에요. 개헌을 ‘블랙홀’이라고 한 건 바로 박근혜 대통령입니다. 똑같은 논리로 지금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더라고.”
●대통령,국회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지방선거에서 압승하고 난 뒤 선거제도 개혁에 대한 민주당과 한국당의 입장이 바뀐 것 같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뜻을 받든다는 사람이 현재 이(소) 선거구제를 고집하면 그 사람은 뭔가 좀 이상한 사람이야. 노 대통령은 처음부터 끝까지 개헌보다도 관심이 컸던 것이 선거구제 개혁입니다. 득표수만큼 의석수를 가져야 합리적인 거예요. 그게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입니다. 그것을 가장 합리적으로 조정한 것이 독일식입니다. 선관위에서 나온 안이 있다니까. 선관위 안을 기준으로 조금씩 양보하면 됩니다. 결단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하려면 올해 안에 해야 합니다. 바로 총선이 코앞에 있으면 현역 의원들 이해관계에 매몰돼 손을 못 대요.”
문희상 국회의장(오른쪽)이 25일 국회의장실을 예방한 자유한국당 김병준 혁신비상대책위원장과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문 의장은 여야 정치인들이 자주 만나도록 자리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변선구 기자
문희상 국회의장(오른쪽)이 25일 국회의장실을 예방한 자유한국당 김병준 혁신비상대책위원장과 반갑게 인사하고 있다. 문 의장은 여야 정치인들이 자주 만나도록 자리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변선구 기자
취임 이후 제일 강조하신 것이 ‘협치’인데, 청와대 제안에 야당은 시큰둥합니다.
“그것은 정치로 풀어야 해요. 내가 본 모든 정치적 연대는 3가지 원칙이 있어요. 첫째, 모든 연대를 할 때는 대의명분이 있어야 해요. 둘째, 절차적 투명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바로 야합이 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줄탁동기(啐啄同機)라고, 때가 있더라고. 안에서 나가려고 구멍이 막 뚫릴 직전에 어미가 탁 쪼아주면 병아리도 살고, 어미도 새끼를 얻지만, 날이 안 됐는데 어미가 안타깝다고 쪼면 죽어버린다고. 지금 나올 것은 다 나왔어. 대통령도 협치의 기본을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운명적으로 20대 국회는 4당 체제가 된 거예요. 1당이 과반수가 안 돼요. ‘협치를 하라’는 국민의 뜻이 그 속에 담겨있는 거예요.”
●4·27선언 지지결의하고 비준도 해야
그는 “촛불 혁명을 완성하려면 개헌과 개혁 입법으로 뒷받침해야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가 전광석화처럼 쾌도난마로 정리를 잘했어. 적폐청산도. 이게 더 길어지면 피로감이 생기고, 국민의 지지를 잃으면, 동력이 상실돼요. 이 기간이 딱 됐어요. 제도적으로 보완하려고 하는데 크게는 개헌, 개혁 입법이야. 이것을 빨리 국회가 해줘야 하므로 난 ‘국회의 계절이 왔다’고 주장하는 거예요. 여소야대인데 협치밖에는 방법이 없잖아요.”
문희상 국회의장은 "대통령이 국회를 국민과 동의어로 생각하고 존중해야 협치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변선구 기자
문희상 국회의장은 "대통령이 국회를 국민과 동의어로 생각하고 존중해야 협치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변선구 기자
협치를 하자면서 청와대가 일방적으로 던지는 건….
“아까 두 번째로 말한 투명성이 없는 겁니다. 역지사지(易之思之)해서 상대방을 잘 보고 입장을 잘 이해해야 접점이 생긴다니까. 자꾸 만나야 해요. 제일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의지입니다. 대통령이 국회에 대한 존중이 있어야 해요. 국민의 뜻에 따르겠다, 자꾸 이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인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반대로 해석할 수가 있어요. 국민에게 인기가 좋으니 국민만 상대하겠다 이게 아니에요. 국회는 국민과 동의어로 생각해야 합니다. 대통령이 우선 진정성이 있는 협치의 의지를 가져야 해요. 필요성에 대해서 인식이 된 것 같아요. 야당에서도 그런 지도자가 나와서 서로 맞아야 하는데 홍준표보다는 김성태, 김성태보다는 김병준이 좀 나아서 협치 가능성이 좀 커졌어요.”
그는 “세계사적 대 격변기에 대한민국이 한복판에 있고, 한 중심에 있다. 이것은 하늘이 우리에게 준 기적 같은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 하나가 촛불 혁명입니다. 우리 주변 모든 나라가 민주주의의 암흑기를 걷고 있습니다. 미국의 트럼프, 러시아의 푸틴, 중국의 시진핑, 일본의 아베, 다 민주주의와 관계없는 분위기인데, 우리만 1700만 명이 쓰레기 한 톨 안 남기고,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이렇게 이룩해 낸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제도화하는 그 책임은 국회에 있다는 겁니다. 또 하나는 한반도 평화예요. 이것도 6개월 전만 해도 상상이나 했느냐고요. 정말 천지가 개벽할 일이 생긴 것이죠. 이 천지의 기운을 우리가 살려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4·27 선언’에 대한 지지 결의뿐만 아니라 비준도 해주자는 겁니다. 남북 국회도 도울 수 있으면 도와야 하니까. 국회의장 회담도 제안했고, 그것을 위해서 실무차원에서 뒷받침하도록 통일부에서 국장급 한 사람을 파견해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는 젊은 시절 김대중의 청년 정치조직인 ‘연청’회장으로 정치를 시작했다. 이기택 대표의 비서실장으로 파견되기도 하고, 노무현 대통령의 비서실장도 맡았다. 민주화 투사이면서 정적(政敵) 사이에 다리 역할을 했던 그가 어떤 변화를 이끌어낼지 관심이다.
김진국 칼럼니스트 kim.jinkoo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