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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13회 2015.6.9.mp3
장소: 전북 익산 원광대학교 교학대학 1층 세미나실 일시: 2015년 6월 9일(화,오후 3시~6시) 강사: 곽준(묘원 법사님)
교재 : 사념처 명상의 세계(도서출판 행복한숲 刊)
<사념처 명상의 세계> 409쪽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마음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탐욕이 있는 마음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고 안다. 탐욕이 없는 마음을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
성냄이 있는 마음을 성냄이 있는 마음이라고 안다. 성냄이 없는 마음을 성냄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을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이라고 안다.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
위축된 마음을 위축된 마음이라고 안다. 산만한 마음을 산만한 마음이라고 안다.
커진 마음을 커진 마음이라고 안다. 커지지 않은 마음을 커지지 않은 마음이라고 안다.
향상된 마음을 향상된 마음이라고 안다. 향상되지 않은 마음을 향상되지 않은 마음이라고 안다.
집중된 마음을 집중된 마음이라고 안다. 집중되지 않은 마음을 집중되지 않은 마음이라고 안다.
자유로워진 마음을 자유로워진 마음이라고 안다. 자유로워지지 않은 마음을 자유로워지지 않은 마음이라고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마음에서 마음을 안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마음에서 마음을 밖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마음에서 마음을 안팎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는 마음이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마음이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는 단지 마음이 있다는 알아차림을 확립할 때까지 마음의 현상들에 대한 분명한 앎과 알아차림을 확립하고, 유지한다. 그는 갈애와 잘못된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지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집착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마음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이상은 여덟 가지 마음을 둘로 나누어서 모두 열여섯 가지 마음입니다.
처음에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마음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라고 할 때 ‘어떻게’라고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나타난 대상을 단순하게 지켜보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할 때는 지혜가 나서 탐욕이 없는 출세간의 마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했을 때는 출세간의 법이 적용되지 않는 단지 탐욕이 없는 마음일 뿐입니다. 가령 탐욕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탐욕이 없는 마음은 선한 마음일 뿐이지 이 상태가 출세간의 경지에 있는 마음은 아닙니다. 단지 탐욕이 없는 마음이 열반을 성취한 마음은 아닙니다. 탐욕이 없는 마음뿐만 아니라 성냄이 없는 마음이나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도 이와 똑같이 적용됩니다.
여기서 ‘어떻게’라고 말한 것은 수행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교학에서는 항상 ‘무엇’이라는 것을 밝히지만, 수행에서는 항상 ‘어떻게’라는 것을 밝힙니다. 이것은 수행을 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교학과 수행이 접목되면 이제 무엇을 어떻게 알아차리는가를 완전하게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라는 말은 마음을 알아차릴 때 오직 알아차릴 대상을 마음에 두고, 알아차리는 그것에만 집중하면서 지낸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지낸다’는 것은 알아차리는 수행을 일상의 일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열여섯 가지 마음 중에서 첫 번째는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탐욕이 있는 마음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고 안다. 탐욕이 없는 마음을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라고 했습니다. 탐욕이 있는 마음은 여덟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탐욕이 있고, 기쁨이 있고, 사견이 있고, 자극이 없는 마음입니다.
둘째, 탐욕이 있고, 기쁨이 있고, 사견이 있고, 자극이 있는 마음입니다.
셋째, 탐욕이 있고, 기쁨이 있고, 사견이 없고 자극이 없는 마음입니다.
넷째, 탐욕이 있고, 기쁨이 있고, 사견이 없고, 자극이 있는 마음입니다.
다섯째, 탐욕이 있고, 평온이 있고, 사견이 있고, 자극이 없는 마음입니다.
여섯째, 탐욕이 있고, 평온이 있고, 사견이 있고, 자극이 있는 마음입니다.
일곱째, 탐욕이 있고, 평온이 있고, 사견이 없고, 자극이 없는 마음입니다.
여덟째, 탐욕이 있고, 평온이 있고, 사견이 없고, 자극이 있는 마음입니다.
이상이 탐욕이 있는 마음 여덟 가지입니다. 이들 마음이 있을 때는 단지 이들 마음이 있는 것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이 마음을 없애려고 하거나 다른 마음을 바라서도 안 되고, 오직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다음에 “탐욕이 없는 마음을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탐욕이 있을 때도 있는 것을 알아차려야 하지만 없을 때도 없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탐욕이 없을 때 탐욕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다시 탐욕이 있는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좋은 것이나 좋지 않은 것이나 모두 똑같이 대상으로 알아차립니다.
여기서 탐욕이 없는 마음이란 세간에서의 유익하고 선한 마음이며 무엇이라고 확정할 수 없는 무기(無記)의 마음입니다. 일반적으로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할 때는 지혜가 나서 탐욕이 없는 출세간의 마음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탐욕이 없는 마음이라고 했을 때는 출세간의 법이 적용되지 않는 단지 탐욕이 없는 마음입니다. 이때 탐욕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탐욕이 없는 마음은 선한 마음일 뿐이지 이 상태가 출세간의 경지에 있는 마음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탐욕이 없는 마음이 열반을 성취한 마음은 아닙니다. 탐욕이 없는 마음뿐만 아니라 성냄이 없는 마음이나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도 이와 똑같이 적용됩니다.
탐욕이 있는 마음이 있을 때는 탐욕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러면 탐욕이 있는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탐욕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탐욕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려서 다시 탐욕이 있는 마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성냄이 있는 마음을 성냄이 있는 마음이라고 안다. 성냄이 없는 마음을 성냄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입니다. 이들 마음이 있을 때는 있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 마음을 없애려고 하거나 다른 마음을 바라서는 안 되고, 오직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성냄이 있는 마음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성냄이 있고 불만족이 있고 반감이 있고 자극이 없는 마음입니다. 둘째, 성냄이 있고 불만족이 있고 반감이 있고 자극이 있는 마음입니다. 이상 두 가지의 성냄이 있는 마음이 있을 때는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성냄이 있는 마음에는 성냄과 함께 항상 불만족과 반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극이 있는가, 없는가가 다릅니다.
여기서 자극은 외부로부터 유발된 것인가, 아니면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인가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성냄이 없는 마음을 성냄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입니다. 성냄이 있을 때도 있는 것을 알아차려야 하지만, 역시 없을 때도 없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성냄이 없을 때 성냄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다시 성냄이 있는 마음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성냄이 없는 마음이란 세간의 유익하고 선한 마음을 뜻하며, 확정이 안 된 무기의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냄이 없다고 해서 출세간의 마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때는 단지 성냄이 있다가 성냄이 없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때 성냄을 진심(瞋心)이라고 말합니다. 진심은 참 진(眞)이 아니고, 눈 부릅뜰 진(瞋)이라고 해서 화를 내는 마음을 말합니다.
세 번째는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을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이라고 안다.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입니다. 이들 마음이 있을 때는 있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 마음을 없애려고 하거나 다른 마음을 바라서는 안 되고, 오직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어리석음이 있고 평온이 있고 의심이 있는 마음입니다. 둘째, 어리석음이 있고 평온이 있고 들뜸이 있는 마음입니다. 이상 두 가지의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그 순간 어리석지 않은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리석은 마음에는 항상 평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평온은 지혜가 있는 평온이 아닙니다. 그리고 의심이 있거나 들뜸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마음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의심과 들뜸이 있을 때 어리석은 마음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리석음은 모든 해로운 마음에 들어 있습니다.
다음에는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입니다. 역시 어리석음이 있을 때도 있는 것을 알아차려야 하지만 없을 때도 없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어리석음이 없을 때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다시 어리석은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이란 세간의 유익하고 선한 마음을 뜻하며 확정이 안 된 무기의 마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음이 없다고 해서 출세간의 마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어리석음이 있다가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일 뿐입니다.
네 번째는 “위축된 마음을 위축된 마음이라고 안다. 산만한 마음을 산만한 마음이라고 안다”입니다. 이들 마음이 있을 때는 있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 마음을 없애려고 하거나 다른 마음을 바라서는 안 되고, 오직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위축된 마음은 다섯 가지 장애 중에서 세 번째인 해태와 혼침에 빠진 마음입니다. 마음이 일을 하는데 일하는 마음이 위축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게으름과 졸음이 올 때는 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산만한 마음은 다섯 가지 장애 중에서 네 번째인 들뜸과 후회를 말합니다. 들뜬 상태에서는 대상을 겨냥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들떠 있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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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방일하지 않는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