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혜리님(이하 존칭 생략)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가수였다. 아니, 사춘기 소년의 가슴을 설레이게 했던 여신이었다. 그녀의 대표곡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는 요즘도 나의 노래방 애창곡이다.
요즘의 성형괴물과는 비교할 수없는 기품있는 미모와 상당히 '보이시'한 이미지는 당대 최고의 톱가수로서 모자람이 없었다. 난 약간 보이시한 미인에 대한 덕후기질이 있다. 아래 앨범 사진의 그녀는 흡사 일본의 여성극 '다카라즈카'배우 뺨칠만한 보이시한 매력을 풍기고 있다.
암튼 개인적인 취향은 이쯤해 두고, 요즘 그녀의 근황을 우연히 접하고 과거 전성기 시절의 앨범을 다시 들으며 인터넷상에서 조사한 자료를 토대로 한국가요사에 대한 아카데믹한 접근을 해보려고 한다.
장혜리는 길옥윤이 발굴한 가수였다. 여기서 길옥윤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정통적인 재즈 색소폰 연주자로서 상당한 실력과 인지도를 갖고 있었지만 대중들에게는 작곡가-제작자로서의 이미지가 더 강했다. 패티김-혜은이-김연자 등 여자가수들을 통해 수많은 히트곡을 만들었고, 말그대로 한 시대를 풍미한 대중예술가였다.
길옥윤은 단순히 가수의 작곡가가 아니라 가수위에 절대적으로 군림했다.(물론 음악적으로). 그래서 길옥윤과 작업한 가수 앨범에는 항상 '길옥윤 작품집'이라는 글자가 박혔다. 아래 혜은이의 앨범 자켓에도 '길옥윤 작품집'이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길옥윤은 패티김, 혜은이로 구축된 자신의 명성을 이어줄 가수로 장혜리를 지목했다. 장혜리 1집 자켓에도 사진상으로는 잘 안보이지만 '길옥윤 작품집'이라는 문구가 박혀있다. 즉, 장혜리는 길옥윤 사단의 가수로서 패티김-혜은이의 후계자로 발굴된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그녀의 1집 노래를 들어보면 패티김스런 가창력에 혜은이스런 발랄함을 접목시키려한 길옥윤의 의지를 엿볼수 있다. 아래 노래를 들어보자. 장혜리 1집의 [날개]라는 곡이다. 원래 혜은이의 앨범에 수록될 예정이었지만 사정상 발매되지 못하고 장혜리의 앨범에 실린곡이다.
그런데, 장혜리의 1집은 그닥 주목을 받지 못했다. 왜일까? 그 앨범이 발매된 연도가 이미 1986년이다. 가요계의 판도가 바뀌는 시점이다. 요즘 가요계와는 달리 90년대 까지만 해도 우리 가요시장은 미국 팝시장과는 별개의 트렌드를 유지했다. 어쨌든 1986년이라면 댄스와 발라드의 전성기로 막 접어드는 시점이었다. 길옥윤은 그 당시 이미 구닥다리였다. 가요시장의 변화에 밀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장혜리 1집은 혜은이 시절의 그림자가 너무 강렬했고, 길옥윤에게 변화는 없었다. 장혜리 1집에는 아예 혜은이의 대표곡 <당신만을 사랑해>가 실려있을 정도였다.
길옥윤은 과거에 먹혔던 자신의 스타일이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착각했는지 모른다. 장혜리 1집은 이후 그녀의 대표곡 <추억의 발라드>,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와 비교하면 전혀 상상하기 힘든 길옥윤 스타일의 곡으로 채워졌지만 구닥다리 트렌드 덕분에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길옥윤이 발굴한 가수라는 '라벨'은 가요계가 그녀를 주목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2집부터는 길옥윤이 아닌 다른 제작자에 의해 새로운 트렌드가 반영된것 같다. 당시 유행했던 김완선-박남정 풍의 본격적인 댄스리듬과 새로운 감각으로 전혀 다른 가수로 태어난다. 살짝 옆으로 새는 얘기지만, 우리 가요의 댄스곡에는 이상한 전통이 있다. 리듬은 분명 나이트 댄스 리듬인데 멜로디는 대부분 '마이너'다. 즉 '단조'다. 리듬만 좀 늘어뜨리면 바로 발라드로 편곡이 가능하다. 이러한 전통은 김건모로 이어졌고 90년대 등장한 대부분의 댄스풍 히트곡들에도 적용할 수 있다.
암튼 2집부터 장혜리는 메가톤급 히트곡들을 터뜨리는데, 이는 당시의 트렌트와 맞아떨어진 제작자의 안목때문이기도 하지만, 장혜리 본연의 노래 스타일이 '록'에 가까운 스트레이트한 맛이 있기때문이다. 길옥윤이 제작한 장혜리 1집이 실패한 이유중의 하나도 장혜리라는 캐릭터에 혜은이라는 캐릭터를 억지로 집어넣으려 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길옥윤의 가수 중 하나인 김연자의 다이나믹한 스타일에 장혜리를 맞췄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으리라 생각된다.
다시 장혜리의 얘기로 돌아가보자. 자신의 '록' 창법과 당시 트렌드가 맞아떨어진 그녀의 2집과 3집은 대박이 났다. <추억의 발라드>, <묻혀버린 이야기>,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라는 히트곡이 만들어졌다.
요즘 그녀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댄스 스타일의 곡은 자신과 잘 맞지 않았다고 하지만, 팬 입장에서는 상당히 잘 어울렸다고 생각한다. 당대 최고의 작곡가가 만들어준 곡들도 그녀의 스타일에 잘 녹아들었다. 댄스 스타일의 히트곡 뒤에 초유의 대박 히트곡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로 화룡정점을 찍는다.
원할 것만 같았던 그녀의 인기도 이 곡을 정점으로 하락세를 탄다. 이후 2장(?)의 앨범을 더 발표했지만, 서태지 이후 변화한 가요트렌드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혼과 함께 자연스럽게 은퇴한다. 그녀 자신이 길옥윤의 구닥다리 스타일을 딛고 새로운 트렌드에 적응해서 성공을 거뒀지만 그녀 자신도 새로운 스타일에 밀린 것이다. 가요계 은퇴 이후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시절을 보냈다고 하는데 신앙의 힘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지금은 가스펠 가수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한다.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장혜리님에게 큰 박수를 보내며 좋은 노래를 발표해준데 대해 팬의 한사람으로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