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인물 열전 (최용현 작가)
「최용현」 작가의 [삼국지 인물열전]은 삼국지의 수많은 등장인물을 한 눈에 정리하였기에 소개합니다. 총 6장 92부작으로 구성된 '삼국지 인물 열전'은 조조, 유비, 손권 등 위·촉·오 3개 나라별로, 유형별로 인물에 관해 기술하고 있습니다.
주요 인물들의 활약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삼국지를 처음 대하는 사람도 쉽게 읽을 수 있으며, 길거나 지겹지 않아 속도감을 더해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 최용현 작가의 프로필
△경남 밀양 출생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문예사조≫ 수필 등단(1991) △한국문인협회 회원 △구로문인협회 부회장 △(사)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 △≪월간 한국통신≫, ≪월간 전기≫, ≪월간 국세≫, ≪월간 전력기술인≫에 고정칼럼 연재 △≪전기신문≫에 주 1회 ‘삼국지 인물열전’ 연재 △에세이집 『아내가 끓여주는 커피는 싱겁다』(1994), 『꿈꾸는 개똥벌레』(2008) △콩트집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2003) △인물평전집 『삼국지 인물 소프트』(1993), 『삼국지 인물』
[삼국지 인물열전] 《1》 ■ 연재를 시작하며
소설 삼국지에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오고, 지략과 무용을 펼치는 비중 있는 인물만도 수백 명에 달하는 바, 갖가지 전형의 인간상이 원형 그대로 담겨져 있다. 성공한 사람은 성공한 사람대로, 실패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대로 그 전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어 인간학 연구의 보고(寶庫)가 되고 있다.
삼국지를 처음 대하는 사람은 그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기억하는 데 질려서 책에서 손을 놓기가 십상이다. 삼국지를 여러 번 읽은 사람도 그 수많은 인물들을 기억하는 데 애로를 느끼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삼국지를 읽을 때마다, 이들 주요 인물들의 활약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은 글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앞으로 삼국지 인물열전을 통해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란다.
그 첫 순서로 지휘관의 유형에 관해 소개하고자 한다. “호랑이가 이끄는 양의 군대는 양이 이끄는 호랑이의 군대를 이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지휘관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표현한 군사격언이다. 지휘관이라 함은 원래 중대(中隊)급 이상의 부대를 지휘하는 장교를 뜻하는 군사용어이지만, 여러 사람을 지휘하거나 통솔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을 통칭한다. 여기에는 회사의 경영자나 각급 관리자는 물론, 한 나라의 최고책임자까지도 포함시킬 수 있다.
지휘관의 유형은 일반적으로 덕장(德將), 지장(智將), 용장 또는 맹장(勇將=猛將) 등으로 분류된다.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을 이 기준에 따라 분류해 보면 유비나 손권은 덕장, 조조나 제갈량은 지장, 여포나 장비는 용장으로 꼽을 수 있다.
몽고메리 원수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신출귀몰하던 사막의 여우 독일의 롬멜 장군의 전차병단을 물리친 영국군 최고의 지휘관이다. 그는 한 독일장군의 이론을 인용해 아주 간단명료한 기준으로 지휘관을 분류했다. 그의 이론은 모든 지휘관은 ‘똑똑함(총명함)과 멍청함(어리석음)’ ‘부지런함과 게으름’ 중에서 각각 한 가지씩을 갖고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여기서 도출해 낼 수 있는 지휘관의 유형은 다음의 4가지다.
(1) 똑똑하고 부지런한 지휘관(똑부) : 총명하고 부지런하므로 고급 참모에 적합하다. 명석한 두뇌에다 투철한 충성심, 그리고 성실함까지 갖추고 있는 제갈량이 표본적인 예이다. 똑똑하고 부지런해서 지휘관으로서 나무랄 데가 없어 보이지만, 이런 지휘관은 스스로도 피곤하고 그를 따르는 부하들도 피곤하게 한다.
(2) 똑똑하고 게으른 지휘관(똑게) : 두뇌회전이 빨라서 상황판단이 정확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기 때문에 고급 지휘관에 적합하다. 세(勢)를 정확히 읽는 안목과 여유, 최고 지휘관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이다. 조조 같은 인물이다. 때로는 전격적으로 행동하지만 웬만한 보고는 무시할 줄도 안다.
(3) 멍청하고 부지런한 지휘관(멍부) : 늘 무언가를 열심히 시키고 또 열심히 하지만 실익(實益)이 없기 때문에 지휘관으로는 부적합하다. 유비를 꼽고 싶다. 부하들을 이끌고 중원을 열심히 헤매고 다녔지만 얻은 것이 없다. 제갈량의 도움으로 촉을 세우지만 관우의 죽음에 흥분하여 우호관계를 유지해야 할 오를 정벌하려다 실패하고 죽는다.
(4) 멍청하고 게으른 지휘관(멍게) :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적소(適所)에 배치하면 그런 대로 쓸 수 있다. 하진 같은 인물이다. 하 황후를 누이로 둔 덕분에 대장군이 됐지만, 그의 명령 한 마디로 쉽게 처단할 수 있는 궐 안의 십상시(환관)를 토벌하기 위해 멀리 있는 군웅들을 불러들였다가 결국 제 목이 떨어진다. |
몽고메리 이론의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 고급 지휘관으로 적합한 인물은 제갈량 같은 인물이 아니고 조조 같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둘째, 하진 같은 지휘관은 자신의 능력으로는 높이 오를 수 없고, 게으른 탓에 부하들을 닦달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유비 같은 지휘관보다 덜 위험하다는 것이다. 하진은 저 혼자 죽고 말았지만 어리석고 부지런한 유비는 부하들을 이끌고 중원 천지를 얼마나 헤매고 다녔는가.
여기서, 몽고메리 이론의 진가를 음미해 볼 수 있는 고사 하나를 소개해본다. 포악한 독재자 동탁이 자신의 애첩을 몰래 희롱하던 부하장수 여포를 죽이려 했을 때 이를 말리고자 동탁의 참모인 이유(李儒)가 들려준 고사이다.
어느 날 밤, 초나라의 장왕(莊王)이 초성에서 무장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있을 때, 갑작스런 돌풍으로 연회장의 등불이 모두 꺼져버렸다. 이때, 자리를 돌며 여러 장수들에게 술잔을 올리던 장왕의 애첩에게 한 장수가 무엄하게도 뽀뽀를 했다. 애첩은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그 장수의 갓끈을 뽑아 쥐고 장왕 쪽으로 도망쳤다. 그리고는 일러 바쳤다.
“전하, 이 중에 어둠을 미끼로 제게 못된 짓을 한 장수가 있습니다. 빨리 불을 켜고 그 장수를 찾아 처벌하십시오. 갓끈이 없는 장수가 범인입니다.” 그 장수는 꼼짝없이 잡혀서 모가지가 날아갈 판이었다. 시신(侍臣)이 막 등불을 켜려고 하자, 장왕은 ‘잠깐!’ 하면서 ‘아직 불을 켜지 마라. 이곳은 제장들을 격려하는 자리이니 제장들의 즐거움은 곧 나의 즐거움이다. 주석(酒席)에선 이런 일도 있는 법, 제장들은 지금 즉시 갓끈을 뽑아버려라.’하고 명을 내린다.
그리하여 애첩의 기지도 헛되이 누가 범인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최고 지휘관으로서 이만한 결단을 내리기가 결코 쉽지 않다. 이런 지휘관을 만나면 죽을 사람도 산다. 나무는 큰 나무 밑에 있으면 치여서 자라지 못하지만 사람은 큰 사람 밑에 있으면 같이 큰다.
그 후 장왕이 진나라와의 전투에서 포위돼 옥쇄(玉碎)할 위기에 처했을 때, 한 장수가 온몸이 피투성이인 채 필사적으로 포위를 뚫고 들어와 장왕을 구해주고 쓰러졌다. 장왕이 다가가서 물었다.
“그대는 내 생명의 은인이다. 그대는 누구이며, 어찌하여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나를 구해 주었느냐?” 독자들은 아마 이 장수가 누구인지 짐작하리라.
“저는 그때 초성의 연회자리에서 전하의 애첩에게 불측한 짓을 했던 바로 그 치한입니다. 그때 죽을 목숨이 대은을 갚고 이제야 죽습니다.”하고 숨이 끊어졌다고 한다. ‘갓끈을 끊은 회합’이라는 뜻의 ‘절영회(絶纓會)’라고 전하는 고사이다. 제 목숨을 돌보지 않는 부하를 가진 지휘관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 당시의 실권자인 동탁에게도 이런 지혜를 들려주는 참모가 있었건만 불행하게도 동탁은 애첩의 농간에 놀아나 결국 그의 오른팔인 여포에게 참살당하고 만다. |
지휘관에게 있어서 총명함이, 또 여유를 잃지 않는 슬기로운 상황판단이 그토록 중요한 것은 그것이 본인 스스로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부하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 1장 난세에 일어난 군웅들 ① 삼국지를 연 황건적의 총수 "장각(張角)"
역사를 되돌아보면, 어느 시대이든 세상이 혼란스러워지고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면 이상한 종교가 생겨나고, 고달픈 백성들은 그런 종교에 빠져든다. 삼국지의 무대가 되는 후한 말기에도 어김없이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
쌀 다섯 말[斗]을 바치면 무슨 병이든 고칠 수 있다는 교리를 내세운 오두미도(五斗米道)가 위세를 떨치더니, 다시 전래의 도교에다 민간신앙을 교묘하게 접목시킨 태평도(太平道)가 나타나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에 번져갔다.
태평도의 교주 장각(張角).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청년이 된 장각은 어느 날 산에 약초를 캐러갔다가 남화노선(南華老仙)이라는 도인을 만났는데, 그 도인은 장각을 데리고 어떤 동굴로 들어가 천서(天書) 세 권을 주면서 이렇게 일러주었다.
“이것은 ‘태평요술’이라는 책인데, 여기에 적혀있는 것을 잘 익혀서 세상에 나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도록 하라. 만일 딴 뜻을 품을 때는 화를 면치 못하리라.”
그때부터 장각은 이 책을 보며 혼자서 수행을 하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들은 장각을 무슨 도사처럼 떠받들었고, 그의 집에는 소문을 듣고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사람들로 성시(盛市)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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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즈음, 중원에 전염병이 유행하여 그의 마을에도 하루에 몇 사람씩 죽어갔다. 장각의 제자들은 각 고을을 돌아다니며 환자들에게 주술로 된 처방을 주었는데 대부분 신통하게 나았다. 백성들은 태평도만 믿으면 병이 낫는다고 여겨 따르는 무리가 구름처럼 불어났고, 그의 명성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는 아무데도 의지할 곳 없는 병들고 굶주린 백성들의 구세주였던 것이다.
민심을 얻는 데 성공한 장각은 스스로를 대현량사(大賢良師)라 칭하고 두 아우를 장군으로 임명하는 한편,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군사조직으로 편성했다. 전국에 36지부를 두고 큰 지부는 만 명이 넘는 군사를, 작은 지부도 수천 명의 군사를 양성하여 그의 군세(軍勢)는 일약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그는 항상 머리를 누런 수건으로 싸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군사들도 모두 이를 본뜨게 되었고, 군기(軍旗)는 모두 황색기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황건적(黃巾賊)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는 천하를 뒤엎을 거사계획을 세운다. 드디어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蒼天己死(창천기사) 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으니 黃天當立(황천당립) 마땅히 누런 하늘이 서리라 歲在甲子(세재갑자) 때는 바야흐로 갑자년이니 天下大吉(천하대길) 중원 천하가 크게 길하리라
황건적이 만들어 퍼뜨린 노래이다. 그들의 군가인 셈이다. 세 살 먹은 아이들까지도 이 노래를 따라 부를 만큼 이들의 위세는 중원을 휩쓸었다. 장각은 자신에게 대항하는 자들은 가차 없이 죽여서 재산을 빼앗고, 복종해오는 사람들에게는 은근히 약탈을 장려했다. 황건적은 가는 곳마다 관청을 습격, 관리를 죽이고 양곡을 약탈하여 나누어 가졌다. 지방의 성주들은 매일 불안에 떨며 황성(皇城)에 구원을 요청했다. 지방에 있는 군사들은 기강도 형편없는 데다,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져 도저히 황건적을 막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중앙정부에서는 대규모의 관군을 편성하여 황건적 토벌에 나섰다. 동탁 원소 조조 손견 등 후일 천하를 다투게 되는 군웅들은 관군의 이름으로 출전하게 되었고, 도원결의로 의형제가 된 유비 관우 장비도 의병을 일으켜 황건적 토벌에 참여하게 된다. 황건적의 난은 이들 모두에게 세상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기세 좋게 중원을 휩쓸던 황건적이 관군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을 무렵, 총수 장각이 병을 얻어 갑자기 죽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아우인 장량 장보 형제가 끝까지 용감하게 싸웠으나 참패를 거듭하다 모두 전사하고 만다. 수뇌부가 붕괴되자 대세는 이미 기울어 주력부대들은 대부분 토벌되거나 흩어져 버렸고, 소규모 부대들만 남아서 국지적인 저항을 하다가 소멸되고 말았다. |
대규모의 농민봉기인 황건적의 난이 이처럼 쉽게 무너지고 만 것은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갑자기 봉기한 점과, 지도자 장각의 돌연한 병사(病死)에서 주요원인을 찾을 수 있으리라. 가족들을 거느린 채 싸워야 하는, 무기도 변변히 갖추지 못한 농민군이 조정의 관군을 상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은 베푸는 행위에서 다스리는 행위로 조직의 목표와 기능이 급격히 변질된 데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이비 종교집단이 으레 그러하듯이 황건적도 처음에는 굶주리고 병든 백성들의 고충을 해결해줌으로써 민심을 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을 뒤엎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관청을 습격하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 살육을 자행하면서부터는 민심이 다시 돌아서버린 것이다. 민심이 따르지 않는 혁명이 실패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황건적이 전부 토벌되었어도 후한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기울어가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십상시라 불리는 환관들이 권력을 독점하여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있었고 백성들은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있었다. 황제는 허수아비에 불과했으니 한(漢)의 4백년 제업(帝業)도 안에서부터, 또 위에서부터 서서히 썩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장각은 왕조 말기 격동의 시대를 헤쳐 나갈 지도자로서는 여러 가지 점에서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가 처음의 순수했던 이상을 끝까지 지키는 종교지도자로 남았더라면 병들고 굶주린 백성들을 구한 고귀한 이름으로 후세에 길이 남았으리라.
어쩌면 역사가 그에게 부여한 역할은 삼국지 전야의 군웅할거시대가 열리는 터전을 마련해놓고 조용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후일 삼국지를 이끌어가는 기라성 같은 군웅들이 거의 다 황건적의 난 때 힘을 기르고 실전경험을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1장 난세에 일어난 군웅들 ② 예쁜 누이 덕분에 출세한 대장군 '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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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신의 역량에 합당한 자리가 주어졌을 때 최대의 기량을 발휘한다. 기량의 크기가 자리(職位)보다 현저하게 크거나 현저하게 작으면 문제가 생긴다.
전자의 경우는 제갈량에 버금가는 준재로 꼽히던 봉추(鳳雛) 방통이 대표적인 예다. 처음에 시골 현령을 맡겼을 때는 매일 술만 마시며 세월을 보내더니, 나중에 서촉 정벌군의 군사(軍師)로 임명했을 때는 발군의 지략으로 큰 공을 세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는 후자의 경우, 즉 기량의 크기에 비해 직위가 현저하게 높을 경우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알아보자. 이의 예를 미모가 출중한 누이 덕분에 벼락출세한 대장군 하진의 부침과정을 통하여 살펴보면서, 아울러 삼국지의 서장(序章)이 열리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후한 말기, 황건적의 난을 겨우 평정한 조정의 권력은 십상시(十常侍)라 불리는 환관들에게 독점되어 매관매직이 성행하는 등 부패가 극에 달해 있었다. 허수아비 황제인 영제(靈帝)는 그저 여색이나 탐할 뿐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었다.
이 무렵 황제가 건드린(?) 후궁 하 씨가 황자 변을 낳았다. 그러자 황제는 황후를 쫓아내고 후궁 하 씨를 황후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하 황후의 오라비인 하진은 원래 소와 돼지를 도축하는 백정이었으나 누이 덕분에 갑자기 조정으로 불려와 벼슬을 하게 되었다. 황후인 누이 덕분에 하진의 벼슬도 나날이 올라갔고, 장각이 주도하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드디어 대장군에 임명되어 반란 진압의 총책임을 맡게 되었다. 단숨에 군부를 손아귀에 넣게 된 것이다.
그 후 후궁인 왕 씨가 황자 협을 낳자, 하 황후는 변 황자의 장래를 위해 후궁 왕 씨를 독살하고, 황제의 모후인 동 태후에게 협 황자를 기르도록 하였다. 협 황자는 영특하고 총명하여 황제는 물론 십상시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중병에 걸린 영제는 협 황자를 태자로 삼아 대통을 잇게 하고 싶었으나, 군권을 쥐고 있는 처남 하진 때문에 눈치를 보며 망설이고 있었다. 십상시들도, 변 황자가 대통을 이으면 더욱 기세등등해질 대장군 하진이 언제 자기들에게 칼을 들이댈지 모르기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었고….
영제가 갑자기 승하하자, 하진은 십상시의 우두머리인 건석을 살해하고 누이의 아들인 변 황자를 황제로 즉위시켜(少帝) 드디어 조정의 대권을 거머쥐었다. 권력투쟁에서 외척세력이 환관세력을 누르고 승리를 거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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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하진의 막하에는 후일 군웅이 되어 패권을 다투게 될 청년시절의 원소 원술 조조 등 신진관료 엘리트들이 모여 있었다. 이참에 환관세력을 완전히 뿌리 뽑아 조정을 어지럽히는 화근을 미리 제거해야 한다는 참모들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하진은 계속 머뭇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근위무관 원소가 한 가지 계책을 내었다.
“사방의 군웅들에게 격문을 보내 그들의 군사로 하여금 환관들을 해치우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각지의 군웅들이 몰려와 조정에 칼을 들이댈지도 모른다고 간하는 참모들이 있었지만, 타인의 손으로 환관들을 쓸어버리자는 원소의 말에 하진은 눈이 번쩍 띄었다. 자신의 손에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구석 자리에 앉아있던 풋내기 무관 조조는 감히 나서지도 못하고 홀로 한숨을 쉬며 탄식하고 있었다.
“형리(刑吏)에게 명하여 환관들을 잡아들이면 될 것이지, 각지의 군웅들을 불러들여 화를 자초한단 말인가….”
결국 대장군 하진의 이름으로 띄운 격문은 각지의 군웅들에게 보내졌고, 서량자사 동탁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20만 대군을 이끌고 낙양 외곽에 도착, 도성 안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병주자사 정원도 맹장 여포를 앞세우고 낙양으로 향하고 있었고….
한편, 십상시들도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어서 하 태후에게 빌붙어 목숨을 구걸하는 한편,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하진을 제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어느 날, 십상시들은 하 태후의 친서를 받아내어 하진에게 속히 입조하라고 전갈을 보냈다. 누이의 친서를 받은 하진은 십상시들의 함정일 거라며 입조하지 말라는 측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허세를 부렸다.
“무슨 소리야? 천하의 병권이 지금 내 손안에 있는데, 십상시 따위가 감히 나를 어쩐다는 말이냐?”
하진은 호위병 5백 명을 대동하고 궁궐로 들어갔다. 그러나 궁문을 지키는 환관이 ‘태후마마께서 대장군 혼자만 들어오라고 하셨다.’면서 하진만 들여보내주는 바람에 호위병들은 장락궁 밖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혼자 걸어 들어가는 하진의 등 뒤에서 갑자기 벼락같은 고함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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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백정, 게 섰거라!”
하진은 순간 ‘아차!’ 싶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사방에서 튀어나온 십상시측 군사들에게 포위되어 순식간에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하진의 호위병들은 격분하여 궁궐에 불을 지르고 환관, 궁녀는 물론 그 가속들 2천여 명을 무참히 죽이는 변란을 일으켰다. ‘장락궁의 피바람’으로 불리는 이 난리통에 진시황 이후 4백년이 넘게 황제에서 황제에게로 이어져온 옥새가 없어졌다. 옥새 없는 황제, 이제 후한도 완전히 망조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이 와중에서도 재빨리 몸을 피하여 살아남은 일부 십상시들은 황제와 그의 이복아우 협(진류왕)을 납치하여 궐 밖으로 달아났다. 그러다가 황제 일행은 낙양 교외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던 동탁 군사의 호위를 받으며 다시 입궐하게 되고….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미모가 출중한 누이 덕분에 대권을 잡은 대장군 하진, 그의 막하에서 원소 조조 같은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보필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조언을 듣지 않고 좌충우돌하다가 외지의 군웅들을 도성으로 불러들여 놓고 어이없이 죽고 말았다.
출신이야 어떠했던 간에, 하진의 역량 여하에 따라 후한말의 난세는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그릇과 기량은 기울어지는 왕조의 대권을 맡기에는 너무나 작고 부족했던 것이다.
■ 1장 난세에 일어난 군웅들 ③ 포악한 독재자의 전형 '동탁(董卓)'
진시황 수양제 히틀러 스탈린 후세인…. 세계사에 등장하는 유명한 폭군과 독재자들의 이름이다. 이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매스컴이나 대중을 동원한 여론조작에 능하다는 점, 타협이나 논리, 정당성 같은 이성적인 것을 싫어한다는 점, 적대세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 공포정치를 한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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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동탁도 그런 점에서 당당히 독재자의 반열에 낄 만한 인물이다.
아니, 오히려 이들보다 더한 이력을 한 가지 더 갖추고 있다. 보통의 독재자들이 적대세력에게는 엄격하면서도 일반 국민들에게는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던 데 비해, 동탁은 적대세력은 물론 민중들도 무자비하게 억압하였던 것이다.
그가 대권을 잡는 과정과, 잡고 나서의 행적 그리고 몰락과정을 살펴보자.
동탁(董卓), 자는 중영(仲穎). 섬서성 출신으로 키가 크고 몸집이 육중했으며 가는 눈매에 재지(才智)가 번뜩이는 사나이. 어릴 때부터 힘이 장사여서 활통을 말 양쪽에 매달고 달리면서 좌우 어느 쪽 팔로도 활을 쏠 수 있었는데, 쏘았다 하면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 변방의 오랑캐인 강족 토벌에 큰 공을 세우면서 중앙에 이름이 알려지게 됐다. 그는 황건적과의 전투에서 여러 번 패하여 위기에 몰리기도 했으나, 조정의 실세인 십상시(十常侍)에게 뇌물을 주고 서량자사로 임명되면서 다시 기사회생한다. 한조의 멸망을 예감한 그는 아무도 주시하지 않는 변방에서 20만 군병을 양성하면서 천하를 움켜잡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사위인 모사(謀士) 이유와 이각 곽사 장제 번조 등 강맹하기로 이름난 네 장수가 포진하고 있었다.
드디어 대장군 하진으로부터 도성으로 들어와 십상시를 토벌하라는 격문이 오자,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동탁은 즉시 군사를 이끌고 도성으로 향한다. 이때 도성에서는 십상시에게 죽임을 당한 하진의 부하들이 환관들을 무참히 살육하는 참사가 일어났고, 난을 피해 궁궐 밖을 전전하던 황제 일행은 동탁군의 호위를 받으며 다시 입궐한다. 대권이 너무도 쉽게 동탁에게 굴러들어온 것이다.
실권자가 된 동탁은 군대를 풀어 도성에 온통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반대파를 과감히 처단한다. 처음엔 여포를 데리고 온 병주자사 정원이 그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희대의 명마인 적토마로 여포를 매수하자 이젠 동탁의 뜻을 거스를 사람이 없었다. 이에 동탁은 소제(少帝)를 폐하고 그의 이복동생인 아홉 살짜리 진류왕을 새 황제[獻帝]로 옹립하니 이제 천하가 완전히 동탁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되었다.
동탁은 철저히 독재자의 길을 걸었다. 폐제(廢帝)와 황비(皇妃), 그의 모후인 하 태후를 잔인하게 죽이고, 그 시체를 아무렇게나 묻어버리게 했다. 또 자신에게 대항하는 사람은 무조건 잡아 죽이니 조정의 백관들은 넙죽 엎드려 목숨을 보전하기에 바빴다. 그는 제위에 버금가는 영화를 누리면서도 심심하면 사람을 죽이는 가학적인 광란 증세를 보였다. |
어느 봄날, 동탁이 수십 명의 미녀를 마차에 태우고 성 밖 매원(梅園)을 지나고 있을 때, 마침 고을의 축제일이라 청춘남녀 한 쌍이 곱게 차려입고 마차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를 본 동탁이 ‘농사꾼 주제에 밭에 나가 일하지 않고 돌아다니니 괘씸하다’며 군사들에게 그들을 잡아오라고 명령했다.
“갈기갈기 찢어 죽여라!”
군사들은 두 사람의 손발을 네 필의 소에 매달아 각각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했다[거열형(車裂刑)]. 두 사람의 사지가 떨어져나가며 흘린 피가 매원을 붉게 물들였다. 이를 본 동탁은 ‘오늘은 꽃구경보다도 더 재미있는 구경을 했구나’하고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동탁을 제거하기 위해 원소 조조 손견 공손찬 등 각지의 군웅들이 연합군을 구성해 맞서보았으나 내분으로 실패하고 만다. 동탁은 도성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하는 한편, 장안 교외에다 으리으리한 새 궁궐 미오성을 지었다. 그 안에 20년 치의 군량과 보물을 저장해놓고 미희 800명을 뽑아 밤낮없이 주지육림 속에서 살았다. 그는 일가붙이를 모두 조정의 요직에 임명하여 그의 눈과 귀가 되도록 해놓고 제위를 찬탈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는 미오성에 기거하면서 보름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장안으로 출사했다. 그의 수레가 지나가는 연도에는 모래를 깔고 보호막을 치는 등 법석을 떨었고, 조정의 중신들은 모두 나와서 도열했다. 민가에서는 밥 짓는 연기마저 피우지 못하고 그의 수레가 무사히 지나가기를 빌었다. 혹시라도 그의 눈에 거슬려 목숨을 잃을까봐 두려워서였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던, 하늘을 찌를 듯한 그의 위세도 조정의 원로인 사도(司徒) 왕윤과 그의 수양딸 초선이 주도면밀하게 연출한 미인계(美人計)와 연환계(連環計)에 빠져 부하인 여포에게 목이 떨어지면서 허망하게 끝나버리고 만다. 그의 나이 54세, 대권을 잡은 지 3년만이었다.
동탁이 죽자 장안의 백성들이 모두 거리로 뛰쳐나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의 머리는 차고 노는 축구공이 되었고, 그의 목 없는 시신의 배꼽에는 심지를 박아서 불을 붙였는데 뱃가죽이 얼마나 기름졌던지 밤새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백성들의 원한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지 않은가. |
적대세력을 억누르고 국민들을 억압하는 데는 공포정치보다 확실한 방법은 없다. 그러나 공포를 수단으로 정치를 하려면 강력한 자극을 주는 새로운 방법을 끊임없이 개발해야 한다. 공포감도 반복되면 마비현상이 생기게 되어 웬만한 자극으로는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독재자는 차츰 광란적인 가학심리에 빠지게 되는데, 그 방법은 일시적으로는 효과가 있는 듯 보이지만 적대세력을 더욱 단합하게 만들어 결국 자기 자신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만다. 이것이 공포정치의 귀결이다.
세계사에서 보아온 독재자들의 말로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처참한 비극으로 끝나는 것은, 자신이 뿌려놓은 죄과에 대한 업보이다. 그런 점에서 포악한 독재자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동탁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 1장 난세에 일어난 군웅들 (3-1) 동탁이 남긴 두 이리 '이각과 곽사'
포악한 독재자 동탁이 여포의 손에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자, 이각 곽사 장제 번조 등 동탁의 심복 네 장수는 앞일이 난감했다. 이들은 우선 근거지인 섬서로 도망친 다음, 항복하겠다는 표문을 장안으로 보냈다. 그러나 이 제의가 당시 조정의 실세였던 사도 왕윤에 의해 거절되자, 네 장수는 모사 가후의 계책대로 싸우기로 방향을 바꾸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지 않는가. 이각과 곽사 등은 '왕윤이 대군을 보내 동탁의 근거지 주민들을 모두 죽이려 한다'고 헛소문을 퍼뜨리고, '가만히 앉아서 당하느니 모두 나서서 동탁의 원수를 갚자'며 주민들을 선동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주민들이 이각과 곽사의 군문(軍門)으로 몰려드니 순식간에 군사가 십만 명이 넘었다.
네 장수는 군사를 나누어서 일부 군사들이 맹장 여포를 도성 밖으로 유인하는 사이, 나머지 군사들은 물밀듯이 장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여포가 급히 회군하여 성 안으로 들어오려 했지만 이미 도성 장안은 이들의 수중으로 떨어지고 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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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각과 곽사 등은 황궁으로 달려가 황제를 협박, 사도 왕윤을 끌어내 목을 베니 다시 대권은 이들 네 장수에게로 돌아갔다. 이각은 같은 열(列)의 장수 번조에게 적장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씌워 죽이고, 장제를 부하장수로 만들어 섬서로 보냈다. 그런 다음 곽사와 함께 대권을 나누어 가지기로 하고 자신들의 벼슬을 멋대로 정하는 등 국정을 전단(專斷)했다. 장안은 이들이 이끌고 온 군사들의 말발굽에 여지없이 짓밟혔다. 동탁을 제거하고 나니 그의 잔당들이 날뛰고 있다. 이를 어쩔 것인가? 권력이란 본시 부자(父子) 간에도 나눠가질 수 없는 것, 그런데 이각과 곽사가 대권을 공동으로 점유하고 있다면 이미 해결책도 나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이 둘을 갈라놓으면 되는 것이다.
이때, 두 사람을 이간시키려고 남몰래 고심하던 중신 양표는 곽사의 처가 질투가 심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드디어 작전을 개시한다. 양표는 자기 아내를 곽사의 부인에게 자주 보내면서 가깝게 지내도록 했다. 어느 날, 양표의 부인은 곽사의 부인에게 살짝 일렀다. "요즘 곽 장군은 이 장군의 부인과 깊은 관계라는 소문이 장안에 파다하게 퍼져 있습니다. 만일 이 장군이 소문을 듣게 되면 곽 장군께서 필히 해를 당하실 것입니다. 은밀히 대비책을 세우도록 하십시오." 곽사의 부인은 질투심에 눈이 뒤집혀 펄쩍 뛰었지만, 혹시 남편이 해를 입을까봐 전전긍긍했다.
며칠 뒤, 이각의 부중(府中)으로부터 연회 초청을 받은 곽사가 출발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곽사의 부인이 "혹시 술에 독이라도 타면 어떻게 하느냐?"며 가지 못하게 했다. 두 사람은 함께 장안을 점령하고 대권을 나누어 가진 이래, 아직 한 번도 서로를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이 하도 말리는 바람에 곽사는 그날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각은 아무리 기다려도 곽사가 오지 않자 술과 안주를 그 집으로 보냈다.
그러자 곽사의 부인은 자신의 의심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보내온 안주를 부엌으로 가져가 몰래 독을 뿌려서 내왔다. 곽사가 안주 하나를 집어서 입에 넣으려 하자, 부인이 황급히 제지하면서 말했다. "이 음식은 그 집에서 보내온 것인데 어찌 함부로 드시려 하오?" 부인은 안주 하나를 마당에 있는 개에게 던졌다. 그러자 안주를 먹은 개가 미친 듯이 날뛰다가 쓰러지더니 바로 숨이 끊어지는 것이 아닌가. |
이를 지켜본 곽사는 치를 떨며 이각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 후 곽사는 이각과 함께 어울리는 자리를 한사코 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쩔 수 없이 이각이 베푸는 술자리에 참석했다가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날 밤 곽사는 심한 복통을 앓았다. 그의 부인은 음식에 독을 넣은 것이 분명하다며 또 이간질을 했다. 복통으로 며칠 고생한 곽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휘하 군사를 이끌고 이각의 부중으로 쳐들어갔다. 이각도 곽사의 배신에 분개하며 군사를 일으켰다. 두 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각은 재빨리 조카 이섬에게 황제를 납치하게 하여 동탁이 기거하던 미오성에 가둬두고 감시케 했다. 황제를 끼고 있는 편이 대의명분이 앞선다는 것을 안 까닭이었다. 이각에게 선수를 빼앗긴 곽사는 분을 이기지 못하여 궁궐을 습격, 비빈(妃嬪)들과 궁녀들을 닥치는 대로 능욕하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도성 장안은 두 군사들의 싸움과 노략질로 완전히 무법천지가 되고 말았다.
그 사이, 이각이 전에 섬서로 보냈던 장제가 대군을 이끌고 황제가 있는 미오성에 들이닥쳤다. 황제를 배알한 장제는 도성을 낙양으로 옮길 것을 종용했다. 아무 실권 없는 황제가 달리 의견이 있을 리 없었다. 황제 일가가 낙양을 향해 떠나자 숨어있던 한의 구신(舊臣)들이 달려와서 어가(御駕)를 호위했다. 서로 싸우다 황제를 빼앗겨 버린 이각과 곽사는 곧 싸움을 중지하고 다시 힘을 합하여 어가를 추격했다.
황제 일행이 천신만고 끝에 낙양 부근에 도착해보니, 낙양은 옛날 동탁이 불태운 폐허 그대로였고 남아있는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었다. 황제는 산동에 있는 조조에게 어가를 보호하라는 조서를 보냈고, 황제의 부름을 기다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던 조조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입성한다.
이때, 이각과 곽사는 조조에게 저항하는 것은 무리라며 항복을 권하는 모사 가후의 계책을 듣지 않고 조조와 일전을 겨루기로 했다. 첫 싸움에서 여지없이 참패하여 재기불능 상태가 된 이각과 곽사는 패잔병을 이끌고 섬서로 도망쳤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부하들에게 살해된 두 사람의 목은 싸늘한 수급이 되어 조조에게 바쳐지고 만다. 여자의 질투심을 이용한 반간계(反間計)에 말려들어 서로를 의심하다가 패망한 이각과 곽사, 대권을 나누어가진 그 자체에 이미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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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몰락이 남긴 교훈은, 뚜렷한 대의명분 없이 서로의 필요에 의해 결탁된 세력은 내부의 조그만 이간질에도 쉽게 무너지고 만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다.
■ 1장 난세에 일어난 군웅들 ④ 삼국지의 무예지존 '여포(呂布)'
소설 삼국지에는 발군의 무용을 지닌 장수들이 많이 나온다. 화웅 안량 문추 여포 관우 장비 조자룡 하후돈 전위 허저 서황 태사자 감녕 마초 방덕 황충 위연…. 하나같이 일기당천의 무장들이다. 이 중에서 무예가 가장 뛰어난 사람은 누구일까?
무력으로 한의 제실을 차지한 동탁이 온통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놓고, 제멋대로 황제를 퇴위시키고 새 황제를 임명(?)하려 했을 때 감히 반대하고 나선 사람이 있었다. 병주자사 정원이었다. 그러고도 그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뒤에 양자(養子) 여포가 떡 버티고 서 있기 때문이었다.
맹호 같은 기상, 불을 뿜는 눈동자, 양날을 창으로 쓰는 방천화극을 꼬나 쥔 빈틈없고 늠름한 위용, 삼국지에 처음 얼굴을 내민 여포의 모습이다. 이에 포악하기로 소문난 동탁도 기가 질려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희대의 명마인 적토마와 금은보화에 눈이 먼 여포는 양부(養父) 정원을 죽이고 동탁의 휘하로 들어간다.
여포(呂布), 자는 봉선(奉先).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궁마와 창검의 명인으로, 신이 전쟁을 위해 특별히 창조한 불사신으로, 무신(武神)으로 표현되어 있을 정도로 삼국지에 등장하는 무장들 중 최고의 무예를 지녔다.
여포가 삼국지 초반부에 등장하여 눈부신 무용을 떨치는 모습에서부터 아깝게 중도에서 사라지는 장면까지 그의 행적을 더듬어보면서, 난세를 헤쳐 나가는 영웅의 조건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원소 조조 손견 공손찬 등 전국의 17제후들이 모여 연합군을 구성, 포악한 독재자 동탁을 타도하려 했으나 여포를 앞세운 동탁에게는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여포가 적토마를 타고 방천화극을 휘두르며 눈부시게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낙양의 어린이들이 이런 노래를 지어 불렀다. |
목장에 말은 많지만 / 말 중의 으뜸은 적토마라네 낙양에 호걸은 많지만 / 호걸 중의 으뜸은 여포 봉선이라네
여포를 삼국지의 무예지존으로 꼽는 근거로, 우선 호로관 전투에서 유비 관우 장비가 한꺼번에 덤벼들었어도 끝끝내 여포를 이기지 못했다는 점이다. 유비는 제쳐두더라도 82근의 청룡언월도를 쓰는 당대 제일의 무사 관우, 1장 8척의 사모를 휘두르는 무쌍의 용장 장비가 동시에 덤벼들었음에도 그를 꺾지 못했다면….
또 있다. 옛날 은나라 주왕 때의 전설적인 영웅 악래라 불렸던 천하장사 전위, 한고조 유방의 맹장 번쾌의 화신으로 불렸던 허저, 그리고 하후돈과 하후연, 이전과 악진 등 조조진영의 여섯 장수가 한꺼번에 덤벼들었어도 여포 한 사람을 꺾지 못했다.
무예로는 분명히 여포에게 적수가 없었다. 그는 가히 무신으로 불릴 만했다. 그러나 하늘은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주지는 않는다. 천하제일의 무용을 지닌 여포에겐 불행하게도 사려와 지략이 부족했다. 변덕도 심했다.
적토마에 혹하여 주인을 바꾼 여포, 이번에는 초선이라는 여자 때문에 두 번째 양부이면서 조정의 실권자인 동탁을 죽인다. 그러나 대권을 차지할 만한 그릇은 못 되었던지 동탁의 부하 장수들인 이각과 곽사에게 쫓겨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고 만다.
결국 여포는 서주의 유비에게 의지하게 되는데, 유비가 남양의 원술을 치는 사이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유비의 뒤통수를 쳐서 서주를 빼앗는 등 신의를 저버리는 행동을 한다. 또, 자신의 딸을 원술의 아들과 정략결혼 시키려다 중도에 포기하는 등 줏대 없이 좌충우돌하기도 한다.
조조의 대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모사 진궁은 여포에게 조조를 물리칠 몇 가지 계책을 일러주지만 여포는 끝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처첩의 치맛자락에 파묻혀 오히려 진궁을 의심하는 등 아녀자의 눈물에는 솔깃하고 참모의 충간(忠諫)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내부 분열이 일어나는 바람에 결국 여포는 잠든 사이에 부하들에게 결박 지워져 조조 앞에 끌려나오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의 적토마도 함께….
“승상! 소인 여포, 이렇게 항복하였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승상을 제 몸같이 돌봐드리겠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일세의 영웅답지 않게 목숨을 애걸하는 여포를 보고 조조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냥 살려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옆에 있던 유비에게 슬쩍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도덕군자 같은 유비도 이제는 여포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
“안 됩니다. 그는 적토마 때문에 양부 정원을 살해하고 동탁을 섬기다가, 또 여자 때문에 동탁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 정도의 무예를 지닌 인물이라면 조조나 유비가 탐을 내었을 법도 한데 아무도 그를 구해주지 않은 것이다. 중원에서 군계일학처럼 무용을 펼치며 무신으로 불렸던 여포, 제대로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참수되고 만다.
오히려 그의 부장 장료가 더 당당하고 꼿꼿하게 저항했다. 유비와 관우의 간곡한 요청도 있었지만, 장료의 뛰어난 무용과 인물됨을 알아본 조조가 그를 발탁하여 자신의 사람으로 만든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신의가 없는 사람은 곤란하다. 또 무용만 있고 지략이 없는 사람은 결코 패자(覇者)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이미 400년 전에 산을 뽑을 만한 무용과 군사력을 지닌 항우가, 그보다 훨씬 열악한 군사력을 지니고도 용인술이 뛰어난 유방에게 진 것으로 이미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여포는 삼국지를 대할 때마다 참으로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첫 번째 인물이다. 최고의 무예를 지닌 그가 패권에 도전할 기개를 가졌다면 인격적으로도 좀 더 성숙했어야 했고, 탁월한 참모인 진궁의 지략에도 귀를 기울였어야 했다.
아니면, 유비나 조조의 휘하에 들어가 한껏 실력을 발휘했더라면 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길 용장으로 기록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 1장 난세에 일어난 군웅들 ⑤ 서주를 유비에게 물려준 인물 '도겸(陶謙)'
도겸(陶謙), 자는 공조(恭祖). 공직생활을 오래한 문약(文弱)한 선비형 인물로, 황건적 토벌에 공을 세워 서주자사가 되었다. 그가 난세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겪게 된 조조와의 악연과 유비와의 인연, 그리고 그에 대한 사후 평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관해가 이끄는 황건적 5만이 북해성을 포위하자 북해태수 공융은 유비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유비는 관우 장비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와서 관해의 목을 베고 황건적을 패퇴시켰다. 공융은 감사의 인사와 함께, 서주자사 도겸의 중신인 미축을 유비에게 소개했고, 미축은 서주가 처한 딱한 사정을 유비에게 들려주며 도움을 요청했다. |
영제가 죽고 어린 소제가 즉위하자, 실권자가 된 소제의 외삼촌 하진이 환관(십상시)의 우두머리 건석을 죽이는 변란이 일어났다. 이에 곧 환관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있을 것으로 예측한 조조는 아비 조숭에게 속히 가솔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내려가라고 했다.
조숭이 그 일족 40여명과 금은보화를 실은 수레 100여대를 이끌고 서주를 지난다는 소식을 들은 서주자사 도겸은 친히 나와서 그들을 맞이하고 성대한 잔치를 열어주었다. 떠날 때에도 도위 장개에게 군사 5백 명을 주며 호위케 했다.
조숭 일가의 행렬은 어느 산골을 지나던 중에 소나기를 만나 가까운 산사로 대피를 하였다. 그런데 장개가 인솔하는 호위군이 갑자기 도적으로 변해 조숭 일가를 모조리 죽이고 재물을 실은 수레를 탈취하여 달아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를 알게 된 조조는 격노하여 아비의 원수를 갚는다며 대군을 이끌고 하후돈을 앞세워 서주로 쳐들어왔다. 도겸이 앞으로 나가 전후의 사정을 설명하였으나 조조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때 마침 강력한 돌풍을 동반한 모래바람이 일어 조조가 군사를 물렸으나,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모른다며 도와달라는 거였다.
유비는 도겸의 처지가 딱하다고 생각하여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유비는 공손찬에게서 빌린 군사 2천 명과 자신의 군사 3천 명을 이끌고 관우 장비와 함께 서주로 향했다. 북해태수 공융과 청주자사 전해도 각각 일군을 이끌고 도겸을 도우러 왔다.
다시 조조군이 몰려와 진을 치자 용장 장비가 조조의 장수 우금을 거세게 몰아붙여 길을 뚫었고, 유비군은 재빨리 서주성 안으로 들어갔다. 도겸은 유비를 만나자 마자 그의 기상과 인품에 반해 ‘저는 이미 늙고 무능해서 서주를 맡아서 지켜낼 자신이 없소. 공은 한실의 종친이니 이 서주를 맡아서 편안케 해주시오.’하며 서주자사의 패인(牌印)을 내놓았다.
그러나 유비는, 그렇게 되면 제가 불측한 마음을 가지고 이곳에 온 것이 된다며 정중히 사양했다. 이런 난세에는 모든 군웅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고 혈안이 되어있는데 저절로 굴러온(?) 서주자사 자리를 사양하다니….
유비는 조조의 군사를 물러나게 하는 일이 더 급하다고 생각, ‘지난번에 일어난 불상사는 호위대장 장개가 저지른 일이고 도겸에게는 아무런 허물이 없으니, 부디 조정의 일을 먼저 생각하시고 사사로운 일은 뒤로 미루시기 바란다.’는 요지의 서신을 조조에게 보냈다. |
서신을 받은 조조는 ‘유비란 놈이 왜 이렇게 건방지냐.’며 역정을 냈지만, 그때 여포가 비어있는 연주를 급습하여 빼앗고 그 여세를 몰아 복양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전갈이 왔다. 조조는 어쩔 수 없이 유비의 화해 권유를 수락하는 답장을 보내고 급히 군사를 거두어 연주로 되돌아갔다.
조조가 물러나자 도겸은 또다시 서주를 유비에게 넘겨주려고 했지만, 어질지 못한 일은 결코 하지 않겠다는 유비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에 도겸은 이웃에 있는 소패성에 머무르면서 서주를 지켜주기를 청했고, 이것은 유비가 쾌히 수락했다. 유비는 이제 공손찬의 그늘에서 벗어나 두 아우, 3천 군사와 함께 소패성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조와 여포가 불꽃 튀는 혈전을 치루고 있는 동안 서주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도겸이 병이 들고 말았다. 도겸은 중신 미축과 진등을 불러 ‘이제 나는 병이 깊어 살아날 가망이 없는데, 조조가 아비의 원수를 갚으려고 혈안이 되어있으니 도대체 어떡하면 좋겠소?’ 하며 의견을 물었다.
미축이 ‘조조의 대군을 막아낼 사람은 소패의 유비뿐입니다. 다시 한 번 불러보시지요.’ 하고 말했다. 도겸이 연통을 넣자, 유비는 두 아우와 함께 서주성으로 달려왔다. 겨우 숨이 붙어있던 도겸은 유비의 손을 잡고 ‘서주의 백성들을 위해 이 패인을 받아 주시오.’하고 다시 간곡히 청했다.
유비는 이번에도 사양했다. 결국 도겸은 미축과 손건 등에게 유비를 잘 섬기도록 당부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63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서주의 백성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 간청을 했고, 유비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서주의 패인을 받아들였다. 10여 년 동안이나 중원을 떠돌아다니던 유비, 이제 수백 리의 땅과 수십만의 인구를 보유한 서주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미 부인이 되는 미축의 누이와도 만나게 되고….
도겸은 애초에 조조와 대적할 만한 실력도 패기도 없었다. 결국 그는 서주를 유비에게 넘겨줌으로써 유비가 군웅의 일각으로 발돋움하는 발판을 마련해주고 조용히 사라졌다. 역사가 그에게 부여한 임무는 거기까지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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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의 유비를 정통으로 세운 삼국지연의는 ‘도겸은 사람됨이 온후하여 선정을 베풀었으며 도의심(道義心)이 깊은 인물’이라고 평하고 있다. 또 ‘조숭의 죽음에는 책임이 없고, 어진 인물이기 때문에 유비에게 서주자사의 지위를 물려주려한 것’이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위의 조조를 정통으로 세운 정사 삼국지 ‘도겸전’에는 ‘도겸은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무도한 사람이며 악정을 거듭한 인물’이다. ‘조숭의 죽음에 책임이 있고, 조조의 침공으로 멸망 직전에 이를 만큼 궁지에 몰렸기 때문에 유비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려한 것’이라고 쓰여 있다.
사서의 평가는 이렇듯 극명하게 갈라진다.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처한 입장에 따라 이렇게 달라지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 1장 난세에 일어난 군웅들 ⑥ 북방의 효웅(梟雄), 백마장군 '공손찬(公孫瓚)'
난세의 영웅들 중에는 끝까지 살아남아 자신의 뜻을 이루는 경우보다 중도에 탈락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중도에 탈락하는 인물은 틀림없이 그럴만한 요인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난세만큼 영웅들의 기량이 있는 그대로 노출되고 공정하게 평가되는 때도 없기 때문이다.
중도에 탈락하는 인물들의 실패요인을 찾아보는 것은 뜻을 세우고 꿈을 펼치려는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중도에 패망하는 군웅 중의 한 사람인 공손찬의 활약상과 패망 요인, 그리고 남긴 업적 등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공손찬(公孫瓚), 자는 백규(伯珪). 중원의 최북방인 고구려와 인접한 요서지방의 빈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우렁찬 목소리를 가졌으며, 성장하면서 상대를 압도할 만한 풍채를 지니게 되었다.
공손찬의 인물됨에 반한 그 지역 태수가 자신의 외동딸을 주어 사위로 삼은 뒤, 당대의 석학 노식의 문하에 유학을 보냈다. 거기서 공손찬은 나이 어린 유비를 만나 함께 수학하였고, 후일 피를 나눈 형제처럼 지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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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적이 창궐하자, 고향으로 돌아온 공손찬은 그곳 청년들을 규합하여 황건적 토벌에 앞장섰고, 북쪽 변방을 어지럽히는 선비족과 오환족을 평정하여 용맹을 떨치면서 당당히 군벌로 성장했다. 또 북평태수로서 동탁을 토벌하는 17제후 연합군에도 참여하여 중앙무대에 등장했다. 이때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도 그의 진영에 함께 있었다.
연합군이 내분에 휩싸여 제후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공손찬도 군마를 이끌고 근거지로 돌아가 기업(基業)을 일으킨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서부터 차근차근 평정해 나가면서 삼국지 전야에 등장하는 군웅들 중에서 가장 먼저 당당한 세력을 갖는 북방의 강자로 부상한다.
이 무렵, 공손찬은 하북의 군웅 원소와 기주(冀州)를 두고 다투다가 서로 원수가 된다. 두 강자는 연일 전투를 벌이며 북방지역의 패권을 놓고 일진일퇴의 공방을 계속했지만 서로 실력이 엇비슷해서인지 쉽게 승부가 나지 않았다.
당시의 세력분포를 보면 여포를 영입한 동탁은 도성에서 무자비한 공포정치를 하고 있었고, 북방의 공손찬은 남양의 원술과 연합하여 원소와 조조의 연합세력과 맞서고 있었다. 그때 유비는 공손찬의 비호 아래 평원 땅에서 힘을 기르고 있었다.
동탁이 죽은 후, 황제가 동탁의 잔당인 이각과 곽사에게 쫓겨 낙양 주위에서 배회하고 있을 때, 유비는 공손찬에게 이때를 놓치지 말고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나아가 황제를 받들자고 진언했다. 당시엔 군웅들이 아직 기반이 잡혀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그러나 공손찬의 반응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현제(賢弟)의 충고는 고마우나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네. 원소가 낙양으로 가는 길을 내줄 리도 없고, 설사 황제를 모신다고 해도 그 득실을 헤아릴 길이 없네. 공연히 낙양으로 가서 제후들의 의심을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곳에 머물면서 내실을 기하겠네.”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마는 공손찬, 황제를 등에 업고 천하를 호령하는 것은 패자(覇者)가 되는 지름길임은 물론, 정통성 확보에도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을…. 결국 재빨리 군마를 거느리고 낙양에 입성한 조조가 실권자로 발돋움하지 않는가.
그런데 공손찬은 북방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확립한 것에 만족을 했는지 갑자기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켜 거대한 성채와 누각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 막대한 식량을 비축하는 등 일가권속들과 함께 안주할 준비를 했다.
이때 조조의 부추김을 받은 원소가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공손찬은 나가서 싸우는 대신 성안에서 굳게 지키는 작전으로 맞섰다. 그러다가 원소군의 주력부대가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쪽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공손찬의 군사들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사기도 급격히 저하되었다. |
다급해진 공손찬은 흑산적(黑山賊)의 우두머리 장연에게 밀계를 적은 사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사자를 사로잡은 원소가 그 계략을 역이용하는 바람에 참패하여 공손찬은 군사를 태반이나 잃고 만다. 이어, 원소군이 땅굴을 파고 누각 안으로 들이닥치니 도망쳐 나갈 수도 없었다.
결국, 공손찬은 처자식을 먼저 죽이고 스스로 불타는 역경루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고 만다. 백마(白馬)를 타고 전장을 누비면서 맨 먼저 기업(基業)을 일으켰던 북방의 효웅(梟雄)치고는 참으로 비참한 종말이 아닐 수 없다. 북방의 패권을 건 두 강자의 건곤일척의 싸움은 결국 원소의 승리로 끝이 난다.
공손찬의 패망 원인을 찾아보자.
첫째, 대국을 보는 안목이 부족했다. 유비가 황제를 받들어 모시자며 낙양으로의 출진을 권했을 때 모험을 한번 해보았어야 했다. 난세에는 도박도 필요한 법이다. 또, 조조마저도 두려워했던 원소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것은 그의 부족한 안목을 여실히 보여준다. 원소와 자웅을 겨루어야 했다면 조조와 연합, 남북에서 협공을 했어야 했다.
둘째, 인재를 모으고 활용하는 데 소홀했다. 특히 그가 뒤를 보살펴주었던 유비의 안목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떠나도록 내버려두었다. 유비를 끝까지 곁에 두었더라면 그렇게 쉽게 패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또, 제 발로 찾아온 조자룡 같은 무장을 ‘속마음을 알 수 없다.’하여 중용하지 않은 것도 그의 빼놓을 수 없는 실책이다.
셋째, 그 자신의 만심(慢心)을 경계했어야 했다. 가장 먼저 성공하여 북방의 강자로 발돋움했으나 조그마한 성공에 만족하여 긴장의 고삐를 풀고 만 것이다. 천하가 평정되어 최후의 승자로 남을 때까지 한 시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는 난세에, 거대한 누각을 짓고 호강을 생각한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일이 아닌가.
북방의 효웅 공손찬, 북방 오랑캐들을 모두 평정하여 군웅들이 안심하고 중원에서 싸울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놓고, 또 일개 서생이었던 유비를 거목으로 키워서 중원으로 내보낸 후 조용히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것이 바로 그에게 주어진 소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 1장 난세에 일어난 군웅들 ⑦ 강동의 호랑이 부자(父子) '손견(孫堅)과 손책(孫策)'
역사에 가정법을 쓰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손견이나 그의 아들 손책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오래 살았더라면 아마 삼국지의 스토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천하의 패권을 놓고 조조와 최후까지 결전을 벌인 사람은 유비가 아니라 이들 중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들 부자(父子)의 짧고 헌걸찬(매우 풍채가 좋고 의기가 당당한) 생애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손견(孫堅), 자는 문대(文臺). 강동 오군 출신으로,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손무의 후예이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잉태할 무렵, 조상들의 장지(葬地)에서 영롱한 광채가 솟아올라 구름을 오색으로 물들이며 하늘까지 뻗쳤다고 하는데, 손견을 낳을 무렵엔 창자가 쏟아져 온 성문을 휘감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손견은 총명하고 활달한 기상을 타고났는지 어릴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의 영명함이 인근에 널리 알려진 것은 그가 열일곱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어느 강의 포구에 갔을 때였다.
거기서 수적(水賊)들이 노략질을 하고 있는 것을 본 손견은 즉시 옆에 있는 언덕으로 뛰어올라가 칼을 빼들고 여러 병사를 지휘하듯 호령했다. 수적들은 관병들이 잡으러 온 줄 알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다. 그는 곧바로 두목을 뒤쫓아 가서 목을 베어 들고 돌아왔다.
이 일로 그의 명성이 온 고을에 퍼졌고, 주민들의 열화와 같은 요구에 의해 고을의 치안책임자가 되었다. 그 후에도 그는 탁월한 지략과 용맹으로 도적을 소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마침내 그곳 장사군(長沙郡)의 태수가 되었고, 한당 황개 정보 조무 등 용맹무쌍한 네 장수를 거느린 막강한 실력자가 되었다.
그는 황건적 토벌에도 참여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 후 동탁이 대권을 잡고 공포정치를 하자, 각지의 제후들이 ‘타도 동탁’의 기치를 내걸고 연합군을 구성하는데 그도 장사태수로서 군사를 이끌고 참여한다. 그는 직정적(直情的)인 성격 그대로 선봉을 자원하여 동탁의 선봉장 화웅을 따끔하게 혼내주며 강동의 호랑이로 불리던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
결국 동탁은 도성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천도를 했다. 연합군은 동탁이 버리고 떠난 낙양으로 입성했는데, 선봉으로 궁궐에 입성한 손견은 한 우물에서 십상시의 난 때 잃어버린 한(漢)의 옥새를 발견했다. 그는 옥새가 자신의 손에 들어온 것은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 웅지를 품은 채 군사를 이끌고 근거지인 강동으로 향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연합군의 맹주(盟主) 원소는 한실의 종친인 형주자사 유표에게 ‘손견이 옥새를 훔쳐 달아나고 있으니 그를 잡아서 옥새를 뺏으라.’고 밀서를 보냈다.
손견과 유표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손견은 유표군의 장수 황조의 매복계에 걸려 무참하게 전사하고 마니 이때 그의 나이 서른일곱이었다. 너무 저돌적으로 맹진하다가 가슴 속에 품은 큰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스러지고 마는 손견.
그의 열일곱 살 난 맏아들이 부업(父業)을 이었으니 그가 바로 강동의 작은 호랑이 백부(伯符) 손책(孫策)이다. 아비 손견의 용맹한 기상과 어미 오부인의 미모를 물려받아 빼어난 용자(容姿)를 지닌 그를 강동 사람들은 손랑(孫郞)이라 부르며 잘 따랐다.
어릴 때부터 아비와 장수들을 따라다니며 병법과 창검술을 익힌 손책은 지용(智勇)을 겸비한 무장으로 성장했다. 처음 참가한 전투에서 아비를 잃었지만, 손책은 절망하지 않고 착실하게 실력을 기르며 기반을 쌓아가고 있었다.
서주자사 도겸의 침략을 받은 손책은 한동안 남양의 군벌 원술에게 의지하며 지냈다. 청년이 된 그는 선부(先父)가 이루지 못한 웅지를 펼치기로 결심, 물려받은 옥새를 담보로 원술에게서 군사 3천명을 빌려 옛 장수들과 함께 강동으로 돌아온다.
그때 손책은 의형제이면서 친구요 동서인 주유와 맹장 태사자, 주태 등을 새로 얻었고, 강동의 두 현사(賢士) 장소와 장굉을 초빙하여 군웅으로서의 기반을 갖추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어 강동 일대를 착착 평정, 오나라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그가 어느 전투에서 적장 한 명을 고함으로 말에서 떨어져 죽게 하고, 또 다른 적장 한 명을 자신의 겨드랑이에 끼워서 죽인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소패왕(小覇王)이라 불렀다. 이곳 출신의 패왕 항우에 버금가는 영웅이라는 뜻이다.
그는 강동과 강남 일대를 주름잡던 군웅과 도적떼들을 모조리 평정한 다음, 황성에 사신을 보내 대사마 벼슬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당시 조정의 실권자인 조조에게 앙심을 품었다. 그는 조조를 쳐서 단숨에 천하의 패권을 잡으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
그러나 그 계획을 추진하기도 전에 자객의 습격을 받아 온 몸에 치명상을 입고 말았다. 손책이 상처를 치료하고 있을 때, 원소의 사자가 와서 함께 힘을 모아 조조를 치자고 제의했다. 그는 쾌히 승낙하고 사자를 접대하는 잔치를 열었다. 그 자리에 우길이라는 선인(仙人)이 찾아왔는데 많은 백성들이 우르르 몰려가 경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손책은 강동 땅에 자기보다 더 우러름을 받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시샘을 느끼고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선인을 잡아서 죽여 버렸다. 그러자 손책은 갑자기 귀신에 씐 듯 날뛰기 시작했고, 아물었던 상처까지 재발하여 중태에 빠졌다. 그는 자신의 최후가 왔음을 직감하고 아우 손권을 불러 후사를 부탁한다.
“아버지와 내가 창업할 때의 간난(艱難)을 한 시도 잊지 말고 영토를 잘 보전하기 바란다. 나라 안의 일은 장소에게 묻고, 나라 밖의 일은 주유에게 물어서 처결토록 하라.”
이때 손책의 나이 겨우 스물여섯 살이었다. 이후 아우 손권이 다스리는 오나라는 그저 물려받은 땅을 지키기에 급급할 뿐, 한 번도 중원으로 진출하려는 적극적인 정책을 펼치지 못한다.
소패왕 손책, 성격이 급하고 매사에 너무 과격한 결점이 있었지만 호방한 기개와 쾌활한 기상은 가히 천하를 삼킬 만했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능히 정예군을 이끌고 양자강을 건너 조조군을 기습했을 것이다.
강동의 호랑이 부자 손견과 손책, 대를 이어 웅지를 펼치다가 중도에 꺾여버린 참으로 아까운 인물들이다.
■ 1장 난세에 일어난 군웅, (8) 황제를 참칭한 군벌 ‘원술(袁術)’
“만약에 내가 없었더라면 얼마나 많은 무리들이 황제와 왕, 제후를 사칭하며 세상을 어지럽혔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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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는 만년에 자신이 걸어온 길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은 곧 현실이 된다. 조조가 죽자, 그의 아들 조비가 후한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위 황제에 오르는 것을 필두로 촉의 유비, 오의 손권이 차례로 황제에 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조가 죽기 전에도 황제를 참칭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효웅(梟雄) 원소의 사촌동생인 남양의 군벌 원술이다. 원술의 부침과정, 그리고 그가 조기에 패망한 원인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원술(袁術), 자는 공로(公路). 사촌형인 원소와 함께 삼국지에 등장하는 군웅들 중에서 가장 화려한 가문 출신이다. 원소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딴 살림을 차리고 서로 왕래 없이 지냈다.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17제후 연합군을 구성했을 때, 원술은 남양태수로서 가장 먼저 군마를 이끌고 와서 연합군의 군량과 마초(馬草)를 담당했다. 강동의 호랑이 손견이 선봉을 맡아 큰 공을 세우려 하자, 원술이 군량을 보내주지 않는 등 협량(狹量)을 드러내어 제후들 간에 불화와 내분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결국 제후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근거지로 돌아가고 마는데, 공손찬은 북방의 유주(幽州)를, 원소는 기주(冀州)를, 조조는 연주(兗州)를 차지하고 각자 야심을 가다듬으면서 힘을 키워나갔다. 원술은 남양에 근거를 두고 맹장 손책을 앞세워 세력을 확대해갔다. 남방 경략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자, 슬그머니 딴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 곧 나의 시대가 온다. 한(漢)을 대신할 사람이 나 이외에 누가 있으랴!”
그때, 아들인양 가까이 두고 부려먹던 손책이 그의 아버지 손견에게서 물려받은 전국(傳國) 옥새를 맡기면서 군마를 빌려 달라고 하자, 원술은 옥새에 혹해서 군사 3000명과 말 500필을 내준다.
어느 정도 기반을 확립한 손책이 빌린 군사를 돌려주며 원술에게 옥새를 달라고 했지만, 오래 전부터 제위를 꿈꾸어오던 원술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돌려주지 않았고, 결국 두 사람 사이가 벌어지고 말았다. 또 원술은 그의 아들과 여포의 딸을 결혼시켜 유비를 견제하려다 실패하여 여포와도, 유비와도 원수가 되고 만다.
좌충우돌하던 원술, 옥새 가진 것을 기회로 수춘성(壽春城)에서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조조는 황제를 참칭하는 원술을 토벌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키는 한편, 강동의 손책과 서주의 여포, 예주의 유비에게도 군사를 내도록 요청했다. 드디어 조조 손책 여포 유비의 연합군이 수춘성을 함락했다. 하지만 원술은 자신의 어림군을 이끌고 회남으로 피신했고, 그곳에서도 방탕을 일삼으니 백성들은 하나 둘 그의 곁을 떠나갔다. |
결국 세력이 급격히 줄어든 원술은 그때서야 옥새를 사촌형인 원소에게 넘겨줄 생각을 했다. 이때 여포는 조조와 유비의 연합군에게 이미 평정되었고, 원술의 동맹자인 공손찬도 원소에게 패망하고 난 뒤였다.
유비는 조조의 울타리를 벗어나기 위해 원술을 치겠다고 자원했다. 조조가 이를 허락하자, 유비는 조조가 내준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서주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원소에게로 가는 원술을 공격했다. 서전에서 원술의 선봉장 기령이 장비의 창에 찔려 죽으니 사기가 땅에 떨어진 원술의 군사들은 대부분 죽거나 항복했다.
원술은 겨우 목숨만 건진 채 도망치다가 어느 조그만 성에 은거하는데, 얼마 안 있어 양식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황제랍시고, 끼니마다 잡곡밥이 나오니 도무지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주방장에게 꿀물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원 참, 꿀물이 어디 있소? 핏물이라면 모를까.”
원술은 그 말을 듣자 울화통이 터져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이놈! 무슨 말버릇이….”
그러다 푹 쓰러져 피를 토하더니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숨이 끊어지고 만다. 황제치고는 너무나 비참한 종말이었다. 원술의 패망원인은 무엇보다도 난세를 헤쳐 나갈 자질이 부족한 데서 찾을 수 있지만, 그 외에도 크게 두 가지의 요인이 있다.
첫 번째, 난세에는 마지막으로 살아남을 때까지 한 시도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적보다는 동지가 더 많아야 하는데, 원술은 사방에 있는 군웅들을 모두 한꺼번에 적으로 만드는 치명적인 실책을 범했다. 가까이 잡아둘 수 있었던 손책을 잃더니, 원래 공손찬과 함께 자기편이었던 유비까지 적으로 만든 데다, 충분히 사이좋게 지낼 수 있었던 여포와도 원수가 되고 말았다. 그런 다음 스스로 황제에 올라 조조의 비위까지 건드린 것이다.
두 번째, 조그만 성공에 도취한 나머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 그때가 군웅이 할거하는 난세인 점을 망각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사치와 향락에 빠진 것은 화를 자초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난세에 황제를 참칭하며 그렇게 호사스럽게 살아온 것을 보면 그의 정신상태가 온전했는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종형인 원소와 힘을 합쳐서 남북에서 조조를 협공했더라면, 어쩌면 원소와 함께 중원의 패자(覇者)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원술을 이렇게 평했다.
‘그는 사치를 즐기고 음란, 방탕하여 그 끝이 좋지 못했으니 이것은 모두 스스로 불러들인 화이다.
■ 1장. 난세에 일어난 군웅, (9) 조조의 명실상부한 라이벌 '원소(袁紹)'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천하의 패권을 놓고 마지막까지 다툰 조조와 유비는 최고의 영웅으로 꼽힌다. 또, 삼국지 전반부에 등장하여 조조와 건곤일척의 자웅을 겨룬 원소와, 물려받은 나라를 지키는 데 탁월한 수완을 보인 손권은 최고에 버금가는 영웅으로 꼽힌다. 공손찬 원술 등은 다시 그 아래로 꼽힐 수 있으리라.
당대 최강의 전력으로 조조와 승부를 겨루다가 패망한 하북의 강자 원소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원소(袁紹), 자는 본초(本初). 사세(四世)에 다섯 정승을 배출한 명문가의 후예이다. 귀공자 같은 준수한 풍모, 기라성 같은 휘하 인재, 막강한 무력과 탄탄한 지역기반 등 패자(覇者)의 조건을 가장 많이 갖춘 인물이다.
젊은 시절, 조정의 초급장교였던 원소는 독재자 동탁이 멋대로 황제를 바꾸려 하자, ‘천하는 동공(董公)의 것이 아니오!’라고 일갈하고 근거지인 기주로 달아났다. 동탁의 회유정책에 따라 발해태수에 봉해진 원소는 그곳에서 인재를 모으며 세력을 키워갔다.
이때 동탁을 타도하자는 조조의 격문을 보고 각지의 군웅들이 모여들었는데, 원소는 모여든 제후들 중에서 맹주(盟主)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개성이 강한 여러 제후들의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규합하기에는 그의 리더십이 어딘지 모르게 부족했고, 그 결과 제후연합군은 변변히 싸워보지도 못한 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제후들은 모두 자신의 근거지로 돌아가 힘을 기르면서 호시탐탐 천하를 차지할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이에 원소도 기주로 돌아가 착실히 인재를 모으고 군마를 양성하면서 북방 유주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공손찬과 불꽃 튀는 사투를 벌였다. |
한편, 독재자 동탁이 여포에게 피살되자, 동탁의 잔당 이각과 곽사를 패퇴시킨 조조는 황제를 호위하며 도성으로 입성, 단숨에 조정의 실권자가 되었다. 황제를 등에 업고 천하를 호령하는 위치에 선 것이다.
이 무렵 원소도 공손찬을 패퇴시키고 하북의 4개주를 관할하는 막강한 실력자가 되었다. 조조가 원술과 여포를 패망시키자 삼국지 전반부 최대의 라이벌인 양웅(兩雄)의 대결은 이제 필연적인 귀결이 되고 있었다.
유비를 정벌하기 위해 조조가 군사를 일으키자, 원소의 일급 참모인 전풍은 허도가 비어있다며 즉시 출병하여 허도를 점령하자고 했다. 허도를 차지하고 황제를 옹위하는 것은 패자(覇者)가 되는 지름길이 아닌가. 그러나 원소는 총애하는 막내아들이 앓고 있다는 핑계로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 후, 마음을 가다듬은 원소는 조조를 치려고 30만 대군을 일으켰다. 이때는 조조에게 빈틈이 없었으므로 전풍과 저수 등이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다.’며 말렸다. 그러나 이미 결심을 굳힌 원소는 전풍을 옥에 가두고 출정했다. 조조도 군사를 이끌고 맞서니 드디어 양웅의 불꽃 튀는 대결이 시작되었다.
이때 원소는 자신이 자랑하는 두 맹장 안량과 문추를 차례로 내보내 조조군을 거세게 밀어붙였으나 조조진영에 포로로 잡혀 있던 관우에게 두 장수가 차례로 목이 떨어지는 바람에 패퇴하고 말았다.
원소는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70만 대군을 이끌고 허도로 향했다. 전풍은 옥중에서 ‘지금 싸우면 패할 수밖에 없다.’며 출정을 말리는 글을 올렸고, 원소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생각한 저수는 굳이 지금 출정하려면 전면전은 불리하니 지구전을 펼쳐야 한다고 간했다.
원소는 불길한 소리를 한다며 저수마저 옥에 가두었다. 조조는 정병 7만을 이끌고 원소의 대군과 맞섰다. 삼국지 전반부 최대의 승부처인 관도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두 진영은 일진일퇴를 거듭했으나 십대 일의 병력 차이 때문에 원소군이 더 유리한 형국이 되었다.
그러나 모사 순욱의 조언으로 다시 용기를 얻은 조조가 원소의 군량기지가 허술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기습부대를 보내 원소군의 군량창고를 불태우자, 원소군은 사기가 무참히 꺾이면서 전세가 단숨에 역전되었다. 승기를 잡은 조조가 총공격을 감행하니 원소의 주력부대는 거의 괴멸되고 만다. |
원소는 겨우 수백 기를 이끌고 도주하다가 세 아들이 이끌고 온 지원군과 함께 다시 20만 대군을 수습하여 반격에 나섰다. 조조가 이번에는 모사 정욱의 계책대로 배수진을 치고 맹공을 퍼부으니 원소는 또다시 패퇴한다.
울화병이 난 원소는 피를 토하며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한때 제후연합군을 이끌었고, 4개주를 호령하던 효웅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비참한 종말이었다. 원소가 죽자 아들들이 대권을 놓고 다투는 바람에, 강병 백만을 자랑하던 하북 4개주는 너무도 쉽게 조조의 깃발 아래로 들어가고 만다.
기주성이 함락되었을 때 관사에 있던 원소의 둘째며느리 견(甄) 씨가 조조의 맏아들 조비의 눈에 띄어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된다. 결국 패전한 원소는 며느리까지 조조의 아들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원소는 패자(覇者)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변화하는 상황에 대처하는 냉철한 결단력이 부족했다. 허도가 비어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을 때 사소한 문제 때문에 용단을 내리지 못한 것은 그의 치명적인 실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유능한 인재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었으면서도 그들의 안목과 식견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출병할 때 직언하는 참모를 옥에 가두어 끝내 죽음에 이르게 하더니, 격전의 와중에서도 후처가 낳은 셋째아들을 자신의 후사(後嗣)로 세우는 어리석음까지 범했다.
또 한 가지, 사촌동생인 남양의 군벌 원술을 포용하여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적대관계에 있었다는 점이다. 조조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여야 했다면, 당연히 혈육인 원술과 함께 힘을 합쳐서 남북에서 협공을 했어야 했다.
삼국지 최고의 영웅인 조조의 라이벌로 대부분 유비를 꼽는다. 그러나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조조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룬 원소야말로 조조의 진정한 라이벌이 아니었나 싶다. 이 무렵 유비는 조조와는 대적할 꿈도 꾸지 못하고 마냥 도망 다니기 바빴으니 말이다.
결국 역사는 원소에게 이렇게 명한다. 강북의 패권을 조조에게 넘겨주고 역사의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지라고. 역사의 심판은 이렇듯 냉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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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장 난세에 일어난 군웅, (10) 군웅들의 각축장인 형주의 준걸 '유표(劉表)'
중원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형주(荊州)는 옛날부터 인심 좋고 물자가 풍부하여 명현(名賢)들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다. 자가 경승(景升)인 형주자사 유표(劉表)는 한실의 종친인데다 뛰어난 학식과 덕망까지 갖추고 있어 형주 주민들의 신망과 존경을 받아왔다.
유표는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여 늘 명사들과 어울렸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와 자주 어울리는 여덟 명사를 ‘강하팔준(江夏八俊)’이라 불렀다. 이들은 중원을 뒤흔들고 있는 전란에도 아랑곳없이 풍류를 즐기며 유유자적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도 서서히 난세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독재자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전국의 제후들이 연합군을 구성했을 때 형주자사 유표는 애써 외면하며 연합군에 가담하지 않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연합군의 맹주(盟主) 원소로부터 ‘손견이 옥새를 훔쳐 강동으로 달아나고 있으니 형주의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옥새를 빼앗으라!’는 밀서가 왔다.
옥새는 황제의 상징물이 아닌가. 한실의 종친인 유표가 이런 사실을 알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손견의 군사가 나타나자 길목을 지키고 있던 형주군이 공격을 감행했고, 두 군사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손견이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공격해오자 유표 진영의 맹장 황조는 매복계를 써서 손견군을 유인, 손견을 무참히 참살했다. 형주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지만, 유표는 강동의 손 씨와는 원수가 되고 말았다.
한편, 원술과 여포를 평정한 조조는 이제 시선을 형주로 돌렸다. 조조는 뛰어난 학문과 아울러 기행(奇行)으로 유명한 재사 예형을 형주로 보냈다. 그의 변설(辯舌)로 유표를 한번 떠보려는 속셈이었다. 유표는 예형을 강하에 있는 황조에게 보냈는데, 황조가 예형의 독설(毒舌)을 참지 못하고 죽이는 바람에 유표는 조조와도 원수가 되고 말았다.
이 무렵, 조조에게 쫓기던 유비가 형주에 왔다. 유표는, 같은 한실의 종친인데다 조조의 남하를 저지하는 데 힘이 되어줄 것으로 판단, 유비를 받아들여 가까이 있는 신야에 머물게 했다. 유비는 조조가 하북의 원소를 치고 있는 사이, 비어있는 허도를 공략하자고 여러 번 조언을 했으나 유표는 번번이 묵살했다. |
유표에게는 고민거리가 하나 있었다. 바로 후사(後嗣) 문제였다. 두 아들 중 전처소생의 맏아들 유기는 심성이 어질고 착했으나 몸이 약했고, 후처 채 부인이 낳은 둘째아들 유종은 아직 어려서 세상물정을 몰랐다.
그런데 유표는 젊은 채 부인의 치맛자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채 부인은 자기가 낳은 유종을 후사로 세우려고 남동생 채모와 함께 온갖 공작을 꾸미고 있었다. 유표가 고민을 토로하며 유비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러자 고지식한 유비, 아주 솔직하게 대답했다.
“옛날부터 맏이를 제치고 아우를 후사로 세우는 일은 국정을 어지럽히는 첫걸음이 되어왔습니다. 젊은 부인의 성화 때문에 아우를 후사로 세우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자고로 남의 후사문제에 대한 직설적인 충고는 위험천만한 것이다. 밖에서 이 말을 엿들은 채 부인은 채모를 불러 유비를 제거하라고 명했다. 눈치 없이 뱉은 말 한 마디 때문에 유비와 함께 맏아들 유기는 채모 일당으로부터 여러 번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다.
어느 날, 유기가 유비를 찾아와 계모 채 씨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며 도와달라고 했다. 이를 딱하게 여긴 유비는 유기를 제갈량에게 보냈고, 제갈량은 춘추시대 진(晋)나라의 신생과 중이 형제의 고사를 들려주며 밖으로 나가야 살 수 있다고 조언해주었다. 유기는 바로 아비 유표를 찾아가 강하를 지키겠다며 그곳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군사요충지인 강하를 지킬 마땅한 장수가 없어 고민하던 유표는, 기꺼운 마음으로 유기에게 군사 3천명을 주며 강하로 떠나게 했다. 결국 유기는 제갈량의 도움으로 계모의 독수(毒手)에서 벗어나게 된다.
조조의 대군이 형주로 쳐들어온다는 첩보가 날아들자, 병상에 누워있던 유표는 유비를 불러 손을 꼭 잡으며 "내가 죽거든 그대가 형주를 맡아서 다스려주게" 하며 간곡히 부탁했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형주가 통째로 굴러 들어오게 되었지만, 유비는 의(義)가 아니라며 끝내 사양하고 물러났다.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형주로 쳐들어오자, 다급해진 유표는 "맏아들 유기를 주인으로 삼고 뒤를 잘 보살펴달라" 는 글을 유비에게 남겼다. 그리고 유언을 하기 위해 맏아들을 불러들였으나, 채 부인 일당이 유기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버렸기 때문에 유표는 맏아들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
채 부인 일당은 맏아들 유기와 유비에게는 부음조차 전하지 않고 가짜 유서를 만들어 이제 겨우 열네 살인 유종을 형주의 새 주인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조조로부터 유종을 형주의 주인으로 인정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너무도 간단히 조조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약속과는 달리 유종은 청주자사로 임명되었고, 임지로 가는 도중에 조조가 보낸 군사에 의해 어미 채 부인과 함께 피살되었다. 또 채모는 조조군의 수군도독을 맡았으나 주유의 사항계(詐降計)에 걸려 조조의 의심을 받아 목이 떨어졌다.
강하를 지키러 떠난 유표의 큰아들 유기는 적벽대전의 승리로 잃었던 형주의 일부를 탈환했지만 얼마 안 있어 병으로 세상을 뜨고 만다. 이때부터 오(吳)에서는 형주를 돌려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했고, 형주문제는 이후 손권과 유비 사이에 골치 아픈 불씨가 된다. 형주는 뛰어난 인재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는 곳이다. 유비가 수경선생 사마휘와 서서, 제갈량과 방통 같은 명현(名賢)들을 만난 곳이 바로 이곳이 아니던가.
유표가 영웅의 기상을 조금이라도 지니고 있었더라면 이 기라성 같은 인재들의 도움을 받아 가히 천하제패를 꿈꾸어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한 마디로, 유표는 치세(治世)에나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치세에 적합한 인물은 난세(亂世)가 되면 결점이 한꺼번에 노출되고 만다. 그는 물려받은 형주를 지키기에 급급할 뿐, 난세에 천하를 다툴만한 야심도 없었고 또 그럴 만한 그릇도 되지 못했다. 그는 군웅들의 각축장이면서 전략요충지인 형주의 임자로는 처음부터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 1장 난세에 일어난 군웅, (11) 서촉을 유비에게 빼앗긴 종친 '유장(劉璋)'
양자강 등 4개의 강이 흐른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사천성(四川)은 2008년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은 곳이다. 행정구역상 익주에 속하는 이곳은 땅이 넓고 물자가 풍부하여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
익주목(益州牧) 유언이 죽자 그의 아들 유장(劉璋)이 그 자리를 계승했다. 그는 암약(暗弱)한 인물이었다. 인근지역 한중의 지도자 장로가 세력을 키우며 국경을 어지럽히자, 유장은 장로의 어머니와 동생을 살해했고, 철천지원수가 되고 말았다.
이즈음 한중은 조조군에게 패퇴한 마초를 따라 이곳으로 넘어오는 서량의 주민들 때문에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조조는 장로를 회유하기 위해 관직을 주었고, 이에 고무된 장로는 서촉을 통째로 집어삼킬 궁리를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유장은 회의를 소집했지만 뾰족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이때 문관 장송(張松)이 일어나 '제가 예물을 들고 조조를 찾아가 한중을 공격하도록 하여 장로가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아무런 복안이 없던 유장이 달리 의견이 있을 리 없었다.
장송은 곧바로 허도로 출발했고, 서촉에서 온 장송을 접견한 조조는 대뜸 '네 주인 유장은 어찌하여 해마다 조공을 올리지 않느냐?' 며 홀대했다. 화가 난 장송이 조조의 자존심을 건드리며 저항을 해보았지만 조조의 기분을 상하게 한 죄로 흠씬 두들겨 맞고 쫓겨나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에 형주에 들른 장송은 유비로부터 극진한 후대를 받고, 지니고 있던 서촉 지도를 유비에게 넘겨 주었다.
유장은 귀국한 장송으로부터 조조가 아닌 형주의 유비에게 요청하여 장로의 군사를 막는 것이 좋겠다는 보고를 받는다. '그렇게 되면 유비에게 서촉을 뺏기고 만다.' 며 황권 왕루 등의 중신들이 극렬히 반대했지만, 순진한 유장은 기어코 유비에게 군사지원을 요청한다.
"시끄럽다! 유비와 나는 피를 나눈 종친인데 어찌 그가 내 땅을 빼앗겠느냐?"
난세에 종친이 어디 있는가. 뒤늦게 유비의 속셈을 알아차린 유장은 숨어서 유비를 도운 장송과 그의 가솔들을 목 베고 결사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부성을 지키고 있던 촉의 맹장 양회와 고패가 유비에게 잡혀 목이 떨어지는 바람에 부성이 함락되었다. 유장은 장임과 유괴 냉포 등현 등 네 장수에게 성도의 외곽요충지인 낙성을 사수하라고 명했다.
네 장수는 연합작전을 펼쳐 유비군의 군사 방통을 낙봉파에서 죽이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새로 합류한 제갈량과 장비 조운 등이 맹공을 퍼붓자, 결국 낙성은 함락되고 끝까지 버티던 용장 장임도 붙잡혀 참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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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유비군이 물밀듯이 밀고 들어와 성도를 포위했다. 성안에서는 주전파와 주화파가 맞서 격론을 벌였지만, 아직도 성안에는 3만 명의 군사가 남아있다며 결사항전하자는 의견이 더 우세했다.
그러나 유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부자(父子)가 서촉을 다스린 지 20년이 넘었으나 이렇다 할 공덕을 쌓지 못했소. 또 유비와의 3년에 걸친 전쟁으로 온 들판에 시신이 넘쳐있으니 모두가 내 탓이오. 차라리 항복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해주어야겠소."
결국 성문을 열고 항복한 유장은 유비로부터 진위장군이라는 직책을 받고 변방인 남군의 공안으로 떠난다. 거기서 유장은 귀양 아닌 귀양살이를 하다 쓸쓸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후세의 사가들은 유장을 어리석고 나약한 인물이라고 평하고 있다. 물론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이므로 패배자인 그에 대한 평가가 좋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 점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난세의 지도자로서 유장의 처신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그의 곁에는 황권이나 왕루 이회 장임 등과 같이 죽음을 무릅쓰고 충간을 한 문관과 목숨을 걸고 성을 사수한 무장들이 여럿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의 사려 깊은 충언을 귀담아 듣지 않고 일부 신하의 꾐에 빠져 오판을 한 것은 그의 자질과 리더십에 문제가 있었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다.
종친이라는 이유로 유비의 군사를 아무런 의심 없이 끌어들인 것은 그의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또 마지막에 유비군이 성도를 향해 밀어닥치자, 3만 군사를 놔두고 성문을 열어 항복한 것도 난세의 지도자로서는 나약하고 성급한 처사가 아닌가 싶다.
유장은 승자만이 살아남는 난세에 적합한 인물은 아니었고, 치세(治世)에나 어울리는 순진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엄친아라고나 할까. 그러므로 유장이 촉을 유비에게 넘겨준 것은 그의 실책이라기보다는 유비에 비해 확연히 처지는 그릇에서 비롯된 자연스런 결과라고 할 수 밖에 없으리라.
■ 난세에 일어난 군웅, (12) 삼국지의 두 기둥 '유비(劉備)와 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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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는 중원을 헤매고(?) 다닌 유비의 입지 과정과 영고성쇠, 그리고 조조라는 희대의 영걸이 종횡무진 활약하는 모습이 주된 줄거리를 차지하고 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군웅들 중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패권을 다투는 두 주인공이면서, 삼국지를 이끌어가는 두 기둥인 유비와 조조에 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빈한한 농촌에서 태어나 편모슬하에서 자란 유비는 황실의 피를 물려받은 혈통을 바탕으로 인품과 정직성을 앞세운다. 드러나지 않으면서 주위를 압도하는 카리스마로 인재를 흡인하여 군웅의 대열에 합류한 대기만성형 인물이다.
반면, 조조는 환관 실력자의 양자로 들어간 아버지를 둔 신분적인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출중한 지모와 결단력, 탁월한 용병술, 다감한 성품 등을 발판으로 인재를 모아 실력자가 된 신흥 군벌을 대표하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두 사람의 위상과 성격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초반부의 에피소드 하나를 살펴보자.
여포를 평정하고 개선하는 조조를 따라 유비도 허도로 갔다. 조조의 눈치를 보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유비는 조조의 부름을 받았다. 두 사람은 매원(梅苑)에서 함께 술을 마시며 천하의 영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조조가 “지금 이 시대, 누구를 영웅이라고 할 수 있겠소?” 하고 물었을 때 유비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아니, 왠지 모르게 겁부터 덜컥 났다. 유비는 생각나는 대로 원소 원술 손책 유표 등의 이름을 차례로 대보았지만 조조는 일소에 부치며 이렇게 말했다.
“영웅이란 미래를 향해 웅지를 품고 대계(大計)에 밝아야 하며 하늘을 감쌀 듯한 기개와 땅을 삼킬 만한 기량을 가지고 있어야 하오. 지금, 천하의 영웅이라면 당신과 나 둘 뿐이오.”
이때 번개가 번쩍~ 하더니 곧 뇌성이 ‘꽈릉!’하고 울렸다. 유비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뜨리며 손으로 귀를 막고 술상 아래로 엎드렸다. 조조가 의아한 듯 멀뚱히 쳐다보자, ‘죄송합니다. 어릴 때부터 천둥소리를 무서워해서….’하고 말했다.
조조가 자신을 영웅이라고 칭하자, 깜짝 놀란 유비가 자신의 그릇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순발력을 발휘하여 능청스럽게 연극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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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를 이끌어가는 두 주인공이 주안상을 앞에 놓고 마주앉아서 세상얘기를 하고 있는 이 삽화에서, 너무도 선명하게 드러나는 두 사람의 위상 차이…. 조조에게서는 넘치는 자신감과 당당한 기개가 보이는데, 유비는 왠지 옹색하고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때 조조는 황제를 등에 업고 전국의 제후들을 호령하는 입장에 있었지만 유비는 조조에게 인질로 잡혀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떠돌이 객장 신세였다. 이로부터 한참 후에나 유비는 제갈량을 얻으면서 조조와 당당히 맞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삼국지연의에 의해 인군(仁君)의 전형으로 평가받고 있는 유비, 그의 상대역이자 간웅으로 자리매김이 된 조조, 두 사람의 여러 가지 면모를 비교해보자.
첫째, 전환기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기준이 되는 정통성 문제를 살펴보자. 유비는 쇠퇴해 가는 한조의 부흥을 대의명분으로 하여 자신이 황실의 후예임을 내세워 정통성을 주창했고, 조조는 난세의 실력자답게 한 황제의 권위를 등에 업고 무력을 기반으로 군웅들을 호령하는 실질적인 치자(治者)임을 내세워 정통성 문제에 대응했다. 정사 삼국지는 위(魏)와 진(晋)으로 이어지는 결과까지도 고려하여 황제를 받들고 있는 조조 쪽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지만, 야사인 삼국지연의는 당시의 민심과 혈통을 중시하여 유비 쪽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다.
둘째, 두 사람의 출신배경과 경영 스타일에 대해 살펴보자. 출신배경을 보면, 유비는 중국인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군주인 한고조 유방의 후손인 데다 가난한 농촌 출신이라는 점, 인화를 중시하는 점 등에서 유방의 연장선상에 있는 인물이다. 반면에 조조는 환관 집안에 양자로 간 아버지를 둔 장교 출신으로, 오직 실력으로 자신의 진가를 보여줄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경영 스타일을 보면, 유비는 수성형이고 조조는 창업형이다. 그 차이는 원정(遠征) 때 극명하게 드러난다. 유비는 원정을 떠날 때 주력을 근거지에 남겨두고 여력(餘力)을 이끌고 떠난다. 반면에 조조는 원정을 떠날 때 미더운 사람 한 둘을 골라 근거지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 전력을 모두 이끌고 떠난다.
셋째, 두 사람의 성격상의 장단점을 살펴보자. 유비의 장점은 알 수 없는 힘으로 사람을 끄는 능력과 항상 인의(仁義)를 내세워 부하들의 충성을 이끌어내는 점을 들 수 있다. 한 마디로 인간적인 매력과 너그러움이다. 단점은 신중함이 지나쳐서 우유부단한 점이다. 결단을 내려야할 순간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여 자주 일을 그르치는 점을 들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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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의 장점은 적절한 조언을 하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등 난세의 지도자가 갖춰야할 덕목인 정확한 상황판단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단점은 행동이 너무 전격적(電擊的)이고 자신의 지모를 과대평가하여 기책(奇策)을 즐겨 쓰다가 제 꾀에 자신이 넘어가는 우(愚)를 범할 때가 많은 점을 들 수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민중들의 입장에서 두 사람을 살펴보자. 일반적으로 민중들은 강자에 대해서는 시샘을, 약자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가지고 있다. 유비는 특별한 재능이 없는 데다, 늘 약자로서 중원을 떠돌아다녔기 때문에 민중들이 편하게 다가갈 수 있어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 반면에 조조는 한 몸에 여러 가지 재능을 지니고 있고, 늘 강자로서 군림했기 때문에 민중들이 경계심을 갖게 되고 시샘을 느끼게 된다.
유비와 조조, 삼국지의 두 기둥 중에서 최후의 승자는 누구일까? 조조의 승리로 판정을 내리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조조는 성했고 유비는 쇠했기 때문이다.
■ 제2장 위(魏)나라의 인물들, (2-1) 하늘이 내린 삼국지 최고의 영웅 ‘조조(曹操)’
삼국지 최고의 영웅 조조(曹操), 자는 맹덕(孟德). 어릴 때부터 유난히 총명했다. 청년시절 한때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궁궐의 위병장교로 발탁되어 뛰어난 업무처리 솜씨를 보이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환관의 양아들로 들어간 아버지를 두고 있어 신분 콤플렉스에 시달리기도 했다.
보통 키에 약간 야윈 편이고, 가늘면서도 매서운 눈매와 얇은 입술, 성긴 수염을 지녔다. 관상가로 유명한 허자장이 "너는 치세에는 능신(能臣)이요, 난세에는 간웅(奸雄)이 될 것이다" 고 했는데, 조조가 아주 흡족해했다고 한다.
‘조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화부터 짚어보자. 젊은 시절의 조조가 부친의 친구 집에 들렀다가 밤에 문밖에서 칼 가는 소리를 자신을 해치려는 것으로 착각하여 식솔 여덟 명을 무참히 죽였는데, 알고 보니 자신을 접대하기 위해 돼지를 잡으려던 것이었다.
그 길로 도망치던 조조, 술을 사오던 부친의 친구마저도 무참히 살해한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때 그는 "내가 천하의 만민을 배반할지언정, 천하의 만민이 나를 배반하지는 못하게 할 것이다" 는 말을 남겼다. 조조가 간웅으로 낙인찍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일화이다. |
조조, 참으로 많은 재능을 한 몸에 지닌 인물이다. 그의 번뜩이는 재치로 쌓은 업적은 그의 결점과 악행을 덮고도 남을 만큼 크고 화려하다. 의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조조, 지휘관으로서 이런 아량도 보였다. 라이벌 원소를 격파한 조조는 원소의 집무실에서 이상한 서류뭉치 하나를 발견했다. 원소와 내통한 자신의 부하들이 보내온 편지를 모아놓은 다발이었다. 그런데, 조조는 ‘나도 이 전쟁이 어떻게 끝날지 몰라 한때 마음이 흔들렸는데.’ 하면서 그 편지다발을 모두 불태워버린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최근, 조조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여 간웅으로 치부되었던 그의 명예는 많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조조에 대한 부정적 평가의 근거가 되는 여러 일화들 또한 곳곳에 남아있다.
조조는 무장들에게는 후했지만 문사들에게는 가혹했다. 조조가 전투에 패한 장수에게 혹독한 처벌을 내린 적은 없다. 마음에 드는 무장은 비록 적장이라도 흠모(?)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눈 밖에 난 문사는 가차 없이 죽였다. 공융 양수 최염 등이 그렇게 희생되었고, 자신의 장자방이라고 했던 순욱과 그의 조카 순유마저도 예외일 수 없었다.
조조는 사람의 목숨을 자주 수단시 했다. 남양의 군벌 원술이 스스로 황제에 오르자 조조는 대군을 이끌고 정벌길에 올랐다. 전쟁이 길어지자 군량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조조는 군량책임자인 왕후를 불러 되[斗]를 작게 만들어 군량을 지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급식이 줄어들자, 불평하던 병사들이 조조를 욕하기 시작했고 곧 난동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다급해진 조조, 급히 왕후를 불렀다.
“자네의 목이 필요한데…. 대신 자네의 처자식은 내가 잘 보살펴주겠네.”
조조는 왕후의 목을 베어 진중에 걸었다. 그의 목에는 이런 방문(榜文)이 붙어 있었다.
“이 자는 되를 줄여 병사들의 식량을 도적질했으므로 군율에 의하여 효수하노라.”
병사들은 ‘그럼 그렇지!’ 하며 죽은 왕후를 욕했고, 조조에 대한 불평은 사라졌다. 위기상황에서의 조조의 임기응변의 능력을 엿볼 수 있는 일화이다. 이렇듯 조조는 자신의 지시를 충실히 따른 부하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목을 베는 경우도 허다했다. |
어쨌거나,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러 군웅들 중에서 공손찬을 패망시킨 사람은 원소지만, 조조는 그 원소와 원술, 여포 등을 평정하고 강북을 제패하였다. 후일, 위(魏)를 이은 진(晋)에 의해 삼국이 통일되는데, 그 통일기반을 확립한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조조이다.
그는 평생 전쟁터를 누비면서 정치가, 군략가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고,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많은 군웅들을 그의 손으로 토벌하였다. 연의에서는 전투에 패한 조조의 참혹한 모습이 더러 나오지만, 그는 적벽대전 외에는 크게 패한 적이 없었다.
또 조조는 문필가로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는데, 혹자는 그가 남긴 시문(詩文)만으로도 조조를 위인의 반열에 올리는데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의 문학적 재능은 그의 셋째아들 조식에게로 이어졌다.
조조의 유명한 시 중 하나인 단가행(短歌行: 짧은 노래를 하노라)의 자주 인용되는 앞부분만 소개한다.
對酒當歌(대주당가) 술잔을 앞에 두고 노래하노니 人生幾何(인생기하) 우리 인생 살아야 얼마나 사나 譬如朝露(비여조로) 비유컨대 인생은 아침이슬 같고 去日苦多(거일고다) 지난날 돌아보니 고생이 많았구나
慨當以慷(개당이강) 하염없이 슬퍼하고 탄식하여도 憂思難忘(우사난망) 마음속 근심은 떨쳐내기 어렵네 何以解憂(하이해우) 무엇으로 이 시름 풀 수 있을까 唯有杜康(유유두강) 오로지 술이 있을 뿐이로다
마지막 부분의 두강(杜康)은 처음 술을 빚었다고 알려진 전설 속의 인물이니 그 ‘술’이라 번역해도 무방하다. 영화 ‘적벽대전2’에서 조조가 술을 마시고 휘하 장수들 앞에서 읊조리던 바로 그 시이다. 모택동이 아주 좋아하던 시라고 한다.
사람은 죽을 때 그 진면목이 드러난다. 조조는 자신의 묘를 만들 때 봉분(封墳) 72개를 함께 만들게 했다. 후세의 도굴이 두려웠기 때문이리라. 그의 유언은 의외로 소박했다. “천하는 아직 평정되지 못했다. 이런 시기에 예를 차린다고 거창하게 장례를 치르지 마라. 장례가 끝나거든 바로 탈상하고 일상 업무에 임하라. 입관할 때 금옥진보(金玉珍寶)는 함께 넣지 말고 철따라 갈아입을 옷이나 몇 벌 넣어다오.” |
■ 제2장 위(魏)나라의 인물들 (2-02) 조조의 심복인 애꾸눈 장수 '하후돈(夏侯惇)'
‘조조의 두 배는 됨직한 떡 벌어진 체격에 구레나룻이 거뭇거뭇한 얼굴과 부리부리한 눈, 한 눈에 힘꼴 깨나 쓰는 장사.’ 이문열이 평역한 삼국지에서, 하후돈의 모습을 묘사한 부분이다.
관우와 장비 없는 유비를 상상할 수 없듯이 하후돈 없는 조조도 상상하기 힘들다. 하후돈은 조조의 분신 같은 존재다. 조조가 삼국지에 처음 등장할 때 함께 나와서, 평생 동안 조조와 함께 전장을 누비다가, 조조가 죽자 얼마 안 있어 그도 숨을 거둔다.
하후돈(夏侯惇), 자는 원양(元壤). 패국 초현 사람으로 14살 때 그의 스승을 모독하는 사람을 그 자리에서 때려죽여 단번에 유명해졌다. 힘이 세고 성품이 거칠었으나 웬일인지 집안의 형(조조의 원래 성씨는 ‘하후’)인 조조에게만은 양처럼 순했다. 조조가 젊은 시절 유협집단과 어울려 다닐 때부터 하후돈은 그 밑에서 주먹대장 노릇을 했다. 조조가 효렴에 뽑혀 낙양으로 오자 그도 함께 따라 올라왔다.
독재자 동탁을 죽이려다 실패하고 도망 다니던 조조가 의군(義軍)을 모집했을 때, 하후돈이 맨 먼저 천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왔다. 조조의 친족 중에는 하후연과 조홍 조인이, 그리고 유협시절의 패거리인 이전과 악진이 차례로 합류했다. 이들이 조조진영의 창립 멤버들이었는데, 이들 중에서 맏형이 하후돈이다. 동탁이 죽고 그의 잔당인 이각과 곽사에게 쫓기던 황제가 조조에게 구원을 요청했을 때, 조조가 군사 5만 명을 주고 맨 먼저 달려가게 했던 장수가 바로 하후돈이 아니던가.
조조가 서주로 원정을 떠난 틈에 여포가 쳐들어오자, 하후돈은 순욱 정욱 등과 함께 연주의 거점을 사수하고 견성에 있는 조조의 가족을 지켜낸다. 서주에서 돌아온 조조는 여포 토벌에 나서는데, 이 전투에 참가한 하후돈은 아주 엽기적인 에피소드를 남긴다. 여포군과 맹렬하게 싸우고 있는 중에, 적장 조성이 쏜 화살이 하후돈의 왼쪽 눈에 꽂혔다. 하후돈이 화살을 빼내자 왼쪽 눈알이 함께 뽑혀져 나왔다. 장병들이 놀라서 우르르 모여들자 하후돈은 이렇게 말했다. |
“이 눈알은 내 아버지의 정기요 어머니의 혈액이다. 이런 전쟁터에 버릴 수는 없다.”
하후돈은 자신의 눈알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다시 창을 꼬나 잡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여 자기를 쏜 적장 조성을 끝까지 쫓아가 그의 목을 베고 돌아왔다. 이때부터 군사들은 하후돈을 하후연과 구별하여 ‘맹(盲) 하후’ 즉, ‘애꾸눈 하후’라고 불렀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이 별명을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거울을 볼 때마다 울화를 참지 못하고 거울을 땅에 내동댕이쳤다고 한다.
하후돈의 이력에는 승전과 패전이 골고루 어우러져 있다.
먼저 승전을 보자. 조조를 제거하는 모임에 가담한 유비를 공격하여 패퇴시키고 관우를 사로잡는 데 기여를 했다. 조조가 서주의 도겸을 칠 때, 하후돈은 복양에 머무르며 수비를 맡았다. 조조의 하북 평정 때는 후방부대를 맡았다. 관도전투에서는 조조가 오소를 습격할 때 본진을 지키며 원소군을 격퇴시키는 데도 공을 세운다. 만년에는 경기와 위황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다음으로 패전을 보자. 제갈량이 유비의 참모로서 첫 출전하는 박망파 전투에서 조조군의 대장으로 출전한 하후돈은 용감하게 싸우지만 완패한다. 또 그가 앞장선 적벽대전에서는 월등한 병력수에도 불구하고 손권과 유비의 소수연합군에게 무참하게 패퇴한다. 또, 양양을 수비할 때에는 제갈량의 계책에 걸려 성을 그저 내주는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전에, 조조가 청주에서 생포한 황건적을 훈련시켜 청주병이라는 외인부대를 만들고 이의 통솔 및 관리를 하후돈에게 맡겼는데, 그 청주병들이 민간인을 약탈하는 등 물의를 일으키는 바람에 조조에게 크게 질책을 듣기도 했다.
하후돈은 틈이 나면 책을 읽었고 문관들과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다. 또 입도 걸고 유머감각도 뛰어나서 병사들과 잘 어울렸다. 그가 흥이 나서 한번 입을 열었다 하면 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조조마저도 그와 떨어져 있으면 그의 입담이 그립다고 할 정도였으니. 조조는 말년에 하후돈에게 큰 식읍을 주어 관할케 했다. 하후돈은 아주 청렴하여 축재를 하지 않았다. 또 남은 재화가 있으면 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으므로 조조는 그의 영지에서는 법령에 구애되지 않고 스스로 정무를 처결할 수 있도록 그에게 전권을 주었다.
또, 그는 조조와 함께 마차에 탔고, 조조의 침실에도 출입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의심 많은 조조가 이런 파격적인 예우를 한 것을 보면 그에 대한 조조의 신망이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
조조가 죽고 그의 아들 조비가 위왕이 되자, 하후돈은 대장군에 오르지만 얼마 안 있어 병이 들어 조조의 뒤를 따라가고 만다. 조비는 스스로 상복을 입고 장례를 집전하여 아버지의 충복에 대한 최상의 예우를 표한다.
하후돈에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조조진영의 영원한 2인자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전투를 진두지휘하여 완승을 거둔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군웅들 중에서 가장 강성했던 조조진영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장수인데도 왜 뚜렷한 승전기록이 없었던 걸까? 혹자는 그가 한쪽 눈을 잃은 충격과 그 후유증으로 용맹을 잃게 되었고, 그 결과 주로 후방에 남아 수비를 맡게 된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그것은 올바른 설명이 아닌 것 같다. 냉정하게 평가했을 때, 하후돈은 타 장수들을 압도하는 지략과 무용(武勇)을 지닌 장수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문무를 겸비한 장수라고는 하나 지략 면에서는 동료장수인 서황이나 장료 등에게 미치지 못했고, 무용 면에서도 창술에는 능했으나 무예 전반에서 허저나 전위보다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 두 가지 요소를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하후돈은 약간 뛰어난 장수가 될 뿐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를 적당히 가지고 있으면서 기복 없는 충성심까지 갖춘 장수를 찾는다면 조조진영에서 하후돈 외에 달리 떠오르는 장수가 없다. 삼국지를 통틀어, 이보다 더 성실하게 초지일관 주군에게 충성을 다한 장수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 제2장 위나라의 인물들, (2-3) 조조의 경호실장 천하장사 ‘전위(典韋)’
연주(兗州)를 차지한 조조가 인재를 모으고 있을 때, 무장 하후돈이 거한(巨漢) 한 사람을 조조 앞에 데리고 왔다.
“제가 사냥을 나갔다가 이 사람이 범을 쫓는 모습을 보았는데 범보다도 더 사납고 날랬습니다. 말 위에서 양 손에 팔십 근이나 되는 쌍철극(雙鐵戟)을 잡고 휘두르는 모습은 가히 신기(神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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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갑자기 강풍이 불어와 진중의 큰 깃발이 쓰러지려 했다. 여러 군사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으나 워낙 바람이 거세어 바로 세울 수가 없었다. 이때 그 거한이 뛰어나가 한 손으로 깃대를 잡았는데, 깃대는 뿌리라도 내린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조가 감탄하며 말했다.
“악래가 다시 살아났구나!”
악래란 옛 은나라 시대의 전설적인 장사(壯士)의 이름이다. 조조는 입고 있던 비단옷을 벗어주며 치하하고 그를 도위에 임명했다.
전위(典韋)가 삼국지에 처음 등장하는 모습이다. 조조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조조를 여러 번 사지에서 구해주었고, 전장에서 바람을 피우는 조조의 막사를 지키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무장 전위의 눈부신 무용과 충절을 회고해 보고자 한다.
여포의 군사와 싸우다가 포위되어 기진맥진한 상태에 있던 조조, 빠져나갈 곳을 찾으며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누가 나를 구할 이 없느냐?”
이때 여포군의 창칼 속을 뚫고 전위가 나타났다. 그는 말에서 뛰어내리자마자 조조를 호위하며 재빨리 표창 꾸러미를 꺼내들었다. 그의 손에서 표창 하나가 날아갈 때마다 적병들이 피를 쏟으며 말 위에서 떨어졌다.
순식간에 십여 명이 죽어 넘어지자 여포의 군사들은 겁에 질려 도망치기에 바빴다. 전위는 다시 말을 타고 양손에 쌍철극을 휘두르며 조조를 위급에서 구해내었다. 쌍철극은 양손으로 쓸 수 있도록 만들어진 쌍으로 된 쇠창으로, 전위의 트레이드마크이다.
조조가 다시 여포의 성안에 갇혀 포위가 되었을 때, 또 다시 전위가 필사적으로 포위를 뚫고 나타나 조조를 구해 성문으로 이끌었다. 이때 조조는 불붙은 성문을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말에서 떨어져 수염과 머리칼이 타고 몸에도 화상을 입었다. 전위의 온몸은 창과 칼의 상처로 피투성이가 되었다.
그 후, 동탁의 부하였던 장제의 조카 장수(張繡)의 항복을 받은 조조는 장제의 미망인 추 씨가 기막히게 미인이란 소문을 듣고 추 씨를 자신의 군막으로 불렀다. 과부인 추 씨도 상대가 천하의 조조인지라 싫지 않은 듯 은근히 추파를 던지며 교태를 부렸다. 두 사람이 연일 음락(淫樂)에 빠져있는 동안 전위는 조조의 막사를 지키고 있었다. 조조가 자신의 숙모와 놀아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항장(降將) 장수는 불같이 화를 내며 옛 무장들을 다시 규합해 조조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문제는 조조의 막사 앞에 떡 버티고 서있는 전위였다. 그의 쌍철극이 두려웠다. 고민 끝에 장수는 전위를 초청하여 곤드레가 되도록 술을 먹이고 그의 쌍철극을 감추어 버렸다. |
그날 밤, 장수(張繡)는 사방에 불을 놓고 함성을 지르며 조조의 군막을 습격했다. 그때 추 씨를 끼고 잠자리에 들었던 조조는 함성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나 전위를 찾았다.
“전위, 전위는 어디 있느냐?”
그때 전위는 조조의 군막 앞에서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 갑자기 시끄러운 소리에 전위도 눈을 번쩍 떴다. 온 사방에 불길이 번져가고 있었고, 반란군 병사들이 조조의 군막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 있어야 할 쌍철극이 보이지 않았다. 전위는 급한 김에 옆 병사의 칼을 뺏어들고 다가오는 군사들을 닥치는 대로 베었다.
술에 취해 자다가 뛰어나온 탓에 몸에 갑옷을 걸치지 못한 데다, 무기도 손에 익은 쌍철극이 아닌지라 몸이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까이 접근하는 적병은 모두 그의 칼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칼날이 무디어지자 전위는 칼을 버리고 양 손에 적병 하나씩을 잡았다. 이번엔 전위가 휘두르는 사람몽둥이에 맞아서 적병들이 또 우수수 쓰러졌다. 정말 술이 덜 깬 것이 맞나싶을 정도로 눈부신 무예요, 무서운 용력이었다.
주춤해진 반란군들은 감히 그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멀찍이 물러서서 활을 쏘기 시작했다. 막사 앞에 버텨선 전위의 몸에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무수히 꽂혔다. 이때 등 뒤로 다가선 적병 하나가 그의 등에 창을 꽂았다. 전위는 우레 같은 함성을 지르며 쓰러져 땅바닥을 온통 선혈로 물들이고 숨을 거두었다.
한편 조조는 전위가 문 앞에서 적을 막고 있는 사이, 재빨리 뒷문으로 빠져나가 조카 조안민과 함께 도망쳤다. 조안민은 뒤따라오는 적병을 막다가 목숨을 잃었고, 조조는 타고 있던 말이 화살에 맞는 바람에 땅에 굴러 떨어졌다.
그때, 어디서부터 따라왔는지 맏아들 조앙이 황급히 말에서 뛰어내리며 ‘아버님, 이 말을 타십시오.’ 하며 조조에게 말고삐를 내밀었다. 조조는 재빨리 말 위에 올라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조앙은 소나기처럼 퍼부어 대는 적의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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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숨을 돌린 조조는 다시 패군을 수습, 반격하여 마침내 장수의 반란군을 물리쳤다. 진중에서 여색을 탐하다가 충직한 경호실장 전위와 사랑하는 아들, 그리고 조카를 잃은 조조, 회군 길에 이들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 조조는 친히 술을 따르고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비록 맏아들과 조카를 잃었으나 그것은 그리 슬프지 않다. 지금 내가 우는 것은 오직 전위를 위해서이다.”
조조의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정말 조조의 진심 그대로일까? 다른 뜻은 없을까? 아마도 이 말은 무장들의 분기(奮起)를 촉구하고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조조 특유의 쇼맨십일 가능성이 높다. 유비가 당양벌에서 조운이 구해온 아들 아두를 땅바닥에 팽개치면서 무장들의 비위를 맞추었던 것처럼.
그러나 굳이 그렇게 곡해해서 해석할 필요는 없으리라. 비록 적장일지라도 충성스러운 무장은 죽이지 않고 흠모해 마지않던 조조가 아니던가. 섬기는 주인을 위해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전위의 충절도 가상하거니와, 그를 잊지 않고 충혼을 기리는 조조의 끝마무리도 참으로 일세의 영웅답지 않은가.
■ 제2장 위나라의 인물, (2-3) 조조의 근위대장 호치(虎痴) '허저'
조조가 한창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던 무렵, 산적을 소탕하던 용장 전위(典韋)가 산적 두목으로 보이는 한 거한과 마주쳤다. 8척이 넘는 우람한 체구에 굵은 허리통, 의연한 이목구비…. 얼핏 봐도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전위가 쌍철극을 내지르며 공격 자세를 취하자, 거한은 큰 칼을 뽑아들고 맞섰다.
마치 여의주를 놓고 두 마리의 용이 다투듯 두 무사의 현란한 무예가 반나절이 넘게 펼쳐졌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당시 조조진영에서 최고의 용장으로 불리던 전위의 혀를 내두르게 한 거한, 그가 바로 허저(許楮)이다. 자는 중강(仲康), 초국 출신이다. 결국 허저는 인재를 탐내던 조조의 계책에 걸려 생포되어 조조의 휘하에서 새 출발을 하게 된다.
허저의 용력에 관한 일화 하나. 허저가 살던 마을에 양식이 떨어져 마을 사람들이 도적들에게 소 두 마리를 주고 대신 곡식을 받기로 했다. 소를 주고 약정한 곡식을 받았으나, 도적들이 소를 끌고 가다 놓치는 바람에 소가 다시 마을로 되돌아왔다. 이때 허저가 소 두 마리의 꼬리를 양 손에 잡고 백여 보(步)를 끌어다 주었더니 도적들이 놀라서 소도 받지 않고 모두 달아나버렸다고 한다. |
조조가 이각과 곽사의 대군과 맞섰을 때, 조조의 명을 받고 뛰어나간 허저가 이각의 조카 이섬과 이별의 목을 단숨에 베어오자, 조조는 허저의 등을 쓸어주며 ‘그대는 실로 나의 번쾌로다!’하며 칭찬했다. 번쾌는 한고조 유방이 항우와 싸울 때 주로 선봉장을 맡았던 전설적인 맹장이다.
실제로 허저는 조조의 근위대장 역을 맡으면서 선봉장까지 겸했다. 그의 무예를 평가한다면 조조진영에서 서황 전위 등과 함께 선두를 다툴 정도라 할 수 있으리라. 큰 칼 하나로, 창술의 대가 조자룡을 상대로 30여 합을 싸웠고, 삼국지 최고의 무예를 지닌 여포와도 단독으로 20여 합을 싸웠으니 말이다. 결국 하후돈 하후연 전위 이전 악진 등 조조 진영의 여섯 장수가 한꺼번에 달려들어 여포를 물리쳤지만.
이번에는 허저의 고지식하고 우직함이 돋보이는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조조가 술이 취해서 잠들어 있을 때 조조의 심복이며 사촌동생인 조인이 찾아왔다. 그러나 근위대장 허저가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 바람에 실랑이 끝에 그냥 돌아가야만 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조, 허저에게 꾸중은커녕 참으로 믿음직하다며 오히려 칭찬을 했다.
허저는 양봉 한섬 장수 등과의 싸움에서도, 여포 정벌 및 원소와의 관도 전투에서도 선봉에 서서 큰 공을 세웠지만, 형주의 신야에 있는 유비 토벌에 선봉장으로 출전했을 때는 제갈량의 계략에 빠져 참패한다. 또 적벽대전에서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에게 무참히 패배한 조조를 호위하여 허도로 돌아오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허저를 얘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서량의 금마초라 불리던 마초와의 피 터지는 싸움일 것이다. 서량의 군벌 마등이 조조에게 잡혀 처형되자, 그의 아들 마초가 부친의 원수를 갚으려고 군사를 일으켰고, 양군은 동관에서 마주하게 된다.
마초와 한수가 이끄는 서량병(西凉兵)의 기세등등한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강 언덕에까지 쫓겨 온 조조,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다. 이때 허저가 신속하게 조조를 들쳐 업고 강 언덕에서 두 길이나 떨어져 있는 배 위로 뛰어내렸다.
추격하던 마초의 장졸들이 강 언덕에서 활을 쏘아대자, 허저는 한 손에 잡은 말안장으로 화살을 막아내면서 다른 손으로는 노를 저었다. 허저의 이런 초인적인 용력 덕분에 조조는 사지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조조가 위수에 부교(浮橋)를 설치하자, 마초는 은밀히 군사를 보내 부교를 불태워버렸다. 조조가 다시 강가에 토성을 쌓자, 이번에도 마초가 군사를 보내 허물어 버렸다. 계속된 실패로 조조가 낙담하고 있을 때 한 도인이 나타나 ‘날씨가 추워졌으니 흙을 쌓으면서 물을 뿌려라.’고 조언해주었다. 그대로 했더니 과연 쌓은 흙이 얼어붙어 하룻밤 만에 토성을 구축할 수 있었다.
다시 기세가 오른 조조가 허저를 앞세우고 토성에 올라가 호령을 하자, 저쪽에서는 분기탱천(憤氣撑天)한 마초가 뛰쳐나왔다. 허저와 마초, 두 사람의 불꽃 튀는 공방이 펼쳐졌다. 용호상박이랄까, 백여 합을 다투어도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다. 말이 지치자, 말을 바꿔 타고 다시 백여 합을 더 싸웠지만 도무지 승부가 나지 않았다.
허저가 다시 투구와 갑옷은 물론 웃통까지 벗어던지고 칼 한 자루만 든 채 말을 달려 나가자, 마초 역시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하게 맞섰다. 마초의 창을 피하던 허저가 칼을 버리고 창 자루를 잡았다.
창 자루가 와지끈~ 하고 부러졌다. 이번에는 부러진 창 자루를 잡고 싸웠지만 역시 막상막하, 도무지 결판이 나지 않았다. 웃통을 벗어던진 허저와 마초가 격렬하게 싸우는 장면은 너무도 유명해서 그림으로 그려져 삼국지의 각 판본에 삽화로 실려 있다.
조조는 혹시라도 허저가 다칠까봐 하후연과 조홍에게 나가서 함께 싸우라고 명했고, 마초진영에서는 방덕과 마대가 나섰다. 두 진영의 장수와 군사들까지 어우러져 일대 혼전이 벌어지자, 그때서야 두 장수가 싸움을 멈추고 떨어졌다.
그 어지러운 전투 속에서 허저는 팔에 두 군데나 화살을 맞았다. 다시 허저와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다 쫓기게 된 마초는 결국 유비진영에 합류하게 된다. 그 후에 허저는 마초의 부장이었던 방덕과도 50합이 넘게 싸우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때 조조가 무용이 뛰어난 방덕을 탐내자, 허저는 방덕을 함정에 빠뜨린 후 사로잡아 조조의 휘하에 들어오게 한다. 나중에 방덕은 촉장 관우와의 전투에서 조조군의 선봉장으로 나서서 용감하게 싸우지 않는가.
용장 허저, 군율을 중시했으며 늘 과묵하고 신중하여 조조가 여색을 밝히고 황제를 업신여기는 등 월권을 해도 모른 척하며 조조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했다. 허저는 조조가 죽자 피를 토하며 울부짖었다고 전해진다. 수(壽)를 다하고 70세에 병으로 죽었다. |
조조군의 맹장 허저, 호랑이처럼 용맹스럽다 해서 처음엔 ‘호치(虎痴)’로 불리어졌고, 나중에는 ‘호후(虎侯)’로 승진(?)했다.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충성을 다한 허저야말로 참으로 멋진 사나이라는 생각이 든다.
■ 제2장 위나라의 인물들, (2-4) 큰 도끼를 잘 쓰는 효장(驍將) '서황'
원소를 물리치고 강북을 제패한 조조는 동작대를 건립하고, 그 기념으로 무장들의 활쏘기 경연대회를 열었다. 붉은 비단전포를 저 멀리 버드나무 가지에 걸어놓고 맞추게 하여 가장 솜씨가 뛰어난 장수에게 비단전포를 하사하기로 한 것이다.
조홍 장합 하후연 등 기라성 같은 무장들이 각각 활솜씨를 자랑하며 비단전포를 맞추었으나, 비단전포가 걸려있는 버드나무 가지를 직접 맞춘 장수가 있었다. 서황이었다. 가지가 부러지면서 비단전포가 땅에 떨어지자, 서황은 얼른 주워 몸에 걸치며 말했다.
“승상께서 이토록 좋은 전포를 내려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이때, ‘무슨 소리!’ 하고 고함을 지르며 뛰쳐나와 서황이 걸치고 있는 전포를 뺏으려한 장수가 있었다. 허저였다. 서황이 손에 든 활로 허저를 후려치자, 허저는 그 활을 한 손으로 맞받아 잡고 다른 손으로 서황이 타고 있는 말의 안장을 들어 엎어버렸다. 두 장수는 말에서 내려서 다시 육박전을 벌였다.
결국 조조의 엄명으로 싸움은 중단되었고, 출전한 모든 장수들이 비단전포를 받는 것으로 경연대회는 마무리가 되었다. 조조진영의 장수들 중에서 하후돈 다음가는 서열을 놓고 두 효장(驍將) 서황과 허저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경쟁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허저가 괴력을 지닌 직정적인 용장(勇將)이라면, 서황은 신중하고 엄격한 지장(智將)이라고 할 수 있다. 무용에 있어서는 허저가, 지략에 있어서는 서황이 약간 우위에 있지 않나 생각된다.
서황(徐晃), 하동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용맹스러운 데다 큰 도끼인 대부(大斧)를 자유자재로 잘 써서 ‘도끼의 달인’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자는 공교롭게도 저 유명한 제갈량과 같은 ‘공명(公明)’을 썼다. |
서황이 삼국지에 등장하는 것은 이각과 곽사가 한창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을 때 이각의 수하 장수였던 양봉의 지시로, 그가 도끼를 들고 출전하여 곽사의 부장을 한방에 찍어 죽이고 황제를 호위하여 낙양으로 돌아오면서부터이다.
그 후, 정권을 잡은 조조가 무리하게 허도로의 천도를 강행할 때, 대담하게도 ‘조조는 어가를 겁박하여 어디로 가려는가?’ 하며 앞길을 막아선 이가 서황이었다. 허저가 큰칼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 나오자 서황도 도끼를 들고 맞선다.
칼과 도끼의 공방이 시작되어 50여 합을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서황의 눈부신 도끼 솜씨에 반한 조조는 그날 밤 서황의 고향친구 만총을 서황의 군막으로 보냈고 마침내 서황은 조조의 사람이 된다.
이때부터 서황은 조조와 함께 전쟁터를 누빈다. 여포 정벌 및 유비 정벌에도 앞장서고, 관도전투 때는 부하장수가 원소군의 세작을 잡아 정보를 얻은 덕분에 원소군의 병량 수송대를 습격하여 불태우는 개가를 올린다. 또 원소의 아들 원담의 부장인 왕소의 목을 베는 등 조조가 강북을 통일하는 데도 큰 공을 세운다.
형주를 지키던 관우가 조인이 지키는 번성을 공격하자, 조조의 명을 받은 서황이 조인을 도우러온다. 서황은 자신의 군사 대부분이 신병이므로 관우와 정면으로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 참호를 파서 적군의 뒤를 끊으려는 것처럼 꾸며 관우로 하여금 군영을 불태우고 물러나게 한다.
관우의 군사가 위두와 사총에 주둔하자, 적 가까이까지 접근한 서황은 위두를 공격하라고 명하고는 몰래 사총을 습격하여 격파한다. 성동격서(聲東擊西)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이때 사총이 무너지는 것을 본 관우가 5000명의 정예군을 뽑아 맹렬히 공격해오자, 서황은 관우와 맞서 80여 합을 싸워 관우를 패퇴시킨다.
조조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이번에 번성과 양양에서 열 겹이나 되는 적의 참호와 방책을 부수고 승리를 얻었으니 장군의 지략은 춘추시대 병법가인 손무(孫武)를 뛰어넘는 것이오.’하며 서황을 격려한다.
한편, 조조가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서량의 마등을 유인하여 처형하자, 그의 아들 마초와 부장 한수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서황은 다시 보병과 기병 4000명을 인솔하여 포반진을 건너 마초군을 격퇴시키고, 장로 정벌에도 공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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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가 죽고 조비가 즉위하자 우장군에 오른 서황은 상용에서 유비군을 무찌르고 다시 양평후로 봉해진다. 조조에 이어 그의 아들에게도 충성을 다했기 때문이다.
서황의 무용을 가늠해보자. 조조와 원소가 맞붙은 백마전투에서 원소군의 상장 안량이 무용을 뽐내며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송헌과 위속이 차례로 나갔다가 목이 떨어지자, 서황이 도끼를 들고 뛰쳐나갔다. 그러나 채 20합을 견디지 못하고 쫓겨 들어왔다. 그 안량이 나중에 관우의 청룡도에 목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관우보다 무용이 처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서황과 관우가 직접 일기토를 벌여 80여 합을 싸웠을 때 결국 관우가 물러선 것을 보면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해진다. 독화살을 맞은 한쪽 팔이 다 낫지 않은 관우가 제대로 힘을 쓸 수가 없었다고 변명할 수는 있겠지만.
종합해서 판단해보면 서황의 무용은 관우와 거의 대등하거나 약간 처지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사실 서황은 장료와 함께 조조군의 장수로서는 드물게 관우와 친밀한 교분을 가졌던 사이이다. 관우가 조조군의 포로로 잡혀 있을 때 속 깊은 우정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서황의 마지막을 보자. 제갈량이 침공해오자 위에서는 사마의를 보내 그를 막게 한다. 신성을 지키던 맹달이라는 장수가 제갈량과 내통하는 것을 알게 된 사마의는 서황에게 선봉장을 맡기며 신성을 급습하게 했다. 이때 맹달의 군사가 쏜 화살에 이마를 정통으로 맞은 서황, 그날 밤 쉰아홉 살을 일기로 숨을 거두고 만다.
이를 두고, 서황 같은 효장이 주인을 세 번이나 바꾸는 맹달 같은 시시한 장수에게 죽는 것으로 처리된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관우가 오나라의 여몽에게 붙잡혀 참수된 것이 서황에게 패퇴한 후유증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그렇게 처리된 것이라며.
생각하건대, 그것은 아마도 서황의 죽음이 그의 역량에 비해 너무 싱겁고 아쉬워서 나온 얘기가 아닌가 싶다.
■ 제2장 위(魏)나라의 인물들, (2-5) 조조의 장자방(張子房), 명참모 '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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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뒤에는 ‘반드시’라고 할 만큼 뛰어난 참모가 있다. 유비에게 제갈량이 있었고 손권에게 주유가 있었듯이 조조에게는 순욱이라는 발군의 참모가 있었다. 조조가 초창기에 이룩한 큰 위업은 순욱 없이는 불가능했다.
순욱(荀彧), 자는 문약(文若). 일찍부터 왕좌지재(王佐之才)로 불릴 만큼 재주가 뛰어났다. 청년시절에는 조정에서 공직을 맡고 있었는데, 동탁이 도성에 들어오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리고 기주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때 기주의 주인이 된 원소로부터 부름을 받았으나 원소의 인물됨과 협량(狹量)을 바로 헤아리고 조조에게로 찾아왔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 살 때였다. 조조는 순욱을 얻은 기쁨을 한 마디로 이렇게 표현했다.
“이제 나는 자방을 얻었다.”
자방(子房)이란 한을 창업한 유방을 도와 숙적 항우를 물리치는데 결정적인 지략을 펼친 명참모 장량(張良)을 일컫는 말이다. 조조에게는 순욱 외에도 곽가나 정욱 순유 허유 만총 등 참모들이 많이 있었지만 대국을 보는 안목과 통찰력, 전략수립의 정확성 등에서 순욱이 단연 돋보였다.
순욱이 조조를 통하여 남긴 업적을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동탁이 죽은 후 황제가 이각과 곽사의 무리에 쫓기며 낙양을 배회하고 있을 때, 황제를 먼저 받드는 것이 대권을 잡는 지름길임을 조조에게 일깨워주었다는 점이다. “주군께서 앞장서서 창의(倡義)의 군사를 일으켜 천자를 받드신다면 반드시 대업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머뭇거리면 다른 군웅에게 선수(先手)를 빼앗기고 맙니다.”
조조는 그의 말대로 재빨리 황제를 호위하여 낙양으로 입성했다. 그로 인해 이제 막 군벌로 자리잡아가던 조조가 단숨에 황제를 등에 업고 군웅들을 호령할 수 있는 지위에 올라서게 된 것이다.
둘째, 조조가 전쟁터로 나갈 때마다 도성에 머무르면서 후방을 경영하고 군량을 보급하는 임무를 수행해왔다는 점이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의 승패는 군수물자의 원활한 조달에 달려있는 법인데, 순욱은 유방을 도와 후방에서 군수품과 병력을 보충하는 역할을 해냈던 명재상 소하의 역할까지도 훌륭하게 해낸 것이다. |
셋째, 조조가 강북의 패권을 놓고 원소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룬 관도전투에서 조조가 승리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조언을 했다는 점이다. 70만 원소군의 십분의 일인 7만 군사로 출전한 조조는 패전을 거듭하였다. 군사들의 사기도 떨어지고 군량과 마초도 턱없이 모자랐다. 이에 조조는 후퇴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동안의 전황과 군세를 기록하여 허도에 있는 순욱에게 보내며 조언을 구했다. 순욱이 답신을 보내왔다.
“지금 후퇴하면 원소에게 천하를 뺏기고 맙니다. 원소는 군사만 많을 뿐 사람을 쓸 줄 모르는 위인입니다. 지금은 목줄기처럼 중요한 곳만 지키고 있으면서 원소의 허점이 노출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곧 그런 기회가 올 것입니다.”
순욱의 답신을 읽은 조조는 다시 전의를 불태우며 군사를 재정비했다. 이윽고 오소에 있는 원소군의 군량창고에 허점을 발견한 조조, 기습작전을 감행하여 원소군의 군량을 모두 불태우면서 전세를 반전시킨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원소군을 격퇴하여 강북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조조의 관도전투 승리는 순욱의 조언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까지는 두 사람이 뜻을 같이 하면서 함께 달려왔다. 그런데 두 사람이 지향하는 목표가 서로 차이가 있었다. 조조가 개인적인 야심을 추구했다면 순욱은 조조를 통하여 한실의 부흥을 꾀하였다. 궁극적인 목표가 서로 달랐던 것이다. 결국 이 문제가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만다.
조조가 눈부시게 성공해가자, 아첨하는 무리가 생겨났다. 조조를 위공(魏公)에 봉하고 구석(九錫)을 받도록 하자는 공론이 일어난 것이다. 구석은 황제가 공적이 지대한 제후에게 주는 아홉 가지 특전으로, 그것을 받는 것은 왕위나 제위에 성큼 다가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조가 흐뭇하게 공론을 지켜보고 있을 때 순욱이 일어섰다.
“아니 됩니다. 승상께서는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기울어가는 한실(漢室)을 붙드셨습니다. 한의 신하로서 처음의 충성스럽고 곧은 뜻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구석 같은 특전으로 위세를 뽐내려하는 것은 온당치 못합니다.”
순욱은 평소의 소신대로 입바른 소리를 했다. 조조는 심히 불쾌한 낯빛이 되었으나 그렇다고 드러내놓고 나무랄 수는 없었다. 결국 중신들이 황제에게 상주하여 조조는 위공에다 구석의 특전을 받게 되었다.
‘아, 내 일찍이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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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욱은 그간 조조를 도와온 것이 후회스러웠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침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조조는 자신에게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순욱을 제거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얼마 후, 강남 평정의 대군을 일으킨 조조는 순욱에게 함께 갈 것을 명했다. 가다가 적당한 기회에 제거할 심산이었다. 조조와 함께 일해 온 지 20년이 넘은 순욱이 그런 낌새를 모를 리 있겠는가. 순욱은 중간에서 병을 핑계로 드러누워 버렸다.
얼마 안 있어 조조의 사자가 조그만 상자 하나를 들고 왔다. 열어보니 빈 약사발이 하나 들어있었다. 무슨 뜻이겠는가. ‘그대가 병들었다 해도 이제 내가 줄 것은 빈 약사발뿐이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조조의 심중을 헤아린 순욱은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미리 준비한 독약을 입에 넣었다. 그의 나이 쉰 살이었다.
막상 순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니 조조도 마음이 아팠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조조가 몸을 일으킬 때부터 강북을 평정할 때까지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조조는 그를 후하게 장사지내고 경후(敬候)라는 시호를 내렸다. 자책감과 함께 후회의 눈물이 솟구쳤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조조의 장자방으로 불렸던 순욱. 끝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고 기울어 가는 한실에 충의를 다했다. 그러나 그 당시 상황에서 한실의 부흥이 과연 민심과 부합하는 최선의 비전이었을까? 좀 더 유연하게 처신하면서 끝까지 살아남아 조조와 함께 새로운 세상을 여는 데 진력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선택은 아니었을까?
■ 제2장 위나라의 인물들, (2-7)조조의 고향친구 재사(才士) '허유'
만약 당신의 어릴 적 고향친구가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면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삼국지에는 황제도 감히 어쩌지 못하는 실권자 조조의 고향친구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의 경우를 살펴봄으로써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허유(許攸), 자는 자원(子遠). 조조와 같은 패국 출신으로 비상한 머리를 가진 재사였다. 어린 시절부터 조조와 친구로 지냈으나 조조가 동탁 휘하에 있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원소가 기주로 달아날 때 함께 따라가 원소를 도왔다. |
동탁에 반기를 든 조조의 의병 모집 때 하후돈 하후연 조인 조홍 등 조조와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 모두 군사를 이끌고 달려왔으나 고향친구인 허유는 이미 원소에게 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원소진영에는 허유 외에도 전풍 봉기 심배 저수 곽도 순심 등 기라성 같은 모사(謀士)들이 있었다. 이들은 원소가 공손찬을 격파하는 데는 함께 힘을 모았으나, 조조를 격파하는 데는 의견이 나뉘어져 분열하고 있었다. 원소는 인재를 모으고 그들의 말을 들을 줄은 알았으나, 옳은 의견을 제때 채택하고 제대로 활용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예컨대, 원소는 심배가 올리는 계책은 채택하고 군사지휘권까지 주면서, 저수가 올리는 계책은 뚜렷한 이유 없이 들어주지 않았다. 또 허유가 재물에 욕심이 많고 어릴 적 조조의 친구였다는 점 때문에 그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았고 아무런 권한도 주지 않았다.
그런 허유에게 큰 공을 세울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원소와 조조가 맞붙은 관도전투 때, 군량이 거의 다 떨어진 조조진영에서 급히 허도에 있는 순욱에게 군량미를 재촉하는 사자를 보냈는데, 그 사자가 붙잡혀 조조의 친필 서신이 허유의 손에 들어온 것이었다.
원소를 찾아간 허유는 조조군의 군량이 바닥났다며 지금 바로 비어있는 조조의 본거지 허도를 기습하고, 이어서 조조군의 목줄인 병참로를 습격하면 바로 조조군을 패퇴시킬 수 있다고 진언했다. 조조가 들었으면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탁월한 계책이었다. 그러나 조조의 친필서신까지 보이며 허유가 헌책(獻策)을 했음에도, 원소는 그 서신이 조조의 유인책일지도 모른다며 채택하지 않는다. 마침 이때 허유의 가족이 법을 어기고 재물을 탐하다가 심배에게 체포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원소는 아예 허유의 말을 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청렴이라는 잣대로 사람의 재주까지 가늠하려한 원소의 협량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행실이 단정치 못한 곽가를 진군이 탄핵했을 때, 조조가 진군의 엄정함도 칭찬해주고 곽가의 재주 또한 살렸던 것과 비교해보면.
살아남기 위해 고심하던 허유, 결국 원소를 버리고 조조에게로 귀순한다. 허유가 찾아오자, 조조는 큰절까지 하며 고향친구를 환대한다. 물론 원소에 대한 결정적인 정보를 얻어내기 위한 제스처였을지도 모르지만. 허유는 순우경이 지키고 있는 원소군 군량창고의 허점을 얘기하며 조조에게 기습작전을 펼칠 것을 제안한다. |
조조의 장점은 옳다싶은 조언은 바로 채택, 전격적으로 결행한다는 점이다. 조조는 곧바로 마보군(馬步軍) 5천명을 뽑아 원소의 군사로 가장하여 한밤중에 적진을 급습, 오소의 군량창고를 불태운다. 이때 조조는 술에 취해 잠든 적장 순우경을 잡아 군량창고 방비를 허술하게 한 죄(?)를 물어 그의 코와 귀를 베고 원소에게 돌려보낸다.
허유는 자신의 계책에 의해 하룻밤 사이에 조조가 승세를 타게 되자, 조조에게 지금의 기세를 살려 다시 한 번 원소에게 맹공을 퍼붓도록 조언한다. 조조는 그의 말대로 야습을 감행하여 또다시 대승을 거둔다. 그 결과 원소보다 열세였던 군세가 단숨에 역전되어 조조가 공세를 취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다.
그 후에도 허유는 장하(長河)의 물을 끌어들여 원소의 본거지인 기주성을 포위하게 하는 계책을 진언하여 성을 함락하는 데 큰 공을 세운다. 이때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기주성으로 입성하는 조조를 보고 허유는 이렇게 우쭐댄다.
“아만(阿瞞)아, 내가 없었으면 네가 어찌 이 성문으로 들어올 수 있었겠느냐!”
‘아만’은 조조의 어렸을 적 이름, 아무리 친구라 해도 그런 상황에서 최고 권력자를 그렇게 부르다니….
그 후에도 허유는 더욱 기고만장해졌고 급기야 무장 허저에게 "너 같이 하찮은 놈이 누구 덕분에 이겼는지 어찌 알겠느냐?" 며 이죽거리다가 결국 모욕감을 이기지 못한 허저의 칼에 목이 달아나고 만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조조는 "그는 내 친구" 라며 허저의 경솔한 행동을 꾸짖고는 허유의 장례를 후하게 치러준다. 조조의 속마음은 알 수가 없지만, 여론을 중시하는 조조의 입장에서 보면 큰 공을 세운 옛 친구를 토사구팽(兎死狗烹)한 것처럼 보이기는 싫었을 것이다.
허유는 분명 참모로서 뛰어난 자질을 갖춘 재사였다. 조조로 하여금 원소의 군량창고를 급습하도록 하여 관도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장하의 물을 끌어들여 기주성을 함락하는 데도 큰 공을 세운 것을 보면. 그럼에도 동료 무장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순전히 자신의 오만과 부적절한 처세 때문이었다.
순욱은 일찍이 "허유는 탐욕이 너무 강해서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원소의 참모들이 허유 가족의 범죄를 결코 간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지적했고 결국 그렇게 되었다. 황제를 참칭했던 원술도 "허유는 욕심이 많고 음탕하며 불순한 사람" 이라고 평했던 것을 보면 허유에 대한 세평이 별로 호의적이지는 않다. |
최고 권력자의 주변에 있으면서 주제파악이 서투르고 언행마저 경박스러운 것은 치명적인 결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모사로서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고향친구라 하더라도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지 않고 경거망동하거나 함부로 입방정을 떠는 위인을 감싸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허유가 여러 장수들 앞에서 조조의 어린 시절의 이름을 부르며 으스댔을 때 조조가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마음까지 그랬을까? 어쩌면 조조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그때 이미 허유의 목숨이 다한 것인지도 모른다.
■ 제2장 위나라의 인물들, (2-8) 건안칠자의 선두, 공자의 후손 '공융'
공융(孔融), 공자(孔子)의 20대손으로 어릴 때부터 재기(才氣)가 뛰어났다. 열 살 무렵 이응이라는 선비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이응은 함께 있던 손님에게 공융의 재주를 칭찬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참으로 총명하다네. 후일 나라에 큰일을 할 걸세.”
그러나 손님은 어린 공융을 보며 대수롭잖은 듯 ‘어릴 때 총명하면 십중팔구 어른이 되어서는 그렇지 못 하다네’하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공융, 그 자리에서 이렇게 대꾸했다.
“그 말씀이 옳다면 어른께서는 틀림없이 어렸을 때 총명하셨던 모양입니다.”
그 손님은 꼬마의 당돌한 응답에 그만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공융은 장성하여 벼슬길에 나갔다가 승승장구, 마침내 북해태수에 이르렀다. 그는 집에 손님이 찾아오는 것을 몹시 좋아하여 이렇게 말하곤 했다.
“객실에는 항상 귀한 손님이 가득하고, 술독에는 술이 비지 않는 것이 내가 가장 바라는 바이다.” |
포악한 독재자 동탁을 무찌르기 위해 각지의 제후들이 연합군을 구성했을 때, 공융도 군사를 이끌고 참가하여 중앙무대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한때 유비의 도움을 받아 북해성을 포위한 황건적을 물리친 적도 있었지만, 그 후에는 조조가 있는 허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당시의 문사들 가운데 특출한 7인을 가리키는 건안칠자(建安七子) 중에서도 선두로 꼽히는 공융의 우뚝 솟은 문명(文名)은 정통성 확보에 고심하고 있던 조조에게도 큰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공융은 종종 입바른 소리를 하여 조조의 미움을 사곤 했다.
조조가 술의 폐해를 지적하며 금주령을 내렸을 때, 그것이 조조가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 내린 조치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공융은 이런 글을 올려 조조의 처사를 꼬집었다.
“술은 옛날부터 조상을 제사지내고 귀신을 위로하며 사람의 괴로움을 가라앉혀 줍니다. 술이 나라를 망치기 때문에 금주령을 내린다면 여자 때문에 천하를 잃는 자가 있는데도 왜 혼인을 금하지 않습니까?”
또, 원소를 격파한 조조가 원소의 둘째 며느리 견(甄) 씨를 자신의 맏며느리로 삼아놓고 여론의 지탄을 받을까봐 고심하자, 공융은 ‘옛날 주의 무왕은 은나라를 친 뒤에 달기라는 미인을 주공(周公)에게 준 적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내심 꺼림칙하던 조조는 예전에 유사한 고사가 있었다는 말에 아주 반가워하며 그 출전을 물었다. 그러나 공융의 대답은 엉뚱했다.
“지금의 일로 옛일을 추측해 보았을 뿐입니다.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 전례가 없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즉, 조조의 떳떳치 못한 처사를 다시 한 번 드러내놓고 비꼰 것이 아닌가.
조조가 형주의 유표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적당한 세객을 찾고 있을 때, 공융은 대쪽 같은 성품과 기행(奇行)으로 이름 높은 당대의 재사 예형을 추천했다. 불려온 예형은 조조를 심하게 욕보인 후 사신으로 형주에 갔다가 거기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 일은 그를 추천한 공융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 후에, 조조의 장수 하후돈이 형주의 신야에서 힘을 기르고 있던 유비에게 참패하고 돌아오자, 조조는 몸소 50만 대군을 이끌고 유비와 유표를 정벌하는 장도에 나섰다. 공융이 막아섰다. |
“유비와 유표는 둘 다 한실의 종친으로 인망이 높으니 그들을 치는 것은 대의명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조조는 불같이 화를 냈다. 은근히 유비를 편들면서 조조의 정벌군을 대의명분에 어긋난다고 했으니 과연 무사할 것인가. 조조는 공융을 꾸짖으며 ‘앞으로 또다시 공융과 같이 말하는 자가 있으면 어김없이 목을 베리라.’하며 못을 박았다.
공융은 조조의 그 같은 꾸짖음이 아니꼬웠다. 가문이나 학식, 문장 등 어느 것을 따져보아도 자신이 조조에게 꿀릴 것이 없다고 생각한 그였다. 그는 승상부를 나오면서 하늘을 보며 ‘어질지 못한 군사로 어진 군사를 치려고 하니 어찌 패하지 않으랴.’하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사람이 더 부풀려서 조조에게 고자질했다.
“공융은 평소에도 늘 승상을 욕해왔습니다. 또 전에, 죽은 예형이 승상을 욕보인 것도 실은 공융이 시켜서 한 짓입니다.”
이제 조조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전에, 예형은 공융을 일컬어 ‘공자는 죽지 않았다[仲尼不死]’고 했고, 공융은 예형에게 ‘안회가 다시 살아났다[顔回復生]’고 화답하는 등 둘이서 아니꼬운(?) 작당놀음을 하던 일도 생각이 났다.
조조는 마침내 공융에게 대역죄를 덮어씌워 죽일 결심을 하고 공융의 가솔들을 모두 체포하라고 명을 내렸다. 포졸들이 집으로 들이닥쳤을 때, 공융은 두 아들과 함께 바둑을 두고 있었다.
가신 한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와서 두 아들이라도 피신하게 하여 가문을 보전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나 공융에 앞서 두 아들이 먼저 당당하게 말했다.
“둥지가 부서지는데 어찌 성한 알이 남아 있을 수 있겠소?”
그 아비에 그 아들인가. 곧이어 들이닥친 포졸들에 의해 공융의 일가붙이는 남김없이 끌려가서 죽임을 당했고 공융의 목은 저잣거리에 내걸리고 말았다. 늘 그랬듯이, 조조는 무장들의 실수나 패전에는 관대했으나 문사들의 실수나 과오에는 비정할 정도로 가혹했다. 조조의 입장에서 볼 때, 문사들의 이런 돌출행동은 썩은 선비들의 작당놀음이나 유희로 보였던 모양이다.
특히 공융은 공자의 후손이라는 눈부신 가문으로 환관가문 출신 조조의 열등감을 부채질했고, 또 그의 우레 같은 명성과 뛰어난 문장은 나름대로 문학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조조의 비위를 건드리기도 했다. 그런데다 한조에 대한 충성을 앞세워 조조의 정책과 언동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면서 조조의 심기를 자주 건드렸다. |
공융이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것, 선비로서 더할 나위없는 명예라는 생각도 들지만, 어찌 보면 지나친 우월감에서 비롯된 오만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좀 더 유연하게 처신하여 가문의 긍지를 지키고 이어가는 것이 진정한 자부심이고 명예가 아닐는지.
■ 제2장 위나라의 인물들, (2- 9)독설(毒舌)로 저항한 기인 '예형'
원소를 물리치고 북방을 평정한 조조(曹操)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전략요충지인 형주를 손에 넣기 위해 먼저 외교교섭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래서 형주자사 유표에게 보낼 세객을 찾고 있을 때, 고매한 학식으로 이름 높은 선비 공융이 한 사람을 추천했다.
“예형을 보내시지요. 재주와 학문이 깊고 기설종횡(奇說從橫)의 설봉(舌鋒)이 사람을 찌르기도 하지만, 뛰어난 학식과 고고한 성품으로 명성이 높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보내면 아무 두려움 없이 대임을 수행할 것입니다.”
조조의 부름을 받은 예형이 조당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조조 휘하의 문무백관들을 휘~ 둘러보고는 이렇게 일갈했다.
“아아, 인물이 없구나, 인물이 없어!”
그 말을 듣고 불쾌해진 조조, 가시 돋친 목소리로 힐문했다.
“어찌 인물이 없는가? 내 휘하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재사양장(才士良將)들이 보이지 않는가? 잘 들어 두어라. 먼저 이쪽의 순욱과 순유 곽가 정욱 만총 등은 모두 지모가 깊은 인재들이요, 저쪽의 장료와 허저 이전 악진 등은 만부부당(萬夫不當)의 용맹을 지니고 있어 모두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장수들이다. 서황과 우금은 최고의 선봉장들이고 또 하후돈은 천하의 기재이다. 또….” |
예형은 그 말을 듣다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리고는 ‘이번엔 내가 이들의 인물평을 해보겠소. 듣기가 좀 거북하더라도 과히 허물치 마오.’ 하면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순욱은 상가를 문상케 함이 제격이요, 순유는 묘 자리를 돌보게 하고, 정욱은 문지기를 시키는 것이 좋겠소. 곽가는 글을 쓰게 하거나 시를 짓게 하는 것으로 족하며, 장료는 북이나 징을 두드리게 하고, 허저는 소나 말, 돼지를 기르게 하면 잘 하리라. 이전은 편지를 돌리는 배달부로 쓰면 어울릴 거고, 만총에게는 술독을 맡기면 십상이겠소. 서황은 개백정이 적임이고, 우금은 등에 지게를 지워서 담이라도 쌓게 하면 잘하리라. 하후돈은 애꾸니까 안과 의원의 약 가방을 들고 따라다니면 어울릴 거요.”
“…………”
한조(漢朝)의 신하를 자임해온 예형, 조조의 역심을 간파하고 조조를 섬기는 무리들을 통렬하게 힐난한 것이다. 조조의 면전에서 거침없이 독설을 퍼부은 예형, 과연 무사할 것인가?
조조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애당초 기인(奇人)이라는 것을 알고 불렀기 때문에 드러내 놓고 해칠 수는 없었다. 그런 사람을 죽이면 자신의 협량만 드러내 보일 뿐. 조조는 예형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악단(樂團)에서 북 치는 자리를 하나 마련해주었다. 며칠 후, 성대한 주연이 열렸을 때 예형도 그 악단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그의 북치는 솜씨는 의외로 수준급이어서 별로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러자 조조는 그가 입고 온 누더기 옷을 꼬투리 잡았다. 의관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고 조조가 꾸짖자, 예형은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알몸이 되었다.
“하늘을 저버리고 천자를 속이는 무례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무례 중 어느 쪽이 더 과한가 생각해 보시오. 명사(名士)를 불러놓고 제대로 예우하지 않고 북을 치게 하여 욕보이는 것은 소인배의 행동이 아니오?”
그가 알몸으로 조조에게 대꾸하자, 만좌해 있던 여러 장수들이 더 참지 못하고 칼을 뽑아 그를 죽이려 했다. 조조가 얼른 제지하며 이렇게 명을 내렸다.
“좋다. 그렇다면 그대는 곧바로 형주로 가서 유표를 설득하여 내 휘하에 들어오도록 하라. 그렇게만 한다면 그대를 궁중의 학부(學府)에다 모시고 중용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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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마 내심으로는 유표가 예형을 어떻게 처리(?)해주기를 바랐으리라. 그렇게 되면 골치 아픈 놈도 제거하고, 유표를 칠 명분도 생기고.
예형이 형주로 떠났다. 형주에 가서도 그의 괴설(怪說)은 이어졌다. 유표 역시 내심으로는 ‘귀찮은 놈이 왔구나.’ 싶었지만, 조조의 사자라 박대할 수가 없어서 황조가 지키는 강하로 그를 보냈다. 예형을 환영하기 위해 술상을 마련한 황조, 마주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물었다.
“학인(學人), 지금의 조조 진영에는 누가 참다운 인물이라 할 수 있소?”
“음, 어른으로는 공융(孔融), 청년으로는 양수(楊修)지요.”
예형이 거침없이 대답했다. 공융은 공자의 후손으로 학식과 인망을 갖춘 재사(才士)로 건안칠자의 선두이고, 양수는 한(漢)의 태위를 지낸 양표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천재로 알려진 재사이다. 뛰어난 혜안으로 조조를 여러 번 놀라게 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소?”
내친 김에 황조가 물었다.
“그대는 말이지, 산신당(山神堂)의 귀신이겠지.”
예형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산신당 귀신?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오?”
황조가 다시 물었다.
“아, 그건 말이오, 주민들의 제사를 받아먹고도 아무런 영험도 없다는 뜻이오. 말하자면 제물(祭物)을 도적질하는 허수아비라고나 할까.”
예형이 거침없이 말했다.
“뭐라고? 이놈이…!”
발끈한 황조는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아 예형을 찔러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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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는 예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결국 설검(舌劍)으로 자신을 찌르고 말았군!’하며 고소해 했다. 그러나 조조의 특사 임무를 띠고 간 외교사절이 유표의 부하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은 중대한 외교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예형의 죽음으로 조조와 유표간의 외교관계는 끊어지고 결국 두 사람은 적이 되고 말았다. 조조가 대군을 일으켜 밀고 내려오자, 이미 유표는 병들어 죽었고, 형주를 물려받은 작은 아들 유종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해버리고 말지 않는가.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 몸조심을 하는 난세에 좀처럼 보기 드문 기인 예형.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누구 앞에서도 거침없이 자신의 소신을 밝힌 절개가 굳은 선비였을까? 아니면 세상과 타협할 줄 모르고 혼자 잘난 체한 썩은 선비였을까?
■ 제2장 위나라의 인물들 (2-10) 조조의 시샘을 받은 불우한 천재 ‘양수(楊修)’
조조는 측근들에게 자주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꿈을 꾸다가 사람을 죽이는 수가 있으니, 내가 잠들거든 절대로 가까이 오지 마라.”
어느 날, 조조가 낮잠을 자다가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 근위병 한 사람이 얼른 들어가 조조를 부축해 침상으로 올리려 했다. 그러자 조조가 벌떡 일어나더니 갑자기 칼을 뽑아 그 근위병의 목을 쳤다. 그리고는 다시 침상 위로 올라가 잠을 잤다. 한참 뒤 잠에서 깨어난 조조, 목이 떨어진 시체를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누가 이 사람을 죽였느냐?”
주위 사람들이 본 대로 대답하자, 조조는 슬피 울고 죽은 근위병을 후하게 장사지내도록 지시했다. 그 뒤로 측근들은 조조가 정말 잠결에 사람을 죽이는 줄 알고 조조가 잠이 들면 그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측근들조차도 믿지 못한 조조, 자신의 안전을 위해 연극을 한 것인데 그의 각본과 연기, 마무리 솜씨가 얼마나 훌륭했던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근위병의 장례식 날 영구(靈柩) 앞에서 조조의 음흉한 연극을 비꼬는 듯 탄식하는 사람이 있었다. |
“가엾구나, 조 승상이 꿈꾸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대가 꿈꾸고 있었던 것이네!”
양수(陽修)였다. 자는 덕조(德祖). 동탁과 그의 잔당 이각과 곽사가 전횡하던 시절 조정 중신을 지낸 태위 양표의 아들로서 일찍부터 천재로 명성을 떨친 재사(才士)이다. 승상부에서 주부(主簿)를 맡고 있는데, 평시에는 서고(書庫)를 관장하면서 조조의 셋째 아들 조식을 가르쳐왔다.
천재 양수가 조조의 휘하에서 어떻게 재기를 떨치다 중도에 사라져갔는지, 그의 불우한 생애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조조가 궁궐 한쪽에 화원을 꾸며보라고 지시한 적이 있었다. 화원이 완성되자 조조가 와서 한 바퀴 빙 둘러보더니, 문 가운데에다 ‘활(活)’ 자를 써놓고 돌아갔다. 조조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해 모두들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양수는 금방 알아차렸다.
“문(門) 안에 활(活)자를 써 넣었으니 ‘넓을 활(闊)’ 자가 되지요. 문이 너무 넓다는 뜻입니다.”
모두들 탄복하고 다시 문을 좁혔다. 조조가 흡족해 했음은 물론이다. 나중에 조조는 양수가 그렇게 알려준 것을 알고는 은근히 경계하는 마음을 가졌다. 자신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위왕에 오른 조조가 큰 아들 조비와 셋째 아들 조식 중에서 누구를 세자로 세울 것인지 고민하고 있을 때이다. 두 왕자의 역량을 재보려고 조조는 시신(侍臣)들에게 이렇게 명을 내렸다.
“내일 두 왕자를 도성으로 부를 터이니 두 왕자가 성문에 이르거든 절대로 안으로 들여보내지 마라.”
다음날, 먼저 조비가 성문 앞에 도착했으나 수비병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돌아가고 말았다. 조식이 왔다. 역시 수비병들이 완강하게 제지했으나 조식은, ‘왕명을 받고 들어가는 것은 활을 떠난 화살과 같아서 되돌아설 수 없음을 모르느냐!’하며 수비병의 목을 베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그 말을 들은 조조, ‘과연 내 아들이구나.’하며 조식을 크게 칭찬했다. 그게 바로 조조가 원하는 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 조식의 스승 양수가 그렇게 하라고 귀띔을 해준 것임을 알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
양수는 조조의 갑작스런 물음에 대비하여 조식에게 ‘답교(答敎)’라는 책을 만들어 주었다. 조조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예상문제집을 만들어 답까지 가르쳐준 것이었다.
그러나 왕자들의 권력다툼에 관여, 한쪽 편을 드는 것은 참으로 위험천만한 행동이다. 양수의 지나친 총명에 대한 경계심에다, 세자 문제에 대한 신중치 못한 관여가 급기야 조조의 노여움을 사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을지도 모른다.
양수는 금도(襟度)를 지키지 않고 계속 조조의 속을 뒤집어놓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그것이 천재들의 자기방기(自己放棄) 속성 때문이라 하더라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지혜를 뽐낸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할 것이다. 안다고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드디어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한중(漢中)의 사곡에서 유비와 격전을 치르고 있던 조조, 패전을 거듭하여 심란했다. 앞으로 나아가자니 사기충천한 촉군의 기세가 두렵고, 물러나자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 같았다.
그날, 조조가 저녁상에 오른 삶은 닭을 먹고 있을 때, 하후돈이 들어와 군호(軍號)를 물었다. 조조는 그때 마침 닭의 갈비를 뜯고 있었기 때문에 무심코 ‘계륵(鷄肋)!’하고 말했다.
사령부로 돌아온 하후돈이 여러 장수들에게 그날 밤의 군호를 하달했지만, 그 자신은 물론 어느 누구도 그 군호의 의미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군호를 들은 양수는 바로 그 뜻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부하들에게 철수 준비를 시켰다. 이를 전해들은 하후돈이 양수를 군막으로 불러 ‘왜 부하들에게 짐을 싸라고 했느냐?’고 물었다. 양수가 대답했다.
“계륵, 즉 닭의 갈비란 먹자니 먹을 것이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것인데, 지금의 이 싸움이 그렇습니다. 이길 가능성도 없고 물러서기도 그렇고. 더 있어봤자 별로 이로울 게 없으니 아마 곧 철수명령이 떨어질 것입니다.”
조조의 심중을 그대로 꿰뚫은 해석이었다. 조조로서는 유비한테 쫓겨서 철수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후돈은 양수의 말을 듣고 그 혜안에 감복하며 휘하 장병들에게 철수준비를 시켰다.
군사들이 짐을 싸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조조, 양수의 해석 때문임을 알게 되자 그간의 양수에 대한 울분(?)을 한꺼번에 토해내듯 격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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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놈, 그런 뜻으로 계륵이라고 한 것이 아니다. 군율을 문란케 한 양수의 목을 베어 효시(梟示)하라!”
아, 34년의 짧은 연륜 동안 온통 재지(才智)로 점철된 생을 살아온 천재 양수, 대기(大器)로 뻗어나지 못하고 찬바람 부는 진문(陣門)의 기둥에 그의 머리가 걸리고 말았다.
■ 제2장 위나라의 인물들 (2-11) 철새 정치인의 원조, 모사 '가후(賈詡)'
모사(謀士)는 섬기는 주인을 위해 지모를 펼치는 사람이다. 이들은 섬기는 주인과 영욕을 함께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더러는 주인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끊임없이 주인을 바꾸어가며 끝까지 살아남은 모사 가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가후(賈詡)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모사 중에서 권변(權變)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권변이란 때와 형편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임기응변의 재능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정확한 상황판단과 유연한 처세술이 요구된다. 가후는 이 모두를 한 몸에 지니고 있었다.
가후, 젊었을 때부터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조정의 공무원이 되었다. 동탁이 도성에 들어와 권력을 잡자 그는 동탁의 부하장수인 이각의 막하로 들어갔다. 동탁이 죽자 이각과 곽사 등 동탁의 부하장수들은 불안하여 각자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이때 가후가 꾀를 내어주었다.
“장군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친다면 일개 관리에게 잡히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군사를 모아 함께 도성으로 쳐들어간다면 천하를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그때 도망쳐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가후의 판단은 정확했다. 결국 동탁의 부하장수들은 군사를 모아 장안에 쳐들어가 대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이각과 곽사는 나라를 이끌어 갈만한 그릇이 되지 못했다. 두 사람이 서로 싸우면서 혼란이 극심해지자, 황제의 부름을 받은 조조가 군사를 이끌고 왔다.
두 사람이 조조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는 가후는 이들의 운이 다했음을 간파하고 몰래 도망쳐버렸다. 난세를 살아가는 재사의 재빠른 몸놀림이었다. 가후는 잠시 단외라는 장군을 섬기다가 그가 기대할 만한 재목이 되지 못함을 간파하고 다시 전에 동탁의 부하였던 장제의 조카 장수(張繡)를 섬기게 되었다. |
조조가 대군을 일으켜 장수를 정벌하려 하자, 가후는 조조에게 대항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 장수에게 항복할 것을 권했다. 장수는 가후를 조조에게 보내 항복할 뜻을 전했고, 이때 가후를 처음 본 조조는 그의 언변과 재주에 반해 함께 일할 것을 권했다. 가후의 대답은 이러했다.
“저는 지난날 이각을 섬겨 나라에 죄를 지었습니다. 지금은 장수를 섬기고 있는 바, 그는 저의 말은 무엇이든 들어주니 차마 그를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승상의 두터운 정만 가슴깊이 간직할 뿐입니다.”
거절은 하되 앞으로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도 않는, 권변의 모사다운 유연한 처세술이 담긴 모범답안이 아닌가.
그러나 장수는 조조가 장제의 처인 자신의 숙모와 놀아나자 다시 반기를 들어 조조를 공격하여 조조의 심복장수인 전위, 조조의 맏아들 조앙과 조카 조안민까지 죽이는 바람에 조조와 원수가 되고 말았다. 가후는 그런 장수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조조와 원소가 강북의 패권을 놓고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을 때, 그 두 사람한테서 동시에 사자가 왔다. 장수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장수는 가후에게 의견을 물었고, 가후는 당시로서는 세력이 훨씬 더 컸던 원소를 마다하고 조조를 택하도록 권했다. 당장의 위세보다는 장래성을 택한 것이다.
가후의 진언대로 장수가 조조에게 항복해오자, 조조는 지난날의 원수임에도 불구하고 천하를 얻은 듯 기뻐했고, 조조는 가후가 내다본 대로 원소를 격파하고 하북을 모두 평정했다. 그때부터 가후는 조조의 모사로 변신했다. 대세를 정확히 읽는 가후의 뛰어난 안목이 또 한 번 입증된 셈이다. 또, 조조가 마초와 싸울 때 가후는 지모로써 조조를 보좌하였고 맹장 방덕을 얻는 데도 돋보이는 지혜를 발휘했다.
조조의 신임이 확고해지자, 가후는 조조 아들들 간의 권력다툼, 즉 세자책봉에도 조심스럽게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조조의 마음이 시문(詩文)에 뛰어난 셋째아들 조식에게 거의 기울어져 있었으나, 가후는 큰아들 조비 쪽에 줄을 섰으니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조조가 전쟁터로 떠날 때, 조식은 말과 글로써 아비의 공덕을 칭송했으나 조비는 가후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과 정성으로 아비를 배웅했다. 싸움터로 떠날 때마다 조비가 눈물로 배웅을 하니 마침내 조조도 마음이 움직이는 듯했다. 어느 날, 가후는 조조로부터 속히 들어오라는 부름을 받았다. |
“나도 이제 후사(後嗣)를 정해야겠는데 누구를 세웠으면 좋겠는가?”
이럴 때 대답을 잘못하면 후일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 누가 좋겠다고 말했다가 다른 사람이 세워지면 어떻게 되겠는가. 능구렁이 같은 가후가 그것을 모를 리 없다. 가후가 선뜻 대답을 하지 않자 조조가 다시 다그쳤다. 마지못해 가후가 대답했다.
“예,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조조가 다시 물었다.
“원소와 유표의 후사문제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절묘한 대답이었다. 원소나 유표가 모두 맏아들을 후사로 세우지 않았다가 자식들 간에 싸움이 붙어 어이없이 무너지게 되었다는 것을 일깨워주면서, 맏아들을 추천한다는 암시까지 포함된 대답이었다. 그 말을 못 알아들을 조조가 아니었다. 조조는 껄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도 참 어지간하구나. 다음부터는 말을 똑바로 하라.”
마침내 조조는 맏아들 조비를 세자로 세웠다. 가후의 눈부신 혜안(慧眼)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한 것이다.
후일 조조가 죽고 조비가 위왕으로 즉위하자, 가후는 삼공(三公)의 하나인 태위가 되었다. 그리고 조비가 후한 마지막 황제로부터 제위를 찬탈하는 데도 공을 세워 마침내 수향후로 봉해져 안락하게 여생을 보내다가 천수를 다하고 죽었다.
모사 가후. 난세에 홀로 입신하여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하면서 살아남아 만년에 빛을 본 인물이다. 좋게 말하면 대기만성형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후세 사가들은 그의 이름 앞에 ‘난세의 철새’라는 달갑지 않은 관(冠)을 씌워주었다. 양지를 찾아 철새처럼 옮겨 다닌 그의 처세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이리라.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는 오늘날의 철새 정치인들은 가후(賈詡)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꼭 한번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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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장 위나라의 인물들 (2-12) 지용(智勇)을 겸비한 무장 '장료'
삼국지 최고의 무사 여포가 묶여서 끌려나와 조조에게 목숨을 애걸하고 있을 때, 그 옆에서 역시 묶인 채로 주인 여포를 꾸짖는 사람이 있었다.
“여포, 이 한심한 작자야! 죽는 것이 무엇이 두려워 그 발광이냐?”
여포진영의 일급장수인 문원(文遠) 장료(張遼)였다. 그는 형 집행을 위해 끌려나오면서도 조조를 욕했다. 조조가 칼을 뽑아 그의 목을 베려 하자, 함께 있던 유비가 ‘저 사람은 마음이 곧은 사람이니 살려서 쓰도록 하십시오.’하며 말렸다. 좀처럼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는 관우도 조조 앞에 무릎을 꿇으며 간청했다.
“장료는 충의의 남아입니다. 부디 목숨을 보존케 해주십시오.”
조조는 껄껄 웃으며 ‘한번 장난을 쳐본 것뿐이오.’하며 친히 장료의 포승을 풀어주고 자신이 입던 옷을 벗어 그에게 입혀주었다. 패장(敗將)으로서 죽음 대신 극진한 후대를 받은 장료는 이후 여포진영의 다른 장수들의 항복을 받아내어 조조의 은의에 보답하고 조조의 장수가 되었다. 장료는 조조에게서 중랑장(中郎將)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그 후, 유비가 조조에게 쫓겨 원소에게로 도망치고 유비의 처자를 맡아 보호하고 있던 관우가 조조의 대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장료는 지난날 관우가 조조에게 무릎을 꿇어가며 자신을 구해준 정을 잊지 않고 관우를 찾아갔다.
장료는 ‘우선 조조에게 항복하여 훗날을 기약하도록 하시라.’고 관우에게 권했다. 결국 관우는 장료의 청을 받아들여 조조에게 항복했다. 유비가 있는 곳을 알게 되면 즉시 떠난다는 조건으로. 조조는 관우를 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관우가 원소 진영의 두 맹장 안량과 문추를 목 베어 조조의 은혜를 갚고 오관(五關)을 돌파하며 유비에게로 가버리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 아닌가.
장료와 관우, 두 사람은 처음부터 적으로 만났으나 서로 통하는 바가 있고 마음이 끌려 이렇게 한 번씩 서로의 목숨을 구해준다. 그리고 서로 적이지만 상대방에 대해 신의를 지키고 속 깊은 우정을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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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가 적벽대전에서 참패한 후, 장료는 이전(李典) 악진(樂進)과 함께 전략요충지인 합비성을 지키는 책임을 맡았다. 그런데 이전과 악진은 조조가 창업할 때부터 함께 활약한 장수들이었고, 장료는 뒤에 합류한 장수였으므로 세 사람 사이에 자연히 알력이 생겼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조조는 능력을 위주로 사람을 썼기 때문에 장수로서의 자질이 앞선 장료를 책임자로, 이전과 악진을 부장(副將)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밀어낸 꼴이 되었다. 특히 이전은 장료의 지시를 받는 것을 아주 고깝게 생각했다. 그러나 장료는 이에 개의치 않고 매사에 솔선하여 앞장섰다.
이즈음, 오(吳)의 손권은 맹장 태사자(太史慈)를 앞세워 합비성을 공략했다. 장료는 태사자와 한바탕 전투를 벌였다. 불꽃 튀는 명승부전이 펼쳐졌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장료는 태사자가 첩자를 합비성 안에 침투시켜 밤에 불을 지르는 것을 신호로 성 안에 돌진하기로 한 계책을 알아채고, 적의 계략을 역이용하여 태사자를 유인하기로 했다. 장료는 부하들에게 영을 내렸다.
“성안에 불을 지르고 모반이 일어난 것처럼 큰소리로 외쳐라! 내가 신호를 하면 성문을 활짝 열어라!”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태사자는 합비성 안에서 불길이 치솟고 곧이어 성문이 열리자, 군사들과 함께 성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갑자기 성 위에서 돌덩이가 떨어지고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들자, 오병들은 모두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되어 거의 전멸 당하고 말았다. 태사자는 온몸에 화살을 맞고 낙마, 그 부상이 악화되어 숨졌다.
장료는 용맹만이 아닌, 지략으로 오나라가 자랑하는 맹장 태사자를 죽이고 오군을 참패시켰던 것이다. 그 후 군사를 재정비한 손권이 태사자의 원수를 갚으려고 다시 1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장료는 악진에게 성을 지키게 하고 이전과 자신은 함께 나아가 싸우는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장료의 지시를 받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던 이전은 나가기가 싫은 듯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장료가 결연히 말했다.
“두 장군은 성에 남으시오. 나 혼자 나가서 한바탕 죽기로 싸우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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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료가 혼자 출진을 서두르자, 아무 말이 없던 이전은 그때서야 마음이 움직였는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장군이 앞장을 서는데 부장인 제가 어찌 따르지 않겠소? 제게도 할 일을 일러주시오.”
장료는 이전(李典)이 여러 가지 불편했던 감정을 씻고 이제 마음으로 따르게 되자, 더욱 겸손하게 작전을 지시했다. 세 장수는 비로소 한마음으로 뭉치게 되었다. 부하를 마음으로 따르게 하려면 솔선하여 모범을 보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임을 장료가 몸소 가르쳐준 것이다.
다시 격전이 벌어졌다. 이때 손권 진영에서는 오의 최고 용장 감녕(甘寧)이 정병 100기를 이끌고 와서 장료의 진채를 습격하여 마음껏 짓밟고 돌아가는 등 맹위를 떨쳤으나, 장료의 군세를 결정적으로 꺾지는 못했다. 이로써 어느 정도 분이 풀린 손권은 감녕을 돌아보며 이렇게 칭찬했다고 한다.
“조조에게는 장료가 있고, 내게는 감녕이 있다!”
이후에도 장료는 손권의 계속된 공격으로부터 끝까지 합비성을 지켜냈다.
후일 조조가 죽고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몸소 30만 대군을 이끌고 오와 대진했을 때, 노령에 접어든 장료도 자원하여 출전했다. 장료는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오장(吳將) 정봉이 쏜 화살에 허리를 맞고 말에서 떨어져 숨을 거두었다.
주로 오와의 전투에서 맹위를 떨친 장료의 무용은 삼국지연의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울던 아이도 장료가 왔다하면 울음을 뚝 그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오나라 사람들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고 한다.
장료, 여포의 장수로 등장했지만 한번 주인을 바꾸어 조조의 장수로 화려하게 성공한 무장이다. 계책을 써서 태사자를 잡았으니 지략도 뛰어났고, 고참 장수들을 마음으로 따르게 할 만큼 덕망도 갖추었다. 또, 적장 관우와 따뜻한 우정을 나누었으니 인간미도 있었다. 늙어서도 전쟁터에 나가 싸우다가 죽었으니 마무리도 나무랄 데가 없지 않았나 싶다.
제2장 위나라의 인물들 |
(2-13) 두 무장의 상반된 행적 ‘우금과 방덕’
무장이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요, 천수를 다하는 것은 크나큰 복이다. 전투에 패배하여 사로잡힌 무장은 장렬하게 참수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며, 목숨을 구걸하는 것을 가장 큰 수치로 여긴다. 전투 중에 적군에게 사로잡힌 두 무장의 상반된 행적을 통하여 무장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우금(于禁), 자는 문칙(文則). 조조를 따라 30여 년간 전장을 누비며 무수한 전공을 세운 용장이다. 장수(張繡)의 반란으로 패주할 때 약탈을 저지른 청주병을 엄하게 질책하며 군율을 바로잡는 등 과감한 조치를 취하여 조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기도 했다.
방덕(龐德), 자는 영명(令名). 서량 남안 출신으로, 마등 휘하의 장수였다가 마등이 죽자 그의 아들 마초의 부장이 되었다. 그러나 마초가 유장을 도우러 떠났을 때 방덕은 병이 나서 참가할 수가 없었는데, 제갈량의 계책에 걸린 마초가 사촌동생 마대와 함께 유비에게 투항하는 바람에 마초와도 갈라서게 되었다.
조조가 한중을 침공하자 방덕은 장로의 장수로 출전하여 용감하게 싸웠지만, 그의 용맹과 뛰어난 무용을 탐내던 조조의 계책에 걸려 항복하게 되었다. 조조는 방덕의 투지와 기량을 높이 평가, 그를 상장(上將)에 임명했다.
적벽에서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에게 참패한 조조는 오(吳)의 주유가 형주를 취하려는 야심을 보이자 조인을 번성으로 보내 맞서게 했다. 두 진영의 군사들이 대치하고 있을 때, 제갈량이 재빠르게 군사를 움직여 결국 형주지역 대부분은 유비의 차지가 되었다.
위장(魏將) 조인은 양양을 뺏기고 다시 번성에서 관우의 맹공을 받자, 조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위왕 조조는 우금을 정남(征南) 장군으로 임명, 방덕을 부장(副將)으로 딸려주며 번성의 위급을 구하게 했다.
조조 진영의 여러 장수들은 방덕의 형 방유가 촉의 점령지인 한중에 남아있다는 점을 들어 방덕의 전향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자 방덕은 ‘나는 승상의 배려로 위나라의 큰 은혜를 입은 몸이라 반드시 그 은혜에 보답할 것이다.’며 당찬 각오를 밝히고 자원해서 선봉장을 맡았다.
방덕은 ‘관우의 시신을 담아오거나, 아니면 내 시신이 담길 것’이라며 관(棺)을 끌고 출전했다. 방덕과 관우의 불꽃 튀는 공방전이 벌어졌다. 방덕이 워낙 죽기 살기로 덤비니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방덕은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는 척하다가 갑자기 돌아서서 활을 쏘았다. 방덕이 쏜 화살이 관우의 왼팔에 박혔다. |
이때 위의 진채에서 징소리가 울렸다. 갑자기 심술이 난 우금이 후퇴를 알리는 징을 울린 것이다. 부장인 방덕이 관우를 죽여 큰 공이라도 세우게 되면 주장(主將)인 자신의 체면이 말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방덕은 부상을 입은 관우를 그냥 두고 물러나기가 아쉬웠지만 혹시 진중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 급히 진채로 돌아와 ‘왜 징을 울렸느냐?’고 물었다. 우금이 기어들어가는 말투로 얼버무렸다.
“위왕께서, 관우는 지모가 깊은 자이니 가볍게 맞서지 말라 하셨소. 관우가 비록 화살에 맞았으나 혹시 무슨 속임수가 있을까 해서….”
방덕은 속으로 분한 마음이 들었지만, 우금이 상관이라 더 이상 따지지 못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우금은 군사들에게 번성 뒤쪽 양강 옆 골짜기에 진을 치게 하여 장기전 태세를 갖추게 했다. 여름철이라 장맛비가 며칠째 쏟아졌다. 진채로 돌아와 화살에 맞은 상처를 치료한 관우는 군사들에게 양강 상류에다 몰래 둑을 쌓게 했다. 물이 불어나면 둑을 일시에 무너뜨려 위군들을 모두 수장(水葬)시켜버릴 계획이었다.
이때 위군 진영에서도 진채가 수공(水攻)에 취약하지 않느냐고 지적하는 소리가 있었으나, 우금은 패신(敗神)이라도 씐 듯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라!’며 듣지 않았다. 비는 계속 세차게 퍼부었다. 그날 밤 관우는 몰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상류에 있는 둑을 무너뜨렸다.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세찬 물길이 골짜기를 휩쓸고 지나가자, 위군의 진채는 대부분 물에 떠내려가거나 흙탕물 속에 잠겼다. 위군들은 대부분 잠자다가 변을 당했다. 겨우 산기슭으로 올라온 우금도, 용감하게 싸우며 저항하던 방덕도 꼼짝없이 촉군에게 사로잡혔다.
잡혀온 우금은 땅에 넙죽 엎드리며 ‘관공, 한번만 살려주시오.’하며 애걸했다. 이에 관우는 ‘내가 너를 죽이는 것은 개나 돼지를 죽이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하며 우금을 형주로 압송하게 했다. 반면 방덕은 항복을 요구하는 관우를 꾸짖으며 꼿꼿하게 저항하다가 참형을 당했다. 관우는 방덕의 시신을 거두어 후히 장사지내 주도록 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조는 ‘30년간이나 나를 따라다닌 우금이, 내 사람이 된 지 2년도 채 안된 방덕 만도 못하구나.’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방덕의 충성심을 치하했다. 그리고 비굴하게 살아 돌아온 우금은 만나주지도 않았다. |
세월이 흘러 조조가 죽고 그의 아들 조비가 위왕으로 즉위하자, 방덕에게는 장후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우금은 조비의 명으로 조조 무덤의 조경 책임자가 되었다. 우금이 임지에 도착해보니 조조의 무덤 안에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촉장 관우가 수공으로 위군을 쓸어버리는 장면이었다. 관우가 높은 자리에 앉아있고 아래에서 한 장수가 성난 얼굴로 노려보고 서 있는데, 한 장수는 땅에 엎드려 애처롭게 목숨을 빌고 있었다.
성난 얼굴로 서 있는 장수는 방덕이고, 땅에 엎드려 목숨을 빌고 있는 장수는 바로 자신이었다. 자신을 비꼬는 그림이 분명했다. 위왕 조비가 먼저 사람을 보내 벽화 그림을 그리게 한 다음, 자신을 그곳 책임자로 보내 항장(降將)의 비굴한 삶을 조롱한 것이었다.
참담한 자신의 모습이 그려진 벽화를 본 우금은 마침내 울화병으로 몸져눕게 되었고,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뜨고 말았다. 관우에게 목숨을 구걸하여 다시 살아난 지 채 일 년도 안 된 때였다.
전장에서 싸우다 사로잡힌 장수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우금과 방덕이 온몸으로 그 해답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리라.
■ 제2장 위나라의 인물들 (2-14) 조조의 출중한 두 아들 '조비와 조식'
조조가 마음만 먹었다면 후한 황제를 폐하고 제위에 오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웠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끝내 황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후세에 찬탈자로 기록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조조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다. 유씨 부인이 낳은 맏아들 조앙(曹昻)은 장수(張繡)와의 싸움에서 죽었고, 변씨 부인 소생으로 큰아들 조비를 비롯하여 조창 조식 조웅의 네 아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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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아들 조비(曹丕)는 통이 크고 글재주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무예에도 자질을 보여 문무에 두루 능했으며, 성격도 원만하고 믿음직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조조가 전쟁터에서 실전경험을 익히게 했다.
둘째인 조창(曹彰)은 궁술과 마술이 뛰어났고, 맹수와 격투를 할 정도로 힘도 장사였다. 조창이 오환족의 반란을 토벌하면서 용맹을 떨치자, 조조는 ‘우리 황수아(黃鬚兒, 황색 수염이 나있는 아이)가 참 대단하구나.’하고 칭찬을 하기도 했다.
셋째인 조식(曹植)은 총기가 있고 시문에 뛰어나 조조의 총애를 받았다. 공융 진림 등 건안칠자(建安七子)들과 사귀었으며, 오언시를 완성시킨 것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이백과 두보가 나오기 이전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꼽힌다.
넷째인 조웅(曹熊)은 몸이 약해 병치레가 잦아서 눈에 띄는 활약을 하지 못했다.
조조가 원소를 격파했을 때, 함께 참전했던 맏아들 조비가 제일 먼저 원소의 집에 들어갔다. 거기서 조비는 스무 살도 채 안 된 원소의 둘째 며느리 견(甄) 씨 부인을 보고 한눈에 반하였다. 나중에 조조도 견 씨를 보고 그 미색에 사로잡혔는데, 조조는 견 씨를 맏아들에게 양보(?)하면서도 못내 아쉬운 듯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번 전투는 오로지 조비 그 놈을 위해서 한 것 같군!”
위왕이 된 조조는 세자 자리를 두고 듬직한 맏아들 조비와, 시문에 뛰어난 셋째 아들 조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조비를 세자로 세웠다. 처음엔 스승 양수의 도움을 받은 조식이 우세했지만, 발군의 모사(謀士) 가후의 조언을 받은 조비가 나중에 더 많은 점수를 땄기 때문이다.
조조가 죽자 맏아들 조비가 위왕의 자리를 계승했다. 조창이 조문(근조)하러 대군을 이끌고 오자, 조비는 조창 혼자 들어와 문상을 하게 한 뒤 바로 임지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조조가 생전에 총애하던 조식은 큰형이 두려워 조문하러 오지 않았고, 결국 조비가 조식을 불러들였다. 조식이 입조하자, 조비는 죽음을 담보로 난제(難題)를 내렸다.
“네가 문재(文才)를 타고났다고 하니 오늘 확인해보겠다.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시 한 수를 지어라. 형제를 주제로 하되 형제란 말을 넣으면 안 된다. 만일 짓지 못하면 여덟 걸음 째에 네 목이 방바닥에 떨어지리라. 자, 발걸음을 떼어라!”
조식은 정말 문재를 타고난 천재였다. 조식이 발걸음을 떼면서 시를 읊조렸고, 정확히 일곱 걸음 만에 끝이 났다. |
煮豆燃豆萁(자두연두기) 콩을 볶으려 콩깍지로 불을 지폈네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콩은 가마솥 안에서 뜨거워 우네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 본래 한 뿌리에서 나온 몸이건만 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 왜 이다지 급하게 볶아대는가
이 시가 일곱 걸음 만에 지었다는 저 유명한 칠보시(七步詩)이다. 여기서 콩은 조식 자신이고 콩깍지는 조비를 지칭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조비는 눈물을 흘리며 단을 내려와 조식을 끌어안는다.
조비는 위왕이 된 지 10개월 만에 후한의 헌제로부터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제위를 물려받아 위 황제[文帝]가 되었다. 이에 촉의 유비와 오의 손권도 차례로 황제에 올랐다. 바야흐로 삼국시대가 열린 것이다.
원소의 며느리였다가 조비와 결혼, 태자 조예를 낳은 견 황후는 조비가 근간에 가까이 하기 시작한 곽 귀비로부터 ‘황제를 몰래 해치려고 한다.’는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죽었다.
견 황후가 죽자, 형수를 연모하던 조식은 그녀가 아끼던 베개를 얻어 임지로 돌아가던 중, 낙수가에서 견 황후가 신녀(神女)처럼 눈앞에 나타난 것을 보게 되었다. 그때의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읊은 시가 바로 ‘낙신부(洛神賦)’이다.
조비는 조창과 조식 두 아우를 멀리 변방으로 보내고, 한 곳에 뿌리박지 못하도록 계속 임지를 옮기게 하고 엄격히 감시한다. 조창은 병을 얻어 죽는데, 일설에는 독살되었다고도 한다.
조식은 자신의 재주를 써주기를 바라는 글을 여러 번 올렸지만 번번이 조비에게 거절당했고 입조(入朝)조차 할 수 없었다. 아마도 조식의 재주에 대한 시기심에다, 세자 자리를 놓고 다투었던 원한이 조비의 가슴 깊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리라. 결국 조식도 울분 속에 병을 얻어 마흔 한 살에 숨을 거둔다.
막내인 조웅은 조비가 작은형들을 핍박하자 겁을 먹고 스스로 목을 매고 죽었다.
조비는 제위에 오른 지 7년 만에 병으로 죽고 만다. 마흔 살이었다. 결과적으로 조조의 네 아들 모두 단명한 셈이다. 어린 태자 조예가 제위를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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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비는 찬탈자라는 비난을 받기는 했으나 황제 즉위 후 도읍을 낙양으로 옮기고 국력증강에 힘쓰는 등 무난한 통치를 했으며 대과(大過)는 없었다. 굳이 허물을 찾는다면 동생들에게 가혹하게 대한 점, 조조가 물려준 창업기반을 더 확장하지 못하고 지키기에 급급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는 조조, 조식과 함께 삼조(三曹)로 불리며 건안문학의 중심에 있었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조비는 넓은 도량과 공평한 마음으로 정사에 힘썼으니, 더욱 오래 성덕을 쌓았더라면 현군으로 기록될 수 있었다’라고 평했고, ‘조식은 형과의 권력다툼에서 패배했지만 시문에 뛰어난 재주를 보인 비운의 천재다’라고 평했다.
ps 조식의 洛神賦(낙신부)를 올려드립니다.
황초 삼년에, 경사(京師)에 입조하였다 돌아가는 길에 낙천을 지나게 되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이 물에 선녀가 있으니 그 이름이 복비라. 송옥과 초왕과 무산신녀의 일에 느끼는 바 있어 이 부(賦)를 짓는다.
경사를 떠나 동녘으로 돌아가네. 이궐산을 등지고 환원산 넘고 통곡을 지나 경산에 이르니 이미 해가 저물고, 수레와 말이 지치었으매 물가에 수레를 쉬고, 지초 무성한 밭에서 여물을 먹이며 버들숲에 앉아, 흘러가는 낙천을 바라보매 문득 정신이 산란하였네.
홀연히 생각이 흩어져 굽어보아도 보이지 않고 우러러 보아도 달랐는데, 바윗가에 서 있는 한 미인을 보았네. 이에 어자를 불러 묻기를, 자네도 저 이가 보이는가,
저 이는 누구이기에 저토록 고운가. 어자가 답하니 제가 듣기로 낙수의 신을 복비라 이르는바, 군왕께서 보신 이가 그 이가 아닐까 하나이다. 그 모습이 어떠한지 소인도 궁금하다 이르매 내 답하기를,
그 자태는 놀란 기러기처럼 날렵하고 노니는 용과도 같아, 가을의 국화처럼 빛나고 봄날의 소나무처럼 무성하구나. 엷은 구름에 쌓인 달처럼 아련하고 흐르는 바람에 눈이 날리듯 가벼우니, 멀리서 바라보니 아침노을 위로 떠오르는 태양과 같고, 가까이서 바라보니 녹빛 물결 위로 피어난 연꽃과 같네. 섬려한 모습과 아담한 키마저 모두가 알맞고 적합하니 그 어깨는 일부러 조각한 듯 하고 그 허리는 흰 비단으로 묶은 것 같구나.
길고 가녀린 목덜미에 절로 드러난 흰 살결은 향기로운 연지도 호사한 분도 바르지 아니하였구나. 구름 같은 머리를 높이 틀어 올리고 그 아미는 가늘고 길게 흐르며 붉은 입술은 밖으로 빛나고 백옥 같은 이는 입술 사이에서 곱구나. 눈웃음치는 눈동자는 아름답고 그 보조개가 능히 마음을 끄나니 그 맵시가 고와 이를 데 없고 거동이 고요하여 윤기가 흐르니 그 부드러운 마음에 가냘픈 자태에 말투 또한 더욱 아름답구나.
기이한 복색은 지상에는 없으며 그 자태 그림과 같으니, 찬연한 비단옷에 귀에는 아름다운 귀걸이 달고 금비취 머리장식에 밝은 구슬을 꿰어 몸치장하고 무늬 신 신고 얇은 명주치마를 끌며 그윽한 난초 향기에 묻혀 산모퉁이를 거니네. 이에 몸을 놓아 즐겁게 노니니, 왼쪽은 채색 깃발에 기대었고 오른편은 계수 깃발에 가리웠네. |
물가에서 흰 팔 걷고 여울가에서 현초를 캐는데, 내 뜻이 그 맑은 아름다움에 흠모되어 마음이 흔들려 편안치 않네. 좋은 매파가 없어 말 전하지 못하여 잔물결에 부쳐 전하노니, 사모하는 내 뜻을 알리고자 구슬 노리개를 풀어 바라네. 가인은 닦음에 정성되어 예를 익혔고 시에도 밝으니, 구슬을 집어 답하기에 깊은 연못을 가리켜 화답하였네. 간절한 정을 지녔으나 그 속음을 두려워하니 정교보의 버림받은 말 생각하고 슬퍼져 머뭇거리며 의심하네.
온화한 얼굴 거두고 뜻을 조용히 가지며 예의를 차려 자신을 지키니 이에 낙신이 느낀 바 있어 이리 저리 헤매는데 광채가 흩어졌다 모이며 그늘이 되었다 밝아졌다 하니 날렵한 자태 발돋움하여 나는 듯 날지 않고 향기 자욱한 길을 밟고 방향을 퍼트리니 길게 읊어 영원히 사모하니 그 소리 서러워 더욱 길어지네.
그리하여 갖은 신령들이 모여들어 서로 짝들을 부르게 하니 혹자는 맑은 물속을 노닐고 혹자는 신령스런 물가를 날며, 혹자는 밝은 구슬을 찾고 혹자는 비취빛 깃털을 줍네. 남쪽 상강의 두 비를 따르게 하고 한수가의 여신을 대동하니 포과성이 짝없음을 탄식하고 견우성이 홀로 삶을 읊조리네.
아름다운 옷자락을 나부끼며 긴 소매 가려 물끄러미 서니 날렵하기가 나는 새 같고 표연하기가 신령과 같네. 물결을 밟아 사뿐히 걸으니 버선 끝에 먼지가 일고 그 몸짓 대중없으니 위태한 듯 평안한 듯 나아가고 멈추어 섬을 예측하기 어려워 가는 듯 돌아서는 듯하네.
돌아서 바라보니 옥안이 눈이 부시고 말을 머금어 내지 않으니 그윽한 난초와 같아 화용이 눈부셔 식사를 잊게 하네. 이에 병예가 바람을 거두고 천후가 물결을 재우며 풍이가 북을 울리고 여와가 고운 노래를 부르니 문어를 띄워 수레를 지키고 옥방울을 울리며 더불어 가는구나. 육룡이 머리를 맞대 공손히 수레를 끌고 고래가 뛰어올라 바퀴를 돌보며 물새가 날아올라 호위하며 북쪽 물가를 넘어 남쪽 산을 지나네.
흰 고개를 돌려 맑은 눈동자로 바라보며 붉은 입술을 열어 천천히 만남의 일을 말하니 사람과 신의 길이 다르매 아름다운 나날에 함께 하지 못함을 원망하네. 비단 소매 들어 눈물을 가리나 눈물이 떨어져 옷깃을 적시니 좋은 만남이 영원히 끊어질 것을 슬퍼하며 한번 가니 다른 곳에 있음을 서글퍼 하네
미미한 정으로 다하지 못한 바 있어 강남의 빛나는 구슬을 바치고 비록 깊은 곳에 거할지라도 이 마음 긴히 군왕께 거하겠다 하네.
문득 그 있는 곳 뵈지 않더니 섭섭히 사라져 빛을 가리네. 이제 돌아서 높은 곳 오르려 하니 발걸음은 가고자 하나 뜻이 머물려 하니 남은 정을 되새기며 돌아보며 탄식하네. 그 모습 되찾기를 바라며 작은 배를 몰아 강에 오르니 아득한 강물에 배 띄우고 돌아갈 길 잊으나 생각은 연이어 그리움만 더하고 |
밤은 깊었는데 잠들지 못하고 엉킨 서리에 젖어 새벽에 이르노라. 마부에게 명하여 수레를 내게 하고, 이제 나는 동로로 돌아가려 하네. 말고삐 잡아 채찍은 들었으나 그 마음 서운하여 돌아서지 못하네.
※ 삼국지의 최후 영웅은 조조라 할 수있다. 아들 조비가 위(魏) 황제에 오르고 손자 증손자까지 대를 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실질적 촉과 오를 평정하고 위조를 물려받은 사마(司馬) 씨가 최후의 승리자가 아닐까. 오늘 그 사마의를 소개합니다.
■ 제2장 위나라의 인물들, (2-15)수수께끼의 인물, 준걸(俊傑) '사마의'
조조가 한중을 평정하고 군사를 돌리려고 했을 때, 측근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유비는 서촉을 뺏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지금 쳐들어가면 능히 유비를 무찌르고 서촉까지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조조군에서 주부(主簿)일을 맡고 있던 사마의였다. 조조의 군사행동에 관해 그가 입을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조조는 ‘이미 농(隴 : 漢中)을 얻었는데 어찌 또 촉을 바라겠는가.’하며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한중을 유비에게 뺏기고 나자, 조조는 사마의의 판단이 옳았음을 깨닫고 뼈저리게 후회했다.
사마의(司馬懿), 자는 중달(仲達). 제갈량에 버금가는 지모를 가진 위(魏)의 명장이다. 보통사람은 고개가 90도만 돌아가는데, 그는 특이하게도 이리처럼 고개가 180도 뒤로 돌아가는 낭고상(狼顧相)을 가졌다고 한다. 조조는 이를 반골(反骨)의 상으로 보고 경계했다.
사마의는 강북을 평정한 조조가 내치에 힘을 쏟고 있을 때 발탁되었는데, 젊은 시절의 조조가 연상될 만큼 권모술수와 임기응변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차이점은 조조의 지모가 양성적인데 비해 그의 지모는 음성적이었다는 점이다. 음험했다는 얘기다. 그는 군략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으나 조조는 그의 지혜와 야심을 경계하여 군사의 일을 맡기지 않았다. |
사마의는 조조의 아들 조비가 위 황제로 즉위할 때부터 차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조비가 제위 7년 만에 죽고 그의 열다섯 살 난 아들 조예가 위 황제로 즉위했다. 이 무렵 조정의 손꼽히는 중신이 되어있던 사마의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여 서량의 군사책임자를 자원했다. 조예가 이를 허락하니 그는 이제 변방에서 대군을 거느리게 되었다.
생전에 조조가 사마의에게는 절대로 병권을 맡기지 말라고 했으나, 그의 손자 대에 이르러 이 금기가 깨진 것이다. 이때 사마의는 위 정벌을 계획하고 있던 촉의 제갈량이 ‘사마의가 서량에서 반역을 꾀하고 있다.’고 퍼뜨린 유언비어에 휘말려 조예의 의심을 받아 다시 군권을 뺏기고 만다. 반간계(反間計)에 성공한 제갈량은 저 유명한 출사표를 바치고 위 정벌길에 올랐다.
위에서는 하후무와 조진을 차례로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제갈량의 촉군을 막게 했으나 계속 패퇴했다. 위 황제 조예는 어쩔 수 없이 낙향한 사마의를 다시 불러 제갈량을 막게 하니 삼국지 최고의 두 지장(智將)이 드디어 전선에서 맞붙게 되었다. 사마의가 제갈량 때문에 잃은 병권을 제갈량 덕분에 다시 찾게 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마의는 그를 닮아 영용(英勇)한 두 아들과 함께 전선에서 제갈량과 맞섰고, 가정(街亭)의 전투에서 제갈량의 심복 장수인 마속을 쳐부수며 첫 싸움에서 승리했다. 두 영걸은 여러 차례 소규모로 맞붙으며 지루한 대치를 계속했다. 한번은 사마의가 제갈량의 계책에 빠져 호로곡에 갇혀 불에 타죽을 뻔했으나, 때마침 소나기가 쏟아지는 바람에 살아난 적도 있었다.
그 후부터 사마의는 이기기보다는 지지 않기 위한 전략으로 일관했는데, 그 때문에 부하들로부터 겁쟁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러나 제갈량을 상대로 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이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사마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제갈량이 없어지면 자신의 병권을 다시 뺏길 거라고 생각, 일부러 시간을 벌기 위해 전쟁을 오래 끌었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사마의는 오직 지키기만 하며 버텨내다가 드디어 제갈량이 오장원(五丈原)에서 병이 들어 숨을 거두자, 나라를 지켜낸 공로로 원훈(元勳)이 되었다. 그 후 사마의는 요동에서 공손연이 연왕을 사칭하며 일으킨 반란까지 평정함으로써 이제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실력자가 되었다. |
위 황제 조예가 술과 여색에 곯아 서른여섯에 죽자, 여덟 살 난 태자 조방이 황제로 즉위했다. 이때 조정에서는 황실의 친위세력인 조상(曹爽)과, 군벌세력인 사마의 간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져 마침내 조상이 승리했다. 대권을 잡은 조상은 사마의의 병권을 다시 뺏어버렸다. 사마의에 대한 황실 친위세력의 견제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사마의는 다시 병을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 두 아들과 함께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황제 부럽지 않은 호사(豪奢)를 누리고 있던 최고 실권자 조상은 그래도 사마의의 존재가 부담스러워 사자를 시켜 그의 근황을 정탐해보게 했다.
이를 훤히 꿰뚫어 본 사마의는 머리를 풀어헤친 채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문병 온 사자를 맞았다. 사마의는 말을 잘못 알아듣는 척 자꾸 엉뚱한 소리를 하면서,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연신 기침을 쿨룩쿨룩 해댔다. 누가 봐도 곧 죽을 늙은이였다. 사자가 돌아가서 본 대로 전하자, 조상은 그것이 사마의의 노림수인줄 모르고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그 늙은이가 곧 죽는다면 이제 내게 무슨 걱정이 있으랴!”
기막힌 연극으로 사자를 속인 사마의, 실권자 조상이 황제를 모시고 사냥을 떠나면서 궁궐을 벗어나자, 두 아들과 심복 장수 및 그를 따르는 군사들과 함께 비어있는 궁궐을 기습 점령했다. 그리고 황태후를 등에 업고 조상과 그의 심복들을 모두 잡아 목을 베니 하루아침에 권력은 다시 사마의의 것이 되었다. 쿠데타가 성공한 것이다.
사마의는 아무 실권 없는 황제 조방으로부터 구석(九錫)의 특전까지 받았다. 그리고 두 아들 사마사, 사마소에게 실권자의 지위를 물려주고 병으로 죽었다.
그는 일생동안 뛰어난 전공(戰功)으로 인한 영예와, 충성에 대한 의심 사이에서 부침을 거듭했다. 그는 나락으로 떨어질 때마다 특유의 지모를 펼쳐서 재기하곤 했다. 그는 상대가 강하다고 느낄 때는 시치미를 떼고 죽은 듯이 있다가, 기회가 포착되면 단숨에 상대를 해치우며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자손들을 위해 착착 준비를 했다.
후세의 사가들은 그를 ‘시치미 떼기의 명수’ 혹은 ‘능청스럽게 지모를 펼치는 수수께끼의 인물’로 평하고 있다. 또, 군략의 측면에서는 결코 제갈량에게 뒤지지 않는 지휘관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가 죽은 제갈량의 재주에 감탄하며 말했듯이, 사마의 또한 백 년에 한두 명 나올까 말까한 천하의 기재(奇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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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장 위나라의 인물들 (2-16) 주장을 능가하는 부장(副將) '장합'
장합, 자는 준예(儁乂). 하간군 막현 사람이다. 황건적 토벌을 위한 의병 모집에 응하여 한복의 휘하에 있다가 한복이 패퇴하자 원소에게 의탁했다. 원소군의 교위(校尉)로 임명된 장합은 공손찬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중랑장으로 승진했다.
조조와의 건곤일척의 승부인 관도대전에서, 장합은 군량창고가 있는 오소(烏巢)의 경비가 허술한 점을 지적하고, 수비대장 순우경에게 지원군을 보내야 한다고 원소에게 진언하였으나, 참모인 곽도는 이를 반대하고 조조의 본진을 공격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였다.
원소는 곽도의 의견대로 오소에 경기병(輕騎兵)만 원군으로 보내고, 주력군은 조조의 본진을 공격하게 했다. 결과는 장합의 예상대로였다. 조조의 본진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고, 기습을 받은 오소의 군량고는 조조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순우경의 패배에 입장이 곤란해진 곽도는 ‘장합은 패배를 기뻐하고, 불손한 말을 내뱉었다.’며 장합을 모함했다. 이에 환멸을 느낀 장합은 원소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고람과 함께 조조에게 투항했다.
조조군의 장수 조홍은 ‘장합은 패전의 책임에 따른 후환이 두려워 투항한 것 같다.’며 장합을 받아들이지 말자고 했으나, 참모 순유는 ‘장합은 자신의 계략을 채택해 주지 않은 원소에 실망하여 항복하는 것’이라며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순유의 의견을 받아들인 조조는 장합에게 이렇게 말했다.
“옛날 오자서는 잘못된 군주를 섬긴 것을 너무 늦게 알았기 때문에 불행한 최후를 맞지 않았는가. 그대가 내게 온 것은 명장 한신이 항우를 버리고 유방을 섬긴 것처럼 올바른 행동이다.”
조조에 의해 편장군으로 임명된 장합은 조조를 따라다니며 오환족과의 전투, 발해에서의 원담과의 전투 등에서 크게 활약했다. 또, 위남에서는 마초와 한수를 토벌하는 데도 큰 공을 세웠다.
조조가 장로를 정벌할 때, 장합은 선두에서 활약하며 본군이 이동할 길을 열어주었다. 장로가 투항해오자, 조조는 하후연에게는 주장(主將)을, 장합에게는 부장(副將)을 맡도록 하여 유비군에 대항하도록 했다. |
유비와의 한중 쟁탈전에서, 장합은 파동과 파서 두 현을 평정하고 그곳 백성들을 한중으로 이주시켰다. 이때 유비군의 용장 장비와 와구관에서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다 패퇴하였다. 유비가 정예군을 10개부대로 나누어 야밤에 기습해왔을 때, 총대장 하후연이 유비군의 노장 황충의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유비는 하후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하후연이 비록 우두머리였다고 하나 어찌 부장인 장합에 미치겠소? 만약 장합의 목을 베어올 수 있다면 하후연을 목 벤 것보다 열 배는 나을 것이오.”
주장인 하후연보다 부장인 장합을 더 의식하고 있었다는 뜻이리라. 위군은 큰 혼란에 빠졌다. 이때 하후연의 막료였던 곽회는 비상대책위원회를 소집하고 ‘이 사태는 장합 장군 없이는 타개할 수 없다. 장합 장군은 적장인 유비도 두려워하고 있다.’며 장합을 총대장으로 추대하였다.
모든 장수들이 장합의 명에 따르기를 결의하자 비로소 장병들의 동요가 가라앉고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조조는 사신을 파견, 장합에게 사령관의 부절(符節)을 보내주었다. 그 후 조조가 직접 한중에 도착하자, 장합을 두려워하고 있던 유비는 높은 산에서 지키기만 할 뿐 감히 나오지 못했으므로 대규모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조조가 죽고 조비가 왕위에 오르자 장합은 좌장군으로 임명되었고, 다시 조비가 제위에 오르자 막후에 봉해졌다. 그 후 조진과 함께 오를 공격할 때, 장합은 함대를 통솔하여 요새를 점령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
조비가 죽고 조예가 즉위하자 제갈량이 북벌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위주 조예는 하후연의 아들인 하후무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내보냈으나 패퇴하자, 다시 조진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촉군을 막게 했다. 그러나 그 역시 역부족으로 패퇴했다.
위주 조예는 어쩔 수 없이 낙향한 사마의를 발탁하여 제갈량의 대군을 막게 했다. 이때 사마의가 선봉장으로 한 사람을 추천하며 함께 가기를 청했다. 위주 조예가 기꺼이 허락하며 그가 누구냐고 물었다.
“장합입니다. 그가 있으면 충분히 대임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가장 으뜸가는 장재(將材)가 어전에서 장합을 선봉장으로 쓰겠다고 한 것이다. 가히 장합의 용맹과 기량을 짐작할 만하지 않은가. |
제갈량이 이끄는 촉군이 기산으로 침공, 촉의 선봉장 마속(馬謖)이 가정의 요지 길목을 버리고 산 위에 포진하자, 장합은 산 아래를 포위하여 촉군의 식수로를 막아버리고 불을 질렀다. 사방에서 불길이 오르자 촉군은 더 견디지 못하고 달아나기 시작했고, 장합이 이끄는 위군은 촉군을 추격하여 격파했다.
마속의 실패로 한중으로 물러났던 제갈량이 다시 기산으로 출전했을 때, 장합은 촉군 속에 뛰어들어 현란한 창검술을 발휘하며 무용을 떨쳤다. 산위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제갈량은 ‘전에 장비가 장합과 한번 크게 싸웠다는 말을 듣고, 설마 장합이 장비의 적수가 되겠는가 생각했는데, 오늘 보니 장합은 참으로 용맹스럽고 두렵구나.’하면서 장합을 제거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결국, 장합은 사마의의 지시에 따라 퇴각하는 촉군을 추격하다가 제갈량의 계책에 걸려 목문도에서 촉군의 화살에 맞아 최후를 맞이한다. 이 소식을 듣고 사마의는 슬퍼해 마지않으며 ‘장합이 죽게 된 것은 모두 내 잘못이다.’라고 자책하며 군사를 돌려 낙양으로 돌아간다. 위 황제 조예는 장합에게 장후(壯侯)란 시호를 내린다.
위의 무장 장합, 하후돈이나 서황 허저 전위 등 기라성 같은 고참 장수들이 모두 사라진 후에 홀로 남아서 조조와 조비, 조예까지 3대째 충성을 다한 용장이다. 무예가 출중했고 군사 통솔에도 능했으며, 위급사태에 빠져도 임기응변으로 적절히 대응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위(魏)에서 조조 이래 최고의 지휘관이라 할 수 있는 사마의가 제갈량에 맞서 출전할 때마다 장합을 선봉으로 세웠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으리라. 그리고 장합은 결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늘 용감하게 잘 싸우지 않았던가.
■ 제2장 위 나라의 인물들 (2-17) 사마의의 두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
삼국지의 최종 승자는 사마 씨라고 할 수 있다. 사마의의 두 아들과 손자가 조조의 후손들로부터 제위를 찬탈하고, 촉(蜀)과 오(吳)를 차례로 병합하여 삼국통일을 이뤄내기 때문이다. |
사마의는 자신을 닮아 영용(英勇)한 두 아들을 늘 전쟁터에 데리고 다녔다. 자신의 뒤를 이어 웅지를 펼 인물로 키워내기 위해서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사마의의 두 아들 사마사(司馬師)와 사마소(司馬昭)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위(魏) 황실의 실력자 조상과의 권력다툼에서 패배하여 낙향, 권좌에서 소외되어 절치부심하던 사마의는 조상이 황제를 모시고 사냥을 떠나자, 드디어 기회를 포착, 두 아들과 함께 전격적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권력을 움켜쥐게 되었다.
실권자가 된 사마의는 조상(曹爽) 형제와 그 가솔들을 처단하고 위 황제로부터 승상에다 구석(九錫)의 영예까지 받았다. 사마의가 늙어서 병들어 죽자, 그의 맏아들 사마사가 대장군이 되어 실권자의 지위를 이어 받았다. 작은아들 사마소는 표기상장군이 되어 형의 뒤를 받쳐주었다.
그 무렵 오의 손권이 죽자, 사마사는 오를 정벌할 군사를 일으켰다. 왕창과 관구검에게 군사를 나눠주면서 아우 사마소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사마소는 처음에 다소 고전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제갈각이 이끄는 오군과 강유가 이끄는 촉군의 연합 공격을 잘 막아내어 사마의의 죽음 이후 다소 흔들렸던 형제의 지위가 더욱 탄탄해졌다.
위주(魏主) 조방은 사마사가 칼을 차고 궁궐에 들어오면 옥좌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로 공포에 떨었다. 결국 조방은 국구 장즙을 비롯한 하후현 이풍 등의 중신들에게 울면서 손가락을 깨물어 용봉적삼에 쓴 밀지를 주며 사마사 형제를 주살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곧바로 그 정보를 입수한 사마사는 세 사람이 미처 궁궐에서 빠져나가기도 전에 군사를 이끌고 와서 이들을 추궁, 결국 장즙의 몸에서 밀지를 찾아낸다. 사마사는 세 사람을 저자거리에 끌어내 목을 베게 한 후 그 가솔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아울러 신하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위주 조방을 못 본 체하고, 장즙의 딸 장 황후를 비단으로 목 졸라 죽이게 했다. 오래 전에 조방의 할아버지인 조조가 복 황후를 죽였을 때와 똑같은 방법으로.
이제 사마사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마사는 다음날 위주 조방을 쫓아내고 조비의 손자인 조모를 제위에 오르게 했다. 조모는 사마사에게 먼저 절을 하고 전각에 오를 만큼 이름뿐인 천자였으니, 이때 조조가 세운 위는 이미 망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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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몇몇 무장들이 반기를 들자, 사마사는 왼쪽 눈 밑에 있던 혹을 짼 직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출정, 반란군을 평정했다. 그 와중에 다시 그 눈을 다친 사마사는 마침내 자리에 누웠고, 얼마 안 있어 죽고 말았다. 그는 죽기 전에 아우 사마소에게 대장군의 인수를 맡기고 뒷일을 당부했다.
형으로부터 대권을 물려받은 사마소는 위주 조모로부터 선위(禪位)를 받으려는 시도를 했지만 아직도 위 조정에 충성하려는 세력이 남아있었다. 진동대장군 제갈탄이 반기를 들고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사마소의 심복인 종회의 계책에 빠진 제갈탄은 수춘성에 갇혀버렸고, 그를 도우러 온 오군도 미덥지 못해 결국 수춘성이 함락되어 처형되고 말았다.
이를 틈타 촉의 강유도 군사를 이끌고 위를 침공했지만 사마소는 등애 부자를 보내 막아내게 했다. 사마소는 물러가는 강유를 쫓아 촉을 공략하려 했으나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위 황제 조모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도성을 비울 수가 없었다.
사마소는 위주 조모에게 구석(九錫)을 청했다. 내심 싫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구석을 내린 조모는 분한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고 어림군을 이끌고 사마소를 죽이려 나섰다가 오히려 사마소의 군사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황제가 피살된 것이다. 사마소는 다시 조조의 증손자뻘인 조환을 새 천자로 세웠다. 이가 바로 위의 마지막 황제이다.
이때 사마소는 드디어 때가 이르렀다고 판단, 종회를 시켜 강유를 치게 하고, 등애를 시켜 다른 길을 통해 촉의 성도로 쳐들어가게 했다. 촉장 강유가 국경에서 분전하고 있는 동안 환관 황호에게 놀아난 촉주 유선(劉禪)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등애에게 항복하고 말았다(262년). 유비가 천신만고 끝에 세운 촉은 그 아들 대에 멸망하고 마는 것이다.
위의 대신들은 촉을 병합한 사마소를 왕으로 봉해야 한다는 표문을 올렸고, 아무 실권이 없는 위주 조환은 그들이 하자는 대로 사마소를 진왕으로 봉했다. 진왕 사마소는 큰아들 사마염을 세자로 세웠다.
여담 하나. 죽림칠현(竹林七賢) 중에서 완적(阮籍)이라는 재사(才士)가 있었다. 시문과 거문고 연주 솜씨가 뛰어나고, 특히 술을 좋아해 두주(斗酒)를 불사했다. 그의 부친 완우는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조조의 속관을 지냈다. 완적의 명성을 흠모해오던 사마 씨 형제가 완적에게 조정으로의 출사를 요청했다. 자유롭게 살기를 원했던 완적은 조정의 부름을 받을 때마다 완곡하게 거절을 했는데, 이번에는 차마 뿌리칠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종사중랑직을 맡았다. |
그 후 대권을 잡은 사마소가 완적의 딸을 자신의 아들 사마염과 결혼시키려고 사자(使者)를 보내왔다. 이번에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차마 내놓고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완적은 궁리 끝에 두 달 동안 내내 술에 취해있음으로 해서 사자로 하여금 아예 말을 꺼낼 기회를 주지 않아 위기를 모면했다.
그 후에도 사마소의 심복인 종회가 여러 번 시사(時事)에 대해 묻고 이를 꼬투리 잡아 죄를 물으려 했지만, 완적은 술로 인해 화를 면했다고 한다.
각설하고, 제위에 못지않은 권세를 누리던 진왕 사마소, 갑작스런 풍병으로 쓰러졌다. 다음날 중신들이 문안을 갔을 때 중풍으로 말을 할 수 없었던 그는 세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숨을 거두었다.
침착한 성격으로 병서에 밝았던 형 사마사는 아버지 사마의 사후의 혼란을 수습, 안전하게 동생 사마소에게 권력을 넘겨주었고, 통솔력이 뛰어나고 권모술수에 능했던 동생 사마소는 다시 그 권력을 탄탄하게 다져서 맏아들 사마염에게 물려준 것이다.
■ 제2장 위나라의 인물들 (2-18) 촉을 평정한 두 명장 '종회와 등애'
종회(鍾會)와 등애(鄧艾)는 위나라에서 사마소 시대를 함께한 발군의 지장(智將)들이다. 태부 종요의 막내아들인 종회는 명문 집안 출신으로 계책에 밝은 참모형 무장이고, 등애는 전방에서 잔뼈가 굵은 지휘관형 무장이다.
사마사가 대장군의 지위를 아우 사마소에게 물려주고 죽자, 위주(魏主) 조모는 이 기회에 사마소의 권한을 약화시켜보려고 사마소에게 계속 허창에 머무르면서 오의 침입에 대비하라고 했다. 그러나 사마소는 참모인 종회의 조언대로 군사를 이끌고 와서 낙양가에 진을 쳤다. 깜짝 놀란 조모는 사마소의 벼슬을 더 높여주었다. 종회의 승부수가 성공을 거둔 것이다.
또 위의 장수 제갈탄이 수춘에서 사마소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나자, 종회는 제갈탄을 구원하러온 오의 장수를 계책으로 귀순시키고 제갈탄을 수춘성에 몰아넣어 목을 베도록 하는 등 반란 진압에도 큰공을 세웠다. |
한편, 전방에 있는 등애는 촉장 강유의 침공을 잘 막아내었다. 위(魏) 황제 조모가 죽자 실권자 사마소는 조환을 위 황제로 세웠는데, 이때 촉의 강유가 또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이번에도 등애가 나서서 잘 막아내어 그의 지위와 명성은 더욱 확고해졌다.
드디어 위의 사마소는 때가 이르렀다고 판단, 종회와 등애에게 대군을 나누어 주며 촉을 정벌하게 했다. 등애는 산길을 뚫으며 지름길로 성도(成都)로 향하기로 했고, 종회는 국경에서 촉장 강유를 쳐부순 후 서촉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등애는 아들 등충을 먼저 보내 산허리를 자르고 다리를 놓아 길을 만들면서 20여일 만에 7백리를 전진해 성도 인근에 다다랐다. 촉주 유선은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에게 7만 군사를 주며 등애군을 막게 했다. 제갈첨은 처음엔 잘 싸웠으나 결국 패하여 성에 갇혀버렸다. 그러다가 오의 구원병이 오기 전에 아들과 함께 성급하게 성에서 나가 싸우다가 둘 다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촉주 유선은 너무도 쉽게 항복을 결정하고 항서(降書)와 함께 촉의 옥새를 등애에게 먼저 보내고, 관(棺)을 싣고 스스로 몸을 묶어 아들 및 대신들과 함께 걸어가 등애에게 무릎을 꿇었다.
등애는 촉주 유선이 싣고 온 관을 불태우고 결박을 풀어주며 안심시켰다. 등애는 촉주에게 표기장군 벼슬을 내리고 나머지 벼슬아치들에게도 적절한 벼슬을 내렸다. 그런 다음 방을 붙여 촉의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전방에서 종회와 싸우고 있는 강유에게 사람을 보내 항복을 권했다.
검각에서 종회의 위군을 막아내고 있던 촉의 장수 강유는 촉주의 항복 소식을 듣고 억장이 무너졌다. 강유는 등애와 사이가 좋지 않은 종회를 부추겨서 후일을 도모해볼 생각으로 ‘만약 장군이 등애였다면 나는 끝까지 싸웠을 것이다’고 하며 종회에게 항복했다.
등애가 촉주의 항복을 받자 초조해진 종회는 촉장 강유가 자신에게 항복한 데다 등애보다 자신을 더 알아준다는 말에 고무되어 강유와 화살을 꺾어 맹세하며 의형제를 맺었다. 한편, 등애는 낙양에 있는 사마소에게 승전 소식을 올렸다.
"이제 촉을 평정하였으니 여세를 몰아 오를 쳐야할 것입니다. 먼저 농우의 군사 2만과 촉병 2만을 보내 준비를 하게 하십시오. 촉주 유선을 낙양으로 끌고 가면 오에서 겁을 먹게 되니 우선 부풍왕으로 봉하고 그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내리는 체 하십시오. 그러면 오는 금방 우리의 품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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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권자 사마소는 등애가 이런 엄청난 일을 제멋대로 처결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났지만, 우선 달래기 위해 등애의 직급을 올려주면서 '그 일은 천자께 아뢴 뒤에 할 일인 만큼 함부로 처결하지 마라' 는 답신을 보냈다.
그러나 등애는 밖에 나가 있는 장수는 임금의 말도 듣지 않을 때가 있다며, '급한 일은 제가 알아서 행할 것인 바, 부디 너그럽게 보아 주십시오' 라는 내용의 글을 다시 사마소에게 보냈다. 이때 종회가 '등애는 촉인들의 환심을 사는 일만 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반역을 할 것입니다’라고 표문을 올렸다.
사마소는 사자를 종회에게 보내 등애를 잡아들이라 명하고, 자신이 친히 장안까지 따라가겠다고 했다. 이에 한 신하가 ‘종회의 군사는 등애의 군사보다 몇 배나 더 많습니다. 종회더러 등애를 잡아라 해놓고 왜 장안까지 몸소 나가시려 합니까?' 하고 묻자, 사마소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지금 등애 때문에 나가려는 것이 아니라 종회 때문에 나가려는 것이다."
사마소의 정치감각이 참으로 비범하지 않은가. 종회는 감군(監軍) 위관에게 수십 기를 주며 등애 부자를 잡아오게 했다. 위관은 한밤중에 성도에 잠입, 잠자고 있던 등애 부자를 묶어 수레에 실었다.
등애의 부하들이 저항하려고 했으나 종회의 대군이 몰려오자 모두 도망쳤다. 종회는 등애의 머리를 채찍으로 내리치며 화풀이를 하고는 수레를 낙양으로 보냈다. 이때 사마소가 군사를 이끌고 장안에 와있다는 소식이 오자, 종회는 사마소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드디어 반역을 결심한 종회, 강유에게 말했다.
"내 결심은 섰소. 잘 되면 천하를 얻을 것이고, 못되어도 유비처럼 서촉을 지키며 살 것이오."
다음날 아침, 종회는 '조정의 곽 태후가 돌아가시면서 내게 사마소는 천자를 죽인 대역무도한 자이니 그를 죽이라는 유조(遺詔)를 남기셨다' 고 하면서 부하장수들에게 자신을 따를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종회의 부하장수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종회는 이들이 쏜 화살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40세였다. 이에 강유도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종회가 피살된 후, 군사들이 수레를 추격해 등애를 풀어주었으나, 성도로 돌아가던 등애 부자는 감군 위관이 보낸 군사들에게 잡혀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
냉정하게 판단해보면, 종회는 강유의 꼬드김과 사마소의 의심 때문에 반역을 했고, 등애는 월권은 했으되 반역을 하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촉 평정의 대업을 이룬 발군의 두 명장, 서로 반목한 것이 원인이 되어 결국 둘 다 목숨을 잃고 말았다.
■ 제2장 위나라의 인물들 (2-19)머리는 용, 꼬리는 뱀 '조조의 후손들' 1)조비 2)조예 3)조방 4)조모 5)조환
조조가 죽자 그의 맏아들 조비가 위왕을 계승했다. 조비는 위왕이 된 지 일 년도 채 안 되어 후한 마지막 황제인 헌제로부터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제위를 물려받아 위 황제가 되었다. 이에 한중왕 유비와 오주 손권도 차례로 황제에 올랐다.
위 황제 조비는 찬탈자라는 비난을 받기는 했으나 재위기간 중 대과(大過)는 없었다. 그는 원소의 둘째며느리였다가 자신과 결혼한 견 부인과의 사이에 태자 조예를 두고 있었다. 재위 7년 만에 병을 얻은 그는 죽기 전에 조진과 조휴, 사마의와 진군 네 중신을 불러 조예를 잘 보필해줄 것을 당부하고 숨을 거두었다.
네 중신 중에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사마의였다. 일찍이 조조는 ‘사마의가 이리처럼 고개를 뒤로 틀 수 있는 낭고상(狼顧相)이어서 반역을 할 가능성이 농후하니 절대로 병권을 맡기지 말라.’고 했었다. 조비는 재위기간 동안 사마의에게 군사 일을 맡기지 않았다.
조예가 즉위하자, 사마의가 서량을 지키겠다고 나섰고, 조예는 별 생각 없이 허락했다. 이때 북벌을 계획하고 있던 촉의 제갈량은 사마의를 껄끄럽게 생각, 사마의가 반역을 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위주 조예는 사마의를 불러들여 병권을 뺏어버렸다.
제갈량이 국경을 침범해오자, 위주 조예는 하후무와 조진을 차례로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막게 했으나 모두 패퇴하였다. 어쩔 수 없이 조예는 사마의를 다시 복권, 총사령관으로 기용하여 제갈량을 막게 했다. 사마의가 제갈량의 수차례에 걸친 침공을 모두 막아내고,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숨을 거두자 드디어 전쟁도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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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이 끝나자, 위주 조예는 사치와 향락, 주색에 빠져들었다. 연일 토목공사를 벌여 많은 궁궐과 전각을 새로 지었다. 조예는 방탕한 생활 끝에 서른여섯의 나이에 죽고 말았다.
그는 죽으면서 사마의에게 여덟 살짜리 태자 조방을 탁고(託孤)했다. 사마의는 황실의 친족 조상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해 낙향했으나, 쿠데타를 일으켜 조상 형제를 주살하고 다시 실권을 잡았다.
이제 사마의의 권세를 넘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마의가 노환으로 죽자, 맏아들 사마사가 대장군이 되어 실권자의 지위를 이어받았다. 이때 오와 촉의 침입이 있었으나 사마사와 사마소 형제가 모두 막아내니 두 형제의 권세는 더욱 탄탄해졌다.
위주 조방은 나이가 들어서도 사마사가 궁궐에 들어오는 것만 봐도 불안에 떨었다. 결국 조방은 장 황후의 아버지인 장즙에게 사마사를 죽이라는 밀조를 내렸다. 그러나 그것이 사마사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위주 조방은 사마사에게 무릎까지 꿇으며 용서를 빌었으나,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만다. 장즙과 장 황후는 사마사의 지시로 죽임을 당한다.
새로이 황제로 옹립된 조모는 사마사에게 먼저 절을 하고 천자의 자리에 오를 정도였으니 사실상 이때 위는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무렵 사마사는 눈병이 생겨 몸져누웠다. 사마사가 눈병이 덧나서 죽자, 아우인 사마소가 대장군의 지위를 이어받았다.
위주 조모는 이 기회에 사마소의 권한을 약화시켜 보려고 사마소에게 계속 허창에 머무르면서 오의 침입에 대비하라고 했다. 그러나 허수아비 황제의 명을 들을 사마소가 아니었다. 사마소가 군사를 이끌고 낙양 가에 진을 치자, 깜짝 놀란 위주 조모는 사마소의 벼슬을 더 높여주었다.
이때 위의 무장 제갈탄이 사마소의 전횡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오에서도 원군이 출동하고 촉의 대장군 강유도 지원군을 보냈으나 사마소가 이들을 모두 막아내었다. 위주 조모는 강청에 못 이겨 대장군 사마소에게 구석(九錫)의 특전을 내렸다. 분함을 참지 못한 조모는 어림군을 이끌고 사마소에게 대항했다가 도리어 피살되고 만다.
조환이 사마소에 의해 위 황제로 옹립되었다. 조비의 손자뻘이었다. 그리고 사마소가 보낸 두 장수 등애와 종회가 촉을 멸망시켰다. 그때서야 때가 이르렀다고 판단했는지 사마소는 자신을 진왕(晋王)으로 봉해줄 것을 요구했고, 위 황제 조환은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진왕 사마소는 맏아들 사마염을 세자로 세워놓고 얼마 안 있어 중풍으로 죽었다. |
위 황제 조환은 진왕 사마염이 노골적으로 제위를 탐내는 데다, 사마염의 신하들이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위압적으로 선양을 강요하니 결국 제위 자리를 내주고 만다(265년). 45년 전에 할아버지 조비가 행했던 똑같은 방식으로 이번에는 조환이 신하에게 당한 것이다.
조조는 죽기 전에, 말(馬) 세 마리가 한 구유에서 여물을 먹는 꿈을 자주 꾸었다. 조조는 그 꿈이 늘 마음에 걸렸으나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마(馬) 씨 중에 자신에게 반기를 든 마등은 이미 죽었고, 그의 아들 마초와 조카 마대는 유비에게로 갔으니 큰 위협이 될 수가 없었기에.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실체가 밝혀진다. 구유[槽]는 조(曹) 씨를 뜻하므로 그 꿈은 즉 사마(司馬) 씨 3부자(三父子)가 조 씨의 여물을 먹는 것, 즉 찬탈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천하의 조조도 그 꿈이 그런 의미인 줄은 어디 상상이나 했으랴.
삼국지 최고의 영웅 조조가 세운 위는 그의 증손자 대에서 사마의의 손자한테 빼앗기고 만다. 폐주 조환은 진류왕으로 강등되어 도성에서 쫓겨난다. 만일 조비나 조예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오래 살았더라면 신하에게 제위를 뺏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랴. 조비가 신하로서 한의 제위를 빼앗은 것도, 그의 손자인 조환이 다시 신하인 사마염에게 위의 제위를 빼앗긴 것도 모두 엄연한 역사인 것을.
■ 제3장 오(吳)나라의 인물들 (3-1) '넘버 투' 에 만족한 수성의 명군 '손권'
삼국지의 세 영웅인 조조 유비 손권이 함께 대학입시에 응시한다고 가정을 해보자. 수능시험에서는 틀림없이 머리가 좋은 조조가 1등을 할 것이고, 내신 성적은 도덕 교과서 같은 유비가 1등을 할 것이다. 손권은 아마도 두 가지 모두에서 2등을 하리라.
손권(孫權). 큰 입과 네모진 턱, 푸른 빛 광채가 도는 눈을 가진 붉은 수염의 사나이. 중원의 패권을 놓고 조조와 유비가 마지막까지 불꽃 튀는 공방을 벌이고 있을 때, 느긋하게 구경하며 가장 오랫동안 권좌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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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처럼 비상한 머리를 가진 수재도 아니고, 유비처럼 은근히 사람을 끄는 매력을 지닌 모범생도 아닌, 그저 우등생 정도의 실력을 지닌 인물이다. 어디서 많이 듣던 ‘위대한 보통사람’이라고나 할까.
위와 촉의 틈바구니에서 오나라가 편안하게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지리(地利), 즉 양자강이라는 천연적인 방어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고, 더불어 손권의 뛰어난 지도력도 빼놓을 수 없으리라. 수성의 명군으로 꼽히는 손권의 출신배경과 통치스타일(leadership), 그리고 그의 실책을 살펴보자.
손권의 출신배경을 설명하려면 먼저 그의 아버지에 대한 얘기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양자강 남쪽에 손견이라는 토호(土豪)가 있었다. 손자병법으로 유명한 전국시대의 전술가 손무의 후예이다. 그 피를 타고 났는지 용감무쌍하고 책략도 뛰어났다.
손견은 후한 말 혼란기에 황건적을 토벌하여 명성을 얻었다. 또 동탁을 무찌르는 연합군에도 가담하여 용맹을 떨쳤다. 선봉으로 도성에 입성하면서, 운 좋게도 잃어버린 한의 옥새를 궁궐 우물에서 건져 올리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큰 뜻을 품고 고향으로 향하던 중, 저지하는 형주의 유표와 격전을 벌이다 전사하고 만다.
그의 큰아들 손책이 뒤를 이었다. 그도 아비를 닮아 영웅의 기개(氣槪)를 타고 나 통이 크고 무예도 출중해 강동의 소패왕(小覇王)으로 불리었다. 부업(父業)을 이어 종횡무진 활약하며 강동지역을 모두 평정했다.
그러나 성격이 너무 호방하고 저돌적이었다. 북방에서 조조가 원소와 싸우고 있을 때 대담하게도 조조의 본거지를 기습해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도 전에 자객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고 말았다.
손권은 숨을 거두는 형 손책으로부터 19살 때 후사를 부탁받는다. 그 후, 71살까지 장수하며 52년간 오를 훌륭하게 지켜낸다. 아버지 손견과 형 손책이 창업(創業)의 인물이라면 손권은 수성(守成)의 교본 같은 인물이다. 창업은 군중을 휘어잡는 탁월한 쇼맨십이 있어야 하고 아울러 천운도 따라야 하지만 수성은 본인의 역량이 중요할 뿐 천운이 차지하는 요소는 아주 적다.
손권은 항상 신중하고 겸허했으며 참을성이 강했다. 그가 중원을 넘보지 않고 오직 물려받은 땅을 지키기만 한 것은 결코 남보다 앞서려 하지 않고 항상 한 발 물러서서 차선책을 구하는 그의 ‘넘버 투(number two)’ 정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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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에게 충성하던 장소와 주유를 사부(師父)의 예로 대하였고 한번 발탁한 사람은 끝까지 신뢰했다. 능히 의심할 여지가 있는 제갈량의 친형인 제갈근을 끝까지 신뢰하고 대임을 맡긴 것은 그의 이러한 점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강북을 제패한 조조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양자강을 넘어오려 하자, 신중한 성격의 그가 주화파를 물리치고 단호히 싸우기로 한 것을 보면 그의 외유(外柔) 속에는 강인한 의지가 숨겨져 있는 듯하다. 결국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 5만 명이 조조의 백만 대군을 적벽에서 궤멸시키지 않았는가.
그러나 손권은 침략한 위군을 물리치기만 할 뿐 패주하는 조조를 쫓아 중원의 패권을 넘보지는 않았다. 만약 그의 아버지 손견이나 형 손책이었으면 어떠했을까? 틀림없이 여세를 몰아 조조를 추격하여 위의 본거지로 쳐들어갔을 것이다. 그랬다면 삼국지의 스토리는 사뭇 달라졌으리라.
손권은 조조의 아들 조비가 후한 황제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 제위를 물려받아 위 황제가 되자, 스스로 신하라고 칭하는 등 때에 따라 몸을 굽힐 줄도 알았다. 그가 오나라의 기라성 같은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한 것을 보면 그의 용인술도 흠잡을 데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나라 안의 일은 장소와 장굉, 제갈근 등의 조언을 받아 잘 처결했다. 또 나라 바깥의 일도 주유 같은 명장들에게 맡겨서 잘 처결했다. 조조의 백만대군은 주유와 노숙이 물리쳤고, 여몽은 오의 필생의 숙원이던 형주를 탈환했다. 또 육손은 촉 유비의 거국적인 침공을 잘 막아내었다.
그러나 손권에게도 실책은 있었다. 위를 공략하고 있던 촉의 관우를 기습해 형주를 빼앗고 그를 참수한 것은 국지적인 안전에는 도움이 될지언정 대국적인 견지에서 보면 결코 잘한 처사라고는 볼 수 없다. 오와 촉은 합심해서 강대국인 위를 견제하는 것이 순리였기 때문이다.
지방정권이 장래를 내다보지 않고 눈앞의 안전만을 도모한다면 결국은 망하고 만다는 것은 역사가 가르쳐 주고 있는 교훈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촉의 제갈량이 앉아서 망하기보다는 꾸준히 중원을 위협하면서 생존의 활로를 찾으려고 한 것과는 좋은 대조가 된다.
또 있다. 수성의 명군도 늙으면 필부(匹夫)가 되는지, 집권 말기에 후계자 선택을 잘못하는 치명적인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장남 손등이 요절하자 왕부인 소생의 장남 손화를 태자로 세웠다가 차남 손패를 총애하는 등 갈팡질팡하다가 결국에는 번부인 소생의 어린 손량을 후계자로 삼았던 것이다. |
조조 또한 후계자를 선정할 때 장남 조비와 시문에 뛰어난 셋째 조식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지만, 사정(私情)보다는 대의명분을 중요시해 결국 장남에게 대통을 물려주면서 위기를 벗어나지 않았던가.
수성의 명군으로 불리는 손권이 후계자 선정에서 원칙을 세우지 못하고 흔들리는 바람에 조정의 국론을 분열시켜 결국 오나라가 패망의 길로 들어서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는 것은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제3장 오나라의 인물들 (3-2) 손견의 4대천왕 '한당, 황개, 정보, 조무'
중국에는 4대 천왕이 있다. 홍콩에서 활약하고 있는 '유덕화, 여명, 곽부성, 장학우' 를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1800년 전 중국에 이미 4대 천왕이 있었다. 회계에서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황제를 칭한 허창이라는 도적을 치기 위해 강동의 호랑이 손견이 의군을 모집했을 때 찾아온 네 장수 한당, 황개, 정보, 조무가 바로 그들이다. 원조(?) 4대 천왕인 셈이다.
한당(韓當), 자는 의공(義公). 곰의 어깨에 범의 허리를 갖춰 날렵하면서도 용력이 남달랐다. 가장 먼저 손견에게 달려왔으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고 특히 큰칼(大刀)을 잘 썼다.
황개(黃蓋), 자는 공복(公覆). 어려서 부모를 잃고 장작을 내다 팔며 가난하게 살았으나 서책을 가까이 하며 병법을 익혔다. 생각이 깊고 참을성이 많은 데다 쇠채찍 철편(鐵鞭)을 잘 썼다.
정보(程普), 자는 덕모(德謀). 지방의 관리 출신이며 외모가 수려했다. 무예와 지략에 고루 능했고, 특히 철척사모(鐵脊蛇矛)를 잘 써서 황개의 철편과 좋은 짝을 이루었다.
조무(祖茂), 자는 대영(大榮). 손견과 같은 오군 출신으로 용맹하고 지략이 뛰어났으며 책임감이 강했다. 손견의 심복장수로서 친위대를 이끌었으며 쌍칼(雙刀)을 잘 썼다. |
이들 4대 천왕은 손견을 주군으로, 이제 겨우 두 살인 아들 손책을 작은 주인으로 모시기로 의기투합했다. 실제로 이들은 큰아들 손책은 물론 그 뒤를 이은 작은 아들 손권까지 3대째 충성을 다한다.
무예가 출중하고 충성심이 강한 네 장수는 강동 일대의 도적들을 평정하며 무명(武名)을 떨쳤다. 이들이 중앙무대에 진출한 것은 공포정치를 일삼던 동탁을 토벌하기 위해 17제후들이 연합군을 구성했을 때였다. 장사태수 손견을 따라 연합군의 선봉으로 출전한 이들은 중원을 누비며 용감하게 싸워 후일 오나라 건국의 터전을 닦았다.
그러나 여기서 4대 천왕의 한쪽 날개가 꺾인다. 동탁 진영의 맹장 화웅이 손견의 진채를 야습(夜襲)했을 때, 친위대를 이끌던 조무는 손견에게 자신의 투구를 쓰고 피하도록 하고, 자신은 손견의 붉은 두건을 쓰고 적을 유인했다. 화웅의 군사들이 붉은 두건을 보고 뒤쫓아 왔다.
쫓기던 조무는 어느 민가에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역습을 시도했다. 그러다가 적장 화웅이 내리치는 대도에 맞아 말 아래로 굴러 떨어져 숨을 거두었다.
손견과 함께 10여 년 동안 범 같은 용맹을 떨치던 친위대장의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오오, 그대가 나를 대신해 죽었구나. 이제 어디서 그대의 영걸스런 용자(容姿)를 다시 볼 수 있으리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손견은 이렇게 탄식하며 목놓아 울었고, 4대 천왕의 한 축을 잃은 세 장수들도 함께 눈물을 흘리며 비통해했다.
궁궐의 우물에서 전국의 옥새를 주운 손견은 큰 뜻을 품고 강동으로 돌아오다 이를 저지하는 형주의 유표군과 전투를 벌였다. 여기서 적의 매복계에 걸린 손견은 무참히 전사하지만, 한당은 적장 장호를 큰 칼로 제압했고, 정보는 손견을 죽인 적장 여공을 한창에 찔러 죽였다. 또 황개는 쇠채찍으로 형주 최고의 맹장 황조를 사로잡았다.
이때 처음 전장에 따라나선 열일곱 살의 손책은 아비 손견의 수급(首級)과 사로잡은 적장 황조를 맞바꾸어 손견을 장사지내고 강동의 새 주인이 되었다. 남은 세 장수들은 손책과 함께 유요를 비롯한 엄백호, 왕랑 등 이 지역의 토호 군벌들을 모조리 평정했다.
그러던 중 자객의 습격으로 중상을 입은 손책은 아우 손권에게 후사를 맡기고 숨을 거두고 만다. 그 후 강북을 통일한 조조가 백만 대군을 이끌고 내려와 적벽대전이 벌어지자, 이제 노장이 된 세 장수들도 각각 맡은 자리에서 조조군과 맞서 싸웠다. |
정보는 부도독인 전부(前部) 도독으로 임명되어 대도독 주유와 함께 전군을 지휘하고 독려했다. 처음에는 아들 뻘인 주유가 상관인 대도독이 된 것이 못마땅하여 딴죽을 걸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주유의 인품에 반해 이렇게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유와 함께 있으면 마치 맛있는 술을 마신 것처럼 나도 모르게 취하게 된다."
한당은 조조군이 작은 배 20여 척으로 기습공격을 감행하자 주태와 함께 용감하게 싸워 이들을 패 퇴시켰다. 황개는 고육계(苦肉計)를 통해 조조에게 거짓 투항하여 화선(火船) 20척을 이끌고 위의 선단에 돌진함으로써 적벽대전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적벽대전 이후, 이들은 주로 후방을 지키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관우의 복수를 위해 유비가 대군을 이끌고 오로 침공했을 때 대장으로 활약한 한당을 마지막으로 이들의 이름은 삼국지에서 사라진다.
네 장수 중에서 가장 무장답게 죽은 장수는 손견을 대신해 죽은 조무이고,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한 장수는 고육계를 통하여 화공(火攻)을 성공시킨 황개이다. 가장 높은 지위까지 승차한 사람은 부도독에 오른 정보이고, 가장 안타까운 것은 넷 중에서 가장 오래 남아 활약한 한당의 아들 한종이 남긴 행보이다.
한당이 죽자, 손권은 그의 아들 한종에게 아비의 직책을 그대로 맡겼다. 그러나 한종은 군무(軍務)에는 신경 쓰지 않고 부녀자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이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손권의 문책이 두려웠던 한종은 식구들과 휘하 군사들을 이끌고 위에 투항해버렸다.
위의 장군이 된 한종은 자주 국경을 침범하여 오의 백성들을 괴롭히곤 했다. 그러다가 전투에 패하여 오 군에게 사로잡혔고 그의 수급은 손권의 묘에 제물로 바쳐졌다. 4대 천왕이 남긴 절대적 충성 행보와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오점(汚點)이 아닐 수 없다.
초창기 조조에게 하후돈, 하후연, 이전, 악진 등이 있었고 유비에게 관우와 장비, 그리고 조금 늦게 합류한 조운이 있었듯이, 강동의 손견에게도 이들 4대 천왕이 있었기에 후일 손책을 이은 손권이 삼국의 일 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후돈은 |
만일 삼국지연의가 유비의 촉을 정통으로 세우지 않고 강동의 오를 정통으로 세웠다면 어쩌면 이들 4대 천왕의 이야기가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못지않은 비중으로 더욱 흥미진진하게 각색되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제3장 오나라의 인물들 (3-3) 오나라 창업의 큰 별, 맹장 '태사자(太史慈)'
소설 삼국지에는 관우 장비 조운 등 무용(武勇)이 현란하게 기술된 촉의 장수와 달리, 위나 오의 무장들은 그러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유비의 촉을 정통으로 세웠기 때문이다. 오나라 창업에 큰 공을 세운 태사자 역시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한 장수들 중의 한 사람이다.
황건적 잔당의 우두머리인 관해가 군사 5만을 이끌고 북해성을 포위 공격하고 있을 때이다. 저 멀리서 단기(單騎)로 적진 속에 뛰어들어 적군을 닥치는 대로 창으로 찔러 넘기면서 성문 쪽으로 달려 들어오는 장수가 있었다.
태사자(太史慈)였다. 자는 자의(子義). 산동반도의 동래 태생으로 신의가 깊고 무예, 특히 창술과 활솜씨가 뛰어났다. 신장은 7척이었고 학문에도 정통했다.
고향을 떠나 요동지방에 나가 있으면서 늘 북해성 밖에 남아 있는 노모를 걱정할 만큼 효심도 깊었다.
북해태수 공융이 태사자의 지극한 효성과 뛰어난 무용을 흠모하여 늘 곡식과 의복을 보내 그의 노모를 보살펴주었기 때문에, 이를 안 태사자가 공융의 은혜를 갚고자 달려온 것이다. 공융은 유비에게 구원을 청하기로 하는데, 포위를 뚫고 유비에게 다녀올 사람이 없었다.
태사자가 자원했다. 그는 성에서 나와 활쏘기 연습을 하고 다시 성으로 들어가는 행동을 반복하여 적을 방심하게 한 뒤, 3일째 되는 날 드디어 공융의 밀서를 가슴에 품고 홀로 성을 박차고 나왔다.
달려드는 도적들을 무수히 활로 쏘고 창으로 찔러 포위망을 뚫으니 아무도 가까이 오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태사자의 눈부신 활약으로 유비는 구원군을 이끌고 올 수 있었고, 북해태수 공융은 황건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적장 관해의 몸은 관우의 청룡언월도에 두 동강이 났다. |
그 후 태사자가 강동의 실력자 유요의 막장으로 머무르고 있을 때, 강동의 소패왕으로 불리던 손책이 광무제의 사당에 제를 올리고 휘하 12장수와 함께 사당 아래에 있는 유요의 진채로 접근해 왔다. 이를 본 태사자는 겁 없게도 부장 하나만 데리고 손책을 추격했다. 바야흐로 태사자와 손책의 불을 뿜는 신기(神技)의 창술이 펼쳐졌다. 수십 합을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결국 양쪽 진영에서 구원군이 옴으로써 싸움은 끝이 났다. 유요를 패퇴시킨 손책은 태사자가 탐이 났다. 천하 제패의 포부를 가진 손책으로서는 당연한 소망이었다. 그는 성문의 동쪽만 비워두고 세 방향에서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 결국 동문으로 도망쳐 나오는 태사자를 사로잡았다.
손책은 스스로 진채 밖으로 나아가 손수 포승줄을 풀어주고 성심을 다하여 후대하니 자부심이 남달리 강한 태사자도 그 정성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태사자가 입을 열었다.
"제가 다시 돌아가서 흩어져 있는 유요의 패군(敗軍)들을 모아서 돌아오겠습니다. 저를 믿고 보내주실지…."
자기를 도로 놓아 달라는 말이었다. 원래 진중(陣中)에는 서로 속이고 속는 계략이 난무하는 법이니 적장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손책은 '귀공의 그 같은 정성이야말로 내가 바라는 바요. 떠나시되 기한은 내일 정오까지로 합니다. 그때까지는 돌아와 주시기 바라오.' 하며 쾌히 승낙했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가. 힘들여 사로잡은, 흠모하는 적장을 도로 놓아준 것이다. 여러 장수들은 태사자가 도망가려고 꾀를 부리는 것이라며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손책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그는 신의를 지키는 장부(丈夫)다.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하고 자신 있게 말했다.
이튿날 정오, 태사자는 부하 천여 명을 이끌고 돌아왔다. 그때부터 태사자는 명실상부한 손책의 사람이 되어 강동 일대를 평정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그의 활솜씨는 귀신같았다. 백발백중이었다. 동오의 덕왕이라 자칭하는 엄백호를 칠 때, 적의 장수 하나가 멀리 성 위에서 한 손을 나무기둥에 대고 서있는 것을 본 태사자는 가만히 활을 꺼내면서 '내 저놈의 손등을 뚫어놓으리라!' 하고 말했다. |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화살이 날아가 적장의 손등을 꿰뚫었다. 이를 보고 사기가 오른 손책의 군사들은 단숨에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 엄백호의 군사들을 일망타진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손책이 죽고, 아우 손권이 뒤를 이어 오를 통치하면서부터 태사자의 활약상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 무렵엔 오에 뛰어난 장수들이 많아진 데다, 태사자의 다소 과단한 성격이 창업의 인물인 손책과는 잘 맞았으나 수성의 인물인 손권과는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태사자가 마지막 무용을 한껏 빛낸 전투는 적벽대전 이후, 손권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위의 합비성을 공략했을 때이다. 그곳은 조조군의 일급장수 장료(張遼)가 지키고 있어서 좀처럼 허물어지지 않고 있었다. 장료라면 '그 이름만 듣고도 우는 아이들이 울음을 뚝 그친다.' 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장수가 아닌가.
장료가 칼을 빼들고 손권에게로 달려들자, 이쪽에서는 태사자가 창을 꼬나 잡고 말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창과 칼의 눈부신 무용…. 그러나 한나절 동안 80합이 가깝도록 창칼을 맞부딪치며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에, 태사자는 합비성에 부하를 몰래 투입하여 성 안에서 불을 지르는 것을 신호로 쳐들어가기로 계책을 세웠다. 이윽고 불길이 치솟자, 그는 계획대로 성안으로 돌진했다. 그러나 아뿔사! 장료가 이 계략을 미리 알아채고 일부러 성안에서 불을 지르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태사자는 화살을 온 몸에 맞고 고슴도치처럼 되어 말에서 떨어졌다. 오군 구원병이 와서 그를 부축하여 병상에 뉘자, 그는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고 문병 온 중신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숨을 거두었다.
"대장부가 난세에 태어났으니 마땅히 석자 칼로 세상을 뒤덮을만한 공을 세워야 하는데, 이제 나는 그 뜻을 이루기도 전에 죽게 되었으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때 그의 나이 마흔하나. 지극한 효성과 신의, 그리고 결코 물러설 줄 모르는 용맹과 무용을 지닌 오나라 초창기 명장의 장렬한 최후였다.
■ 제3장 오나라의 인물들 (3-4) 도(道)에 통달한 선인(仙人) '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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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는 수호지, 서유기, 금병매와 함께 중국 4대기서(四大奇書)의 하나이다. 역사소설인 삼국지연의가 여기에 포함되는 것은 아마도 기이한 인물이 여럿 등장하는 점이 이유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신의(神醫) 화타를 비롯하여 환술(幻術)의 명인 좌자, 점복(占卜)의 대가 관로, 도(道)에 통달한 선인(仙人) 우길 등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신선으로 추앙받은 우길(于吉)의 행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자객의 습격으로 중상을 입은 강동의 소패왕 손책이 상처를 치료하고 있을 때, 하북의 강자 원소가 ‘함께 연합해 남북에서 조조를 치자’며 사신을 보내왔다. 조조의 본거지를 기습하여 중원을 제패하려는 야망을 불태우고 있던 손책은 이 제안을 쾌히 수락하고 원소의 사신을 접대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한창 연회가 무르익을 무렵, 갑자기 장수들이 수군거리며 일어나더니 우르르 연회장 아래로 내려갔다. 손책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곁에 있는 신하가 대답했다.
“신선으로 불리는 도사 한 분이 지금 연회장 아래에 와있습니다. 선술(仙術)로 여러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어 신망을 얻은 사람입니다. 장수들이 자리를 뜬 것은 그 분을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서입니다.”
손책은 자기가 다스리는 강동에 자기보다 더 숭앙받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시기심이 솟아올랐다. 연회장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니 학의 깃털로 짠 옷을 입고 손에는 명아주 지팡이를 든 노인이 서 있었는데, 그 앞에 수많은 백성들이 엎드려 그에게 경배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손책은 치솟는 분기를 더 이상 억누르지 못하고 호위병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저 늙은이를 묶어서 잡아오너라.”
군사들은 그 노인을 차마 묶을 수가 없어서 그냥 모시고 왔다. 손책이 매섭게 노려보며 "이 요망한 늙은이!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나서 민심을 어지럽히느냐? 네 정체가 뭐냐?" 하고 힐문했다.
우길은 꼿꼿이 서서 말을 받았다.
“나는 일찍이 순제 때 산에 들어가 ‘태평청령도’라는 신서(神書)를 얻어 그 비방으로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구하였소. 어찌 그런 나더러 민심을 어지럽힌다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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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순제 때 산에 들어갔다면 지금 네 나이가 2백 살이나 되었다는 말이냐? 그따위 요망한 거짓말에 내가 속을 줄 아느냐? 여봐라! 저 놈을 끌어내서 당장 목을 베어라!”
손책이 영을 내렸지만, 여러 중신들이 잔칫날이라며 극구 말리자 다음날 처치하기로 하고 우선 옥에 가두었다. 연회는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여러 중신들은 모두 입을 모아 우길을 죽이면 민심을 잃는다며 석방을 청원했다. 그러나 손책은 절대로 안 된다며 더욱 고집을 부렸다. 이때 중신 한 사람이 절묘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제가 알기로, 신선은 능히 바람을 일으키고 비를 부른다고 합니다. 요즘 가뭄이 극심하니 그로 하여금 비를 내리도록 해보라고 하는 것이 어떨까요? 만일 비가 오면 살려주고 안 오면 죽이고….”
손책이 무릎을 쳤다. 마침 몇 달째 가뭄이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그의 헛된 이름을 만천하에 드러내 보일 좋은 기회라 생각되었다. 날이 밝자, 손책은 제단 앞으로 우길을 끌어냈다.
“네가 진정 2백 년을 살아온 신선이라면 그 증거로 당장 비가 오도록 해보라. 만약 정오까지 비가 오지 않으면 너를 불에 태워 죽일 것이다.”
우길은 지그시 눈을 감고 제단 앞에 묵상처럼 앉아있었다. 사람들이 제단 주위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돌연 광풍이 불어오더니 사방에서 검은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마음이 급해진 손책이 황급히 영을 내렸다.
“정오가 다됐다. 그런데도 구름만 있을 뿐 비는 오지 않으니 즉시 저 요망한 늙은이를 불에 태워라!”
군사들은 제단 옆에 쌓아둔 장작더미 위에 그를 묶고 불을 붙였다.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잠시 후 뇌성과 함께 폭우가 양동이로 퍼붓듯이 쏟아졌다. 순식간에 장작더미의 불이 꺼지고 거리와 마을이 온통 물바다가 되었다.
비가 그쳤다. 사람들은 장작더미에 올라가 아직 숨이 붙어있는 우길을 부축해 내려왔다. 그리고 모두 그 앞에 고개를 숙였다. 이를 보고 두려움과 함께 다시 질투심이 솟구친 손책은 더욱 핏대를 올리며 호령했다.
“비가 오는 것은 하늘의 이치일 뿐, 저 늙은이가 한 것은 아니다. 어서 저 놈의 목을 베어라!” |
결국 우길의 목이 베어졌고, 잘려진 우길의 목은 시신과 함께 저자거리에 내걸렸다.
다음날 아침, 우길의 시신이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어리둥절한 손책이 막사를 향해 가고 있는데, 우길이 앞에서 웃으면서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손책은 칼을 빼들고 그를 내려치다가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가 깨어나자 어머니 오태부인은 도관(道館)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우길에게 용서를 빌라고 간청했다. 손책은 마지못해 도관을 짓고 제수(祭需)를 차리기는 했으나 절은 하지 않고 서있었다. 그때 제단 위에 우길이 나타나 크게 웃었다. 노한 손책은 칼을 빼서 우길을 향해 내려쳤으나 칼에 맞아 죽은 사람은 전날 우길의 목을 벤 바로 그 무사였다.
손책은 밤마다 우길의 망령과 싸우느라 나날이 쇠약해져갔다. 더구나 전에 입은 상처까지 덧나는 바람에 중태에 빠졌다. 스스로 명이 다했음을 느낀 그는 아우 손권을 불러 후사를 부탁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겨우 스물여섯이었다.
이 황당한 이야기 중에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일까?
진수(陳壽)가 쓴 정사 삼국지에는 손책이 자객의 습격으로 중상을 입고 죽는 것으로 나와 있고, 선인 우길을 죽인 사실은 주(註)에만 언급되어 있다. 우길이 실존인물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그가 2백년 가까이 살았다거나 도술로 비를 오게 하였다는 얘기는 아마도 지어낸 얘기리라.
여기서 확실한 것은 손책이라는 인물이 호방한 기개와 불같은 성정을 지닌 열혈남아였다는 사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최고 권력자는 재야(在野)에 자기보다 더 존경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다.
■ 제3장 오나라의 인물들, (2-5) 패기만만한 적벽대전의 영걸 ‘주유(周瑜)’
조조에게 순욱과 곽가가 있었고 유비에게 제갈량이 있었듯이 손권에게는 주유가 있었다. 오나라 최고의 명장이요 명참모인 주유, 안휘성의 명문호족 출신으로 자는 공근(公瑾)이다. 강동의 소패왕 손책과 동갑내기 친구였다가 후일 동서가 되었다. 그의 아내 소교는 손책의 아내 대교와 함께 미인으로 유명한 이교(二喬) 자매 중 동생이다. |
주유는 젊었을 때부터 귀공자 같은 풍모를 지녀 주랑(周郞)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는데 음악에 유난히 조예가 깊었다. 그는 행차 때마다 악단을 대동했기 때문에 오나라 병사들은 음악소리가 들리면 주유가 온 것을 알았다.
또 아무리 술에 취해도 연주가 틀리면 꼭 알아채고 악사 쪽을 돌아보았다. 그 때문에 악사들 사이에 ‘정신 바짝 차려라. 주랑이 돌아본다.’는 말이 회자되었다고 한다.
주유가 손책과 함께 오나라 창업의 기틀을 다져가고 있을 때, 불행히도 손책이 자객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손책은 임종에 이르러 아우 손권에게 대권을 물려주면서 이렇게 당부했다.
“나라 안의 일은 장소에게 묻고, 나라 밖의 일은 주유에게 묻도록 하라.”
주유는 새 주인 손권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했고, 손권은 그런 주유를 사부의 예로 대했다.
강북을 평정한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양자강까지 밀고 들어 왔을 때 오(吳)의 국론은 결전이냐 항복이냐로 극심하게 분열되어 있었다. 손권은 주유에게 의견을 물었고, 주유는 조조군의 약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면서 항전을 주장했다.
“조조가 강북을 평정했다고 하나 아직도 변경이 불안한 상태이므로 오래 버티지 못하며, 조조군은 대부분 북방 출신이라서 수전(水戰)에 약하다. 그리고 조조군은 남쪽 기후에 익숙하지 않아 풍토병에 시달리고 있어서 전력이 많이 약화되었다. 또, 조조군이 백만 명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20만 명 정도인데, 그것도 원소와 유표의 항병(降兵)까지 포함한 숫자이다. 그리고 조조군은 보급로가 너무 길어서 군량과 마초의 조달이 여의치 못하며, 지금은 겨울철이라 양자강을 건너기가 쉽지 않다.”
오군 최고의 전략가답게 조조군의 약점을 정확하게 지적하면서 수전에 익숙한 오의 정예군 3만 명과 육군 위주의 유비군 2만 명 등 5만 연합군으로 능히 조조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마침내 손권은 ‘누구든지 앞으로 항복을 말하는 자는 이와 같이 되리라’하면서 칼로 탁자를 내려쳐 두 동강을 내며 싸우기로 결정을 내린다.
주유는 누구에게나 호감을 샀지만 원로장군 정보(程普)와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정보는 창업주 손견 이래 3대째 활약한 장수로, 어려서 애송이처럼 보이는 주유가 승승장구하는 데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
정보는 가끔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주유는 더욱 겸손한 자세로 선배 장군을 성심으로 대했고, 마침내 정보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었다. 마음이 돌아선 정보는 주위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주유와 함께 있으면 마치 오래 묵은 술을 마실 때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취하게 된다.”
원로 대선배의 이러한 찬사야말로 주유의 인품과 리더십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척도가 아니랴. 또 노장 황개가 적벽대전 직전에 주유에게 온몸이 으깨어지도록 매를 맞는 고육지계(苦肉之計) 책략에 자원한 것도 주유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적벽대전에서, 주유는 먼저 방통을 파견하여 조조의 선단을 서로 쇠사슬로 묶게 한 다음, 노장 황개가 사항계(詐降計)를 펼쳐서 화공(火攻)으로 조조의 선단을 잿더미로 만들고 곧바로 정예군을 투입하여 조조군을 여지없이 괴멸시킨다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결국, 그의 과단한 성품과 뛰어난 지략이 결실을 이루어, 조조의 백만대군은 여지없이 참패하여 대부분 불에 타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고 조조는 패주했다. 주유는 적벽대전의 최고 영웅으로 후세에 길이 빛나는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불행은 바로 다음에 찾아왔다.
적벽대전 때는 제갈량과 함께 지모를 모았으나 그 전리품인 형주(荊州)는 재빠르게 움직인 제갈량에게 선수를 뺏기고 만 것이다. 주유는 형주를 다시 뺏어오기 위해 유비군과 싸우다가 화살에 맞고 만다. 중상을 입은 채 무리하게 전투를 계속하던 주유, 마침내 상처가 도져서 숨을 거둔다. 온건파인 노숙을 후임 도독으로 추천하고서….
삼국지 연의(演義)에는 주유가 제갈량과 지모를 다투다 패하여 분사(憤死)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또 다른 야사에는 주유가 쟁(箏)이라는 악기를 잘 다루는 한 기생에게 빠져 황음(荒淫)하다 죽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아마도 촉을 정통으로 세웠기 때문에 주유의 죽음을 그렇게 매도한 것으로 보인다. 화살 독에 의한 사망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오나라 창업에 공을 세운 영걸들은 거의 다 일찍 죽었다. 손견이 서른일곱, 그의 맏아들 손책이 스물여섯, 명장 태사자가 마흔, 그리고 주유가 이제 서른여섯에 죽고 말았으니. |
오주(吳主) 손권은 주유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 ‘아, 이 무슨 날벼락인가. 이제 나는 누구를 의지한단 말인가!’하며 크게 탄식했다.
주유는 오나라의 국운을 좌지우지할 만한 대들보였다. 그는 서촉을 공략하여 천하를 조조와 함께 둘로 나누고 장차 중원을 도모하려는 웅대한 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중도에 죽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실제로 오나라는 주유가 죽고 난 뒤 중원을 넘보려던 적극적인 정책을 포기하고 오직 수성에만 급급한 세력으로 전락하고 만다.
훗날 손권은 제위에 올랐을 때 도열한 중신들 앞에서 ‘내게 오늘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주유 덕분이다.’며 적벽대전에서 주유가 세운 공적을 칭송했다.
주유는 제갈량에 버금가는 원대한 구상과 뛰어난 지모를 가졌던 인물이었다. 그의 패기만만하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은 그가 죽을 때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하듯 뱉은 말에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의 유언은 너무도 유명하여 삼국지의 명구절로 꼽히며 지금도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 제3장 오나라의 인물들 (3-6) 난세에 보기 드문 수성형 참모 '노숙(魯肅)’
손책이 죽고 그의 아우 손권이 오의 새 주인으로 등장하자, 손책의 동서요 친구이면서 오군의 대들보였던 주유는 온화한 성품의 한 인물을 손권에게 천거했다.
노숙(魯肅), 자는 자경(子敬). 이미 다른 사람을 섬기게 되어 있었지만, 주유가 찾아가 손권의 간곡한 뜻을 전하자 출사(出仕)했다. 노숙을 맞이한 손권이 오나라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가르침을 청하자, 노숙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미 한실은 기울어졌고 도성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조조 또한 토벌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주군께서는 장강 이남을 평정하여 강대한 나라를 만든 다음, 제위에 오르셔서 때를 기다리며 천하를 도모하십시오. 이는 지난날 한고조 유방이 천하를 얻은 바로 그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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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위에 오르라!’ 엄연히 한의 황제가 있는 당시로서는 실로 엄청난 말이었다. 그러나 육도삼략(六韜三略)을 가슴에 품고 있다고 알려진 노숙이 천하대세의 흐름을 꿰뚫어보고 한 말이고, 난세에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심이 없는 군웅이 어디 있겠는가.
노숙의 이 말에 손권이 크게 용기를 얻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원소를 격파하고 강북을 통일한 조조가 형주를 집어삼키고 다시 여세를 몰아 백만대군을 이끌고 내려와 손권에게 결전과 항복 중에서 택일하라는 문서를 보내왔다. 이에 손권은 항복을 권하는 문신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주유와 노숙 등 무장들의 의견을 채택, 유비와 연합하여 조조군과 일전을 치르기로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마침내 조조의 백만대군을 적벽에서 화공(火攻)으로 격파한다. 적벽대전 승리의 첫 번째 수훈자가 총사령관 주유라면, 두 번째 수훈자는 뒤에서 묵묵히 주유를 도운 노숙이다. 촉의 제갈량이 들으면 좀 섭섭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오나라에 ‘수전(水戰)에는 주유가 으뜸이고, 육전(陸戰)에는 노숙이 으뜸이다.’라는 말이 있다. 주유만큼은 아니지만 노숙도 뛰어난 지휘관으로 명성이 높다. 오군이 워낙 수군 위주이다 보니 육군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을 뿐. 대도독 주유는 죽으면서 자신의 후임자로 노숙을 천거했고, 노숙은 주유에 이어 오나라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노숙은 주유와는 달리 유비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온건정책을 펼친다. 그리고 적벽대전 때 조조의 선단을 쇠사슬로 연결하게 한 숨은 공로자 봉추 방통을 손권에게 천거한다.
그러나 방통의 볼품없는 용모에 실망한 손권이 그를 발탁하지 않자, 방통은 유비에게로 가고 만다. 오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후일 유비가 서촉을 평정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사람이 군사(軍師) 방통이 아니던가.
그즈음 오나라의 숙원사업은 적벽대전 승리의 과실인 형주를 유비로부터 탈환하는 일이었다. 주유는 형주탈환을 위해 제갈량과 무리하게 지모를 겨루다가 부상을 당해 죽고 말았지만, 노숙은 유비와 외교적으로 교섭을 한다.
노숙은 ‘서촉을 얻으면 형주를 오나라에 돌려주겠다.’는 약조를 유비로부터 받아낸다. 그러나 유비는 서촉을 차지하고서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형주반환을 미룬다. 끈질기게 교섭을 벌이던 노숙은 다시 유비로부터 형주의 일부를 즉시 돌려주겠다는 내락을 받아내지만, 이번에는 형주지역 사령관인 관우가 반환을 거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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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던 노숙은 관우를 불러서 한 번 더 형주반환을 요구해 보고 여의치 않으면 그 자리에서 관우를 죽여 버리기로 계획을 세웠다. 온건파인 노숙이 이런 계책을 마련하게 된 것은 형주탈환이 오나라의 국운이 걸린 숙원사업인데다, 그것을 해결하는 데 관우가 가장 큰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노숙은 대안(對岸)에 있는 관우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다음날, 관우가 겁 없게도 배 한 척에 호위병 여남은 명만을 데리고 강을 건너왔다. 노숙은 이미 회담장 주변에 도부수(刀斧手)를 숨겨놓고 관우를 죽일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노숙은 관우에게 계속 술을 권하면서 형주반환을 요구했다. 그러자 관우는 ‘땅을 주고받는 문제는 국가의 대사인 바, 이런 술자리에서 화제로 삼기에는 어울리지 않소.’하며 딴전을 피웠다. 노숙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차마 관우를 죽이라는 신호를 보낼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관우의 칼에 자신의 목이 먼저 달아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회합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섰을 때 노숙은 또 한 번 기회를 노렸으나, 관우가 한 손으로는 칼을 잡고 한 손으로는 노숙의 허리춤을 낚아 쥐고 자신이 타고 온 배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바람에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관우는 배에 오르자마자 노숙을 뭍으로 밀치며 ‘술 잘 마시고 갑니다.’하고 능청스럽게 인사를 했고, 관우를 태운 배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칼 한 자루만 차고 적진으로 담판하러 간다.’는 뜻의 ‘단도부회(單刀赴會)’를 탄생시킨 에피소드이다.
지금도 중국에서 경극의 소재로 많이 등장하고 있는 이 일화는 관우를 한껏 돋보이게 하고 상대역인 노숙을 아주 우유부단한 인물로 비하시키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정황을 잘 살펴보면 관우의 용맹 못지않게 노숙의 너그러운 성품이 돋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때 관우가 무사했던 것은 노숙이 관우를 죽이라는 신호를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초대장을 보낼 때와는 달리 노숙이 중간에 마음을 돌렸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노숙이 죽기를 각오하고 관우를 죽이라는 신호를 보냈다면 과연 그 상황에서 관우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노숙은 관우와 우호관계를 계속 유지한다. 오의 조정에서는 제갈근을 촉에 보내는 등 여러 외교채널을 통한 촉과의 끈질긴 교섭 끝에 결국 형주의 세 군을 돌려받는다. 노숙은 여몽을 후임으로 추천하고 46세에 병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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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 난세에 보기 드문 수성형 참모로서 오나라의 국방은 물론 정치안정과 외교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인물이다. 동시에, 오나라를 중원으로 진출하려는 적극적인 야심 없이 지키기에만 급급한 보수적인 지방정권으로 고착시키는 데에도 일조를 한 인물이다.
■ 제3장 오나라의 인물들, (3-7) 구국(救國)의 투혼을 불사른 노장 '황개'
오나라의 무장 황개(黃蓋), 한당 정보 조무와 함께 손견을 도운 4대천왕의 한 사람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장작을 팔아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항상 서책을 가까이 하면서 무예를 익혔고, 특히 쇠채찍을 사용하는 철편술(鐵鞭術)이 뛰어나 당대의 제1인자로 꼽혔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토벌군에 참가한 손견을 따라나선 황개도 한껏 무용을 떨치며 실전경험을 쌓아 범 같은 장수로 성장했다. 동탁을 무찌르기 위해 전국의 17제후들이 연합군을 구성했을 때도 황개는 선봉을 자원한 손견을 따라 참전해 활약했다.
이때, 손견은 십상시의 난 때 잃어버린 옥새를 우연히 궁궐의 우물에서 발견하고 큰 뜻을 품고 강동으로 돌아오는데, 이를 저지하는 형주자사 유표의 장수 황조와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수군 요새를 지키고 있던 황개가 군사를 이끌고 도우러 왔을 때, 손견은 이미 적군의 유인계에 빠져 무참히 전사한 후였다.
격분한 황개는 특기인 쇠채찍을 휘두르며 용전분투하여 적장 황조를 생포했다. 손견의 맏아들 손책은 사로잡은 적장 황조를 돌려주는 대신 적진에서 보관하고 있는 손견의 수급을 돌려받아 부친의 신체를 온전하게 한 다음 장례를 치렀다.
황개는 손책이 강동을 평정하고 오나라의 창업 기반을 확립하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손책이 죽고 그의 아우 손권이 오나라의 주인이 되자, 이제 노장이 된 그의 활약은 아무래도 처질 수밖에 없었다. 주유 노숙 여몽 감녕 등 떠오르는 신예 무장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장 황개가 다시 한 번 진면목을 드러낼 때가 왔으니, 적벽대전에서의 눈부신 투혼을 결코 빼놓을 수 없으리라. 강북을 제패한 조조가 백만대군을 이끌고 쳐내려와 나라가 존망의 위급에 처하자, 노장이라고 그냥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
황개는 총사령관 주유의 군막을 찾아가 화공(火攻) 전략을 건의했다. 주유는 이미 화공을 하기로 결심을 굳히고 구체적인 계책을 짜느라 고심하고 있었다. 황개가 자신의 심중을 간파하고 있음을 안 주유는 그의 식견에 감탄하며 한 가지 고민을 털어놓았다.
“화공을 성공시키려면 조조를 감쪽같이 속여야 하는데 그 일을 맡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고민입니다.”
“그 일이라면 내가 한번 나서서 맡아보겠소.”
황개가 대뜸 대답했다. 그러나 주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안 됩니다. 지모에 능한 조조를 속이려면 피투성이가 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장군께서는 나라의 어른으로서 몸도 젊은이들 같지 않으신데 어찌 그만한 고초를 견디시겠습니까?”
그래도 굳이 하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는 노장 황개의 확고한 결심을 확인한 주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음에서 우러나온 감사의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노 장수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장군께서 몸소 고육계(苦肉計)를 맡아주신다고 하니 오나라와 강동의 백성들에게 이보다 더한 충절은 없을 것 같습니다.”
다음날, 주유는 여러 장수와 군사들을 모아놓고 군령을 내렸다.
“우리는 조조의 백만대군에 맞서 오로지 수비만 할 것이다. 모든 부대는 장기전 태세를 갖추고 각 병선마다 3개월 치의 식량을 준비하고 대기하라.”
주유답지 않은, 사리에 맞지 않는 명령이었다. 숫자가 적은 병력으로 대군을 무찌르려면 기습을 통한 속전속결이 최선의 방략이 아닌가. 그런데, 수비만 한다고 하니…. 그때 노장 황개가 일어나 불쑥 말했다.
“3개월분이 아니라 30개월분을 준비한다 해도 장기전으로는 조조의 백만대군을 깨뜨릴 수가 없소. 속전속결의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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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사령관의 명령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항복을 운운했으니 어떻게 될 것인가? 모든 장수들이 숨을 죽이고 주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분노로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주유가 벌떡 일어서며 좌우의 군사들에게 명했다.
“군령을 어지럽히는 저 요망한 늙은이를 끌어내어 당장 목을 베어라!”
손견 이래 3대째 충성을 다해온 창업공신의 목이 떨어지게 되었다.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게 된 장수들이 모두 주유에게 간청하여 겨우 황개의 목숨은 붙어있게 되었지만 그 대신 태장(苔杖)이라는 중벌이 내려졌다.
황개는 그 자리에서 갑옷과 옷이 모두 벗겨진 채 모든 장수와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곤장을 맞았다. 이윽고 황개의 몸은 살점이 터져나가 온몸이 피범벅이 되었고, 겨우 목숨만 붙어있는 신세가 되었다.
며칠간 침상에 누워 있던 황개, 드디어 조조에게 항서(降書)를 보냈다. 첩자를 통해 황개가 총사령관 주유에게 크게 욕을 당해 초주검이 된 것을 확인하고서야 의심 많은 조조도 그의 항복을 믿게 되었다. 주유는 다시 재사 방통을 보내 배 멀미 환자가 속출하고 있는 조조의 선단을 서로 쇠사슬로 묶게 하는 데 성공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동남풍이 불어오자, 황개는 ‘오늘 밤 투항하겠다.’고 조조에게 밀서를 보내고, 그날 밤 화선(火船) 20척에다 불에 잘 타는 유황과 염초 등을 가득 싣고 조조의 진채를 향해 발진했다.
황개의 배가 다가오자, 조조는 항선(降船)이 오는 줄 알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황개가 인솔하는 화선들은 유황과 염초에 불을 붙이고 조조의 선단을 향해 돌진했다. 쇠사슬로 묶여진 조조의 선단은 꼼짝도 못하고 거세게 불어오는 동남풍에 의해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불에 타죽거나 불길을 피해 물에 뛰어든 조조군의 시체가 양자강을 뒤덮었다.
작은 배로 뛰어내린 황개는 도망가는 조조를 추격하다가 적장 장료가 쏜 화살에 맞아 물속으로 떨어졌지만 다행히 뒤따라 온 부하장수가 그를 구해냈다.
적벽대전 승리의 최고 월계관은 오군 대도독 주유의 몫이지만, 주유를 도와 화공을 성공시키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수훈자가 황개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4대천왕에 나오는 황개를 별도의 제목으로 다시 다루는 이유이다. 황개가 보여준 빛나는 감투정신은 노장으로서 구국(救國) 투혼의 마지막 불꽃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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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장 오나라의 인물들, (3-8) 내치(內治)의 두 기둥 '장소와 장굉'
원술에게 옥새를 맡기고 군사 3000을 얻어 강동으로 향하던 손책은 소식을 듣고 찾아온 옛 친구이면서 의형제인 주유를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이 함께 술을 마시며 그간의 회포를 푸는데, 문득 주유가 ‘형님께서 큰일을 하시려면 강동의 이장(二張)부터 찾아야 할 것입니다’하고 말했다.
‘이장이라니, 누구누구인가?’ 하고 손책이 물었다.
“한 사람은 장소(張昭) 자는 자포(子布)이고, 또 한 사람은 장굉(張紘) 자는 자강(子綱)입니다. 둘 다 배움이 깊고 지략이 뛰어나 능히 나라를 평안케 할 준재들입니다. 지금 난리를 피해 숨어 살고 있습니다.”
손책은 두 사람을 초빙하게 했으나, 둘 다 나오려 하지 않았으므로 직접 찾아가 함께 일하자고 간곡히 부탁하여 모셔오게 되었다. 손책이 강동과 강남 지역의 토호세력들을 대부분 평정하자 장소가 말했다.
“이제 조정에 표문을 올려 강동에 주공이 계심을 알리고, 새로 얻은 땅도 황실로부터 승인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손책이 그대로 따랐음은 물론이다. 자객의 습격으로 중상을 입은 손책은 죽음을 앞두고 아우 손권을 불러놓고 이렇게 당부하고 숨을 거두었다.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안의 일은 장소에게 묻고 밖의 일은 주유에게 묻도록 하라.”
손권은 형의 유언대로 장소와 주유를 사부의 예로 섬기며 충심으로 받들었다. 손책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조조는 모사들을 불러 모아 강동을 칠 계획을 세웠다. 손책의 사자로 허도에 갔다가 시어사(侍御史) 벼슬을 받고 눌러앉아 있던 장굉이 나서서 말했다.
“남의 상(喪)을 틈타 쳐들어가는 것은 의로운 일이 못됩니다. 오히려 이 기회에 손권에게 벼슬을 내려주어 우호를 더욱 든든히 해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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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강한 세력을 지닌 원소를 바로 등 뒤에 두고 있는 조조를 깨우쳐주는 말이었다. 조조는 그 말을 옳다고 생각, 장굉의 조언대로 손권에게 장군에다 회계태수까지 얹어주기로 했다. 장굉이 다시 청했다.
“인수(印綬)를 가지고 가는 사자로 저를 써 주십시오. 저는 원래 강동 출신이라 손권의 사람됨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원소에게 붙지 않도록 잘 설득해보겠습니다.”
장굉으로서는 조조에게서 몸을 빼내 강동으로 돌아갈 궁리를 낸 것인데 조조의 필생의 적수인 원소를 들먹인 때문인지 조조가 순순히 허락을 해주었다. 허도에 눌러앉아버린 줄 알았던 장굉이 돌아오자 손권은 몹시 기뻐했다. 더구나 조조와 우호관계까지 맺게 되었으니.
손권은 장굉에게 장소와 함께 정사를 돌보도록 했다. 바야흐로 강동에 이장(二張)시대가 열렸다. 장굉은 또 올곧은 선비로 인망이 높은 고옹(顧雍)을 추천했고, 손권은 바로 등용하였다. 고옹은 후일 오랫동안 승상을 지내며 오를 반석 위에 올려놓지 않았는가.
적벽대전 이후, 전열을 정비한 위의 장료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손권은 용감하게 앞에 나서서 싸우다가 적진에 포위되어 위험한 상황에 처했는데 태사자와 정보의 분전으로 천신만고 끝에 위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때 장굉이 간했다.
“주공께서 젊은 혈기만 믿고 적진에 뛰어드셨으니 실로 한심한 일입니다. 적장을 목 베고 그 위세를 떨치는 것은 한낱 편장(偏將)이나 할 일입니다. 앞으로는 스스로를 보중(保重)하시어 함부로 싸움머리에 몸을 드러내지 않도록 하십시오.”
뼈저리게 와 닿는 충언이었다. 손권은 크게 뉘우치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무렵, 위에서는 사자 형정(邢貞)을 보내 손권에게 오왕(吳王)의 작위를 내렸다. 형정은 오의 궁궐 안에 들어와서도 수레에서 내리지 않았다. 이를 보고 장소가 ‘그대는 스스로를 존대하고 있는 모양인데, 설마 오나라가 작고 국력이 약하다고 조그만 칼 한 자루도 없다고 생각하시오?’하고 말했다. 뜨끔해진 형정은 즉시 수레에서 내렸다. 장소의 대쪽 같은 기상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이미 황제가 된 조조의 맏아들 조비, 촉 유비에 이어 오의 손권도 장소의 진언대로 제위에 오르니 바야흐로 삼국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관우의 원수를 갚으러 오에 침공한 유비가 이릉전투에서 패배한 후 백제성에서 숨을 거두자 오와 촉은 다시 손을 잡았다. |
이때 병이 들어 몸져누운 장굉은 손권에게 오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해 건업(지금의 남경)으로 수도를 옮길 것을 건의하고 숨을 거두었다. 손권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나라를 생각한 장굉을 참으로 충신이라 생각하여 그의 진언대로 건업으로 천도하였다.
이 건업 천도를 두고 잘했다고 하는 의견도 있지만, 잘못했다고 하는 의견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오와 동진 송 제 양 진 등 건업을 수도로 정한 나라 중에서 장수한 나라가 없었다는 점 때문에….
이장(二張) 중에서 장굉은 예순 살까지밖에 살지 못했지만, 오의 내정을 한 몸에 짊어진 장소는 여든 살까지 살면서 나라의 든든한 기둥 역할을 다했다. 그러나 장소에게도 실책은 있었다.
조조가 백만대군을 이끌고 적벽에 진을 치자, 장소는 앞장서서 항복을 권했다. 조조의 백만대군을 궤멸시킨 손권이 전승 축하연에서 ‘만약 내가 그때 장소의 말을 듣고 조조에게 항복을 했더라면 아마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고 말했을 때, 장소는 식은땀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또 있다. 유비가 두 아우의 원수를 갚는다며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자원해서 오의 사자로 나선 제갈근이 촉으로 떠난 지 여러 날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장소는 ‘제갈근이 오를 버리고 촉으로 간 것 같습니다. 아마 그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말했다.
그러나 손권은 ‘내가 그를 저버리지 않는 한 그도 나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며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했고, 그때 마침 제갈근이 돌아왔다는 전갈이 오자, 장소는 부끄러워 얼굴도 들지 못하고 손권 앞을 물러났다.
손책이 유언에서 언급한 대로, 장소는 내치에서는 탁월한 역량을 보였지만, 아무래도 바깥쪽 일에 대해서는 문관으로서 한계가 있었던 듯하다.
■ 제3장 오나라의 인물들, (3-11) 제갈량의 형과 조카 '제갈근과 제갈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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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근은 제갈량의 삼형제 중 맏이로, 사려 깊고 온후한 품성을 지닌 인물이다. 일찍이 고향을 떠나 남양에서 살던 중 오의 중신 노숙의 천거로 손권을 섬기게 되었다.
그는 손권의 부름에 응하면서, 당시 네 주를 차지하고 있던 하북의 강자 원소가 머지않아 조조에게 패망할 것이라며, 원소와의 거래를 끊고 조조와 관계를 맺도록 권했다. 손권은 그의 말대로 따랐고 그의 예측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제갈근은 주로 촉과의 외교교섭을 담당하였는데, 그의 아우 제갈량이 유비를 섬기게 되고부터는 여러 번 어려움을 겪었다. 제갈량의 친형이라는 이유 때문에 여러 중신들에게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의 가솔들을 모두 옥에 가둬둔 채 혼자 촉으로 가서 오의 숙원인 형주반환 협상을 해야 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형주지역 사령관인 촉장 관우의 딸과 오주 손권의 아들과의 혼인교섭을 맡았다가 관우로부터 ‘어찌 범의 딸을 개의 아들에게 시집보낼 수 있겠는가?’하는 치욕적인 말을 듣고 쫓겨 온 적도 있었다.
또, 관우가 오의 명장 여몽의 기습 전략에 허를 찔려 형주를 뺏기고 맥성으로 피신해 있을 때, 그에게 손권을 섬기도록 권하러 갔다가 다시 관우의 칼에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있는 등 외교관으로서 많은 수난을 겪었다.
관우와 장비가 죽은 후, 촉 황제 유비가 두 아우의 원수를 갚는다며 거국적인 대군을 일으켜 오로 쳐들어왔을 때, 손권을 위시한 오의 중신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때 제갈근이 앞으로 나서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군후의 녹을 먹은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아직 이렇다 할 공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이제 제가 촉주 유비를 만나 이해득실로 설득하여 그의 군사를 물러가도록 해보겠습니다.”
촉군 진영으로 찾아가 유비를 만난 제갈근은 "형주를 도로 촉에 돌려드리고, 관공과 익덕을 해친 장수들도 묶어서 촉으로 보낼 테니 부디 우리와 힘을 합쳐서 제위를 찬탈한 위의 조비를 치자" 고 간곡하게 제의했다.
그러나 복수심에 불타는 유비에게는 오의 파격적인 제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비는 "승상의 낯을 보아 그대의 목을 베지 않을 것이니, 돌아가서 손권에게 목을 씻고 죽음을 기다리라 이르라" 며 제갈근을 꾸짖고 내쫓았다.
한편, 제갈근이 촉으로 떠난 지 여러 날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제갈근은 아우 제갈량의 꾐에 빠져 오를 버리고 촉을 택한 것 같다’며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오주 손권은 ‘내가 그를 버리지 않는 한 그 또한 나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며 절대적인 신임을 보였다. |
제갈근에게는 총명하고 재기 넘치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바로 제갈각이다. 제갈각이 어릴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손권이 잔치를 열어 오의 중신들을 위로하고 있는데 여섯 살 난 제갈각도 아비를 따라 그 자리에 끼이게 되었다.
손권이 갑자기 뜰에 있는 당나귀를 끌고 오게 하더니 당나귀의 면상에다 분필로 ‘제갈자유(諸葛子瑜)’라고 썼다. 자유(子瑜)는 제갈근의 자(字)이다. 제갈근의 얼굴이 유난히 긴 것을 빗대어 우스개삼아 쓴 것이었다. 이것을 본 중신들은 모두 큰소리로 웃었다.
이때 어린 제갈각이 자리에서 일어나 당나귀에게로 다가가더니 분필을 집어 네 글자 밑에 ‘지려(之驢)’라는 두 글자를 더 썼다. 이제 ‘제갈근의 당나귀’라는 뜻이 되었다. 제갈근은 졸지에 당나귀가 될 뻔 했다가 아들의 기지로 다시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자리에 있던 중신들은 모두 어린 제갈각의 재치에 혀를 내둘렀고, 손권 역시 감탄하며 그 당나귀를 그 꼬마에게 선물로 하사했다.
한번은 손권이 어린 제갈각에게 ‘네 아버지와 숙부 중에서 누가 더 똑똑하지?’하고 물었다. 숙부란 말할 것도 없이 제갈량을 가리키는 것이다. 제갈각은 스스럼없이 아버지가 더 똑똑하다고 대답했다. 손권이 이유를 묻자 그 꼬마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버지는 섬기는 상대를 잘 골랐지만 숙부는 잘못 골랐기 때문입니다.”
아주 얄미울 정도로 멋진 대답이 아닌가.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제갈각은 타고난 총명과 아버지의 후광 덕분에 승승장구했다. 명장 육손이 죽자 마침내 오나라의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손권이 죽은 후에는 오의 국권을 한손에 쥔 실권자가 되었다.
제갈각은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여 백성들의 신망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 무렵 중원의 위나라가 손권의 죽음을 틈타 쳐들어왔다. 제갈각은 손수 오군을 이끌고 나가 위의 대군을 격파하여 그의 기세와 인기는 가히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위군을 물리친 제갈각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시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리고 20만 대군을 이끌고 위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위군의 방어는 철통같이 탄탄했다. 마음이 조급해진 제갈각은 진두에 서서 지휘를 하다 화살에 맞는 부상을 입었다. 게다가 오군들 사이에 전염병이 돌고 투항자가 속출하는 등 도저히 전투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오군은 많은 병사와 물자를 잃은 채 퇴각하고 말았다. |
순식간에 제갈각의 인기는 땅에 떨어졌고 정적(政敵)이 속출했다. 그러나 그는 책임을 지기는커녕 모든 허물을 부하장수들에게 뒤집어씌우고 더욱 권세를 휘둘렀다. 마침내 정적들이 오주 손량을 설득, 제갈각을 꾀어내어 주살하니 실권을 장악한 지 겨우 일 년 만에 몰락하고 말았다. 그의 일족들도 모조리 참수되었다.
아버지 제갈근의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성실한 성공에 비해, 아들 제갈각은 한때 그의 아버지가 쌓았던 공훈을 능가하는 화려한 재능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실패로 위기에 처하자 슬기롭게 헤어나지 못하고 자멸하고 말았다.
그것은 자신의 재능만 믿고 그 재능의 뿌리가 되는 덕을 쌓는 것에는 소홀한 데서 온 스스로의 한계라고 할 수밖에 없으리라. 제갈각의 짧은 성공에 이은 통한의 실패는 자신의 재주만 믿고 설쳐대는 사람들에게 뼈저린 교훈이 되리라.
■ 제3장 오나라의 인물들, (3-12) 백면서생, 그리고 지모의 명장 '육손'
조조의 백만대군을 격파해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사람은 오(吳)의 대도독 주유이고, 촉장 관우가 지키는 형주를 지략으로 빼앗은 사람은 여몽이다. 주유 노숙 여몽에 이어 오군의 최고 사령관에 오른 사람은 육손이다.
육손(陸遜), 자는 백언(伯言). 강동 호족의 자제로 키가 여덟 자에 두뇌가 명석했고, 얼굴이 옥처럼 고왔다. 약관 20세 때부터 손권의 휘하에서 일을 했는데, 손권은 재기가 뛰어난 그를 형 손책의 딸과 혼인시켜 자신을 보좌케 했다.
육손이 삼국지에서 처음 활약하는 것은 명장 여몽이 형주를 빼앗기 위해 고심하고 있을 때이다. 형주지역 사령관인 촉장 관우가 주요 요새마다 봉화대를 세우고 경계를 철저히 하자, 아무 계책도 쓸 수가 없게 된 여몽은 병이 나서 드러눕고 말았다.
이때 여몽의 고민을 간파한 육손은 여몽의 병상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
"장군께서는 병을 핑계로 물러나시고 그 대신 이름 없는 장수를 사령관에 위촉토록 하십시오. 그러면 관우는 완전히 마음을 놓고 위 공략에 주력할 것입니다. 그때 기회를 보아 단숨에 형주를 뺏어버리면 됩니다."
그를 백면서생(白面書生)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런 절묘한 계책을 내다니. 깜짝 놀란 여몽은 그의 계책대로 병을 핑계로 사령관직에서 물러나고 대신 그 자리에 육손을 임명토록 건의했다.
사령관에 풋내기 육손이 임명되자, 관우는 완전히 마음을 놓고 주력부대를 모두 위나라의 번성을 공략하는데 투입했다.
드디어 때가 왔다고 판단한 여몽은 육손과 함께 정병 3만을 이끌고 형주로 진격, 순식간에 형주성을 점령하고, 나중에는 관우까지 사로잡아 목을 베는 개가를 올렸다.
그 후, 촉주 유비가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거국적으로 군사를 동원해 오(吳)를 쳐들어왔다. 서전에서 크게 이긴 유비는 승세를 타고 계속 진군해왔다. 손권은 마흔 살의 육손을 오군의 대도독으로 임명해 침략군을 막아내게 했다. 이때 육손은 작은 전투에서 여러 번 패하면서도 반격을 하지 않았다. 모두들 육손을 겁쟁이라고 수군거렸지만 그는 느긋했다.
"기다려라. 섣불리 정면으로 맞붙으면 승산이 없다.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적이 피로해질 때를 기다려야 한다. 머지않아 그때가 올 것이다."
육손은 수비를 강화하면서 촉군을 계속 깊숙이 유인했다. 겨울에 시작한 전쟁, 어느덧 여름이 됐다. 드디어 폭염을 견디지 못한 촉병들은 이릉 숲속 수백 리에 이르는 장사진(長蛇陣)을 쳤다. 모두 창칼과 갑옷을 내팽개친 채 시원한 그늘을 찾았다. 때가 왔다고 판단한 육손은 드디어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적을 섬멸할 때는 바로 지금이다. 모두 풀섶에 불을 붙여 바람을 등지고 촉군의 진채를 향해 던져라. 총공격이다!"
불길은 숲을 휩쓸며 촉군의 진채(陣寨)를 온통 불바다로 만들었다. 불에 타죽은 자, 도망치다가 오군의 창칼에 찔려 죽은 자…. 촉군의 시체가 온 숲을 뒤덮었다. 유비는 겨우 수백 기를 이끌고 도망쳤다. 육손이 이끄는 오군의 완전한 승리였다.
이 전투가 바로 이릉대전이다. 조조와 원소가 강북의 패권을 놓고 맞붙은 관도대전, 주유가 조조의 백만대군을 화공으로 격파한 적벽대전과 함께 삼국지의 3대전투에 꼽히는 바로 그 전투인 것이다. |
육손은 성급하게 싸우려는 선배 장수들을 잘 다독거리면서 '이일대로(以逸待勞)' 즉, 만반의 준비를 하고 적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단숨에 공격하는 전법을 완벽하게 구사했던 것이다. 한 평생 군사를 부리며 전장에서 세월을 보낸 백전노장 유비는 풋내기 백면서생에게 무참히 패해 백제성으로 피신했다가 홧병을 얻어 죽고 만다. 이릉전투의 영웅 육손은 손권에 의해 후(侯)로 봉해져서 오의 군권을 한 손에 쥠은 물론, 전략요충지인 형주목까지 맡았다. 바야흐로 육손의 시대가 온 것이다.
오군(吳軍) 최고사령관 육손이 제갈근과 함께 위(魏) 공략에 나섰을 때, 육손의 작전서신을 가지고 손권에게로 가던 사자가 위군에게 사로잡히는 바람에 작전계획이 누설되고 말았다. 이제 속히 철수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육손은 군사들에게 들판에 나가 콩과 보리를 심게 했다. 자신은 장수들과 함께 바둑을 두기도 하고 궁술대회를 여는 등 전혀 철군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때 제갈근이 찾아와 왜 빨리 철수를 하지 않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육손이 대답했다.
"무릇 군사를 철수하려면 적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해야 하오. 섣불리 군사를 물리면 적군이 기세를 타고 쫓아오기 때문에 잘못하면 전멸당하고 마는 법이오. 한바탕 적을 몰아붙인 뒤 감쪽같이 군사를 물려야 할 것이오."
육손은 전군에게 공격준비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적병들을 거세게 몰아붙여 꼼짝 못하게 한 뒤, 쥐도 새도 모르게 전군을 철수시켰다. 병법의 작용과 반작용, 허와 실을 교묘히 응용한 기민한 작전이었다.
오군이 물러간 것을 며칠 뒤에야 안 위주(魏主) 조예는 '육손의 군사 부리는 솜씨가 옛 손자나 오자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구나. 그가 있는 동안은 오를 쳐서 없애기 어렵겠구나!' 하고 탄식하며 돌아갔다.
그 후 오의 조정은 후계자 문제로 큰 혼란에 빠졌다. 태자가 일찍 죽자, 오주 손권은 후처 소생의 맏이를 태자로 삼아놓고 둘째를 노왕으로 봉하더니, 노왕을 태자보다 더 총애했다. 조정은 태자파와 노왕파로 나뉘어 서로 헐뜯는 등 국론이 심하게 분열되었다. 이때 형주에 있던 육손은 승상(丞相)의 중책까지 겸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사태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손권에게 충심이 담긴 상소를 올렸다.
"마땅히 태자에게 무게를 더하여 노왕과는 차별을 두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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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노왕을 총애하던 손권의 귀에는 옳은 말로 들리지 않았다. 이때 타격을 받은 노왕파에서 육손을 모함했고, 늙어서 판단력이 흐려진 손권은 육손을 문책하는 관리를 잇달아 형주로 보냈다.
울분을 참지 못한 육손은 시름시름 앓다가 그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나이 예순 셋, 오군 최고의 명장치고는 참으로 어이없는 최후였다.
■ 오나라의 인물들, (3-13) 명군의 불초한 후예 ‘손권의 자손들’
수성의 명군 손권(孫權)의 치세 말기, 위나라는 조조로부터 4대째로 이어져 이미 쇠락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으니 실권은 모두 사마의의 아들인 사마사 사마소 형제가 쥐고 있었다. 촉에서는 오래 전에 유비가 죽어 그의 아들인 유선의 치세가 계속되고 있었다. 오에서는 아직도 손권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었다.
어느 시대, 어느 정권을 막론하고 집권이 장기화되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손권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그도 치세 말기에는 명군답지 않게 몇 가지 실책을 범했다. 위에 반기를 든 요동태수 공손연과 손잡고 위에 대항하려 했다가 공손연의 배반으로 외교적인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손권의 가장 치명적인 실책은 후계자 선정에 있어서 갈팡질팡한 점이다. 처음엔 순리대로 장남 손등을 태자로 세웠으나 손등이 일찍 죽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다. 손권은 다시 후처 소생의 장남을 태자로 세우면서 동시에 아우를 노왕으로 임명하여 태자와 거의 동등한 대우를 하면서 극진히 총애했다. 이에 조정 중신들은 태자파와 노왕파로 나뉘어져 서로 헐뜯고 싸웠다. 국론이 극도로 분열되었다.
이 무렵, 승상 고옹이 죽자 손권은 후임으로 형주를 지키고 있던 명장 육손을 승상직까지 겸하게 했다. 그런데 육손으로부터 ‘태자를 나라의 반석으로 삼고 노왕과 차별을 두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노왕을 총애하는 손권의 귀에는 그 상소가 태자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소리로 들렸다. 이때 타격을 받은 노왕파에서 육손을 모함하기 시작했다. 늙어서 판단력이 흐려진 손권은 여러 차례 관리를 보내 육손을 문책했다. 결국 육손이 화병으로 죽고 난 후에야 손권은 육손이 아무런 죄가 없음을 알고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 |
마침내 손권은 기력을 모아 결단을 내렸다. 태자 손화를 폐하고 노왕 손패에게 사약을 내린 다음, 이제 겨우 여덟 살인 어린 손량(孫亮)을 새 태자로 세웠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손권이 죽었다. 형 손책을 이어 열아홉 살부터 일흔한 살까지 52년 동안 오의 주인으로 있었던 손권, 황제로서의 재위기간도 24년이나 되었다.
새 황제 손량이 너무 어리다보니 조정의 실권은 태부 제갈각에게 돌아갔다. 제갈근의 아들인 제갈각은 위군의 침공을 막아낸 공로 덕분에 한때 승승장구했으나, 무리하게 군사를 동원하여 위를 정벌하려다 실패하여 실권을 잡은 지 일 년 만에 반대파인 손준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조정의 실권은 이제 손준에게, 그리고 다시 그의 종제(從弟)인 손침에게 넘어갔다. 손침은 또다시 무리하게 군사를 동원하여 위를 침공했다가, 손침의 전횡에 실망한 장수들이 위에 투항해버리자 그들의 일족을 처형하는 등 독재와 공포정치를 일삼았다. 어느덧 오주 손량의 나이가 열일곱 살이 되었다. 실권자인 손침을 아주 싫어하던 손량은 어느 날 측근에게 손침을 죽이라는 밀조를 내렸다. 그러나 이 사실이 손침의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오히려 손량 자신이 제위를 뺏기고 말았다.
실권자인 손침은 있던 손휴(孫休)를 새 황제로 세웠다. 새로이 오주가 된 손휴는 손침을 승상 겸 형주목으로 임명하고, 자신의 조카이면서 손권의 손자인 손호를 오정후에 봉했다. 그러자 오의 실권자인 손침의 권세는 황제를 능가할 정도였다. 손침은 제위 자리까지 넘보았다. 이에 놀란 오주 손휴는 노장 정봉에게 은밀히 명하여 손침을 죽이고 그 일족을 모조리 처형했다. 오랜만에 오나라는 권세를 부리던 실권자들을 처단하고 다시 황실의 면모를 일신할 수 있었다.
그 무렵, 촉이 위의 사마소에게 평정되었다. 오주 손휴는 육손의 아들 육항과 노장 정봉에게 국경수비를 철저히 하게 하여 위의 침입에 대비했다. 위에서는 실권자인 사마소가 죽자, 그의 아들 사마염이 위주 조환을 폐하고 진(晋) 황제로 등극했다.
오주 손휴가 병으로 죽자, 오정후 손호(孫皓)가 중신들의 추대로 제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손권에 의해 한때 태자로 임명되었던 손화의 아들인 바, 그가 바로 오의 마지막 황제이다.
제위에 오른 손호는 날로 흉포해져서, 충간하는 중신들을 가차 없이 처단했다. 또 도성을 건업에서 무창으로 옮기고 나날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서 세월을 보냈다. 재정이 바닥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토목사업을 벌이고 궁궐을 증축했다. |
또 명장 육항에게 진을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가,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하여 판단한 육항으로부터 ‘지금은 공격할 때가 아닙니다.’라는 상소문이 올라오자 그의 병권을 뺏어버렸다.
드디어 때가 이르렀다고 판단한 진 황제 사마염은 두예와 왕준을 보내 두 갈래로 오를 공격했다. 이미 국력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오는 전투다운 전투를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패퇴를 거듭했고 마침내 도성이 포위되고 말았다.
오주 손호는 더 이상 저항할 힘이 없어지자, 20년 전 후주 유선이 했던 것처럼 스스로를 포박한 채 중신들을 이끌고 항복했다. 강동의 손견과 그 아들 손책이 창업하고, 명군 손권을 위시하여 주유 노숙 여몽 육손 등 무수한 명장들이 지켜온 오나라도 4대 53년 만에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280년).
이로써 조조 유비 손권이 세운 삼국은 모두 망하고, 위를 이은 진에 의해 삼국통일이 이루어졌다. 오주 손호는 왕준을 따라 낙양으로 끌려갔다. 진 황제 사마염은 손호에게 자리에 앉기를 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짐이 자리를 만들어놓고 경(卿)을 기다린 지 이미 오래되었소.”
손호가 대답했다.
“신(臣)도 남쪽에서 이런 자리를 만들어놓고 폐하를 기다렸습니다.”
망국의 황제치고는 얼마나 당당하고 호기로운 말인가. 오주 손호는 삼국지연의에 아주 포악한 군주로 기술되어 있으나 실상은 상당히 당찬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는 진 황제 사마염에 의해 귀명후에 봉해져서 구차한 삶을 이어가다가 오가 망하고 3년 후에 죽었다.
오는, 위를 이은 진을 정통으로 세운 정사 삼국지와, 촉을 정통으로 세운 삼국지연의 어느 것으로도 비호를 받지 못했다. 오의 마지막 황제 손호가 포악한 군주로 낙인찍힌 것은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역사는 이긴 자에 의해 기록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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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장 촉나라의 인물들, (4-1) 조조에 맞선 인군의 전형 "유비" 중국사의 여러 창업자들 중에서 성취한 일에 비해 가장 많은 민중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유비(劉備)가 아닌가 싶다. 그 이유를 찾아보려면 유비가 걸어온 길과 그의 인간적인 매력, 처세술 등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난세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웅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후한 말 황건적의 난은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유비에게도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은 유비도 동문수학한 공손찬의 막하에서 황건적 토벌에 적잖은 공을 세워 한 고을의 장령(將領)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어, 서주(徐州)의 책임자가 되었으나 여포에게 뺏겼고, 다시 조조를 따라 허도(許都)에 갔으나 조조제거 음모에 가담하였다가 도망쳐 나오기도 했으며, 하북의 원소에게 의지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조조가 강북을 통일하고 손권이 강동에서 탄탄한 기반을 확립하고 있을 때까지도, 유비는 일성(一城)도 얻지 못하고 형주에서 유표의 눈칫밥을 얻어먹고 있었다.
그런 유비가 뒤늦게나마 촉을 세워 조조 손권과 나란히 필적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이 걸출한 군사(軍師) 제갈량과 방통을 얻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인물들을 얻을 수 있었던 유비의 저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유비는 누구에게나 성심으로 대했고 항상 겸손했다. 때로는 우둔해 보일만큼 정직했던 점도 그의 강점이 되었다. 유비 진영이 내세울 점은 인화(人和)를 바탕으로 한 튼튼한 팀워크이고, 그 원천은 유비의 인간적 매력에서 찾을 수 있다. 인화를 빼면 유비진영에서는 남는 게 없기 때문이다.
관우 장비 조운 황충 같은 만부부당(萬夫不當)의 용장들로부터 절대적인 충성을 받을 수 있었고, 제갈량과 방통 같은 대현인을 부하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유비의 이런 신비한 매력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에게는 은근히 사람을 끌어들이고 포용하는 힘이 있었다.
또, 그가 한 황실의 후예라는 점을 그의 카리스마를 유지하는 데 큰 무기로 활용했던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지금도 한 고조 유방과 함께 중국인들에 의해 인군(仁君)의 전형으로 추앙받고 있다.
유비의 인물됨에 대해서는 가장 이상적인 군주의 모델이라는 평가가 정설이지만, 결코 뱃속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음험한 인물이라는 평가도 함께 존재하고 있다. 후자의 예(例)가 될 만한 일화 하나를 소개해 본다. |
당양벌에서 조조의 대군에 쫓겨 패주하던 유비가 겨우 몸을 피신했을 때의 일이다. 유비 진영의 맹장 조운이 단기(單騎)로 조조의 대군 속에 뛰어들어 유비의 어린 아들 ‘아두’를 구해오는데, 이때 유비의 반응을 보자. 적지에서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어린 아들을 안고 볼을 부비다 말고 갑자기 땅에 내동댕이치며 이렇게 말한다.
“이놈 때문에 하마터면 국장(國將)을 잃을 뻔했구나!”
아들은 다시 낳을 수 있지만 조운(趙雲 : 子龍) 같은 장수는 다시 얻을 수 없다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이런 주군을 따르지 않을 장수는 없다. 유비는 이런 식으로 부하들의 충성을 이끌어 냈다.
유비를 음험한 인물로 보는 것은 이러한 그의 언행을 고도의 계산된 행위로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덕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덕망과 인품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인물로 자리매김 되어 있다.
또 한 가지, 진의가 의심스러운 일화가 있다. 관우의 복수를 위해 국운을 걸고 오(吳)를 치러 나섰다가 대패한 유비가 백제성에서 제갈량을 불러 후사를 부탁하는 장면이다.
“승상, 위(魏)를 쳐서 한(漢)의 명예를 회복해 주시오. 만약 내 아들이 도와서 될 만한 인물이거든 승상께서 도와주시오. 그러나 도와줘도 도저히 안 될 인물 같으면 승상께서 촉의 주인이 되시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태자 유선은 조운이 조조의 대군 속에서 천신만고 끝에 구해왔던 바로 그 아이 아두이고, 그때 나이는 17세였다. 유비가 내동댕이칠 때 머리를 다쳐서 그렇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지만, 정말로 그는 중국 역사를 통틀어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멍청한 군주의 표본 같은 인물이었다.
그런데 제갈량은 지나치게 똑똑하다. 그래서 자기 아들을 폐하고 황위를 차지하라는 것일까? 아니면, 아예 찬탈을 공개적으로 언급함으로써 혹시 후일에 있을지도 모르는 그의 찬탈기도에 미리 쐐기를 박아두자는 것일까?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음험한 계산이 깔려있는 유언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이 말을 듣고 제갈량은 너무도 황송한 나머지 엎드린 채 계속 이마를 짓찧어 바닥이 온통 피와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고 한다. |
유비가 필생을 다하여 일궈놓은 촉은, 나라를 혼자 떠맡다시피 짊어지고 있던 제갈량에게 달려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제로 제갈량은 그 모자라는 유비의 아들을 하늘처럼 받들면서 충성을 다했다. 제갈량의 위대함은 실로 거기에 있다할 것이다.
제갈량은 유비의 유훈을 한 시도 잊지 않고 분골쇄신하며 중원통일을 도모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전선에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이라고 하지 않는가.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한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었던 유비의 비전이 과연 당시의 상황에 합당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미 한의 부흥이 물 건너간 것이라면 ‘새로운 시대! 새로운 나라!’ 같은 참신한 비전을 제시하여 민심에 호소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일반적으로 ‘천시(天時 chance), 지리(地利 location), 인화(人和 teamwork)’ 이 세 가지 요소를 다 갖추고 있어야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를 당시의 판세에 대입해 보면 위의 조조는 천시를, 오의 손권은 지리를, 촉의 유비는 인화를 얻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냉정하게 판단해 볼 때, 위나라가 이 세 가지 모두에 가장 가깝게 접근해 있었고, 오나라는 지리와 인화 두 가지를, 촉나라는 인화 하나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 해답이 너무나도 자명하지 않은가.
■ 제4장 촉나라의 인물들, (4-2) 신(神)이 된 삼국지 최고의 무장 ‘관우’
삼국지에 나오는 무수한 영웅호걸 중에서 현세에 가장 추앙받고 있는 인물은 누구일까? 도덕군자 같은 유비일까, 임기응변이 뛰어난 조조일까, 아니면 수성의 명군 손권일까? 그도 아니라면 그 재주의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는 제갈량일까?
아니다. 9척 신장에 수염길이 2척, 잘 익은 대춧빛 얼굴에 누에 눈썹과 봉황의 눈을 가진 장수. 한 손에 청룡언월도를 쥐고 적토마를 타고 무수한 전장을 누빈 삼국지 최고의 무장, 전장에서도 ‘춘추(春秋)’를 손에서 놓지 않은 운장(雲長) 관우(關羽)이다. |
관우가 중앙무대에 등장하는 모습을 보자. 동탁군의 맹장 화웅에 맞선 제후 연합군의 장수들이 차례로 패퇴하자 연합군의 사기는 뚝 떨어졌다. 이때, 공손찬 진영의 마궁수로 있던 관우가 출전을 자원했다. 조조가 출전을 허락하면서, 따끈한 술 한 잔을 내어주었다. 관우가 말했다.
“술은 갔다 와서 마시겠습니다.”
말을 타고 쏜살같이 달려 나간 관우, 술이 채 식기도 전에 화웅의 목을 들고 왔다. 관우가 조조군의 포로로 잡혔을 때, 조조는 관우를 자기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적토마를 주는 등 극진히 환대했다. 그러나 관우는 유비의 거처를 알자마자, 조조와 격전을 벌이고 있는 원소 진영의 일급장수 안량과 문추를 차례로 목 베어 조조의 은혜에 보답하고 바로 유비를 찾아간다.
光談過五關斬六將(광담과오관참육장) 不談走麥城(부담주맥성)
관우의 공과(功過)를 압축한 글이다. ‘과오관참육장’은 관우가 유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조조의 다섯 관문을 돌파하면서 그를 저지하는 여섯 장수를 베어 천하에 명성을 떨치는 장면을 표현한 것으로, ‘광담’은 신나게 얘기하라는 뜻이다.
‘주맥성’은 관우가 오의 여몽에게 기습을 당하여 형주성을 빼앗기고 오백여 명의 패잔병들과 함께 맥성으로 도망치는 장면을 표현한 것으로, ‘부담’은 창피하니까 얘기하지 말라는 뜻이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관우의 굴욕’이라고나 할까.
관우는 의리와 충절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강직한 성품을 지닌 반면, 정에 약한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적벽대전에서 참패한 조조가 화용도로 도망치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관우는 충분히 조조를 잡을 수 있었는데도 전에 입었던 은혜를 생각해서 그냥 놓아준다.
또, 관우는 지나친 자부심으로 인해 상대방을 업신여기는 치명적인 결점도 지니고 있었다. 오주 손권이 사돈을 맺자며 딸을 달라고 했을 때, ‘범의 딸을 어찌 개의 아들에게 시집보내겠는가?’하며 거절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상대는 동맹국의 황제이지 않은가.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오나라가 형주를 차지하는 것이 순리이지만, 선수(先手)를 친 제갈량 덕분에 유비가 형주를 차지한다. 오주 손권이 유비에게 계속 형주반환을 요구하자, 유비는 ‘서촉을 얻으면 형주를 돌려주겠다.’고 약조를 한다. |
서촉을 차지하고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형주를 돌려주지 않던 유비는 마침내 형주의 세 군을 오에 돌려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형주지역 사령관인 관우가 반환을 거부한다. 이것은 내부적으로는 하극상이고 외교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결례이다. 오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어느 날, 관우는 오의 노숙으로부터 초청장을 받는데, 함정이 있는 것 같다는 측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관우는 ‘만약 내가 가지 않으면 나를 겁쟁이라고 비웃을 것이다.’며 배 한 척에 호위병 몇 명만 데리고 강을 건너간다. 노숙이 회담장 주위에 도부수(刀斧手)를 숨겨놓고 계속 술을 권하면서 형주반환을 요구하지만, 관우는 ‘그런 중요한 문제를 이런 술자리에서 의논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소.’하며 넉살좋게 받아넘긴다.
회합이 끝날 때까지 관우에게서 빈틈을 찾지 못한 노숙은 관우를 그냥 보낼 수밖에 없었다. ‘단도부회(單刀赴會)’라고 알려진 이 에피소드는 관우의 용맹을 한껏 돋보이게 하지만, 그 이면에는 촉오동맹의 전략적 의미를 간과하여 오를 적으로 만들어버린 관우의 치명적인 실책이 드러나 있다.
오군의 사령관인 여몽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육손이 임명되자, 관우는 ‘손권이 식견이 짧아 저런 애송이를 임명했구나.’하면서 오 쪽에는 완전히 마음을 놓고 위의 번성을 공략하다가 후방을 급습한 오의 여몽에게 무참하게 패하고 만다.
관우는 싸울 때마다 승리했지만 이때 딱 한 번 졌다. 그러나 그것이 촉을 멸망으로 이끄는 단초가 되는 치명타가 될 줄이야! 형주를 잃은 촉은 그때부터 서천의 분지 안에 갇히고 말았지 않았는가.
결국 오군에 포위된 관우는 맥성에서 탈출을 시도하다 사로잡히고 마는데, 그의 의기와 무예를 아깝게 생각한 손권이 함께 일하자고 회유를 한다. 그러나 관우는 ‘옥은 깰 수 있으나 그 흰빛을 바꿀 수 없고, 대나무는 태울 수 있으나 그 곧음을 꺾을 수 없소이다.’하며 죽기를 자청하고 결국 참수된다.
후일 후주 유선이 위에 항복하자, 관이 등 관우의 후손들은 관우에게 참수된 방덕의 아들 방회에게 잡혀가서 한 명도 남김없이 목숨을 잃었다. 이 때문에 관우의 가계는 멸문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에 관우의 67대손 한 사람이 나타나 화제가 되기도 했다. |
문(文)의 최고봉인 공자는 문왕(文王)으로 불리고, 그와 나란히 무왕(武王)의 지위에 있던 관우는 관제(關帝) 관성대제(關聖大帝)로 제(帝)가 되었다가 다시 신(神)이 되어 이제는 민중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 때 명장(明將) 진린이 부상을 당하자, 요양을 하기 위해 남대문 밖에다 관우의 사당을 설치했는데, 이를 ‘남묘(南廟)’라 불렀고, 이듬해에는 명 황제가 보내온 현판과 경비로 종로구 숭인동에 ‘동묘(東廟)’를 설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관우가 무장으로서 치명적인 실책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렇듯 추앙을 받고 있는 것은, 그의 무용이나 지략보다는 추상같은 의로움과 주군을 향한 뜨거운 충의를 더 높이 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제4장 촉나라의 인물들, (4-3) 정당한 평가를 해주어야 할 용장 '장비’
정사이건 야사이건 사서(史書)는 문사에 의해 기록된다. 사서에 등장하는 인물은 문사의 손에 의해 뛰어난 영웅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형편없는 망나니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은 그들이 남긴 글에 의해 그 인물을 평가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문사는 무사를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다. 문(文)을 항상 무(武) 위에 올려놓는 오래된 관행에다, 자신이 갖추지 못한 무에 대한 콤플렉스까지 더해진 것이다. 글줄을 좀 읽은 무사는 그래도 좀 낫다. 글을 모르거나 출신이 비천한 무사는 이들의 좋은 표적이 되어 형편없는 사람으로 매도당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피해자가 익덕(翼德) 장비(張飛)가 아닌가 싶다. 관우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의기와 무예를 갖추고도, 출신이 비천하고 무식하다는 이유로 후세에까지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장비의 출신배경, 인상(人相)과 성격, 무용,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주요 대목을 관우와 비교하면서 고찰해 보자.
우선 출신배경을 보면 관우는 서당 훈장 출신으로 식자층이고, 장비는 조그만 고을 현령의 무사 출신이다. 장비가 관헌을 죽이고 쫓기면서 한때 멧돼지를 잡아서 생계를 이어가던 때가 있었는데, 그 이력 때문에 푸줏간 출신으로 알려져 무식한 망나니로 낙인찍히고 만다. |
두 번째, 인상에서 관우는 선비형 무사로 묘사되어 있는 데 비해 장비는 돌쇠형(?) 무사로 묘사되어 있다. 넓은 이마, 누에눈썹, 봉안(鳳眼), 단정하고 긴 수염은 관우의 등록상표이고, 장비의 인상에는 일자눈썹, 치켜뜬 고리눈, 쭉쭉 뻗친 턱수염이 상표처럼 따라 다닌다.
세 번째, 성격상의 장단점을 살펴보자. 관우는 의리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점과 강직한 성품이 장점인 반면, 스스로를 과신하고 상대방을 깔보는 단점이 있었다. 또 정에 약해 손아귀에 들어온 조조를 옛정 때문에 놓아준 적도 있었다. 한 마디로 관우는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장비는 속과 겉이 똑같고 남을 의심하지 않는 장점(?)을 가졌으나, 조급한 성격에 술을 먹으면 난폭한 행동을 하는 단점이 있었다. 다시 말해 장비는 직선적이고 저돌적인 성격에 주사(酒邪)가 있는 무뢰한으로 그려져 있다.
네 번째, 무용을 비교해 보자. 우선 무기의 주 종목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관우의 손에는 정통 무사의 이미지를 주는 칼(청룡언월도)이 쥐어진데 비해, 장비의 손에는 칼이 아닌 창(장팔사모)을 쥐게 하였다.
무용담을 보자. 관우가 조조진영에 머물고 있을 때 원소가 자랑하는 두 맹장 안량과 문추의 목을 벤 적이 있었다. 조조가 그의 무용을 칭찬해 주자 관우는 이렇게 대답했다. “승상, 무용에 있어서는 저의 아우인 장비가 저보다 위입니다. 장비는 전장에 나가면 적장의 목을 베어오기를 마치 호주머니 속에서 물건을 꺼내듯 합니다.”
관우가 스스로를 낮추려고 아우를 과대포장한 말이지만, 이 말은 관우가 장비의 무예를 최소한 자신과 동급 정도로 보고 있다는 증좌(證左)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 말을 들은 조조, 사모하는(?) 관우의 말인지라 간담이 서늘하여 휘하 장수들에게 이렇게 명을 내린다.
“너희들은 어디에다 장비의 이름을 적어놓고 기억하라. 앞으로 장비를 만나거든 섣불리 덤비지 마라.”
장비의 진가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부분은 뭐니 뭐니 해도 장판교에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친 쾌거일 것이다. 유비가 형주의 피난민들과 함께 후퇴하느라 조조군에 쫓기며 장판교 건너 숲 속에 몸을 숨기고 있을 때이다. |
조운이 유비의 어린 아들 아두를 구해 품에 안고 피투성이인 채 달려왔을 때, 장판교 다리 위에서 큰 창을 쥐고 조조의 대군에 맞서 단 일기(一騎)로 버티고 서있는 거한이 있었다. 장비였다. 장비는 조운을 유비가 있는 숲 속으로 보내고 혼자 말위에 버티고 서서 고리눈을 부릅뜨고 우레 같은 목소리로 고함을 내질렀다.
“나는 연인(燕人) 장비다. 누구든지 자신 있는 놈은 나와서 덤벼라!”
조조진영의 장수 하후걸이 겁 없이 덤벼들었다가 단 일합에 목이 떨어졌다(장비의 고함소리에 놀라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써진 책도 있지만.). 조조진영의 장수들은 그 모습을 보고 모두 기가 죽어 멈칫하고 있었다. 군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 챈 조조가 황급히 영을 내렸다.
“퇴각하라. 그때 관우가 얘기하던 바로 그 장비이다.”
장비의 위풍당당한 기세가 조조의 대군을 물리친 것이다. 물론 그 옆 숲속에 매복이 있을까봐 조조가 섣불리 공격명령을 내릴 수 없기도 했지만, 이 정도면 장비의 용맹과 무용이 결코 관우에게 뒤진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중국인 특유의 허풍이 좀 가미되었음을 감안하더라도.
마지막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을 보자. 패주하던 관우는 맥성에서 빠져나오다가 아들과 함께 오군에게 사로잡혀 오주 손권의 간곡한 회유를 물리치고 참수를 당함으로써 무사다운 죽음을 맞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장비는 관우의 죽음에 흥분하여 범강(范彊)과 장달(張達)이라는 이름의 두 부하에게 무리하게 출정준비를 시켰다가, 기한 내에 준비를 하지 못하여 장비한테 두들겨 맞을 일을 두려워 한 이들에게 암살당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후세 사가들이 장비의 이름을 관우보다 한참 아래에 두게 된 것은, 관우가 전장에서도 항상 ‘춘추(春秋)’를 끼고 다니는, 문무를 겸비한 무장인 데 비해, 장비는 일자 무식꾼인 데다 주벽 때문에 큰일을 여러 번 그르친 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유비 또한 관우의 죽음에 흥분, 제갈량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오를 정벌하려다 참패하여 백제성에서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후세 사가들이, 촉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간 단초가 되는 유비의 판단착오마저도 관대하게 평가하면서도 장비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평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
아직도 명예회복을 하지 못한 장비, 이제는 정당한 평가를 해주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180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레와 같은 명성으로 남아있는 유비와 관우만큼은 아니더라도.
■ 제4장 촉(蜀)나라의 인물들, (4-4)당양벌 장판파 전투의 영웅 ‘조운’
북방의 두 강자 원소와 공손찬이 불꽃 튀는 접전을 펼치고 있을 때, 원소 진영의 맹장 문추에게 쫓기던 공손찬이 정신없이 도망가다가 어느 산비탈에서 말 아래로 꼬꾸라졌다. 뒤따라오던 문추가 창을 꼬나 잡고 돌진해왔다.
문추가 그를 내리찍으려고 창을 번쩍 드는 순간, 나무덤불 속에서 한 청년이 뛰쳐나와 그 창을 막아내고 공손찬을 구해주었다. 그리고 신기의 창술을 펼치며 문추를 쫓아냈다. 훤칠한 체격에 눈썹이 짙은, 아직 스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동안(童顔)의 미장부(美丈夫)였다. 공손찬이 물었다.
“정말 고맙소이다. 젊은이는 뉘시오?”
“저는 상산 사람으로 이름은 조운(趙雲), 자는 자룡(子龍)이라고 합니다.”
후일, 유비 진영에서 관우와 장비에 못지않은 활약을 하는 조운이 처음 삼국지에 등장하는 모습이다. 조운은 본래 원소 진영의 장수였으나 원소가 요란한 명성만큼 주민들을 아끼고 살피는 마음이 없는 것을 보고 실망하여 북방의 또 다른 영웅 공손찬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공손찬은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이 젊은 장수를 요직에 기용하지 않고 후진에 배치한다. 너무 젊은 데다 아직 속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 그 무렵 공손찬을 도우러 왔던 유비는 조운을 한번 보고, 마치 천생배필을 만난 청춘남녀처럼 첫눈에 반했다. 조운도 유비를 한번 보고 ‘이 사람이야말로 내가 평생 따르고 섬겨야 할 주군이구나.’하고 생각했다.
후일 공손찬이 원소에게 패망하자, 조운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다시 유비를 만나게 되고, 그때부터 유비를 그림자처럼 호위하며 끝없는 충절과 눈부신 무용을 떨치게 되는 것이다. |
‘조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뭐니 뭐니 해도 당양벌의 장판파(長板坡) 전투이다. 원소를 격파한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형주로 쳐들어오자, 유비는 그를 따르는 피난민들과 함께 조조의 군마에 짓밟히며 유표의 큰아들 유기가 있는 강하로 쫓겨 가고 있었다.
그때, 유비의 처자가 적진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조운은 단기(單騎)로 조조의 대군 속에 뛰어든다. 그리고 온몸이 피투성이인 채 창날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적병을 베어 넘기며 유비의 아들 ‘아두’를 구해온다. 이때 그가 죽인 조조군의 장수만도 십여 명이었다.
언덕 위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조조까지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때부터 ‘상산 조자룡’하면 장판파에서 조조의 대군 사이를 무인지경으로 휘젓고 달리던 그 눈부신 무용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조자룡이라는 빛나는 이름을 후세에 알리게 되었다.
또, 유비와 정략결혼한 손권의 여동생 손 부인이 오로 돌아갈 때 몰래 아두(阿斗)를 데리고 떠나자, 조운은 오의 계략을 간파하고 재빨리 뒤따라가서 아두를 빼앗다시피 다시 찾아온다. 그는 후일 촉의 후주(後主)가 되는 아두를 두 번이나 위기에서 구한 것이다.
조운은 노장군 황충과 함께 조조로부터 한중을 빼앗는데도 선봉을 맡아 큰 공을 세웠다. 유비가 죽고, 제갈량이 촉주 유선에게 저 유명한 출사표를 바치고 위나라 정벌에 나섰을 때 조운의 나이는 이미 칠십에 가까웠다. 그 때문에 제갈량은 정벌군의 진용에서 조운을 제외했는데, 이를 알게 된 조운은 불같이 노하며 군막에서 뛰어나와 따지듯 외쳤다.
“내가 비록 늙었다 하나 선제(先帝) 이래 선봉을 맡지 않은 적이 없소이다. 대장부가 싸움터에서 죽는다면 그보다 더한 복이 없을 터인데, 어찌 나를 뺀단 말이오. 나를 선봉으로 써주지 않는다면 이 주춧돌에 머리를 짓찧어 죽어버리겠소!”
끝없는 노익장이요, 한없는 충절이었다. 결국 제갈량은 그에게 선봉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위군에서는 조조의 부마인 하후무가 총대장이었고, 서량대장군 한덕이 용맹무쌍한 네 아들과 함께 선봉을 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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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과 맞붙은 선봉대장 한덕은 네 아들을 차례로 보냈으나 모두 조운의 창에 찔려 죽고 마침내 그 자신마저도 조운의 창에 모가지가 떨어지고 말았다. 서전에서 적의 선봉장 5부자를 차례로 물리친 조운의 승전보에 힘을 얻은 촉군은 사기충천하여 마침내 위군을 무찌르고 총대장 하후무까지 사로잡는 개가를 올렸다.
그는 한평생 무장으로서 패배를 몰랐고, 신하로서도 진심어린 충절을 다하며 살다가 칠십이 넘어서 병사했다. 조운의 죽음을 전해들은 촉주 유선은 지난날 두 번이나 자신을 구해준 은혜를 생각하며 목 놓아 울었고, 제갈량은 쓰러져 흐느끼며 이렇게 탄식했다.
“이제 촉은 기둥 하나를 잃었고, 나는 팔 하나를 잃었다.”
제갈량에게 조운은 남다른 장수였다. 관우와 장비는 초창기부터 유비와 의형제를 맺은 사이인 데다, 둘 다 개성이 너무 강하여 제갈량이 다루기에는 좀 버거운 점이 있었다. 그러나 조운과는 늦게 유비진영에 합류했다는 공통점도 있었고, 또 조운의 성격도 무장치고는 다소 온유한 편이어서 제갈량과는 호흡이 아주 잘 맞았던 것이다. 그런 조운이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으니….
우리 속담의 ‘조자룡이 창 들고 서있는 듯하다.’는 말은 ‘감히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빈틈이 없다.’는, 즉 완벽한 경호를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조운이 중국사를 통틀어 몇 손 안에 꼽히는 창술의 대가이기 때문에 만들어진 속담이리라.
또, ‘조자룡 헌 칼(창) 쓰듯’이라는 말도 자주 쓰이고 있는데, 이것은 조운이 장판파의 싸움에서 창날이 너덜너덜하도록 창을 쓰고 나서, 다시 적군에게서 뺏은 칼을 휘두르며 적병을 닥치는 대로 베어 넘기던 눈부신 무용에서 나온 말이다. ‘아주 익숙하게 사용한다.’는 뜻과 함께 ‘마구잡이로 휘두른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혼자 적진에 뛰어 들어 주군의 아들을 구해올 만큼 투철한 충성심과 걸출한 무용을 갖춘 조운 자룡, 천수를 다한 후 온전한 몸으로 성도의 금병산에 묻혔다. 동료인 관우와 장비는 둘 다 참수되어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말았지 않았는가.
생각하건대, 삼국지에 등장하는 무수한 장수들 중에서 무용 충절 최후 등에서 조운만큼 모든 것을 골고루 갖춘 장수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는 참으로 복 받은 장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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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장 촉나라의 인물들, (4-5)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명재상 ‘제갈량’
소설 삼국지의 주인공은 유비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파고들어가 보면 전반부는 조조, 후반부는 제갈량이 실질적인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삼국지의 주인공은 세 사람, 즉 유비와 조조, 그리고 제갈량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삼국지 후반부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제갈량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제갈량(諸葛亮). 자는 공명(孔明), 삼국지연의에 의해 거의 신격화된 사람으로, 주 문왕 서백후를 도운 강태공(여상), 한 고조 유방을 도운 장자방(장량)과 함께 오천 년 중국사에서 3대 명재상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일찍 부모를 여읜 제갈량 형제들은 숙부와 함께 양양의 융중(隆中)에 자리 잡고 살게 되었다. 거기서 주경야독하면서 가슴속의 이상을 키워가고 있다가, 형 제갈근은 오나라로 건너가 손권의 참모가 되었고, 제갈량은 유비를 섬기는 촉나라의 군사(軍師)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의 집안 조카 제갈탄은 위나라의 장수로 있으면서 후일 사마소의 찬탈기도에 반기를 들고 저항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다. 당시 ‘오는 호랑이를 얻고 촉은 용을 얻었는데 위는 개를 얻었다.’는 말이 회자되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들 모두 뛰어난 인물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제갈량이 세상에 나온 것은 유비가 삼고초려를 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제갈량이 주로 경세(經世)를 겨냥한 학문을 익혀왔고, 당대의 재사들과 교유(交遊)를 통해 천하대세를 가늠할 식견과 안목을 기르고 있었다는 점, 스스로를 춘추시대의 명재상 관중과 명장 악의로 비유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또한, 결혼을 통하여 명문가와 결속을 맺고 신분상승을 꾀한 것도 그가 초야에 묻혀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반증이 되리라. 제갈량의 장인은 그곳의 호족인 명사(名士) 황승언, 장모는 형주 제일의 명문 채 씨 집안의 딸로서 형주자사 유표의 부인과 자매였다.
제갈량은 분명히 세상에 나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미 확고한 터전과 많은 인재를 보유한 조조와 손권보다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유비를 주군으로 택했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설명하면서 서촉에서 기업(基業)하여 오와 힘을 합쳐 위를 공략하는 전략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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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관 27세의 제갈량이 혜성처럼 등장하면서부터, 한때 천하의 7할을 석권했던 조조가 참담한 좌절을 맛보게 됨은 물론, 삼국지의 주역 자리도 그에게 빼앗기고 만다. 적벽대전에서 손권과 유비의 5만 연합군이 조조의 백만 대군을 괴멸시킬 수 있었던 것은 명장 주유의 공이 크지만, 그것도 제갈량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갈량은 기도로 동남풍을 불게 하기도 하고, 공성(空城)에서 거문고 하나로 적의 대군을 물리치기도 하고, 또 축지법을 써서 추격하는 적군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의 행적은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부풀려진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제갈량이 왔다가 울고 가겠다.’는 말이 있다. 지략이 뛰어난 제갈량이 상대방의 지략에 놀라 자신의 무능을 한탄하겠다는 뜻으로, 지혜와 책략이 아주 뛰어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제갈량이 지략의 대명사임을 방증하는 속담이다.
제갈량의 기량을 정치가와 군략가의 측면으로 나누어서 살펴보자.
먼저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보자. 어리석은 촉주 유선을 하늘처럼 받들고 충성을 다하는 모습에서 명재상으로서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국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똑똑한 2인자가 아둔하기 짝이 없는 1인자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흠으로는, 승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크고 작은 일 모두에 관여했던 점을 드는 사람이 많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얘기지만, 믿고 맡길 만한 인재가 부족했다는 점과 상벌이 엄격하고 공평무사했다는 점에서 정상 참작을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음, 군략가로서의 면모를 보자. 촉(蜀)의 5~6배에 달하는 위(魏)의 국력을 감안해보면, 앉아서 망하느니보다는 싸워서 활로를 찾는 전략을 택한 것은 분명 현명한 판단이다. 결국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6차에 걸쳐 공세를 취한 사실만으로도 그가 뛰어난 군략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월등한 군사력을 가진 적장 사마의가 시종일관 수비에 치중한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첫 북벌 때 용장 위연이 제안한, 지름길로 장안을 치는 기습책을 채택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안전 위주의 지지 않는 전략으로 일관한 제갈량의 입장에서는 용인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전쟁에는 도박도 필요한 법이다.
위(魏)와의 전투에서 제갈량은 여러 차례 신출귀몰하는 지략을 펼치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얻지는 못한다. 분골쇄신하던 제갈량, 드디어 오장원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만다. 그의 나이 54세, 병명은 과로로 인한 폐결핵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가 죽자, 그와 함께 중원을 다툰 위의 명장 사마의는 이런 말을 남긴다. |
“공명은 참으로 천하의 기재(奇才)이다.”
제갈량이 삼국지에 처음 모습을 드러낼 때의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필두로, 그의 행보를 따라 수어지교(水魚之交), 만두(饅頭), 칠종칠금(七縱七擒), 출사표(出師表), 읍참마속(泣斬馬謖) 등 수많은 고사성어가 만들어졌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된, 요즘말로 뉴스메이커였던 셈이다.
그가 죽은 후에 보니 그의 재산은 ‘뽕나무 8백 그루와 전답 15경(頃)’이 전부였다고 한다. 청빈한 공직자로서도 귀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陳壽)는 촉장 마속의 막하에 있던 진식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마속이 제갈량에 의해 목이 베어질 때 진식도 함께 요참(腰斬)을 당했다. 그런 악연이 있음을 감안하면서 진수가 쓴 제갈량에 대한 인물평을 보자.
‘해마다 군사를 이끌고 나갔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으니 장수로서는 그리 뛰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승상으로서는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백성을 따뜻하게 어루만질 줄 알았으니 실로 다스림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가히 관중과 소하에 견줄 만했다.’
다음에 중국에 가게 되면 사천성 성도에 있는 무후사(武侯祠)를 꼭 한번 찾아가 제갈량 전(殿)에 참배하고 싶다.
■ 제4장 촉나라의 인물들, (4-6)제갈량에 버금가는 준재(俊才) ‘방통’
형주의 신야에서 인재를 구하고 있던 유비는, 수경선생 사마휘로부터 복룡(伏龍)과 봉추(鳳雛) 중에서 한 사람만 얻어도 가히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사마휘는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인재를 뜻하는 ‘복룡봉추’는 여기서 생겨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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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룡은 하늘에 오를 때를 기다리는 숨어있는 용으로 제갈량을, 봉추는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새끼봉황을 의미하는데 방통을 지칭하는 말이다. 둘 다 천문과 지리에 통달하여 자유자재로 지략을 펼치고 군사를 부리는 재주를 지닌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제갈량에 버금가는 재주를 가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준재(俊才) 방통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봉추 방통(龐統), 자는 사원(士元). 적벽대전 때 오군 총사령관 주유의 요청을 받고 조조 진영을 찾아가 조조군의 선단을 쇠사슬로 묶게 하여 오나라 수군이 조조의 백만대군을 화공(火攻)으로 괴멸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사람이다.
방통은 주유의 뒤를 이어 오군 총사령관이 된 노숙의 천거로 오주 손권을 만났지만, 그의 용모에 실망한 손권은 그를 채용하지 않았다. 그의 라이벌 제갈량이 준수한 용모를 지닌데 비해, 방통의 용모는 너무 볼품이 없었던 것이다.
노숙과 제갈량으로부터 추천장을 받은 방통은 다시 유비를 찾아갔다. 그리고 일부러 추천장은 내놓지 않고 인사를 했다. 우레 같은 명성에 비해 용모가 미치지 못한 데에 실망한 유비는 그에게 조그만 고을의 현령 자리를 하나 내주었다. 방통은 자신을 겨우 현령 감으로밖에 보지 않은 데에 화가 났으나 애써 참으며 유비가 내린 벼슬을 받고 임지로 떠났다.
유비는 방통이 매일 술만 마시며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장비에게 직접 가서 확인해보도록 지시했다. 장비가 뇌양현에 이르자, 관리들이 모두 나와 맞이하는데 방통은 보이지 않았다. 방 현령을 찾으니 한 관리가 기다렸다는 듯 일러바쳤다.
“방 현령은 부임한 뒤로 지금까지 백여 일 동안 고을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매일 술만 마셨습니다. 아마 지금도 어디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을 것입니다.”
장비가 방 현령을 찾아오라고 호통을 치자, 이윽고 벌겋게 취한 방통이 나타났다. 장비가 가까스로 화를 억누르며 ‘어찌하여 일은 하지 않고 매일 술타령만 했느냐?’고 물었다.
방통이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까짓 백 리도 안 되는 고을의 일이야 뭐 어려울 게 있겠소?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내 금방 해치울 테니.”
방통이 그동안 밀린 서류를 모두 가져오라고 하자, 관리들이 이런저런 문서며 밀린 송사(訟事) 자료들을 가져왔다. 그는 손으로 문서를 넘기며 입으로는 처리 방향을 지시하고, 이어 송사의 판결을 내리는데 누가 들어도 합당하여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
백여 일이나 밀린 관청 일을 반나절도 안 되어 모두 깔끔하게 처결하는 것을 본 장비는 그만 눈이 휘둥그레졌다. 돌아온 장비가 유비에게 그간의 일을 자세히 고하자, 깜짝 놀란 유비는 대 현인을 몰라본 자신의 과오를 크게 뉘우쳤다.
유비는 방통을 모셔오게 한 다음 계단 아래까지 내려가 자신의 잘못을 빌고, 곧바로 그를 군사 제갈량과 함께 전략을 수립하는 부군사(副軍師)로 임명했다. 드디어 방통은 제갈량과 함께 유비의 양쪽 날개가 된 것이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형주를 지키게 하고, 방통을 정벌군의 군사(軍師)로 임명하여 서촉 공략에 나섰다. 정벌군은 방통의 계책 덕분에 연승을 거듭, 서촉 지역을 한 군데씩 점령해나갔다. 순조롭게 나아가던 정벌군은 낙성에 이르는 갈림길 앞에 이르자 잠깐 멈춰 섰다. 이때 형주에 있는 제갈량으로부터 서찰이 왔다. 유비가 읽어보니 이렇게 씌어 있었다.
“제가 간밤에 천문을 보니 으뜸장수에게 불길한 일이 생길 조짐이 있습니다. 모든 일을 한 번 더 살펴보시고 함부로 가볍게 나아가지 마십시오.”
유비는 진군을 멈춰야겠다고 생각하며 방통에게 의견을 물었다. 서찰을 찬찬히 훑어본 방통은 서촉 공략에서 자신이 큰 공을 세우는 것을 제갈량이 견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역시 간밤에 천문을 보았습니다만, 그것이 꼭 우리 쪽 으뜸장수에게 불길한 일이 생길 조짐은 아닙니다. 걱정 마시고 진군을 계속하십시오.”
마음이 내키지 않던 유비는 방통이 거듭 권하자, 다시 마음을 바꾸고 군사를 두 갈래로 나누어 진군하여 낙성에서 만나기로 했다.
다음날, 막 출발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방통이 낙마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를 본 유비는 방통의 말이 너무 여윈 것을 헤아리고 자신이 타던 백마를 내주고 자신은 다른 말을 탔다. 방통은 감읍하며 유비가 타던 백마를 타고 출발했다.
이윽고 어느 산의 소로(小路) 입구에 이르자, 방통은 문득 주위에 가득한 살기를 느끼고 ‘이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한 부하장수가 대답했다. |
“낙봉파입니다.”
방통은 깜짝 놀라며 군사들에게 이곳을 속히 통과하라고 지시했다. 낙봉파(落鳳坡)라면 봉황이 떨어지는 곳이란 뜻이고, 자신이 바로 새끼봉황이 아닌가.
그 순간, 함성이 일며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산언덕에 매복한 촉병들이 봉추가 탄 백마를 보고 유비인 줄 알고 집중해서 활을 쏜 것이었다. 방통은 그 자리에서 온 몸에 화살을 맞고 고슴도치처럼 되어 말에서 떨어져 죽으니 이때 그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제갈량과 동시대에 태어난 것이 비극이었는지, 방통의 큰 재주는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꺾이고 말았다. 새끼봉황은 끝내 대붕(大鵬)으로 성장하지 못했던 것이다. 제갈량은 하늘로 날아올랐지만, 방통은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던 것이다.
방통이 오래 살아남아 제갈량과 적절히 역할분담을 했더라면 관우가 그렇게 어이없게 형주를 잃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북벌 때 한 사람이 성도에 남아서 후주 유선을 보좌했더라면 촉이 그렇게 허망하게 멸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 제4장 촉나라의 인물들, 노익장을 과시한 명궁(名弓) ‘황충’
예순 가까운 나이에 삼국지에 처음 등장하는 무장 황충(黃忠), 자는 한승(漢升). 형주에서 중랑장을 지내다가 장사태수 한현을 섬기게 되었다. 그는 뛰어난 명궁(名弓)에다 용력도 대단했다. 그의 활 솜씨는 백 발자국 떨어진 곳에 있는 버들잎을 정확히 꿰뚫을 정도였다.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유비는 형주 점령에 이어 계양군과 무릉군을 쳐서 빼앗고, 다시 관우를 앞세워 장사군을 공략하고 있었다. 정벌군의 선봉 관우와 장사군의 용장 황충의 싸움은 문자 그대로 용호상박이었고, 백 합이 넘어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다음날, 두 장수가 다시 불꽃을 튀기며 접전을 벌이고 있을 때, 황충의 말이 발을 헛디딘 듯 갑자기 황충이 말에서 떨어졌다. 관우가 다가가 청룡도를 번쩍 쳐들었다. 그러나 말의 실수에 편승한 승리는 의(義)가 아니라고 생각한 관우, 칼을 도로 거두며 말했다. |
“얼른 돌아가서 다시 말을 바꿔 타고 오너라!”
황충은 성안으로 물러갔으나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그때 관우가 칼을 내려쳤으면 자신의 목은 영락없이 땅바닥에 굴러 떨어지고 말았으리라.
황충은 진채로 돌아와 새 말로 갈아탔다. 다시 나가 관우와 맞붙게 된 황충은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거짓으로 도망치다가 돌아서서 활을 쏠 심산이었다. 관우가 쫓아왔다. 황충이 갑자기 획 돌아서며 활을 쏘았다. 날아간 화살은 관우의 투구 끈을 뚫고 투구 언저리에 정확히 꽂혔다.
깜짝 놀란 관우,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황충이 자신의 투구끈을 쏜 것은 아까 자신을 죽이지 않은데 대한 갚음 같았다.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의 머리를 한 살에 꿰어놓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찔했다.
그날 싸움이 그렇게 끝나자, 태수 한현은 즉시 황충의 목을 베라고 명을 내렸다. 명궁인 황충이 일부러 관우를 맞히지 않고 살려주었다며. 이때 젊은 장수 위연이 반기를 들어 한현의 목을 베고 황충을 구출하여 함께 유비진영에 항복했다.
황충은 태수 한현을 장사지낸 후, 유비를 섬기는 촉의 장수가 되었다. 그리고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흰 수염을 휘날리며 노익장을 과시, 위연과 함께 유비가 서촉을 평정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게 된다.
유비와 조조의 한중쟁탈전에서 황충은 수십 년간 조조의 측근으로 활약하던 맹장 하후연을 활을 쏘아 죽이는 개가를 올렸다. 결국 유비는 조조로부터 한중을 빼앗아 한중왕으로 등극하고, 노장군 황충은 관우 장비 조운 마초와 함께 촉의 오호(五虎) 대장군에 위촉되었다.
그 후 형주를 지키던 관우가 오의 여몽에게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고, 장비마저 부하에게 살해되어 그 수급이 오나라로 넘어가는 불상사가 일어나자, 유비는 두 동생의 원수를 갚기 위해 대대적인 오나라 정벌군을 일으켰다.
이때 유비는 황충과 더불어 관우와 장비의 아들인 관흥과 장포를 선봉장으로 명했다. 젊은 두 장수는 각각 죽은 아비의 원수를 갚기 위해 분전, 서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유비는 크게 기뻐하며 여러 장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두 장수를 격려했다. |
“이제 지난날의 장수들은 모두 늙어서 아무 쓸모없게 되었다. 그런데 젊은 두 조카가 이토록 용맹스러우니 오나라 따위를 겁낼게 무어랴!”
젊은 두 장수를 칭찬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앞에 한 말 ‘늙은 장수들은 이제 쓸모가 없게 되었다.’가 문제였다. 이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은 노장군 황충은 같은 연배의 장수인 오반의 막사로 달려가 불편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나는 이때까지 숱한 싸움터를 누볐으나 한 번도 뒤로 물러선 적이 없었다. 내 나이 비록 일흔이 넘었으나 아직도 고기 열 근을 한꺼번에 먹을 수 있고, 쌀 두 섬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사람만이 당길 수 있는 활을 쏠 수 있다. 그런 나를 늙었다고 어찌 이리 무시하는지.”
황충이 격한 음성으로 불평을 토로하고 있을 때 마침 군사 하나가 와서 오군의 선봉이 가까이 이르렀다고 보고했다.
그 말을 들은 황충, 누가 말릴 틈도 없이 갑자기 말에 오르며 쏜살같이 군막을 뛰쳐나갔다. 그리고는 오군을 향해 돌진하며 홀로 싸움을 걸었다. 적장은 오군의 맹장 반장이었다. 그날 황충의 기세가 워낙 드센 탓인지 반장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도망쳐 버렸다.
다음날, 반장이 다시 대군을 이끌고 앞장서서 쳐들어오자, 황충은 주위사람들의 만류도 듣지 않고 다시 혼자 말을 타고 달려 나갔다. 반장은 몇 합 싸우다가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황충이 소리치며 뒤를 쫓았다.
“이놈, 달아나지 마라! 오늘은 너의 목을 가져가야겠다!”
그러나 그것은 반장의 계략이었다. 황충이 적진 깊숙이 쫓아갔을 때 갑자기 천지를 뒤흔드는 함성과 함께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오군이 쏜 화살 하나가 그의 어깨에 꽂혔다. 황충이 비틀거리며 퇴로를 찾고 있는데 때마침 관흥과 장포가 구원군을 이끌고 왔다.
진채로 돌아온 황충, 상처를 치료했으나 워낙 늙어서 그런지 상처가 점점 더 깊어졌다. 유비는 몸소 황충의 병상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잘못을 사과했다.
“이번에 노장군께서 부상을 당한 것은 순전히 나의 실언 때문이오. 부디 용서해주구려.” |
그러자 황충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신(臣)은 한낱 무부(武夫)로서 촌구석에서 썩을 몸이었습니다만, 늦게나마 폐하를 만나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고 지냈습니다. 신의 나이 일흔 다섯,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부디 옥체를 보존하시고 힘을 길러 꼭 중원을 평정하십시오.”
그날 밤 황충은 숨을 거두었다. 유비는 그의 시신을 성도로 보내 후히 장사지내게 했다. 노장군 황충. 늙어서야 삼국지에 등장했으나 빛나는 무용과 올곧은 충의로 노년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마지막에는 이성을 잃고 혼자 무모하게 적진에 뛰어들기도 했으나 그 또한 노병의 아름다운 용기가 아니었는지….
■ 제4장 촉나라의 인물들, (4-8) 출중한 재주를 가진 형제 ‘마량과 마속’
삼국지에는 마(馬) 씨가 여러 명 등장한다. 서량의 맹호 마등과 그의 아들 마초, 조카 마대, 또 마량과 마속 형제, 그리고 사마(司馬) 씨 3대까지. 두 가지의 고사성어와 관련이 있는 마량과 마속 형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여세로 형주와 남군, 양양까지 차지한 유비가 널리 인재를 구하고 있을 때 막빈(幕賓) 이적이 한 사람을 추천했다.
“이 고을에 마 씨 5형제가 있는데 모두 재주가 뛰어나다고 합니다. 가장 인망이 높은 사람은 마량인데 자는 계상(季常)이며 눈썹이 희고, 마속은 자가 유상(幼常)이며 병서에 밝다고 합니다. 마씨오상(馬氏五常) 중에 백미가 으뜸이라고 하니 우선 마량을 부르시지요.”
‘백미(白眉)’라는 고사성어의 유래이다. ‘흰 눈썹’이라는 뜻이지만, 여럿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나 사물을 지칭하는 말이다. 유비는 곧 사람을 보내 마량을 초빙했다.
유비의 부름에 응한 마량은, 유표의 맏아들 유기를 형주자사로 세워 형주의 민심을 안정시키고, 남쪽으로 나아가 영릉 무릉 계양 장사 네 군을 공략하도록 진언했다. 유비는 그의 말대로 네 군을 차례로 평정하고, 황충과 위연이라는 두 맹장까지 얻었다. |
유비가 서촉을 평정한 후, 마량은 전략요충지인 형주를 지키는 관우의 참모로 배속되었다. 위나라의 번성을 공략하다 팔에 화살을 맞은 관우가 신의(神醫) 화타에게 독이 스며든 뼈를 긁어내는 수술을 받았을 때 관우와 함께 바둑을 두었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관우가 오군에게 사로잡혀 참수당한 뒤,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위해 대군을 이끌고 오로 쳐들어갔을 때 마량은 유비의 참모로서 종군(從軍)했다. 유비가 이끄는 촉군이 관우와 장비를 죽인 원흉들을 모두 처단하고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자, 오에서는 형주를 촉에게 반환하겠다며 화친을 하자고 사신을 보내왔다.
이때 마량은 ‘원수들을 모두 죽였으니 형주를 돌려받고 오나라와 다시 화친하여 함께 위나라를 공략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이제 철군해야 합니다.’하고 조언했다. 분명 옳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유비는 오를 멸망시키고 손권을 죽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마침내 오나라 깊숙이 쳐들어간 촉군은 한여름 뙤약볕을 피해 숲속 그늘에 장사진(長蛇陣)을 쳤다.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낀 마량은 촉군의 진형도를 그려서 한중으로 달려가 제갈량에게 보였다.
이를 보고 사색이 된 제갈량은 마량에게 ‘숲 속에다 장사진을 치면 적의 화공(火攻)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며 속히 돌아가서 진형을 바꾸라고 했다. 그러나 마량이 돌아왔을 때 촉군은 이미 오의 명장 육손의 화공에 여지없이 참패한 뒤였다.
그 후 마량은 촉한 부흥을 위해 분골쇄신하다 제갈량이 남만정벌을 떠났을 때 병으로 죽었다. 제갈량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북쪽을 향해 제사를 지냈다. 마량은 뛰어난 지략가는 아니었지만 유비의 기업(基業)을 안에서 충직하게 도운 인물이었다. 그가 죽자 아우 마속이 형의 빈자리를 메웠다. 병서를 읽어 병법에 능한 그를 제갈량이 발탁한 것이었다.
임종이 가까워진 유비의 부름을 받고 제갈량이 찾아왔을 때, 마침 마속이 유비 곁에 있었다. 마속이 잠깐 나간 사이에 유비는 마속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예, 당대의 영재(英才)로 봅니다.”
제갈량이 평소의 생각대로 대답하자, 유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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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소. 내가 보기에 마속은 실제의 재주나 실력보다는 말이 더 앞서는 듯하오. 승상께서는 마땅히 잘 살펴서 써야 할 것이오.”
그러나 좋게만 보면 곰보딱지도 보조개로 보이는 법, 제갈량은 유비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마속을 가까이 두고 총애했다. 남만정벌 때도 마속이 자신의 심중을 가장 잘 헤아리는 것을 보고는 흐뭇해 마지않았다.
출사표를 올리고 북벌에 나선 제갈량이 한중의 목구멍 같은 요지인 가정(街亭)을 지키는 장수로 누굴 보낼까 하고 둘러보자, 마속이 자신 있다며 자원했다. 잘못되면 목을 베어도 좋다는 군령장까지 마속이 써주었지만 제갈량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길목 요지에다 진채를 세우라고 거듭 당부했다. 가정이 뚫리면 북벌은 여지없이 실패로 끝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정에 다다른 마속은 제갈량의 지시를 무시하고, 어설픈 지관(地官)이 더 큰소리를 치듯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리치면 그 기세는 파죽지세’라며 병서의 한 구절까지 들먹여가며 산꼭대기에다 진을 쳤다.
드디어 적장 사마의가 이끄는 위의 대군이 나타났다. 사마의는 촉군이 산꼭대기에다 진을 친 것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선봉장 장합에게 산을 겹겹이 포위하게 했다. 한나절이 지났을까. 산 아래로 통하는 길이 끊겨 식수를 구하지 못한 촉군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사마의는 산기슭마다 불을 지르게 했다. 불길이 산위로 덮쳐오자, 촉군은 꼼짝없이 산꼭대기에 갇혀 우왕좌왕하다 대부분 불에 타죽거나 장합이 이끄는 위군에게 쫓겨 도망치기에 바빴다. 전략요충지인 가정이 적의 수중으로 떨어지자, 제갈량은 패배를 자인하고 전군을 철수했다. 그리고 군령을 어기고 참패한 마속의 책임을 물어 눈물을 흘리며 그를 참형에 처했다. 이것이 ‘울면서 마속의 목을 벤다.’는 뜻의 고사성어 ‘읍참마속(泣斬馬謖)’이 생겨난 유래이다. 아끼는 부하를 제거할 때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마속이 제갈량에 의해 목이 베어진 것을 두고 애당초 인선(人選)이 잘못된 것이라며 너무 지나친 처사요, 고지식한 행위라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길목 요지에다 진채를 세우라고 한 총사령관의 군령을 무시하고 산꼭대기에다 진을 쳐서 거국적인 북벌을 돌이킬 수 없는 패전으로 몰고 간 마속의 책임을 어찌 가볍다고 할 것인가.
자식처럼 아끼며 총애하던 부하장수를 참형에 처해야 했던 제갈량의 심정을, 편안히 책상 앞에 앉아 고작 삼국지연의 몇 번 읽은 필부가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생각하건대, 모나지 않고 성실하게 일한 형 마량에 비해, 아우 마속은 자신의 재주를 믿고 너무 앞서가려다가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리라. |
■ 제4장 촉나라의 인물들, (4-9) 제갈량에게 밉보인 비운의 맹장 ‘위연’
관우 장비 황충 등 오호대장군이 사라진 촉에서 발군(拔群)의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반역자라는 이름을 남긴 무장이 있다.
촉의 맹장 위연(魏延), 자는 문장(文長). 잘 익은 대춧빛 얼굴에 빛나는 눈을 가진 용맹무쌍한 장수로, 형주를 얻은 유비가 장사군을 평정할 때 노장 황충과 함께 새로 얻은 젊은 무장이다.
관우가 장사군(長沙郡)의 무장 황충과 싸울 때, 황충은 관우를 죽이지 않으려고 활을 약간 비껴 쏘았는데, 이를 알아챈 태수 한현에 의해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때 재빨리 태수 한현의 목을 베어 죽인 뒤 황충과 함께 유비 진영에 귀순한 장수가 바로 위연이다.
이때 제갈량은 위연이 제 주군을 죽인 불충한 짓을 했고, 또 그의 뒤통수에 반골(反骨)의 상(相)이 있다 하여 그를 죽이려고 했으나 유비가 만류하는 바람에 살려주었다.
촉의 장수가 된 위연은 노장 황충과 함께 서촉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또 유비가 한중을 공략할 때도 위연은 활을 쏘아 조조의 앞니를 부러뜨리고 낙마케 하는 등 큰 활약을 했다. 형주에 이어 서촉과 한중(漢中)까지 차지한 유비가 드디어 한중왕에 올랐을 때 위연은 그간의 공로로 한중태수에 임명되었다.
유비가 죽고 아들 유선이 촉의 황제로 즉위했을 때는 관우 장비 황충 마초 등이 모두 죽어 촉의 일급 무장으로는 그와 노장 조운만 남아 있었다. 위연은 간혹 공을 다투다가 장수들 사이에 불화를 조성한 적도 있었으나, 그가 전장에서 보인 용맹과 공적은 그런 흠을 씻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발군의 활약을 했다.
제갈량의 남만정벌 때 그는 조운(趙雲-子龍)과 함께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고, 제갈량이 출사표를 올리고 첫 북벌에 나섰을 때도 그가 선봉장을 맡았다. 위연은 출정길 작전회의에서 제갈량에게 한 가지 계책을 건의했다.
“승상께서 제게 정병 5천 명만 주신다면 자오곡(子午谷)으로 들어가 위(魏)의 서쪽 중심부요 군사기지인 장안을 기습하겠습니다. 열흘 안에 장안을 점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승상께서 대군을 이끌고 진군하신다면 장안의 서쪽은 모두 우리 땅이 될 것입니다.” |
이른바 위연의 자오곡 계책이다. 귀가 솔깃해지는, 한번 시도해볼 만한 작전이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위험성이 높다하여 그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다 갖춘 후에 완벽하고 세밀하게 작전계획을 수립해서 싸우는 제갈량의 스타일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세의 사가(史家)들 사이에 위연의 계책이 합당하다고 주장하는 의견이 많다. 위(魏)의 5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촉(蜀)의 국력을 생각할 때 어차피 기습으로 승부를 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반면 제갈량의 정공법은 주도면밀하나 진군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충분히 대비할 시간을 주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반면 제갈량을 두둔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위(魏) 나라의 병력은 한번 싸움에 지더라도 다시 보충이 가능하지만, 촉의 병력은 전 국력을 결집한 것이기 때문에 보충이 불가능하고, 한번 잘못되면 나라의 존망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갈량으로서는 이긴다는 확신이 없는 작전에 투기적인 모험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어차피 정답은 없는 것인 바, 두 의견 모두 충분히 일리가 있다. 하지만 위연의 계책대로 한번 해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전쟁이란 어차피 도박 같은 것인데….
위연은 가끔 군율을 어기고 불손한 언행을 하기도 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제갈량이 군율을 위반한 마속이나 진식 같은 장수는 과감히 참형에 처하면서도 위연을 벌하지는 않았다. 촉에는 그만한 장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촉군 내에서의 그의 역량은 절대적이었다.
촉(蜀)의 수차례에 걸친 북벌은 제갈량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했고, 마침내 제갈량은 과도한 심로(心勞)가 원인이 되어 오장원(五丈原)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만다. 제갈량은 죽기 전에 측근 양의를 불러 ‘내가 죽으면 틀림없이 위연이 반역할 것이다.’며 위연을 제거할 계책을 일러주고 모든 군권을 양의에게 물려주었다.
한편, 제갈량이 죽는 날 밤 위연은 머리에 뿔이 돋는 꿈을 꾸었다. 이를 괴이쩍게 생각한 위연이 아침에 승상부로 가보니 제갈량은 이미 숨졌고 모든 군권은 양의에게로 넘어가 있었다. 제갈량 다음은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위연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부장(副將) 마대와 함께 반기를 들었다. |
촉군은 제갈량의 영구를 앞세우고 성도(成都)로 철수했다. 이때 촉으로 가는 잔도(棧道)를 불태우고 철군하는 양의를 막아선 위연은 제갈량에게 미리 밀계를 받은 마대에 의해 목이 베어지고 만다. 제갈량의 죽음에 이어 촉군의 최고 맹장이 이렇게 해서 또 사라진 것이다.
맹장 위연, 이루어놓은 공적에 비해 억울한 구석이 많은 인물이다. 삼국지연의 곳곳에 그를 매도하고 헐뜯은 흔적이 남아있다. 처음 등장할 때부터 그의 주군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제갈량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고, 또 제갈량이 수명 연장을 위해 북두칠성을 향해 기도하고 있을 때 마지막 날 주등(主燈)을 건드려 끈 사람도 그였다.
또, 제갈량 사후에 위연이 반기를 든 것 역시 촉장 중에서 자신이 최고라고 자부하는 그로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우발적인 사건인데도 이미 그렇게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씌어있다. 처음부터 반역자로 예단(豫斷)해 놓은 탓이다.
그가 꾸었다는 머리에 뿔이 돋는 꿈을 파자(破字)해보면, ‘뿔 각(角)’ 자는 ‘칼 도(刀)’ 자 밑에 ‘쓸 용(用)’ 자가 붙는 것이므로 머리에 칼을 쓰게 된다는 뜻으로, 마대에게 칼을 맞아 목이 떨어지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꿈 이야기 역시 훗날 만들어서 끼워 넣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
또, 반기를 든 위연이 위에 귀순하려 했던 것으로 되어 있지만, 촉주(蜀主) 유선이 그를 고이 묻어주라고 한 것을 보면 그것도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결론적으로, 위연은 많은 업적을 남긴 뛰어난 무장이었지만 제갈량의 후계 자리를 놓고 양의와의 권력다툼에 패하여 반역자의 누명을 쓴 것으로 보인다. 제갈량에게 밉보인 것이 결정적인 화근이었다.
■ 제4장 촉나라의 인물들, (4-10) 관우와 장비의 아들 ‘관흥과 장포’
관우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 관평(關平)은 관우가 하북에서 관정이라는 사람의 집에 잠시 머물러있을 때 그의 차남을 양자로 받아들여서 얻은 아들이다. 정사에는 관평이 관우의 친자로 되어있는데 연의에서는 왜 양자로 바꿔놓았는지 알 수가 없다. |
관평은 유비의 양자인 유봉과 함께 전장을 누비고 다녔다. 유비가 서천을 공략할 때, 관평은 유봉과 함께 부수관에서 유장의 부하장수 양회와 고패를 사로잡기도 했다. 그러나 군사(軍師) 방통이 낙봉파에서 전사하자, 관평은 형주에 있는 제갈량을 모시러 가는 사자로 발탁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형주를 지키는 관우 밑에 눌러앉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관평은 관우와 함께 위를 공략하다가 형주를 기습한 오의 명장 여몽에게 허를 찔려 패퇴, 맥성에서 탈출하다가 오군 장수 마충에게 사로잡혀 관우와 함께 참수되고 만다.
셋째 아들 관색(關索)은, 유비가 죽고 나서 다시 오와 친교를 맺은 제갈량이 남만정벌에 나섰을 때 제갈량의 군영으로 찾아오면서 등장한다.
“형주가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저는 심한 부상을 입고 숨어있었습니다. 몸이 나은 후에 알아보니 동오의 원수들은 모두 죽었더군요. 이제야 서천에 천자를 뵈러 가는 길인데, 이렇게 남만 정벌군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제갈량은 크게 기뻐하며 그 소식을 조정에 알리는 한편, 관색을 출정군의 선봉으로 삼았다. 그는 남만과의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하지만 그 후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정사에는 셋째 아들로 ‘관통’이 나오는데, 연의에 나오는 관색과 같은 사람인지 궁금하다.
이제 관우의 둘째아들인 관흥(關興)과, 장비의 외아들인 장포(張苞)에 대해서 알아보자.
유비는 관우가 죽고 이어서 장비마저 죽자, 함께 죽기로 맹세한 두 아우 없이 자신만이 살아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 피눈물을 흘리며 오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다. 유비와 마찬가지로, 관흥과 장포 또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이를 갈며 전의를 불태웠다.
관흥과 장포는 그들의 아버지가 죽은 후부터 삼국지에 이름이 나오기 시작하여, 항상 둘이서 같이 전장을 누비고 다니며 활약을 했다. 둘 다 활을 잘 쏘았고 무예가 절륜하여 아버지들 못지않았다. 한 살이 더 많은 장포가 형이 되고, 관흥이 아우가 되었다.
유비는 거국적으로 군사를 동원, 관흥과 장포 두 조카와 함께 몸소 군사를 이끌고 오로 쳐들어갔다. 촉군은 이르는 곳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항복을 받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 동안 관흥과 장포는 서로 도와가며 용감히 싸워 오군을 패퇴시켰고, 적장 손환과 이이 등을 물리쳤다. |
이에 고무된 유비는 두 조카의 무용을 칭찬하면서 늙은 장수들은 이제 쓸모가 없게 되었다고 했다. 이에 마음이 상한 황충은 오군의 반장과 마충이 쳐들어오자 앞뒤 분별도 하지 않고 맞서 싸우러 나갔다가 오군이 쏜 화살에 맞아 쓰러진다.
노장군 황충이 죽자 관흥과 장포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관흥은 홀로 떨어져 낯선 골짜기를 헤매다가 아버지의 원수인 반장을 만나 단칼에 죽이고, 아버지가 쓰던 청룡언월도를 다시 찾아온다.
한편, 전에 관우가 위급에 처했을 때 구하기는커녕 그를 배신하고 오에 항복했던 미방과 부사인은, 촉군의 기세에 놀라 관우를 죽인 마충의 목을 베어 그 수급을 가지고 유비에게로 찾아온다. 그러나 원한에 사무친 유비는 미방과 부사인까지 목을 잘라 관우의 영전에 제물로 바친다.
오주 손권은 유비를 달래기 위해, 장비를 살해하여 그 수급을 오로 가져왔던 범강과 장달을 잡아서 묶어 촉에 보낸다. 이들 두 무뢰한 역시 장포에 의해 목이 잘려서 장비의 영전에 제물(祭物)로 바쳐진다.
관흥과 장포는 오군과의 교전에서 맹활약하며 각기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원한과 분노를 씻어낸다. 그러나 촉군의 승리는 거기까지 뿐이었다. 촉의 대군은 이릉의 숲에 장사진을 쳤다가 오의 명장 육손의 화공(火攻)에 무참히 패퇴하고 만다. 패주하던 유비는 백제성에서 숨을 거둔다.
그 후에도 관흥과 장포는 제갈량의 북벌에 참여하여 맹장 위연과 함께 선봉을 맡아 적장을 여럿 죽이거나 사로잡는다. 또 오호대장군이 사라진 촉군에서 그들은 자기들의 아버지 못지않은 활약을 하며 큰 공을 세운다.
그러나 제갈량이 다시 출사표를 올리고 세 번째 기산으로 나갔을 때, 장포는 적장 사마의의 부장 곽회와 손례를 뒤쫓으려고 산등성이를 오르다가 말과 함께 계곡으로 떨어지게 되고, 이때 머리를 다쳐 성도로 후송되었다가 죽고 만다.
관흥은 장포가 죽은 이후에도 제갈량 곁에서 함께 싸우며 위군 최고의 맹장 장합을 목문도에서 몰아붙여 죽이는 등 큰 활약을 펼치다가, 제갈량이 여섯 번째 기산으로 나갈 무렵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
그런데 관흥과 장포가 앞에서처럼 정말로 오 정벌에 참여하여 각자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한 것일까? 정사에 의하면 관흥과 장포 둘 다 오 정벌에 참여한 일이 없었다. 당연히 그 후 제갈량의 북벌에도 따라간 적이 없었다.
정사 ‘관우전’에 의하면, 관우의 아들 관흥은 어릴 때부터 무예가 출중하여 제갈량의 총애를 받았지만, 오래 살지 못하고 약관의 나이에 죽었다고 한다. 장포도 마찬가지이다. 정사 ‘장비전’에 의하면, 장비의 아들 장포는 장비가 죽기 전에 요절한 것으로 되어있다.
결과적으로 관흥과 장포가 오(吳) 정벌에 참가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그렇다면 삼국지연의의 저자는 왜 그렇게 시원스런 복수극을 만들었을까? 아마도 관우와 장비의 죽음을 너무도 아쉬워한 나머지 다시 한 번 거침없는 상상력을 발휘, 그 아들들의 영웅적인 복수담을 창조해낸 것이 아닐까 싶다.
너무 일찍 죽어버린 아들들을 다시 살려내 복수극을 꾸민 저자의 심정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관우와 장비가 한 쌍으로 활약했던 것처럼 관흥과 장포가 나란히 부친의 복수를 하는 설정 또한 얼마나 멋지고 보기 좋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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