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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선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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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진화 심리학의 이론적 기초』에 포함될 것입니다.
집단 선택을 적용한 설명들 – 『Adaptation
and Natural Selection』에서.. 3
집단 선택론과 관련된 논쟁에 대해 알고 싶다면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 1976)』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 책에서 도킨스는 집단 선택론을 상당히 알기 쉽게 반박했다. 좀 더 엄밀한 학문적 논쟁을 접하고 싶은 사람들은 도킨스의 책에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집단 선택론과 관련된 논쟁은 그렇게 쉬운 책에서 온전히 다룰 수 있을 만큼 만만하지 않다. 그런 사람들은 다음 세 권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Animal Dispersion in Relation to Social Behaviour(1962)』, Vero Copner Wynne-Edwards
『Adaptation and Natural Selection: A Critique of Some Current Evolutionary Thought(1966)』, George Christopher Williams
『Unto Others: The Evolution and Psychology of Unselfish Behavior(1998)』, Elliott Sober & David Sloan Wilson
베로 윈-에드워즈(Vero Copner Wynne-Edwards)는 당시에 유행했던 집단 선택론을 체계적으로 옹호했다. 여기에 그의 공헌이 있다. 그는 잘못된 생각을 일관되게 주장함으로써 비판하기 쉽게 만들었다. 저명한 생태학자 콘라트 로렌쯔(Konrad Lorenz)도 『공격성에 관하여(Das sogenannte Böse. Zur Naturgeschichte der Aggression, 1963; On Aggression, 1966)』라는 책에서 집단 선택론을 적용한 설명들을 제시했다. 내 생각에는 집단 선택론 논쟁에 대해 알기 위해 굳이 윈-에드워즈와 로렌쯔의 책까지 볼 필요까지는 없을 듯하다. 그들의 논리는 조지 윌리엄스(George Williams)의 책에 충분히 소개되어 있다.
집단 선택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책은 아마 『Adaptation and Natural Selection』일 것이다. 윌리엄스는 윈-에드워즈의 책을 비롯하여 당시에 유행하던 집단 선택론적 설명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이 책 이전에는 집단 선택론이 저명한 생물학자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유행했는데 윌리엄스의 비판 이후로는 너무나 큰 타격을 받아서 진화 생물학계에서 집단 선택 이야기만 꺼내면 바보 취급을 받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윌리엄스의 이 책에는 집단 선택론 비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상당히 압축적이고 어려운 이 책에서 온갖 주제들을 다루었다. 특히 적응 개념과 기능 개념을 명확히 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그럴 듯한 이야기(just so story)를 만드는 것과 과학적 설명 사이의 차이를 명확히 한 것이다. 윌리엄스의 이 책은 진화 심리학자들의 성경이다.
보통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와 리처드 르원틴(Richard Lewontin)이 1979년 논문 「The spandrels of San Marco and the Panglossian paradigm: a critique of the adaptationist programme」에서 그럴 듯한 이야기 만들기를 통렬하게 비판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윌리엄스의 책에서 훨씬 더 상세하고 명확하게 그럴 듯한 이야기 만들기를 비판했다. 하지만 윌리엄스의 책은 진화 심리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거의 읽지 않기 때문에 대중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굴드와 르원틴은 13년 후에 쓴 이 논문에서 윌리엄스의 책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Unto Others』는 집단 선택론의 부활을 천명한 책이다. 이 책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과거의 순진했던 집단 선택론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집단 선택론을 거의 몽땅 버려야 한다는 윌리엄스나 도킨스의 생각에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자신의 이론을 신집단 선택론(new group selection) 또는 다수준 선택론(multi-level selection)이라고 부른다. 이들에 따르면 과거의 집단 선택론은 거의 아무 생각 없이 그럴 듯한 이야기 만들기에 만족해서 문제가 있었지만 집단 선택의 논리는 엄연히 상당히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사실 이 세 권의 책을 읽는 것으로는 집단 선택론을 둘러싼 논쟁을 충분히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의 친족 선택의 수학적 모델, 프라이스 방정식(Price equation) 등을 충분히 이해해야 신집단 선택론의 문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골치 아픈 논문들을 보아야 한다.
『Adaptation and Natural Selection』이 출간될 당시에 어떤 집단 선택적 설명들이 유행했는지 살펴보자. 아래에 나오는 사례들 중 대다수가 당대의 저명한 생물학자들의 주장이었다고 한다.
첫째, 노화와 죽음. 생물이 늙어서 죽는 것은 다음 세대의 더 건강하고 젊은 생물들에게 살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다.
둘째, 돌연변이. 돌연변이가 생기는 것은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자연 선택이 더 잘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다.
셋째, 지렁이. 지렁이가 땅을 헤집고 다니는 것은 땅을 비옥하게 해서 다른 생물들이 잘 살도록 하기 위해서다.
넷째, 유성 생식. 유성 생식이 존재하는 것은 진화적 유연성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유성 생식의 경우에는 부모의 유전자가 혼합되어 자식이 생긴다. 따라서 돌연변이보다 훨씬 빠르게 유전적 다양성이 만들어지며 그만큼 빠르게 진화할 수 있다. 또한 새로 생긴 유용한 돌연변이가 개체군 내에 빨리 퍼질 수 있도록 한다. 그리하여 변화된 환경에 더 빠르게 적응할 수 있게 된다.
다섯째, 영역 다툼. 영역 다툼을 벌이는 것은 개체의 수가 너무 많아지지 않도록 해서 자원이 고갈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여섯째, 독성이 있는 생물. 일부 종의 생물들이 몸에 독소를 품고 있는 것은 자신이 속한 종이 독이 있음을 포식자에게 알려서 종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일곱째, 나그네쥐(lemming)의 집단 자살. 개체군 밀도가 높아지면 일부 나그네쥐들이 다른 나그네쥐들의 살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절벽에서 뛰어내려서 집단 자살한다.
여덟째, 서열. 서열이 존재하는 것은 맨날 싸움을 벌이지 않고 질서가 유지되도록 해서 집단 전체가 더 평화롭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다.
아홉째, 자식 수 조절. 개체 밀도가 높아지면 어미는 낳는 자식의 수를 줄인다. 이것은 개체군 밀도가 너무 높아져서 자원이 고갈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열째, 자식 낳기. 자식을 낳는 이유는 종의 보존을 위해서다.
이 외에도 집단 선택을 이용한 온갖 설명들이 있어왔다. 전문 진화 생물학자들 사이에서는 웃음거리가 되는 집단 선택론적 설명이 여전히 자연 다큐멘터리 등에서 유행하고 있어서 많은 진화 생물학자들이 푸념을 늘어놓고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식욕을 생존 본능이라고 부르고 성욕을 종 보존 본능이라고 불렀다. 아마 이런 식으로 생각한 것이 프로이트가 처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성욕의 기능이 종의 보존인 것 같다. 성욕은 성교로 이어지고, 성교는 자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아무도 자식을 낳지 않으면 그 종은 멸종하게 된다.
하지만 효과(effect)와 기능(function, 물론 여기서는 진화 생물학적 의미의 기능이다)을 명확히 구분해서 생각해 보면 종 보존 본능이라는 표현은 말도 안 된다. 성욕의 효과로 종이 멸종을 면하게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기능 개념은 어떤 표현형의 기원에 대한 설명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과연 성욕은 종의 보존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진화했나?”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그렇다”여야 성욕의 기능이 종 보존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만약 신이 생물을 창조했다면 “만약 성욕이 없으면
나는 종 선택이 일어난다는 점을 부정할 생각이 없다. 지난 수십억 년의 생물의 진화 역사는 종 분화의 역사이기도 했지만 멸종의 역사이기도 했다. 수 많은 종들이 온갖 이유 때문에 멸종했다. 다른 종과의 경쟁에서 밀려서 서서히 개체수가 감소하다가 멸종하기도 했고 공룡들처럼 지구에 박치기한 커다란 돌멩이 때문에 갑자기 멸종하기도 했다. 물론 어떤 종들은 상대적으로 취약해서 멸종하기 쉽다.
문제는 그런 종 선택이 정교한 적응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 여부다. 이것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먼저 개체 선택이 어떻게 정교한 적응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선 우연에 의해 돌연변이가 생긴다. 그 돌연변이 중 대다수는 해롭다. 소수의 돌연변이만 번식에 이득을 준다. 그러면 그 돌연변이는 개체군 내에서 퍼지게 되어 결국 종 표준이 된다. 이런 작은 변화가 쌓여서 결국 눈이나 뇌 같은 복잡하고 정교한 적응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연은 엄청난 수의 시행착오를 거쳐서 그런 교묘한 적응을 만들어낸다.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수의 ‘실험’이 필요하다.
이 엄청난 숫자는 두 가지 때문에 가능하다. 첫째, 한 종의 개체의 수가 매우 많다. 둘째, 엄청난 세대 수가 있다. 어떤 종의 한 세대의 개체의 수가 1000만 마리이고, 1년이 한 세대라고 하자. 그러면 1000만 년 동안 100조(1000만 * 1000만, 엄밀하게 계산하자면 더 복잡하겠지만 넘어가자) 마리의 개체가 살다가 죽은 것이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실험’이 있었기 때문에 개체 선택이 우연적 돌연변이들을 바탕으로 정교한 적응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종 선택의 경우에는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만큼 많은 종들이 그만큼 많은 멸종을 겪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멸종의 주기는 개체의 삶의 주기보다 훨씬 길다. 따라서 종 선택의 속도는 개체 선택의 속도에 비해 터무니 없이 느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종 선택의 압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개체 선택에 압도 당한다. 결국 종 선택이 표현형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다. 개체 선택에 의해 어느 종이 멸종하기 십상인 방향으로 진화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종 선택이 막지 못한다.
요컨대, 종 선택이 일어나느냐 여부와 종 선택이 정교한 적응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 여부는 전혀 다른 문제다. 따라서 종 선택론자가 생물의 정교한 메커니즘의 존재를 종 선택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성욕은 종 선택으로 진화할 수 없다. 따라서 성욕을 종 보존 본능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 식으로 부른다면 식욕을 종 보존 본능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식욕이 있어야 개체가 생식을 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고, 개체가 생식을 할 때까지 살아남아야 생식이 가능해져서 결국 종이 보존되기 때문이다. 즉 식욕도 종 보존이라는 효과를 발휘한다.
옛날부터 자연의 섭리 또는 자연의 조화에 대한 낭만적 믿음이 있었다. 생물과 무생물을 막론하고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런 막연한 믿음을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은 가이아 가설(Gaia hypothesis)이라는 과학적으로 보이는 체계로 발전시켰다.
가이아 가설에 따르면 지구 생태계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와 같다. 한 포유류 동물의 각 부분들 즉 심장, 허파, 눈, 다리, 코 등이 서로 협력하여 그 개체 전체의 생존과 번식에 기여하듯이 지구 생태계의 각 부분들이 서로 협력한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에 따르면 육식 동물이 초식 동물을 잡아 먹는 이유는 건강하지 못한 개체를 솎아 냄으로 초식 동물들 전체가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육식 동물이 초식 동물을 꾸준히 잡아 먹음으로써 초식 동물이 너무 많아지는 것을 막는다. 개체수가 너무 많아지면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각 생물들은 때가 되면 죽음으로써 다른 생물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자리를 내준다. 각 생물의 행동의 목적은 다른 생물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가이아 가설에서는 이런 이타 행위의 수혜자가 전체 생태계다. 반면 기독교의 창세기에 나오는 세계관에 따르면 이런 이타 행위의 수혜자는 바로 인간이다. 신은 인간을 가장 사랑하여 인간을 위해 온갖 생물들을 창조했다. 물고기와 대형 초식 동물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이 잡아 먹거나 길들이도록 하기 위함이고, 과일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이 따 먹도록 하기 위함이고, 꽃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이 예쁜 꽃을 보고 즐거움을 느끼도록 하기 위함이고, 새가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이 아름다운 노래를 즐기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과학적 설명이 아니라 그럴 듯한 이야기(just so story)일 뿐이다. 다윈의 자연 선택 이론이 나온 이후로 이런 식의 ‘설명’들은 퇴출되기 시작했다. 다윈에 따르면 자연 선택의 핵심은 번식 경쟁이다. 만약 자신의 번식에 불리한 방향으로 행동하는 동물이 있다면 그 동물은 도태된다.
육식 동물이 초식 동물을 잡아 먹는 것은 초식 동물을 위해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초식 동물을 잡아 먹음으로써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다. 물론 건강하지 못한 개체를 잡아 먹을 확률이 높지만 그것은 단지 잡기 쉽기 때문이다. 부실한 동물도 잡기 쉽지만 아기 동물도 잡기 쉽다. 물론 육식 동물들은 초식 동물 아기들을 매우 좋아한다. 육식 동물이 전염병에 걸린 초식 동물을 잡아 먹음으로써 병이 퍼지는 것을 막았다면 그것은 순전히 부작용(side effect)일 뿐이다.
생물은 가이아 가설 옹호자의 생각과는 달리 생태계 전체가 어떻게 되든 개의치 않는다. 대체로 생물은 자신의 번식에 유리한 행동이면 한다. 또한 생물은 창세기의 저자인 야훼의 생각과는 달리 인간의 유익함을 위해 창조되지 않았다. 새의 ‘노래 소리’를 듣고 인간이 기분이 좋아진다면 그것은 부작용일 뿐이다. 새는 짝을 꼬시기 위해 또는 경쟁자를 쫓아내기 위해 소리를 낼 뿐이다. 물고기는 인간에게 잡아 먹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나 다른 동물에게 잡아 먹힌 물고기가 있다면 그것은 그 물고기의 무능 때문이다. 물고기는 최대한 잡아 먹히지 않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경향이 있다.
가이아 가설은 집단 선택적 사고의 극한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극단적이어서 집단 선택론이라고 볼 수도 없다. 집단 선택이 성립하려면 집단끼리 경쟁을 해야 하는데 도대체 지구의 생태계는 누구와 경쟁한단 말인가? 먼 외계의 어떤 행성의 생태계와? 그럴 리가 없다. 왜냐하면 설사 먼 외계의 어떤 행성에 생태계가 있더라도 지구와의 상호작용이 사실상 없어서 서로 경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이아 가설은 낭만적 사고 방식을 과학의 언어로 포장한 엉터리 가설일 뿐이다.
가이아 가설 또는 창세기 가설에 충실한 동물과 이기적 유전자론에 충실한 동물이 있다고 하자. 누가 번식에 더 성공할까? 육식 동물 중 “어떻게 하면 초식 동물의 삶에 도움이 될까?”라고 ‘고민’하면서 사냥을 하는 동물과 그냥 잡기 쉬운 동물을 골라서 사냥하는 동물 중 누가 더 사냥에 성공할 확률이 클까? “어떻게 하면 인간에게 잡아 먹혀서 인간을 이롭게 할까?”라고 ‘고민’하면서 사는 물고기와 어떻게 하면 다른 동물에게 잡아 먹히지 않을지 ‘궁리’하는 물기기 중에 누가 살아남아서 번식할 가능성이 클까? 답은 뻔하다. 자기 잇속을 챙기는 쪽이 성공한다. 이것이 다윈의 자연 선택 이론의 핵심적 메시지다. 생태계는 선한 신이 만든 것이 아니다. 무지막지한 번식 경쟁의 논리가 쉬지 않고 작동하고 있을 뿐이다.
종 또는 무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개체와 자기 잇속을 챙기는 개체 중에 누가 더 번식에 성공할 가능성이 클까? 이것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남들이 다 종 또는 무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할 때(그럴 리가 없지만 그렇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개체가 자기의 번식을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면 결국 성공하는 쪽은 그런 이기적 개체 즉 배신자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들이 다 자기의 번식을 위해 최선을 다할 때 자기 혼자 종과 무리 전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면 그 개체는 결국 도태된다.
예를 들어 보자. 개체수가 많아졌을 때 일부 나느네쥐들이 자발적으로 집단 자살한다는 것이 집단 선택론자의 설명이다. 논의의 편의상 실제로 나느네쥐가 그렇게 설계되었다고 가정하자. 이 때 개체수가 많아져도 집단 자살에 절대 동참하지 않도록 하는 유전자 돌연변이가 생겼다고 하자. 그럼 그 돌연변이 유전자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그 유전자는 세대가 지날수록 개체군에 내에서 퍼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남들이 자살할 때 자살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개체군 내의 모든 개체가 그 돌연변이 유전자 즉 이기적으로 행동하도록 만드는 유전자를 보유하게 될 것이고 집단을 위한 자살 현상은 사라질 것이다.
대체로 집단 선택을 적용한 이야기 만들기가 개체 선택을 적용한 이야기 만들기보다 훨씬 쉽다. 이것이 집단 선택론이 과거에 생물학자들 사이에서 유행한 이유이며 여전히 진화 생물학을 잘 모르는 대중들이 집단 선택론을 받아들이는 이유인 것 같다.
집단 선택을 적용하면 노화에 대한 그럴 듯한 이야기가 쉽게 만들어진다. 노화는 다음 세대를 위해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일어난다는 식으로 설명된다. 반면 개체 선택적 관점에서 보면 노화는 진화론과 모순되어 보인다. 불로장생하면서 계속 자식을 낳는 개체와 금방 죽는 개체가 번식 경쟁을 벌인다면 누가 이길 것인가? 뻔하다. 불로장생해서 자식을 훨씬 더 많이 낳는 개체가 승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물은 늙는다.
집단 선택론적 설명은 만들어내기 쉽다. 반면 개체 선택적 설명은 가설 검증은 고사하고 가설 설정 자체가 훨씬 더 어렵다. 하지만 과학은 쉬운 설명을 찾아내는 과정이 아니라 옳은 설명을 찾아내는 과정이어야 한다.
첫째, 노화와 죽음. 개체 선택에 입각한 노화에 대한 설명이 궁금한 사람은 『인간은 왜 늙는가 - 진화로 풀어보는 노화의 수수께끼』를 참조하기 바란다. 요약하면, 개체는 늙고 싶어서 늙는다기보다는 어쩔 수 없어서 늙는 것이다. 이것은 초식 동물이 잡아 먹히는 이유는 육식 동물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 잡아 먹히는 것과 같다.
둘째, 돌연변이. 윌리엄스는 돌연변이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설명한다. 이기적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돌연변이가 생기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 왜냐하면 돌연변이의 정의 자체가 유전자가 바뀌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대한 돌연변이가 생기지 않도록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가 개체군 내에 퍼질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완벽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돌연변이가 생기는 것이다. 그 돌연변이 때문에 진화가 일어나서 종이 더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게 된 것은 돌연변이의 부작용일 뿐이다.
셋째, 지렁이. 지렁이가 땅을 헤집고 다니는 것은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해서다. 그 결과 땅이 비옥해져서 다른 생물들이 더 잘 산다면 그것은 부작용일 뿐이다.
넷째, 유성 생식. 유성 생식 즉 성의 진화에 대해서는 매트 리들디(Matt Ridley)의 『붉은 여왕(The Red Queen: Sex and the Evolution of Human Nature)』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다. 그 책에 따르면 가장 유력한 가설은 기생 생물에 맞서기 위해 자식의 유전적 구성을 다양하게 하기 위해서 유성 생식을 한다고 보는 설명이다.
다섯째, 영역 다툼. 더 넓은 영역을 차지하면 생존에 도움이 된다. 더 넓은 영역에서 사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짝짓기에도 도움이 된다. 암컷이 더 넓은 영역을 차지한 수컷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여섯째, 독성이 있는 생물. 집단 선택론은 종 전체를 위해 독성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배신자 돌연변이 유전자가 생겨서 독성을 만들어내지 않도록 한다면 그 돌연변이 유전자는 어떻게 될까? 그 돌연변이 유전자를 품고 있는 개체는 다른 개체가 독을 만들어내서 생기는 이득을 챙긴다. 그 개체도 그 종에 속하기 때문에 포식자가 그 종을 잡아 먹지 않으려고 하는 것에서 생기는 이득을 챙기는 것이다. 반면 그 개체는 독을 만드는 비용을 치르지 않는다. 그 비용을 번식을 위해 다른 곳에 쓸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개체가 번식 경쟁에서 더 성공한다. 결국 모든 개체가 그런 식으로 바뀔 때까지 진화가 일어날 것이다.
독성이 있는 동물의 진화를 개체 선택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예컨대 피부에 독성이 있으면 포식자는 삼키기 전부터 독성에 반응하여 뱉어낼 것이다. 그러면 그 개체는 피부의 독성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내장 깊숙이 있는 독성의 진화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친족 선택을 이용해서 설명할 수 있다. 자신이 잡혀 먹어서 희생을 하더라도 바로 옆에 있는 친족을 구할 수 있다면 내장 깊숙이 있는 독성이 진화할 수 있다. 개체 선택의 관점에서 설명하다 보면 하나의 예측이 나온다. 내장 깊숙이 독성이 진화하는 동물은 친족들이 모여 사는 동물일 것이다. 반면 “종의 보호를 위해서”라는 설명에 따르면 그럴 이유가 없다.
일곱째, 나그네쥐의 ‘자살’. 개체군 밀도가 높아지면 다른 곳으로 이사 가는 것이 자신의 번식에 유리할 것이다. 따라서 일부 나그네쥐들은 떼거지로 이사를 가는 것이다. 이 와중에 길을 잘못 들면 떼거리로 절벽 등에서 떨어져 죽는다. 이것은 자살이 아니라 사고사다.
여덟째, 서열. 힘이 센 개체의 입장에서는 힘이 약한 개체를 착취하는 것이 자신의 번식에 도움이 된다. 반면 힘이 약한 개체의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착취당하는 것이 반항하다가 죽도록 얻어 맞는 것보다는 낫다. 그리하여 서열의 질서가 생기는 것이다. 아예 서열이 없이 평등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 집단 전체를 위해서는 최선일 것이다. 물론 서열이 있는 체제에서는 항상 난투극이 벌어지지는 않지만 서열을 둘러싼 상당히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다.
아홉째, 자식 수 조절. 자식 수 조절의 경우에도 개체 선택으로 설명할 수 있다. 개체수가 많아지면 그만큼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 부족해진다. 자원이 부족한 시기에는 자식을 많이 낳는 것보다 적게 낳거나 아예 낳지 않고 미래를 기약하는 것이 더 낫다. 왜냐하면 자원이 부족한데도 자식을 많이 낳으면 결국 그 많은 자식들을 다 먹여 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열째, 자식 낳기. 개체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식을 낳아야 번식 경쟁에서 승리할 가망성이 생긴다. 그 결과 종도 보존된다면 그것은 부작용일 뿐이다.
논의의 편의상 아프리카 초원에 영양과 치타만 산다고 가정하자. 실제로는 상황이 훨씬 더 복잡하지만 이 단순화된 모델에서 논의를 출발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단순화했다는 점을 잊지만 않으면 된다.
영양과 치타가 매우 빠르게 달릴 수 있도록 진화한 이유를 흔히 이렇게 설명한다: 옛날에는 영양과 치타가 그렇게 빠르지 않았다. 논의의 편의상 치타가 먼저 조금 더 빨라졌다고 하자. 그러자 치타에게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영양이 조금 더 빨라졌다. 그러자 치타는 영양을 잡아 먹기 위해 조금 더 빨라졌다. 그러자 영양은 치타에게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조금 더 빨라졌다. …… 이렇게 영양과 치타가 속도 경쟁을 벌이다 보니 지금처럼 매우 빠르게 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설명을 들어보면 영양이 치타와 직접 경쟁을 벌이는 것 같다. 서로 다른 종 사이에 직접적인 경쟁이 일어난다는 식의 설명은 집단 선택론의 오류로 이어질 수 있다. 영양이 더 빨라진 이유는 느리게 달렸다가는 치타에게 모두 잡아 먹혀서 영양이 멸종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치타가 더 빨라진 이유는 영양을 잡아 먹지 못해서 치타가 멸종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영양이 “우리 이렇게 느리게 달리다가는 치타에게 모두 잡아 먹혀서 멸종하고 말겠어. 빨리 달릴 수 있도록 진화하자”라는 식으로 생각할 리가 없다. 또한 누군가 그런 선견지명을 발휘해서 영양이 더 빨리 달리는 방향으로 진화하도록 만들지도 않는다. 물론 지적 설계론(intelligent design)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신이 그런 일을 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영양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영양보다 잘 잘아 먹히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치타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치타보다 더 잘 잡아 먹는 것이다. 영양은 영양끼리 번식 경쟁을 벌이고 치타는 치타끼리 번식 경쟁을 벌인다. 정교한 적응은 종 간(inter-species) 경쟁이 아니라 종 내(intra-species) 경쟁 때문에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서 영양과 치타가 서로 속도 경쟁을 벌이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일까?
여기서도 논의의 편의상 치타가 먼저 이전보다 조금 더 빨리 달리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전에 비해 치타는 영양을 더 잘 잡아 먹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영양에게 작용하는 선택압(selective pressure)이 변한다. 즉 포식자의 위협이 커지는 것이다.
영양은 자신의 에너지를 여러 방면에 투자한다. 물론 달릴 수 있는 능력을 위해서도 투자를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영양이 생존하고 번식하기 위해서는 보고, 냄새 맡고, 먹고, 싸고, 생각하고, 짝짓기 하는 것 등을 비롯하여 온갖 일을 해야 한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달리기 능력에 더 많이 투자하게 되면 다른 능력들에 투자할 자원이 줄어들게 된다.
치타가 이전보다 더 빨라져서 영양이 치타에게 더 많이 잡아 먹히게 되었기 때문에 달리기라는 능력이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더 중요해진다. 이전의 투자 방식을 고수하는 영양은 이전과 같은 속도로 달릴 것이다. 반면 이전에 비해 달리기에 더 많이 투자하고 다른 곳에 조금 덜 투자하는 영양은 더 빨리 달릴 수 있게 된 반면 다른 능력은 다른 영양에 비해 떨어질 것이다. 이 때 두 영양 중 누가 더 유리할까? 달리기에 더 많이 투자하는 영양이 유리하다. 왜냐하면 치타가 더 빨라져서 달리기의 중요성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결국 달리기를 더 잘하는 대신 다른 능력에서는 조금 떨어지는 영양이 번식 경쟁에서 승리하게 되고 영양은 그런 방향으로 진화한다.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달리기에 더 많이 투자하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영양이 더 빨라졌기 때문에 치타에게 작용하는 선택압이 변한다. 이전보다 영양을 잡아 먹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위에서 설명한 방식과 똑 같은 방식으로 치타도 더 빨라지도록 진화한 것이다. 즉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투자하는 치타보다 다른 생리적 메커니즘을 약간 희생하는 대신 더 빠르게 달릴 수 있도록 달리기에 더 많이 투자하는 치타가 번식 경쟁에서 승리하여 그런 특성이 유전되는 것이다.
결국 영양과 치타가 점점 더 빨라지는 식으로 진화가 일어난다. 하지만 영양과 치타가 직접 경쟁을 벌이기 때문이 아니라 영양과 영양이 경쟁을 벌이고 치타와 치타가 경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즉 종 선택 때문이 아니라 개체 선택 때문이다.
어느 정도 이상 빨라지게 되면 달리기에 대한 투자 때문에 다른 생리적 메커니즘들이 치러야 하는 희생이 너무나 커진다. 그래서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치타가 오히려 더 불리해진다. 영양을 조금 더 잘 잡아먹을 수 있는 대신 다른 일에서는 능력이 너무나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결국 번식 경쟁에서 밀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양도 치타도 더 이상 빨라지지 않는다.
이런 논리가 달리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한 쪽이 더 잘 위장하면 다른 쪽이 그 위장을 더 잘 간파하는 식의 ‘경쟁’이 일어날 수 있다. 또한 포식자와 피식자 사이의 상호 작용뿐 아니라 기생자와 숙주 사이의 상호 작용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이런 논리를 진화 생물학자들이 진화론적 무기 경쟁(evolutionary arms race)이라고 부르는 것 모두에 적용할 수 있다.
국가간 무기 경쟁의 경우에는 국가들이 직접 경쟁한다. 반면 진화론적 무기 경쟁의 경우에는 종 간 경쟁이 아니라 종 내 경쟁 때문에 진화가 일어난다. 얼핏 보기에 종 간 경쟁이 벌어지는 것 같아 보이는 것일 뿐이다
인간의 이타성과 도덕성을 진화론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에는 다섯 가지 정도가 있다.
첫째, 친족 선택. 친족을 돕는 행위는 결국 자신의 유전자를 돕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진화할 수 있다. 온갖 종의 동물들이 친족을 주로 돕는다는 것이 드러났으며 이것은 인간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부부의 경우에는 친족이 아니다. 하지만 부부는 자식이라는 공동 친족으로 엮여 있다. 남편의 입장에서는 아내가 잘 살아야 자신의 자식도 잘 살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아내의 입장에서는 남편이 잘 살아야 자신의 자식도 잘 살 수 있다.
둘째, 상호적 이타성(reciprocal altruism). 이것은 친구 사이의 우정을 잘 설명해 준다. 또한 상호적 이타성은 친구가 아닌 사람에 대한 이타적 행동까지 설명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정 시장과 짝짓기 시장에서 이타성 경쟁을 벌여야 하기에 평판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더 똑똑하고, 잘 생긴 사람을 친구 또는 배우자로 원할 뿐 아니라 더 착한 사람을 원하기도 한다.
셋째, 핸디캡 원리. 수컷 공작이 거추장스러운 꼬리를 달고 다님으로써 즉 손해 보는 짓을 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듯이 사람들이 남을 도움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과시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넷째, 집단 선택. 다윈은 거의 모든 것을 개체 선택으로 설명하려고 했으며 집단 선택에 거의 의존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의 이타성과 도덕성의 경우에는 예외였다:
It must not be forgotten that although a high standard of morality gives but a slight or no advantage to each individual man and his children over the other men of the same tribe, yet that an advancement in the standard of morality and an increase in the number of well-endowed men will certainly give an immense advantage to one tribe over another. There can be no doubt that a tribe including many members who, from possessing in a high degree the spirit of patriotism, fidelity, obedience, courage, and sympathy, were always ready to give aid to each other and to sacrifice themselves for the common good, would be victorious over most other tribes; and this would be natural selection. At all times throughout the world tribes have supplanted other tribes; and as morality is one element in their success, the standard of morality and the number of well-endowed men will thus everywhere tend to rise and increase. (Charles Darwin, 『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1871)』, http://darwin-online.org.uk/content/frameset?itemID=F937.1&viewtype=text&pageseq=1)
다섯째, 오작동. 동물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따라서 어떤 메커니즘도 오작동할 수 있다. 예컨대 여러 종의 새가 뻐꾸기의 유전적 자식을 자기 자식처럼 정성껏 돌본다. 가이아 가설 옹호자들은 다른 종을 위한 이런 희생이 설계된 것이라고 우길지도 모르겠지만, 뻐꾸기의 ‘양부모’가 그러는 이유는 자식 사랑 메커니즘이 오작동했기 때문이다. 원래는 자신의 유전적 자식을 돌보도록 설계되었는데 뻐꾸기에게 이용당한 것이다. 그 이유는 자식 인지 메커니즘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친족 선택과 상호적 이타성으로 인간의 이타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널리 인정 받고 있다. 반면 핸디캡 원리와 집단 선택을 적용한 설명이 옳은지 여부를 두고는 치열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나름대로 골치 아픈 핸디캡 원리를 둘러싼 문제는 여기서는 제쳐두기로 하자.
집단 선택론자들은 인간이 친족 선택과 상호적 이타성으로 설명하기에는 지나치게 이타적이라고 주장한다. 최후통첩(ultimatum) 게임 같은 실험에서 보여주었듯이 인간은 처음 보는 낯선 사람과 일회성 게임을 할 때에도 완전히 이기적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1980년대에 이런 실험 결과를 보고 많은 주류 경제학자들이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이전에는 이런 체계적인 실험은 (거의) 없었지만 수 많은 관찰이 있었다. 예컨대 영국의 경우 헌혈은 한다고 어떤 경제적 혜택도 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헌혈을 했다. 물론 수혈 받는 사람이 친족도 친구도 아니었기 때문에 친족 선택이나 상호적 이타성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집단 선택론자들의 생각이다.
굳이 체계적인 실험이나 관찰을 할 필요도 없다. 상식적인 사고 실험만으로도 충분하다. 낯선 도시에서 어떤 모르는 할머니가 죽음의 위협에 처해 있다고 하자. 주변에 보는 사람도 없다. 10분만 투자하면 할머니를 구할 수 있다고 하자. 그러면 여러분은 할머니를 구할 것인가? 아니면 못 본 척하고 지나칠 것인가?
모르는 할머니이기 때문에 친족도 친구도 아니다. 그 할머니를 다시 볼 것 같지도 않다. 또한 할머니이기 때문에 임신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경우에 할머니를 돕는다. 할머니를 구하기 위해 자신이 큰 희생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망설이는 사람이 많겠지만 거의 대부분 10분 정도의 약간의 수고 정도는 감수한다.
이런 현상을 개체 선택론자는 친족 선택과 상호적 이타성의 논리 때문에 진화한 여러 이타성 메커니즘이 오작동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반면 집단 선택론자는 집단 선택의 결과 인간이 친족 선택과 상호적 이타성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이타적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우선 집단 선택론자들의 설명에 한 가지 난점이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인류가 대부분 기간 동안 진화했던 사냥-채집 사회에서 낯선 사람은 곧 다른 부족 사람이었다. 집단 선택에 따르면 부족 간 경쟁 때문에 자기 부족 사람이라면 친족도 친구도 아니라 하더라도 이타적으로 대하도록 진화했다. 그렇다면 다른 부족 사람들을 해치도록 진화했다고 보아야 일관성이 있다. 자기 부족 사람들에게 잘 해주고 다른 부족이 망하도록 해야 부족 간 경쟁에서 승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최후통첩 게임이나 낯선 할머니의 사례에서 인간은 낯선 사람을 이타적으로 대하기는커녕 해코지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실제 실험 결과나 관찰 결과와는 다르다.
또한 집단 선택론자들은 오작동을 끌어들인 설명을 간단하게 무시해 버린다. 예컨대 최후통첩 게임에서는 “다시는 그 사람과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는 가정이 있다. 이런 가정은 인간이 진화했던 환경에서는 말도 안 된다. 교통과 통신이 매우 불편했던 당시에 인간의 활동 범위는 매우 좁았다. 따라서 한 번 어떤 사람을 보았다면 다시 볼 확률이 매우 높았다. 최후통첩 게임처럼 매우 인위적이며 과거의 환경과 매우 다른 조건에서 인간의 심리적 메커니즘이 오작동할 것이 거의 뻔함에도 불구하고 집단 선택론자들은 이런 가능성을 그냥 무시해 버린다.
이런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집단 선택론은 진화 윤리학계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 다른 때에는 집단 선택론을 거부하는 리처드 알렉산더(Richard Alexander)도 『The Biology of Moral Systems(1987)』에서 인간의 도덕성을 다윈과 비슷한 방식으로 설명했다. 알렉산더는 집단 선택을 적용한 설명과 개체 선택을 적용한 설명을 모두 제시했다. 저명한 영장류 학자인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 역시 『Good Natured: The Origins of Right and Wrong in Humans and Other Animals(1996)』와 『Primates and Philosophers, How Morality Evolved(2006)』에서 집단 선택론에 의존했다. 물론 집단 선택론을 가장 열정적으로 주창한 책은 엘리엇 소버(Elliott Sober)와 데이비드 윌슨(David Sloan Wilson)이 쓴 『Unto Others: The Evolution and Psychology of Unselfish Behavior(1998)』이다.
반면 리다 코스미디스(Leda Cosmides)와 존 투비(John Tooby) 그리고 그들의 가까운 동료들은 집단 선택론에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다. 「The Resurrection of Group Selection as a Theory of Human Cooperation(Michael E. Price, 2008, http://people.brunel.ac.uk/~hsstmep/Price_Social_Justice_Research_2008.pdf)」와 『Foundations of Evolutionary Psychology(Charles Crawford, Dennis Krebs, 2008)』에 실린 “Renaissance of the Individual; Reciprocity, Positive Assortment and the Puzzle of Human Cooperation(Johnson D. D. P., Price M. E., Takezawa M.)”에서 집단 선택론에 대한 반박을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신집단 선택설 옹호자와 집단 선택이 거의 영향력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 사이의 논쟁은 의미론적(semantic) 논쟁이다. 수학적 모델은 동등한데(equivalent) 서로 다른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내용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은 『확장된 표현형』에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의 관점과 포괄 적응도의 관점이 네커 육면체(Necker cube)처럼 하나의 실체를 두 가지 다른 시각에서 본 것과 같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 같다(엄밀히 따지면 상황은 더 복잡하다). 이기적 유전자의 눈으로 보면 자연 선택은 유전자의 복제를 위한 방향으로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포괄 적응도의 측면에서 보면 자연 선택은 개체가 포괄 적응도를 최대화 하는 방향으로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의 친족 선택 이론을 개체의 관점에서 보면 개체가 포괄 적응도를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가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같은 수학적 모델을 신집단 선택설의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 만약 친족으로 이루어진 무리를 집단으로 본다면 집단 수준의 선택 즉 친족 집단 사이에서 경쟁이 일어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상호적 이타성(reciprocal altruism)의 경우에도 친구들로 이루어진 무리를 집단으로 본다면 친구 집단 사이에서 경쟁이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신집단 선택설은 틀렸다기 보다는 재탕이다. 해밀턴의 친족 선택 이론과 로버트 트리버스(Robert Trivers)의 상호적 이타성 이론을 형질 집단(trait group)이라는 개념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재해석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집단 개념을 정의하면 집단 개념이 너무 지저분해진다.
인간의 경우 개체군(population)이 친족 집단들로 깔끔하게 나뉘어지지 않는다. A와 B 사이의 근친도(degree of relatedness)가 너무 낮아서 친족이라고 보기 힘들다고 하자. 이 때 A는 C의 친가 쪽 사촌이고, B는 C의 외가 쪽 사촌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C는 어느 친족 집단에 속하는 것일까? 친족의 경우에는 이분법적이지 않다. 가까운 친족과 먼 친족이 있을 뿐이다.
신집단 선택론자와 개체 선택론자의 논쟁이 실질적 내용을 둘러싼 논쟁일 때도 있다. 나의 잠정적 결론에 따르면, 신집단 선택론자들은 이론적 모델을 제시할 때에는 해밀턴의 수식의 재해석에 치중해서 새로운 것은 별로 없지만 옳은 이야기를 하지만 실제로 인간의 이타성이나 도덕성의 진화를 설명할 때에는 윈-에드워즈 식의 구집단 선택론(old group selection)을 펼치는 것 같다.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해 상세히 쓸 생각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집단 선택론이
이기적 유전자론와 대립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명백한
오해다. 데이비드 윌슨
자신이 이것은 오해라고 여러 번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이기적 유전자론은
너무나 뻔한 진리다. 한 유전자좌(locus)를 두고 여러 대립유전자들(alleles)이 경쟁을 벌일
때 당연히 더 잘 복제하는 유전자가 승리한다. 즉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전자가 승리한다. 피셔(Ronald Fisher), 해밀턴, 윌리엄스
등이 정립했으며 도킨스가 『
실제로 주목해야 할 논점은 이기적 유전자론을 부정하느냐 여부가 아니다. 이제는 사실상 모든 진화 심리학자들이
이기적 유전자론을 당연시한다. 신집단 선택론의 수학적 모델의 경우에도 논란거리가 아니다. 진화 생물학의 수학적 모델에 정통한 학자들은 신집단 선택론 옹호자이든 비판자이든 한결같이 그것이 해밀턴의 모델의
재탕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진짜 따져야 할 점은 과연 신집단
선택론자들이 재탕한 해밀턴의 모델을 정확하게 적용하는지
아니면 자신들의 주장과는 달리 엉뚱하게도 윈-에드워즈의
잘못된 모델을 적용하는지 여부다. 나는 후자라고 보며 이것이 내가 구집단 선택론뿐 아니라 신집단
선택론도 거부하는 이유다.
첫댓글 "강한자가 살아남는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자다" 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이 말이 생물학적으로나 진화심리학적으로나 진화에 대한 가장 함축적인 표현일 것 같습니다.
투비와 코스미디즈의 논문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추천 서적> 게시판에 있는 "진화 심리학을 공부하려는 사람들에게 - 추천하고 싶은 책들"을 참조하십시오. http://cafe.daum.net/Psychoanalyse/J3xI/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