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멸 이후에 엄격한 규칙 아래, 경계선 내에서 모든 것이 보호되는 Community가 만들어졌습니다.
출산모들이 ‘신(NEW) 자녀’를 낳고 갓 태어난 아기들은 시험을 통해서 기초 가족에게 보내지거나, 임무해제로 안락사 당합니다. 혈연이 아닌 사람들끼리(기초가족) 똑같은 모양의 집에 살며, 매일 아침 감정을 앗아가는 주사를 맞습니다. 졸업을 하면 원로들이 모두의 직업을 결정하고, 일정 나이가 되면 은퇴를 하여 안락사 됩니다.
평화롭고 모두가 평등한 이 Community에서 주인공 조너스는 기억 보유자로 선택됩니다. 어렸을 적부터 사물을 보는 게 남달랐던 조너스는 대파멸 이전의 기억들을 그 전 보유자에게 전해 받음으로써 Community에 조언을 해주는 역할을 맡습니다. 훈련을 통해 남들보다 많은 것들을 알고 보고 듣게 된 조너스는 이러한 것들을 사람들에게 다시 돌려주고자 애씁니다.
<The Giver: 기억 전달자>는 구슬 동료 도희 언니와의 영어 공부 모임에서 두 번째로 본 영화입니다. 햇살이 가장 좋은 시간에 만나서 둘 다 너무 졸리다는 말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지만, 몰입감 있는 영화 덕에 한 번도 졸지 않고 아주 재미있게 영화를 보고 그 소감을 나눴습니다.
도희 언니는 영화를 보며 감정의 중요성을 느꼈습니다.
언니는 좋아도 좋은 것을 잘 표현하지 않고, 힘들어도 힘든 것을 잘 표현하지 않습니다.
언니만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요즘 사회는 많은 것들을 참으라고 합니다.
중·고등학교 때는 연애하지 말고 참다가
대학교에 와서 연애하라 하고,
젊을 때 놀고 싶은 걸 참고 바짝 벌어서
그 돈으로 늙어서 여행을 다니라 합니다.
현 사회는 많은 것들을 표현하기 어렵게 합니다.
교과서의 질문은 분명 내 생각을 묻지만
자습서에는 답이 나와 있습니다.
선생님이 원하는 답, 사회가 원하는 답을 좇으며
우리의 다양한 생각은 배제되고,
하나의 답만이 남습니다.
이 사회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에게 영화 속 오전 주사를 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고 버티는 것을 사람들에게 내재화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처음에는 색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둘 다 흑백영화인가보다 했는데
조너스가 (겉핥기 식의 일시적인 느낌(feeling)이 아닌)
깊고 오래 가는 감정(emotions)을 느낄 때마다
영화 속 색이 살아납니다.
색에서 오는 감정이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눈에 보이는 모든 색들이 참 소중합니다.
도희 언니는 색약자들이 여느 사람이 보는 색을 볼 수 있는 전용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본 후 눈물을 흘리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분명 매일 보던 장면인데
보지 못했던 색들이 감동을 준 것이지요.
이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연을 찾아다니며 자연의 색을 보라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차마 이름 붙일 수 없는 이 세상 수많은 색들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어떠한 감정들을 일으킵니다.
영화를 보며 말의 힘을 느꼈습니다.
있는 말이라고 해서 그 실체가 다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 말들은 단어라기보다는 소리에 가깝습니다.
사람마다 그 실체가 다르기도 합니다.
영화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I apologize.(사과 드립니다.)
I accept your apology.(사과를 받아들입니다.)
이 말을 하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진정한 사과와 사과를 받아들이는 마음이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이 말은 그저 형식에 가깝습니다.
영화 속에서 사랑 같은 추상적인 단어를 쓰면
정확한 단어를 쓰라며 꾸짖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가끔 공부를 하다보면 이런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외우긴 했으나 그 단어들이 와 닿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복지 당사자를 대상자라 부르지 않고 당사자라 부르는 이유가 나에게 와 닿지 않았을 때,
제가 쓰는 당사자라는 말은 그저 형식에 가깝습니다.
제 실천도 얼마쯤 말을 따라갑니다.
말은 당사자인데, 실천은 대상자입니다.
제가 진정 당사자를 복지의 당사자로 여기고, 당사자라 부르며, 그렇게 실천했을 때
그 당사자라는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고 발로 나오는 말들을 하고 싶습니다.
힘 있는 말을 하고자 다짐했습니다.
공상과학 영화라지만 사실 영화 속 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이상으로 삼는 복지국가와 닮아 있었습니다.
승자와 패자가 없고, 모두가 평등한 사회.(분배정의)
무척이나 안전하고 완벽한 사회. 문제 없는 사회.
언뜻 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안전한 만큼 사람들은 공포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고,
그만큼 커뮤니티에 의존했습니다.
커뮤니티에 쓰임새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고,
여러 가지 감정들과 경험 자유는 감정들은 비효율이라는 명목으로 오전 주사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커뮤니티 속 사람들은 그저 임무들이며
임무 그 이상의 가치는 없습니다.
심지어는 영화에서 사람의 죽음은 상실로 표현됩니다.
사람이 죽으면 상실 의식을 진행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잊으면
그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이 됩니다.
사람이 정말 이름만 잊으면 이 세상에 없던 사람이 될까요?
우리가 복지국가를 만들어 많은 것들을 국가에 맡기면 맡길수록
그저 국가를 지탱하는 하나의 안전한 부품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안전을 위해서는 규칙이 필연적이기에
다양성은 무시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정도의 안전망은 필요하고,
이를 만들려 애쓰는 사람들에게 항상 고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전을 위해 내 모든 것을 국가에 맡길 수는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쓰임새(직업, 임무) 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가치들이 참 많습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소중합니다.
이 영화를 보며 사회사업의 가치를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국가밖에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
관계망을 만들어줌으로써
진짜 삶을 전해주는 일.
조너스처럼 한 번에 모든 사람들에게 진짜 삶, 감정이 있는 삶을 전해줄 순 없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진짜 삶을 경험하게 하고 싶습니다.
정붙이고 살 만한 사회는, 눈물 고통 슬픔이 있고 가난 질병 장애가 있고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그래도 이웃이 있고 인정이 있어’ 살 만한 세상입니다. 불편하거나 갈등이 있을지라도 그래도 혼자는 아닌 세상, 고운 정이든 미운 정이든 정붙이고 살 만한 사회입니다.
사회사업 이상은 문제를 없애는 쪽보다 정붙이고 살아갈 만한 바탕 곧 이웃 관계와 인정의 소통을 살리는 쪽에 가깝습니다. ‘문제없는 세상’보다 ‘인간적인 세상’에 가깝습니다. 「복지요결」 ‘사회사업 이상’ 가운데
사회사업 재주가 필요 없고,
재주가 있어도 재주를 내보이지 말아야 한다지만
‘사물 저 너머를 보는 능력’(영화 속 조너스가 갖춘 능력)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람을 학벌 문제 실적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닌
그저 ‘사람’으로 보는 능력은 갖춰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열심히 발로 다니며 좋은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며
그 좋은 기억들을 잘 전하고 싶습니다.
있는 힘껏 궁금해 하고, 표현하고 싶은 걸 마음껏 표현하며
‘사물 저 너머를 보는 능력’을 키우겠습니다.
당사자가 살아 있는 한 끝까지 자기 삶을 살게 돕는 사회사업가야말로
이 시대 진정한 기억 전달자·기억 생동자가 아닐까요?
첫댓글 경화가 그 시작을 이해하고 공감하였구나, 필히 그랬으면 좋겠다. 당사자의 감정을 다 받아들여 때론 힘들지라도,
사람살이가 그렇듯이, 살림살이가 그렇듯이, 녹녹치 않은게 없으니, 그래서 사람 인 처럼 서로 기댈지니, 그것은 공감에 따른 힘듦보다 공감을 통해 안식이 될 수 도 있음이랴.....
글 써줘서 고마워요
상진이 형이 생각나는 글이에요, 아.,,보고싶은 상진이형, 대중문화로 복지를 풀어내는 문화복지인, 경화도 글을 찾아서 읽어보길 바래요, 이번에 새 책도 나왔어요
@카페사회사업가(꿈공장장-이우석)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
아직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선생님이 이렇게 말해주시니 힘이 납니다.
문화복지 흥미롭습니다.
찾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