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백팔고찰순례단
 
 
 
 
카페 게시글
자유게시판 스크랩 한옥의 창, 그 아름다움
청원 추천 0 조회 1,253 15.05.24 20:12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차경(借景), 자경(自景)..

한옥의 창, 그 아름다움





필자가 건축 디자이너가 꼭 아니더라도 한옥의 그 아름다움은 누차 이야기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집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마치 박물관에서 국보급 도자기를 감상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지만 한옥안에서 문을 열어 밖을 보는 풍경은 마치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것이며

그안에서 사는 것은 그차체가 평온과 행복입니다.



한옥에서 발견한 선조들의 지혜


차경(借景)

 

한옥에서 창을 통해 일어나는 풍경작용의 출발점은 ‘차경’이라는 개념이다. 말 그대로 ‘경치를 빌린다’는

뜻으로 동서양의 건축과 조경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개념이다. 한옥의 경우는 ‘건물 밖에 있는 경치를

집 안으로 들여와 감상 대상으로 활용한다’는 뜻이다. 물론 경치를 직접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창이 개입하는 지점이 이곳이다. 창을 통해 경치를 선별하고 재단해서 마치 액자에 담긴 한 장의 그림처럼

만들어 즐기게 된다.

 

차경은 오로지 창의 활약에서 생겨난다. 물론 이런 작용은 동서고금 공통이다. 건물에 구멍만 뚫려 있으면

그곳을 통해 바깥 경치가 보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옥은 차경에 대해 이런 당연한

현상을 훨씬 넘어서서 매우 정치(精緻)한 계획을 세워 활용하고 즐긴다. 물론 모든 한옥의 모든 창이 이런

것은 아니다.
집과 방이 처한 상황에 따라 차경을 시도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집주인과 장인이 차경에 대해 크게 의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매우 많은 수의 한옥에서 창은 차경에 대해 분명한 의도와 목적을 읽을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렇게 많은 창이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화를 연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옥에서 차경을

특별하게 의도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마당의 존재다. 물론 마당 역시 개인주택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한옥의

마당은 단순히 집을 빼고 남는 나머지 면적이 아니다. 방과 한 몸으로 작동하는 방의 일부다.

한옥에는 복도가 없다. 문만 열면 바로 마당이다. 한옥의 방은 보통 두 면, 심지어 세 면을 마당과 면한다.

문만 열면 바로 앞마당, 뒷마당, 옆마당으로 통한다. 방과 마당을 가르는 경계나 벽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 보니 방에 앉아 있어도 마당은 늘 함께한다. 숫제 마당이 방 안에 들어온다는 표현이 정확할 정도다.

 

둘째, 창밖의 풍경요소 가운데 차경의 대상으로 삼고 싶은 것은 분명히 찍어서 창에 대응시킨다. 식수를 할 때

그렇게 할 수도 있고 이미 있는 요소라면 창을 거기에 맞춰서 낼 수도 있다.

한옥의 창이 정형적 반복이나 동일성을 피해 자유롭게 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똑같은 창을 동일하게

반복하는 것을 가급적 피하는데 그 이유는 방안의 형편에 맞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형편이란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풍경요소를 차경에서 즐기려는 속셈이다.

 

셋째, 마당을 가급적 비워서 차경 대상에 대한 집중도를 높인다. 한옥은 원래 마당에 식수를 거의 하지 않는다.

잔디도 깔지 않으며 소품도 두지 않는다. 이렇게 비워두는 것은 대류작용을 원활하게 해서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기 위한 목적이 크지만 차경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한 것도 있다.

크게 보면 ‘비움의 미학’이란 것인데, 비움으로써 다른 더 큰 것을 얻는다는 지혜인 것이다. 대류작용도 그렇게

얻는 더 큰 것 가운데 하나일 터이고, 차경을 통한 풍경작용 역시 그럴 것이다. 마당을 통틀어 차경 대상은

잘해야 두세 점, 귀하고 드문 것이 되며 따라서 창을 통해 차경될 때 그 효과는 꽤나 커진다.

창밖 가득, 이 나무 저 나무 체한 것처럼 넘쳐나는 법은 절대 없다 절제하고 집중해서 한두 점만 빌릴 뿐이다.

그래서 오롯하다.

 


넷째, 방 전체의 스케일감이다. 한옥에서 창을 통한 차경은 방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않아서 볼 때,

즉 좌식 형식일 때 그 맛이 가장 좋다. 한옥의 좌식문화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부정적 평가도 있다.

조선이 끝내 식민지로 전락한 것이 결국은 앉은뱅이 생활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다. 좋은 점도 있는데 바로

풍경작용을 즐길 때다. 한옥의 풍경작용은 기본적으로 좌식문화의 산물이다.

 

풍경작용은 눈높이에서 일어나야 되는데 의자에 앉는 경우와 방바닥에 앉는 경우는 차이가 크다. 방바닥에

앉는다는 것은 곧 땅바닥과 내 몸을 하나로 밀착시켰다는 뜻이다.

풍경작용이란 것이 결국 땅을 끼고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땅바닥과 내 몸을 밀착시키는 조건은 매우

중요하다. 같은 눈높이에서 풍경을 보더라도 방바닥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보는 장면은 의자에 앉아서

보는 것과 아주 다르다. 나의 존재와 훨씬 밀착해 있다.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되는 기분이다.

노장의 ‘몰아(沒我)’, 즉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되어 나를 잊은 상태다. 의자에 앉아서 보면 이렇지 못하다.

나와 차경 대상, 주체와 객체가 따로 논다. 둘 사이에는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있다.

 

좌식문화가 풍경작용에 유리한 점은 또 있다. 한옥의 방은 천장이 낮다. 좌식문화에 맞춘 스케일인데, 그래서

아늑하다. 아늑함은 풍경작용에 감성적, 감상적 효과를 높여준다. 호탕하게 즐길 풍경은 대청에 나가면 된다.

방안에서는 오붓하게, 그리고 오롯하게 풍경을 즐길 수 있다. 내 마음 가득 풍경을 담을 수 있다. 내 마음과,

내 감성과 온전히 주고받을 수도 있다. 내 피부 같고 내 숨결 같다. 이것 역시 몰아의 또 다른 상태다.

 

다섯째, 창이 작동하는 방식이 다양하다. 우선 창이 여닫이와 미닫이 두 종류다. 여닫이창은 차경 대상에 대해

2차원 평면적으로 작동하는 대신 선별하는 기능을 갖는다.

닫으면 자르고 열면 받아들인다. 정적이고 직설적인 대신 분명하고 정확하다. 차단과 열림이 명확하다.

미술에서 액자를 보는 것과 같은 장면을 만들어낸다. 미닫이문은 반대다. 밖으로 열리기 때문에 3차원 공간

깊이를 갖는다. 선별기능은 약한 대신 시선에 사선을 집어넣기 때문에 풍경작용이 풍부하고 다양해진다.

동적이며 은유적이다. 열린 것도 아니고 닫힌 것도 아닌 중간 상태를 유지하지만 그만큼 영화를 보는 것처럼

뛰어들고 싶게 한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하이라이트는 이런 두 종류의 창이 함께 작동한다는 점이다. 한옥은 대부분 겹창이다.

겨울의 단열 목적이 가장 컸겠지만 차경에 다양성을 주기 위한 목적도 중요했다. 서로 반대되는 성격의

두 창을 함께 내다 보니 풍경작용은 매우 다양해질 수 있다.

안쪽의 여닫이를 활짝 다 열고 바깥쪽의 미닫이를 반쯤 여는 경우, 여닫이 두 짝 중 한 짝은 닫고 다른 한 짝은

활짝 연 다음 바깥쪽의 미닫이는 그 반대로 열고 닫는 경우 등등 조합에 의한 경우의 수는 실로 수십 가지는

된다. 현실세계에서 경우의 수가 수십 가지라면 무한대로 다양하다는 말을 쓸 만하다.

 

두 창의 순서도 중요하다. 겹창일 경우 대개 안쪽을 여닫이로 하고 바깥쪽을 미닫이로 한다. 이것은 물론 창의

열림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반대 순서이면 안쪽의 미닫이가 바깥쪽의 여닫이에 걸려 열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창의 순서를 이렇게 정하고 보니 풍경작용은 한결 안정적이 되었다. 안쪽의 여닫이문으로

일단 열리고 닫힘의 선택을 명확하게 정할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 바깥쪽의 미닫이문을 통해 동적인 즐거움을

더할 수 있다. 안쪽 문이 동적으로 작동했다면 너무 불안했을 것이다. 안정 속의 변화를 택한 것인데, 이는

좌식문화에 요구되는 아늑함과도 통하는 특징이다.

 

이처럼 한옥에서는 차경에 대해 매우 정밀하고 치밀한 건축적 셈법을 갖는다. 이런 셈법은 한옥을 지을 때

매우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 아무 한옥에나, 아무 방에서나 눈길만 조금 돌리면 별의별 신기한 풍경작용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비밀이다. 요즘같이 자극적인 놀이문화가 없던 시절, 이런 다양한 풍경작용은 그 자체가

훌륭한 놀이문화였다. 또한 그림을 거는 것보다 수십 배는 효과적인 문화생활이기도 했다.

매번 그림을 바꿔 달 필요도 없이 시간 따라, 날씨 따라, 계절 따라 자연이 선사하는 ‘진짜 풍경’을 즐기고

감상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한옥에서 발견한 선조들의 지혜

 

자경(自景)

 

창을 통해 일어나는 풍경작용의 대상은 크게 자연물과 집의 일부로 나눌 수 있다. 자연물은 대부분의 집에서

흔히 일어나는 풍경작용이다. 창밖에 수목 한 점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집의 일부는 좀 다르다.

방 안에 앉아서 내 집을 풍경으로 감상할 수 있는 것은 한옥만의 독특한 특징에 해당되는데 이것을 ‘자경’

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다. 자경은 말 그대로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본다는 의미다.

집에 적용하면 내 집의 모습을 풍경요소로 활용하여 감상한다는 의미다. 집을 주체와 동격으로 가정한

상태에서 자기 스스로를 풍경요소로 활용하는 입장이다. 주체가 관찰자인 동시에 피감상 대상, 즉 객체가

되는 것이다. 자경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먼저 풍경요소가 수목이나 꽃이 아닌 집의 일부분이어야 한다. 액자작용을 일으키는 주체로서의 집이 되는

풍경요소인 객체도 되는 현상이다. 액자와 풍경 모두가 집의 일부분이어야 한다.

다음으로 풍경작용이 집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 내 집을 집 밖에서 보는 것은 너무 당연하고 평범하다.

내가 남을 보거나 남이 나를 보는 일방통행의 시각작용으로 새로울 것이 전혀 없다.

한옥의 특징이자 장점 가운데 하나는 집 안에 앉아서 내 집의 생김새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남을 봄과

동시에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나 스스로를 보게 되는 쌍방향 시각작용을 한 번에 행하는 것이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풍경작용으로 만든 것이 ‘자경’이다.

 

<정여창 고택 사랑채>

 

한옥에서 자경이 일어나는 이유는 ‘외파(explosion)’라는 한옥만의 구성 방식 때문이다. 씨앗이 발아하듯

방 하나의 기본 공간단위가 밖으로 증식하면서 분할하는 구성이다. 육면체 윤곽을 먼저 정하고 안으로 잘라

들어가며 구성하는 서양의 ‘내파(implosion)’ 구성과 반대되는 한옥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한옥의 평면을 보면 꺾임, 증식분할, 나눔 등이 유난히 많다. 개별 채에서부터 이미 한 번 꺾인 ‘ㄱ’자형,

두 번 꺾인 ‘ㄷ’자형, 세 번 꺾여 에워싸는 ‘ㅁ’자형, 에워싼 다음 한 번 더 뻗어나간 ‘ㅂ’자형 등 구성방식이

다양하다. 한글 자음과 닮은꼴을 보이기도 하려니와 한자에까지도 유추할 수 있는 더 복잡한 구성들도 많다.

한옥 전체로 보면 이런 개별 채들이 다시 몇 개씩 어울리면서 한자에 유추할 수 있는 복잡한 구성으로

발전한다.

 

그 결과 집 안에 앉아서 내 집을 볼 수 있는 특이한 현상이 가능해진다. 이때 내 집을 창 안에 담아서 볼 수

있다면 ‘자경’이 된다. 집과 집이 마주보기도 하고 직각으로 어긋나 비스듬히 맞서기도 한다. 창만 열면

집의 다른 부분이 보이니 자경작용을 만들어낼 수 있는 요인이 넘쳐난다는 뜻이다.

공간 켜가 복층이 되면서 문을 열면 밖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공간 켜와 집의 다른 일부가 보인다.

채와 채 사이를 담이 가르고 문이 나면서 자경작용의 가능성은 증폭된다. 마당과 대청도 자경작용을 유발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집과 집 사이에 적당한 간격을 만들어 거리를 조절하면서 자경작용을 돕는다.

 

<추사고택 안채>

 

집 안에 앉아서 내 집을 본다는 것은 내 스스로 내 몸을 본다는 것과 같은 말이며 확장하면 내가 나를 본다는

말이다. 내가 나를 본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데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나르시시즘, 즉 자기애의 심리작용이다.

외관의 모습은 나르시시즘을 성립시키는 핵심 요소이나 이것은 반드시 시각작용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프로이드는 나르시시즘을 오토에로티즘(自體愛)보다 한 단계 성숙한 상태로 정의했다.

오토에로티즘은 자신의 신체를 감각적이고 단편적인 성충동의 대상으로만 보는 데 반해 나르시시즘은

총체적이고 통일된 사랑의 대상으로 대할 수 있게 되는 단계다. 물론 나르시시즘만으로도 아직 불완전한

단계이지만 적어도 자신의 신체를 스스로 종합적 인격체로 정의할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는 일정한 인격미를

획득한 상태로 볼 수 있다. 이것을 한옥의 자경에 적용하면 자기 집을 보면서 느끼는 자기만족 상태이거나

혹은 자기 집을 풍경요소로 즐길 수 있는 자기애의 여유가 된다.

 

둘째, 자아성찰이다.

증자(曾子=曾參)는 『증자』에서 ‘하루 세 번 내 몸을 돌이켜 살핀다’고 했다. 증자는 실천을 위주로 한 수양을

주창했는데 날마다 세 가지로 자신을 반성하는 것을 요체로 보았다. 형식적 예(禮)보다는 실천적 자기수양을

중시했는데 내 몸을 돌이켜 살피는 일이 핵심을 이룬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 잘못하는 것은 없는지, 몸가짐이

흐트러지지는 않았는지 등등 끊임없이 스스로를 살펴 돌아보라는 가르침이다.

 

셋째, 자아의식을 확고히 한다는 의미다.

자경작용은 관찰자와 대상이 모두 자아다. 모든 질서가 나를 중심으로 짜인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이거나

이기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자기의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는 차원에서 자존감을 확보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이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보한다. 그 목적은 나와 대상, 즉 나와 주변 사이에 동일화 작용을

일으키는 쌍방향 교류에 있다. 세상을 나인 주체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타자와

나를 동일시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이상을 종합하면 자경이란 ‘내가 나 스스로를 종합적 인격체로 정의해서 사랑한 뒤 자아성찰과 자기수양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이를 바탕으로 남과 나를 분별 지어 대립시키지 않고 하나가 된다’는 동양적 가르침과

일치가 되는 건축작용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불이(不二타)’ 사상으로 가르쳤고 현대 윤리학에서는

‘타자 동일화’라고 가르친다. 자경은 이런 가르침을 집 구조에 반영해서 즐긴다는 뜻이다. 관찰자와 풍경요소,

즉 집의 이쪽과 저쪽은 서로 보는 주체와 보이는 객체 사이를 오간다. 둘은 이분법으로 나뉘어 대립하지

않는다. 전도는 매우 부드러워서 둘 사이에는 서로를 구별하기 힘든 일체 상태가 나타난다. 문양, 건축형식,

분위기 등 조형적 통일성이 먼저 일어나고 풍경적 어울림으로 발전한다.


‘방향 전도’, 혹은 ‘위치 전도’라는 것도 있다. 문이나 창을 통해 보는 풍경작용이 이쪽과 저쪽, 혹은 안과 밖을

오가며 양방향으로 일어난다는 의미다. 문의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면 내가 있는 방이 풍경요소가 되면서

풍경작용이 일어난다. 나는 피사체가 된다. 거꾸로 문으로 들어가 뒤를 돌아보면 내가 관찰자가 되고 집의

다른 부분이 풍경요소, 즉 피사체가 된다. 방향과 위치를 매개로 한 나와 너, 주체와 객체, 관찰자와 피사체

사이의 전도다. 전도 작용은 불이 사상을 구체화하는 건축적 전략의 하나다.



<충효당 사랑채>


이처럼 자경은 다분히 유교적 건축현상이다. 한옥이 유교시대 상류층의 주거였으니 당연하다 할 만하다.

한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느니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느니 하면서 유교의 현대적 존재 이유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현대에 조선시대 유교처럼 사는 사람은 없겠지만 내용에 따라 현대화해서 좋은 교훈으로

삼는 것은 필요하다. 자경작용도 그중 하나다. 자경작용의 의미를 현대 한국인의 주거와 비교하면 잘 알 수

있다. 요즘 자기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니, 이런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 수십 층

콘크리트 건물 속에 창 몇 개 난 것이 전부이려니와 모든 집이 이런 모습이 똑같기 때문이다.

 

집은 사는 사람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집이 같으니 정체성이 성립되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 정체성을 찾으려

든다. 과도한 학벌 경쟁과 출세 욕구를 유발한다. 끊임없이 나를 남과 분별하려 든다. 내가 남보다 잘난 구석을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라도 만들어내야 겨우 안심이 된다. 억지와 갈등은 커져만 간다. 가장 힘든 것은 이런

나 자신이다. 모두가 이렇게 힘든 나이니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는 병들어 신음한다.

 

자경은 현대 한국인의 이런 암울한 상태에 대한 좋은 교훈이다. 내 집에 앉아서 내 집을 성찰하고 감상하며

즐기는 여유와 수양이 소중한 이유다.

 

글 : 임석재 (이화여자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출처 : Korea Cultural Heritage Foundation / March 2013





한옥의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며 보이는 집은 모습도 예술이고

대문을 열어 밖으로 나서며 보이는 풍경 또한 예술입니다.



한옥의 창을 열고 보이는 풍경은 어느곳 어느 풍경이나 한폭의 그림입니다.







유리를 통하지 않고 문을 열면 여는 것만으로도 소통입니다.

여닫이와 미닫이의 한지를 바른 이중문은 유리보다 보온 효과도 높지만 문살도 없어 시야도 편합니다.






외관상 남루한 작은 창일지라도 저창을 열면 빛이 방안 가득 쏟아져 들어 올것이고

저 창을 통해 하늘의 구름과 달돠 별들이 보일 것입니다.



창을 통해 밖을 엿보기도 하고 창을 통해 사람과 소통하기도 합니다.




한옥뿐만 아니라 건축물에서의 창은 그 건물에 사는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축디자이너 '사울의칼'도 창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창을 적절하게 안배하지 않는 것은 평생 바꾸어 걸지 못하는 그림을 걸게 되는 것보다도 나쁩니다.



한옥이 아닌 서양식 건축물은 지붕을 뚫어 집안으로 하늘을 데려 올수도 있습니다.

욕실 천정을 유리로 해서 클라이언트의 탄성을 자아내게도 했었습니다.



때로는 창을 낮게 해 누워서 자연을 감상하고 느끼며 사색할 수도 있습니다.



한옥의 창처럼 활짝 열어 밖과 소통 할 수도 있습니다.



하이샷시라는 평범요상(?)한 창 말고도 훨씬 낭만적인 창을 좋은 위치에 설치할 수 있습니다.

(어라? 이런류의 창은 본래 밖으로 밀어 여는 것인데...)



(이런 그림이 더 맞는 창입니다. ^^)



봄날 창밖에 좋은 풍경과 함께 스프링처럼 튀어오르는 미녀도 볼 수 있다면 더더욱 좋겠지요..ㅎ

(아차! 창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샜습니다. ^^)





창과 문을 잘못내면 복이 나간다고 옛분들이 말하지만 난 그런거 개의치 않습니다.

동쪽에 창을 내어 아침 햇살을 침실로 들이고 서쪽에도 창을 내어 석양을 즐기며 와인도 한잔하고..

남쪽에 창을내어 하루종일 환한 자연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면 인생이 즐거워집니다.



규칙이나 통념은 깨라고 있는 것입니다.

오래된 집이라 하더라도 답답하고 밖을 보고 싶다면 과감하게 벽을 자르자는 것입니다.


한옥은 불편하다고 막연히 폄하 하지만 한옥의 창에서 또 많은 것을 배웁니다.


#



 
다음검색
댓글
  • 24.09.09 13:22

    첫댓글 안녕하세요, SBS 예능 프로그램 <동네멋집>에서 연락드립니다.

    다름이 아니라 해당 게시물 위에서 세번째 차경 사진을 출처를 밝히고 자료로 사용해도 괜찮을지 문의드립니다!
    확인 후 답변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바로 전화를 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010-5524-1975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