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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남 이순신연구소,백두대간 의병전쟁 답사회,의병정신선양회 원문보기 글쓴이: 범털과개털(미산고택,저상일월)
예천 호명면과
□ 호명면(虎鳴面)
예천군의 남부에 위치한 면으로, 본포동에 있는 범우리의 뜻을 따라서 호명면(虎鳴面)이라 하여 본동(本洞), 포저(浦底), 원곡(原谷), 송분(松粉), 사곡(沙谷), 금릉(金陵), 어촌(漁村), 한어(閑於)의 8개 동리(洞里)를 관할(管轄)하다가, 1914년 4월 1일 군면(郡面) 폐합에 따라 위라면(位羅面)의 본동, 형호(衡湖), 오천(?川), 방구(芳邱), 우음(牛音), 신기(新基), 산합(山合), 백송(白松)의 8개 동리와 양산면(陽山面-艮山)의 직곡(稷谷), 간산(艮山), 소망(所望), 황지(黃地)의 4개 동리와 신당면(新堂面)의 인포(仁浦), 월촌(月村), 서당(書堂), 종산(宗山), 사평(沙坪), 고산(古山), 내동(內洞), 신동(新洞), 하리(下里), 담암(淡岩)의 10개 동리와 안동군 풍북면(豊北面)의 현애(玄厓), 수전(水?)의 각 일부를 포함 4면(面) 30개리를 병합하여 1914년 3월 본동, 원곡, 송곡, 금릉, 한어, 본포, 형호, 오천, 산합, 백송, 직산, 황지, 월포, 종산, 내신, 담암의 16개 동으로 개편(改編)하였다.
동쪽은 안동시(安東市) 풍산읍(?山邑), 남쪽은 지보면(知保面)과 안동시(安東市) 풍천면, 서쪽은 지보면과 개포면, 북쪽은 예천읍(醴泉邑)과 보문면(普門面)에 맞닿아 있다. 면적은 62.2㎢이며, 가장 높은 곳이 해발 507m의 수국산, 341m의 광석산이다. 북동쪽에 산지(山地)가 있고, 대부분 구릉성 산지 및 구릉지(丘陵地)로 구성되어 있으며, 봉화에서 시작되는 내성천(乃城川)이 관류한다. 전체면적의 31.8%인 19.77㎢가 농경지로 수리(水利)가 좋다.
볼거리는 선몽대, 도정서원이 있으며, 특산물은 금싸라기 참외, 배, 사과 등이 있다.
□ 범우리(虎鳴)
ㅇ 위 치 : 호명면 본포리
ㅇ 내 용
지금의 본포리와 원곡리 사이에 있는 범우리산(일명 虎鳴山)은 옛날에 수목(樹木)이 우거진 깊은 산골짜기에 범이 살았다고 범우리로 불러진다 한다. 범 “호(虎)”자와 울 “명(鳴)” 자를 따라 옛날의 면소재지인 본포리가 속하는 행정단위(行政單位)의 이름을 호명(虎鳴)이라 했다.
원곡리 동암산을 범우리산이라 하고, 본포리와 원곡리 사이에 범우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호명이라는 지명은 여기서 유래(由來)했다.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태어난 예천군의 임지한(林支漢) 장군(將軍)이 범을 길들여 말(馬)처럼 타고 다녔다는데, 원종(元宗) 때 경주(慶州)에서 일어난 적도(賊徒) 최종, 최적, 최사 등을 청송 주왕산에 토벌하고 그 공으로 큰 벼슬을 주고자 하니 상주(尙州) 관내에 소속된 다인현(多仁縣)을 예천군에 속하게 하도록 임금에게 청(請)하여 허락을 받았다. 임 장군(林將軍)이 다인(多仁)을 왕래할 때, 장군이 탄 범이 여기에 이르러 크게 포효(咆哮)하니 이 산에 있던 범들이 모두 따라 울어 범우리가 되었다고 한다.
□ 선몽대(仙夢臺)
ㅇ 위 치 : 호명면 백송리 내성천변
ㅇ 내 용
백송리(白松里) 내성천 남쪽 우암산에 자리잡고 있는 선몽대(仙夢臺)는 1563년(명종 18)에 우암(遇岩) 이열도(李閱道)가 창건하였으며, 그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종손(從孫)이며 문하생(門下生)이다.
당시 저명인사가 많이 모여 시를 지어 읊으며 선몽대의 창건을 축하하였다고 한다. 이황은 「선몽대(仙夢臺)」 대호(臺號) 삼자(三字)와 한 귀절의 시를 친필로 써 주었는데, 대(臺) 위에 오르면 선경(仙景)을 이룰만큼 경치가 아름답다 하여 선몽대(仙夢臺)라 하였으며 이것이 지금까지 전하여 오고 있다. 이황의 원운(原韻)을 차운(次韻)한 당시 여러 현자 중 약포(藥圃) 정탁(鄭琢), 서애(西崖) 류성룡(柳成龍),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등 여러 선비들의 친필(親筆)로 쓴 시도 목판(木板)에 새겨 걸어 두어 지금껏 전하여 오니 역사적 유서가 깊다.
동서로 흐르는 내성천 모래밭 평사십리를 한눈으로 볼 수 있고, 대(臺) 아래는 가늘고 긴 내가 굽이쳐 흐르고, 뒷산에는 병암이 둘러싸고, 중턱에는 약수터가 있으며, 약간 내려오면 학심대가 있었던 곳으로 동으로 힘차게 뻗어간 기암절벽(奇巖絶壁)의 장관은 보는 이의 마음을 황홀케 한다.
정자 주변에는 천년을 자랑하듯 울창한 노송(老松)이 둘러 서 있어 일년 내내 이 곳을 찾는 소풍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또한 이 마을 뒤 높은 산 중턱에 있는 넓은 바위 옆에는 잎과 나무 줄기가 흰 소나무가 있어 마을 이름을 백송(白松)이라 불렀으며, 매년 정월 보름에는 마을의 무사태평(無事泰平)과 안녕을 위하여 동제(洞祭)를 여기서 지낸다.
□ 정효각(旌孝閣)
ㅇ 위 치 : 호명면 월포리 (인포마을)
ㅇ 내 용
월포리 인포마을 복판에 있으며, 조그마한 비석 하나를 씌운 아담하게 단장된 비각 한 체, 불과 4 ~ 5평 정도에 세워진 이 비각의 내력(來歷)은 다음과 같다.
1820년 경 이곳에 김복암(金福巖, 본관 金海)이라는 마음씨 착하고 어진 효자(孝子)가 살고 있었다. 그의 부인 안동(安東) 권씨(權氏) 또한 어릴 때부터 말이 적고 남과 다투기를 싫어하고 마음씨 곱고 기절이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그녀가 김씨 집안에 시집을 오니 그 집은 매우 가난하였다. 대가 관문은 고사하고 한끼 두끼 굶주림에 놓여있었다. 또한 시어머니는 장님이었고, 남편은 품팔이하여 식량 한 두 되를 구해서 호구지책(糊口之策)을 마련하고 있었다.
권씨 부인이 이 집에 시집 온지 삼일만에 집 뒤 돌담 밑에 칠성당(七星堂)을 모아 놓고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일월성신(日月星辰) 토지지신(土地之神) 팔금강 (八金剛) 보살(菩薩)님, 그리고 하느님께 비나이다.” 라고 하면서 손발이 닳도록 시어머님 눈뜨게 하여 달라고 3년을 빌고 빌어 정성을 다하였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옛말이 있듯이 하늘도 무심하지 않았다. 잎 피고 꽃피는 춘삼월(春三月)이 지난 농촌의 계절인 5월의 어느 날, 정하수 동이를 단 위에 놓고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물동이 앞에 서리가 갑자기 서리고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면서도 이상하기도 하여 이는 필경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 서리를 숟갈로 접시에 담아 눈먼 시어머님의 눈에 넣어 드렸더니 시어머님이 “보인다”고 소리쳤다. 이에 또 한 번 집어넣으니 “온 세상이 밝게 나타난다”고 소리 쳤다.
그녀는 시어머님을 부축하면서 기뻐하여 춤을 추고 눈물을 흘리며 울기 시작하니, 이웃사람들이 어리둥절하여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게 되었다. 찾아온 이웃 사람들에게 시어머니는 눈을 부릅뜨고 “저 사람이 누구냐! 저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이 소문(所聞)은 즉시 퍼져나가 들에 일하러 간 사람들에게도 알려지고, 또한, 김효자(金孝子)에게도 즉시 알려졌다. 김 효자는 정신없이 집으로 달려오니 어머니가 자기를 알아보자 50년 만에 세상을 볼 수 있는 어머니를 붙들고 뜨거운 감격(感激)과 기쁨의 눈물을 한없이 흘렸다.
이웃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예천군수(醴泉郡守)와 예천향교(醴泉鄕校)에 알리고 서리를 담았던 그 접시를 보내니 예천군수도 이 착한 덕(德)을 상부에 알리고자 서리가 담긴 접시와 보고서(報告書)를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에게 보냈다. 경상감사(慶尙監司) 역시 크게 놀라 임금에게 고(告)하는 보고서를 다 쓰자 그 때까지 녹지 않고 있던 접시에 담긴 서리가 물로 변하고 말았으니 감사(監司)는 더욱 감탄(感歎)하였다. 1867년(고종 4)에 영남어사(嶺南御使) 박선수의 계언(啓言)을 들은 임금도, 그 부인의 효성을 칭송하여 1870년(고종 7)에 효부각(孝婦閣)을 짓게 하여 「정효각(旌孝閣)」이라 이름지었다. 한편 각 유림(儒林) 에서도 권효부(權孝婦)라 부르게 되었다. 이는 하늘이 내린 여성 교훈(敎訓)을 위한 미담(美談)으로 오늘날까지 전하여 오고 있다.
지금도, “효부 김복암처 안동권씨지여(孝婦金福岩妻安東權氏之閭)”라는 비석이 있다.
□ 의구총(義狗塚)
ㅇ 위 치 : 호명면 월포리
ㅇ 내 용
예천읍에서 호명면 오천행 버스를 타고 약 20여 분정도 가다가 내려, 오른쪽으로 산길을 오르면 오백이재라고 하는 만만치 않는 재(고개)가 있다. 이 재의 중턱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높지 않은 산등성이를 따라 조금 가면, 내성천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별로 높지 않은 무덤이 하나 있다. 이것을 의구총(義狗塚)이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사연(事緣)이 있는 개의 무덤이다.
지금부터 200여 년 전, 호명면 형호리에 박준룡이라고 하는 늙은 선비 한 분이 살고 있었다.
이 늙은 선비는 개를 한 마리 기르고 있었는데, 개를 너무나 귀여워하여 한참만 안보이면 개를 불러서 쓰다듬고 어루만져 줄 뿐만 아니라 개의 먹이를 먼저 주고 나서 항상 밥상을 대할 정도의 애견가(愛犬家)였다.
개도 주인의 사랑을 아는지 밤에 잠들기 전에는 주인 곁을 떠나는 법이 없었으며 또한 잘 따랐다. 이러기를 몇 해 지나는 동안 주인과 개는 정(情)이 들대로 들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 박씨(朴氏) 노인(老人)은 우연히 병(病)이 들어 세상(世上)을 떠나고 말았다. 노인이 기르던 개는 주인이 병이 나던 날부터 아무 것을 주어도 먹지 않고 방문 밖에 쭈그리고 앉아서 슬픈 눈빛으로 먼 산만 바라보고만 하였다.
이 해 겨울은 유난히도 날씨가 춥고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눈이 많이 쌓여 상주(喪主)들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산소자리를 구하지 못하여 며칠 동안 애를 쓰고 있을 때, 방 앞에 쭈그리고만 앉았던 개가 상주 앞으로 다가와서는 옷 앞자락을 물어당기는 것이 아닌가?
상주는 무심히 개를 쫓기만 하였으나 개는 달아나지 않고 몇 번이고 상주 옷 앞자락을 물고는 끙끙거리며 밖으로 나가자는 시늉을 하므로 옷자락을 개에게 물린 채 따라 나서니, 개는 줄곧 저우리 앞산인 오백이재를 향하여 줄달음치듯이 상주를 끌고 산(山)으로 올라갔다.
남향(南向)한 한 곳에 이르자 개는 그 자리에서 더 가지 않고 주저앉으면서 끙끙거렸다. 그 자리를 살펴보니 이상하게도 여기만은 눈이 다 녹았을 뿐만 아니라 바람이라곤 한 점도 없이 따뜻한 햇살이 포근히 쪼이고 있지 않는가?
상주(喪主)는 주위 산천(山川)을 다시 바라보니, 이 곳이 아버지의 산소로서 매우 적격임을 깨달았다. 산에서 다시 내려 온 상주는 장사(葬事)지낼 준비를 하고 마침내 이곳에다 아버지의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터를 잡아 준 개는 주인이 병들던 날부터 먹지 않고 슬퍼만 하고 있다가 주인의 산소를 정해주고 상여가 떠나는 것을 보고 그 날 죽어버리고 말았다.
상주들은 주인을 위하여 의로움을 바친 이 개를 아버지 산소 바로 밑에 묻어 주고 이 무덤을 의구총(義狗塚)이라 불렀다.
그 후 후손(後孫)들은 해마다 이 묘(墓)에 제사를 지내고 난 음식을 의구총에 갖다놓고 주인을 위하여 충성(忠誠)스럽게 죽어간 이 개의 넋을 위로하고 무덤의 풀도 베어 주었다고 한다.
풍수설(風水說)에 의하면, 이 충견(忠犬)의 주인인 박씨(朴氏)의 묘자리를 용이혈(龍耳穴)이라고 하며, 명당(明堂)이라고 전해진다.
현재 호명면 형호리에 살고있는 밀양 박씨의 대부분이 이 용이혈 묘의 후손(後孫)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의 박씨 노인에 대한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박씨 부인의 비와 상석이 있는 부근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 오백이재
ㅇ 위 치 : 호명면 월포리 산 88번지 일대
ㅇ 내 용
오백이재는 지금의 월포리 오백이지(못)에서 북쪽으로 산고개를 넘어 종산리 맏질지(못)를 지나 예천(醴泉)으로 가는 옛날의 험한 산길이었으며, 현재 고개 정상에는 작은 돌이 흩어져 있는 서낭당이 있다. 옛날에는 수목(樹木)이 우거지고 산이 험하며 산적(山賊)이 은거하고 있어 500명 이상이 모여서 이 길을 지나야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하여 오백이재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정도의 길이 남아 있다.
또 오백을 한자(漢字)로 오백(五百)말고 오백(烏白)으로 표기해서 석탄(石炭)이나 흑연(黑鉛)의 광맥(鑛脈)이 있을 것으로 추측(推測)하여 탐사(探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 안찔장 대감 장화식(張華植)
ㅇ 위 치 : 호명면 원곡리
ㅇ 내 용
장화식(張華植:1853~1938)은 인동인(仁同人), 호는 학암(鶴巖) 또는 연파(蓮坡)로 호명면 원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명하였던 그는 7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어른과 다름없이 복상(服喪)을 하자 이웃 사람들은 “하늘이 낳은 효자”라고 칭찬했다. 통사(通史)를 읽다가 관우(關羽)가 여몽(呂蒙)의 꾀임에 빠지는 대목에서 여몽이란 두 글자를 성을 내며 지워 버렸으니 정의감이 남달랐다. 1877년 과거에 급제하여 군부경리국(軍部經理局) 2과장 되었으나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인(日人_에게 시해(弑害) 당하자 “역적을 치고 원수를 갚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낯으로 나라 일을 맡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하리면 양정리로 내려와 숨어살았다.
그를 각별히 아낀 고종(高宗)은 칙명(勅命)을 내려 다시 경리국장에 오르고 1902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그해 5월 일본은 「제1은행권」이란 지폐를 발행하여 우리나라 경제를 장악하고자 통용될 수 있도록 조정을 위협함으로 과감히 반항하여 서울의 4대문에 『일본 은행권의 국내 통용을 엄금함. 한성판윤 장화식』이라고 크게 방을 써 붙이고 9월에 일본제일은행권의 통용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1903년 2월 통용금지령이 철회되니 책임을 통감하고 사직하였다. 얼마 후 군무국부장(軍務局部長)으로 임명되고 1905년 통신원 총판(通信員總辦)이 되었으나 이해 4월 일본에게 통신원을 넘겨주니 분하고 원통하여 관원들과 함께 총사직하면서 상소(上疏)를 올려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니 허락되지 않고 도리어 군부 참모국장으로 승진 임명하므로 굳이 사양했다. 고종은 마지못해 허락하면서도 “시골로 가지는 말고 짐의 가까이 있으라”하시므로 서울에 머물다가 1907년 고종 황제가 퇴위(退位)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외부 세계와 인연을 끊고 여생을 보냈다. 당시 벼슬길에 있던 아들 삼형제도 아버지의 뜻을 따라 모두 시골로 내려와 혼탁한 세상에 더불지 아니했으니 참으로 장한 일이었다. 그를 “안찔장 대감??이라 부른다.(학암집)
□ 흰 까치가 울고 간 노봉서원(魯峰書院)
ㅇ 위 치 : 호명면 내신2리
ㅇ 내 용
노봉서원(魯峰書院 - 문화재자료 제59호)은 단종(1400~1420) 복위를 위하여 사육신과 죽음을 같이 한 권산해(權山海)를 모시고자 1794년(정조 18)에 세운 서원으로 노산군(魯山君)으로 봉해진 단종을 숭상한다는 뜻에서 선비들이 지은 듯 하다. 이 서원을 세울 때 흰 까치가 날아와 며칠간 울고 같다고 하는데
이는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권산해가 죽어서도 그를 잊지 못하고 왕위를 복위하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하여 흰 까치가 되어 울고 갔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건물은 1866년(高宗 3)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폐된 것을 1921년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 임천서원의 통문(通文)에 의하여 병산서원(屛山書院), 호계서원(虎溪書院), 역동서원(易東書院)과 도내(道內) 사림의 여러 문중에 의하여 그 해 3월 18일에 다시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몽양재(蒙養齋, 乾揚齋) 현판을 가진 강당(講堂), 숭의사(崇義祠), 존사소(尊事所), 정문(正門), 신도문(神道門) 5동의 아담한 건물로 호명면 내신리 안동 권씨 종중에서 춘추로 향사를 지내고 있다.
권산해(權山海, 1403~1456)는 지보면 대죽 출생으로 본관은 안동이다. 자는 덕보(德甫), 호는 죽림(竹林)이며, 경력 관(寬)의 장자, 단종의 이모부로 증조부 우의정 진(軫)에게 학문을 배웠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고 지조가 매우 굳고 재주가 있는 학자 출신이다. 단종 복위를 위하여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1456년(세조 2) 모의에 가담하였다가 김질(金質)의 배반으로 실패하자 고향에 돌아와 은거 중 성삼문(成三門) 등이 죽자 투신자결(殉節)하였다. 전가족이 유배가고 백년금고(百年禁錮)되었다가 1785년(正祖 9)에 후손 종락(宗洛)이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하여 성공하고, 1789년(正祖 13)에 복관(復官), 이조판서에 추증(追贈), 시호를 충민(忠愍)이라 하였다. 1785년 경주시 강동면 왕신리 운곡서원(雲谷書院-雲谷追圓祠)에 배향(配享)되었고, 유연정(悠然亭)에도 제향되었고, 1794년(正祖 18)에 이곳 노봉서원(魯峰書院)에도 제향되었다. 또한 지보면 신풍리에 정충각(旌忠閣)이 세워지고, 신풍2리 피약골(節義谷-念松山)에 그의 무덤이 있다.(장릉지, 운곡서원 상량문, 안동권씨 좌윤파 족보)
□ 무릉정(武陵亭)
ㅇ 위 치 : 호명면 송곡리
ㅇ 내 용
송곡리(松谷里)에 눌헌(訥軒) 이응(李應, 1536~1957)을 위하여 1905년에 중건한 정자이다.
종도천수의 경치가 중국의 무릉도원과 비슷하여“무릉정”이라 하였으며, 사림학파(士林學派)인 응(應)은 퇴계 이황(李滉)의 제자로서 거듭되는 사화(士禍)에 염증을 느껴 벼슬을 그만두고, 안동 절강상 도수곡(安東 浙江上 桃樹谷-現地名未詳)에 무릉정을 짓고, 그의 맏형인 매촌(梅村) 유(愈), 둘째 형인 율리(栗里) 희(熹)와 함께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약봉(藥峰) 김극일(金克一), 몽재(蒙齋) 이상룡(李詳龍) 월천(月川) 조목(趙穆)등과 어울려 이 정자에서 매일 같이 시를 짓고, 정담(政談)을 나누면서 세상의 돌아감을 개탄하여 탄식하던 중, 1592년(宣祖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맏형인 유와 둘재 형인 희가 종군(從軍) 중, 전사하게 되자, 응(應)은 드디어 그가 이상(理想)으로 하던 도학정치(道學政治)를 펴보지도 못하고, 세상에 뜻을 잃은 채 평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 후 세월이 흘러 사림학파들의 보금자리 격이었던 무릉정이 언제인지 모르게 허물어져 버려서, 지금은 그 유허(遺墟)조차 찾을 길이 없다고 한다.
현재의 이 정자는 그의 후손들의 취락지인 현장소에 응을 기념하기 위하여 1905년에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에 그들이 지었다고 하는 시(詩)글이 액자로 되어 정자안에 걸려 있다. 즉눌헌(訥軒)의 시를 비롯하여 매촌(梅村), 율리(栗里), 약봉(藥峰), 학봉(鶴峰), 몽재(蒙齋), 해월(海月), 운천(雲川), 삼성재(三省齋) 등의 시들이 걸려 있다.
현판 3자는 해사(海士) 김성시(金聲視)가 썼고, 도사(都事) 유도헌(柳道獻)의 중건기(中建記-靑蛇首冬上澣)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