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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3. 10:28. 오타 수정 및 문장 배열 교정
1) 녹봉을 보태어 금정정을 고쳐 세우기 위해 ~를 ~금강정~으로
2) 彰烈巖(창령암)으로 새롭게 새겼다.~를 ~ (창열암)~으로
3) 박기정(朴基正)은~ 문장 중복으로 배열을 정리
4) 1741년 9월 15일 부임한 홍성보는, 민충사(愍忠祠)를 건립한 후~ 를 ~
1741년 9월 15일 부임한 홍성보는, 1742년에 민충사(愍忠祠)를 건립한 후~로 '1742년' 추가
첫 번째 이야기
영월 여행, 나도 모르게 신선이 되다.
왜?!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야만 들어설 수 있는 곳, 寧越이니까!
홍살문(紅箭門 홍전문)은, 조선국의 聖地, 충절의 고장 영월을 뜻한다. * 箭 : 화살 전
선돌(仙 巖)
명승 제76호 2011.06.10. 고생대국가지질공원 명소
6천만년 전부터 ‘서있는 돌(입석)’의 기다림은 신선이 되다.
우뚝 서 있는 것이 마치 신선처럼 보였다 하여 신선바위 ‘선돌’이 되었다.
*암벽에는 순조 20년(1820년)에
영월도호부사 홍이간(洪履簡 1753~1827),
아들 홍직필(洪直弼. 1776~1852),
아들의 벗 오희상(吳熙常 1763~1833),
세 사람이 새겨 둔 詩題‘雲壯壁’글자가 있으니
누구이든 시 한 수 읊는 다면, 참 좋은 추억이 된다.
요선암. 요선정 (邀仙岩. 邀僊亭)
仙 신선 선. 신선스럽다. 僊 신선 선. 춤추는 모양.
*신선을 맞이하는 바위 요선암,
*신선과 함께 만남의 기쁨을 즐기는 정자 요선정,
*바위에 계시는 신선이 신선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으니, 영월을 찾아오시는 분이 곧 신선이다.
물과 바람 그리고
세월이 그려 낸 주천강 물 그림
‘요선암 돌개구멍’
영월의 개요
영월 寧越, 세상사를 넘어선 평안한 고장
자연의 역사를 간직한 고생대 국가 지질공원과
조선국 격동의 세월을 겪어낸 사람의 역사가 공존하기에
보고 듣고 만나는 여행길에서 나도 모르게 ‘신선이 되는 영월!’
1 보물(징효대사보인탑비)
3 사적지(장릉, 관아, 정양산성)
4 명승(한반도지형, 청령포, 어라연, 선돌)
5 천연기념물(은행나무, 관음송, 고씨굴, 문곡 스트로마톨라이트, 요선암돌개구멍)
12 강원도유형문화재
(관풍헌, 자규루, 창절사 ,영모전, 징효국사부도, 법흥사부도, 법흥사석분, 마야여래좌상,
향교, 정조대왕태실비, 서곡정사석조여래입상 ,만봉불화박물관 시왕도초본과 사자도초본)
1 강원도무형문화재(단종제례)
5 시도기념물(창령사지, 흥녕선원지, 용담굴, 연하굴, 대야굴)
7 문화재자료(보덕사, 금강정, 금몽암, 민충사, 요선정, 북쌍리 고택, 창원리 고택)
과거 : ●조선국 역사의 현장(청령포, 객사, 장릉)
●영월 문학의 시조 -난고 김병연 선생, 영담 김어수 선생
근대 : ● 석탄산업 –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전환, 광부의 경험은 독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실천.
광부의 공덕에 국가에서는 산업전사로서 공경
● 영월의 독립만세운동 – 1919년 4월21일 주천면 금마리 주민.
현대 : ● 박물관고을 특별구역지정 - 21개 박물관
● 사진마을 특별구역지정 –사진의 메카
● 문학의 고장 영월 – 문학의 맥을 이어가는 4개 문학회 150여명
● 기록 속에 묻혀있던 역사`문화 –현대인과 공유하는 영월
● 배움과 깨달음의 길을 걷는, 성지 순례의 고장
● 550년 만의 단종대왕 국장, 영월인의 힘으로 장례를 거행, 고난과 아픔을 한꺼번에 훌 훌 털어내는 계기.
두 번째 이야기
산은 산에 있으니 찾아가는 것처럼 내 몸의 향기로움을 찾아내다
영월 관광 택시와 함께 하면!
산
있으니
찾아오지
더부살이 하얀 구름
바람 불면 온갖 형상
그리는 게 아니던가?
그냥 그 자리
있는 거라네
- 心 鄕
【서문】
사람의 역사인 날짜와 날짜에는 ‘조선국 영월’을 지켜준 인물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공덕이 있었기에 미래의 ‘살기 좋은 영월’의 꿈을 꾸게 됩니다.
엉뚱하지만, 생각에 생각을 더하면
발길 이어지는 영월로의 여행에 더 좋은 생각이 떠오를 수 있으니 생각을 나열합니다.
손님과의 첫 만남에서 우리는 이렇게 인사를 나누게 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삼척 김씨에 이름은 원식, 김원식입니다. 반갑습니다.”
하면,
손님은
“아~ 저는 함안 조씨에 이름은 명, 조 명 입니다.”라는 답을 듣게 됩니다.
이때에 언뜻 생각나는 인물이 있습니다.
“함안 조씨라면 바로 생육신 어계 조려 선생님의 후손 분이시군요. 더욱 반갑습니다.
조려 선생님께서는 영월 역사와 함께,
영월 엄씨 문중에 크나큰 은덕을 베풀어주신 분인데
그 후손 분을 뵙게 되었으니 영월인으로서 고마운 인사말씀을 올립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손님과의 첫 만남이 이렇게 진행된다면,
여러분이 ‘영택시’ 손님이었다면,
느낌과 감동은 어떠할까요?!
내 몸에 베어있는 은은한 향기, 기질, 품성을 찾아서, 영 택시와 함께 시작합니다.
관란 원호(原州 元公 豪),
어계 조려(咸安 趙公 旅),
도촌 이수형(羽溪 李公 秀亨).
세분은
1457년 6월, 노산 상왕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니
‘관란정과 토실’, 치악산 시작점인 ‘요선암과 요선정’ 봉우리에 올라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
상왕에 대한 충심을 ‘삼공제명암(三公題名巖)에 이름을 새기면서까지 다짐하며 충절을 지켰던 분이다.
우계 이씨(羽溪 李氏)의 본관은 현재의 강릉시 옥계면이다. 고려국 시대에 경주 이씨(慶州 李氏)에서 분적(分籍)하였다.
觀瀾 元昊 (관란 원호) 선생의 유허지 관란정(觀瀾亭) 충북 지방기념물 92호
貞節公漁溪趙旅先生事蹟碑(정절공 어계 조려 선생 사적비)
선생의 사적비가 있는 ‘어계비원’은 청령포와 장릉의 중심에 있는데, 丁丑十月(정축 10월)에
赴哭(부곡)하신 事實(사실)에 關(관)하여 생긴 虎背渡江(호배도강)의 說話(설화)에 의해 ‘호랑이 등’에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조려 선생의 가장 큰 업적은, 단종의 영월유배와 영월에서의 승하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셨다.
“영월군 서강 청령포에 도착하신 날짜는 6월 28일이다. 승하일자는 10월24일이며,
임금의 옥체를 수습하여 장릉에 모신 이는 영월호장 엄흥도이다.”를 명기하셨기에
호장 엄흥도는 조선국 충신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漁溪 趙旅先生(어계 조려 선생) 魯陵事實 노릉사실
世祖大王 三年 丁丑正月。세조대왕 3년 정축정월。세조대왕 3년 정축년 정월에
上王出居錦城大君瑜家。상왕출거금성대군유가。상왕(단종이 양위한 뒤의 위호)이 금성대군 유(瑜)의 집에 나가 있었다.
大月二十八日。대월이십팔일。동년 6월28일에
降封上王爲魯山君。강봉상왕위노산군。상왕을 강등시켜 노산군을 삼아
安置于寧越郡西江淸泠浦。안치우영월군서강청령포。영월군 서강 청령포에 안치하였다가
尋移寓於客舍東軒。심이우어객사동헌。이어 객사의 동헌으로 옮겼다.
安置錦城大君于順興府。안치금성대군우순흥부。이때 금성대군을 순흥부에 안치하였더니
錦城大君與順興府使李甫欽。금성대군여순흥부사이보흠。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더불어
謀復魯山君。모복노산군。노산군의 복위를 모의하고
每相對。매상대。매양 서로 만나
慷慨流涕。강개류체。비분강개하며 눈물을 흘리고
潛結南中士人。잠결남중사인。남몰래 영남 선비들과 결탁하였다.
一日。일일。어느 날
錦城召甫欽。금성소보흠。금성대군이 이보흠을 불러
辟左右使草檄。벽좌우사초격。좌우를 물리치고
將發順興兵及南中與議者。장발순흥병급남중여의자。순흥부의 관병과 영남에서 찬동 호응하는 군중을 규합 동원시켜
迎魯山君以踰嶺。영노산군이유령。노산군을 맞아 올려는 격문을 초하였다.
官奴爲吸唱者。관노위흡창자。이때 관노로 흡창이 된 자가
潛匿壁中而聽之。잠닉벽중이청지。벽장 속에 숨어서 그것을 엿듣고
仍交錦城宮侍女。잉교금성궁시녀。금성대군의 시녀를 꾀어
竊其檄文。절기격문。그 격문을 훔쳐
奔走上京。분주상경。서울로 달려갔다.
時基川今豐基縣監者聞其事。시기천금풍기현감자문기사。이때 기천(풍기)현감이 이 사실을 듣고
替騎三四馬疾逐之。체기삼사마질축지。급히 말을 타고 따라가
奪其檄。탈기격。그 격문을 빼앗아 가지고
先入京上變。선입경상변。먼저 서울로 올라가 조정에 고변하여
遂得大功。수득대공。기천현감은 큰 공훈을 얻었고
錦城,甫欽皆被死。금성,보흠개피사。금성대군과 이보흠이 피살되었으며
南中士人。남중사인。영남선비들도
死者亦多。사자역다。죽음을 당한 사람이 많았다.
漢南君瓔,永豐君瑔,寧陽尉鄭悰等。한남군 영, 영풍군 전, 영양위 정종 등도
皆坐瑜黨。개좌유당。모두 금성대군에 연루되어
安置禁錮。안치금고。안치 또는 금고에 처하여졌다.
十月。십월。그해 10월에
命賜魯山君死。명사노산군사。노산군에게 죽음을 명하여
禁府都事。금부도사。금부도사가
奉藥到寧越。봉약도영월。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내려갔으나
踧踖不敢入。축적불감입。주저하면서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다.
拿將以時刻之遲誤。나장이시각지지오。이 광경을 본 나장이 시각의 지연됨을
立而頓足。립이돈족。발을 구르며 말하니
都事不得已入伏庭中。도사불득이입복정중。금부도사가 하는 수 없이 뜰 앞에 들어가 부복하였다.
魯山君俱翼蟬冠,龍衮袍。노산군구익선관,용곤포。이에 노산군이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고
出御堂中問所以。출어당중문소이。마루 복판에 나와 앉아 찾아온 까닭을 물으니
都事無以答。도사무이답。금부도사가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有一貢生常侍魯山君者。유일공생상시노산군자。노산군을 시종하는 한 종(從人)이 곁에 있다가
請自當之。청자당지。자청하여 달려들어
以一條弓弦。이일조궁현。한 가닥의 활줄로
繫頸而絶。계경이절。목을 졸라 절명케 하였으니
時年十七歲。시년십칠세。이때 나이 열일곱 살이었으며
是月二十四日酉時也。시월이십사일유시야。때는 10월24일 유시였다.
貢生。九竅流血斃。공생。구규류혈폐。노산군을 죽인 종(從.공생)은 아홉 구멍으로 피를 토하고 죽었으며
侍女從人。시녀종인。시녀와 종인들은
多投江。다투강。강물에 몸을 던져
浮屍滿江。부시만강。시체가 강물에 가득하고
雷雨大作。뢰우대작。뇌성과 폭우가 쏟아지며
烈風㧞木。렬풍발목。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으니
黑霧彌空。흑무미공。검은 안개가 하늘에 가득하였다.
鎭撫來莅。진무래리。진무가 와서
暴魯山君戶於外。폭노산군호어외。노산군의 시체를 읍(邑) 밖에 내다 버렸다.
邑宰從人。읍재종인。고을을 다스리는 자와 종인들은
莫敢收歛。막감수감。감히 시체를 수렴하지 못하였으나
郡首吏嚴興道。군수리엄흥도。고을의 우두머리 아전인 엄흥도가
往來獄街哭泣。왕래옥가곡읍。거리를 다니면서 소리 내어 슬피 울며 곡을 하다가
修棺營葬。수관영장。관을 갖추어 장사를 하려고 하니
興道族黨。흥도족당。엄흥도의 친족들이
懼有禍爭止之。구유화쟁지지。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만류하였다.
興道曰。흥도왈。이에 엄흥도가 말하기를
爲善被禍。吾所甘心。위선피화。오소감심。“착한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하는 것은, 내가 마음에 즐겨하는 바이다” 하고는
卽葬于郡北五里許冬乙旨向東之原。즉장우군북오리허동을지향동지원。즉시 영월군 북쪽 5리 동을지 동향에 장사하였다.
[參例服喪之人。참례복상지인。이때 예에 따라 상복을 입은 사람도
亦或有焉。역혹유언。간혹 있었다.
【참고•인용문헌】 『漁溪先生集卷之三 附錄 어계선생집 3권 부록』 263~269쪽
『漁溪集 어계집』은 조선 초기의 학자 조려(趙旅 ; 1420~1489)의 시문집이다.
조려의 자는 주옹(主翁), 호는 어계(漁溪), 본관은 함안(咸安), 시호는 貞節(정절)이다.
장릉침령(莊陵 寢令) 조성악(咸安趙公 性岳) 어계(漁溪)선생 정절공(貞節公)의 후손
고종 30년(1893년) 동짓달에 배견정개건기(拜鵑亭改建記)를 찬술하고 판각하여 배견정에 걸었는데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있다.
배견정은 정조17년(1793) 음력 3월에 영월도호부사 박기정(朴基正)이 신축하였는데 100년이 지난 후인 1893년에 무너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개건하게 되었는데 재목은 풍락목(風落木)으로 하고 기와는 새로 준비하여
1893년 10월 16일에 시작하여 11월 23일에 공사를 마쳤다.
왕릉에 정자가 있는 곳은 영월 장릉 뿐이다.
桃村 李秀亨(도촌 이수형) 유적지
공북헌(拱北軒)
경상도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 사제동에 있는데 평생을 북쪽을 바라보면서 살던 옛집이다.(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37호
영월에는 선생의 업적을 기억하게 하는 조형물이 없다.
단지, 무릉도원면 요선정 건너편 암벽에 새겨져 있는 ‘삼공제명록’에 이름만 있다.
조선국 충신 영월군 호장 엄흥도(寧越嚴公 興道)
1457년 10월 24일, 승하하신 임금의 옥체를 모셔주었기에 조선국의 역사는 이어질 수 있었다.
*生 1404년(태종 4)~ 歿 1474년(성종 5) 2월 26일(70세). 정축년 당시 53세.
2018년도 단종문화제 학술논문<엄흥도의 행적과 후대의 追崇 / 朴道植(강릉원주대학교 사학과)>
엄흥도 정려문.정려비(旌閭門`碑)
1726년 영조 2년, 호장 엄흥도의 충절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임금이 내린 어명(깃발 旌)으로 마을 어귀(閭)에 세움
*이문(里 門) 閭 : 25호를 리(里)라 하고, 반드시 문을 세워 閭(려) 라 부름.
팔괴리에 있는 엄흥도묘
영월 엄씨 문중에서는 2003년 11월 묘를 새롭게 단장하여 성역화 하였다.
밀양 박공 충원 (密陽朴公 忠元)
駱村 朴忠元 記蹟碑(낙촌 박충원 기적비)
조선왕릉 40기 중에서 영월 장릉에만 충신 268위의 충정을 기리는 위패가 모셔져 있고,
호장 엄흥도의 정려문과 박충원의 기적비도 세워져 있다.
역대 임금과 왕비의 능에는 없는 신하의 위패와 공덕비가 있다는 것은 당자는 물론 가문의 영광이다.
그 중에서 1541년에서부터 1546년 정월까지 영월군수를 역임했던 박충원의 기적비는
장릉의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능침으로 향하는 길목 오른쪽에 있어 먼저 만나게 된다.
장릉, 왕릉에 신하의 기적비가 자리잡게 된 내력
1541년도에 영월군수이던 낙촌 박충원이 노산묘를 찾은 일에 대한 사연을 기록한 기적비와 비각으로,
박충원의 충심을 후세에 널리 알리기 위하여 세운 기적비(사실을 기록한 비석)이다.
1974년 5월 5일 그의 후손들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1973년 성균관장 ‘昌山成樂緖(창산 성낙서) 선생이 찬술한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전설의 고향 같은 옛날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군수로 부임하여 임금의 혼령을 만났지만 당황하지 않고 예를 다하였기에
그 공덕은 500여년이 지나도록 계속 전하여지고 있다.
사연은 이러하다.
세 명의 수령이 알 수 없는 연유로 연이어서 사망에 이르자
모두가 사양하는 자리를 자청하여 부임하게 되었는데 <寧越府邑誌(영월부읍지)>선생안의 내력은 이러하다.
▷ 박세호(朴世豪) 경자년(庚子年, 1540년, 중종 35) 정월 27일에 부임하여, 신축년(辛丑年, 1541)정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다.
▷ 권수중(權守中) 신축년(辛丑年, 1541년, 중종 36) 5월 초 4일에 부임, 같은 달 초 8일에 세상을 떠났다.
▷ 연현령(延玄㱓) 신축년(辛丑年, 1541년, 중종 36) 6월 24일에 부임하였으나, 7월 15일에 세상을 떠났다.
▷ 김희성 (부임하지 않았다)
▷ 박충원(朴忠元) 신축년(辛丑年, 1541년, 중종 36) 9월 초 7일에 부임, 약 5년간 재임.
명종 01년 병오년(丙午年 1546년) 정월18일에 후임 민종건(閔宗騫) 군수가 부임 할 때까지 재임하였다.
종사관(從事官)으로 차출되어 갔다. 문관이다.
강원감사 정철(延日鄭公 澈),
영월군수 김륵(禮安金公 玏),
강원감사 정곤수(淸州鄭公 崑壽)
1581년 1월 6일에 노산군 묘 수개와 석물 세울 것을 청 하였기에 선조의 명이 내려졌지만 실행되지 못하다가
1584년 8월 2일 영월군수로 부임한 김륵(禮安金公 玏)이 강원감사 정곤수(淸州鄭公 崑壽)에게 청하여
1585년에 제청(祭廳) 3간, 재실, 부엌간을 묘 옆에 짓게 되었다.\
강원감사 홍만종(豊山洪公 萬鍾),
도사 유세명(豊山柳公 世鳴),
영월군수 조이한(楊州趙公 爾翰)
1685년 3월 강원감사 홍만종(豊山洪公 萬鍾)은,
도사 유세명(豊山柳公 世鳴), 영월군수 조이한(楊州趙公 爾翰)과 영월선비 5명이 뜻을 모아
쓰러져가는 노산군묘우(魯山君墓宇)보수와
육신사(六臣祠)를 건립하여 엄흥도 신위도 사육신과 함께 모셔서 제례를 올렸다.
봉조하(奉朝賀) 송시열(恩津宋公 時烈)
영월 선비 엄민도(嚴敏道)
송시열은 1685년(숙종 11) 7월 하순에 한양으로 찾아온 영월 선비 엄민도(嚴敏道)의 청으로
‘영월군육신사기(寧越郡六臣祠記)’를 지어 주었다. 엄민도 선생의 정려문은 방절리에 있다.
송시열은 1684년(숙종 10)에 찬술한 영월군 금강정 기 (寧越郡錦江亭記)도 있다.
강원도 관찰사 어진익(咸從魚公 震翼)
영월군수 이 무(全州李公 堥)
이진익은 1683년~1684년 강원도 관찰사.
이무는 1684년 (숙종 10)에 영월군수.
녹봉을 보태어 금강정을 고쳐 세우기 위해 관찰사 어진익에게 도움을 요청하니 기뻐하며 힘을 보태었다.
전 현감 신규(平山申公 奎)
1698년 9월 30일 전 현감 신규(申 奎)는, 노산대군을 임금으로 복위시켜달라는 상소문을 올렸기에
숙종은 노산대군을 조선국 제6대 임금 단종대왕으로 복위 시킬 수 있었다.
*어느 누구도 감히 말하지 못했던 단종복위에 대하여 가문의 멸문지화를 각오하고 상소문을 올렸는데
그 바탕에는 평산 신씨 문중의 뿌리인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 장군의 기품을 이어받은 후손이었기에 말 할 수 있었다.
대제학 서종태(大丘徐公 宗泰)
1699년 2월에 신축된 장릉 정자각에 대하여 숙종의 명을 받아 ‘장릉정자각상량문(莊陵丁字閣上梁文)을 찬술하였다.
영월군수에서 영월도호부사로 직급이 높아진 날짜와 이유
숙종실록 33권, 숙종 25년(1699년) 2월 10일
영월을 부사로 승격하고 김시습에게 증직과 사제를 행하도록 명하다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이 아뢰기를,
"장릉(莊陵)의 헌관(獻官)은 의당 영월 군수(寧越郡守)로 차정(差定)하여야 하니,
영월을 부사(府使)로 승격시켜 사체(事體)를 높이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영월군수 윤순거(尹舜擧)
경자년(庚子年, 1660년 현종 1) 12월 28일에 부임하여, 강희(康熙, 청나라 성조(聖祖)의 연호) 을사년(乙巳年, 1665년 현종 6) 7월에 장령(掌令) 벼슬에 임명되었다
5년간 군수재임하시면서 금몽암의 옛이름 ‘노릉지덕암’을 1664년(현종 5)에 중수한 후 〈노릉지덕암중건기 魯陵旨德庵重建記〉 기문을 찬술하였는데
금몽암 추녀 밑에 판각으로 걸려 있다.
큰 업적은 단종실록과 장릉지의 원본이자 기초자료가 되는 ‘노릉지’를 편찬하였다.
영월관아 서고에 찌들고 흐트러진 종이쪼가리 들이 있어 살펴보았더니 노산 상왕 관련 기록들이어서
이를 정리하여 옮겨 쓰고, 한편으로는 상왕에 대하여 부정적인 글과 긍정적인 글들을 모아서 ‘노릉지'에 함께 편찬함으로서 책을 읽는 자가 스스로 판단하게 한것이 큰 특징이다.
영월도호부사 윤양래(坡平尹公 陽來)
1725년 7월 24일 영월도호부사로 부임한 윤양래는, 홀대했던 청냉포(淸冷浦)를
1726년 10월에 자신의 녹봉으로 청령포(淸泠浦)라는 이름으로 금표를 세웠기에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지켜졌다.
1457년 6월 21일 부터 ~1698년 11월 6일까지는 노산군 유배지 영월 청냉포
1698년 11월 단종복위 이후부터는 단종유지 청령포(실질적으로는 윤양래가 금표를 세우면서 이름을 바꿨다.
1733년 6월 19일 윤양래는 장릉에 능비를 세워줄 것을 영조 임금에게 주청드렸기에
한양에서 다듬고 새긴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 비’는
한강`남한강`동강까지 수로를 따라 역으로 운반하여 장릉에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영월도호부사 홍성보(豊山洪公 聖輔)
1741년 9월 15일 부임한 홍성보는, 1742년에 민충사(愍忠祠)를 건립한 후 제례가 단절되지 않기 위해
사흘 갈이 밭(三日耕.삼일경. 소가 3일 동안 밭갈이 면적. 약 6천 평)을 마련,
영월부 호장에게 세금을 해마다 거둬들여 매년 한식 제향을 올리게 하였고, 암벽에 낙화암(落花巖)을 새겼다.
영월도호부사 조하망(昌寧曺公 夏望)
1746년 윤 3월 9일에 부임한 조하망은 민충사 상용축문(常用祝文)을 지었으며, 낙화암 암각자 아래(약 10여m)
彰烈巖(창열암)으로 새롭게 새겼다.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漆原尹公 師國)
영월도호부사 이동욱(平昌李公 東郁)
판중추부사 이복원(延安李公 福源)
좌의정 채제공(平康蔡公 濟恭)
이조판서 홍양호(豊山洪公 良浩)
1791년 2월 6일 강원도 관찰사 윤사국은,
영월부사 이동욱과 함께 자규루 옛 터를 찾아내어 중건한 사실을 정조 임금에게 보고하니,
판중추부사 이복원은 ‘중건자규루기(重建子䂓樓記)’ 기문을,
좌의정 채제공과 이조판서 홍양호는 ‘자규루상량문(子䂓樓上樑文)’을 어명에 의하여 찬술 되었다.
3점의 기문과 상량문은 판각으로 자규루에 걸려있다.
박기정(朴基正)은~
승정원 좌부승지 서영보(達城徐公 榮輔)
영월도호부사 박기정(順天朴公 基正)
1791년 10월에 승지 서영보는 정조의 어명을 받아‘영천립석기(靈泉立石記)’ 기문을 찬술하였고,
영월부사 박기정은 기문을 받아 비석에 옮겨 쓰고 세웠으니 오늘의 영천 비(靈泉碑)가 존재할 수 있었다.
박기정(朴基正)은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으로 영월에 많은 유적이 있다. 장릉 배견정 신축, 배견암 암각자, 자규루에 장식물 설치, 청령포 단묘유지비 비각신축, 단종 관련 유적 건물 보수공사, 여러인물들이 찬술한 기록 등을 관찰사 윤사국과 함께 판각작업을 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창절서원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
난고(蘭皐)김병연(安東金公 炳淵) 선생
정암(靜岩) 박영국(潘南朴公 泳國)선생
1807년 3월 13일 태어나 1863년 3월 29일 타계한 난고김병연(일명 김삿갓) 선생은 민중의 고난과 아픔을 대변하는 글을 남겼기에 노루목 양백지간에서 공경 받고 있다.
정암(靜岩) 박영국(潘南朴公 泳國 1917.9.13~1994.4.2)선생은
난고 선생이 영월을 찾아오게 된 내력, 생가 터, 해학과 풍자로 가득한 유시(遺詩), 묘 등을 찾아내었다.
때문에 ‘돌아간 김삿갓’은 200백여 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돌아온 김삿갓’으로 ‘시와 별 문학의 고장 영월’이다.
2016. 06. 08 환경부 인증
강원고생대 국가지질공원 (영월군, 정선군, 태백시, 평창군)
영월 8대 명소
요선암돌개구멍, 스트로마톨라이트, 어라연, 한반도지형, 선돌, 물무리골생태습지,청령포, 고씨굴
【마무리】
성심을 다하는 인물이 계셨기에 온전하게 이어진 영월의 역사이었습니다.
정조 임금은 “군신일체(君臣一體)이니라” 하시면서
장릉 장판옥에 충신 268위를 모시면서 ‘男左女右’로 신위를 배치하게 하셨습니다.
여우(女右)는 여성은 혼인을 하면 어미(母)가 되니
소생의 근원이기에 이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이므로 그 무엇보다 우선하여 공경하는 자리가 우측이었기 때문이다.
난고 김병연 선생은 세상 밖으로 나가서 조선8도 전국을 두루 다니면서도
떳떳하게 큰소리 치면서 살 수 있었던 근본은 어머님의 가르침이었던 지식이었고,
준비된 지식이 있었으니 지혜를 발휘하여 당당하게 세상살이를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조상의 제례, 성황당, 장릉, 관음송, 은행나무 등에서는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하고 때로는 큰 절을 하면서 만수무강 재물홍수 등, 큰 복을 달라고 기원하게 된다.
하지만,
예를 올리는 진정한 뜻은
“선대 어른이 겪어냈던 고난과 아픔 그리고 기쁨과 슬픔, 그 모든 것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겠습니다”
를 다짐하는 기억의 날이다.
영월에는 수 많은 역사적 유적과 유물과 문화와 전례전통이 있다.
하나 같이 하고 싶은 말, 존재의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부디 바라건데 나를 잊지는 말아주오!”
연
참 곱구려
그리 되자 하니
얼마나 애를 썻겠소.
고맙소
나를 닮으라 하니
내 그리 하리다.
- 心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