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기억(추억)을 찾아서...
아침밥을 먹고나니 문득 그곳이 생각났다. 천성산 내원사, 일어버린 기억(추억)이 있는 곳이다. 이때껏 지난간 추억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군대생활 배속부대, 신혼시절 달셋방 그집, 어머니와 누님의 관련 추억, 그리고 잊혀지지 않는 곳을 찾아 다녔다.
그런데 항상 나의 마음속에 못다한 숙제처럼 남아있던곳, 그게 내원사의 오랜 기억이었다.
내원사는 내가 첫입사 직장시절 직장동료와 지역 사람들이 갔었던 첫여행지였다.
자가용이 없던시절, 음식을 준비하고 버스를 전세내어 설레는 마음으로 그곳에 도착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문제가 생겼다. 좁은 사찰주차장 우리차가 후진 주차하다 승용차를 밀어 난간에 걸리게 만들었다.
뿐만아니라 비포장 산길을 오다보니 차의 타이어가 펑크 나버렸다. 액운이 겹친 것이다.
당시는 렉카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승용차는 여럿 달려들어 원상태 유지시키고, 타이어 구매가 문제였다.
특공대 두명을 선발 아랫마을에서 택시를 불러 면소재지 타이어방에서 타이어를 구입했고, 택시로 아랫마을까지 왔으나 산길은 못가겠다니...하는 수없이 그걸 두사람이 교대로 굴러 4km 넘는 사찰주차장까지 왔었더라.
오늘 그길을 직접 걸어보니 그분들의 사명감을 가히 알만했다. 지금은 먼곳을 떠났거나 역사의 뒤안길에 머물러 계실 것이다.
그런 사고로 그날은 어떻게 지냈는지 기억이 나지않아 더욱 내 머릿속에 미완결 상태로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시절에 남자들이 남의 눈 의식하며 보았던 '선데이 서울'이란 잡지가 있었다. 그걸 구입하는 일은 없었지만 보는데는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날 눈에 들어온 특종, 가명으러 눈에다 검은 띠를 둘렀지만 분명 동네 친구 누나가 틀림이 없었다.
나와 누나는 나이차가 대여섯살 났으니 개인 성향은 잘모른다. 그집에는 아버지가 교회를 다니시다가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동네 뒷산에다 절을 지으셨다. 어린 우리들 생각에도 저건 아니다 싶었다.
아무튼 그 어머니도 돌아가시자 형제들은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잊고 살았었다.
잡지의 사연인즉, 그 누나가 내원사에 있었는데, 어느 등산꾼의 지속적 구애에 그만 눈이 맞아버린것...
탈신분하고, 그 처지에 갈데가 어디 있었겠나? 꾀임에 빠져 부산의 유명동네 업소의 종업원이 되었다가 이건 아니다싶어 털고 나오면서 기사화 되었더라.
내가 다른곳에 살때 예술제 행사에 동생인 그 친구가 장사꾼이 되어 왔었다. 오랫만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음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이곳이 또한 나의 마음에 궁금증으로 남아있었는지 모르겠다.
참! 내원사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또있다. 서울 부산간 고속전철 공사때 도룡농의 생태계가 파손된다며 단식을 하고 막아섰던 비구니 스님이 있다.
오늘 그곳을 간김에 어떻게 그러한 용기가 있었는지 묻고 싶었으나 요즘 스님들은 절간에 가도 얼굴 대하기가 힘들었다.
솔직히 이곳에선 열차가 어디를 오가는지 기적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렇다면 불교의 교리, '모든 사물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 의존관계 벗어날 수 없어
생성과 소멸은 항상 관계성을 지닌다(연기법?)' 라는 사실에 기인한 것일까?(나도 자연을 좋아하니 비난이 아님)
기온 30도, 약간의 무더위속 찾아간 내원사는 평화로웠다. 매표소 직원에게 40여년만에 왔다고 하니 친절하게 잘 다녀 가시란다.
숲 울창한 계곡물은 줄었고, 오솔길은 중간중간 자동차 아베크족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경내에 들어섰으나 의식은 취하지 않았다.
사찰의 분위기는 그때의 추억에 맞는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곳엔 흰구름 흘러가고, 우리네 인생은 연륜과 시류에 떠밀려 자리 바꿈을 한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