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글은 <삼국사기> 기록이다. 갈색 글은 다른 글의 원문 기록이다. 파란색 글은 저자의 해석이다.
12. 진사왕과 아신왕
진사왕(재위384~391)
진사왕(辰斯王, 346~395)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이요 침류의 동생이다. 사람됨이 굳세고 용감하고 총명하고 어질었으며 지략이 많았다. 침류왕이 죽자 태자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 진사가 왕위에 올랐다. 2년(386) 봄에 나라 안 사람으로 나이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국경을 방비하는 관문關防을 설치하였는데 청목령(靑木嶺)에서부터 북쪽으로는 팔곤성(八坤城)에 닿았고,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렀다.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8월에 고구려가 쳐들어 왔다.
3년(387) 봄 정월에 진가모(眞嘉謨)를 달솔(達率)로 삼고 두지(豆知)를 은솔(恩率)로 삼았다. 가을 9월에 말갈(靺鞨)과 관미령(關彌嶺)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5년(389) 가을 9월에 왕이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침입하여 약탈하였다. 6년(390) 가을 7월에 살별이 북하(北河)에 나타났다. 왕이 진가모(眞嘉謨)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구원(狗原)에서 사냥하다가 7일만에 돌아왔다. 8년(392) 여름 5월 초하루 정묘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에 고구려 왕 담덕(談德)광개토왕이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북쪽 변경을 침공해 와서 석현성(石峴城)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군사를 부리는 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하니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들이 다수 함락되었다. 고구려 광개토왕이 391년 가을 7월에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10성을 함락시켰다. 9월에 북쪽으로 거란을 정벌하고 남녀 500명을 사로잡았으며, 또 거란에 잡혀갔던 본국 백성 1만 명을 불러 타일러 데리고 돌아왔다. 겨울 10월에 백제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깎은 듯 가파르고 바닷물에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왕은 군사를 일곱 방향으로 나누어 공격한 지 20일만에야 함락시켰다. 관미성 공취는 석현성 공략 3개월 후에 이루어진다. [일본서기]에서는 진사왕이 살해되었지만 실제는 일본에 압송되었다.[일본서기] 是歲, 百濟辰斯王立之,失禮於貴國天皇(근구수왕). 故遣紀角宿?.羽田矢代宿彌.石川宿彌.木?宿彌,?讓其無禮狀. 由是,百濟國殺辰斯王以謝之. 紀角宿彌等便立阿花?王而歸 [고사기]에서 백제 진사왕은 오호야마모리大山守命(346~395)로 나온다.
진사대왕의 후예가 [신찬성씨록]에 남아있다. 진사대왕의 시호는 진사陳謝, 즉 사죄의 의미를 담고 있다.
아신왕(재위391~414)
백제 아신대왕阿莘大王(372~424)은 근구수대왕인 응신천황과 오키나가마와카나카즈히메息長眞若中比賣(340~406)의 아들이며, 두 번이나 백제왕위에서 물러났기에 와카누케후타마왕若沼毛二股王이라고 일본에서 호칭했고 그의 황릉은 나라현奈良縣의 가즈라기성葛城 야시기야마屋敷山공원에 있는 전장 135m의 전방후원고분이다.
현지에서는 갈성씨 고분으로 알려졌지만 아신대왕릉이다. 아신왕(阿莘王372~424)<혹은 아방(阿芳)이라고도 하였다.>은 침류왕의 맏아들이다. 처음 한성(漢城)의 별궁(別宮)에서 태어났을 때 신비로운 광채가 밤에 비치었다. 장성함에 뜻과 기개가 빼어났으며, 매 사냥과 말타기를 좋아했다. 왕이 죽었을 때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 진사가 왕위를 이었는데 8년에 죽자 즉위하였다. 2년(393) 봄 정월에 동명묘(東明廟)에 배알하였다. 또 남쪽 제단南壇에서 천지에 제사지냈다. 3년(394) 봄 2월에 맏아들 전지(~支)를 태자로 삼고, 크게 사면하였다. 서제(庶弟) 홍(洪)을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4년(395) 봄 2월에 살별이 서북쪽에 나타났다가 20일만에 없어졌다. 이는 [아리모려 묘지]에서도 보인다. 겨울 11월에 왕은 패수의 싸움을 보복하려고 친히 군사 7천 명을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 청목령(靑木嶺; 평안북도 희천군) 밑에서 머물렀다. 이 직후에 광개토왕이 쳐내려왔다. 이는 광태토왕비문의 396년 전쟁이다. 영락6년 396년에, 태왕은 친히 백제를 토벌하여 먼저 1)일팔성 2)구모로성 3)약모로성 4)간궁리성 5)○○성 6)각미성 7)모로성 8)미사성 9)고사조성 10)아단성 11)고리성 12)○리성 13)잡미성 14)오리성 15)구모성 16)고수야라성 17수○ 18)○○ 19)○○ 20)분이야라성 21)○성 22)○○ 23)○○ 24)○○ 25)두노성 26)비○, 27)○리성 28)미추성 29)야리성 30)대산한성 중국 단동시 봉성현 봉황산성의 전설에 봉황성은 영락태왕의 백팔성의 하나라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을 참고하여야 한다. [만주지리풍속지]에서 봉황산성은 “영락대왕의 백팔성의 하나”라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이 정벌한 58성에 단동시 봉성현 봉황산성을 첫번째로 포함시켜야 한다.
이어지는 [광개토왕 비문]에서는 고구려군이 이미 백제왕성(30.대산한성=북한산성)을 함락하였으나, 백제왕은 항복하지 않고 밖으로 나와서 끝까지 싸우려 하였다. 태왕이 진노하여 아리수(현재 대동강)를 건너고, 장수를 (한산성)에 보내어 성을 압박하라고 하니, (단기로 쳐들어가서 항복하고 편히 살라고 하여) 마침내 백제왕이 항복하고 남녀 천명과 세포 천필을 태왕에게 바치고 백제왕은 이제부터 영원히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제왕을 아량으로 용서하여 “앞서는 어리석었지만 차후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새기도록 하였다. 이때 백제의 58성과 7백의 부락을 빼앗고 백제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인을 인질로 삼아 데리고 도읍으로 돌아왔다. 口口口其國城 殘不服氣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橫○○○○(衝直撞以) 便國城
처음부터 친정을 나왔던 태왕이 건너간 아리수는 지금의 대동강으로 고려된다. 대산한성, 즉 북한산성이 함락되고서 고구려군은 대동강 서쪽의 여러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용강의 횡악성과 성천의 홀골산성등은 그대로 백제 영역이었다. 아무튼 광개토왕의 백제 정벌로 요동반도와 대동강 이북이 백제에서 고구려로 지배권이 넘어간 것이다.
이때 아신왕은 한산성에서 광개토왕에게 항복한 것이다. 아신왕은 이후에 고구려와 새로운 국경이 된 한수, 즉 대동강을 맞대고 있는 한성에 도읍할 수 없으므로 새로운 곳으로 옮겨갔다. [일본서기]에서 전지왕의 누이를 신제도원이라고 한다. 신제도원新濟都媛(백제 새 수도의 여인이라는 뜻)은 일본에 가서 천황의 비가 되었다. 따라서 신제도新濟都는 백제의 새도읍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이때 아신왕의 임시 수도는 황해도 토산군 북포리로 고려된다.
토산군도 본래 도산(都山)을 의미이고, 물건너 동쪽의 강원도 철원군 안협현이다. [일본서기]에는 반정천황의 부인이 된 전지왕의 누이를 신제도(新濟都)에서 왔다고 하였는데 바로 그 신제도가 고마성이다.
북포리의 고성터는 강물이 감아 도는데 중간에 강물을 잘라서 참호를 만들었다. 북성과 남성으로 나누어지는데 중간에 대로가 있다. 대로의 동서 길이는 2000m 정도이며 그 안에 평지성이 들어 있는 것이다. 동성왕이 임류각에서 놀면서 성문을 닫아 버리는 일이 있는데 이는 남성을 닫아 버린 것으로 이해된다.
서쪽 기달산(=고애주산)에 북소궁(北蘇宮)이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궁궐 유기가 있다고 하였다.
서북쪽 수안군에 새로운 위례성이 생겨난다. 제2 위례성이다.
서쪽은 부여성(사정성)이 생겨난다.
토산군 우봉현 위치에 우두성이 생겨났다.
남쪽은 태백산성(대곡성)이 생겨나서 호위하였다. 다지성이라고 하였고 일본 반정천황이 태어난 곳이다. 남쪽 태백산성, 충청남도 사비성인 부소산성과 배치가 매우 유사하다.
그외 서쪽의 오곡성이 오관성이라고도 하였는데 자비령 동쪽을 방어하는 매우 중요한 성이었다.
백제 아신왕이 임시로 후퇴한 수도 아신한성은 임진강에 있었고 예성강은 주요 방어선이었다. 6년(397) 여름 5월에 왕이 왜국(倭國)과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琠支)를 볼모로 보냈다. 아신왕 7년(398년)에도 쌍현성을 쌓고, 개로왕 때에 쌍현성을 수리한 적이 있었다.
가을 8월에 왕이 장차 고구려를 치려고 군사를 내서 한산 북쪽의 목책에 이르렀다. [광개토왕비문]에 의하면 399년에 일이다. 영락9년 399년에 백제가 서약을 배반하고 왜적과 사통하였다. 태왕이 수도(동황성)에서 평양에 가서 신라의 사자를 만나니 사자가 태왕께 말씀올리기를 “왜인들이 신라에 가득하여 신라의 영지를 파궤하고 있습니다. 신라는 태왕의 신하이니 태왕의 적절한 조치를 기다립니다.”하였다.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王巡下 平穰 而新羅遣使 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其國忠誠○遣使還告以○○
영락10년 400년에 태왕은 보기병 오만병사를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여도록 하였는데 남거성을 지나 신라도읍에 이르렀다. 왜구가 득실거렸으나 고구려군대는 왜적을 패퇴시켰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求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倭賊退 ○○○○○○○○來背 急追之 任那加羅 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於)新羅城 農城 倭寇○潰城○○○○○○○○○○○○○○○○○○○盡○(=更)隋來安羅人戌兵○○○○○其○○○○○○○言○○○○○○○○○○○ ○○○○○○○○○○辭○○○○○○○○○○○○潰○○○○安羅人戌兵 이때 광개토왕은 왕자 고진을 보내어 대마도를 거점으로 임나일본부까지 만들었다. 왕자 고진은 417년에 시코쿠에서 인덕천황을 죽이고 432년에 오사카로 들어가서 윤공천황으로 등극한다.
고구려 임나일본부 지도
9년(400) 봄 2월에 살별이 규(奎)와 루(婁) 별자리에 나타났다. 여름 6월 초하루 경진에 일식이 있었다. 11년(402) 여름에 크게 가물어 벼의 모가 타서 말랐다. 5월에 사신을 왜국에 보내 큰 구슬을 구하였다. 404년에 [광개토왕 비문]에서는 백제가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왜적은 백제군과 연합하였다. ○○은 수군 병사들을 이끌고 평양에 이르러 선봉군이 고구려 왕당군과 만났다. 태왕의 군사가 격퇴시켜서 왜구는 궤멸하고 무수히 죽었다. 十四年甲辰 而倭 不軌 侵入 帶方界 ○○○,○○, 石城 [爲]連船[百殘]○○率[水軍至]平穰 [倭寇先]鋒相遇 王幢 要截 湯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대방계가 요동반도 서남해안으로 기록되었다.
<광개토왕 비문>에서 396년에 광개토왕이 공취한 백제 58성은 아래와 같이 비정된다. 1번) 일팔성壹八城은 단동시 봉성현 봉황산성鳳凰山城이다. 현재는 일면성一面城이라고도 한다. 성 둘레는 30여리에 이르는 대성이다. 백제 진사왕辰斯王이 쌓은 관방의 최북단인 팔곤성八坤城과 관련하여 그 서쪽의 봉황산성을 역시 관방성의 하나로서 일팔성으로 추정한다. 팔곤성은 팔하천八河川이라고도 부른 요동반도 단동시 애양현(~陽縣) 관수진灌水鎭의 고대보산성高臺堡山城으로 추정된다. 2번) 구모로성臼模盧城은 수암현岫巖縣 동북쪽 황화전黃花甸의 노성구산성老城溝山城이다. 성 둘레는 약 3리이다. 대양수大洋水의 동쪽 가지에 있는데, 동쪽 가지 계곡을 구곡九谷이라 하며 이는 구곡舊谷의 변형이다. 부근의 송수구산성松樹溝山城은 성 둘레가 5리인데 고구려 때 쌓은 것으로 고려된다.
3번) 약모로성若模盧城은 애하 변의 구련성九連城으로 추정한다. 여기까지 3성은 압록강 북쪽에 있고 이후 성들은 압록강 남쪽에 있다. 4번) 간궁리성幹弓利城은 의주시 동남쪽 20리에 있었던 전문령箭門嶺 고성古城으로 추정한다. 간궁리성의 간궁幹弓을 뒤집으면 궁간弓幹이 되는데 평안북도 의주 동쪽 삼림森林에서는 활의 재료가 되는 궁간목弓幹木을 생산하였다. 궁간은 활대를 말하며 전문령의 전箭은 화살을 말하여 서로 유사점이 있다. 이 전문령고성은 의주 동남 20십리에 있던 토성으로서 백제 초기 토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성 둘레는 11600척(4000m)이고, 62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전한다. 전문령고성의 현재 위치는 의주시 송산동松山洞, 대문리大門里 부근이 된다. 송산동은 금강산과 횡금산 사이에 위치하여 있는데 금강산(金剛山,524m)은 조선시대 송산松山이었다. 간궁산, 궁간산弓幹山으로부터 금강산金剛山이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궁간목은 청천강 이북에서 주로 생산된다. 간궁리성은 의주를 통할하던 백제 대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5번) ○○○ 무명성은 모수성牟水城으로 추정하며 의주 서남쪽 백마산성白馬山城이다. 현재는 고구려성으로 분류되는데 백제가 먼저 쌓은 것이다. 백마산성은 토성土城으로서 내성 둘레가 2590m이고, 외성 둘레는 2430m인데 외성은 조선시대에 세웠다. 다음은 두비압령한豆比鴨嶺韓으로서 피현군枇縣郡 용골산성의 위치인데 고구려군은 모수牟水(=三橋川)를 건너지 않고 동쪽으로 갔다. 6번) 각미성閣彌城은 천마군天馬郡 각구봉角拘峰 남쪽 고영삭진古寧朔鎭으로 추정한다. 토성이 있었다.
7번) 모로성牟盧城은 천마군 식송진植松鎭 고성古城으로 추정한다. 문곡산門谷山 아래인데 모로를 문곡으로 바꾼 것이 된다. 8번) 미사성彌沙城은 천마군 서고성西古城터로 추정한다. 서고성은 승암산 아래인데 미사彌沙가 사미로 뒤바뀌었다. 사미沙彌는 20세 이하의 어린 남자 승僧을 의미하므로, 다시 현재의 승암산僧巖山으로 바뀌었다. 9번) 고사조성古舍鳥城은 선천군 동림성東林城으로 추정된다. 석축과 토축이 함께 있으며 그 둘레는 17560척이다. 고선주성古宣州城이었다. 사조가 축약되어 선주宣州로 되었다. 수묘인을 바친 사조성舍?城은 철산군鐵山郡으로 추정한다. 10번) 아단성阿旦城은 선천군宣川郡 대륙산大陸山으로 고려한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아단성은 없고 아차성阿且城만 두 번 나온다. 책계대왕이 고구려를 막기 위해 위례성(평안남도 성천 홀골성)을 수리하고, 사성(동해안 정평군 세류고성) 등과 함께 쌓았고,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끌려가서 죽은 곳이다. 고구려의 기록이 아단성이지만 본래가 백제 아차성의 오기誤記로 추정한다.
11번) 고리성古利城은 곽산군郭山郡 읍성이다. 곽산성, 또는 능한산성凌漢山城이라고도 하였다. 석성으로서 성 둘레는 6913척이다. 곽산군郭山郡은 고려시대 장리현長利縣이었던 기록이 있다.
12번) 무명성○利城은 어리성於利城으로 추정한다. 능한산성이 당어령堂於嶺에 있으므로 그 아래는 어리성으로 추정하였다. 정주군定州郡 서주리西州里에 위치한 성동산성城洞山城으로서 성 둘레는 3만척에 달하는 토석성土石城이다.
13번) 잡미성雜彌城은 정주군 남쪽 제석산帝釋山에 위치한 성 둘레 7000척의 육지고성育地古城이다. 정주군 오산리五山里에 있으며 현재는 익주성益州城이라고 한다. 육지성이 익주성으로 변한 것이다. 이 산성은 고구려 때 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백제 고성도 되는 것이다. 그 다음 동쪽은 운전군雲田郡 봉두산성鳳頭山城, 즉 구모객두성句牟客頭성인데 고구려군은 이를 지나지 않고 북쪽으로 올라갔다.
14번) 오리성奧利城은 구성군 오봉면 조양리 고성지古城池로 추정한다. 태천군을 흐르는 오지천천烏知遷川과 관련하여 해석한다. 구성군 남쪽 30리에 고성지古城池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이 오리성일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 위치는 오봉면 조양리이다. 구성군 기룡리氣龍里에 니성泥城이 있다. 그 부근 지명에 “어미 역驛”과 “엄교嚴橋” 등이 있는데 어머니성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는 수묘인을 바친 오리성의 후신으로 추정한다. 즉 구성군 오봉면의 오리성이 기룡리에 옮겨져 새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어머니의 방언이 오마니이다.
15번) 구모성勾牟城은 운전군 목우산(牧牛山,416m)은 구모산을 뒤집은 이름이다. 또한 수묘인을 공출한 구모객두성句牟客頭城은 운전군 가산리 봉두산성鳳頭山城으로 추정한다. 봉두산성은 석성이며 성 둘레는 9067척이다. 구모객두는 환12국의 하나인 구모액국句牟額國의 후신으로 추정된다. 혹은 구모객두의 기록이 옳고 《단군세기》가 환12국의 이름을 옮겨적으면서 구모액국으로 기록하였을 수도 있다.
16번) 고수야라성古須耶羅城은 대관군大館郡의 읍성 위치에 있던 대삭주성大朔州城으로 추정된다. 성 둘레는 4615척의 석성이었다.
17번) 무명성頁○은 수추성須鄒城으로 추정하며 대관군 수동면水洞面 용성리龍城里 위치로 추정된다. 첫 글자에 분명 혈頁자가 보이는데 이는 고어체에서 수首를 대신한다.
18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귀성군(龜城郡) 북쪽 굴룡산 산성으로 추정한다. 석축으로 성둘레는 1만 50척이었다.
19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귀성(龜城)으로 추정한다. 석축으로 성둘레는 1만 1만2335척이다.
20번) 분이야라성分而耶羅城은 두 강역을 나누는 성으로 추정한다. 태천泰川의 동쪽, 퇴라산고성退羅山古城으로 추정한다. 성 둘레는 6674척이다. 퇴라산은 지령산(地靈山,300m)로 바뀌었다.
21번) 무명성○성은 알 수 없다. 22번) 무명성○○은 박천군博川郡 박릉성博陵城 위치로 추정된다. 23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안주읍 고성은 석성으로서 6050척이었다. 24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25번) 두노성豆奴城은 문덕군 대니면 마두산(馬豆山,536m)의 서쪽 일대로 고려한다.
26번) 비성沸城은 숙천군肅川郡 고읍성으로 추정한다. 성 둘레는 4050척의 토성이다.
27번) 무명성()利城은 비리성比利城으로 추정한다. 숙천군肅川郡의 접무봉(蝶舞峰,340m) 남쪽, 호전성虎田城이다. 숙천읍 동쪽 20리라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호전성은 토성으로서 성 둘레는 9710척이다. 비리는 피리로 읽어서 한자어로 호적胡笛으로 바뀌어 다시 호전성虎田城으로 바뀌었다. 호전성의 산봉우리는 역시 피리봉을 바꾼 호적봉에서 호접봉胡蝶峰이라고 바뀌어서 다시 오늘날의 접무봉蝶舞峰으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현재의 접무봉과 접무봉 기슭 아래 호전성은 둘 다 한자어 호적胡笛, 즉 우리말 피리에서 유래한 것이다. 28번) 미추성彌鄒城은 평원군 영유현 위치의 태조산 남쪽 미두산성米豆山城으로 추정하였다. 미두산성은 토성으로서 둘레는 4380척이다. 둘레가 1820척이 되는 고소토성古小土城이 영유현 자리에 있었는데 온조溫祚 도래 당시의 미추홀이고, 미추산성은 비류의 후예들이 도래하여 지어진 산성일 것으로 추정된다.
29번) 야리성也利城은 자모산성慈母山城으로 추정한다. 평성시 어중리御重里에 있다. 성 둘레는 5Km이며 99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 대성이다. 내성이 북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내성이 백제 성으로 추정된다. 아리, 또는 야리는 다 알을 어원으로 하며 어머니를 의미한다. 미추성이 바라보이는 자모산성은 《삼국사기백제본기》의 부아악負兒岳으로 추정하는데, 부아악의 뜻은 아이를 업은 자애로운 어머니 산이다. 30번) 대산한성大山韓城은 백제 국성이었던 대동강의 북한산성 안학궁이다.
31번 이하는 대산한성 안학궁이 함락되면서 대동강 이북에 위치해서 항복해서 얻은 성들일 것이다.
31번) 소가성掃加城은 평성시 소사산(蘇射山,354m)과 관련된 성으로 추정하는데 그 북쪽에 니성泥城이라는 성 둘레 1250척의 작은 토성이 있었다. 32번) 돈발성敦拔城은 한자를 풀어서 발이 족足으로 바뀌었다고 보면, 대성산성 북쪽의 대동군 자족면紫足面이 된다. 돈敦이 돈豚, 시豕, 시柴, 자紫로 바뀌는 과정을 추정할 수 있다. 이 토성의 위치가 바로 자족면紫足面이며, 백제가 쌓은 토성으로서 돈발성으로 추정된다. 즉 대성산성의 전신이다. 33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34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35번) 루매성婁賣城은 청암동 토성이다. 노성魯城이라고도 하였다. 36번) 산나성散那城은 고방산 산성高坊山 山城으로 추정한다. 성 둘레는 4Km이다. 37번) 무명성○婁城은 청호동 산성淸湖洞山城으로 추정한다. 38번) 세성細城은 평양시 삼석구역 손자산(孫子山,356m) 남쪽 삼성리三成里로 추정한다. 고성은 알 수 없다. 39번) 모루성牟婁城은 평성시平城市 한왕리漢王里 고성古城으로 추정한다. 40번) 우루성于婁城은 첫자가 희미하지만 대개 우루성으로 해석한다. 우륵지于勒池가 있던 평원군 노지면 대주리大州里로 추정한다. 우륵지는 거문고를 타는 가야인 우륵이 왔던 곳이 아니라 우루지于婁池의 와전으로 추정된다. 우루지에 고성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41번) 소○성蘇○城은 증산군甑山郡 함종면咸從面 고읍성으로 추정한다. 석성이며 성 둘레는 4334척이다. 산성도 있는데 역시 석축이며 2246척이다. 함종咸從은 비류의 백성들이 비류가 죽고 온조 땅에 건너올 때 낙종樂從했다는 백제 건국기의 기록과 관련될 것으로 본다. 42번) 연루성燕婁城은 평안남도 용강군 어을동토성으로 추정한다. 황룡산성은 오석산(烏石山,566m)을 중심으로 쌓은 성 둘레 6620m의 대성이다. 그 서쪽의 어을동토성於乙洞土城은 성 둘레 1212척의 토성으로서 평산군 신사비가 발견된 곳이다. 43번) 석지리성析支利城은 용강군龍岡郡 삼화읍 고성三和邑 古城으로 추정한다. 토축이며 성 둘레는 4630척이다. 44번) 암문지성巖門至城은 평안남도 용강군 암성면巖城面이다. 암성리巖城里가 남아 있다. 고성은 알 수 없다.
45번) 임성林城은 평안북도 염주군鹽州郡 성림성城林城으로 추정한다. 46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47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무명성()()()은 잡진성雜珍城으로 추정되며 그 위치는 선천군宣川郡 검산성劒山城이다. 48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49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50번) 취추성就鄒城은 알 수 없다. 51번) 무명성○○○은 알 수 없다. 52번) 고모루성古牟婁城은 알 수 없다. 53번) 윤노성閏奴城은 알 수 없다.
54번) 관노성貫奴城은 압록강 북쪽 관전현(寬甸縣)으로 추정된다. 55번) 삼양성三穰城은 평양시 삼석구역 삼성동으로 추정된다.
56번) 무명성○○은 미성味城으로 추정한다. 영변군 약산성藥山城으로 추정한다. 영변읍 고성은 철옹성으로서 4성으로 나누어지는데 그 중 가장 오래된 성 둘레 1Km의 약산성藥山城 고성으로 추정한다. 영변은 밀운密雲성이라고도 하였었다. 그래서 미성이었을 수 있다.
57번) 무명성()()()羅城은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으로 추정한다. 영변군 고무주성(古撫州城)으로 추정된다. 토성으로 성둘레는 5947척이다. 영변군에는 단군시대 모한(慕韓)이 있었다.
58번) 구천성仇天城은 순천시 은산殷山이다. 북쪽 천성산天聖山이 구천성仇天城이 된 것이다. 구천성은 은산의 고읍성으로 추정되는데 토성이며 성 둘레는 5168척이고 우물 9개와 연못 3개가 있었다. 천성산 꼭대기에 고구려, 백제 시조 동명왕의 마적馬跡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온조대왕의 마적과 관련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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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홍익인간/인류공영 원문보기 글쓴이: 솔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