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독서일지(2024.07.04~07.25)*
<7월 5일 금요일>
문학작품에서 역사를 들여다보다
현대적 개념의 역사는 그리스도에 의해
만들어졌고 복음서가 바로 역사의 기반이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닥터지바고》
1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제가 말했었지요. 지금 그 의미를 설명해드리죠. 당신은 무신론자로서 신이 존재하는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모르면서, 인간은 자연 속이 아니라 역사 속에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현재적 개념의 역사는 그리스도에 의해 만들어졌고 복음서가 바로 역사의 기반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힘들 겁니다. 과연 역사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죽음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와, 죽음의 극복을 위해 수 세기에 걸쳐 연구되어 온 결과물입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닥터지바고》 제1장, <다섯 시 급행열차> 중에서)
문학작품에서 진리를 바라보는 장면은 신기하고도 경이롭다. 이 작품 속의 등장인물을 통해서 여러 학문의 한 분야인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물론 ‘역사’라는 학문은 그렇게 간단한 학문이 아니라는 것은 이 글을 읽는 모두는 잘 안다. 다만, 전문 영역의 필진이 아닌, 문학소설 속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을 통해서 작가의 식견(혹은 지성)이 드러나는 것이 흥미로운 것으로, 진리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존재할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광경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융합이라고 하고, 콜라주라고도 하는 것이, 어떤 목표나 주제가 어느 한 곳에만 고정되어 있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전혀 관련 없을 것 같은 분야나 학문이 서로 교류하는 과정 중에 새롭게 발견되어 진리탐구에 대한 인류의 시각을 바꾸거나 새삼 깨우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위해 수학의 무한성과 전자기파가 발견됐고, 그것을 위해 교향곡이 만들어졌습니다. 특별한 정신적 고양이 없다면, 그 방향으로의 발전은 불가능하니까요. 그러한 발견을 위해서는 영적인 요소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복음서에 나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죠. 첫째,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가득 차면, 필요한 곳으로 저절로 흘러넘치게 되는 이 사랑은 살아 있는 에너지의 최고 형태입니다. 둘째, 이것이 없으면 현대인이라고 할 수 없는, 현대 인간의 중요한 구성 요소인 개인의 자유라는 사상과 희생적 삶이라는 사상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유사 이래로 가장 새로운 사상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고대인들에겐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닥터지바고》 제1장, <다섯 시 급행열차> 중에서)
이 얼마나 독특한 시각인가. 역사를 바라보는,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없이 많은 인간들 중의 한 사람의 시각(비록 소설 속에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에 불과하지만)으로 볼 수도 있겠는데, 그 동안 역사라는 정통적인 학문에서 바라보는 시각과 다소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종교, 그 중 기독교와 과학(기독교에서 일부분 경계하기도 하는)이라는 학문과 연계해서 역사를 바라보는 독특한 철학적 시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참신함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이 책을 읽는 기쁨과 즐거움을 얻게 하고, 앞으로 계속 이어질 여러 장면에 대한 독서를 기대에 찬 설렘과 흥미로운 시각으로 기다리게 만든다.
-기껏해야 모든 압제자들이 얼마나 무능했는지를 증명하는 잔인한 곰보딱지 얼굴을 한 칼리굴라들의 무시무시한 야수성만이 존재했으니까요. 그곳에는 청동의 기념비와 대리석 원기둥의 거만하고 영원한 죽음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오직 예수의 출현 후에야, 수 세기 동안 수많은 세대가 자유롭게 숨 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직 그 이후에야, 인간은 대를 이어 살기 시작했고, 담장 아래 길거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역사 안에서, 죽음을 불사하는 지고한 작업을 통해서, 이 주제에 자신을 희생하며 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 이런, 그야말로 진땀이 다 나네요.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는데!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닥터지바고》 제1장, <다섯 시 급행열차> 중에서)
우리의 삶의 현실 속에서 보는 한 장면인 듯 유쾌하고 현장감이 넘실거리고 있다. 작품 속 등장인물의 대사처럼, 살아가다 보면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는 경우는 이것 말고도 많다. 무엇에 관해? 그것조차도 말하려 들면, 작품 속 대사처럼, 진땀이 다 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리고 그런 부분에 대해 어느 순간부터 나도 잘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책을 읽는 것이라고 어제 말했던 것 같다.
1958년 이미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작가는 수상을 거부함)으로 선정된, 소련(지금의 러시아)의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는 영화로도 이미 제작되었을 만큼 유명한 문학작품으로, 영화와 작품 둘 다 ‘본다 본다’ 하면서도 아직 보지 못한 채(일전에는 빌려 놓고도 한 페이지도 보지 못 한 채 반납) 지금까지 지나온 것으로, 이런 부분에서도 사람에서만 ‘인연’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책(작품)과의 인연도 없으면 그 명성만 듣고 흘러 지나칠 뿐, 결코 만날 수가 없는 것이라는 한탄도 해보게 된다.
2
여기 또 다른 책에서 역사를 읽게 하는 또 다른 시각을 발견한다. 윤장훈의 《그날, 우리가 몰랐던 중남미 세계사》로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을 하루하루씩 쪼개, 그 날 중남미 대륙의 여러 많은 나라에 있었던 역사적으로 다양한 근현대사를 신문의 칼럼처럼 한 장에 걸쳐 사진과 함께 소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의 다양함이 마치 재미있는 ‘해외토픽’을 보는 것처럼 부담 없이 읽어 내리게 하는 힘이 숨어있다.
우리 사회에는 이런 류의 다양한 방식을 추구하는 작가와 책이 많이 흘러나와야 한다. 그건 우리 사회의 정신적 밭인 비옥한 문화적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집필한 작가도 중남미 대륙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이 책을 쓴 것 같다.
우리와는 지리적으로도, 그 동안의 국가 간 상호교류라는 관점에서 봐도, 먼 거리에 있는 먼 나라여서 피부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고, 주로 외국인이 출간한 서적으로 겨우 알아가는 정도였다. 그러나 외국인이 중남미를 바라보는 시각과 우리나라 작가가 바라보는 시각은 또 다를 소지가 있다.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미묘한 정서에서 드러나는 차이점을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에콰도르’ 주재 코트라 직원으로 오래 상주한 분이 그 나라의 문물과 역사, 정치 등 여러 다양한 분야를 소개한 책을 통해 따스한 관심을 가지게 된 적이 있다. 우리는 이제 시작이다. 역사상으로 오래전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을 통해 동양 사회를 서구에 널리 알린 것처럼, 세계를 누비는 한국인들이 우리들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세계 곳곳을 우리 사회에 널리 알린다는 것은 ‘우물 안 개구리식’의 좁고 자기밖에 모를 수 있는 근시안을 넓혀, 우리의 삶을 여러 방면에서 윤활지게 하고, 세계를 우리의 이웃처럼 다정하게 껴안을 수 있는 그런 따스한 국가와 민족으로 변모시킬 수도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