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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용정(芙蓉亭) : 경상남도 창녕군 성산면 냉천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정자
솟을대문의 문턱이 둥그려져 있는 멋지다.
1997년 12월 31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48호로 지정되었다.
1582년(선조 15) 창녕현감이던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후학들의 공부를 위해 장학도장으로 창건하였다.
성안의(成安義)에게 이양되어 사용되다가 1727년 불에 탄 뒤 1780년(정조 4)에 중건하였다.
6·25전쟁 때 불에 탄 것을 1955년 복원하였다. 크기는 423㎡로 건물 1동이다.
○ 지정종목 : 문화재자료
○ 지정번호 : 경남문화재자료 제248호
○ 지정일 : 1997년 12월 31일
○ 소장 : 성준기
○ 소재지 : 경남 창녕군 성산면 냉천리 222
○ 시대 : 조선
○ 종류/분류 : 정자
○ 크기 : 면적 423㎡
※ 달창저수지(達昌貯水池) : 여름에 가고 싶은 숨은 보석
창녕군 성산면 후천리와 대구 달성군 유가읍 본말리에 걸쳐서 있는 저수지다.
성산면 냉천(冷泉)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맑은 물이 저수지를 이루고 있다.
※차천제방(車川堤防) : 달창지(達昌池)로 흘러와 서북으로 유가, 구지, 현풍을 지나
낙동강에 유입되는 수리내(총연장 8.6km)를 사이에 두고 800 ha가 넘는 현내들이 넓게 펼쳐 있으며
1973년 한이협회 재단으로 총연장 9.5km의 차천제(車川堤)가 완공됨으로 비로소 낙동강의 침수를 막게 되었다.
※ 연암(燕巖)장터 : 달창저수지가 생기기 전 이 일대에 있었던 장터로
이곳은 구지(求智)-청도(淸道)를 잇는 큰 길이 지나가는 요지였다고 한다.,
(道界마을인 원명은 청도군 풍각면 화산리 와 창녕군 성산면 대산리에 걸쳐 있다. 서로 붙어 있다.
서로 떨어져 있는 창녕목단-구지목단, 창녕유산-구지유산[국가산단으로 사라짐]과는 조금 다르다.)
대견리(大見里)에서 후천리(後川里)를 지나 대산리(垈山里) 원명마을 동쪽
서낭단(城隍壇) 고개(400m, 원명고개=원명재)을 잇는 길로 신라때부터 있었던 한길[大路]이었는데
고려, 조선시대에도 경상우도[동쪽의 상수월마을(수월리)]와 좌도[서쪽 원명마을(화산리)]를 연결하는 대로로
인마가 걸어다니던 시절의 육상 교통의 요지로 이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인가도 있고 주막도 있어서 5일장이 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토포산(티피산) 북쪽 산모퉁이에 연암장이 섰고, 주막 등 인가가 많았으나 점차 사라지고
연암시장도 대견(大見)쪽으로 나가며 없어지게 된 것이다.
또 1967년 8월 달창저수지가 들어서며 장터마저 저수지 안에 수몰되고 길마저 끊어져 버렸다.
지금 제방아래 한 집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횟집으로 바뀌었다.
※ 웃줄기[放鷹山] : 후천리 동쪽 위에 있는 산으로 연화봉(蓮花峰) 서쪽 줄기로 매를 놓아 보내는 형국이라 하여
매방산(鷹放山), 방응산(放鷹山), 응방산(鷹放山) 등으로 불린다.
(求智에도 매방으로 불리는 應巖2里 마을이 존재했었다. 현재 국가산단으로 인해 해체되었다.)
※ 본말지(本末池) : 후천의 동북쪽에 있는 저수지로 경남과 대구시 경계에 있다.
(안심저수지로도 불린다.)
비슬능선의 남향 끝자락 용고개(510m) 건너 葛山일대
비둘산(650m 鳩山)우측 뒷매산(750m)에서 발원하는 개울로 안심저수지를 지나간다.
본래 원래 곽천을 사이에 둔 두 마을이 한 고을을 형성했는데, 나중에
고을 북 서흥김씨 기점에서는 마을 남쪽의 전천
고을 남 창녕성씨 기점에서는 마을 북쪽의 후천 으로 불리어 졌었다.
後川마을은,
1967년 8월 달창(達昌)저수지가 들어서면서 예전 교통요지 및 5일장도 동네가 수몰되면서
지금은 달창저수지를 뒤에 한 마을만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달창(達昌)저수지를 앞에 품고 있는 후천마을은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고 있으며 대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후천리(後川里)는 동쪽 芳里에서 흘러오는 운봉천(雲峰川, 발원 천왕산618m)과 대산리 말등에서 흘러내리는
뒷 내(垈山川)가 만나 달창저수지로 흘러 들어가는 삼각지에 위치하였는데 방응산(放鷹山)의 서편이다.
마을은 냉천리(冷泉里)의 북쪽, 방응산 아래 낮은 평지에 자리 잡았으며,
大邱廣域市 達城郡 瑜伽面 本末里와 도랑(藿川-前川-後川)을 사이에 두고 붙어 있다.
뒷 내를 경계로 경남·북이 나누어지고 마을도 개울을 사이에 두고 있어 만약 광역자치단체에 일을 보려면
남쪽은 부산이나 창원으로 가고,북쪽은 대구로 간다.
동리 앞에 있는 달창저수지 물은 대견(大見里)을 지나 북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되는데
저수지 아래의 내(川) 명(名)은 차천(車川)이다.
연암서원(燕巖書院)이 있었던 마을로 지금도 조선중기의 정자 부용정(芙蓉亭)이 남쪽 끝에 있어
금헌 李長坤(本.碧珍), 부용당 성안의(成安義 本.昌寧 子.精甫 號.芙蓉堂 정구(鄭逑)의 문인) 등
선현들의 발자취가 역력한 곳이다. 행정리는 1개리로 행정리의 명도 후천이라 한다.
냉천(冷泉)의 북쪽에 있는 마을로 후천리(後川里)에는 자연마을이 단 한 마을뿐이다.
예전에는 곽천(藿川)이라 하였는데, 전천(前川)으로 불리다가 후천(後川)으로 되었다 한다.
53호가 살며 서흥 김씨가 살았다고 하며 현재는 창녕 성씨가 많다.
※ 곽천(藿川) : 부용정(芙蓉亭) 근처에 옛날에는 깊은 소(沼)가 있어 물이 깊었다 한다.
이곳에 큰 바위가 있어 이 근처를 미역 바우라 부른다. 이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이 동리에 효자가 살았는데 그 부모가 "미역국을 먹었으면 좋겠다. 조기를 구워 먹었으면 원도 한도 없이 죽겠구나."
하는 말을 듣고 그 효자가 이 바위에 와서 기도를 하였더니
바닷물에서 나는 미역이 신기하게도 민물인 이 바위에 있었고, 또 바다에서 잡히는 조기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후세의 사람들이 미역바우[藿巖]라 부르는 것인데 이 미역바우는 달창저수지의 담수로 물에 잠겨 버렸다.
미역바우, 곽암이 있는 내(川)라하여 내 이름도 미역내, 곽천(藿川)으로 부르던 것이 마을 이름이 되고 또
서흥 김씨가 먼저 이곳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이 미역내(川)의 앞에 동리가 있다 하여 前川이라 마을이름을 개칭하였다.
그 후 성씨들이 또 와서 살게 되면서 그들은 내 뒤에 동리가 있다 하였던 고로 後川이라 부르니
그 이후부터 동명이 후천이 되었다 한다.
※ 서원(書院)터 : 후천 동남쪽 부용정과의 사이에 연암서원이 있었던 터이다.
출처:창녕군지, 발행인:창녕군지편찬위원회, 발행:2003년 8월 31일
삼거리 표지
버스정류장, 곽천교회, 티피산
후천마을 표지
성안의비, 부용정
부용정문
후천교, 부용정, 티피산
왕령산(426.5m)화재감시소
경남 창녕군 고암면 계상리 1160 칠월마을 下 국도#24창밀로 남쪽 구니서당 남편 박월산(390m)
경남 창녕군 창녕읍 퇴천리 창락 북동편 화왕산(757m)
창녕 대합면 이방리·합리 와 창녕 성산면 정녕리를 가르는 태백산(284m)
달창저수지 남쪽 퇴포산 즉 티피산(268m) 下 왕령산 북서능선 소시랑등(237m)
비슬산주능선(琵瑟山主稜線)은 북단봉(1,052m)부터 남단봉(990m, 상여덤)까지가 양끝(바닥거리기준 4.7km)
琵琶山 琵瑟氣脈本脈 서쪽에는 달성군 유가면, 동쪽은 청도군 각북면, 북쪽은 달성군 가창면·옥포면,
琵琶山 琵瑟氣脈本脈 남쪽에는 청도군 풍각면·창녕군 성산면·달성군 유가면의 마을들이 분포한다.
양끝 또는 인근에서 분기하는 稜線은 넷.
북서편 ①와와稜線(草谷山城), 북동편 ②琵瑟氣脈(雲門山) 그리고 가운데 북(서)으로는 대구 앞山까지
남서편 ③짐실稜線(油谷里), 남동편 ④소말稜線(淸道郡角北面南山里) 그리고 가운데 남(동)으로는 淸道 華岳山까지
짐실(油谷)능선은 大門 990m봉을 출발해, 880m잘록이(경남·경북·대구 분界점표석), 933m봉(금수덤869m분기점),
890m잘록이, 가마봉(992m), 969m봉, 880m잘록이(임도종점), 肉峰(926m), 920m봉(대구市界능선 분기점) 西向
858m잘록이, 고둥덤(877m), 792m잘록이를 거친 후 달등(827m)으로 마지막 솟았다(3.7km)가 玉女峰으로 급락한다
대구市界능선방향 920m봉(대구市界능선 분기점) 南向 갈봉(916m, 벼락덤), 용고개(500m), 상사바위등(750m)
으로 내려와 곽천에 도달한다.
소말능선은 먼저 남향 화악분맥을 700m공유(기차덤 구간)한 후 920m남동능선분기점에서 갈라저 동쪽으로 굽는다.
화악분맥은 大門 990m봉~920m분기점~
서낭단고개(400m, 원명고개=원명재, 서 화산리 원명마을-동 수월리 상수월마을)~난두산(611m, 난디산, 마령산)~
馬靈岾(405m, 창녕 연당리-청도 금곡리)~수복산(593m, 수봉산)~
비티재(278m, 국도#20 창녕성산-청도풍각)~
방골재(296m, 창녕 방리 안마실-청도 안산리 무태[안태]마을)~
묘봉산(514m)~퉁점이재(324m)~배고개(305m)~천왕산(618m)~화악산(932m) 사이
25km를 니은(ㄴ)자 형태로 달리는 능선.
천왕봉(1083m)-마령재-월광봉(1003m)-대견봉(1035m)-석검봉-조화봉(1059m)-남단봉(990m)은 잘못된 명칭이고
천왕봉(1083m)-삼봉재-극락봉(1003m)-대견봉(1035m)-톱바위-칠분지(1059m)-남단봉(990m)서 양갈래로 갈라져
짐실즉유곡방향 남서능선 가마봉(992m, 관기봉은 잘못된 명칭), 육봉(926m, 비실산), 상사바위등(750m, 뒷매산)과
성산풍각면방향 화악분맥 기차덤(비슬릿지)下 수복산(593m, 수봉산) 間下 후천里 西 매응산 즉 연화봉(434m)
매일신문 글 박종봉 편집위원
[雲門에서 華岳까지] (1) 산으로 들어서며 2007-05-09 14:54 2011-01-26 11:33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065851
[운문서 화악까지] <46>늦가을, 비슬산에 이르다 2010-11-13 10:15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178187
[운문에서 화악까지] <47> 삼봉재∼극락봉∼칠분지 2010-11-20 10:21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178825
[운문에서 화악까지] (48) 옛 현풍현서 본 비슬산 2010-11-27 10:48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179483
[운문서 화악까지] <49> 남부외곽능선 2010-12-04 10:27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180068
[운문서 화악까지] <50> 비슬 산남, 천왕산까지 2010-12-11 10:15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180709
[운문서 화악까지] <51> 창녕지맥 밀양지맥 2010-12-18 10:12 2010-12-21 11:57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181348
[운문서 화악까지] <52-끝> 겨울, 산을 떠나며 2010-12-25 10:15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181977
[운문서 화악까지] 1년간 시리즈 애독한 독자와 도움 준 모든 분께 깊은 감사 2010-12-25 10:15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181979
[책] 운문서 화악까지 2011-04-21 11:48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193057
박종봉 기자
첫댓글 origin 昌寧郡은 남부의 예전 靈山郡 지역과 달리
생활권은 大丘에 속해 있다.
1955년 7월 1일
昌樂面은 昌寧面에 편입되었다.
1960년 1월 1일
昌寧面이 昌寧邑으로 승격하였다.
[경북의 끝-道界마을을 찾아서] 창녕과 경계 청도 풍각면 원명마을
"시장은 창녕장에서 보고, 투표는 풍각면에 가서 하지…"
경북 청도군 풍각면은 경남 창녕군 성산면, 대구 달성군 유가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풍각면은 오랜 기간 대구에 속해 있었지만 1906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각북, 각초면과 함께 청도군에 편입됐다. 풍각면은 1914년 행정구역 통합 등 부분적인 이동(里洞) 개편을 거쳐 법정 12개 리(里), 행정 23개 리 체제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풍각면 북쪽의 비슬산(1,083m) 줄기는 남서쪽으로 뻗어가며 마령산(610m)과 수봉산(593m), 묘봉산(514m), 천왕산(619m) 등이 이어진다. 풍각면은 면 소재지를 관통하는 청도∼창녕 간 20번 국도를 통해 경부선 철도와 신대구부산고속도로, 구마고속도로와 연결된다.
◆도 경계에 위치한 자연부락
풍각면 화산1리 원명(元明)마을은 산 능선을 타고 이어가던 도 경계가 계곡을 중심으로 나뉘면서 뚝 떨어진 자연부락이다. 경남 창녕군 성산면 대산리와 접한 이 마을은 경남'경북 주민이 한 마을처럼 대대로 살아오고 있다. 원명마을로 가려면 고즈넉한 풍광의 화산1리 마을을 지나 구불구불한 임도를 1.5km나 올라가야 한다. 마을 사람들은 풍각면 소재지까지 12km, 30리길이라고 말한다.
산길이 시작되면 원명마을이 나올 때까지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다. 지금은 콘크리트 도로로 포장이 됐지만 예전에는 그야말로 첩첩산중 산길이었을 터, 고개 정상에 올라서야 원명마을이 펼쳐진다. 원명마을은 가마봉 등 비슬산 남서쪽 외곽 능선의 최고 절경 구간이 둘러싸고, 아래로는 조피덤폭포 계곡이 펼쳐지는 명승지다. 최근에는 피서객들이 입소문을 통해 조용히 찾아들고 있다.
이 마을 지명은 최근까지도 '우멍이' 또는 '움미이'로 불렸다. 임진왜란 당시 비슬산 일대에서 왜군과 맞서던 곽재우 장군이 비슬산에서 포진하다 이곳에 도착해 동이 트자 '여명'(黎明)이라 이름 붙였는데, 세월이 흐르며 '원명'(元明)으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이곳 마을에도 전기와 통신이 들어오면서 일상생활의 불편은 어느 정도 해소됐다. 하지만 아직도 한밤중에는 영화 '웰컴 투 동막골'처럼 세상과 단절된 적막강산이다. 주민들은 눈이 오면 말할 것도 없고, 비가 내려도 꼼짝달싹하기 힘들다고 한다. 산허리 아래 사방으로 마을길이 모두 급경사이고,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대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교통 신호등이 원명마을 안에서 작동하는 모습은 매우 이채롭다. 몇 년 전 청도군과 청도경찰서가 차량 교행과 통행 편의를 위해 연구를 거듭하다 시간 차를 두고 방향을 바꿔가며 일방통행시키는 신호등을 설치했다.
◆경남'북 구분 없이 옹기종기 모여 살아
원명마을도 30~40년 전에는 30여 가구나 모여 살았다. 마을계곡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경남 땅에 10가구, 경북 땅에 20가구 정도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마을 한복판 다리가 도계이고, 생활권이 같다보니 도계의 구분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청도 풍각 상수월리에서 이 마을로 시집와 45년째 살고 있다는 정우선(66) 씨도 경북 땅의 집에서 식당을 하고, 경남에 있는 채소밭에서 농사를 짓는다. 정 씨는 "시장은 버스 편이 연결되는 창녕장으로 가고, 예방접종 등 생활민원은 편도 2만원의 택시비가 들어도 풍각면 보건소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전화세와 주민세는 청도로, 전기세는 창녕으로 납부한다. 택배는 창녕 쪽에서 차량이 들어오고, 투표는 청도 풍각면으로 나가서 한다. 예전 아이들이 어릴 때는 말씨도 창녕 발음과 청도 억양이 뒤섞인 말투였다고 한다. 계곡 근처에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고 원두막 형태만 남아 있는 집은 마당 한복판으로 경남'북 경계가 갈렸다. 이 집 주인은 윗담과 아랫담을 사이에 두고 경남으로 갔다, 경북으로 갔다 했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대대로 경북
원명마을은 현재는 14가구, 18명 정도가 살고 있다. 원래 주민들은 대부분 외지로 나가고 남은 주민들과 객지에서 귀향한 사람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예전 아이들이 학교를 다녀야 할 시기에는 교육 문제 때문에 창녕 성산면이나 대구로 주소를 옮겨야 하는 불편과 고민이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다 크고 도시로 나간 요즘, 정부의 경계마을 행정구역 조정 발상은 무의미하다는 게 주민들의 의견이다. 이 마을 반장 김비룡(66) 씨는 "마을주민 입장에서 볼 때 창녕 성산면은 창녕에서도 가장 오지이면서 열악한 편이다. 반면 풍각면은 보건소와 시장 등 필요한 일을 일사천리로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단순히 교통 편의에 따른 경계 조정은 필요 없다는 얘기다. 주민들은 정서적인 측면에서도 여지껏 청도군민으로 살아왔고, 고향과 친척, 원적이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다만 풍각과 유일하게 이어주는 "화산리~원명마을 간 임도를 군도로 승격시켜 달라"고 건의했다. 청도군은 올 9월 경계 조정과 관련해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 거주자 대부분이 65세 이상 고령자이며, 후손의 입장에서 조상대대로 살아온 터전의 지명이 바뀌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창녕군으로 편입 등 경계 조정이 불필요하다는 입장을 정부에 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