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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곳은 선조님들과 부모님들이 태어나신 곳이고 선영이 모셔진 곳이기에 정신적인 고향일 뿐이고 또 지금에는 설악산이 좋고 동해 바다와 속초가 좋아 자주 오가고 하지만 먼 친척만 더러 있고 내집도 없는 그런 곳이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어른들 께서 고향으로 내려와 1952년 까지 8년간 살면서 끔찍한 6.25 전쟁 전후의 아픈 추억만 가득한 곳일 뿐 태생도 그 곳이 아니고 성장한 곳도 그 곳이 아니고 지금까지 객지에서 만 살았기에 많이 산 곳을 기준으로 삼는 다면 서울이 고향이요, 동심이 뭍혀 있는 청소년 기를 기준으로 한다면 부산이 내 고향이고, 태생지를 기준으로 한다면 함경북도 종성군 행영면 영리가 고향이고, 사랑하는 내 아내를 기준으로 한다면 실제로 1년 밖에 살지 않었어도 산수가 너무 좋아 그만 홀딱 반해 지금까지 가장 빈번하게 왕래 하면서 지내는 춘천! 그곳이 내 고향이라 할 수도 있다.
1945년 8.15해방 이후 11월 29세 되신 해 아버님은 할머니 모시고 어머니와 함께 나 그리고 4살 아래인 갓 태어난 나의 여동생을 데리시고 객지 직장 생활을 정리한 뒤 함경북도를 떠나 고향 강원도 양양으로 내려 오셨다. 귀향 도중 원산 근처 덕원 기차역에서 소련 군인 로스께가 귀중품과 사진등 온갖 소중한 자료가 든 커다란 가방를 날치기 하여 도망을 갔는데 가방을 찾으려고 쫓아간 아버지가 돌아오시지 않자 나를 업으신 할머니가 큰 소리로 우시면서 '아범이 오지 않는걸 보니 소련군 놈이 총질을 하였을 것이다' 하시면서 기차 바퀴에 몸을 던져 죽겠다고 하시던 애절하신 절규의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한참 뒤 우리집의 전 재산인 가방을 찾지 못하고 빈손으로 터덜 터덜 돌아오신 아버님과 우리는 적수 공권으로 거지 행색이 되어 고향역 강현에 도착했다. 고향에 온 우리는 친척집 뒷방 하나를 빌려 사는 농촌 생활이 시작되었다. 38 이북의 공산 치하의 우리 생활은 그렇게 시작 되었다.
1946년 가을 소련 공산주의 앞잡이 김일성 우상화와 공산 정권의 세력 다지기가 한참일 무렵 우리 집의 비극은 시작 되었다. 아버지가 마을 인민 위원장인 J씨의 집에서 젊은 사람들 끼리 사상 논쟁을 벌이다가 그들 공산주의 패들과 싸움이 붙었는데 힘이 모자란 아버지 일행이 다수인 그들에 밀려 무수히 구타를 당하여 들 것에 실려 오시는 그 때의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하고 나는 지금도 몸서리를 친다.
온 몸에 선혈이 낭자하고 특히 왼쪽 눈 두덩이는 인민위원장 J씨가 아버지를 들어 거꾸로 문지방에 내리 꽂는 바람에 찢어져 갈라 졌는데 어린 내가 보니 아버지의 왼쪽눈 위에 또 하나의 커다란 눈이 있는것 처럼, 찢어진 살이 너덜 거렸던 걸 본 기억이 있다. 나는 아버님이 살아계실때 그 눈섭위의 상처만 보면 그 때의 생각이 났다.
집에와 정신을 차린 아버지가 어머니와 할머니 더러 어서 빨리 바늘을 가져와 실로 생살을, 마취도 않은 살을 꿰매라고 연신 고함을 칠때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정신없이 벌벌 떠시기만 하시던 할머니 어머니 생각이 지금도 나서 눈물이 난다. 할머니가 된장 독에서 된장을 한 주먹 떠다가 상처에 싸매고 머리를 천으로 동이신 나의 아버지...밤낮으로 신음소리만 내시던 내 아버지...
3 일쯤 지나 물치 내무서에서 내무서원이 몸져 누우신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인민 위원장의 고발로 체포 연행된 것이다. 양양 정치 보위부에 끌려가셔서 한 달간 모진 고문을 받으셨는데 어머니가 한번 면회를 갔었는데 아버지는 너무 혹독한 고문에 온몸이 퉁퉁 부어 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고 몽둥이로 온 몸을 맞아 전신이 구렁이 감아 놓은것 처럼 얼룩 덜룩 무섭고 끔찍하게 피멍이 들어 계셨다고 하셨다.
그런데도 아버지 께서는 어머니 더러 이르 시기를 당신 어머니에게 가서 내가 이렇게 맞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한다. 나의 할머니가 너무 애통하여 충격을 받으실가 염려 하셔서 하신 말씀이라 하셨다. 얼마 뒤 내무서원들과 양양 정치 보위부 놈들이 우리 집에 들이 닥쳐 어머니 할머니 가슴에 총 뿌리를 들이 대고 여러차례 짓 이기며 비밀서류 어디 있느냐고 죽인다고 욱박 지르고 바로 대라고 하였다. 그들은 새로한 집 천정을 마구 뜯어가며 아버지가 쓰신 '공산주의의 허구성' '공산 사회주의의 비판' 에 관한 논문집을 찾느라고 혈안이 되어 난리를 친적이 여러번 있었는데 다행이 그 비밀 서류들은 어머니가 집뒤 장독 아래 집짓느라 옮겨 놓은 커다란 바위 밑에 숨겨 놓아 발각되지 않으셨다고 하신다.
한편 온 동네 친척들이 야단 났다. 동네 사람들이 두 패로 갈라진 것이다. 친척들을 중심으로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며 아버지 구명 운동이 벌어 졌다. 아버지의 우리문중 집안 혐님 뻘 되시는 친척 J S 아저씨가 적극 나서서 구명 운동을 하셔서 아버지는 풀려 나셨다.
그러나 잠시뿐, 집안 아저씨의 느낌으로 사태가 심상치 않으니 몸을 숨기라 하셔서 아버지는 아픈 몸을 끌어가며 한 밤중에 종적을 감추셨다. 깊은 산골 설악산 신흥사로 몸을 피하신 것이다. 당시 공산 치하에서 '종교는 아편이다', 라며 김일성만 숭배하라는 시대여서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신흥사엔 처음에 스님이 없다가 얼굴이 넓적스레 하고 눈에 눈곱이 찌적 찌적한 나이 많으신 할아버지 절 지킴이 스님 한 분만 계셨는데 이름을 한흥운 이라 하셨는데 나의 어머니는 그분의 함자가 만해 선생님과 비슷하여 한용운 선생의 동생이 아닌가 하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형제가 아니었다 하셨다.
나의 외 할아버지는 절만 짓는 지금은 속초시 설악동( 옛 이름은 상도문) 의 대목(大木) 이 셨고 소시적엔 가족이 용대리에서 사시다가 다시 고향인 도문으로 오셔서 사셨는데, 백담사 오세암 봉정암 신흥사 낙산사 홍련암 등 외 할아버지의 손길이 닿지않는 데가 없으신 그런 분이셨다고 하셨다. 만해 선생님보다 6살이 아래 이셨는데 호형호제 하시는 사이라 하셨고 봄철에 백담사 절의 밭에 옥수수를 심어 놓으시고 여름이 조금지나면 목수일 없을 때는 늘민령( 나의 생각으론 마등령 이 아닌가 생각됨) 을 넘어 옥수수를 지게에 한 섬씩 담아 지고 오셨다고 하셨다. 어머님이 소시적에 만해 선생께서 외갓 댁에 들르시면 한용운 선생 아저씨 오셨다고 말씀 했던 기억이 난다 하셨다.
우리가 60년대 초에 우연히 만해 선생님 댁 이웃에 이사를 가서 그분의 따님과 병약하신 부인을 처음 만나 나의 어머님과 만해 선생님의 따님(H Y S 여사) 이 옛날 얘기를 하시면서 친하게 지나 셨으니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라 생각 된다. 얼마 있지 않아 만해 선생님 부인은 그 곳에서 돌아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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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신흥사에 숨어 계신지 얼마 되지 않아 속초에 탁발 나갔던 노 스님이 허겁 지겁 돌아와 지금 밖의 공기가 수상하니 계조암으로 피하라고 하여서 울산바위 아래 흔들바위를 앞에둔 어마 어마하게 큰 돌 바위 밑에 집이 있는 계조암으로 피신 하여 그곳에서 1950년 1월 하순 까지 계셨으니 참으로 오랜 동안 숨어 지내신 시절이셨다. 이때 아버님은 설악산 일대의 모든 역사와 일화들을 기록해 두셨다.
아버지가 안 보이는 사실을 다음날 아침에 안 나는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대구 물었는데 할머니와 어머니는 그 때마다 어린 저를 보고 아버지는 저 멀리 돈 벌러 가셨는데 이담에 돈 많이 벌어 오실 거라고만 하셨다. 아버지의 행적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어머니는 그 무서운 산골 한 밤중에 호랑이도 출몰 한다는 데를 두려움을 감수하고 식량을 준비하여 아버지에게 비밀리에 가져다 주시고 밤 새도록 왕복 4십리 길도 넘는 그 밤 중에 다시 몰래 집에 돌아오시던 때 였으니 생명을 걸고 다니셨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1948년 봄 4월 인민학교 입학 할때 할머니의 손 만을 잡고 입학식에 참석 했을 정도였다. 그 때 운동장에서 처음으로 학교 교실 쪽으로 다가가 교실 안을 신기한 장소로 알고 호기심이 가득한 마음으로 유심히 여러차례 들여다 보던 그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어린시절의 느낌을 다시금 떠올려 본다. 나의 교직 30년 넘도록 그때의 느낌은 항상 나를 학교를 사랑하게 만들었고 교육의 의지를 붙들어 주는 원인 제공이 되었다.
1947년 우리 집 얼마 되지 않는 농사 짓는 밭은 모두 김일성 집단에게 몰수 당하였다. 인민군에 입대한 아버지의 4촌형제 두 아저씨댁, 즉 작은 집의 소유로 넘어갔다. 우리 집은 농사 지을 땅도 없는 완전한 거지 집이 되었다. 그 이후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나 셨지만 그때 작은 댁 할머니가 나의 할머니 앞에서 몰란 절에 '에이그! 세월이야 참 잘 됐지 뭐유' 하고 말하여 나의 할머니에게 평생의 한을 심어 주었다. 당시 38 이북 공산 치하에서는 공산 사회주의로 인해 분배라는 핑게로 가족과 친척과 이웃의 이런 파괴의 현상이 도처에서 일어 났던 것이다.
1950년 2월초 어머니와 아버지는 두 여동생을 데리고 비밀리에 기차를 타고, 일제 때에 객지 생활을 하실 때의 친한 친구인 원산의 팔용 아저씨 댁에 몸을 숨기고 사시게 되었다. 그때 그 분이 커다란 양조장을 경영 하였다고 하는데 아버님이 그 곳에서 일 자리를 얻으셨다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1948년 여름 할머니는 인민학교 일학년생인 나를 데리고 열차편으로 강현역을 출발하여 원산까지 간 일이 있다. 그 때에 할머니는 우리가족 어른들이 아시는 원산에 계시는 분들과 아버지 어머니에 관한 거취 문제가 은밀히 논의 되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할머니와 나를 고향에 남겨두고 비밀리에 기차 타고 원산으로 올라 가시면서 그해 가을에 데리로 올테니 그리 알고 있으라 하셨는데 그해 6월 우리 민족의 그 한 많은 6.25가 터져 서로 생사도 모르고 할머니와 나는 원산에 계시는 가족과 갑자기 난데 없는 이산 가족이 되었다.
(계속)
1948년 10월 중순이 조금 지나 내 둘째 여동생이 태어 났다.
나의 아홉 형제 자매중 다섯만이 살아 있는데 고향에서 난 형제는 바로 둘째 여동생 뿐이다(나의 형과 바로 아래 남 동생은 해방되기 전 홍역으로 사망하고 거제도에서 태어난 여동생 둘은 앞으로 다시 말 하겠지만 피란 시절 거제도에서 사망 하였다).
우리집 생애 가장 가난하고 공포 속에 살았던 시절이라 둘째 여 동생은 영양 실조로 잔병 치레도 참 많이 하면서 자랐다. 내가 학교에 갔다 오면 어머니가 동생을 어린 나의 등에 엎히고 포대기 끈으로 흘러 내리지 않으라고 너무 꼭 조여 매시는 바람에 가슴이 답답하여 숨이 막힐 지경이어서 쩔 쩔 매던 생각이 난다.
어머니는 그러시고는 농토가 없으므로 농사 일은 못하시고 바느질 솜씨가 좋으셔서 동네 삯 바느질을 도맡아 하셨다. 당시 어머니의 이 고생 하심이 우리 집안의 주 수입원 전부 이셨다.
1948년 늦 가을의 일이다.
시골 벽촌 이라 머리가 길면 할머니가 잘 들지도 않는 재봉 가위로 듬성 듬성 머리 카락을 깎아 주셨는데 아무리 기술적으로 다 깎고 다듬 었다 하여도 사내인 내머리는 흡사 얼룩말 가죽 씌어논 꼴 이었다. 나는 이것이 창피해 누가 있으면 양손 바닥으로 머리를 가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수업을 마치고 귀가 하려는데 담임 선생님께서 나를 아주 다정히 부르셨다. 이제까지 선생님이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신 적이 없는데 나는 의아 하여 또 예의 그 얼룩말 가죽 같은 내 머리통을 감싸고 긴장 하면서 선생님께 다가 갔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내 머리를 아주 귀엽 다는 드시 쓰다듬어 주시면서 '화곡아! 네 아버지 요즈음 잘 계시지? 아버지 집에 오셨니?' 하시는 것이다. 나는 그 순간 깜짝 놀랐다.
이렇게 젊고 이쁘신 선생님이 왜 우리 아버지 안부를 물으시지? 하는 것과 그때 내 아버지는 내무서원 들에게 사상이 이상 하다고 감시를 받다가 잠적하여 이웃도 모르게 설악산 신흥사 뒷쪽 흔들 바위가 있는 계조암에 몇년간 몰래 숨어 계실 때 였다는 사실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를 못 보았기에 머리를 좌우로 젓고 있으면서 머리 깎은 챙피스럼 보다 나의 또 다른 관심사는 내 어머니가 계시는데 왜 선생님이 관심을 갖느냐, 이것이 더 큰 근심거리 였다. 어렸지만 나의 이성 감각은(?) 상당한 수준이 아니었나 생각해 보기도 한다.
'화곡아! 네 아버지 오시면 꼭 나에게 아무도 모르게 살짝 알려줘! 하시는 선생님의 사랑 넘치는 말씀을 뒤로 하고 창피한 까까 머리를 감싸며 집으로 갔다. 그 뒤 내가 철이 들면서 생각하니 그 선생님을 통하여 내무서 원들이 아버지를 수배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공포의 전율을 느꼈다. 어린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걸 이용하여 그들은 나에게 아버지 행방 여부를 추적하고 있었다는 그 사실 때문이다.
늦은 가을 어느날 한 밤중 왠 일인지 홀연 잠이깬 내가 들으니 주변에서 두리번 거리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못 뵙던 아버지가 한 밤중에 보고 싶은 가족을 보시러 오신 것이다. 아버지가 어리 둥절한 나를, 할머니가 가위로 깎으신 나의 까까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웃으시던 모습이 생각 난다. 잠든 어린 두 동생도 안아 보시고 머리를 쓰다 듬어 보시며 한참 그렇게 계시다가 보따리를 챙기시더니만 밖으로 나가셨다. 어머니가 먼저 밖으로 나가셔서 망을 보시고 들어 오시자 마자 일어난 일이다. 할머니도 허겁 지겁 밖으로 따라 나가 셨다. 1950년 1월 말까지 아버지가 설악산 신흥사 계조암에 잠적하신 뒤로 나는 이렇게 아버지 얼굴을 한번 밖에 보지 못 하였다.
이튿날 내가 학교엘 가려는데 어머니와 할머니는 번갈아 가시면서 나를 붙들고
"누가 아버지에 대해 물으면 아버지 못 보았다고 대답해라! 알겠니? 아버지 못 보았다고! 알겠니?" 하시면서 수도 없이 나에게 다짐 하시던 생각이 난다.
나는 나서 처음으로 어른들로 부터 거짓말을 하기를 강요 받은 셈이다. 지금 생각 하면 할머니와 어머니는 내 앞에서 처절하게 절규를 하셨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가 왜 저렇게나 두려운 눈빛으로 야단 이신가 속으로 의아해 하였다. 또 거짓말 까지 하라시니....
그러나 어린 나였지만 할머니 어머니 말씀을 명심하고 누구를 만나도 아버지에 관한 얘기엔 시침이를 딱 떼었다. 모른다고 하겠다고 어른들과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였으리라.
1949년 여름 방학이 될 무렵 우리 학교에서는 기억나는 행사 하나가 있었다. 상급생 어린이 회장 격인 형이 금강산 수련을 떠난다 하였다. 운동장에서 교문까지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모두가 도열한 한가운데로 그 형이 양 어께에 손바닥 만한 계급장 같은 것을 달고 멋스럽게 지나 갈 때 그 때 선생님이 커다란 목소리로 '우리의 ***가 영명하신 김일성 장군님 대 원수님의 은혜로 금강산 수련을 떠난다!' 하면서 요란하게 박수를 치며 환송하던 기억이 난다.
일주일 쯤 뒤 그 어린이 회장이 돌아 올 땐 더 대단하였다.
선생님이, '보라! 드디어 *** 동무가 김일성 어버이 수령님의 가르침을 받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라!' 하며 우뢰 같은 박수를 치면서 나는 그 순간 온몸에 전률을 느끼면서, 나도 이 다음에 커서 저 형 처럼 멋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면서 몹시 부러워 했던 생각이 난다.
지금도 나는 그 때의 생각이 나서 우리 대한민국의 학생들이 금강산 관광을 가는 계획을 그리 좋은 시각으로 보지 않는다. 간접적으로 김일성 우상화의 사상 교육에 동참하는 것이라 여기는 나의 시각이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동무' 란 호칭이 그때 부터 온나라 구석 구석까지 강요 되었는데 동네 아주머니 들이 모여 이 '동무' 호칭이 너무 우습다고 쑤군 거리며 웃으시던 기억도 난다. 아버지 동무 어머니 동무 아저씨 동무 할아버지 동무 위원장돔무 어버이 수령동무 ... 그저 갖다가 부치는게 동무라서 형들은 한편으로는 재미도 있지만 비아냥 거리면서 쓰레기 동무 바가지 동무 삽살개 동무 송아지 동무 하며 킥킥대고 웃던 생각도 난다. 나도 그 때 처음 불러 보는 이 '동무' 호칭이 이상하게만 들렸다. 아버지 동무라니!
부모님과 두 여동생이 그렇게 원산으로 가신뒤. 고향에는 할머니와 내가 단 둘이 남아 나는 학교가는 날 빼고는 매일 할머니 치마 자락만 붙들고 졸졸 따라 다니다 시피 하였다.
할머니가 생각 하시는 맏 손주인 나에 대한 정성은 대단 하셨다. 할머니는 9남매를 낳으셨는데 모두다 유행병 (주로 홍역)에 걸려 심지어 하루 저녁에 두 아드님을 잃으신 적도 있으실 정도로 충격과 한을 가슴에 가득히 지니시고 계시는 분이셨다. 이로 인해 정신도 한번 잃으셨다고 하였다. 오직 나의 아버님만 무녀 독남으로 살아 나셔서 성장하신 것이다.
그러니 아들과 손주들에 대한 사랑의 집념이 대단하셨다. 연 년 생으로 난 내 아우 때문에 나는 돌이 조금지나 할머니 차지가 되었고 할머니 젖을 5살 까지 먹어 젖이 나왔 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주로 다른 집 농사 일을 거들어 주시고 겨우 끼니 되는 정도만 얻어 오셔서 우리집 양식으로 하셨다.
또 삼베 베틀에 앉으셔서 하루 종일 삐이꺽 찰가닥, 삐이꺽 찰가닥 하는 소리를 내면서 북을 오른 손에서 왼손으로 왔다 갔다 건네면서 그때 마다 바디집을 잡아 땡겨 가로로 이어진 실을 다지고 한쪽 발에 신을 신으시고 그신 코 끝에 굵은 끈이 달려 베틀 뒷쪽 위로 이어진 끈이 잡아 당겨 졌다가 풀어지고 잡아 당겨 졌다가 풀어질 때 그 때 마다 규칙적인 형언할 수 없는 특이하게 들리는 베틀 짤 때 들리는 그 소리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할머니의 베를 짜시고 명주실로 비단을 짜시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한폭의 예술적인 동작과 같다고 생각 된다. 그 동네에서 베와 비단을 제일 잘 짜셨다고 소문이 나셨으니까.
나의 아버지가 열 다섯 되시던 그해 음력 동짓달 초 여드레 날에 할아버지는 대포에 가마니를 짜러 가셨다가 밀폐 되다시피 한 방안에 숯불 피운데서 까스가 나와 일산화 탄소 까스에 중독이 되셔서 48세 년세로 갑자기 돌아 가신 뒤에 나의 할머님은 외 아드님을 데리고 억척 스럽게도 세상 속에서 사셨다. 세상에 안 해 보신 것이 없을 정도로 부지런히 다 해 내셨다고 하신다.
할머니는 내가 놀이로 가지고 있는 장난감 들은 하나도 버리시지 않으셨다. 공기돌 이고 땅 따먹기 할때 손가락을 접어 튕기는사금 파리를 동그랗게 다듬은 것 이라 던지 심지어 자 치기 막대까지 할머니가 방 한 구석에 신주 단지 모시드시 잘 보관해 놓으신다. 그리고 매일 저녁 옛날 얘기를 해 주신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우리 집안 내력을 노상 들려 주셨고 특히 7대조 부터 우리 집안의 가계 이야기라 던지 조상님들과 얽힌 이야기라 던지 당신이 경험 하신 이야기라 던지 이와 얽힌 동네 다른집 역사 이야기라 던지 매일 저녁 나는 할머니의 말 동무가 되었고 할머니가 얘기 하실 때의 청수(聽手), 곧 지음(知音)이 돼 드린 것이다.
할머니가 입만 열으시면 나는 할머니의 그 다음 이야기가 무엇인지 다 안다. 지금까지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이상스러우리 만치 거의 다 기억한다. 할머니는 처음 말씀 하시는 것 처럼 항상 진지하게 이야기를 시작 하신다.
기억나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할머니는 우리집에 17살 되시던해 할아버지께 시집을 오셨다.할머니의 친정즉 나의 진외가는 양양군 서면 서림리 황이 라는 곳이다. 지금은 구룡령으로 길이 아주 잘나서 홍천에서 쉽게 너머 미천골 입구 쪽으로 올수 있지만 예전엔 타지 사람들 구경도 잘 못하는 산골 이었었고 사철 맹수가 출몰하였으며 특히 겨울철에 눈이 많이 왔을 때에는 사냥꾼 들이 많이 모이는 그런 곳이라 한다.
17살의 연세에 시집 오신 할머니 ... 아주 부끄러움이 많으셔서 농담 잘하시는 시어머니(나의 증조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고 혼이 나신적이 한두번이 아니라 하셨다. 하루는 시아버님 즉 나의 증조 부께서 농사일 마치시고 저녁 때 술이 아주 거나 하셔서 들어 오셨다. 증조부 께서는 술을 아주 좋아 하셨다 한다.
술을 자시면 그냥 들어 오셔서 식사하시고 주무시지를 않고 얘기를 많이 하시는 편인데 다시 말하여 주정이 심하셨는데 증조모께 술더 가지고 오라고 투정을 하시는 바람에 어느날 시어머님이 새 며느리더러 이러이러 시키셔서 심부름으로 17살되신 나의 할머니가 술 대신에 쌀뜨물을 걸직하게 마련 하셔서 가져다 드리니 증조부 께서 여러차례 맛이 좋다고 드시곤 주정을 더 심하게 하셨다 한다.
이튿날 일찍 증조부 께서는 그때 까지 생존하신 연세 많으신 나의 고조모님의 부름을 받아 야단을 맞으셨다고 하셨다.
"몸을 생각하지 않고 과음하고 주정까지 한다" 고 야단을 맞으시곤 증조모께 다가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 어제 내가 주정을 많이 했나?" 라고 물으시길래 증조모 말씀이
" 내 보다 보다 쌀뜨물 마시고 주정하는 양반 처음 보았네." 하고 말 대답을 하시니 증조부 께서 말씀하시길
"아! 어제 저녁 새아기(나의 할머니)가 나중에 가지고 온 것이 쌀뜨물 이었단 말이야? 어쩐지 내 주정이 좀 뜨더라!"
하셔서 어른 앞에서 웃지도 못하고 장독대 뒤로 혼자 나가셔서 한참 동안 웃었다 하시는 경험의 말씀을 재미 있게도 해 주셨던 기억도 난다.
한여름 저녁땐 마당에 멍석을 깔고 할머니 옆에 누워 타 들어 가는 쑥으로 된 모기 불 연기를 쐬어 가며 은하수를 쳐다보며 이건 뭐고 저건 뭐고 하면서 초가 지붕 위에 달린 둥그런 참 박위로 날아 다니는 박풍도 쳐다보며 설악산 앞산 송암산 아래 동네에서 할머니와 나는 그렇게 지나며 부모님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계속)
1950년 6월 초순쯤 아침에 등교해 보니 학교 교사 건물 양쪽으로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집채보다 훨씬 커 보이는 탱크가 그물(위장망)에 씌워져 자리 잡고 있었다.
장난꾸러기인 우리들은 호기심이 생겨 탱크 가까이 접근해 구경도 하고 만져 보려고 했는데 선생님들이 얼씬도 하지 못하게 엄히 말씀하여서 멀찍이 떨어져 신기한 듯이 쳐다보기만 하였고 그 근처에서 서성이면서 놀았다.
그때 탱크의 크기가 너무 크고 앞의 대포알 나가는 포신이 참으로 길기도 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크고 무서우면서도 멋있어 보이는 것은 처음 이었다( 사실은 8.15 해방 될 때 함경북도에서 소련군 탱크도 보았는데 나이 어려서 그리 명확히 기억되지 않음).
6.25가 나기 3일전 즈음 학교에 등교해 보니 홀연 탱크가 없어졌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알지 못 한다. 그냥 없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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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당일엔 우리 마을에선 전쟁이 난줄 몰랐다. 3일 쯤 지나서 부터 인가 날마다 예쁘신 여자 담임 선생님은 교실에서 우리를 앉혀놓고 칠판에 남조선 지도를 그려 놓고 분필로 화살 표식의 줄을 그어가며 목청을 높이며 흥분한 목소리로 신나게 말씀 하셨다.
"어린이 동무 여러분! 우리의 용감한 인민군 전사들이 위대하신 어버이 김일성 대원수 우리들의 장군님의 드높으신 영도로 지금 남조선 해방 전선에 뛰어 들었어요. 며칠전 여러분이 학교 양 옆에 있는 땅끄를 보았지요? 바로 그 땅끄를 앞세우고 우리 용감한 인민군 전사들이 남 조선을 해방 시키려고 힘차게 내려가고 있어요."
하면서 서울도 해방, 서해안 경기도 충청남도 전라도 쪽으로 모두 해방, 칠판에다 분필로 많은 줄을 그어가며 나중엔 중부지방 강원도 동해안 해안을 따라 가며 해방 시켰다고, 신나도 그렇게 신나게 설명하는 담임 선생님은 여느 때와 아주 달랐다.
말 끝마다 '자! 동무들 모두 박수!' 하면 그 때 마다 우리 반 급우들은 야! 소리를 지르며 박수 치느라고 덩달아 신나서 야단 들이었다. 쉬는 시간에 밖엘 나가 보니 매일 같이 전교생의 얼굴 들이 설 명절에 웃음 가득한 그런 얼굴 표정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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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호칭이 동무 였다.
할아버지동무, 아버지동무, 할머니동무, 아저씨동무, 선생동무,사람호칭만 나오면 그다음에는 동무라는 말을 반드시 붙이도록 교육받았다. 처음엔 사람들이 어색해 하였으나 공산주의 간부들과 신봉자 들은 이 호칭 부치는데에 아주 철저하였다.
그로부터 우리 동네에서는 가끔 저녁부터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인민 위원장 주도로 인민 재판이 벌어졌다. 돌아 가신지 오래 되셨지만 그때 우리 집 아랫집 J D 아저씨도 인민재판을 받고 전신을 두들겨 맞고 한쪽 다리를 크게 다쳐 끌다 시피 하고 다니셨다.
이유는 그 아저씨의 형님께서는 참으로 동네 의인으로 친절하시고 자상 하시기로 소문나신 아저씨 이셨는데 얼마 전에 남쪽 강릉 쪽으로 공산 치하를 피해 월남 하셨는데 동생 되시는 착하디 착하신 분을 한 동네 성씨 다른 집안 패거리가 재판권도 없는 자들이 인민재판이란 명목으로 뭣도 모르고 모여든 동네사람들 앞에서 몽둥이로 여러 사람이 두들겨 팬 것이다. 인사 불성이 된 그 착하신 아저씨는 그날 저녁 들것에 실려 집에 모셔 졌다. 그댁 가족들이 울고 불고 야단이 났었다. 한 동네에서 일어난 일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당시 이런 일이 인근 동네에서 비일 비재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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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가 지나면서 철없는 우리 친구들은 남쪽 해방이고 뭐고 다 잊어 버리고 학교 수업이 끝나면 개울가로 산으로 몰려다니며 놀러 다니기만 하였다.
그해 여름방학 때의 일이다. 한번은 내 또래 동네 친구들과 노는데 나이 두세 살 많은 형들 몇이서 우리들 보고 따라 오라고 하였다. 우리 동네 윗 개울 동네가 있었는데 집안 아저씨가 과수원을 하고 계셨다.
멋도 모르고 따라 갔는데 그 형들이 과수원 쪽으로 데리고 가더니만 우리 보고 개울가에서 망을 보라고 하고선 그때 한참 잘 익은 복숭아 서리를 하러 울타리 밑을 기어들어 가는 것 이었다. 허락도 없이 남의 물건을 따는 것을 처음 보는 나는 갑자기 가슴이 후 당당 뛰기 시작 하였다.
망이고 뭐고 다 걷어치우고 개울가 커다란 돌 바위 뒤에 숨어 오금도 못 펴고 납작 엎드려 있는데 용감한(?) 개구쟁이 형들이 훌떡 벗어 제친 상의 에다가 복숭아를 수북 하게들 따 왔다.
나도 한 개를 배당(?) 받았는데 다른 친구들은 히히덕 대며 잘도 먹었는데 나는 아까보다 가슴이 더 뛰어 한 입 물어 보았을까? 그 뒤로 도저히 먹지를 못하고 그저 얼이 빠져 멍청히 들고만 있었다.
모진 훈련(?)을 해보지 못한 결과 라고나 할까? 홀로 집에 오는 도중 나는 그 복숭아를 논 한가운데 팔 매질을 하여 멀리 던져 버렸다. 그런데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복숭아 맛이 자꾸 생각이 났다. 그냥 가지고 올걸, 아니지 던져 버리기를 잘했어 하고 뒤죽박죽 생각을 하다가 정면 돌파를 하자는 생각이 반짝 났다.
밖에 나가셔서 아직 돌아 오시지 않는 할머니 몰래 윗방의 쌀독에서 보리쌀 세 사발(지금에 생각하면 너무나 작은 분량 이었다) 가량을 자루에 넣고 J D 아저씨 댁으로 복숭아와 바꾸려고 한참 올라갔다. 마당 문을 들어서서 아저씨! 하고 부르니 마침 마당에 계시던 아저씨가 네가 웬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아저씨에게 '아저씨! 제가 복숭아가 먹고 싶어 왔는데 이 보리쌀과 복숭아를 바꾸어 주세요’ 라고 말씀 드렸다. 세상에 나서 나는 처음으로 거래 흥정을 해 본 셈이다.
한참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아저씨가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야! 화곡아! 너 참 잘 왔다’ 하시더니만 보리쌀이고 뭐고 할 것 없이 복숭아 나무 밑으로 데리고 가서 자루 가득히 끌고 갈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잘 익은 복숭아를 따 넣어 주셨다.
그리고 ‘네 아버지가 고향에 온 다음해 이 복숭아 나무 전지를 너무 잘 해주어서 이렇게 열매가 잘 달리는데 한번도 은혜를 못 갚았는데 오늘 네가 왔구나’ 하시면서 할머니에게 가져다 드려라 하셨다.
내 생각에 한 너 댓개 정도를 생각했는데 보리쌀은 그대로 자루에 두고....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고맙다는 인사 꾸벅 하고는 그냥 부자 된 기분으로 그 무거운 복숭아가 들어있는 자루를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신이 나서 집에 돌아왔다. 할머니는 아직 밭에 일하러 나가셨다가 돌아오시지 않았다.
그런데 또 한 가지 큰 고민에 빠졌다. 할머니 몰래 보리쌀을 퍼낸 것 때문 이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말씀 하신 것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든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가르치는 말을 너무나 잘 이행하는 순진성을 가지고 있기에 나도 그러 하였으리라.
저녁에 돌아오신 할머니에게 나는 숨김없이 이실직고 하였다. 형들이 남의 집 복숭아를 몰래 따 먹으러 가는데 따라 갔다가 일어난 일과 돌아온 얘기와 복숭아 먹고 싶어서 이러 이러 하였노라고 하나도 빼 놓지 않고 자초지종을 다 말씀 드리고 '그랬더니 이렇게 복상(복숭아) 을 많이 주시데요' 하였다.
다 듣고 나신 할머니가 기특 하다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보시더니만 나를 와락 끌어 안으셨다. 숨이 막힐 정도로 꼬옥 껴안아 주시었다. 복숭아를 드시며 할머니는 원산에 가 계신 아버지를 생각을 또 한번 하셨으리라.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시대엔 예로부터 전해오는 관습으로 어느 정도의 서리 행위는 청소년들을 위하여 숨통을 트여 주도록 하는, 사회적으로 왼쪽 눈 감고 오른 쪽으론 실눈을 뜨고 못 본체 했었다고 하였다.
주인이 때에 따라 그 광경을 보았을 때에도 멀리서 헛 기침하며 어험! 이놈드을! 들릴듯 말듯 소리쳐 그냥 도망가게 내버려 둔다라고 한다. 적당히 묵인하는 관습 즉, 일종의 교육적인 배려를 염두에 둔 것 이였다고 한다. 그들 어린 청소년들이 바른 교육을 받고 그런 행위를 스스로 하지 않을 때 까지 참고 기다려 주는 사회 풍습이라고나 할까. 어떤 면에서는 미풍 양속이라 볼 수도 있는데 요즈음 같으면 큰일이 난다.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 이후 할머니는 손자 자랑 하실 일이 있으면 어디 가시던지 가끔 그 복숭아 얘기를 꺼내셨다. ‘얘가 그런 애 라우!’ 하시면서... 80세가 넘으신 뒤 내가 교직에 있으면서 30이 넘어 장가들어 아이를 둔 뒤에도 그러 하셨다. 그때 마다 나는 그저 어색하기만 하였다.
그해 8월초 남쪽 읍내에 있는 양양군청의 직원들이 북쪽 우리 마을로 피해 와서 동네 집 집 마다 자리 잡고 군청 사무를 보았다. 군청이 도심지로부터 시골 구석으로 피신해 숨는 꼴 이었다. 마을 뒷산 구석 마다 방공호도 많이도 파 놓았다. 분위기가 이상하였다.
남조선 해방시키러 나갔다는 이야기도 별로 신이 나지 않은 것 같았다.
또한 우리들도 학교를 나오지 말라고 휴교령을 내려 학교도 쉬고 매일 놀기만 하였다. 이상한 일만 자꾸 있었고 동네 인민위원장 여맹위원장등 새빨간 사람들이 웃지도 않은 얼굴로 성난 사람처럼 다녔다. 마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고 우리 집안 친척 어른들과 나이든 형들은 마음 속으로 무언가 좋은 것을 기다리는 그런 분위기였다. (계속)
양력 8월 하순 이였던것 같다. 나는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윗 개울 지소 건너편 개울에서 미역( 물놀이)을 감고 있었다. 정오가 조금 지났을까 하였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우뢰와 같은 소리가 났다.
우리 모두가 그 소리에 놀라 2.5km 즈음 떨어진 강현 역 쪽(지금의 속초공항 아래 바닷가 쪽) 을 내려다 보았는데 엄청나게 큰, 이제 까지 처음 보는 비행기(B 29)한대가 바다 쪽으로부터 강현역 상공 하늘을 배회 하더니만 강현 기차역 상공에 낮게 내려와 시꺼멓고 커다란 쌀 가마니 정도의 길 다란 물체를 몇번 떨어 뜨리고는 바다 쪽으로 다시 유유히 날아가는데 떨어지는 시꺼먼 물체가 우리 육안 눈짐작으로 10m 정도 보이더니 홀연 없어지면서 역 주변에 갑자기 연기가 풀석 하고 일더니만 조금 있다가 벼락 치는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우리가 노는 개울 뒷산 송암산이 흔들리는 듯 천둥치는 소리와 흡사 하였다.
우리들은 너무 놀라 금방 죽을 것 같아 옷이고 뭐고 집는 둥 마는 둥 홀딱 벗은 채로 맨발로 도망을 치기 시작하였다. 앞에 뛰는 형들이 비탈길 야산으로 한 100m 쯤 떨어진 방공호로 치달리는데 모두 옷을 벗어 한손에다 거머쥔 채로 20여명의 사내 애들이 홀딱 벗고 줄지어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치달리니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날 일이나 그때는 너무 소중한 줄행랑 이었다.
모두 무서워 컴컴한 굴 안으로 씨익 씨익 숨을 몰아쉬며 들어가서 마음을 진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둠컴컴한 방공호 안쪽으로 들어가던 형들이 또 한번 놀랬다. 우리도 웅성거리며 그 안쪽을 보니 길옆 방공호 바로 아래에서 미역 감던 윗동네 누나들과 우리 또래 여자 애들이 먼저 피신했는데 우리 일행이 뒤미처 들이 닥쳤기 때문에 서로 또 한번 이번에는 어색하게 놀랬다. 밖으로 나갈 수 도 없고 옷도 챙겨 입지도 못하고 서로 웅크리고 눈만 멀뚱거리고 외면하고 있는 모습을 지금 다시 생각하니 배꼽을 잡고 웃을 그런 장면이었다.
한동안 진정이 된 뒤 우리도 굴 밖의 기미가 조용해 밖으로 나갔고 또 동네에선 그동안 조용히 숨어 있던 어른들이 비행기가 날아 간지 한참 지나서야 밖으로 나와 자기 집 아이들을 목청 높여 불러 대느라고 온 동네가 소란하였다. 강현 역사는 계속 타고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는데 우리들은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 지나 보니 역으로 들어가는 강현천 기차 다리가 폭격으로 끊어 졌고 역사는 흔적도 없어졌고 역 안에 하늘 같이 쌓아 놓은 마초더미(말먹이 풀) 등 전쟁 지원용 군수물자들은 삽시간에 흔적도 없이 다 타버렸다. 함경도에서부터 기차로 실어온 전쟁 지원물자들이 몽땅 다 타버린 것이라 하였다.
그날 저녁 할머니는 나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셨다. 원산의 내 아버지 어머니와 동생들이 죽었을 것 같은 무서움 때문이라 하셨다.
가끔 하늘에 검정색 정찰기가 날아 다녔는데 우리는 그 정찰기를 '뿌웅' 하고 소리를 내며 날아 다닌 다고 해서 방구 비행기라 하였다. 그런데 그 방구 비행기가 제일 무서웠다. 폭격기 보다도 더 무서워 하였다. 왜냐하면 그 비행기가 떳다하면 곧이어 공격용 쌕쌔기가 순식간에 날아오기 때문이었다.
방구 비행기가 뜨면 2, 3분도 못되어 어디서 오는지 엄청나게 빠르고 샤아악 하는 엄청난 소리를 내는 쌕쌔기(제트기)가 몇대 날아와 날아와 양양 읍내 상공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폭격을 하고 어떤 때는 속초 북쪽으로 날아 가는데 빠르기가 번개 같았다.
우리 마을 논에도 폭탄을 떨어 뜨렸는데 땅에서 터지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땅 속까지 흔들려 방공호 땅굴 천정에서 흙 부스러기가 떨어질 정도 였다. 비행기가 가고나면 우리들은 그 폭탄 이 떨어져 땅이 넓고 깊게 움푹 패인 곳으로 달려가 구경하며 폭탄의 위력에 놀라기도 하였다.
9월 중순 이후 우리 동네에선 매일 같이 커다란 구경거리가 생겼다. 남조선 해방시키려고 씩씩하게 나갔다고 하던 인민군 전사들이 초라한 패잔병이 되어 미군의 공습을 피해 해변가 큰 대로로 퇴각하지 못하고 송암산 쪽으로 2km 떨어진 화일리 에서 회룡리로 이어지는 우마차가 다니는 농로를 따라 후퇴하고 있었는데 우리 동네를 가로 질러 퇴각하는 모습을 보는 그런 구경거리였다.
한 일주일도 넘게 걸렸다. 더러는 말도 탄 남 여 장교들도 보였지만 대부분 딱쿵 총과 따발총을 거꾸로 멘 그야말로 초라한 거지같은 군대 도보 행렬을 구경한 것이다. 부상병이 어찌나 많은지 그 처참한 모습은 어린 우리들도 무섭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스러웠던 생각이 난다. 행군 중 이었는데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며 들것에 실려 가는 군인도 부지기수였다. 한쪽 팔이 없는 군인, 양쪽 모두의 팔이 없는 군인도 많았고, 들것 위의 군인들은 다리가 없는 군인들 이였다. 한쪽 다리를 다친 군인들은 엉성한 목발을 하고 걸었고 더러는 여자 군인들이 배가 아주 불러 곧 출산 할 때가 되었다고 동네 누나 들이 쑤군거렸다. 나보다 키가 조금 클가 말가 하는 어린 군인이 자기 키 보다 더 긴 장총을 질질 끌며 가는 모습도 많았다. 한 마디로 처절한 지옥 행렬 같다고 동네 어른들이 말하였다.
동네 누나들과 아주머니 들은 물동이를 가져다 지나가는 인민군인 들에게 물도 떠 주곤 하였다. 인민재판을 받아 몸이 성치 않은 아저씨들과 동네 아저씨들이 화가 나서 아주머니들과 누나들을 향해 ‘왜 그 깐 놈들에게 무슨 물을 떠다 주느냐’ 고 야단을 치기도 하여 물 떠다 주었던 누나들은 훌쩍 훌쩍 울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들과 야단 맞은 누나들은 그래도 어린 동생들을 등에 업고 다음날 점심 먹을 때만 제외하고 어떤 때는 점심도 걸러 가며 하루 종일 길가에 서서 패잔병 행열을 구경하는 것이 일 이었다. 이 행렬이 지나가고 며칠은 조용하였다.
9월 말경 동네 아저씨들이 쑤군 대며 국방군이 곧 들어 온다고 하며 해방이 된다고 하였다. 10월이 되기 바로 전 날인가, 한 밤중에 아래 동네에서 얼마전 폭탄이 터지는 소리에 놀라 충격을 받아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하는 나이 많은 동네 형이 있었는데 전쟁이 우리 동네에서 일어 난다고 갑자기 고함치며 다니는 바람에 위 아래 가운데 동네 할 것 없이 마을 사람들이 한 군데 몰려 갑자기 엄청난 피란행렬이 되어 아랫 동네 절벽 아래 넓은 벌판에 모두 모여 밤새 도록 숨어 덜덜 떨며 뜬눈으로 밤을 새고 아무 일도 일어 나지 않아 다음날 모두 집으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
(계속)
다음날 10월 1일 오후 동네 아저씨들이 이집 저집 다니며 알려 왔다. 내일 물치 장거리에 모두 국군을 환영하러 나간다고 하였다.
10월초 즈음 국군이 양양을 거쳐 속초를 탈환하고 계속 북상하여 고성 통천을 차례로 탈환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을 때 마다 할머니와 나는 원산에 계시는 부모님과 어린 두 여동생이 그래도 무사하기만을 바랐다. 할머니는 집 뒤 장독간 옆의 돌 바위에 하얀 사기그릇에 정화수를 떠 놓으시고 시간 날 때 마다 밤낮으로 두 손을 싹싹 빌으시며 치성을 드리셨다. 밖에서 아버지에 대한 불길한 소식만 전해 들으신 날은 몇 시간씩이나 두 손을 모아 싹싹 부비시며 누구에게 하시는지 그저 ‘무사하게 해 주십소사’ ‘무사하게 해 주십소사‘ 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갑자기 열이 오르는데 나는 금방 인사불성이 되었다.
한 열흘도 넘게 나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전혀 모른다. 방공호에 있던 동네 사람들이 나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친척이고 뭐고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유행병 앞에는 인정도 사정도 없는 것이다 . 할머니와 나는 방공호에서 쫓겨났다.
할머니는 다 늘어진 나를 업으시고 길가에 있는 우리 집은 위험하여 내려가지 못하고 방공호 아래에 있는 큰 쉴집(이댁 큰 형님 내외가 공산주의자로 이북으로 피해 갔었음) 대청마루 밑에서 자리하였다. 그 속에서 웅크리고 숨어서 불도 피우지 않은 상태에서 할머니는 나를 간호하셨다. 보름 가까이 오들오들 떨고 지냈으니 이왕 정신을 못차리고 늘어져 투병하는 나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간호 하시는 할머니의 고생은 오죽 하시었으랴. 할머니께서는 당신 생명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오직 손자 생명을 살리시려고 온갖 정성을 다하셨다.
전쟁 통에 무슨 예방약이고 치료약이 있었겠는가? 전통 한약재도 하나도 없는 그때의 상황이다. 생짜로 앓는 수밖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야말로 대책 없이 죽지 않으면 살기다. 방공호에 있는 동네 친척들은 얼씬도 상대도 하지 않는다. 감염되면 큰일이기 때문 이다.
열흘이 지난 어느 날 아침 나는 열이 서서히 내리기 시작하였다. 이때 할머니가 하얀 무를 잘게 썰어 빨간 실고추를 띄워 만드신 물김치 국물을 내 입에 떠 넣어 주셨다. 나는 그 이후 지금까지 평생 그렇게 시원하고 입맛이 돋는 인상적인 물김치를 두 번 다시 만나 볼 수가 없다.
서서히 회복하는 나를 보시던 할머니는 매일 우시다 다 말라 버리셨을 눈물을 기쁜 마음으로 다시 흘리시며 '대청화곡아! 이제 됐다! 네가 살아 났으니 내가 네 애비 에미에게 너의 손목을 넘겨 줄 수 있게 되겠구나! 이제 됐다! 이제 됐다!' 하시면서 기뻐하시던 그 모습이 떠오른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할머님께서는 그 무서운 장티프스에도 끄떡이 없으셨다. 지극하신 사랑의 일념에는 맹위를 떨치는 전념병도 감히 우리 할머님을 범접치 못하였으리라.! 다시 얘기지만 할머님께서는 9남매를 낳으셨는데 8남매 자식을 모두 홍역 등으로 잃으셨고 심지어는 하루 저녁에 홍역으로 어리신 두 아드님을 함께 잃으시는 인생을 사셨던 분이셨다.
51년 그 해가 할머니의 회갑 되시던 해이셨다. 그 통에 무슨 회갑이고 설날이고가 있겠는가. 장티프스를 거뜬히 이기고 일어선 나를 보고 동네 친척들은 우리를 다시 방공호 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장티프스를 앓고 나면 남자이고 여자이고 모두 머리털이 몽땅 빠지는데 이상하게도 그 이후 나의 머리털은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
전황은 다시 국군의 진격으로 인민군들은 우리 마을에서 완전히 북으로 물러갔다. 4월 중순 엄청나게 많은 국방군이 우리 동네 앞 관덕정 공터 넓은 곳에 주둔하기 시작하였다. 개울 말 정승 골 넘어가는 길 왼쪽에 있는 작은 서당집의 커다란 기와집에 사령부 사무실이 들어섰다. 우리 동네 소금 재 고개 너머 북쪽 넘은들, 설악산에서 내려오는 쌍천을 경계로 도문 속초 쪽으로는 인민군이 주둔하여 쌍방이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양상으로 전황이 형성 되었다.
나는 지금도 9월 고향 선산에 벌초하러 갈 때 마다, 다 성장하고 군 복무도 오래 전에 마친 내 자식들과 며느리들을 데리고 소금재 고개를 넘어 차를 몰고 달리다 멈추어 세우고 모두 내리게 한뒤 내 아이들에게 당시 이 벌판 양쪽에서 치열하게 총을 쏘며 대치하던 때를 떠 올리며, 옛날 할머니가 나에게 옛날 얘기 하신 것처럼 나도 자식들에게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그때의 사실들을 들려 주곤 한다.
매일 보는 일인데 국군들이 커다란 밥통에 밥을 담아 두 사람이 앞 뒤로하여 어깨에 메고 뒷산 참호로 나르던 모습도 많이 보았는데 어떤 때는 밥을 나르던 군인 둘이서 무슨 의견차이가 있었는지 싸움이 붙어 커다란 밥통은 길 옆에 내려놓고 피가 나도록 서로 주먹질을 하던 모습을 친구들과 같이 구경했던 때도 생각이 난다. 같은 국군 끼리인데도 말이다.
우리 동네에도 집집마다 군인들이 주둔하였다. 우리 집 아래 위집으로 일개 소대원이 같이 있었는데 젊은 아주머니들과 누나들은 모두 군인들을 피해 따로 모여 다른 집에 있게 했고 동네 아저씨들이 누나들과 젊으신 아주머니 들이 다칠 새라 신경도 많이 썼고 마을 비상이 걸리다 시피한 기억도 난다. 나는 그 때는 잘 몰랐으나 커서야 그 정황을 짐작했다.
분대장들은 실탄이 들어있는 권총을 허리에 차고 다녔는데 분대장이 일등중사도 있었고 이등중사도 있었다. 내가 군에 입대 했을 때를 기준으로 하면 병장 상병에 해당되는 사병 계급인데 그 분대장에게도 전시에는 총살권이 있다고 무시무시한 말을 하여 어린 우리들은 그 권총을 보고 겁이나 은근히 두려워하였다.
그때 어린 나이지만 군인들의 눈초리를 유심히 보았는데 커서 생각해 보니 그 때의 군인들 눈빛은 보통이 아니었다. 눈이 벌겋게 충혈 되었었고 빛나기가 샛별 같았다. 얼굴에 살기가 등등하였다고 말할 수가 있다. 하기야 그 무서운 전투를 수도 없이 겪으며 무수히 총을 쏘며 밤낯 잠도 못자고 때로는 한 밤중에 양쪽 군이 맞 부닥쳐 총칼로 치고 받는 육박전 까지 수없이 많이 겪었고,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인 것을 무용담으로 자랑하고 다니면서, 사람이 많이도 죽어 널려진 시체벌판, 살육의 현장을 수도 없이 거치면서 동해전선 우리 마을까지 올라오고 내려가면서 이제 다시 주둔하고, 뒷산 너머에서 계속해서 적군과 싸우려고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그 들이니 과연 그 눈빛이 어떠했겠는가 짐작이 가는 일이다.
매일저녁 암호가 군인들의 암호가 바뀌고(나는 군인들의 암호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한 밤중에 군인들이 앞에 있는 상대에게 암호를 물었는데 대답하지 못하면 군인이고 민간인이고 가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즉시 발사하여 사살 한다고 하였다. 너무나 무서운 공포 분위기 이었다.
옛날 시골 농촌 분위기는 끼니때가 되면 집집마다 밥을 짓느라고 부엌 아궁이에서 나무를 태워 초가집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일제히 하늘로 올라가는데 동시에 약속 한 것처럼 이집 저집에서 하늘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 모습은 요즈음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농촌 풍경의 한가지 모습이다. 때마다 굴뚝에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고 어느 집은 비어 있고 어느 집은 손님들이 많이 왔다는 것을 가름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군인들이 주둔하고는 산 너머 넘은들 벼락바위 쪽의 적군에게 노출된다고 하여 연기도 제대로 피우지 못하게 하여 한동안 집집마다 또 다른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우리 집에도 일개 분대가 숙식을 같이 했는데 나는 아저씨들이 쉬는 시간에 전투 무용담을 할때는 아주 재미있게 듣곤 하였다. 어느 전투에서 산 고지 참호 속에서 산 아래로부터 공격해 올라오는 적들과 치열하게 전투를 하는데 참호 속에서 아래쪽으로 사격을 하던 아저씨가 갑자기 머리를 숙이고 엎어지는 것을 본 다른 분대장 아저씨가 보기에 총에 맞아 죽은 것 같아 순간 몸을 날려 바람같이 빠르게 그 넘어진 아저씨의 등위로 뛰어 내리니 엎드렸던 아저씨가 아야! 하고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얼굴을 쳐다보니 멀쩡한 상태여서 씨익 한번 서로 웃고 다시 고지 아래로 사격을 하면서 그 전투를 이겼다고 하였다.
그때 엎드려서 아야! 하고 비명을 지른 아저씨가 분대장 아저씨에게 말하기를 ‘제가 총알을 재 장전 하느라고 엎드린 사이에 분대장님이 제 등 뒤에 떨어지는 바람에 등 뒤에서 바위가 무너지는 줄 알고 너무 놀라 소리를 질렀다고 하니 분대장 아저씨가 ’네가 죽은 줄 알고 네가 쏘는 자리가 비면 큰일이기에 그 자리를 지키려고 몸을 날려 급히 뛰어 총을 쏘려 하였다' 고 말 하면서 '아! 이 새끼가 살아 있잖아!" 하면서 여러 분대 원들 앞에서 껄껄거리며 손 벽을 쳐 가면서 서로 웃는데 철없는 나는 그 무용담이 그저 재미있게만 들렸었다.
총알이 비 오듯 하는 싸움터에서 여기 저기 옆의 전우들이 쓰러지는 그 가운데에서 이런 한가한 농담이 나오다니... 그 전투에서 이겼으니 지금 그러한 얘기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니 인생이란 의미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게 된다.
내가 1962년도 초가을 육군에 입대하여 중부전선 산악지대 최전방에서 총을 들고 참호속에 엎드려 11년전 그 때의 생각을 해보니 생명이 경각에 달리고 사람 죽이는 것을 파리 잡는 것보다 더 쉽게 생각하는 그 끔찍하고 슬픈 때에도 그런 웃음이 있었구나 하고 회상해 본 적이 있었다.
4월 하순 인민군이 또 쳐 내려 온다고 하였다. 이번에 마을에 머물러 있으면 인민군에게 다 죽는다고 하였다. 우리 마을 과 인근 마을 여기저기에서 이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피란 보따리를 또 싸기 시작 하였다. 이번에는 대대적으로 보따리를 싸고 있었다.
나의 할머니는 이제 피난가면 영영 고향에 돌아 오지를 못 것이라 하면서 장정들도 지고 가기 어려운 무거운 피난 짐 보따리를 싸셨다. 동네 한 아저씨가 할머니더러 ‘아주머니! 이렇게 무거운 것을 어떻게 지고 가시려고 그러시느냐’ 고 하시면서 짐을 줄이라고 얘기하였다. 그러나 나의 할머니는 그 말을 듣지를 않으셨다. 나도 조그마한 배낭에 보리쌀 몇 되 옷가지 몇 점 정도를 넣었다.
5월초 강현 일판에는 모든 농촌 사람들이 남쪽으로 피란을 떠났다. 넓은 길 가득히 피난민 행렬은 끝이 없이 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하였다. 소달구지에 짐을 실은 집들은 빨리도 지나갔고 우리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무거운 짐을 지게에 지고 머리 꼭대기에 이고 손에 들고 걸어서 내려갔다.
수염이 길고 멋있게 나시고 우리 동네 기율 담당 격이신 J R 아저씨께서는 장티프스에 걸려 늘어져 고생하는 그댁 막내아드님 J S 형님(나보다 네 살 위인 형님, 우리 또래가 제일 좋아한 동네형님)을 지게에다 싣고 지고 내려 가셨다. 우리가 내려가면서 길 양쪽에 있는 집안을 들여다 보니 이미 피란을 떠나서 텅텅 빈 집들 이었다.
양양 읍내 쪽으로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고 벌써 한계령 아래 오색 쪽 으로부터는 인민군이 내려 온 것 같아 언제 총질이 날지 몰라 위험하다고 하여 바닷가 옆 낙산 해수욕장을 지나 남 대천 하류 백사장에서 갈벌 이라는 동네를 건너가기 위해 우리 피란민 행렬은 잠시 멈춰 쉬면서 점심을 해 먹기 시작하였다.
지금의 연어가 올라오는 남 대천 하류의 물 깊이는 어른의 가슴정도 되었고 물살은 그다지 세지 않은 것으로 기억된다. 밥 보따리를 풀어 모두 삐잉 둘러앉아 밥을 먹으려는데 하필이면 그때 나는 오줌이 마려워서 상류 쪽으로 한 2, 30 m 쯤 떨어진 곳으로 가서 오줌을 누는데 오줌 떨어지는 곳을 내려다 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너무 놀라고 무서워 기절을 할뻔 하였다. 숨도 쉬지 못하고 가슴이 콱 막히는 그러한 심정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