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한 2000년대 들어
미국 화랑가에서 가장 잘 나가는
한국인 작가는 Nikki S. Lee이다.
몇년 전 <월간미술>에 글을 쓰려고
뉴욕에서 활동중인 젊은 한국 화가들을
여럿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니키가 최고라고 했다.
나는 니키가 뉴욕 첼시의 스타로
막 떠오르던 때
뉴욕 첫 개인전에서 만나 인터뷰했었다.
1999년 8월이었다.
당시 나는 회사에 일주일 휴가를
내고 뉴욕에 놀러갔었다.
뉴욕 문화예술에 정통한 절친이
있어서 뉴욕에는 놀러만 가도
좋은 기사거리가 늘려 있었다.
첼시든 브로드웨이든 슬슬
돌아다니기만 해도 공부가 되었으니
휴가나 출장으로 수시로
들랑거리던 참이었다.
99년에는 운이 좋았다.
이창래 신간 <제스추어 라이프>가
막 뜨고 있었다.
그보다 더 마음 설레게 한 것은
한국인 신인 예술가였다.
첼시 갤러리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여는
신인에게 <뉴욕타임스>가
프리뷰를 파격적으로 실을 정도였으니까.
여러 차례 그룹전을 통해 인정을 받아
첼시의 갤러리에 '전속' 되어
첫번째 개인전을 연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사건이 아니었다.
중앙대 사진학과 졸업생으로서
FIT에서 공부했다는 것도 흥미로웠고,
무엇보다 작업이 대단히 새롭고 신기했다.
니키는 찍는 사진가가 아니라 찍히는 작가였다.
사람은 환경에 지배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환경에 따라 정체성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특정집단에 들어가 일정 기간 살면서
증명해 보이는 예술이었다.
사진은 그 증거물이고.
무엇보다 에너지가 넘쳤다.
내 친구의 인맥을 통해 급히 니키를 만나
2시간 정도 인터뷰했고, 개인전 오프닝에도
갔었다. 함께 간 친구가 "저 사람은 누구,
저 사람은 누구" 하고 손으로 가리키는데,
나로서는 깜짝 놀랄 만한 인물들이었다.
이름만 듣던 다수의 미술 평론가와
MoMA 큐레이터까지 와 있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신인의 첫 개인전이
얼마나 주목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자리에 내가 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뿌듯했다.
한국 사람은 거의 안 보였고,
한국 기자는 물론 나 혼자였다.
회사에 돌아와 위에 적은
내용들을 열심히 설명했다.
기자는 많고 지면은 좁아서
늘 지면싸움이 벌어지는 곳에서
무려 4쪽이나 얻어냈다.
감격했다.
아마도 편집국장한테 가서
흥분해서 큰 소리로 썰을 풀었을 것이다.
"놀러가서 일했으니 지면 내놔라"라고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니키 S.리에 관한
기사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나왔다.
워낙 파격적으로 출발했고,
내용이 탄탄해서, 이후 니키는
뉴욕 미술계 유력 작가로 발돋움했다.
이후 광주비엔날레에 초대되어 왔다가
우리 회사에 찾아와 길게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난다. 기사를 썼는지는 모르겠다.
몇년 전 뉴욕에 드나들면서
풍문으로만 듣다가 페이스북에서
친구로 만나,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었다.
나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고마웠다.
갑자기 툭 튀어나온 아래 사진은 니키가
20년 전 첫번째 개인전에서 비디오로 찍어둔
영상을 디지털 파일로
정리하다가 발견했다며 내게 보내온 것.
내가 나를 보는 데도 참 낯설다.
평소에는 안 그러는데, 티셔츠 단추를
답답하게 끝까지 꼭 채운 이유는
오프닝에 걸맞는 옷을 입고 가지 못해서
그랬을 것이다. 아침에 NYT 기사 읽고,
점심쯤 니키 인터뷰하고(바쁠 때 시간 내줘서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저녁에 개인전 오프닝에 갔으니
옷을 빌릴 시간조차 없었다.
목줄은 아마도 우리 사진부에서
빌린 카메라.
내 기자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뿌듯한 장면 가운데 하나이다.
아래는 옛 <시사저널>에 실린 기사.
나 스스로 중요하다 싶은 기사들은
스크랩을 해서 지금도 가지고 있다.
읽어보니 참 열심히도 썼다.
이렇게 신인 시절 내가 썼던 예술가가
스타가 되면 속된 말로 기분 째진다.
물론 내 기사 때문에 스타가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아래부터는
1) 비염, 축농증
2) 분노조절장애, ADHD
3) 여드름과 아토피 등 피부병
4) 만성피로 원기(에너지) 회복
5) 다이어트와 성기능 향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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