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잠실 롯데월드 뒷쪽의 석촌호수(서호) 한모퉁이에 낡은 비석이 쓸쓸히 서 있다. 1639년(인조 17) 조선이 병자호란 때 굴욕적으로 항복한 뒤 세운 `청태종공덕비`, 일명 `삼전도비`이다.
부끄러운 역사의 증거인 만큼 감추고 싶었다. 비석은 허물어 파묻고 복구하기를 반복했다.
삼전도비는 청일전쟁 중인 1895년 고종의 명으로 땅에 묻혔다가 일제강점기 때 다시 세워졌다. 광복 후 주민들에 의해 다시 매립됐지만 1963년 홍수로 모습을 드러냈다. 2007년 붉은 페인트로 훼손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고전은 고적과 유물에 대한 우리가 잘 모르는 일화를 소개한다. 인조 때 대제학과 3정승을 지낸 이경석(1595~1671)은 이 삼전도비문을 써 조선선비들에게 지탄을 받았다. 작자 미상의 시화집 <좌계부담>에 의하면, 이경석은 아이러니하게도 척화의 상징이었던 청음 김상헌(1570~1652)의 수제자였다.
그런데 이경석은 인조의 총애를 받아 스승을 제치고 항상 먼저 승진했다. 이경석은 인조 23년(1645) 김상헌에 앞서 우의정에 오른다. 왕과 주요 중신들이 함께 대면하는 경연이 열릴 때 마다 이경석은 매번 자리를 피했다. 그러면서 인조에게 "저의 스승은 당대의 큰 어른인데도 아직 예전 자리에 머물러 있고 못난 제가 선생보다 앞에 있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라고 곤혹스러워했다. 이듬해 김상헌이 좌의정으로 승진하자 이번에는 이경석이 영의정에 올랐다. 불편한 이경석은 자주 사퇴를 청했다. 그는 치욕적은 글을 써 오명을 남겼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이 추앙했던 김상헌에게 극진한 예를 다했다고 평가받으며 일부 면죄부를 받았던 모양이다. <좌계부담>은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세상 사람들은 간혹 삼전도 비석의 글 때문에 그를 비방하지만 이것은 당시의 불행한 일이니 어찌 그에게 잘잘못을 따질 일인가."
보물 제463호로 지정돼 있는 강원도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 탑비(국립중앙박물관 소장)는 고려시대에도 최고의 보물로 대접받았다. 이제현(1287~1367)의 <역옹패설>에 따르면, 진공대사는 신라말, 고려 초기에 활약한 고승으로 비석은 태조 왕건이 직접 글을 지었고 서예가 최광윤이 글자를 집자해 새겼다.
"말의 뜻은 웅대하고 심원하고 거룩하며 … (중략) … 글자는 큰 글씨, 작은 글씨 그리고 해서와 행서가 서로 사이를 맞춰 봉황이 물 위를 헤엄치는 것처럼 그 기상이 하늘 밖까지 삼킬 듯하다. 정말 천하의 보물이었다." 현재는 탑비 몸체가 사라졌고 거북 모양의 귀부(받침돌)에 용을 새긴 이수(머릿돌)만 옛 흥법사터에 남아 있다.
고려말 불교의 도시 개경에는 300곳이 넘는 불교사찰이 있었다. 그 중 연복사의 규모가 가장 컸지만 안타깝게도 조선 명종때 화재로 사라졌다. 고전은 어처구니없게도 비둘기를 쫓다가 불을 냈다고 전한다. 조선중기 문장가 차천로(1556~1615)는 <오산설림초고>에서 "연복사는 개성에 있던 절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다. 연복사에는 5층 목탑이 우뚝 서 있어 장관을 이루었다"고 했다.
연복사는 고려 멸망 이후에도 명맥을 유지했다. 그런데 명종 18년(1563) 송도 유수(수도 이외의 중요 지역을 맡아 다스리던 정2품의 외관 벼슬)가 사위를 맞기 위해 사람을 시켜 횃불로 비둘기를 잡게 하다가 그만 불똥이 떨어져 대와 비석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태워버렸다고 <오산설립초고>는 기술한다. 차천로는 화재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그는 "내 나이 겨우 여덟 살이었지만 불꽃이 밤에 하늘로 치솟던 일을 아직도 기억한다"며 아쉬워했다.
이중환(1690~1756)의 지리서 <택리지>는 원나라 황제가 우리나라에 지은 사찰을 소개한다. <택리지>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종종 중국인들의 귀양지로 종종 활용됐다. 원나라 문종은 순제(원나라 마지막 임금)를 서해 대청도로 귀양 보냈다. 순제는 대청도에 집을 짓고 살면서 순금으로 만든 부처를 모시고 매일 해가 돋을 때마다 고국에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훗날 귀국해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황제가 된 순제는 장인 100명을 보내 해주 수양산에 신광사를 지었다. <택리지>는 "웅장하고 화려하기가 우리나라에서 으뜸이었는데 화재로 불타 버렸다"고 했다.
<오산설림초고>는 백두산 근처에 있던 정체불명의 비석도 다룬다. "선춘령(宣春嶺)은 갑산(甲山)과 닷새 길 거리에 있는데 백두산 밑에 가깝다. 고개에 짤막한 비석이 풀 가운데 묻혀 있었다. 신립 장군이 남병사(함경도 북청 남병영의 병마절도사)가 됐을 때 끌어와 나도 볼 수 있었다. 높이는 다섯 자(155㎝) 쯤이고 넓이는 두 자(62㎝) 쯤이며 … (중략) … 여기서의 `황제`는 고구려왕을 뜻하지만 `탁부(啄部) 아무개 예닐곱 명` 중에서 탁부는 어떤 관직인지 알 수 없다."
`황제`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차천로는 황제가 고구려의 왕을 의미한다고 적었지만 고구려가 직접 황제를 칭했다는 기록은 없다. 중국을 위협할 만큼 국력이 강성하기는 했지만 고구려는 `태왕`이라는 호칭을 썼을 뿐이다. 고구려가 `탁부`라는 벼슬명을 사용했는지도 현전하는 문헌에서 찾을 수 없다. 우리 역사에서 고려가 유일하게 `황제`라는 칭호를 썼다. 고려 예종 2년(1107) 윤관은 여진족을 물리친 뒤 6진을 설치하고 `선춘령(先春嶺)`에 고려의 경계를 나타내는 비석을 설치한 바 있다. 하지만 고려가 황제 명칭을 사용한 것은 왕조 초기에 국한된다. 탁부라는 벼슬은 신라에서만 등장한다. 진흥왕이 함경도를 순시하고 새긴 황초령비에도 `황제`라는 단어는 없다. 다만 황초령비의 `제(帝)`, `짐(朕)`, `건호(建號·연호를 세우다)`라는 글자를 두고 차천로가 황제라고 단정해 썼을 수도 있다. 차천로는 어떤 비석을 두고 이런 말을 했던 걸까.
청주공항 근처 충북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에 유명한 약수가 있다. 천연탄산수가 샘솟는다는 초정약수다. 조선 성종 때 문신 이륙(1438~1498)의 <청파극담>에는 그와 관련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와 있다. "서원(청주의 옛 지명)에 초수(후추 맛이 나는 물)가 있다. 늙은 농사꾼이 언덕 위에서 잠이 들어 귓가에 은은히 말떼의 소리가 들리기에 일어나 보니 평지에서 물이 솟아나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달려가 사또에게 고하였고 소문이 널리 퍼졌다. 불로 끓이면 맛과 독이 사라지고 가려움증 같은 병은 이 물로 씻기만 하면 바로 나았다. 내가 안찰사가 되어 살펴 보니 물이 땅속으로부터 솟아나오는데 아주 차고 맛이 쓰다. 뱀이나 개구리가 뛰어들면 곧 죽는다. 세종이 만년에 안질이 있어서 행궁을 지어놓고 행차하여 눈을 씻었다. 여러 날이 지나자 효험이 있어 그곳의 목사 박효성을 당상관에 임명하였다. 하류에 있는 수십 이랑의 논에 이 물을 대니 땅이 매우 비옥해졌다."
인조는 반정 이듬해인 갑자년(1624) 일어난 반란(이괄의 난)으로 충청도 공주까지 피난을 간다.
<택리지>에 따르면, 도망가다가 나무 두 그루에 기대어 쉬고 있는데 마침 한양에서 달려온 군사가 관군의 승리를 보고했다. 인조는 나무를 기특하게 여겨 두 나무 모두에 통정대부(당상관 최하위의 품계)의 벼슬을 내린다. 그 뒤 관아에서 나무 옆에 정자를 지었는데 나무는 말라죽고 정자만 남았다고 <택리지>는 기술했다. 지금도 공주 공산성 내에는 인조가 두 나무옆에 지었다는 쌍수정(雙樹亭)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