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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인간혁명 30권 제6장 서원(6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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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SGI멤버와 교류한 작가 우시지마 히데히코 도카이여자대학교 교수(당시)는 문화의 본질에 되돌아가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문화와 종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양자는 동의가 아니다. 문화, 예술은 종교와 종파를 초월해 널리 사회에 뿌리내리고 역사 속에서 다른 문화를 흡수·도태·융합하면서 인간의 생활양식을 형성한다. 따라서 종교의 틀을 뛰어넘은 인간찬가 베토벤의 ‘제9번’ 합창 부분을 이교도로 단정하고 단죄, 배척하는 것은 세계의 문화 나아가 인간의 생활양식을 부정하는 논리가 된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틀어박혀 독단적인 교리를 휘두르기는 쉽다. 그러나 그래서는 니치렌(日蓮) 대성인의 유명(遺命)인 세계 포교를 절대 이룰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그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종교가 교조주의에 빠져 독선적인 잣대로 문화나 예술을 재단한다면 그것은 이미 인간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종교를 위한 종교다.
‘지금이야말로 인간으로 되돌아가라’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르네상스가 필요하다고 동지들은 통감했다.
또한 학회 최고간부들은 종문(宗門) 승려들의 행태에 마음이 아팠다. 안하무인격인 언동이나 유흥에 빠져 화려한 생활을 추구하는 승려들의 풍조에 당황한 각지의 회원들은 걱정을 많이 했다.
학회도 그것을 종문 측에 전달했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종문은 황폐해져 수습할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대성인은 절복도 하지 않고 “헛되이 유희잡담만을 하며 지내는 자(者)는 법사(法師)의 가죽을 쓴 축생이니라.”(어서 1386쪽) 하고 말씀하셨다.
광선유포를 하겠다는 뜻을 잃고 승복의 권위를 휘두르는 종문 승려들의 모습은 학회 초창기부터 보였다. 따라서 제2대 회장 도다 조세이(戶田城聖)는 “명예와 지위를 동경해 재력에 아첨하는 도제(徒弟)가 신자에게 허세를 부리지 않도록” 하고 자주 종문 승려에게 신심의 성심을 다해 엄하게 간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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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는 니치렌 대성인의 유명인 세계 광선유포를 추진하기 위해 어떠한 박해가 따를지라도 할 말은 하고 바로잡을 것은 바로잡지 않을 수 없었다.
1991년 1월 3일, 전국현장회의를 열어 종문 문제를 보고했다.
회장인 아키즈키 에이스케는 니치렌 대성인의 유병을 달성해야 할 21세기를 이끄는 세계종교에 걸맞은 광포의 기반을 갖추기 위해 종문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청했다.
①민주주의 시대에 부응해 세계를 향해 열린 종문이 되기 바란다. ②니치렌 대성인 불법의 본디 정신에 따라 권위주의를 시정하고 신도를 멸시하는 태도를 고치기 바란다. ③승려의 타락을 훈계하고 소욕지족(小慾知足)의 성승(聖僧)이라는 종풍(宗風)을 확립하기 바란다.
야마모토 신이치는 참석자들과 함께 근행한 뒤 ‘사명 있는 사람, 신념 있는 사람으로서 깊이 자각해 멋진 1년을!’ 보내자고 인사했다.
그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세계광포를 위해 불의불칙(佛意佛勅)인 창가학회를 꿋꿋이 지켜야만 한다’고 강하게 결의하고 ‘평화와 확대의 해’에도 연초부터 회원을 격려하기 위해 분투했다.
1월 26일에는 제16회 ‘SGI의 날’을 기념해 제언을 발표했다.
그때 1년 전 8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해 걸프전이 시작되어 1월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과 이라크가 교전했다. 제언에서는 걸프전의 조기 종결을 요청하고 아울러 유엔이 리더십을 발휘해 중동평화국제회의 등을 개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튿날 27일 홍콩·마카오 방문에 나선 신이치는 31일, 아시아 등 14개국지역 대표 1500명이 모여 홍콩문화회관에서 개최한 SGI 아시아회의총회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걸프전의 조기 해결을 위해 ‘긴급어필’을 채택했다. 어필에서는 유엔이 주도해 하루빨리 평화를 실현하기를 염원하며 쿠웨이트에서 이라크의 철수를 표명, 전투재발방지책을 구축, ‘중동평화국제회의’ 개최, ‘긴급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호소했다.
신앙의 불꽃은 평화를 위한 투혼의 불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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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을 방문한 신이치는 마카오도 처음 방문해 마카오동아대학교 명예교수칭호 수여식에 참석했다. ‘새로운 인류 의식을 찾아’라는 제목으로 기념강연을 했다. 2월 2일에는 곧바로 지도차 오키나와에 들어가고 이어서 미야자키를 방문했다.
3월에 들어서도 간사이를 비롯해 주고쿠, 주부 등으로 일본 내 동지들을 위한 격려행을 계속했다.
그 해 3월, 학회와 대화를 계속 거부한 종문은 갑자기 해외조직에 대한 방침을 전환한다고 발표했다. 지금까지 해외에서는 SGI 이외에 신도 조직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 방침을 폐지한다는 취지의 통지서를 송부한 것이다.
또 학회의 월례등산회를 폐지하고 7월부터 소속 사찰이 발행하는 소개장(등산참예어개비원)을 소지한 등산만 허용한다고 통지했다. 분명 학회 조직을 파괴하려는 의도다.
학회원은 일방적이고 오만불손한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신심에 대한 정성 어린 마음으로 거듭 등산해 총본산을 장엄케 하고자 뼈를 깎는 심정으로 계속 공양했기 때문이다.
총본산 다이세키사(大石寺)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농지개혁으로 그때까지 소유한 농지를 대부분 잃고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어 매우 피폐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러자 종문은 생활수단을 확보하기 위해 다이세키사를 관광지로 내놓으려고 계획했다. 1950년 11월에는 총본산에 현지 시장을 비롯해 촌장, 관광협회, 신문기자 등을 불러 ‘후지북부관광간담회’를 열고 구체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크게 놀란 도다 조세이는 몹시 슬퍼했다. 돈을 위해 총본산을 신앙심 없는 관광객에게 개방함으로써 대성인의 정신이 짓밟힐 것을 우려했다. 그리고 사태를 타개하는 길을 모색해 정기적인 등산회를 기획하고 2년 뒤인 1952년부터 실시했다. 이로써 종문은 궁지에서 벗어나 크게 발전했다. 등산회에는 40년 동안 총 7천만명이 참가했다.
광선유포를 바라는 창가학회원의 신심이 종문을 지키고 총본산을 크게 흥륭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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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는 총본산 정비에도 최대한 힘썼다. 도다 제2대 회장 시절에는 봉안전과 대강당을 건립해 기진했다. 신이치가 제3대 회장에 취임한 뒤에는 대방을 비롯해 대객전, 정본당, 총문, 숙박시설 등 총본산 건물과 시설을 기진했다.
총본산 소유지도 농지개혁 직후에는 불과 5만 1천여평에 지나지 않았으나 예전의 23배인 117만평에 이르렀다. 그 땅도 대부분 학회가 기진한 것이다.
이렇듯 오랫동안 외호한 성의에도, 학회원들의 진심 어린 공양에도, 등산회 무사고 운영을 위해 밤낮으로 헌신한 청년들의 노고에도 감사 인사 한마디 없이 첨서 등산을 시작했다.
1991년 7월, 종문은 학회를 그만두게 하여 단도로 끌어들이는 ‘단도 만들기’를 공식 방침으로 발표했다.
불법(佛法)에서 가장 중죄(重罪)인 오역죄(五逆罪) 중 하나로 부처의 교단을 분열해 혼란시키는 ‘파화합승(破和合僧)’이 있다.
그들은 현실에서 광선유포를 추진한 불의불칙의 단체인 창가학회 조직을 본격적으로 파괴하기 시작해 커다란 중죄를 범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공양을 받을 만큼 받고 잘라버린다는 냉혹하고 비열한 소행이었다.
또한 종문은 대성이의 가르침과 다른 ‘법주신앙’이라는 사의(邪義)를 내세워 법주를 정점으로 한 승려의 권위로 신도를 지배하려고 획책했다.
그러나 그런 악랄함과 시대착오적 체질을 학회원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9월에는 2년 전인 1989년 7월, 닛켄이 선조대대의 묘를 후쿠시마시에 있는 선종 사찰의 묘지 내에 건립해 개안(開眼) 법요를 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 동안 학회를 방법(謗法)이라며 실컷 비난해 놓고 ‘이런 짓까지 하는가’ 하고 다들 어이가 없었다.
또한 종문의 갖가지 부패, 타락한 실태도 차례로 알려졌다.
이래서는 더 이상 니치렌 태성인의 불법이라 할 수 없다. 닛코 상인의 정신은 단절되고 슬프게도 후지에 이어져 내려온 청류(淸流)는 끊겨 탁류(濁流)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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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치는 동서냉전 종결 후 새로운 평화 구축을 전망해 행동했다.
1991년 4월에는 교육, 문화교류를 위해 필리핀대학교를 방문했다. 경영학부졸업식에 참석해 ‘평화와 비즈니스’라는 제목으로 기념강연을 했다. 이날 필리핀대학교가 신이치에게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6월 초순부터는 독일에 이어 룩셈부르크를 처음 방문하고 프랑스와 영국 등 유럽을 차례로 방문했다. 각 방문국에서 문화교류를 거듭하는 한편 국가 지도자를 비롯한 식자와 회담했다. 9월 하순부터 10월 초에는 북미를 방문해 9월 26일, 하버드대학교에서 ‘소프트파워 시대와 철학 - 새로운 미일관계를 열기 위해’라는 제목으로 기념강연을 했다.
또한 일본 국내를 동분서주하며 보우(寶友)들을 격려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이번 제2차 종문사건으로 동지들은 음험하고 약삭빠른 종문의 모략을 냉정하게 간파하고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정열을 불태우며 감연히 싸웠다.
신이치는 회장을 사임한 제1차 종문사건 때, 다시 한번 광선유포의 사명을 위해 꿋꿋이 살아가는 사제의 유대를 맺어 강인한 창가학회를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동지 한 사람 한사람에게 철저히 빛을 비췄다. 개인지도를 비롯해 가정방문 소단위 대화, 간담 또 각종 회합에도 발걸음을 옮겨 계속 격려했다.
식사도 최대한 멤버들과 함께하며 대화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또 촌음을 아껴 단가나 시를 읊고 종이나 서적에 휘호해 선물하는 등 격려에 이은 격려를 거듭했다.
신이치는 동지의 성장을 위해, 행복을 위해 뼈를 깎겠다는 각오로 움직이고 일했다. ‘모두 홀로 서는 용자(勇者)가 되기를’ 바라며 필사적으로 광선유포의 혼을 쏟았다.
그러자 후계의 청년들도 훌륭하게 성장해 어떠한 거센 바람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금강불괴(金剛不壞)와 같은 사제의 유대로 맺어진 위대한 창가성(創價城)을 구축했다. 더욱이 그 사제정신은 널리 세계 동지의 마음을 연결했다.
목숨을 건 행동에 혼이 공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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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노고많으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