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를 통하여 (중복)
용계성당 정상덕(마리노)
성경을 읽거나, 가톨릭 서적들을 접하다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온갖 고통과 생명까지 내어놓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을 본받을 가치가 있어 성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예전 직장 동료들과 뜻을 모아 ‘은혜로운 장소‘, 천주교 성지 111개소를 모두를 순례하고 주교회의 국내 이주사목위원회로부터 2016년 4월에 축복장을 받고 가슴에 남은 내용들을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활동
1836년 12월 유학생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중국인 신부 유방제를 따라 한양을 떠나 송도, 평양을 거쳐서 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밤에 몰래 건너, 중국의 책문까지 거의 한 달이 걸렸다. 차가운 북풍의 추위를 이기는 것이 고통스럽고, 불법 출국이라 국경수비대를 피해야 한다. 잡히면 무조건 처형되기 때문이었다. 의복도 변변찮았고, 밤에는 추워서 모닥불을 피우고 추위를 이기며 노숙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김대건 일행은 험한 만주 땅을 넘어서 요동 반도를 거친 후, 계속 남쪽으로 걸어서 6개월이 걸려서. 그들이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무엇이 어린 소년들을 그토록 죽을 고생을 하며 가게 하였을까? 이 벽 성조를 중심으로 한 지도자들이 천주의 진리를 깨우쳤을 것이고, 명문가, 선비들의 형제, 자매, 부자지간 등 가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배교하면 살려주겠다는 요구를 받았지만, 응하지 않은 굳은 신념들이, 만약 지금의 우리였다면 어찌하였을까? 선조님들의 신앙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8년여의 1845년 8월 서품을 받기까지 기후와 환경에 적응하며 온갖 시련 속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조선교회의 기둥이 되겠다는 신념과 상해를 떠나 조선으로 입국하기 위해 세 번의 난파와 표류를 거처 제주 용수항에 표착하고, 나바위로 입국하기까지의 죽음을 무릅쓴 집념과 1년 5개월여의 선교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살이와 순교하기까지의 삶들을 돌아보기 위해 유학생 시절의 마카오 ~ 용수 ~ 나바위를 순례하였다.
마카오에는 1587년에 지은 중국 최초 성 도미니코 성당이 남아있고, 1580년대에 지은 성바오로성당은 유적지만 남아있다. 특히 1560년대에 지은 성 안토니오 성당은 김대건 신부 등이 신학 공부를 하던 곳을 둘러보았다. 이 성당의 작은 별실에는 지금도 한복 차림의 김대건 신부 목상이 안치되어 있었음은 흐트러져가는 나의 신앙심은 순례를 통한 체험과 묵상으로 더욱 굳게 다지게 되었다. 순교 정신을 본받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은혜를 얻도록 천주께 빌어주소서!” 아멘!
최양업 신부의 활동
1849년 사제 서품 후 단신으로 귀국하여 1861년 12년여의 굳건한 믿음과 열정으로 구만리 고달픈 길을 마다하지 않으며 조선 방방곡곡 교우촌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신자들을 돌보는데, 온 정성을 바치는 선교활동 전개하시다 선종한 곳 들을 순례하며 순교의 정신을 본받아야겠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서양에 바오로 사도가 있다면 동양에는 최양업 신부가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바위의 김대건 신부 일행 기착지의 십자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