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내로 변에 자리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중앙공원을 휘감아 도는 분당천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넜다. 공원 가장자리에 자리한 한산 이씨 유사비 비각을 살펴보고 공원으로 든다. 수내동의 뒷매산 전체를 공원으로 조성한 이곳은 ‘숲 안’의 한자 표기인 '수내(藪內)'라는 이름에 걸맞게 수목이 무성하다.
중앙광장 좌측의 산록을 따라 조성해 놓은 황톳길을 많은 사람들이 맨발로 걷고 있다. 나도 신발과 양말을 벗고 500미터 남짓 황톳길을 두 번 왕복했다. 고목이 무성한 길 주변 군데군데 벤치가 놓여 있고, 네댓 개의 배드민턴 코트에서는 노장년의 남녀가 복식 게임에 열중하고 있다.
고운 황토가 깔린 길은 단단하기도 하고, 물렁물렁 발자국이 찍히기도 하고, 어떤 곳은 질퍽하여 발 소매를 걷어 올리게 하기도 한다. 황톳길 양쪽 끄트머리엔 발을 씻을 수 있는 수도 시설과 신발을 보관하는 수납 시설이 놓여 있다.
한산 이씨 종중 묘역이기도 한 뒷매산의 기슭, 중앙광장 가장자리에 있는 한산 이 씨의 옛 집인 수내동 가옥을 둘러 보았다. 이 가옥은 마당을 가운데 두고 본채, 사랑채, 장독대, 마굿간 등이 둘러선 옛 농가의 전형을 간직하고 있다.
중앙광장에 접해서 거북 모양을 닮은 분당호가 자리한다. 호수 한 편에 자리한 돌마각(突馬閣) 정자는 경복궁의 경회루를 연상케 한다. 분수가 하얀 물줄기를 뿜어 내는 호수 중앙 수면 위에서 오리 떼가 노닐고, 호수 가장자리 무성한 수초 사이로 물새들이 내려앉는다. 성남 지역에 남아 있는 '돌마(突馬)'라는 지명의 기원을 찾아보았다.
"돌마(突馬)는 1577년 광주목(廣州牧)이 생기면서 돌마면(突馬面)이 되었고, 그 이전에는 돌마리(乭馬里)로 불렸다. 돌마 지명의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원(1368~1429)의 ‘용헌집(容軒集)’에 ‘乭馬’라는 기록이 있다.
지금은 조금 낯설어진 이 지명이 광주군 시절에는 분당 지역의 대표지명이었다. 편재의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 갈현, 도촌, 여수동과 분당구 이매, 야탑, 서현, 율동, 분당동, 수내, 정자동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 돌마 면으로 불렸다.
분당 신도시 개발 때 116기의 고인돌이 조사된 것으로 보아 돌마 지명이 돌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_ 경기신문, [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 '21.4.20.
거북의 머리에 해당하는 호수 한편에는 수내정(藪內亭)이 호젓하게 자리 잡고 있다. 건물 형태는 다르지만, 호수 가장자리에서 수면 쪽으로 정자 반쪽이 나앉은 모습이 흡사 창덕궁의 후원인 부용정(芙蓉亭)과 닮았다. 수내정에 오르니, 주변 숲에서 지저귀는 온갖 새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수내정 옆 산록에는 한산 이 씨 묘역이 자리한다. 그중에는 변기(邊璣)의 종사관으로 상주 전투에 참전하여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이경류(李慶流, 1564-1592)의 묘가 그의 말 무덤인 애마총(愛馬塚)과 함께 자리한다. 이경류의 피 묻은 옷과 유서를 물고 상주에서 수내동까지 500여 리를 달려와서, 그가 전사한 사실을 알린 말은 3일 동안 먹지도 않고 울기만 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묘역 한편에 지석묘군(支石墓群) 안내판이 눈에 띈다. 분당 택지개발 당시 이 지역에서 남방식 지석묘가 다수 발굴되었는데, 분당동 야탑동 도촌동 지역에서 발굴된 지석묘 10기를 이곳에 이전하여 보존한다는 내용이다. 한반도에 우리 선조가 터를 잡기 시작한 청동기 시대, 아득히 먼 그 시기 선인들의 바위 무덤을 눈앞에 대하니, 시월의 마지막 날 어젯밤처럼 우리 일생이 짧기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느긋함의 옷으로 감추어 보려는 조급증이 옷깃을 비집고 나오려 하지만, 옛 성현의 말씀으로 다독이며, 무르익어 가는 가을의 정취에 젖어 보는 날이다.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작은 이익에 얽매이지 말라. 급히 하려 하면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에 얽매이다 보면 큰일을 이루지 못한다."
無欲速, 無見小利, 欲速卽不達,
見小利卽大事不成.
_ 논어 자로편(子路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