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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에 일을 하는 기홍씨에게 빨간 공휴일 게다가 연휴는 생명수와도 같은 반가운 날이다.
당연히 매년 새해 달력을 받자마자 1박2일, 또는 2박3일을 알차게 놀 수 있는 연휴가 언제 생길까, 연휴가 생기면 어디를 갈까 하고 궁리를 하게 된다. 우리에게 연휴라 함은 남들 다 노는 토요일이 빨간 날이 되는 것을 뜻한다. 물론 온국민에게 좋은 건 월요일이 빨간날이 되는 거지만. 보통 공휴일 연휴는 삼일절부터 발생하기 마련이나, 우리에게 삼일절은 아버님 기일인 3월 6일에 앞선 주말과 나란히 있어 기일을 지키다보면 어디 멀리 떠나기는 여의치 않다.
몇 년 전부터 식목일도 까만 날이 되어 버렸으니 본격적인 연휴 발생은 어린이날 또는 석가탄신일이 있는 5월이 시작이다. 그러나 아뿔싸~ 올해에는 어린이날도 일요일이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5월 17일 석가탄신일이 금요일, 그렇다면 사이에 낀 토요일에 쉬라고 기홍씨에게 강한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금토일 샌드위치 연휴렷다! 고마우신 부처님, 음력이라 매년 살짝 살짝 날짜와 요일까지 바꿔가며 우리에게 놀 궁리를 모색하게 해주신다...!
그러나 막상 기홍씨는 어디를 가느냐에 따라 병원을 쉴 지 말 지 결정하겠다는 게 아닌가. 남들 다 노는 토요일에 오랜만에 한 번 놀아보자는데, 그것도 찬 밥 더운밥을 따지시는 게요! 그래서 제주도 말고 알토란같은 2박3일을 투자할 만한 여행지로 어디가 좋을까 고민하다 선택된 곳은 거문도, 백도! 기홍씨도 마침 거문도에 가보고 싶었다며 기꺼이 쉬겠다고 한다. 스쿠버 다이버들의 천국이라는 청정해역 거문도. 용산에서 세 시간 반 기차를 타고 도착한 여수에서 다시 배를 타고 두 시간이나 가야 하는 먼 여정이다.
여수에서 거문도까지 가는 배는 3월 초에 곧바로 예약을 시도했으나, 이렇게 육지에서 먼 섬일수록 여행사에서 다량 구매해 패키지 여행상품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대다수인지라, 개인 여행객은 표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거문도까지 배를 띄우는 회사가 단 두 곳인데, 돌아오는 배 3자리가 없어 가는 배와 오는 배를 각기 다른 회사에 예매할 정도였다. 숙소도 옛날 일제시대 가옥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깔끔한 관리로 이름난 '고도민박'은 애진작에 예약이 다 됐다고 해서 통일교에서 세우고 연초부터 일반에게 공개하기 시작했다는 거문도의 유일한 호텔, '거문도섬호텔'로 예약을 해두었다.
거문도 여행 준비의 가장 어려운 과정은 기차표 예약에 있었다. 모든 기차표는 30일 전 아침 7시부터 예매 개시를 하는데, 이때가 3일 연휴이다보니 명절 기차표 예매 전쟁을 방불케하는 접속자 폭주 및 광폭 클릭질을 거쳐야만 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명절 표와 달리 가는 날과 오는 날 이틀 다 따로 따로 예매를 해야 하니, 4월 17일과 19일 아침 6시 50분부터 초긴장 및 고도의 집중력 발휘를 필요로 했다. 뭐, 그렇게까지나~ 기차표 매진되면 버스를 타고 가거나 차를 가지고 가면 되잖아~?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재작년 현충일 연휴에 거제도에 가는데 토요일 오후 6시에 출발해서 담 날 새벽 2시에 도착하는 무아지경의 교통체증을 경험한 이후, 우리는 2시간 이상의 먼 여행엔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것을 절대지령으로 삼는다.
서두가 장황하구나~ 대체 금오도까지 언제 가냐... -.-;;
그러나.. 이것으로 모두 극복한 줄 알았던 거문도 여행의 장벽이 또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날씨... 정확하게는 '바람'이었다. 일주일 전부터 금요일부터 남해안을 시작으로 중부지방까지 비가 올 거라는 예보가 거의 확실시 되는 듯 했다. 사실 비오는 날씨도 여행에는 적합치 않지만, 배를 타고 먼 곳으로 나갈 때는 바람이 문제인데, 파고가 높으면 멀쩡하게 맑은 날도 배가 뜨지 못하기 마련이다. 울릉도와 마찬가지로 거문도도 멀고 먼 남쪽나라의 섬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설마 배가 뜨겠지, 이제 와서 어디로 여행지를 바꾼단 말이냐, 여차하면 여수에서 배 타고 30분이면 간다는 금오도라도 가려는 심산으로 전날 금오도 여행 코스도 대충 구상해놨다. 이럴 때야말로 나의 최대 장점 중의 하나인 태평한 마음을 적극 발휘하야~ 일단 여수로 고고! 8시 20분에 용산에서 출발한 기차에서 한 숨 자고 일어나니 해운회사가 전화를 받을 시간이 됐다. 아니나다를까, 오전 배가 취소되었단다. 우리가 탈 예정인 오후 2시 배는 뜰 것 같단다.
그러나.. 문제는 돌아오는 19일이었다. 오늘은 바람만 불지만 제주도에서는 비가 오기 시작했다 하고.. 기상청에 전화를 해보았더니, 19일은 비는 물론이고 파도가 높아서 현재로서는 기상악화로 인한 예비 특보가 발령된 상황이라고 했다. 통상 3미터 이상의 파도가 치면 배는 뜨지 않는다고 한다.(이날 날씨 공부 많이 했다.)
여수여객터미널에 도착해 물어보니, 오후에 거문도에 들어가는 배는 뜨지만, 백도를 유람하는 배는 못뜬다고 한다. 거문도까지 가서 기암절벽으로 이뤄진 무인섬 백도를 구경하지 못한다 함은.. 여수에 와서 향일암에 오르지 않고, 오동도만 구경하고 가는 꼴이 아니더냐.
게다가 19일에 배가 뜨지 않아서 섬에 묶여 버리면... 그거슨~ 우리가 이미 작년 울릉도에서 경험한 바~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불안초조의 유예였다. 평소에도 걱정불안이 많은 우리 정유진양께서는 그렇지 않아도 요며칠 9명 절친 그룹의 문제로 매우매우 델리키트한 나날을 보내고 계신데, 월요일에 학교에 가지 않으면 자신은 개입되지도 못한 채 상황이 어디로 튈지 모르니 헬기를 긴급요청해서라도 학교에 가야 한다고 했다. 물론 정기홍한의원의 상황도 크게 다르진 않다. 오는 환자들마다 상황 설명하고 돌려보내면.. 토요일에는 느닷없이 자체 휴무(개인병원 운영의 정서상, 3일 전쯤 공지한다.) 후, 3일을 기다려 월요일에 찾아온 환자들 헛걸음질 치게 하기..? 대책없이 일단 시도해놓고 보는 내가 봐도 걸림돌이 너무 많았다.
여객 터미널 앞에서 제법 훌륭한 7천원짜리 백반을 먹으면서 고민해봤지만..
역시 거문도행은 무리였다. 백도도 못간다는데.. 내일 오후부터 비온다는데.. 다음을 기약하는 편이 낫겠다.
터미널로 돌아와서 어렵게 예약한 거문도 배표를 취소했다. 여수로 나온 거문도 도서민들도 표가 없어서 발을 구르고 있었는데, 이걸 프리미엄 붙여서 암표로 팔아도 되겠다 싶을만큼 대기자가 줄을 서 있었다.
그리고, 복안으로 준비한 금오도로 행선지를 바꾼 것까지는 좋았으나...
관광안내센터 직원의 말,
"금오도에는 숙소를 정하고 들어가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숙박하기 힘드세요."
이 말을 가벼이 들은 것이 우리의 실수였다.
위 사진은 여수의 돌산 신기항. 금오도 가는 배는 여수여객터미널 말고도 여기에서도 뜬다.
여수 연안여객터미널보다 더 남쪽인 돌산 신기항으로 내려오면 금오도 가는 배가 자주 있고, 승선 시간도 30분이면 된다고 해서 시내버스를 타고 한 시간 가까이 돌산으로 내려왔다. 관광안내센터 직원의 말만 듣고 돌산 가는 버스가 하나밖에 없는 줄 알고 그 버스를 탈 수 있으려나? 이미 지나갔나 하고 노선표를 기웃거리고 있었더니, 웬걸~ 정류장에 앉아 있는 한 아주머니가 지금 막 정류장에 도착하는 버스도 돌산에 간다며 일러주셨다. 역시 행운의 여신처럼 나타나는 현지인의 도움으로 완성되는 여행의 묘미!
위 사진에서 보이는 섬이 금오도이다.
저 금오도에 도착하기까지 30분 동안 배 위에서 내가 한 일은.. 금오도 여행 안내 전단지에 적힌 모든 숙소에 전화하기...!!!
물론 처음부터 모든 숙소에 전화할 생각은 아니었다. 금오도에는 '비렁길'이라는 트래킹 코스가 개발되어 최근 급부상했는데 우리의 트래킹 진도에 맞추어 오늘 밤에 도착할 수 있는 동네 민박집 몇 군데 전화하면 설마 방 한칸이 없겠어~ 금오도는 대부분 당일로 다녀오는 모양이던데~ 우리처럼 자면서 이틀 내내 걷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라구~ 했으나.... 오늘 밤에 자면 좋겠다 싶은 중간 지역인 직포에도, 두포에도, 심지어 시작점인 함구미에도 모든 민박집에 방이 없었다.
사진은 선실 안에서 유진이가 자기도 전화 걸어 보고 싶다며 민박집에 전화하는 모습.
물론 유진이는 우리가 전화한 총 40여군데 중 딱 한 군데 걸어보고 말았지만.
"안녕하세요? 저희 3사람인데 오늘 방이 있나요? .. 네, 알겠습니다."
이렇게 끝나 버리고 마는 간단한 전화... ㅠ.ㅠ
금오도의 여천 터미널에서 바라본 풍경.
유진이 간식을 사주러 수퍼에 들어갔다가 사람들 먹는 모습에 식욕이 동한 유진이가 라면을 먹고 싶다길래, 그래 뭐, 라면이라도 먹으면서 기분을 내야지 싶어 라면을 하나 주문하고, 우리는 캔 맥주를 하나씩 마시면서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막막한 마음을 추스리며 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맥주를 마시다가 이번에는 기홍씨가 전화를 걸어보겠다며 최후의 보루인 안도- 정식 비렁길 코스에는 포함돼 있지 않고, 금오도에서 제일 먼 남쪽 작은 섬마을. 안도대교로 연결돼 있어서 택시나 마을버스로 이동할 수는 있다.- 로 전화를 걸기 시작하더니, 뜻밖에 두번째로 전화를 받은 안도모텔민박에 방이 있다고 했다. 숙박비는 거금 8만원! 그러나, 지금 비용을 따질 때가 아니다. 고맙다며 절이라도 할 기세로 예약을 마쳤다.
드디어 끝냈다!
숙소를 해결했을 때의 해방감이라니. 그렇지 않아도 두 달 전부터 준비한 거문도행이 무산돼서 김이 빠지려던 참이었는데, 유진이를 데리고 어디에서 자야 하나 그냥 여수로 다시 나가야 하나 아무리 태평한 나라도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래도 끝까지 전화한 보람이 있구나.
금오도까지 오는데, 이렇게 사연이 길고 복잡해서.. 쓰면서도 우리한테나 중요하고 특별했을 법한 이 과정을
이렇게 장황하게 쓰고야 말아야 하는 것이냐... 싶은 갈등이 압박해오면서도 ...
결국은 다 쓰고야 마는 나의 이 성격... 나는 나의 이런 점이...
...싫다.
그러나 할 수 없다. ㅠ.ㅠ 나의 40 평생 고착된 특성이다...
나에게는 내 일상에서 일어나는 이런 소소한 우여곡절이 너무나 중요하고 재미있(지 않을 때도 있지만 대개는 의미있)기 때문에
타이핑하는 손이 멈춰지질 않는 것이다. >.<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시작된 비렁길 트래킹은 내일 이어지겠다.
1코스 초입부터 발생한 기홍씨의 고글 케이스 분실 사건은.. 스킵할까.. 말까~ >.<
암튼, 2년 전 보라카이에서 기홍씨가 잠수실력을 발휘하며 간신히 찾아낸 초록 테 안경이 담겨 있는 고글 케이스 행방을 무사히 확인하고, 드디어 편안한 마음, 맥주 한 캔까지 마셨겠다, 기분 좋은 취기와 함께 더욱 편안해진 마음으로 비렁길 트래킹이 시작되었다.
그러고보니 위에 사진은 비렁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비렁길은 대개 이런 평탄한 숲길과 바닷가를 품은 절벽 위의 길로 이어진다. 금오도는 자라를 닮은 섬이라 하여 자라 '오'자를 써서 금오도(金鰲島)라 불리운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이 섬은 국립공원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멋진 풍경을 자랑한다. 조선시대에 궁궐을 짓거나 보수할 때, 임금의 관을 짜거나 전투용 배의 재료인 소나무를 기르고 가꾸던 '황장봉산(黃腸封山)'이 있었을 만큼 원시림이 잘 보존된 곳으로 숲이 검게 보인다고 해서 '거무섬'으로도 불리웠다고 한다. 고종은 금오도를 명성황후가 살고 있던 명례궁(덕수궁)에 하사했고, 명례궁에서는 이곳에 사슴목장을 만들어 사람의 출입과 벌채를 금했다고도 한다. 옛날 왕들은 자기 아내에게 섬 하나를 선물로 주고 그랬나보네, 허허.
거문도, 백도야 워낙 맑은 바다와 백도의 기암괴석 풍경으로 유명하지만, 금오도는 그만큼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거문도 여행을 계획할 때 배삯이며 기차삯이 제법 많이 들뿐 아니라 예약 과정도 복잡하길래 패키지상품을 이용해볼까 싶어 거문도여행사 상품을 들여다보다가 거문도, 백도 일주와 금오도 비렁길을 엮어 2박 3일로 만든 상품이 눈에 띄었다.
" '비렁길'은 금오도의 해안 절벽을 따라 만든 트레킹 코스이다. 절벽의 순 우리말인 '벼랑'의 여수 사투리 '비렁'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본래는 주민들의 땔감과 낚시를 위해 다니던 해안길이었다고 한다. 함구미 마을 뒤 산길에서 시작해 바다를 끼로 돌며 형성된 18.5km의 길은 도보로 6시간 30분 가량이 소요되는데 완만한 경사 탓에 남녀노소 무리 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다. 올레길 등 다른 트레킹 코스와 달리 숲과 바다, 해안 절벽 등의 비경을 함께 만끽하는 매력에 탐방객들의 탄성이 절로 나온다."
여행 상품에 소개된 금오도의 비렁길 소개 내용. 어라, 이거 상당히 끌리는데~ 무엇보다 산행을 싫어하는 유진이와 거문도 일주를 걸어서 하려면 꽤나 힘들 거 같았는데, 금오도의 비렁길은 훨씬 더 쉬워보이는데다 경치는 그에 못지 않은 듯 했다.
자, 그렇담 오늘 2시간 걸린다는 1코스 함구미에서 두포까지 걷고, 잘 하면 1시간 걸리는 3코스 직포까지 걷는 거야!
지금이 4시니까 예상대로라면 7시, 조금 더 걸린다 해도 8시 안에는 닿겠지!
지도를 보며 별 관심 없는 유진이에게 오늘의 동선을 열쒸미 알려준다.
여천항 (지도 중앙 상단에 여객 터미널이 있는 곳)에서 단 두 대밖에 없다는 콜택시를 불러 타고
오후 4시, 함구미마을(지도 왼쪽 상단)에서 드디어 1코스가 시작되었다.
우리의 숙소는 저 오른쪽 아래에 연결된 작은 섬, 안도에 있다. ^^;;
그러나 비렁길이 유진이에게도 무리 없는 코스일 거라 생각한 거슨 나의 순진한 착각이어따~.~
아무리 섬의 야트막한 뒷산이라도, 경사는 있는 법...
일단 걷기를 싫어하는 유진이에게는 약간의 경사만 시작돼도 히말라야 산맥을 오르는 듯한 심폐기능의 압박을 초래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걷는다, 엄마랑 아빠는... ㅋㅋㅋ
다행히 비가 올듯 흐렸던 하늘은 다시 개기 시작하고,
옅은 구름이 흩어져 있는 하늘 아래 쪽빛 바다가 펼쳐지며
가는 곳마다 이런 절경이 눈을 사로잡는다.
바람개비가 세워져 있던 전망대를 멀리서 보면 이런 모습이다.
이곳이 바로 1코스의 백미 '미역널방'. 해발 80~90m인 이 절벽 아래에서 섬 사람들은 미역을 채취해 벼랑에 널어 말렸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정말이지, 섬사람들의 근성이야말로... 가히 최고라 할 만하다.
다시 또 이어지는 길들.
호젓한 섬의 연한 에머랄드 빛 바다와
초록이 무성해지는 과정이 눈에 보일 듯 푸르른 산,
그 사이로 자갈자갈 돌들이 깔려있는 오솔길과 정다운 나무들은 그저 엄마에게만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열 다섯 살 유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금 막 옆에 다가온 유진이에게 이 사진을 보여주면서
"유진아, 사진 속의 유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 같애?"
하고 물었다.
"어, 일단~ 떨어질까봐 무섭다. (-.,-;;)
그리고 엄마, 더 내려가서 앉지 않았으면 좋겠어요.(ㅠ.ㅠ)
그래도 좋긴 좋다. (^_^)
그러니까 이제 그만 걸어요~~ (>.,<)"
저기 숲 너머로 우리의 목적지인 두포마을이 보인다.
두 시간이면 걷는다는 1코스를 세 시간 동안 걸었다. 역시 유진이와 함께 걸을 때는 최소 1.5배에서 2배 가까운 소요시간을 잡아야한다. 하기사 딸 덕분에 쉬엄쉬엄 걸으니 나도 나쁘지 않다. 우리가 무슨 국토순례단도 아닌데, 뭐, 기어이 남들 가는만큼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두
두포 마을은 서쪽으로 옴푹 들어온 만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서쪽에 면하고 있어 해지는 풍경이 꽤 아름다웠겠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7시가 막 넘었으니, 태양이 이미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뒤였다.
유진이의 인내심과 체력이 한계에 가까와 오는 듯했던 두 시간 경과시, '장점 말하기 게임'을 시작했다. 유진이가 엄마 아빠의 장점 중 아무거나 하나를 말하면, 아빠 엄마는 돌아가면서 유진이의 장점을 한 사람이 하나씩 말하는 게임이다. 물론 중복되는 게 있어서는 안되며, 막히는 사람이 상대방의 소원을 들어주는 게임이다. 아무래도 유진이 한 사람의 장점을 엄마 아빠가 나눠 말하다보니, 결국.. 내가 ... 사실은 유진이가 누구 한 사람이 걸리기를 너무나 간절히 바랬기 때문에...=.= 목적지도 눈앞에 보이고 해서 적당히 져 줬다.
유진이가 말한 장점은 엄마보다 아빠가 훨씬 더 빈번하게 나와서 질투와 경쟁심을 유발했는데, 그래서 일부러 공평하게 엄마 아빠 번갈아가며 하나씩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럼에도 아빠 우세.. ㅠ.ㅠ 암튼.. 유진이가 말한 엄마의 장점 중 기억에 남는 건,
"나의 취향을 잘 맞춰준다." 였다.
정말? 내가 과연??? @.@
고마운 딸... 다른 엄마 밑에서 살아보질 않았으니.. 엄마에게 이런 장점을 만들어주는구나.
하긴.. 세 시간의 도보 중 마지막 1시간 동안 소원 들어주기 유인책을 곁들인 게임을 하는 것도 유진이의 취향을 맞춰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두포 마을 바닷가 앞에 있는 한가로운 쉼터.
숙소를 못 구한 부부가 콜택시를 불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흐미, 남 일 같지 않은 거이~다행히 이 분들은 택시 기사 아저씨의 도움으로 비공식적으로 민박을 겸하고 있는 택시 아저씨의 단골 식당을 소개 받았다. 자기 이름을 팔아서라도 사정을 해보라며 우학리에 있는 식당 앞에 부부를 내려주었다.
우리가 안도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8시가 다 되어서였다. 이름도 특이한 '안도모텔민박'은 여관 정도의 시설로 깨끗하고 주인아저씨도 친절한 편이었다. 동네의 맛있는 식당을 추천해달라 했더니, 택시기사 아저씨가 권한 백송식당을 권해주셨으나 그곳은 이미 단체 손님으로 꽉 차서 자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였다. 다른 식당들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재료가 다 떨어졌다거나, 동네 사람들로 보이는 술 손님이 몇 명 앉아 있는데도 영업이 끝났다고 우리를 반겨하지 않았다. 배가 고파 죽겠다는 유진이를 달래달래 겨우 다시 숙소 근처에 있는 별 맛있을 거 같지 않은 식당으로 들어갔는데, 그나마 마지막 남은 밥이 딱 세 공기라며 들어와 앉으라고 했다. ㅠ,.ㅠ 나이 든 부부 둘이 하는 식당이라 저녁 내내 일하고 이제는 밥을 더 하기도 힘들다 하시는데~ 다른 식당도 다 비슷한 분위기였다.
알고보니 금오도 비렁길은 여수국제 엑스포 개최가 결정되면서 주변 관광 자원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고 한다. 원래 자연적으로 나 있던 길을 정비하고 추가로 개발하면서 총 5코스가 완성되었다. 실제로 와서 보니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경치가 아름다웠다. 그 덕분에 관광객이 엄청나게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교통은 물론 숙박이나 식당 등 제반 시설이 미처 갖춰지지 않아 매 주말마다 이렇게 늘어나는 관광객을 감당하지 못하고 몸살을 앓는다고 한다.
저녁 먹고 나서 한반도 모양 비스무리하게 생긴 포구의 만을 산책할까 했으나,
바닷바람이 제법 쌀쌀하게 불어와서 그냥 숙소에 들어와서 맥주를 마셨다.
그렇게 저 멀리 제주 먼 바다에서부터 시작되어 이 작은 섬마을의 좁은 만까지 들어온 바람이
우리를 이곳, 금오도에 데려다 주었다.
첫댓글 사연이 길고 복잡한데...
오랜만에 손 좀 풀어볼까나~.~
좋아요!!!
응원해준 은영씨, 고마워요! 그러나 결국 오늘에서야 시작~>.<
빨리 풀어주세욧~!!ㅋ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러다가 2박 3일 금오도 여수여행 한 일주일동안 쓰겠어요. ㅠ.ㅠ
ㅎㅎ 너무나 생생리얼한 묘사, 그날의 여행이 다시 펼쳐지네요.
타이핑을 멈추지 않게 하는 당신의 '성격'이 저를 즐겁게 한답니당.
비렁길 걷는 심정으로 쉬엄쉬엄 써 주세요~
일주일 아니라 이주일을 써도 좋고요~ㅋ(물론 바쁜 당신으로선 원치 않는 상황일테지만.^)
그래요.. 이 장황 배경설명은 오로지 당신과 나를 위한 것일지도.. 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고글은 패쓰~!^
ㅎㅎ 제목을 유진이가 강조했넹~ ㅋㅋ
내가 강조했는뎅 ~>.<
고글은 패쓰??? 예전에 열심히 고르고 고르셨던 그래도 매우 좋아하셨던 그 고글 아닌가요? ^^* 그래도 뭐 찾았다니까 패쓰하셔도 되는건가요? 아니면.. ㅋㅋ 케이스라서? ^^*
잃어버리셨으면 그 글만 게시판 한 바닥이었을 거에요. ㅋ
흥~ 구구절절 이렇게 긴 글을 형부와 나를 제외한 사람이 열쒸미 읽을 거라 기대치는 않았지만, 고글케이스안에 담겨 있는 안경이라니까. 극적으로 찾았으니까 한 바닥이지, 잃어버린 얘길 뭐 그리 길게 쓰겠냐.(물론 난 할 수 있지만... 흥!)
ㅎㅎㅎ 이렇게 재밌을수가..! 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 언니도 댓글 열쒸미 안읽었지~!!! 난 열쒸미 읽어서 케이스라는 것 알고 있다고요~ >.< 뭐... 고글 얘기를 쓰기도 했지만(자수하자면, 파란 안경이 그 고글인줄 알았지~) ㅋㅋ 아~ 그건 그렇고, 생략된 이야기로 댓글이 줄줄이라니~!!! 푸하하~~ 손 풀어, 손 풀어~~~~
저녁 먹었던 식당 아주머니(할머니?)가 손님들에게 대하는 그 무뚝뚝한 대응은 정말 근래 보지 못한 진기한(?) 모습이었죠~ ㅎㅎ
역시나 멋진 여행이었던 것 같네요 (유진네 따라가기 들어가야겠어요~)
강추강추, 산행도 잘하는 효원이, 준원이면 한 두 코스 정도느 ㄴ너끈히 걸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