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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지가 선정한 이 한 편의 시 후보작품:
임은경, 이영선, 송승안, 임덕기, 하록, 이희석, 김언, 나고음, 이병일, 조영심
정해영, 박송이, 이서빈, 김형식, 문정희, 김명인, 이소연, 이병연, 윤옥란, 류희석
몽고반점
임은경
엄마 자궁에서 나올 때
푸른 점 하나 엉덩이에 새겼지
오래된 기억을 새기고
첫발을 내디딜 땐 모두가 환호했지
초원을 걸을 때나 하늘길을 달릴 때도
푸른 점은 아이를 지켜줬지
아이가 커가면서
몽고반점은 점점 희미해졌지
흙바람에 눈을 감기도 하고
따가운 햇살을 피하기도 하면서
아이는 점점 흙을 멀리하게 되었지
어느 날,
바다 깊은 곳에서 태초의 기억이 말을 걸어왔지
바다 이야기를 간직한 물고기 이야기,
나비와 새가 날던 숲의 이야기
억만 광년의 거리에서 보면
우리는 푸른 점 안에서 살고 있지
서로 손잡고 있지
---애지 겨울호에서
]
새해 첫날
이영선
툭 터진 석류 껍질을 비집고 움찔움찔 붉은 즙이
흘러나온다
낼름 혀로 핥다가는 낄낄대는 개 한 마리
붉은 침이 목으로 가슴으로 가랑이 사이로 튀어 대는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개의
가랑이 사이로 비죽이 서는 그것
석류 훔쳐먹은 죄가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는다
화살나무 사이에서
자작나무 사이에서
사철나무 사이에서
어떤 붉은 것이 발걸음마다
흔들린다
---애지 겨울호에서
주름진 살갗 속에는 더 주름진 속살이 있고
송승안
호두를 굴립니다
굴곡지고 둥근 것이 손안에 있습니다
입으로는 깰 수 없는 소리들
부딪히면서도 거슬리지 않으니 신기합니다
이번 설에는 찾아오는 가족이 없었습니다
해외 사는 독신 아들 전화는 받았으나
지척에 사는 자식들은 전화도 문자도
손주들 사진 한 장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내 죄가 크다고 쓴 웃음을 지었고
세뱃돈 봉투는 며칠 가슴에 품고 있다가
돈은 빼서 본당 수녀님께 드리고
봉투는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렸습니다
여행 중에 휴게소에 잠깐 들르는 일행처럼
자식도 한 때 일행이었을 뿐이라며
고속도로에선 차가 너무 빨리 달린다며
일방통행이라 되돌아오기 어렵다며
기다림도 욕심인가
내 잘못 네 잘못을 따져보다가
하릴없이 호두를 돌려 봅니다
주름진 살갗 속에는 더 주름진 속살이 있고
깊게 파인 내부에는 말 못할 어둠도 있겠으나
던져도 깨지지 않을 심지, 서러움의 굴곡을 다지며
모난 데 없이 여문 것이 손 안에서 구릅니다
---애지 겨울호에서
은행나무의 속성
임덕기
공룡시대 화석이 살아있다
살아서 천년의 삶을 이어간다
더 이상 진화가 필요치 않다고 거부하며
홀로 기품있게 살아간다
홀로 서서 고독을 즐기는 명상가이다
친척도 없이 처음 태어난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잘 버티고 사는 것은
철저한 계획과 준비성으로 태어난
완벽을 추구한 부모 덕분이다
급변하는 계절변화에도 휘둘리지 않는
끈질긴 고집 덕분이다
갈바람이 불어 은행 알이 땅에 떨어지면
누구도 해치지 못하게 악취를 풍겨
처음부터 접근을 막아버린다
이중 잠금장치 안에 열매를 숨겨두고
비로소 안심하는 완벽주의자다
바람에 샛노란 은행잎이 시나브로 떨어진다
길게 살려면 철저한 준비성이 필요하다고
바닥에 떨어진 잎들이 넌지시 제 속내를 드러낸다
---애지 겨울호에서
초대
하록
귀신
괴물
도깨비
시체
뭐가 됐든 놀러와 나는 쓸쓸하니까
악마는 영혼을 사주고 소원까지 들어준다지
어쩜
상냥하게도
땅이 나를 부른다 어지러울 정도로
어서 와 어서 와
열렬한 손짓
먼데서 내려다보다 감동하고 말아
그래 지금 갈게
지금 그리 갈게
새하얀 너를 만날 땐
나는 무엇보다 커다랄 거야
빛도 나만큼 화려하지 못할 거야
겨울처럼 강한 내가 달려들 거야
뭐가 됐든 놀러와
나는 기다리니까
---애지 겨울호에서
사천 해변에서
이희석
한 여인이 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해변 위 도로를 걷고 있다
짧은 치마 밑을 파도의 흰 혓바닥이 기웃거린다
문득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발가락 사이에 낀 모래는 몇 살일까?
육순의 나이가 세상의 가장자리로 밀려나듯
바닷가 모래밭은 제 생의 마지막 여정에 다다른 돌들이
모이는 곳인지도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두텁거나 날카로운 것이 보이지 않는
무게와 크기를 벗어버린
작은 모래들이
반짝거린다
햇빛을 머금고 발바닥을 뜨겁게 한다
푹푹 꺼진다
간지럽힌다
착시가 관점을 무너뜨리고 있다
한 남자가 바다 위를 걷는다
구름이 섬에 걸려 버둥거린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지우며 배 한 척이 간다
해변을 다 걸은 나는
툭툭 슬리퍼를 털어 모래를 떨군다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은 없다
가끔 바위에 부딪혀 부서진 바다가
방파제를 넘어와 다리를 적실뿐
---애지 겨울호에서
나무가 되려다가
김언
나무는 나무가 되려다가 말았다. 지루하게 되려다가 말았다. 희한하게 되려다가 말았다. 이상하게 되고 말았다. 무심하게 되고 말았다. 여기저기 흩어져서 되었다. 쓸모없게 되었고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 알고 있어서도 안 된다. 여전히 부추기는 소리가 있다. 건네받는 소리가 있고 앞으로도 낭비되는 소리들이 있다. 차라리 눕고 싶은 소리를 찾아다닌다. 위태롭지 않으면 안 되는 나무가 서 있다. 계속해서 서 있을 이유를 찾고 있다. 거기 있다고 생각되는 이유를 찾고 있다.
---애지 겨울호에서
노각
나고음
비 오는 날은 비를 바라보며
비만 바라보며.
흐린 날은 구름을 바라보며
구름만 바라보며.
늦여름 무심하게 매달려 있는 노각처럼
편안한 하루가 길게 매달려 있다
누렇게 바랜 듯 삼베 같이 주름 많은 껍질 속에 숨은
하얀 속살, 담백하고 슴슴한 맛을 알아 즐기게 되었다
늙어야 제 맛이 나는 노각
아는 이만 알아주는 맛
나도 어느새 노각이 되어 간다
---애지 겨울호에서
라부여관
이병일
나의 피난처는 라부여관,
그런데 레바논의 백향목이 왜 생각날까
익힌 것은 깊고 잊힌 것은 춥겠지,
욕심은 나를 깨우고 잠들게 하고
핏줄보다 돈이 이끄는 대로
적과 싸우게 하고
총, 칼, 활이 내 관자놀이를 겨누게 한다
고흐, 까마귀 울음으로 칼을 갈아
귓등을 긋고서야 알게 된 것이 있다
왜 피에서 해바라기 냄새가 나는지
왜 피로 죄와 믿음을 씻으려 하는지
오늘 수염으로 가득한 나의 얼굴은
까마귀가 되었다가
사이프러스와 밀밭이 되었다가
다시 새 피 얻을 몸으로 되돌아온다
왜 죄는 눈꺼풀이 없을까
나의 탄식소리로 말미암아
인중에 괸 침묵도 일렁거릴 것만 같다
격리와 고립은 한몸 같은데
얼음구멍같이 갇혀있는 것은 아니다
찔끔, 코피가 흘러나온다
라부여관, 신기하게도 죽음보다
고백을 듣는 방이 많았다
나는 종교도 없이 신앙심을 갖고 싶었다
캄캄한 것이 꾸물꾸물 밝아진다
---애지 겨울호에서
명옥헌 배롱꽃은
조영심
뜰 안에
오래된 하늘을 한 채 들여놓은 건
석 달 열흘 땡볕에
피고 지고 피고 지고 허리 휘었을 날들에
잠시 숨 고르라는 것
간간이 구르는 옥구슬 소리로
귀나 씻으라는 뜻
명옥헌 배롱꽃은 져서도 하늘로 져서
바람결에 잔물결 타고
져서도 한 번 더 붉어서
행여,
피었네! 졌네!
곱네! 곱지 않네!
시답잖은 소리로 시끄러울 것이면
그 꽃빛에 마음이나 씻으라는 뜻
---애지 겨울호에서
말의 즙
정해영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입안에 들어온 딱딱하고 거칠은
이물질 같아 내 뱉고 싶었다
넘길 수 없는 말
입속에 넣고 혀끝으로
오래 굴렸다
녹인다는 것은
둥근 모양으로 어루만지는 일
울퉁불퉁 거친 것을 받아
부드럽게 넘기는 법은
어릴 적
사탕을 먹으면서 알았다
굴릴수록 단맛이 난다
그 말에서 나오는
즙인가
어느새
말이 넘어 간다
돌을 삭이듯
녹여 먹는 말
며칠 혹은 몇 백 년이
걸린다 해도
즙이 된 말은
역사를 바꾸기도 한다
---애지 겨울호에서
목도리를 뜨다가
박송이
동계 장날은 처음이에요 새끼 고양이를 산 것도 처음이에요 새끼 고양이를 묻은 것도 처음이에요 무덤은 처음이에요 폐교에 간 것도 처음이에요 교회 오빠 손을 잡은 것도 처음이에요 발바닥에 못이 박힌 것도 처음이에요 미나리를 싫어한 것도 처음이에요 88오토바이를 탄 것도 처음이에요 다슬기를 잡은 것도 처음이에요 계곡물에 빠져 물 밖으로 끌려 나온 것도 처음이에요 하숙집 두부조림도 처음이에요 목욕탕도 처음이에요 알몸을 맡긴 것도 처음이에요 죽은 닭을 만진 것도 처음이에요 중환자실도 처음이에요 휴학도 처음이에요 드라이아이스도 처음이에요 갈팡질팡했다지만 사랑도 폭력도 다 처음이에요 흘러내리는 빙하는 언제가 처음일까요 매미가 울다 울음을 그치는 것도 여름이 왔다 겨울이 가는 것도 처음이에요 마른 가지가 새순을 틔우는 것도 처음이에요 아이를 때린 것도 처음이에요 완벽한 고통도 처음이에요 한 땀 한 땀 코바늘 뜨개질을 했어요 우는 딸에게 말했어요 설아, 변명 같겠지만 나는 네가 처음이란다 정말이란다 이 손도 뜨개질이 처음이란다
---애지 겨울호에서
13월 32일 멍청요일
이서빈
얄랑얄랑, 청초함 하얗게 흘리며
가을심장 서늘하도록 흔들어대는 구절초
가을 앞세워 달려와 가을 다 지도록
아홉마디마다 구구절절
서성이며 애태우는 저, 가련
내 짝사랑이었다며 혼절 없이 자꾸 홀려
흘깃흘깃 구절초 배를 갈랐다
구절초 뱃속엔
새파란허구만 바글바글
사랑은 커녕
향기 한 방울 꽃잎 한 알갱이도 없었다
분명 구절초 대궁에 핀 꽃인데
농간을 당했다
그럼 구절초에 일렁이는 향기와 꽃들은 대체 어디서 왔단 말인가?
늙은이 젊은이 병신 쪼다 암캐 수캐 멍군 장군
휘파람이 꽃향기가 되었는지
귀뚜리눈알이 꽃이 되었는지 자막을 보고도 읽지 못하고
생각의 풀만 되새김질한다
비에 젖은 부처에게 연잎우산을 씌워주면 해답을 줄까?
풀벌레울음 눈썹만도 못한 생각으로
일기를 쓰는데
구절초 빼꼼 들여다보며 하얗게 희롱하는 멍청요일 밤
---애지 겨울호에서
꾸역꾸역
김형식
아나콘다 뱃속에 사람이 있다
꾸역 꾸역 꾸역마다
꾸역꾸역 들고나는 사람들
진돗개 하나씩 손에 들고 있다
나는 지금 출근 중이다
책가방이 무거운 학생
청바지가 짧은 아줌마는
진돗개에게 먹이를 주고 있고
빨간 모자 할머니는 진돗개 안고 졸고 있다
임산부 보호석 옆자리에 앉아있다
미래의 유일한 희망이 자라고 있는 임부 뱃속
덜컥 덜커덩 눈까풀에 눌려 바깥세상 꺼내 자근자근 씹고 있다
난기류 속 승객들
자동차 급발진
빈번한 전기차 화재
뚜껑 열린 자연재해
입맛 지옥이다
낙토, 낙토는 어디에 있는가
비탈에선 세상
앞에,
대책 없이 불안에 떨고 있는 인간들
안전지대 찾아
들고나는 아나콘다 뱃속
꾸역꾸역
---애지 겨울호에서
당신의 감옥
---마드리드 책의 밤
문정희
초저녁 마드리드는 소나기에 갇혔다
세계 책의 밤! 세계도 책도 밤도 넓기만 하다
퇴적층을 뚫고 뿌리 하나가 솟듯이
은발의 평론가가 대뜸 물었다
당신네 나라의 감옥은 어떻습니까?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 투쟁으로 사형수였던 분이
대통령이 된 후로 감방마다 TV도 있고
난방도 비교적 잘 되고 있다고 해요
당신네 나라의 감옥은 어떻습니까?
나날이 범죄가 증가하여 수용이 넘쳐나요
프랑코 시대도 아닌데 정치범? 혹은
마약과 성범죄등인가요?
어느 시대나 미운 놈은 많죠, 게다가
고통도 자유도 인터넷도 널려 있으니까요
인간은 육신이 감옥 아닌가요
(앗, 마스크를 착용하세요)
작가는 수갑보다 입마개를 더 싫어하죠
오늘은 책의 밤, 책처럼 완성된 사물도 없는데
자꾸 인간에게서 밀려나고 있네요
피와 살이 숨 쉬는 문학은 오래 살까요?
글쎄요. 시인은 언어의 감옥에서
늘 탈옥을 꿈꾸는 수형자
침묵으로도 자유를 표현할 수 있어요
감옥은 사방에 널려 있으니까요
시인의 노래는 결국 감옥의 노래입니다
쉬잇! 너무 과장 미화하지 마세요
시가 달아나요
---애지 겨울호에서
고양이 울음
김명인
다용도실에서 듣는 고양이 울음이
날카롭다, 빈집 둘레라서
저렇게 선명할까, 한 때 들썩이며
홍홍 거리기도 하던데
며칠 째 고양이 울음소리가 휘어진다
목숨을 산다는 건 조근 조근
이웃에게 신호를 보내는 일,
주위가 잦아들며 어느 샌가 고립될
이주단지의 구월이 지나가면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
다들 낯선 소란에 섞여 들 텐데
살던 주인이 비우고 떠난
빈집을 독차지 하고서도 저 고양이
등록부에도 없는 호주로 남아
동네 한밤을 찢을 듯 울고 있다!
---애지 겨울호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
이소연
에밀리 디킨슨이 사랑이 죽은 이도 다시 죽일 수 있다고 말할 때*
나는 믿지 않았다
아무것도 믿지 않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울대뼈 하나만 골라 바오바브나무 아래 묻는다는 이야기를
믿고 싶다 그러므로
한 그루의 불신에는 한 사람의 목소리가 스며있다
작은 새가 와서
바오바브나무에게 목소리를 달라고
석달하고 열흘동안 빙빙 돌면
작은 새의 목에선 흙냄새 난다지
그 새, 너무 작아 겁이 없다지
한때 사람이었던 때를 기억하는지
옛집에 들러 씨앗 하나를 떨어트린다
바오바브나무가 자라고
눈코입 달린 새가 된 한 사람
눈에 잘 띄기 위해
목청이 큰 바람새가 되었다는데
왜 아무도 듣지 못하는지
오래도록 불타는 땅에서만 그 나무 자라는지
어쩌다 해는 새까만지
나무에서 나온 말이 우물인지
우기는 벽을 뚫고 오는지
색은 얼룩에서 잠드는지
깨어나보니 반사광에 눈이 시린 오후 다섯시 반이었다
내 얼굴인지 새의 얼굴인지
어떤 짐승의 입에 물려 있었다
*에밀리 디킨슨 <Love can do all but raise the dead>로 부터 온 김복희 시 <사랑하는 신>으로부터.
---애지 겨울호에서
담금질하다
이병연
비가 작심을 했다
때를 기다린 듯
수직으로 내리꽂으며 사선으로 옆구리를 찬다
잎이 놀라 몸을 움츠리고
중심을 잃고 비틀대다
비수처럼 꽂히는 빗줄기를 튕겨낸다
잎맥을 키워준 햇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천지를 호령하는 빗속
오그라든 심지를 돋우어야 할 때
잊고 지낸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앞으로 나가는 발판도 어둠 속
내리붓는 여름비에
무른 근육을 다지고 있다
몰아치는 비의 늪에서
잎은 어둠을 빛으로 읽는 중이다
---애지 겨울호에서
능소화의 비밀
윤옥란
턱, 턱 숨이 막히는 대장간
사내가 쉼 없이 망치질을 한다
망치를 한 번씩 내리칠 때마다
쇳덩어리는 꽃잎같이 점점 얇아지고
사내의 타는 숨결이 헉, 헉, 헉 타들어간다
사방 막힌 철문 안에서
벌건 쇳물이 지지직하고 흘러나올 때
지붕을 뒤덮고 꽃잎으로 피어나는 능소화
허공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달음박질치는 바람의 발뒤꿈치도 시뻘겋다
공중으로 타오르는 빛의 꽃무늬
먹잇감을 향해 쫓아가는 초원의 짐승처럼
갈기를 휘날리며
또한 세계를 점령하는 능소화의 붉은 혀
불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전극
그 비밀이 내 발목을 잡고 놓지 않는다
윤옥란 2018년 {미네르바}로 등단.
---애지 겨울호에서
횡단보도
류희석
오랜만이네
신호가 바뀌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잠깐만
나는 엄지로 스피커를 막았다
사람들이 놀라지 않게 신호는 천천히 꺼진다
말해도 돼
뒤늦게 도착한 사람이 정지선에 멈춰 좌우를 살핀다
나를 발견하고 놀란다
소식 들었어
가쁜 숨과 떨리는 목소리를 들키지 않기 위해 한 걸음 물러선다
그와 나는 정해진 범위 내 가장 먼 곳에 위치한다
신호가 바뀌면 건너는 것과
모르는 사람을 모르는 채로 두는 것은
학습된 규칙
괜찮아 다 잊었어
다시 신호가 바뀌어
거리가 잠깐 밝아졌을 때
그는 선에 걸린 줄도 모르고 뛰쳐나갔다
나는 그에게서 흘러내린 허물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바스러진 비닐처럼
소란하고 매끄러운
사람이 사람을 잊는 것과
다음 사람이 뛰어오는 것은
불규칙
신호가 멈춘 줄 알고
우리는 동시에 검은 화면을 마주본다
---애지 겨울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