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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욥의 고난에 동참하자
욥1:1-22, 42:12-17, 시119:71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마치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과 같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땅에서 고난없이 사는 인생은 아무도 없다. 각자가 자기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고난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고 나면 이런 고난이 자신에게 유익이 되었다는 것은 그 후 문득 떠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고난 때문에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나는 고난때문에 주님의 법을 배우게 되어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고난이 과연 유익일까요? 예전에 소록도 한센인 마을에서 한센인들을 돌보는 한 의사 선생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 생각납니다. ‘한센인들은 겨울철 난로 앞에서 손에 화상을 입은 줄도 모르고 계속 불을 쬐다가 손을 잃게 된다든지 발에 동상이 걸린 줄도 모르고 계속 일을 하다가 발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고통을 느꼈더라면 손과 발을 지켰을 것입니다. 여러분,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입니다. 사람은 고난 때문에 죽지 않습니다. 고난이 없을 때는 죽는 줄도 모르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기보다 고난을 잠시 잊게 만드는 진통제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고통을 잊어버리려고 대부분 진통제를 사용합니다. 알콜 중독, 약물 중독, 게임 중독, 성적쾌락 중독 등 고난을 피하는 진통제에 중독되어 결국 자신이 서서히 망가지는지도 모르게 삶이 망가져 가는 것이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신포도주를 거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신포도주는 당시 진통제였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죽음이라는 고난을 통과하여 영광에 이르는 길이고 부활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난 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고난이 유익이라는 말이 전혀 와 닿지 않으므로 그저 기도할 뿐입니다. 그가 이 아픔을 잘 견뎌서 언젠가는 자신의 아팠던 때를 회고하며 그게 유익했다고 고백할 수 있도록 기도할 뿐입니다. 바울은 일평생 주를 위하여 충성하다 로마선교를 위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항해하는 배에 압송되었으므로 누구하나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는 데다가 항해 중에 풍랑을 만나 죽을 위기를 경험하게 되니 이보다 더 나쁠 수가 있을까? 사도행전 27장의 사도 바울의 모습이 바로 그러합니다. 그레데 뵈닉스 항구에 정박한 배가 출항하려고 할 때 바울은 반대합니다. 이번 항해로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을 경고합니다. 그러나 죄수의 말을 그 어느 누구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아시아의 교회들을 다니면서 권위있게 복음을 전파하던 설교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말에는 아무런 권위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항해하던 배는 큰 풍랑을 만나고 좌초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사흘 밤낮을 고생하면서 그들은 배의 모든 물건을 다 버렸습니다. 여기저기 구토와 아우성 속에서 바울은 어떤 행동을 했을까요? 성경은 바울이 불평했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 바울은 불평을 모르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 수십가지를 기록하고 있지만 바울은 오히려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고백합니다(고후11:23-29). 이 난파선 같은 배에 타고 있는 바울은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위로합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내게 주셨다고 합니다(행27:24). 그 후 14일 동안 배는 어려운 항해를 지속합니다. 그 기간 동안 바울은 배에 타고 있는 사람 하나하나를 찾아다니면서 위로하고 말씀을 전했을 것이라고 상상해 봅니다. 당신 어디서 왔소? 난 빌립보에서 왔는데요. 그래요 그렇다면 빌립보의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아시오? 바울은 아시아와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만들었던 인맥을 총동원하여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한명 한명에게 복음을 전파했을 것입니다. 거기 타고 있는 276명 전원을 구원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기록했을까요? 그들 모두가 바울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즐거운 상상을 해봅니다. 왜 하나님께서 바울을 죄수로 더우기 풍랑가운데 빠뜨렸을까요? 그것은 276명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전 오늘 이 아침 그 역전의 고난 가운데 축복이 우리 가운데 있기를 소망해봅니다. 흔히들 말하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 기독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지만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오해하는 것은 자신이 사랑받는 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사도 요한이 가이오를 향해서 가이오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그를 향하여 마음껏 축복기도를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공 의식이란 심리현상이 있습니다. 자기는 영화속의 선한 주인공이고, 악한 사람은 결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성경에서도 사랑받는 가이오는 무조건 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사도요한이 가이오를 사랑하고 복을 빌어주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이며(요삼1:3). 나그네 대접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사람이며(요삼1:5). 가이오에 대하여 들려오는 모든 소식들은 전부다 아름다운 소식, 칭찬하는 이야기뿐입니다(요삼1:4). 사도 요한이 가이오를 생각할 때 너무 자랑스럽고 기뻤습니다.반면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있습니다(요삼1:9). 그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으뜸되는 일,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인정받는 일에는 나서지만 그렇지 않은 일, 나그네를 대접하거나 불쌍한 사람을 돌보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악한 말로 비방하는 사람이고, 형제들(전도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도요한이 디오드레베를 위해서는 그의 행위를 결코 잊지 않겠다고 말합니다(요삼1:10).이제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살펴봅시다. 아직도 자신은 복받기에 합당한 가이오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돈, 명예, 권세, 지식으로 높아지기를 원하면서 다른 사람은 전혀 돌보지 않는 디오드레베는 아닙니까?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너무 자기 좋은 쪽으로만 읽지는 않습니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지 않습니까? 그건 기독교가 아니라 미신입니다.성도에게 있어서 고난은 다음과 같은 유익을 줍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하오니 이로써 내가 주의 법규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고난을 통해 인간은 겸손을 배우게 되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며 분명한 것은 고난을 경험한 사람들은 고난중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코로나로 인한 고난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고난이 주는 유익’이 있습니다. 평소 몸의 저항력을 위해 운동이나 필요한 음식을 섭취한다는 것이 정말 코로나에는 저항력을 높여 준다는 것입니다, 정말 건강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깨달음을 얻고 있습니다. 모두가 겪는 코로나 고난은 특히 가족의 소중함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가족 같은 교회가 되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가시에 찔리지 않고서는 장미꽃을 모을 수가 없듯이 고난은 사람의 참된 값어치를 시험하는 시금석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을 통해 사람은 고난을 통해 참된 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임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격언에는 금과 은은 불 속에서 정련되어야 비로소 빛이 난다고 합니다. 이 격언이 말하는 바는 사람도 역경으로 단련되지 않고서는 큰 인물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날이 밝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는 것처럼 또 만일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봄은 그토록 기다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도 이따금 역경을 맛보지 않는다면 성공은 그토록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욥이 받은 고난을 음미해 보려고 합니다. 언뜻 고난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떠오르지만 인간으로서 욥처럼 고난받은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욥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고난이라는 말을 연상하게 됩니다. 욥기 1:1은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로 시작합니다. 욥이 살았던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욥은 실존 인물로 하나님께서 욥을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자녀들이 잘된 일에 대해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까? 욥기 1장은 하나님이 거짓과 참소의 대가인 사탄에게 욥을 칭찬하셨습니다. 8 네가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난 사람이 세상에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욥을 이처럼 사탄앞에 높이니까 사탄이 말합니다. 9 사탄이 주께 응답하여 이르되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나이까? 10 주께서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를 사방에서 울타리로 두르지 아니하셨나이까? 11 그러나 이제 주의 손을 내미사 그의 모든 소유에 손을 대소서, 그러면 그가 주의 얼굴 앞에서 주를 저주하리이다, 하면서 욥이 하나님 잘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욥을 축복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욥이 가진 것을 다 빼앗아 버리면 욥도 별수 없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떠날 것이라는 것이다. 이 때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욥은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니 그렇다면 네가 욥을 시험해 보라고 허락하십니다. 당연히 사탄은 욥의 재산을 뺏으면 금방 하나님을 저주하고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하늘에서 하나님과 사탄과의 회의에서 욥의 고난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당했던 고난은 순전히 욥이 하나님을 진실하게 경외한다는 것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허락하에 욥이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온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부터 온 것인지 확인하기 바랍니다.
1. 욥이 받은 고난들
어느 날 갑자기 사탄이 욥의 재산과 열 자녀들을 파멸시킬 때에 욥이 어떤 태도를 나타낼 것인가를 두고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대결이 시작되었습니다. 사탄의 생각대로 욥이 모든 재산을 잃을 때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떠난다면 사탄이 이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욥에 대해 자랑했던 것이 가짜로 드러나기 때문에 하나님은 불명예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재산을 잃었는데도 욥이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잠시 후에 어느 날 욥이 갑자기 당하는 고난을 보겠습니다.
(1) 소유물이 순식간에 소멸되는 고난
성경은 그 때 욥이 동방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다고 했습니다. 3절을 보면 욥의 재산이 공개되었는데 양 7,000마리, 낙타 3,000마리, 암나귀 500마리, 소 500마리, 그밖에 종들이 여럿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웃나라 야만인들이 쳐들어와서 짐승을 치던 종들을 모두 죽이고 목장을 모두 불태우고 짐승 떼를 모두 끌고 갔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욥1:14-17) 14 한 종이 황급히 뛰어 들어와 보고 하기를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것들 곁에서 풀을 먹는데 15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아 가고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이 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종이 뛰어 들어오면서 욥에게 보고 하기를 16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들과 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보고하기를 17 갈대아 사람이 세 무리를 지어 갑자기 낙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재앙이 겹쳐 일어날 때마다 한 사람만 살아남아 재난의 소식을 전하는 것은 사탄은 각 재앙 때마다 한 사람을 살려 욥에게 보고하게 하여 욥에게 고통을 더 합니다. 그러니까 손을 써볼 겨를도 없이 생명과도 같은 전 재산이 하루아침에 다 소멸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갑자기 재산을 잃어버리게 되면 충격을 받아 정신을 잃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자살까지 합니다. 그런데 생명과 같은 재산손실 보고만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이 사람들의 보고가 다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사람이 뛰어와서 보고를 하는데 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욥1:18-19) 18 주인의 자녀들이 그들의 맏형 집에서 음식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데 19 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집이 그 젊은이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했습니다.
욥은 하루 동안에 네 번의 재난이 겹쳐 일어나면서 자녀들과 재산을 몽땅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엄청난 재난 앞에 보통 사람들 같으면 정신잃고 까무라칠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런 재난 앞에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욥1: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으며 머리를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욥은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나타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했다고 했습니다.
욥에게는 10남매가 있었는데 자식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업입니다. 형제 중에 한 사람이 생일을 당하면 모든 형제들이 그 집에 모여 즐겁게 보내곤 했던 것을 본다면 그들은 아주 우애가 좋았습니다. 그 날도 맏아들 생일이라 모든 형제들이 맏형 집에 모여서 잔치 하였을 때 갑자기 강풍이 불어니 그 집을 무너뜨려 욥의 십남매들이 다 압사해 버리는 끔찍한 사고를 일으킨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재앙도 있습니까? 재산을 잃어버리는 아픔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재앙인데 그것도 자식 하나가 아니고 10남매 모두가 한 날 한 시에 한 장소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욥이 어떠했겠습니까. 20절 보면 그 때의 모습을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냥 앉아서 들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벌떡 일어나서 "옷을 찢었고 "머리털을 밀었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극도의 슬픔을 당하면 옷을 찢는다고 합니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 같았으면 머리를 쥐어뜯었거나 가슴을 쥐어뜯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털을 밀었다는 것은 죽음을 표시합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개화기 때 단발령이 내렸지만 사람들은 한사코 상투 자르기를 거부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욥도 머리를 밀었고 그리고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 드리면서 하는 말이
(욥1; 21) 주신 분도 주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시오니 주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께 엎드려서 경배 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 같은 범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면 욥은 어떻게 그렇게 초연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욥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전 재산이 한꺼번에 없어진 것이나 열 남매가 한 날 한 시에 죽은 사건은 이것 모두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은 여기에 분명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같은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그래서 신앙에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불평하게 되고 원망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이것을 배워야 할 교훈입니다.
하루아침에 소중한 재산이 모두 없어진 것을 욥은 하나님이 주셨던 것을 하나님이 가져가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욥의 물질관은 매우 정확합니다. 물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이므로 우리는 그 물질의 관리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필요에 따라 그 물질을 회수해 가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물질을 잃어 버렸다고 하지만 그것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회수해 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통해서 얻는 교훈이고 우리가 알아야 할 바람직한 청지기관 입니다.
사람은 물질관이 분명하면 물질 때문에 시험 당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물질이 많다고 해서 교만할 이유도 없고 또한 물질이 적다고 비관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그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신자도 하나님이시오 가져가신 자도 하나님이시라고 오리혀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사탄의 제 일차 시험은 이렇게 해서 패배를 합니다.
이런 고통을 겪으면서 그는 이 모든 일에 죄를 짓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을 어리석게 비난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 사탄에게 패배를 준 것입니다. 우리도 욥과 같이 엄청난 고난이 겹칠 때에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앙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원망과 불평을 하면 사탄의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무조건 감사 찬양하면 사탄은 패배하고 우리가 승리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빌4:6-7)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욥이 재난 가운데서도 감사를 한 것은 그의 고백에서 잘 나타납니다.
(욥1:21-22)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벌거벗은 채로 나왔사온 즉 또한 벌거벗은 채 그리로 돌아가리라. 주신 분도 주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시니 주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죄를 짓지 아니하고 어리석게 하나님을 비난하지도 아니하였더라.
인생은 벌거벗고 왔는데 자신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셔서 그 동안 부유하게 살았다는 것이 청지기 신앙입니다. 하지만 막상 그런 상황에 닥치고 보면 우리가 정말 욥과 같이 감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은 욥의 믿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저 없이 욥을 사탄에게 내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으로 인해 승리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욥 2:3) 주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살펴보았느냐? 그와 같이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가 땅에 없느니라.
사탄에게 말하였던 것이 빈말이 아니라 사실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욥의 감사를 통해 첫째 대결에서 하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2) 욥의 몸을 상하게 하는 고난
욥이 재산과 자녀의 시험에서는 승리했지만 사탄은 그것으로 굴복하지 않고 이번에는 욥의 몸을 치면 욥도 별 수 없이 하나님을 저주하고 떠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몸을 치는 것 까지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욥에 대한 신뢰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고난에 간섭하셔서 그 고난을 이기도록 도우실 수 없습니다. 욥 스스로 이겨야만 하나님이 욥을 걸고 사탄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과는 달리 욥처럼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사탄에게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욥 2:5)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에 대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저주하리이다, 하매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의 몸도 허락하신 것은 사탄이 첫 번째 시험에서 실패한 것에 대한 변명으로서 욥에게 보다 더 강도 높은 시험을 하려는 사탄의 의도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욥은 질병의 고통을 받게 됩니다.
(욥2:7-8) 7 사탄이 이에 주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8 그가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으며 재가운데 앉아 있더라 했습니다.
이 질병으로 나타난 욥의 모습을
(욥7:5) 내 살에는 벌레들과 흙덩이가 입혀졌고 내 살갗은 터지고 역겹게 되었으며 했습니다.
여기 종기는 아주 무서운 문둥병의 일종으로 증상은 아픈 종기와 가려운 증, 얼굴 피부를 상하게 하고, 종기에 벌레가 생기고, 전신으로 확산하고, 호흡이 곤란해지고, 입에서 냄새가 나고, 피부가 검어지고 열이 난다고 합니다. 그 후에는 처참한 악창이 발생하여 순간의 고통이 아닌, 장구한 고통으로 이어진다. 이 고통에서도 욥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탄이 두 번째 시험에도 패배를 했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고통이 시작됩니다.
(3) 아내가 저주하면서 욥을 떠나가는 고통
욥은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심한 종기가 나고 냄새가 나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당대 최고 부자로서 종들을 거느렸던 욥이 이제는 피부에 종기가 가려워 자신이 기왓장을 가져다 몸을 긁으며 재위에 누워있다. 이런 가장 힘든 시기에 옆에서 인생의 동반자인 아내가 곁에 있으면 얼마나 위로가 될까? 부부는 고난을 함께 나누어 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욥의 아내는 고통중에 있는 욥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욥을 더욱 괴롭힙니다.
(욥2:9) 당신이 아직도 당신의 순전함을 지키느냐?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는 악한 말을 하였다.
이것이야 말로 참을 수 없는 고난을 통해서 점점 약해져 가는 욥의 의지에, 아내의 말은 치명적이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이 세상의 것을 다 잃어도 아내는 잃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아내가 소중한 존재라고 하지만 고난이 왔을 때 가장 고통을 주는 사람도 아내라는 것입니다. 욥의 아내도 욥이 재산을 잃고 자식을 잃고 욥이 몸에 병까지 나니까 이제는 욥을 저주하고는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사탄은 욥의 입에서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하는 말이 나오도록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한가지 씩 뺏어 갑니다. 평소에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을 무자비하게 격리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고독하게 만들고 외롭게 만들고 주위로부터 소외될 때 괴로워하면서 하나님을 저주하는 모습을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욥의 아내가 남편을 저주하고 집을 나가도록 아내까지도 빼앗아 버렸습니다. 욥의 고난은 그래서 더 처절했습니다. 사람의 처지가 이 정도가 되면 땅을 치기도 하고 불평도 하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적인 말도 나올 듯 한데 욥은 좀처럼 중심을 흐트러뜨리지 않습니다. 단지 욥은 어리석은 여자의 말로 치부하고 여전히 순전을 지킵니다. 그러니까 욥은 지금 이 고난이 철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시련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 한번의 하나님의 승리이며 사탄은 여지없이 패배를 맞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성도들에게도 환난과 고난을 통해 성도들의 신앙을 더욱 연단시켜 훌륭한 성도로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욥23:10) 나의 가는 길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는 말씀입니다.
(4) 친구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는 고난
아내마저도 떠나고 욥이 갑자기 몰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욥의 세 친구들이 욥을 위로하고자 찾아온 친구들은 욥의 몰골을 보고 통분의 눈물을 흘렸고 자기의 겉옷을 찢고,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일 칠야를 말없이 욥의 옆에 같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욥을 더 화가 나게 한 것은 찾아온 친구들이 위로한다는 말이 네가 죄가 없으면 이런 고난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 무조건 회개하라고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한 말의 요지는 하나같이 욥이 고난을 당하는 원인을 욥이 범한 죄에서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욥의 상처에 고통을 더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욥이 귀를 틀어막으면서 소리 지르기를 "제발 입 좀 다물라"고 화를 냅니다. 우리들이 혹시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 위로한다고 가서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 정도가 되면 누가 와서 위로 한다고 해도 실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욥에게 가서 무슨 말로 위로를 하겠습니까? 그런 때는 위로하는 방법은 아무 말하지 않고 같이 울어주는 일입니다. 무슨 말이 그로 하여금 위로가 되겠는가요?
(5) 하나님의 무관심으로 인한 고통
욥의 고통을 능가할 만한 것은 겟세마네에서의 주님의 고통 이외에는 없습니다. 내적으로 고결하고 악에 대해서 완전히 떠난 자가 받는 고통을 보시는 하나님은 슬픈 분노를 느끼십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의 고통이 극복될 때까지 우정 어린 침묵의 응원을 보내 주십니다. 십자가상의 주님의 고통을 침묵했듯이 욥에게 있어서도 그랬습니다.
사람은 재산을 잃어도 살 수 있습니다. 자식을 잃어도 아내를 잃어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입니다. 욥은 온몸에 난 종기로 가려워서 기와 장으로 긁기고 했고 진물이 나고 피가 나서 개들이 와서 핥았다고 했습니다. 나중에는 가려워서 견딜 수가 없어서 잿더미 속에서 뒹굴었고 마침내는 살가죽이 뼈에 붙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욥의 고난은 정신 차릴 사이가 없을 정도의 입체적인 고난임에도 욥의 중심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고백한 말이
(욥19:26)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합니다.
이 말은 "이러다가 내가 죽으면 내 영혼이 친히 몸밖으로 나와서 하나님을 뵈오리라"는 말입니다. 욥은 죽음을 앞에 두고는 확실하게 죽는 그날 내가 하나님을 직접 볼 것이라고 합니다. 신앙인에게는 이런 내세관이 확실해야 합니다. 하지만 욥이 무엇보다도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자식 죽은 것도 참을 있었고 재산 잃은 것도 참을 수 있었고 아내가 떠난 것도 몸에 병든 것도 참을 수 있었는데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 자신을 외면하시는 일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위로가 없다는 것이 욥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뇌였습니다. 그래서
(욥13:24) 어찌하여 주께서 주의 얼굴을 숨기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하고 항변을 합니다.
내가 지금 죽게 생겼는데 하나님은 왜 모른 척 하고만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무관심만은 참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세상사람 누가 와서 조롱을 한다해도 견디겠는데 하나님이 자신을 이렇게 외면하시는 것 만큼은 참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탄식하기를 "어찌하여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하며 탄식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부르짖었던 바로 그 절규입니다. 욥의 이 피맺힌 절규를 듣고는 사탄이 마침내 욥에게서 손들고 도망갑니다. 사탄이 끝내 항복을 한 것입니다.
2. 엘리후 등장으로 욥과 세친구의 잘못을 깨닫게 하다
32장에서는 엘리후(그분은 하나님이시다 라는 뜻)가 등장한다. 그는 지금껏 세 친구의 변론과 욥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이야기를 다 듣고만 있다가 이제 양편주장이 끝나자 개입한 이유는 첫째는 욥이 하나님보다 자신을 의롭다고 주장하는 것이 못마땅해서 이고(2) 둘째는 욥이 자신을 의롭다고 주장할 때 그의 친구들이 거기에 대하여 적절한 반론을 펴지 못하고 오히려 욥을 죄인 취급하기 때문(12)에 개입하겠다는 것이다. 엘리후가 지금까지 개입안한 이유는 욥과 세친구들 보다 연소했기 때문이다.
33장에서는 자기가 하는 말을 호의적으로 받아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1-3). 그러면서 욥에 대하여 의롭지 못하다고 이야기 한다.
1) 욥 스스로 나는 범법이 없이 깨끗하며 무죄하고 내 안에는 불법이 없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9).
2) 하나님과 다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 하나님께서 왜 고통을 주시는가 따진다는 것을 불경하다는 것이다(13).
34-37장은 엘리후의 최종 변론이다.
34장은 신관에 대한 차이점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엘리후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결코 불의와 악을 행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에 모든 사람들을 각자의 행위대로 보응하신다. 즉 욥에게도 하나님은 그의 고난을 무조건 죄의 결과라고 보아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전혀 무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10-15) 또 하나님은 지위나 재산 등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신다(17-19). 그들의‘행위를 따라’심판하신다(25). 그러기에 욥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회개하라는 것이다.
35장에는 세 번째 변론이다.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께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1-8). 기도의 응답이 없는 이유를 밝히는 부분이다(9-16). 기도의 응답이 없는 이유는 회개하지 않은 교만한 태도로 기도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36장에서는 엘리후의 4차 변론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고 복종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러면서 엘리후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위대하셔서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 년 수를 계산할 수 없다(26).
37장에서는 엘리후의 4차 변론을 마치면서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송할 때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님의 두려운 위엄이 있다는 것이다(22). 이 모든 것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영광을 돌릴 때 모든 문제가 풀린다는 것이다 (24).
엘리후의 등장으로 욥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욥의 친구들도 욥에게 죄문제로 몰고 갔던 것도 회개하게 되었다. 그래서 욥은 회개한 후 하나님이 인정하신 그대로 동방의 의인이었다. 그렇다면 욥은 그가 당한 고난이 얼마 동안 지속되었겠는가?
3. 욥이 받은 고난의 기간
우리들은 욥이 당한 고난만 생각하지 그가 고난을 얼마나 오랫동안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욥이 2주 동안 고난을 당했을 것이라 말하는 것은 욥을 위로하려 온 친구들이 욥기2:13에,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면서 일주일 동안 침묵하다가 그리고 욥기 3장부터 42:6까지 네 친구들과 욥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시기까지 일주일 해서 총 2주 정도 고난을 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욥기 7:3에서 욥은 친구들이 오기 전에 이미 여러 달 동안 고난 가운데 있었다고 말합니다. 여기 여러 달일 수도 있으나 일년은 넘기지 않았다는 것인데 과연 일년도 고난을 받지 않았단 말인가?
욥기서 42:10에,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주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의 고난이 마치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후 주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했습니다. 또 욥기 42:16-17에, 이 일 뒤에 욥이 140년을 살며 자기 아들들과 손자들을 사 대까지 보았고 17 이렇게 욥이 늙고 날들이 차서 죽었더라.
그런데 70인역(LXX-헬라어)에서는 욥기 42:16의 내용이 우리 성경과 다르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욥은 고난을 시작한 때부터 170년을 더 살았고 따라서 그는 모두 240년을 향수하고 죽었다”했습니다. 70인 역에서는 욥이 고난을 시작한 때부터라고 했으나 개역 성경에는 고난이 끝난 후 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경은 고난이 끝난 때로부터 140년을 더 살았고, 70인 역은 고난이 시작된 해로부터 170년을 더 살아서 총 240년을 향수했다고 합니다. 그 차이가 30년 입니다.
그러므로 유추해보면 욥이 재산과 자녀를 모두 잃고 온 몸이 악창으로 고통당한 기간은 30년입니다. 개역성경에는 30년이란 말이 없지만, 욥42:16-17의 개역성경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을 대조하여 보면 욥이 고난당한 기간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습니다. 고난이 시작된 나이는 70세(240-170), 고난이 끝난 나이는 100세(240-140), 그러므로 욥은 30년(=100-70)간 고난을 당하였으며, 그 후 140년을 더 살아 240세를 향수하고 죽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30년은 고난과 함께 욥기7:3에서 욥이 질병을 여러 달 동안 고통을 받는 중에 친구들이 오게 되고 그 친구들과 대화를 나눈 기간이 끝나면서, 욥기 42:7-10에 의하면 그 친구들이 욥에게 가서 번제물을 드리고 욥이 친구들을 용서해 줄 때에 욥의 질병이 끝나게 되고 그리고 욥의 자녀들과 재산이 고난 전의 갑절이 되기까지 30년이 걸린 것입니다.
(욥42:10)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주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주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에서
10절 한 절에서 30년의 세월이 지난 것입니다.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셨다는 것은 그 후로 자녀나 재산이 갑절이 되기까지 30년이 걸린 것입니다. 고난이 시작될 때에 잃은 재산이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잃었던 10자녀를 하루 만에 생기게 하지 않습니다. 열 자녀를 낳는데 3년 터울이면 30년이 걸립니다.
그리고 고난이후 욥은 140년을 향수하였는데 이는 70인 역에서 언급했던 240년을 향수하였고 이제 늙어 죽은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욥의 고난
(1) 욥이 고난 받은 이유
누구나 당하는 고난 외에 성경이 말씀하는 또 다른 차원의 고난이 욥의 고난입니다. 욥의 고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한 말의 요지는 바로 율법적 관점이었습니다. 그들은 욥이 고난당하는 원인을 죄를 회개하라는 말로 욥에게 고통을 더해주기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욥기의 뒷부분에서 친구들을 책망하십니다. 우리는 욥의 친구들과 달리 욥기 1~2장을 통해서 욥에게 고난이 찾아온 이유는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의 신앙을 칭찬하셨기 때문에 발생한 고난이었습니다. 주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8). 사탄이 주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욥 1:9-11).
까닭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은 없다는 것이 사탄의 요지입니다. 사탄의 신학은 번영신학 그 자체입니다. 세상에서는 잘 되고 축복 받으려고 믿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제안을 하십니다. 주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욥1:12).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예를 걸고 내기를 하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녀들의 믿음을 그렇게 우습게보지 말라는 겁니다. 이것이 욥이 고난을 받은 직접적 이유였습니다.
1라운드를 보면, 인간이 이렇게 철저하게 망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욥은 하루아침에 망했습니다. 아마도 욥이 분산투자해 놓았던 모든 재산이 한꺼번에 다 날아갔고, 사랑하는 열 자녀들이 한날 한 자리에 서 다 압사되어 죽었습니다. 사탄이 욥의 믿음의 거짓됨을 증명하기 위해서 몰고 온 고통은 잔인하고도 혹독했습니다. 이 고난을 대하는 욥의 신앙은 욥기서 1장 입니다.
(욥1:21-22) 21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22 주신 분도 주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시오니 주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은 자기 믿음의 참됨을 입증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욥의 몸에 고통을 준다면 욥이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탄이 주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참으로 사람이 자기의 생명을 얻기 위해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리이다. 그러나 이제 주의 손을 내미사 그의 뼈와 살에 대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의 얼굴 앞에서 주를 저주하리이다.(욥 2:4-5). 소유만 건드려서는 소용없고, 결국 그 사람 자신을 치면 믿음을 배반할 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도 허락하십니다. 주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그를 네 손에 있으니 그의 생명은 살려둘지니라(욥 2:6). 이제 진짜 깊고도 오랜 욥의 고난 2라운드가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이기적 욕구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욥의 고난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욥과 그 신앙을 칭찬하고 자랑하셨기 때문에욥이 고난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믿음을 걸고,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입증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사탄에게 내기를 거셨고, 욥은 고난 속에서 범죄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것이 욥의 고난 받은 배경입니다.
(2) 욥이 받은 고난의 의미
욥의 고난은 어떤 면에서 욥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고난이었습니다. 하늘에서 일어난 일을 전혀 알지 못하는 욥이나 세 친구들이 이 고난의 원인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순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믿어주셨기 때문에 일어난 고난입니다. 사탄이 말한 것처럼, 욥의 믿음이 그저 울타리를 쳐서 복 받게 하셨기 때문에 믿는 번영식학의 믿음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무너져도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뢰를 버리지 않는 참된 믿음인 것을 믿어주셨고, 허락하신 고난 속에서 욥이 그 믿음의 참됨을 입증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당신의 영예를 지키셨고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9:3에서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기를 저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 된 것은 누구 죄로 인한 것이냐고 물었을 때에 누구의 죄도 아니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예수님께서 치유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뜻입니다. 의인이 고통당하는 것은 죄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질병이나 고난을 통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징계를 주시는 것은 죄와는 상관없이 의인이 고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칭찬하시고 자랑하시기 까지 인정한 사람입니다. 욥이 당한 고난은 하나님께서 욥을 사랑하셔서 더 큰 영적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욥42:5) 내가 귀로 듣는 것을 통해 주께 대하여 들었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이 말하기를 고난 받기 전에는 하나님을 영적 귀를 열어주셔서 듣기만 하였는데 고난 받는 중에 주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주님을 눈으로 보게 되도록 영적 눈을 열어 주셨다고 고난 받기 전에는 자신은 자타가 공인하는 의인이라고 자신했는데 고난 후에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더욱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3) 욥은 고난 후 갑절의 축복을 받다.
욥은 30년 고난을 통해 자기의 무지, 거만한 태도, 자기 입술의 부정함과 잘못된 생각 등을 깨닫고 스스로 한하며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였습니다(욥42:3, 6, 잠28:26). 그러면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라는 위대한 믿음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는 자기가 부요한 중에서 하나님을 섬기던 때보다 말할 수 없는 환란에 처하였을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더 실감 있게 체험하였다는 고백으로, 고난의 참된 뜻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19:25) 내가 알거니와 내 구속자께서 살아 계시고 또 마지막 날에 그분께서 땅위에 서리라. 하였습니다.
이는 초림 예수가 오실 것을 예견하신 말씀으로 이스라엘의 메시아 신앙이 그에게 싹이 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벌써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었고 그가 이 땅에 오실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 주가 되시고 심판 주가 되시어 땅 위에 서실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의 태풍은 욥으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하는 은총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욥이 이처럼 끝까지 신앙의 정조를 지킨 결과, 하나님께서 욥에게 그 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셨습니다
(욥42:10, 12-13) 10 욥이 자기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주께서 그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시고 또 주께서 욥에게 그가 전에 소유했던 것의 두배를 주시므로 12 이와같이 욥의 마지막 끝을 그의 처음보다 더 복되게 하셨으니 그는 양 14000마리와 낙타6000마리와 소 1000겨리와 암나귀 1000마리를 소유하였더라. 13 또 그가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더라. 그의 수명도 갑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고난 받기 시작한 나이가 70세이므로, 고난이 끝난 이후 70년의 두 배인 140년을 더 살게 하셨습니다. 욥은 140년간 고난 이전보다 더욱 활력과 기운이 넘치는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5. 욥의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얻고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어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 될 하늘 본향을 바라며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어떤 희생이라도 감당할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막10:29-30)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기독교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에 수많은 성도들이 주님과 복음을 위해 순교하였던 사람들을 히브리서 11:38에서 세상이 감당못할 사람들이라고 한 사람들은 사막과 산과 동굴과 땅굴에서 떠돌아 다녔느니라 했습니다. 이들은 이렇게 고난을 받을 필요가 없었고 또 죽을 필요가 없었는데도 주님과 그 복음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욥의 고난과 인내는 사람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하고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일찍이 야고보는 인내하는 자가 복되다 하면서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볼 때까지 인내한 욥과 같이 선지자들의 고난과 오래 참음을 본 받을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였습니다(약5:10-11).
욥의 고난은 바로 신약시대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성도들을 나타냅니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