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한국사회의 당면 문제와 경허(鏡虛)의 사상:
사회 윤리적 맥락을 중심으로*
박재현(동명대학교 불교문화학과, 조교수)
*) 이 논문은 2012년 11월 21일에 개최된 ‘경허산사 열반 100주년 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 목 차 ▒
□ 국문요약문
이 논문은 현대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사회윤리의식의 실종이라는 관점에서 진단하고, 경허(鏡虛, 1846∼1912)의 사상이 이러한 문제점에 어떤 시사점을 던져주는지 밝히고자 하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현대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는 가깝게는 근대 시기에 파종되고 산업화 시대에 양육되어 나타난 결과물이다.
근대 한국 사회는 세 단계를 거치면서 도덕감이 실종되었다. 첫 번째 단계는 20세기 초 전 세계를 휩쓸었던 우승열패의 패권주의적 제국주의 시대였다. 두 번째 단계는 광복 이후부터 1990년대에 접어들 무렵까지 진행된 경제성장 위주의 국가정책과 반공 이데올로기 전성시대였다. 세 번째 단계는 1990년대 중반부터 밀어닥친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사적 흐름이었다. 이 세 단계의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는 권력지향을 내면화 하고, 자연적 인격과 사회적 인격을 분화하도록 요구받았고, 이는 전 사회적인 도덕감의 상실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허의 생애와 사상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는 스스로 자리비워주기를 통해 권력지향에 대한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또 일반적인 종교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사회윤리의식을 확립하려는 면모도 보여주었다. 또한 철저히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의식 속에서 윤리성도 담보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 국문핵심어
경허(鏡虛), 도덕감, 제국주의, 우승열패, 반공이데올로기, 신자유주의, 역사의식, 자발성.
Ⅰ. 들어가는 말 ▲ 위로
이 논문은 현대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불교와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진단해 보고, 경허의 사상은 이러한 문제점에 어떤 시사점을 던져주는가를 밝히고자 하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현대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는 가깝게는 근대 시기에 파종되고 산업화 시대에 양육되어 나타난 결과물일 것이므로, 근대 시기의 한국사회와 불교계에 대한 고찰이 현대 문제를 해결하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1)
더구나 최근에 현대 한국 불교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경허로부터 도출해낸 연구결과가 발표된 바, 불교계를 포함한 한국사회의 당면 문제와 관련해서 경허는 중요한 연구주제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대 한국불교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한국 종교 일반과 한국사회가 내포하고 있는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종교에 대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오해 내지 선입견은, 종교를 정치사회적 상황과 별개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경향이다. 하지만 종교는 사회현상이고 문화현상이다. 종교가 사회현상이고 문화현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종교현상에 대해서 어떤 발언도 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비판이든 옹호든 모든 형태의 발언은 필연적으로 사회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계의 추문이나 타락상에 대하여, 몰지각하거나 타락한 일부의 현상일 뿐이라고 변명하거나, 원래 우리 종교는 그렇지 않았다고 옹호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러한 발언들은 종교는 세상의 때에 물들지 않은 뭔가 순수하고, 고결하고, 숭고하고 어떤 것이라는 선입견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런 선입견이 종교현상을 보는 올바른 시각을 마비시킨다. 종교를 사회현상과 분리하는 행위는 언뜻 종교의 순결성을 보호하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종교에 대한 외부의 발언을 원천적으로 봉쇄함으로써 종교를 섬에 가둬놓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
이 글에서는 근대시기를 현대사회의 당면 문제가 파종된 시기로 보고, 그 시기를 살아간 대표적 선사인 경허의 생애와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 전체와 불교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어떤 특징을 내포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한편 해결의 단초를 얼마간이나마 찾아보려고 한다. 이를 위해 먼저, 현대 한국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염치의 상실과 욕망 지상주의의 점령 그리고 과도한 권력지향성의 세 가지로 파악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들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 수 있을지 경허의 북행(北行)과 역사의식 그리고 그가 피력한 수행 의식의 확립을 통해 가늠해보기로 한다.
Ⅱ. 현대 한국사회의 당면 문제
1. 염치의 상실 ▲ 위로
한국의 ‘근대’는 강제로 이식된 근대였다. 근대는 제국주의의 형상을 하고 밀어닥쳤는데, 이에 대한 대응의 기조는 둘로 나눠졌다. 한 축은 제국주의에 동참하거나 편승하여 미래를 기약하려는 노선이었고, 다른 한 축은 아나키즘과 민족주의로 대표되는 반제국주의 노선이었다. 반제국주의는 특정인이나 특정 국가에 대한 분노를 넘어 강제하는 권력에 대한 전면적 문제제기였다.
근대의 불교계 역시 이와 같은 두 가지 노선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 가운데 경허, 만해, 백용성, 운암 김성숙 등은 항일 혹은 반제국주의 노선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보인 반제국주의 면모가 반드시 불교적 가치관이나 세계관과 연계되어 있었던 것 같지는 않고, 당시 한국 사회 전체를 염두에 둘 때 불교적 세계관이 반제국주의노선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고 보기는 더욱 어렵다. 한국사회 전체를 고려한다면, 오히려 조선 오백년 동안 축적된 유교적 가치관이 반제국주의 혹은 항일의식의 저변에 갈려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 싶다.
유교적 가치관 중에서도 의(義)에 해당되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의식과 밀접한 덕목으로 제국주의에 맞서는 사상적 교두보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수오지심은 ‘염치’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의 일차적 기능은 자기 검열이다. 염치 하나 걷어내면 어떤 행동도 자기 안에서 정당화된다. 남세스러움을 느낄 필요도 없고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습니다. 무모한 자기 확장의 본능을 내부에서부터 제어하는 것이 염치의 일차적 기능인 것이다.
염치는 또한 외부검열이기도 하다. 염치없는 사람에게 사회 구성원 전체가 파렴치한이라고 비판할 수 있는 집단의식으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작동하려면 파렴치함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공감대가 전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행동을 두고 파렴치한 것인지 아닌지 굳이 따지거나 증명하지 않아도 저절로 공감이 형성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윤리의식이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실종되었다.
일제강점이 진행되던 시기까지만 해도 염치를 중심으로 한 유교적 가치관은 어느 정도 작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살아내는 동안 그리고 해방 이후로 이러한 가치관은 급속히 무너졌다. 한국 사회에서 염치가 상실되는 과정은 세 단계에 걸쳐서 초래된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단계는 20세기 초 전 세계를 휩쓸었던 우승열패의 패권주의적 제국주의 시대였다. 이 시기 동안 한국은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식민지 통치하에 있었고, 정당함과 부당함의 구도는 사라지고 오로지 강자와 약자의 구도만이 용납되는 불가항력적인 세계사적 흐름을 겪어냈다. 이 과정에서 명분과 의리를 존중하는 유교적 사회 윤리의식이 실종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일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단계는 광복 이후부터 1990년대에 접어들 무렵까지 진행된 경제성장 위주의 국가정책과 반공 이데올로기 전성시대였다. 197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전세계적으로 국민총생산(GNP) 위주의 경제정책과 이념전쟁은 신화와 같은 것이었고, 이 과정에서 합리적인 사회윤리의식의 확립은 염두에 두지 못했다. 특히 한국사회는 일제 잔재 청산에 실패하고 반공이데올로기가 사회윤리를 대신하면서, 현실 순응적 가치관이 사회윤리를 대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치의 윤리의식은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미력하게나마 작동했던 것으로 보인다.2)
세 번째 단계는 1990년대 중반부터 밀어닥친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사적 흐름이다. 20세기 초의 제국주의가 대포를 앞세운 겁박과 침탈의 영토제국주의였다면, 신자유주의라는 21세기의 제국주의는 통상을 앞세운 금융제국주의 혹은 자본제국주의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의 제국주의는 우리 내부의 탐욕 형태인 재테크, 성공신화, 행복신화 등과 결탁하고 있어 더욱 교묘해졌다. 이 과정에서 사회 구성원들의 윤리의식이나 공동체 의식은 알뜰히 사라졌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의 근대화 과정은 유교적 사회윤리의식이 실종되는 과정이었으며 새로운 사회윤리를 확립하지도 못한 시대였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한국사회 내부에서 기인한 것인 동시에 세계사적 흐름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20세기는 세계사적인 규범허무주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2. 윤리적 형이상학의 부재 ▲ 위로
인간의 도덕감이 어떤 과정을 통해 확보되는가 하는 문제는 의견이 다양하지만, 가장 일반적이고 오래된 관점은 형이상학에 기반을 둔다는 것이다. 플라톤과 칸트는 이데아와 정언명법이라는 초월의 형이상학에 기반을 두어 윤리의식을 도출해냈다. 유학자들의 윤리의식 역시 형이상학에 기초하고 있다. 역사와 사회는 형이상의 세계에 내포된 가치를 형이하의 구체성으로 구축하고, 형이하의 세계에서 부족하고 미흡한 부분을 다시 형이상에 비추어 고쳐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이 『주역』 이래 동양의 윤리의식이었다. 이렇게 형이상학에 기반을 둔 윤리의식은 근대 들어 급격히 소멸하였고, 그 빈자리에 행복과 공리를 가장한 욕망지상주의가 들어섰다.
행복을 지향한 서구 인간관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곧 선(善)이라는 공리주의적 사고로 귀결되었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보편적인 윤리의식이고 행복론의 바탕이다. 공리주의의 창건자 벤담은 도덕의 근원을 신의 명령이나 교회의 권위가 아닌 쾌락에서 찾았다. 모두가 좋아하고 바라는 것이 곧 선이라는 공리주의는 그 단순명쾌함과 현실적 위력으로 해서 현재 가장 강력한 윤리이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3)
공리주의는 사실 윤리학이라고 보기 어렵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인간은 타인에 대해 모두 늑대라는 것이 공리주의의 기본적인 세계관이며 인간관이다. “공리주의가 풍미하고 있는 현재의 사태는 ‘한낱 좋음’(goodness)을 ‘도덕적으로 좋음’(moral goodness) 곧 ‘선’ 내지 ‘착함’과 혼동한데서 빚어진 것이다. 좋음과 선의 혼동 또는 무차별적 사용은 결국 윤리 문제를 이익(분배)의 문제로 전환시키고, 가치 상대주의를 일반화시켜 도덕 상대주의를 조장하고, 마침내는 윤리 문제를 유야무야로 만드는 요인이 되고 말 것이다.”4)
20세기 서구철학의 보편적 현상은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의 양산이다. 유럽 대륙의 현상학과 실존철학, 영미의 분석철학은 형이상학을 회피하고 지성공동화현상을 유발했다는 점에서 동일한 문제점을 내포한다. 인간본성을 전제하지 않고는 규범이론을 구성할 수 없다면, 어떠한 규범이론도 형이상학에 기초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본성의 전제는 본질상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형이상학을 회피하려는 정치철학은 거대한 자기기만(a grand game of self-deception)이라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5)
근대에 들어서면서 진리와 윤리의 연결고리가 끊어졌다. 근대는 신의 자리에 이성(理性)을 밀어 넣음으로써 인간의 주체성을 고양하였지만, 윤리의식의 근거가 되었던 선험적 이념조차 밀어내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로써 인류는 일종의 윤리적 공백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6) 지금 한국사회는 유교적 윤리의식을 복원하든지, 아니면 윤리적 형이상학의 소멸을 대세로 인정하고 사회적 계약관계에 충실하든지, 혹은 제 3의 윤리적 형이상학을 새롭게 모색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7)
3. 권력지향의 내면화와 인격의 분화 ▲ 위로
근대화 과정에서 사회윤리 의식의 실종은 당연하게도 사회구성원들로 하여금 권력 지향적 의지만 남게 했다. 윤리가 실종되고 욕망의 충족이 절대선으로 치부되는 사회에서 사회구성원들이 추구하는 것은 권력 지향적 의지이다. 종교를 사회현상이요 문화현상이라고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당면하는 문제 역시 ‘권력’이다. 사회는 곧 권력과 관련된 역학관계이다.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발언도 권력적이지 않은 발언은 없다. 근대 이후의 도덕감 상실 현상은 권력의 지향적 현상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한다. 유교사회에서는 통치이념으로 명덕신벌(明德愼罰)과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표방함으로써 행위 주체 속에서 자연인으로서의 인격과 사회적 인격이 분화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통치자의 윤리적 인격이 통치 권력의 가장 중요한 바탕임을 이념적으로나마 표방하였다.
하지만, 입헌주의를 내세운 근대 이후의 권력은 법치의 형태를 취했다. 법치는 신상필벌(信賞必罰)을 기조로 작동하는데, 이 과정에서 상주고 벌주는 자연인으로서의 주체는 절대 노출되지 않는다. 법이라는 이름의 모호한 주체가 구체적인 자연인을 겁박하고 주눅 들게 하는 것이 법치권력의 핵심이다.
법치 권력 하에서는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공유 가치나 상호주관적 가치는 상실되고, 오로지 법적 사실과 법적 가치만이 유효하다. 법치 권력은 발언의 주체인 자연인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객관성과 공신력을 확보한다. 그것은 늘 “ ∼라고 판결한다”거나 “관계 기관에서는 ∼라고 말한다.” 혹은 “위원회에서는 ∼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는 방식으로 발설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말(言語)’이 될 수 없는 말이다. 말은 오로지 사람의 입을 통해서만 나오기 때문에 말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직은 결코 말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말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이 마치 말의 주체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 법치 권력의 속성이다. 법치 권력은 신상필벌을 기조로 작동하는데, 이 과정에서 상주고 벌주는 자연인으로서의 주체는 노출되지 않아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해방된다. 이렇게 파악되지 않는 어떤 것이 구체적인 자연인을 겁박하고 주눅 들게 하는 것이 신상필벌의 핵심이요, 전체주의화된 권력의 근대적인 작동방식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화해나 소통 혹은 통합의 문제조차도 기구나 위원회를 통해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화해나 소통은 사회구성원인 각 개인들이 상호주관적 가치를 공유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지, 캐치프레이즈나 조직을 통해 강제할 수는 없는 사안이다. 명덕신벌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현상은 윤리의 실종 상태에서 나타나는 사회병리현상이다.
법치 권력 하에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은 법적 주체가 되거나 법적 당사자로 존재할 뿐이다. 자연인으로서의 인격은 무의미하고 오로지 법인격만이 유효하고 정당화된다. 법치 권력은 권력의 사유화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있으므로, 현대사회에서 권력은 사회적 인격에게만 주어지는 권한이다. 따라서 법치 체제 하에서 살아가는 사회구성원인 개인들은 ‘자연인으로의 인격’과 ‘사회적 인격’을 분리하도록 요구받는다.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전근대적인 인간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현대사회는 이중인격을 충분히 내면화 한 사람일수록 잘 적응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구조화 되어 있다.
근대 이후 일반 사회는 물론이고 종교계도 자연스럽게 권력지향을 내면화 하였다. 불교에 국한해서 본다면, 현재 한국 불교의 운용시스템은 1911년 일제가 강제한 사찰령과 그에 따른 본말사 체제를 따르고 있다. 본말사체제의 현실 적합성 여부는 차치하고, 해방 이후 60년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이러한 운용방식에 대한 문제의식이 제기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운용방식이 현대의 불교계에 충분히 내면화 되었다는 것이고 현실적합성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찰령이 자체가 입헌체제의 사회통치방식을 염두에 둔 것이므로 현대사회에서도 무난히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불교계 더 나아가 한국의 종교계가 고유의 가치관과 이념 혹은 목적을 구현하는데 있어서 지금의 운영체제가 적합하다고 판단한다면, 법치 권력이 내포하는 특징까지 그대로 재생산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상황을 지속할 때 한국의 종교계는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긍정적으로는 시민단체, 부정적으로 이익집단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종교계가 선거에 개입하고 정치권력에 깊숙이 연루되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Ⅲ. 경허의 북행과 역사의식
1. 북행(北行), 자리비워주기 ▲ 위로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한국의 근대화 과정은 20세기 세계사적 흐름과 결부되어 사회윤리의식의 실종이라는 현상을 나타내었다. 이것이 사회윤리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현대 한국사회가 당면하고 문제점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극복할 수 있을까. 근대불교계의 대표적 선사인 경허를 통해 그 단초를 열어보고자 한다.
경허의 이력에서 특이한 점은 구한말의 시대적 상황이 그의 행적이나 사상에 뚜렷이 나타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박한영, 이운허, 백용성, 한용운 등 근대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의 행적에서는 물론이고, 경허의 제자인 만공이나 한암의 경우에도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이 적잖이 반영된 것으로 확인되는 것과 비교하면, 경허의 경우는 이상하리만치 정치사회적 상황이 반영된 지점이 목격되지 않는다. 이러한 특징은 경허의 사상을 출세간 중심주의 혹은 선 중심주의로 이해하고 판단할만한 근거가 되었다.
그런데 출세간 중심주의 혹은 선 지상주의로 판단하기에는 곤란한 대목이 경허의 이력에서 발견된다. 바로 그의 북행 사건이다. 이 사건은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은둔, 환속, 소멸 등 여러 가지로 지칭되어왔다. 정확한 시점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경허는 대략 환갑 무렵에 북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진 출가한 보통의 승려가 별 다른 이유 없이 환갑의 나이에 갑자기 승복을 벗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데, 그의 경우는 그냥 보통의 승려라고 보기도 어렵다.
경허는 동진 출가해서 1868년 23세의 나이에 동학사 강원의 강사로 추대되어 1879년까지 역임했다. 방한암은 경허의 행장에서, “그 교의를 논하심에 파란양양하여 사방의 학자가 모두 귀의하였다”8)고 적었다. 한암의 알려진 성정을 고려할 때 과장된 얘기가 아닐 것이다. 확인되는 경허의 이력만 봐도 1894년에는 동래 범어사 조실이 되었고, 1899년에 해인사에서 임금의 뜻에 따른 인경불사와 수선사 신설 등의 불사에 법주(法主)가 되었다. 당시 이판비구승의 규모와 위상이 지금과 같지는 않았다는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당시 불교계에서 차지하는 경허의 위상이 결코 만만하지는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실들이다.
이 정도의 위상을 가졌던 인물이 특별한 이유도 없이 불교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가 몇 년 후에 시골 서당의 훈장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경허를 출세간 중심주의자 혹은 선 수행 지상주의자로 이해하기에 망설여지는 부분이다. 최근 이와 관련하여 경허의 북행을 도피성 은둔으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9) 이러한 주장은 경허의 주색(酒色)과 관련된 당시 전언과 평가 그리고 경허 자신의 반성을 사실로 전제한 것이며, 그를 한국불교의 사표로 삼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평가로 이어졌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 때문에 이러한 평가는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여지가 있다.10)
첫째, 경허에 대한 부정적인 인물평에는 식민통치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경허에 대해 평가를 내린 지식인들이 공통적으로 친일 성향을 강하게 보였다는 점은 이러한 추측의 근거가 된다. 대표적으로 이능화(李能和, 1869∼1943)가 있고11) 권상로와 김태흡도 추가될 수 있다. 권상로와 김태흡의 경우는 경허에 대해 우호적으로 평가했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지만, 본 연구자는 이러한 판단에 동의하지 않는다. 새로운 자료와 좀더 치밀한 연구를 진행한다면 얼마든지 달리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12)
권상로와 김태흡은 후에 새마을운동의 방향이 된 일제강점기의 심전(心田) 개발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인물들이다. 심전개발운동은 조선인들을 일제의 정책에 순응케 하는 이른바 황국신민을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었으며, 이는 단순히 생활의 개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상개조 인간개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13) 사상개조에 목멘 사람들의 눈에 경허는 더없이 좋은 먹이감이었을 것이다. 주색과 관련된 경허의 일화들은 이들에 의해 부정적으로 확대 재해석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둘째, 주색과 관련된 행적 때문에 경허를 한국불교의 사표로 삼기 어렵다는 평가에는 사표됨에 대한 독재적 혹은 식민지적 허구성이 작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독재 권력의 특징은 개인의 사적인 영역을 체제의 영향권 안에 두는 것이다. 개인의 옷차림이나 생활태도를 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개인의 몸에 대한 권한조차도 박탈한다. 그리고 사표 혹은 위인으로 설정되는 사람은 늘 태몽 좋고, 부모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잘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바른 생활태도를 가진 사람으로 상정된다. 이러한 기준 하에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검열을 통해 스스로 주눅 들어 체제에 순응토록 하는 것이 사표됨의 허구성이다. 바른생활인은 체제가 설정한 허구적 사표는 될 수 있을지언정 올바른 사표의 모습, 특히 선의 사표와는 거리가 멀다.
셋째, 경허가 자신의 주색 관련 행적에 대해 반성의 태도를 취했는지 의문이다. 최근에 발표된 논문의 내용은 곱씹어볼만 하다. “경허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마음을 찾고 아는 것일 뿐 몸과 관련된 현상은 하찮고 유연한 것이며, 잊어버려야 할 대상이다. 따라서 경허는 하찮은 부속물인 몸이 지어내는 현상인 그의 파계행 역시 ‘좋으나 좋지 않으나 다 꿈일 뿐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14) 만약 자신의 행실에 대한 시각이 이와 같았다면, 경허의 북행은 도피성 은둔이 아니라 의도적인 자리비워주기로 이해할 수 있다. 시대가 사회윤리적 인격을 갖춘 불교계지도자를 요구에 부응하는 결단으로 읽을 수도 있는 것이다.
경허는 58세 되던 1903년 가을에 범어사를 떠나 해인사로 갔다. 이때의 심경을 읊은 「자범어사향해인사도중구호」(自梵魚寺向海印寺途中口號)라는 제목의 한시가 한 편 남아 있는데, 이것이 그의 북행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가 되는 문건이 아닐까 싶다.15)
아는 것 없이 이름만 높은데 세상은 위태로우니
어디에 몸을 감추어야할지 알 수 없네
어느 한적한 어촌 주막엔들 숨을 곳이 없을까마는
다만 이름을 감출수록 더욱 새로워질까 두려울 따름이다.16)
이 시에서 당시 경허가 고민하고 있었던 지점이 어느 정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첫 번째 고민은 자신의 위상과 세상의 위태로움 사이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는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이 그에게 어떤 사회적 역할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세간의 이치와 출세간의 이치는 엄연히 다르기에 섣불리 나서기 어려운 처지임을 정직하게 드러낸 것이다.
두 번째 고민은 은둔과 익명이 또 다른 유명세로 작동할 수 있다는 지점에서 발생하고 있다. 은둔의 방식이 매끄럽지 못하면 불필요하게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거나 자신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막후의 실력자 행세를 하게 되는 상황을 염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허가 단순한 낙향이나 은둔의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종적으로 전혀 알리지 않고 머리를 기르고 이름조차 바꾸는 소멸의 방식을 취한 것은, 이러한 염려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경허의 북행은 ‘자리 비워주기’로 이해된다. 일단 한 분야에서 이름이 높아지면, 자신의 식견이 닿지 않는 분야에서조차도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세상의 속성이다. 그래서 그는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잘 할 수 있는 식견과 안목을 지닌 수행자가 불교계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 스스로 자리를 비워준 것으로 보인다. 그가 북행을 단행한 속내를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겨우 시 한편을 통해 짐작해 보는 그의 속내는 현재의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너무 정직해서 차라리 기이해 보인다.
2. 방함록과 역사의식 ▲ 위로
종교 수행자의 가치관에서 흔히 나타나는 특징은 가치의 지향점을 역사의 바깥에 둔다는 점이다. 종교에서 이상향이 공통적으로 초시간적이라는 특징을 보여준다는 사실은 종교가 ‘시간의 소멸’ 혹은 ‘역사의 무화’ 속에서 궁극적 가치를 찾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선불교는 독특하게도 출세간을 말하면서도 그 궁극적 지향점을 세간에 둔다. 심우도가 입전수수로 마무리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선사 경허의 사상에서 역사의식이 포착된다는 사실은 그가 이러한 선의 지향점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경허의 역사의식은 일종의 선원 안거 방명록인 방함록 작성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지금은 일반화 되어 있는 방함록은 그 유래가 분명히 밝혀져 있지 않다. 경허 이전의 한국불교사에서는 물론이고 중국불교까지 살펴봐도 방함록의 존재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17) 방함록이라는 기록 형식이 경허가 과거의 형식을 복원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처음 시도한 것인지 여부는 좀더 연구가 필요한 일이겠으나, 필자는 한국불교사에서 방함록 작성을 처음 시도한 인물이 바로 경허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방함록 작성은 결사와 더불어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경허가 결사를 시작하고 그에 관한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것은 1899년, 세수 54세가 되던 해에 호서지방을 떠나 해인사로 옮겼던 때부터로 보인다.18) 조계종단에서 현재시점에서 확보 가능한 근대 방함록을 모아 편찬한 『근대선원방함록』에서도 가장 오래된 기록은 1899년 해인사 퇴설선원의 동안거 방함록인데, 이 기록에 의하면 당시 경허가 조당(祖堂)의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경허는 「해인사 수선사 방함인」(海印寺修禪社蒡啣引)과 「합천군 가야산 해인사 수선사 창건기」를 집필했는데, 방함인의 내용 전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방함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뒷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뒷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사람의 몸은 물거품과 같고 목숨은 바람 앞에 등불과 같으니 채찍질하고 힘써야겠다고 알았던 자 누구였던가. 법성은 본래 공하고 지혜의 태양은 오래도록 빛나니 깨달을 수 있다고 여겼던 자 또 누구였던가. 지금 우리가 지난날을 돌이켜 보듯이 뒷사람들은 오늘을 돌이켜 볼 것이고, 뒷사람들이 지금을 돌이켜 보듯이 [뒷사람들의] 뒷사람들도 뒷사람들을 돌이켜 볼 것이니, [방함록을 쓰는 이유가] 분명한 것이다. 아, 이 결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거울로 삼아 경계할 일이다.19)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경허의 역사의식이다. 경허는 방함록을 쓰는 이유가 뒷사람들에게 보여주어 감계(鑑戒)로 삼도록 하기 위함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자치통감』이나 『동국통감』의 예에서 보듯이 동양에서는 역사를 거울이라고 생각했다. 역사의 핵심적 기능이 감계 즉 사람들로 하여금 역사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스스로 경계하도록 하는데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불교적 맥락보다는 유학적 맥락이 강한 의식이고, 개인의 개별적 수행이나 깨달음의 경지보다는 사회적 역할과 의미에 비중을 두는 것이다.
현재 확인된 방함록이라는 선원 기록 양식이 경허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경허 자신이 강한 역사의식에 바탕을 두고 방함록 작성을 도모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경허의 사상을 두고 출세간 지상주의나 수행 중심주의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경허의 의식은 범어사 결사와 관련된 글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된다.
몸으로 선사(禪社)에 참여하고 이름을 선책(禪冊)에 올리는 것은 하나의 인연이다. 하지만 [단지] 향기를 후대에 전하려는 것만이 아니라, [뒷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해볼 만한 것이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람들의 근기가 미약하고 정법이 경박해진 상황에서, 정법안정을 지키고 유통시키는 일은 실로 역량 있는 형제들이 감당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세상은] 무상하여 덧없이 빠르고 생사는 큰일이니, 어찌 하릴없이 한 평생을 보내겠는가.20)
위에서 “[뒷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해볼 만한 것이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내용에서 보듯이, 경허는 역사의식이 반성적 사고를 통한 자발적 윤리의식과 연결된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정법이 경박해져 행동과 사고에 기준 삼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말법의 시대에, 출가자와 재가자를 막론하고 유일하게 기댈 것이라곤 역사 밖에 없을 것임을 알고 방함록 작성을 기도했던 것이다.
서양 윤리의식의 기초가 신(神)이나 형이상학적 관념이었다고 한다면, 동양의 전통적인 윤리의식은 역사의식에 바탕을 두었다. 춘추(春秋)는 곧 하늘이었고 하늘에 죄를 얻으면 빌 곳이 없다는 생각이 위정자에서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합의된 사회윤리의 기초였다. 방함록에 이름을 올리는 일은 이러한 역사의식이 반영된 것이었으며, 경허는 이러한 행위를 통해 선원에 참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검열하도록 했단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경허를 통해 역사의식이 사회윤리의식의 근간이 된다는 것을 재확인할 수 있다.
3. 수행 정신의 확립을 통한 윤리의식 확보 ▲ 위로
경허의 유문에서 가장 빈번하게 발견되는 대목은 수행자의 자긍심과 관련된 부분이다. 그것은 외부의 권력에 맞서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수행자 개인의 마음속에서 욕망하는 권력을 견제하려는 것이기도 했다. 그의 유문 가운데 널리 알려져 있는 우리말 문건인 「중노릇하는 법」은 이러한 의식을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대저 중노릇 하는 것이 적은 일이리요 잘 먹고 잘 입기 위하야 중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부쳐되여 살고 죽은 것을 면하고자 하는 것이니 부처되려면 내 몸에 있는 내 마음을 찾아보아야 하는 것이니 몸뚱이는 송장으로 알고 세상일이 좋으나 좋지안으나 다 꿈으로 알고 … 공부하는 사람이 마음 움적이지 않기를 산과 같이 하고 마음을 넓게 쓰기를 허공과 같이 하고 지혜로 불법 생각하기를 날과 달같이 하야 남이 나를 옳다고 하든지 그르다고 하든지 마음에 끄달리지 말고 다른 사람의 잘하고 잘못하는 것을 내 마음으로 분별하여 참견말고 좋은 일이 당하든지 좋지아니한 일이 당하든지 마음을 평안히 하며 무심히 가져서 남 봄에 숙맥같이 지내고 병신같이 지내고 벙어리같이 송경같이 귀먹은 사람같이 어린아이같이 지내면 마음에 절로 망상이 없어지나니라 설사 세상일을 똑똑히 분별하더라도 비유하건대 똥덩이 가지고 음식을 만들려는 것과 같고 진흙 가지고 흰 옥 만들려는 것과 같애여 성불하여 마음닦는대 도시 쓸대없는 것이니 부디 세상일을 잘 할려고 말지니라.21)
잘먹고 잘 입겠다고 마음먹으면 누군가의 눈치를 봐야 하고, 눈치가 길어지면 수행자는 첫 마음을 잃기 십상이다. 경허는 늘 “참선하는 이가 제일로 두려워할 것은 덧없는 세월의 빠름이요, 살고 죽는 것이 실로 큰 일”22)이라는 사실을 힘주어 말하곤 했다. 이와 같은 경허의 태도는 세상사에 대한 지나친 무관심으로도 보인다. 죽음의 화두를 목하에 둔 수행자에게 삶의 논리와 세상의 논리는 한없이 무기력하다. 결국 경허는 세속으로 은둔하는 북행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살림살이를 보존하고자 했던 것이다.23)
경허는 첫 마음의 회복이 바로 세간의 입질로부터 수행자의 자존심을 지켜내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 같다. 경허가 남긴 문건에서 윤리적 형이상학은 확인되지 않지만, 생사대사의 해결이라는 수행자의 초심을 잃지 않고, 또 강한 역사의식 속에서 그 가치가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구현해 냄으로써 승가의 독립성과 수행자 개인의 자존감이 지켜질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경허와 관련된 수많은 일탈과 파격의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지만, 그가 이와 같은 강렬한 역사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그것들 가운데 대부분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것일 공산이 크다.
이와 같은 기조는 「결동수정혜동생두솔동성불과계사」(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契社)에서도 확인되는데, 그 가운데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덕이 스스로 경계한 게송에 이르기를, “거룩하다는 이름도 구하지 말고 재물도 구하지 말고 영화로움도 구하지 말고 그럭저럭 인연 따라 한 세상 보내리. 턱밑 세치 기운이 떨어지면 누가 주인이며 백년 뒤에 이 몸은 헛된 이름뿐이로세. 옷이 해어지면 누덕누덕 기워 입고 양식이 떨어지면 그때마다 얻어 먹세. 한낱 허환한24)몸 며칠이나 살겠다고 쓸데없는 일 하느라 무명만 키우겠는가.”하였다. …… 마땅히 이 결사문을 재삼 읽고 생각하여 마음에 새겨두고 정진하여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하여 이 생애를 헛되이 보내지 말지어다. 이것을 보던지 듣던지 간절히 경계할지어다.25)
위의 인용문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경허가 절제나 청빈을 미덕이라는 차원에서 권장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형이상학에 맞추어가는 사고하고 행동하는 윤리가 아니라, 생사대사의 해결이라는 수행자로서 초심을 잃지 않음으로써 윤리성이 자연히 확보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허의 기조는 아래의 법문 내용에서 최종적으로 종합되어 나타난다.
무릇 참선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자기 몸의 안쪽을 돌이켜 비추고 그 주인공을 명백히 보아서, 바깥의 잡다함에 끄달리지 않고 나고 죽는 뒤바뀜이 되지도 않아서 초연히 뛰어나고 분명히 드러나서 고르게 트이는 것이니, 얽매임도 벗어남도 아니고 번뇌도 열반도 아닌 것이다. …… 일을 마친 사람의 경지에서는, 때로는 부처와 중생 그리고 건곤과 대지가 하나의 미세한 먼지로 작용하고, 때로는 다른 역할에서 각자의 지위에 있고 또 때로는 위치에 따른 역할을 바꾸어서 일체가 자재하니, 이것을 불가사의한 큰 작용이라고 하기도 하고 자재로운 해탈이라고도 한다.26)
경허는 참선이 주인공 찾기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 주인공은 임제선 전통의 특징으로 비교적 많이 거론돼온 개념인데,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을 비롯해서 ‘무위진인’(無爲眞人)과 ‘인’(人) 같은 개념과 구문들이 대표적이다. 이는 수행자 의식의 자유 ‘자유’(自由)나 ‘자재’(自在)를 의미하는데, 다른 사람의 의견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莫受人惑] 주변상황에 얽매이지도 않는다[不與物拘]는 의미로서, 자존심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경허는 욕망과 권력에 경도되지 않는 수행자의 자유로운 의식을 통해 수행자의 윤리성이 확보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수행 정신을 지속적으로 재확인하여 내면의 윤리의식을 앙양하는 방식은, 윤리적 이념을 굳건히 세우고 그 이념을 철저히 내면화하여 윤리성을 고양하려는 유학의 방법과는 구별된다. 이러한 방식은 사회 구성원 전체의 윤리성을 고양하기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적어도 불교계 내부의 출가수행자들에게는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Ⅳ. 맺음말 ▲ 위로
1923년 5월에 총독부에서는 조선제국대학령을 발표했다. 입학시험은 1924년 3월 18일부터 21일까지 나흘 동안 논술하는 형식으로 치러졌다. 시험과목 속의 국어와 역사는 일본어와 일본사였다. 외국어 시험을 포함한 전 과목 모두 답안을 일본어로 작성해야 했다. 수석 합격자는 조선인이었다. 2등에서 10등까지도 모두 조선인 학생이 석권했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미국말은 한국에서 치러지는 대부분의 시험에서 부동의 1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국어와 국사조차 영어로 가르치고 영어로 시험을 치르게 하자는 주장까지 용인되고 있다. 만약 미국의 사립학교가 한국에 분교를 세우고 입시를 치른다면, 경성제국대학 시절처럼 미국인보다 한국인의 성적이 더 높을 가능성이 많다. 이처럼 역사의식과 윤리의식이 알뜰히 실종된 상황과 현대 한국사회 전체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구한말의 엄혹한 상황 속에서 선사 경허의 선택지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와 관련된 파격과 기행의 이야기들이 적잖게 전해지고 있지만, 정작 현재 남아 있는 경허의 유문을 통해 보면 그는 그 어떤 수행자보다 엄격하고 방정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경허는 염치가 상실된 시대를 강렬한 역사의식과 수행 의식을 통해 돌파해내려고 했다. 또 정치사회적 안목과 세계사적 식견이 필요한 시기에 자신의 역량의 한계를 인정하고 기꺼이 자리를 비웠다. 이러한 경허의 행적과 사상은 불교 고유의 목적과 지향점에 부합하는 승가 윤리를 마련하는데 필요한 좌표와 기준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경허의 생애와 사상을 통해 가늠해 보았을 때, 수행자 개인이 자신의 역량과 한계를 스스로 알고 기꺼이 인정하며, 역사의식을 잃지 않고, 수행 정신을 확립하는 것이 한국불교계가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는 단초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는 비단 불교계뿐만이 아니라 현대 한국 사회 전체의 당면과제와 관련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지금의 한국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의 본질은 윤리의식의 실종으로 인한 사회구성원들의 과도한 권력지향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문제를 이렇게 파악했을 때 선택지는 별로 없다. 실종된 사회윤리 이념을 복원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사회윤리를 수립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의향이 없다면, 윤리의 실종과 권력지향을 시대적 요청으로 파악하고 너나 할 것 없이 하루라도 속히 이중인격을 충분히 내면화하여 한 마리의 늑대가 되어 혹독한 세월을 살아내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 위로
Abstract
Ven Song Gyeongheo and Contemporary Social Problems in Korea
Park, Jae Hyeon(Tong Myong Univ.)
This paper diagnoses the contemporary social problems in Korea with the loss of moral sense. And I examine the implications of the life and idea of Ven Song Gyeongheo (1846~1912) with this matter. The contemporary social problems in Korea were sown in the early modern period. And it was raised in the era of rapidly growing industries.
As modern age Korean society passes through three steps, the moral sense was disappeared. First phases were imperialism age of survival of the fittest that swept the early 20th century world. Second phases were anti-communist ideology golden age of economic growth putting first which progress since take in the 1990s since the independence day. Third phases were global stream that is neoliberalism pouring from the mid-1990s. Korean people were required to internalize power intention, and differentiate natural personality and social personality passing through this process.
In these situation, Gyeongheo’s life and thought pitch some implications. He showed critical mind about power intention by resigning himself. Also, he showed countenance to establish social ethics with historical consciousness that is rare in religion. And he showed that a moral sense is secured by the maintaining a sense of spontaneity.
<key words>
Ven Song Gyeongheo, Moral sense, imperialism, survival of the fittest, anti-communist ideology, neoliberalism, historical consciousness, spontane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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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주: ▲ 위로
1) 현재 한국불교의 모습은 ‘유교적 봉건’의 비판과 극복에 소홀했고 일제에 의해 주도된 ‘뒤틀린 근대’의 비판 극복에도 역시 소홀했던 결과물이라는 것이 불교학계의 지적이다. 신규탁, 『한국 근현대 불교사상 탐구』, 새문사, 2012, p.10.
2) 1994년 10월경의 일간지를 살펴보자. 고려대학교에서는 5천여 명 규모의 기숙사를 신설하여 신입생을 전원 1년 동안 기숙사에 수용하고 『명심보감』을 필수과목으로 채택하여 도덕성 회복에 나서겠다는 지금 생각해보면 황당해 보이기까지 하는 내용을 언론에 발표했다.(동아일보, 1994년 10월 11일자) 이러한 분위기는 특정 대학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당시 대학가 전반은 물론 한국 사회 전체의 분위기였다. 또 정치권에서는 도덕성 회복을 위한 인성교육과 효(孝)사상 함양을 위한 교육 개혁안을 다투어 발표했다.(동아일보, 1994년 10월 17일자)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진 원인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로 유명한 범죄 집단인 지존파의 연쇄살인 사건이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당시 지존파의 행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엽기적 범죄가 수시로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구성원은 놀라울 정도로 무감각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옳고 그름의 문제를 넘어 엄연한 사회현상으로 파악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3) 정원규, 「공리주의에 대한 패러다임적 독해」, 『철학』 78, 한국철학회 편, 2004, pp.271-275.
4) 백종현, 「윤리 문제의 근본 주제」, 『철학사상』 23, 서울대철학사상연구소 편, 2006, p.34. 백종현은 또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도덕적 선이 기초적으로 쾌락의 감정이라면, 쾌락을 주는 것은 무엇보다 유용성(utility)인 만큼인, 도덕적 선은 유익함을 내용으로 가질 것은 정한 이치이다. 그래서 이른바 공리주의자들은 도덕적 선과 옳음과 유익함 또는 공리성과 행복 및 쾌락을 내용상으로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는 경우 윤리 문제는 손익의 문제에 다름 아니다.”(pp.400-401)
5) 김주성, 「존 롤즈와 승계호: 현대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갈림길」, 『사회비평』 11, 나남출판, 1994, 참조.
6) 박재현, 『한국 근대불교의 타자들』, 푸른역사, 2009, pp.319-323.
7) 재미(在美) 철학자 승계호는 그의 저서 『직관과 구성』(김주성 譯, 나남출판, 1999)에서 서양철학사를 중심으로 윤리적 형이상학이 실종되는 과정과 현대사회에서 그 복구가 절실히 요구된다는 점을 치밀하게 밝히고 있다. 그의 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부흥과 플라톤의 복구를 모색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근현대 세계사의 흐름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포괄적으로 진단하고 있다.
8) 한암 會編, (한암선사육필본)『경허집』, 월정사, 2009(영인본), p.3 “論敎義波瀾洋洋 四方學者多歸之”.
9) 윤창화, 「경허의 주색(酒色)과 삼수갑산」, 『불교평론』 52, 만해사상선양실천회 편, 2012 참조.
10) 윤창화의 경허에 대한 평가가 나온 후에 이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 논문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홍현지, 「경허의 삼수갑산과 상채(償債)」, 『대각사상』 18, 대각사상연구원 편, 2013; 김광식, 「경허 논의에 관한 비판적 검토: 윤창화의 논고를 중심으로」, 『불교평론』 53, 만해사상선양실천회 편, 2013.
11) 1918년에 간행된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실린 경허에 대한 인물평은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따로 소개하지 않는다. 이 인물평에 대해 최병헌교수는 2008년에 열린 덕숭총림 세미나에서 “이능화의 경허 비판은 식민지 찬양자의 한계”라고 지적한 바 있다. 최병헌, 「근대 한국불교의 선풍진작과 덕숭총림」(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편, 『경허·만공의 선풍과 법맥』, 조계종출판사, 2009) 참조.
12) 권상로와 김태흡의 경허에 대한 평가가 담긴 글로 널리 알려진 것은 「한국선종약사」(『백성욱박사 송수기념 불교학논문집』, 1959)와 「人間 鏡虛: 鏡虛大師 一代評傳」(『비판(批判)』, 1938년 6월∼1939년 1월)이다. 표면적으로는 우호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권상로의 글은 발표된 시기를 감안해야 하고, 김태흡의 글은 경허의 행적을 ‘미운 짓’이라고 분명히 적시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아울러 권상로의 「조선불교개혁론」(『조선불교월보』3-18호, 1912년 4월-1913년 7월)을 보면, 그가 과연 경허를 어떻게 평가했을지 짐작되는 바가 있다. 이와 관련된 문제는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므로 더 이상의 논의는 생략한다.
13) 동아일보 1938년 9월 13일자에는 “京城의 權相老·金泰洽 兩人이 慶北豊基에서 心田開發에 대한 講演을 했다”는 기사가 실려있다. 또한 동아일보 1972년 12월 11일자에서는 「새마을 운동의 새방향」이라는 제하에, 새마을운동이 농업소득증대나 산야(山野) 개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심전개발을 서두르는 데까지 나아가야한다는 취지의 내용을 기사화 하였다. ‘심전개발운동’이 일제의 ‘황민화 정책’과 괘를 같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근대사학에서 일반화된 관점이다. 김순석, 「1920년대 초반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 재단법인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성립을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문화체육관광부 1999 참조.
14) 김성순, 「경허성우의 몸과 마음: 파계행 혹은 無心行履」『한국불교학』 63, 한국불교학회 편, 2012, p.250.
15) 이 당시 심정을 담은 대표적인 문건으로 경허가 한암에게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 「경허화성전별사」가 자주 거론되어왔다. 그런데 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 문건을 좀더 면밀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경허 열반 이후 만공의 부탁으로 한암이 육필로 작성한 『경허집』에 이 문건이 실려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전별사의 수신 당사자이고 법통과도 관련된 중요한 편지를 한암 자신이 『경허집』에 넣지 않았다는 사실은 납득하기 어렵다. 두 번째는 「전별사」의 문투와 내용이 지나치게 곡진하다는 점이다. 당시 경허는 이미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고 한암은 겨우 28세였으며, 두 사람이 만난 지 겨우 3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16) 한암 會編, (한암선사육필본)『경허집』, 월정사, 2009(영인본), pp.142~143. “識淺名高世危亂 不知何處可藏身 漁村酒肆豈無處 但恐匿名名益新”
17) 대한불교조계종교육원 불교학연구소에서 편찬한 『근대선원 방함록』(2006년 발간)의 앞부분에 실려 있는 김광식의 해제글 「방함록에 나타난 근·현대 선원」 참조.
18) 경허는 54세 되던 해(1899년)부터 해인사에서 結社를 시작하고 藏經을 간행하였다. 이어서 화엄사, 범어사 등 전국의 주요 사찰에 선원을 창설하고 청규를 지었다. 『경허집』에 수록된 결사 관련 자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해인사수선사방함인(海印寺修禪社芳啣引): 1899년 4월 작성, 결동수정혜동생두솔동성불과계사문(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契社文): 1899년 11월 작성, 범어사총섭방함록서(梵魚寺總攝芳啣錄序): 1900년 4월 작성, 화엄사상원암부설선실정완규문(華嚴寺上院庵復設禪室定完規文): 1900년 12월 작성, 범어사계명암수선사방함청규(梵魚寺鷄鳴庵修禪社芳啣淸規): 1902년 10월 작성, 범어사설선사계의서(梵魚寺設禪社契誼序): 작성 시기 미상(1902년 말~1903년 초로 추정). 박재현, 「송경허의 선사상을 통해 본 간화선 수행의 입각점과 지향점」, 『동방학』 15, 한서대학교 동양고전연구소 편, 2008, pp.277~278 참조.
19) 「海印寺修禪社芳啣引」, 『鏡虛集』, 한불전11,600중. “書芳啣所以然者 示後人也. 示後人也者 以何意也. 身隣泡. 命危風燈 知策勤者 是誰也. 法性本空 慧日長明 能悟入者 又是誰也. 後之視今猶今之視昔也 后之視后又猶后之視今也 指點得分明矣.”
20) 「梵魚寺鷄鳴庵修禪社芳啣淸規」, 『鏡虛集』, 한불전11,599b. “盖身.禪社 名載禪冊 一段因緣. 然不是傳芳于後 使之有所思處. 當人根機微劣 正法.. 使正法眼藏 扶護流通 實賴有力量兄弟. .無常迅速 生死事大 豈可因循空過一生乎.”
21) 惺牛, 「중노릇하는 법」, 『鏡虛集』, 한불전 11, 597상-598중.
22) 「泥牛吼」, 『鏡虛集』, 한불 11, 590하. “夫.禪者, 第一.怖着, 無常迅速, 生死事大.”
23) 박재현, 「구한말 한국 선불교의 간화선에 대한 한 이해: 송경허의 선사상을 중심으로」, 『철학』 89, 한국철학회 편, 2006 참조.
24) 경허의 생애에서 눈길을 끄는 사실은 일탈과 기행에 가까운 그의 행적이지만, 이와 관련한 정보들은 일화나 낭설의 수준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 학계의 평가이다. 이른바 막행막식(莫行莫食)으로 일컬어지는 경허와 관련된 소문들이 아무런 사실관계도 확인된 바 없으며, 이러한 소문에 휘말려 선입견을 가지고 경허의 선사상을 왜곡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 여러 차례 지적된 바 있다. 김지견, 「경허선사 재고」, 『덕숭선학』 1, 한국불교선학연구원 무불선원 편, 2000; 민영규, 「경허당의 北歸辭」, 『민족과 문화』 12, 한양대민족학연구소 편, 2003; 박재현, 앞의 논문(2008) 참조. 하지만 여러 가지 관련 자료를 검토할 때 경허와 관련된 소문을 모두 낭설로 치부하기도 어렵다는 입장도 유효하다. 김성순, 앞의 논문 참조.
25) 경허, .結同修定慧同生兜率同成佛果契社文., .鏡虛集., 한불전 11, 604b-c. 古德自誡頌云: “不求名利, 不求榮, 只.隨緣, 度此生. 三寸氣消誰是主, 百年身後漫虛名. 衣裳破處重重補, 粮食無時. 旋旋營, 一箇幻軀能幾日, 爲他閑事長無明.” …… 應是此.社文, 三復披究, 銘箴心腑, 精進也如救頭燃, 莫使此生空過也. 至於若見聞如此, 切懇規戒.
26) 惺牛, 「示衆」, 『鏡虛集』, 한불전 11, 596하. 夫參禪者, 不是特地之事, .是返照自家屋裏, .得自家主人公明白, 不被外物.雜, 不爲生死互換, 孤逈逈地, 明白白地, 平妥妥地, 非繫縛非解脫, 非煩惱非涅槃. …… 於了事人分上, 有時將佛與衆生, 乾坤大地, 作一微塵用, 有時任他, 各住其位, 有時易其位用, 得一切自在, 是名不思議大用也, 亦名自在解脫也. ▲ 위로
[출처: 한국선학 제3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