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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청지기
제목 : 악한 농부들, 머릿돌에 깨어지다
성경 : 눅20:9~18
찬송 : 288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20529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눅 20:9 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눅 20:10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눅 20:11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눅 20:12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눅 20:13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눅 20:14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눅 20:15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눅 20:16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눅 20:17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눅 20:18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스웨덴은 북극권에 속하는 척박한 토양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전 국토의 10%에 불과한 빈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는 1856년 스웨덴 최초의 민간 상업은행을 설립하며 19세기 말 스웨덴의 산업화라는 기적을 일구어 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는 은행을 통해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유망한 기업들을 인수했으며, 두 사람의 후계자를 세운 투명한 경영, 노동조합의 경영 참여, 공익사업에 대한 막대한 투자 수익의 85%를 법인세 형식으로 사회에 환원하는 과정을 통해 스웨덴을 가장 사랑하는 기업인이 됩니다. 발렌베리 가문은 161년을 이어 오는 동안 각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는 18개 기업을 소유했습니다. 그런데 이 가문에 속한 사람들 중에는 세계 1000대 부자들의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
“존재하지만 드러내지 않는다.”는 가문의 모토를 따라 후계자들은 얻은 수익의 대부분을 공익 재단에 넘겨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부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발렌베리가의 모토는 가족경영입니다. 160년이 넘게, 5대에 걸쳐 경영권을 세습했죠. 그러나 흔한 가족경영 기업과는 달리, 발렌베리가는 기업들의 독립경영을 확실하게 보장합니다. 독립경영을 위해 능력 있는 전문 경영인들에게 자회사의 경영권을 일임하고, 대신 지주회사인 ‘인베스터’를 통해 자회사들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할 뿐입니다. 이 인베스터는 발렌베리가의 여러 재단이 지배하고 있는데요. 발렌베리가 기업들의 경영 수익은 배당을 통해 인베스터를 거쳐, 각 재단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처럼 발렌베리가의 부는 인베스터의 주요 주주인 재단에 쌓이는 구조이며, 때문에 발렌베리가 오너들의 재산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너들은 자신의 재산을 축적하는데 목적을 두지 않는데요. 이는‘소유권은 특권이 아닌 책임이다’라는 발렌베리가의 전통에서 근거한 것이라 합니다. 발렌베리가 사람들은 가문의 부를 누리는 특권을 선택하기 보다는, 부를 잘 관리하고 키우는 자신들의 임무와 책임을 선택합니다.
막대한 부를 물려받았지만 자신의 안락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열매를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모습은 청지기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잘 보여 줍니다.
여러분!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누군가에게 잠시 빌린 것이라면 그 유형, 무형의 소유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오늘 본문은 ‘악한 농부의 비유’입니다.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참 슬픈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악함과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비유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토록 자격 없고 악한 죄인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주신다는 말씀이기도 하기에 너무나 감격스러운 비유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살피게 만드는 두려운 비유이기도 합니다.
√농부들의 악행(9~12절)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유에서 포도원, 포도원 주인, 소작인 농부, 주인의 종이 상징하는 바는 각각 무엇입니까?
√포도원은 이스라엘,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 소작인 농부는 유대 지도자들, 주인의 종은 선지자들을 의미합니다.
중동지역에서 포도는 풍요로움과 즐거움의 상징이었습니다. 포도는 전적으로 열매를 통해 그 가치를 인정받는 식물이기에, 성경은 포도 농사를 종종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에 빗대어 묘사합니다. 갈릴리에는 자신들의 소유지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유대인 혹은 로마인 부재지주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포도밭을 사서 농장 건설 과정에는 관여하다 자신의 본거지로 돌아가고 현지 소작인들에게 농장 관리를 맡기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추수할 때가 되면 소작인들에게 소작료를 요구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보면 지주들이 있어서 가을이 되면 동네에 찾아와서 소작료를 받아가는 것을 본 적이 많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 비유에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농장 경영을 맡은 소작인들은 유대 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주인이 보낸 종들은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을 의미합니다. 패역한 유대인들은 선지자들을 때리고 목에 나무 고랑을 채우고, 돌로 쳐 죽이고, 조롱하고, 채찍으로 때리며, 결박하고 옥에 가뒀으며, 톱으로 켜거나 칼로 베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의무는 다하지 않고, 이미 얻은 기득권을 지키는 일에만 열심을 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대 지도자들의 이 같은 반역에도 불구하고 인내하시며 계속해서 그분의 종들을 보내어 그들을 설득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포도원은 무엇인가요? 청지기 역할을 여러분은 어떻게 감당하고 계십니까?
소작인이 본래 포도원 주인이 아닌 것처럼 나도 ‘자녀, 일터, 물질, 은사, 시간, 건강, 그 밖에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를 ‘청지기(steward)'라고 부릅니다. 청지기는 주인(소유권자)이 맡긴 것들을 주인의 뜻대로 관리하는 위탁 관리인으로서(창43:16), 하인을 감독하고 주인의 자산을 관리하는 자입니다. 청지기의 관점에서 우리의 일상을 바라보면 참으로 많은 분야에서 우리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녀는 내 소유가 아니므로 자녀에게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게 됩니다.
지난 주간 인간 극장을 보았는데 오스트리아에서 살다 한국에 와서 정착한 성악가 부부였는데 아이들이 다섯이 있는데 넷째 아들이 발달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자식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을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청지기 삶을 사는 사람들은 게으름으로 세월을 낭비하지 않고 주어진 은사를 부지런히 개발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포도원을 맡은 소작인들 즉 청지기의 악행이 나타납니다.
√눅 20:10 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눅 20:11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눅 20:12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누가복음만 종을 한 명씩 세 번에 걸쳐서 보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모티브는 13:6~9에 기록된 비유에서 주인이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얻기 위해 삼 년을 기다린 행동과 일맥상통합니다. 열 므나의 비유에서도 세 명의 종이 등장했지만(19:11~27), 그중 두 명은 충직하다는 칭찬을 받고 한 명은 실패한 경우이므로 이 비유처럼 세 번의 기회가 모두 허비되었다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한두 번 주인의 뜻을 거스르더라도 돌이켜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주어질 것임을 뜻합니다.
농부들이 왜 그랬는지는 본문에 나오지 않습니다. 주인이 보낸 종들을 거부하고 핍박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의 선포를 거부하고 그들을 핍박한 것을 가리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종들을 죽였다는 내용이 있는데(막 12:3~5), 누가복음에서는 주인의 아들만 죽임을 당합니다. 그렇게 해서 아들로서 예수님의 독보적인 지위와 고난이 두드러집니다.
√주인의 아들까지 죽인 농부들(13~16절)
√“그러자 포도원 주인이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야겠다. 아마도 그들이 그는 존경할 것이다.’ 하지만 아들은 본 소작인들은 서로 의논하며 말했다. ‘이 사람은 상속자이다. 그를 죽이자. 그러면 유산이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그들은 포도원 밖으로 그 아들을 내던지고 죽였다.”(유대인의 신약성경)
포도원의 주인은 세 명의 종을 보냈지만 그들이 모두 폭행을 당하고 능멸당한 채 빈손으로 돌아오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아들을 직접 보냅니다. 농부들이 종들은 무시했지만 자신의 아들은 존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놀랍게도 이 주인은 악한 농부들을 당장 멸하기보다는 그들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인의 아들까지 거부합니다. 거부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죽입니다. 그들은 주인의 선한 기대를 저버리고 주인의 유산까지 차지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 비유의 실제 주인공이 되시는 예수님은 바로 며칠 뒤에 그와 같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십니다.
√이제 주인은 자비를 거두어들입니다.
√눅 20:15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눅 20:16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이르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아들을 보낸 것은 최후통첩이요,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조금의 지혜라도 있었다면, 선한 양심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다면, 주인의 아들이 왔을 때 ‘마지막 기회구나. 이제는 주인과의 약속을 지켜야겠구나.’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악에 깊이 젖어 버렸고, 욕심에 완전히 사로잡혀 악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말았습니다.
숨을 죽이며 듣고 있던 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이 악한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농부들에게 주지 않겠느냐?”
그에 대한 무리의 반응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유대인 신약성경)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주인은 마땅한 요구를 거부하는 농부들, 은혜를 망각하고 정당한 것조차 내놓지 않는 농부들에게 반복해서 종들을 보내고, 마지막에는 아들을 보내면서까지 그들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이처럼 죄인들에게 끊임없이 회개를 요구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죄를 그때 그때 갚지 않고 기다려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징계와 심판을 결정하셨다가도 연약한 인간들을 위해 유예하시고 감해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결코 심판을 면제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감사하고 진심으로 회개의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방종의 기회로 삼는다면 더 큰 심판이 닥칠 것입니다.
√모퉁이의 머릿돌(17~18절)
√눅 20:17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눅 20:18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표현은 시편 118:22절에 최초로 등장합니다. 돌에 걸려 넘어지는 자나 돌에 맞아 죽는 자나 모두 복음을 받지 못한 사람들인데, 전자는 메시아에 대해 잘못 이해함으로 시험에 드는 자들이고, 후자는 적극적으로 메시아를 반대하고 핍박하는 데 동참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건축에서 기준이 되는 돌이 중요하듯, 예수님은 우리 삶의 기준이십니다. 큰 건물을 정확한 기준도 없이 모래 위해 주먹구구식으로 집을 지어 올리는 건축가는 없습니다. 단단한 반석 위에 기준이 되는 모퉁잇돌을 세우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 건물을 올립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정과 사업과 사역을 바른 기준 위에 세워 나가야 합니다. 그 기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회사의 사훈이나 가정의 가훈, 혹은 개인의 좌우명에도 그 기준이 반영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동일한 돌이 두 가지 용례로 판이하게 쓰이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먼저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에게 그 돌은 ‘거치는 돌(stumbling)’이 되거나, 모든 것을 ‘부서뜨리는 돌(smiting stone, 단2:34~35)’이 될 것이고, 반대로 그를 믿는 자들에게는 인생이라는 성전을 지어갈 때 기준을 제공하는 ‘모퉁잇돌(Cornerstone)’이 될 것입니다.
포도원 소작농들이 처음에는 주인의 종을 폭행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후에는 주인의 아들을 죽이기에 이르게 된 것처럼 예수님을 삶의 기준의 삼지 않은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악해져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습니다. 그러나 매사에 주님을 모퉁잇돌로 삼는 사람은 견고한 건물을 세웁니다.
고전 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우리는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집을 세워야 합니다. 최후 심판 날에 우리의 공력이 밝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리석고 악한 농부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주인이 보낸 종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주인의 뜻을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 아들을 무엇보다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아들을 향한 반응이 우리의 영원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머릿돌로 삼아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