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시간이 흘러 다시금 낭만과 추억의 계절인 가을이 짙어가고 있다. 나이를 잃어버리고 감상의 나래를 활짝 펼 수 있는 여유 그 자체만도 자랑할 만하고 소중하다. 하지만 너무도 빠르게 달아나는 시간이 야속하다는 걸 새삼 느낀다. 삶의 마지막 길로 들어선 초로의 우리들 에겐 너무 비정하고 잔인하다. 노랗게 물들어가고 있는 은행잎이 곧 떨어져 나뒹굴 때 아름다운 추억을 되새기는 마음이 주변의 하나하나를 잃어버려 갖는 서글픔에 맥을 놓는다. 특히 청순하고 정이 넘쳤던 학창시절의 벗들이 앞다투어 지고 있는 걸 보면 회환과 아픔이 짓누른다. 정나열이 오랜 병고 끝에 어제 떠난 소식을 접하니 살아생전에 소원했지만 애타는 가슴을 억누를 수 없다. 지난 일 년 사이에 생의 끈을 놓은 진동, 해청, 재진의 부인, 우석이 떠오르니 시야가 흐려진다.
아프고 아쉬운 추억 속에 젖어있다 보니 어느덧 당구장에 들어선다. 이미 영현이 다른 친구와 게임을 하고 있다. 책임감이 투철한 그를 보니 왕초란 별명이 무색치 않다. 정시 즈음에 광희와 영후가 들어서 미리 잡아 둔 두 테이블의 하나를 차지한다. 건너편 기원으로 오른다. 근지 혼자 앉아 있다. 2시10여분인데... 조금 지나 원식이 들어서 반상에 몰입하는 걸 보고 당구장으로 되돌아간다. 이젠 온 마음이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오늘 행사에 참여하나에 몰입되어 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건강이 허락하지 않는 걸 생각해 막대한 금전적 출혈에도 불구하고 올해부턴 두 달에 한 번씩 행사를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회가 갈수록 실망감만 커졌다. 특히 나이가 들어 당구치는 세가 느는 걸 고려해 처음엔 세 테이블을 준비했으나 기대엔 한참 모자라 하나를 반납했다. 그 이후론 잡아 둔 두 테이블의 하나마저도 포기했다. 영현과 마음을 터놓고 당구대회의 존속을 의논했을 정도다.
동문들 사이에 회자되는 달갑지 않은 말이 가슴에 닿는다. “동성인은 착하고 정은 많으나 단결력과 책임감이 대단히 약하다.” 무거운 마음으로 게임을 지켜보는 순간순간이 덧없이 길게 다가온다. 3시경 재진과 승권이 들어서 마침내 쉬고 있던 테이블이 살아 숨쉰다. 30여분 후 두 테이블 주변에 10여명의 친구들이 득실거리며 소란스럽다. 고국으로 마실 나온 성윤과 충국은 큐를 잡을 수 있었던 몇 명의 축복을 받은 행운아다. 북적거리고 무척 시끄럽지만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상쾌하다. 큐를 잡을 기회가 없던 충진과 희택은 어쩔 수 없이 기원으로 간다. 기원도 예약해둔 8석을 다 차지한다. 양쪽 다 희귀한 사태라 태양이 동시에 두 번 서쪽에서 뜬 것과 버금간다. 생각했던 것 보다 많이 모여 저녁 회식과 뒤풀이 비용이 걱정으로 떠오른다. 소인이 우스갯소리로 간혹 내뱉는 말이 맴돈다. “내 피를 팔아 해결하지, 뭐.”
분위기가 한층 솟은 탓인지 눈 깜빡할 사이에 저녁을 예약해둔 시간이 달려든다. 다른 친구의 상가를 가려고 자리를 뜬 근지를 빼고 19명이 맛좋은 고기 식당에 모였다. 제법 큰 식당이지만 우리들이 호기를 부리며 설치니 주변의 손님들이 쥐 죽은 듯 조용하게 보인다. 한참 들고 마시는 사이에 젊게 보이고 발랄한 성윤의 부인과 처제가 들어서니 수캐들의 눈이 탐욕스럽게 번뜩인다. 반갑다고 불이 나게 먼저 손을 내미는 놈들이 심상치 않는 듯하다. 더욱 떠들썩한 혼돈 속에 즐기고 일어서니 성윤이 어마어마한 식대를 지불한다. 무척 고맙지만 한편으론 때마다 맘껏 베푸는 댈러스의 사내한테 미안하다. 충국도 적지 않은 돈을 기부해 뒤풀이를 성윤의 부인과 처재를 위해 아름다운 옛 추억을 이끌어 내는 생음악 주점에서 한다. 1960년대 말 우리나라의 통기타 문화로 대중음악을 선도한 “쉘부르” 카페의 이름을 따 운영하는 주점은 그 시절 낭만을 찾는 나이가 지긋이 든 객이 주된 손님이다.
거의 20명이 들어가니 꽉 찬다. 열기가 달아오르기 전인 7시라 첫 번째 나온 예전 가수는 기대에 못 미친다. 그래도 성윤 부인과 처제가 생전 처음 맛보는 분위기라며 꽤 만족하는 모습을 보니 다행스럽다. 영현의 힘으로 예정시간 보다 30분 앞당겨 나온 두 번째 가객은 허스키한 매력적인 음색으로 귀를 잡아맨다. 학창시절에 온 정성을 다해 듣던 팝송 멜로디가 조그맣게 취기가 오른 마음을 휘젓는다. 이미 취기가 귀에 찬 성윤과 피곤한 부인과 처제를 생각해 한층 더 높이 날아오르는 추억을 잠시 매달아 놓고 작별한다. 덩달아 영현을 빼고 모두가 나선다. 마중을 마친 후 널브러지게 남은 맥주와 과일 안주를 모아 들며 추억의 품에 안긴다. 9시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영현과 길로 나선다. 내일 아내 그리고 진동이 부인과 함께 그의 납골당을 찾으려는 걸 생각하니 다시금 애처로움과 서글픔이 발길을 무겁게 한다.
함께한 친구들: 강윤구, 권영현, 권충국, 김순화, 김성윤 부부와 처제, 김영후, 김종화, 김충진, 김희택, 박병현과 여자친구, 박재진, 문원표, 서규석, 이광희, 이근지, 이승권, 이원식,이재묵, 최원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