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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와 균형, 혹은 건강한 삶을 위한 조건
―의사 시인 김연종의 신작 세계
황치복(문학평론가)
절제와 균형
제 3회 의사문학상을 수상했고, 현재 한국의사시인회 회장이라는 직함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다. 세상의 모습은 미셀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강조한 인식틀episteme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기에 의사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시인은 이미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두 번째 시집과 세 번째 시집인 헤스테리증 히포크라테스(지혜, 2012)와 청진기 가라사대(천년의시작, 2018)에서 선보인 바 있다. 의학적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의 독특한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이 두 시집의 참신하고 이질적인 시적 발상과 상상력이 변별점을 보이고 있는데, 무엇보다 가장 주목되는 시선은 삶과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이라고 하겠다.
그러니까 우리는 삶의 이쪽에서 질병과 죽음이라는 저쪽을 바라보고 나서, 다시금 질병과 죽음을 통해서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변증법적 사유를 전개하며 삶을 살아가는 반면에 의사로서의 시인은 편재된 질병과 죽음을 통해서 삶의 모습을 바라보고, 다시금 삶의 모습에서 죽질병과 죽음을 관찰하는 전도된 시각을 선보인다. 그러니까 의사의 시각으로 볼 때 질병과 죽음은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현상이고 그 사이의 아슬아슬한 시공을 통해서 삶의 찰나가 간신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시각으로 볼 때 삶은 질병과 죽음으로 둘러싸여 간신히 숨을 토하고 있는 형국이며, 그러하기에 삶은 동정과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지난한 과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전도된 시각에서 볼 때 삶은 그만큼 간절하고 신비로운 모험이자 도전이며,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의 묘기처럼 처절한 균형잡기일 수도 있다. 험난한 순간순간의 난관을 헤쳐나가는 것이 생의 시간이며, 그 과정은 질곡과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관찰과 사유는 살아가는 존재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자아내어 감상적인 관점을 강요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인간의 육신과 영혼에 대한 유물론적 시각을 견지하면서 이러한 감상주의로부터 탈출하는데, 시인의 시편들에서 블랙 코미디와 같은 장면이나 냉소적인 접근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메커니즘 때문일 것이다.
시인의 사실주의적인 접근과 냉소적 태도가 좀더 나아가 사회적 부조리와 인간 내면의 허위의식과 만나면 풍자와 아이러니가 된다. 시인의 풍자는 신적인 위치에서 환자를 치료하려 하지만 유한한 인간으로서의 의사가 지닌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한계를 드러낼 때도 빛을 발하고, 하나의 직업으로서 의사가 감당해야 하는 이윤추구의 영리적 작업에 대한 자조적 반응에서도 도드라진다. 하지만 시인의 시편에서 더욱 주목되는 지점은 인간이 질병과 죽음에 대해서 보편적으로 지닌 근원적인 약점과 한계에 대해 사실적으로 접근할 때, 그리고 존엄한 인간 존재가 지닌 한없이 연약하고 부조리한 모습을 직시할 때 나타나는 풍자와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시인은 풍자를 시작술의 바탕에 두고 있으며, 이러한 풍자의 정신으로 인해서 시인은 감상에 떨어지지 않고 인간의 본성과 삶의 진정성에 틈입할 수 있는 셈이다. 이번 신작들 또한 예외가 아니다.
나는 뼈대 있는 종족이라
오직 뼈의 길이로 삶의 높낮이를 재고
뼈의 단단함으로 살을 짓무르는 척추동물의 후예다
한 가닥 뼈도 없는 흡반의 다리로
온통 삶이 꼬여버린 연체동물과는 근본부터 다르노니,
대대손손 뼈대 있는 가문이라 무릎 닳아지고 허리 굽을 때까지 쉬지 않고 뛰어가리라 오로지 뼈있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고통의 강을 건너 광활한 바다에 뼈를 묻으리라 황홀한 다리에 곧추서서 오래 버티리라 이대로는 못 살겠다고 잔뼈가 아우성치고 갈비뼈가 소리쳐도 개뼉다귀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찬란한 햇빛을 받아먹으리라 유령 같은 거리에 서서 허명의 빗장뼈를 움켜쥐리라
천변의 자전거를 타다가
대퇴부 골절상을 당한 용가리 통뼈가
아작아작 멸치 뼈를 씹고 있다
―「뼈를 묻다」, 전문
시인은 두 번째 시집인 히스테리증 히포크라테스에 실린 「Homo medicus」라는 시에서 “나의 텍스트는/ 피와 살과 뼈로만 기록되어 있다”라고 진술한 바 있다. 그러니까 진료의 대상인 인간 존재가 피와 살과 뼈라는 세 가지의 질료로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피와 살과 뼈라는 구성요소가 인간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으며, 생활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요소이기에 이 세 가지를 적절히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이 삶의 건강성을 유지하는 비결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어떤가? 오직 뼈대만을 강조하는 편향된 시각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나는 뼈대 있는 종족이라/ 오직 뼈의 길이로 삶의 높낮이를 재고/ 뼈의 단단함으로 살을 짓무르는 척추동물의 후예다”라는 진술에서 피와 살에 대한 관심과 존중을 찾아볼 수는 없다.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은 그의 웃음이라는 책에서 ‘경직성’이야말로 위트와 유머의 근원이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여기서 웃음이란 유연성을 상실한 고지식한 행동에 대한 비웃음으로써 풍자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한 가닥 뼈도 없는 흡반의 다리로/ 온통 삶이 꼬여버린 연체동물과는 근본부터 다르노니”라고 의기양양하게 떠벌리고 있지만, 연체동물이 지닌 유연성과 포용성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하는 독자의 반발에 대해서 아무런 해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3연에서 이루어지는 과장과 허풍은 더욱 가관인데, “무릎 닳아지고 허리 굽을 때까지 쉬지 않고 뛰어가리라”라는 장면부터 “고통의 강을 건너 광활한 바다에 뼈를 묻으리라”라는 대목에 이르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리해야 하는지 의문이 일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시적 화자가 내세우는 가치가 고작 “유령 같은 거리에 서서 허명의 빗장뼈를 움겨쥐리라”라는 허위의식에 그치고 있다는 점에 새삼 주목해 보면, 그 아이러니한 결말에 독자들은 실소를 금할 수 없게 된다.
“천변의 자전거를 타다가/ 대퇴부 골절상을 당한 용가리 통뼈”가 등장하는 시의 마지막 부분은 어떤가? ‘용가리 통뼈’라는 구절부터 풍자적 어조가 농후한데, 본래 용의 갈비뼈라는 뜻을 지니고 있지만, 관용적인 표현으로 담이 세고 뱃심 좋은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면서 믿을 것이 없는데도 까불어 대는 사람에게 비아냥댈 때 쓰기도 한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그 풍자적 저의를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아작아작 멸치 뼈를 씹고 있다”는 표현을 보면, 과도하게 뼈에만 몰두하는 시적 화자의 집요한 내면 풍경과 집착의 구도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점 역시 허위의식에 고착화되어 있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암시하고 있다. 유독 뼈에만 집착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개체적 차원에서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좋지 않지만 사회적 차원에서도 구성원들의 연대를 해치는 병균과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손톱은 뼈에서 그리 멀지 않은 친연성을 지니고 있는데, 시인에게는 그것은 모순과 배리로 가득 차 있는 역설의 대상이 된다.
너는 명예이자 멍에다
너무 짧아도 길어도 병이 된다
덧칠하고 수정하여 슬픔을 위장한다
너는 손가락이자 숟가락이다
너무 과해도 부족해도 골칫거리다
막연한 허기와 비장한 포만감을 가려야 한다
너는 예술이자 흉기다
너무 화려해도 사나워도 무기가 된다
나서야 할 때와 지워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
너는 망자이자 생자이다
죽어서도 자란다는 생각의 손톱을
갈고
닦고
다듬어
짧게
더 짧게
망각의 발톱까지
―「네일 아트」, 전문
네일 아트란 물론 손톱에 매니큐어를 다양한 방식으로 바르거나 액세서리 등으로 그것을 장식하는 일을 지칭한다. 그러니까 네일 아트는 우리의 육체 중에서 늘 자라고 있는 손톱을 대상으로 하여 심미적 효과를 창출하는 예술 행위인 셈인데, 우리의 육체를 아름다움의 질료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행위 예술로 간주할 수도 있다. 그런데 원래 손톱이란 미용적인 기능을 위한 조각이 아니라 손끝을 보호하고 손가락에 힘을 더해주어 손가락을 사용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장치이다. 그것을 예술의 질료로 활용하는 것은 따라서 우리 몸의 잉여적 사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잉여적 사용에 대해서 시적 화자는 “덧칠하고 수정하여 슬픔을 위장한다”고 평가하기도 하고, “막연한 허기와 비장한 포만감을 가려야 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손톱을 가지고 하는 예술적 행위는 어떤 정동을 숨기기 위한 위장이며, 어떤 내면 풍경을 가리기 위한 책략이기도 한 셈이다. 카멜레온이 자신을 천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몸의 빛깔을 수시로 변화시키는 것처럼 네일 아트는 자신의 어떤 약점을 가리고 위장하기 위한 보호장치가 되는 셈이다.
자신의 몸의 일부를 활용한 예술로서의 네일 아트는 잉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위장술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다시금 이중적인 속성을 산출한다. “너는 명예이자 멍에다”라든가 “너는 예술이자 흉기다” 등의 시적 진술들이 그러한 네일 아트의 이원적 성격을 직시하고 있다. 네일 아트는 내적인 약점을 덮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명예가 되지만, 손톱의 그러한 역할은 시적 화자를 그것에 예속하도록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멍에가 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심미적 가치를 창출하기에 분명히 예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겠지만, 동시에 그것은 위장술의 일종이라는 점에서 자아를 해치는 흉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의 이치로 그것은 “손가락이자 숟가락”이 될 수도 있고, “망자이자 생자”가 될 수 있다. 네일 아트는 손가락의 일부에 해당되는 일이기도 하지만, 손가락의 연장이라는 의미에서 숟가락과 같은 기능을 담당하기도 하며, 잉여적인 차원의 예술이라는 점에서 쓰고 난 후 남은 것으로서 그것은 죽은 것과 다르지 않지만, 또한 다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것은 분명 어떤 심미적 가치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생동감의 영역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네일 아트는 이처럼 모순적이면서도 공존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에 위험한 재주넘기를 하거나 외줄 타기를 하는 것과 같은 미묘함과 절묘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하기에 그것은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하나의 과제가 될 터인데 시적 화자는 그러한 상황을 “너무 짧아도 길어도 병이 된다”고 하거나 “너무 과해도 부족해도 골칫거리다” 혹은 “너무 화려해도 사나워도 무기가 된다”라고 하면서 그 파국을 경계한다. 따라서 네일 아트는 너무 과하거나 너무 부족한 경향성, 즉 극단으로 치달아서는 안되는데, 이러한 경계에는 시인이 생각하는 예술에 대한 생각이라든가 인생에 대한 통찰 등이 암시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하여 많은 윤리사상가들이 지적한 중도(中道), 혹은 적도(適度)라는 인생의 황금률에 대한 생각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시적 화자가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갈고/ 닦고/ 다듬어”라든가 “짧게/ 더 짧게”라는 시어를 통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금욕과 절제와 같은 가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덕목은 에술의 함축적 풍요로움과 건강한 삶의 궁극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예술에 대한 관심과 건강한 삶에 대한 관심은 시인의 궁극적인 주제일 터인데, 이어서 건강한 삶에 대한 시편들을 살펴보자.
2. 건강한 삶을 위한 조건
빈손이라야
악수가 가능하다
한쪽의 힘이 너무 세거나 약하면
진심의 악력이 전해지지 않는다
흉금 없는 사이라야
포옹이 가능하다
가슴 속에 억울함 품고 있으면
서로 껴안거나 등을 토닥일 때
마음의 독 가시가 툭 튀어나오고 만다
잠수함 속 토끼도
갱도 속에서 노래하는 카나리아도
미세한 떨림을 감지한다
지난밤 당신이 한 일을 알고 있어
억울한 소문과 낯선 두려움이
깡마른 주먹 악수를 하며
가파른 서로의 등을 어루만진다
―「악수와 포옹」, 전문
악수와 포옹은 한 사회의 타자들이 서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두 기제이다. 친애와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서로 손을 내밀어 마주 잡는 일, 혹은 사람들끼리 서로 품에 껴안는 의례는 건강한 삶과 건강한 인간관계를 위해서 매우 유용한 척도가 된다. 그런데 그러한 의례가 진정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조건이 필요한데, 이러한 주제가 이 시의 주된 관심사이다.
“빈손이라야/ 악수가 가능하다”라든가 “흉금 없는 사이라야/ 포용이 가능하다”라는 시적 진술이 악수와 포옹이 가능케 하기 위한 조건에 해당한다면, “한쪽의 힘이 너무 세거나 약하면/ 진심의 약력이 전해지지 않는다”라거나 “가슴 속에 억울함 품고 있으면” “마음의 독 가시가 툭 튀어나오고 만다”는 표현은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의 부정적인 결과를 암시해준다.
그런데 그 전제조건들을 살펴보면, 그것은 윤리적 덕목에 대한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빈손”이라는 표현은 상대방을 받아들기 위한 마음의 준비로서 편견과 선입견의 방기, 그리고 그것을 통한 전적인 환대와 배려의 내면적 풍경을 강조하고 있는데, “한쪽의 힘이 너무 세거나 약하면/ 진심의 약력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구절은 그러한 환대와 배려라고 할지라도 그것 또한 균형과 적도에 맞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대등하고 평등한 수평적인 마음의 교환이 건강한 인간관계의 척도가 되는 것이다.
“흉금”이라는 표현도 “빈손”이라는 시어와 마찬가지로 비우고 해방되어 깨끗한 마음 상태를 강조한다. 상대방에 대한 미움과 증오의 감정을 청산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악착(齷齪)과 집착으로부터의 탈피를 필요로 한다. 그러니까 포옹이란 타자의 허물과 잘못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아량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포용이기도 한 셈이다. 이제 시인이 ‘빈손’이라든가 ‘흉금’이라는 함축적 어휘를 통해서 강조하고 한 의미가 분명해지는데, 그것은 바로 자아에 대한 적절한 절제와 타자에 대한 포용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절제와 포용은 자아와 타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미묘한 균형감각을 필요로 한다. 시인이 “잠수함 속의 토끼”라든가 “갱도 속에서 노래하는 카나리아”를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미묘한 정동의 흐름이라든가 섬세한 관계의 균열과 같은 미세한 흐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성격은 ‘네일 아트’에서 이미 점검한 요소이기도 하다. 이러한 미묘한 균형감각의 상실은 다음 시처럼 파국을 초래할 수도 있다.
비자금이 꽃비처럼 쏟아지면
장미를 살까 권총을 장만할까
내 안에 내장된 여정을 마무리하고
또 다른 세계로 떠난다면
장미는 알까
권총 같은 부채를 안고
오지 않는 그 날을 기다린다는 것을
노구에 장식된 감정의 실타래가 풀리면
난 시집을 살까 청진기를 챙길까
익숙한 감각마저 사라지면
어떻게 나를 증명할 수 있을까
꽃잎은 시들었고 가시도 무뎌졌는데
안락의자에 앉아 고통의 현재 시각을 바라본다
친절한 프사가 악역 배우처럼 충고한다
장미의 주인공은 당신일지도 몰라요
신용과 불량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경력 30년 전문직이라는 멘트와 함께
―「디폴트」, 전문
디폴트(default)란 물론 채무 불이행을 의미하며, 그것은 파산과 도산, 그리고 신용불량의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한 개인의 파국은 물론 한 사회의 혼란을 야기하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그런데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다양한 상징적인 의미와 연관되어 있다. 채무 이행이라든가 변제 등의 의무는 사실 삶과 관련되어 있으며, 죽음의 영역에서 그것들은 모두 무화되고 만다. 그러니까 삶의 영역에서만 채무 이행이라든가 디폴트라는 개념이 유효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삶의 영역에서는 수많은 채무의 종류들이 존재한다. 직장에 출근해서 하루의 일과를 수행하는 것에서 비롯하여 아버지라든가 어머니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과 관련하여 자기 자신의 고유한 삶의 행로를 이행하고 완수하는 것 등의 다양한 책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책무는 물론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고, 자신의 고유한 삶의 행로를 이행하는 것, 그러니까 자신의 소명과 천품을 실현하면서 삶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 시에는 다양한 이분법적 구도가 존재하는데, 장미와 권총을 비롯하여 시집과 청진기, 신용과 불량 등의 대립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장미와 권총의 대립은 맥락의 차원에서 삶의 향락과 죽음의 무화라는 구도를 표상하고 있으며, 채무와 관련해서는 장미가 채무의 이행이라는 의무를 함축하고 있다면 권총은 채무의 불이행을 의미한다. 시집과 청진기의 대립은 영혼과 육신, 혹은 영혼의 건강과 육신의 건강이라는 구도를 함축하고 있는데, “노구에 장식된 감정의 실타래가 풀리면”이라든가 “익숙한 감각마저 사라지면” 등의 표현들은 그러한 영혼과 육신의 구별이라는 것이 매우 상대적이고 한정적인 개념에 불과함을 암시한다.
그런데 의무라든가 채무 불이행이라는 등의 사회적 규범은 삶의 생동감을 약탈하는 주범인지도 모른다. 시적 화자가 “안락의자에 앉아 고통의 현재 시각을 바라본다”고 고백하는 장면은 채무와 변제로 점철된 의무의 상징계가 고통과 억압의 기제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메커니즘의 연장선에서 “장미의 주인공은 당신일지도 몰라요”라는 내면의 울림이 전해지자 시적 화자는 “신용과 불량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초월의 경지로 이동한다. 신용과 불량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경지란 물론 채무와 변제의 개념이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자유로운 경지에 도달한 시적 화자는 그러한 개념에 얽매이지 않고 채무를 변제하는 데 자신의 삶을 탕진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디폴트에서 자유로운 삶이라 할지라도 삶의 사각지대에 대해서는 맹목을 드러낼 수도 있다.
3. 삶의 사각지대가 지닌 의미
시집 한 권 보내고 싶었는데 주소를 물어보기는 겸연쩍고 주소를 알만한 단서는 보이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가 누구인지 가물거리고
혼사 소식을 들었는데 모바일 단체 청첩장이라 가기도 쑥스럽고 안 가기도 체면이 아니라
계좌번호만 확인했는데 날짜가 지나가 버리고
신문 동정란 보고 병원장 등극한 동창 소식 접했는데 축하 전화도 축하 난도 어색해서
우물쭈물하다 보니 어느새 퇴임 소식
부고를 접하고 망자 대신 장례식장을 확인하는데 주중에는 시간이 없고 주말에는 거리가 멀어
핑계 대신 반가운 계좌번호만 하릴없이 바라보고
보조미러를 달고
두 눈 부릅뜨고
귀 활짝 열고
말없이 '좋아요'만 누르고 사라진 지인에게
메신저를 통해 안부나 전할까
전화로 직접 목소릴 확인할까 고민하다가
다시 들어가 보니
이미 페친 삭제
―「사각지대」, 전문
사각지대란 어느 위치에 섬으로써 보이지 않게 되는 각도를 의미하기도 하고, 관심이나 영향이 미치지 못하는 삶의 어떤 영역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특정한 관점으로 인해 맹목을 드러내게 되는 경우나 관심의 사각지대로서 주목으로부터 소외된 삶의 어떤 국면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시에는 다양한 삶의 사각지대가 등장하는데, 주로 삶의 의례적인 순간이 이에 해당된다. 즉 출간한 시집을 보내야 하는 경우, 혹은 지인의 혼례에 참석해야 하는 경우, 그리고 동창생의 승진 소식에 축하 난을 보내야 하는 경우, 망자의 장례식장에 참석해야 하는 경우 등에서 사각지대가 발생한다.
그런데 이 시에서 묘사되어 있는 삶의 사각지대란 사실 시각에서 벗어나 있거나 온전히 관심의 영역에서 소외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고, 관심이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결단을 내리기에 충분한 동기가 부여되지 못한 상황에서 발생한다. “차일피일 미루다가”라든가 “날짜가 지나가 버리고”, “우물쭈물하다 보니”, “하릴없이 바라보고” 등의 표현들이 애매한 상황으로 인해 결단을 단행하지 못하고 내적인 갈등에 휩싸여 있는 상황을 시사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내적 갈등으로 인해서 중요한 사건들이 나의 삶을 비켜가고 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누구인지 가물거리고”라든가 “날짜가 지나가 버리고”, 그리고 “어느새 퇴임 소식”, “다시 들어가 보니/ 이미 폐친 삭제” 등의 구절들이 자신에게 다가온 사건들이 이미 자신과 무관하게 종결되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니까 우물쭈물하고 망설이는 동안에 중요한 사건들은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벗어나 버리고 자신이 개입할 수 없는 맹목의 지대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삶의 사각지대는 우리의 일상을 크게 변화시킬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집을 발간하고, 혼례에 참석하고, 승진을 축하하며, 망자를 애도하는 등의 사건들은 우리 삶의 중요한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다. 그것들은 우리 삶의 마디이자 결절점에 해당된다. 통과의례란 사람의 일생 동안 새로운 상태로 넘어갈 때 겪어야 할 의식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까 통과의례란 우리의 삶이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인데,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어떤 탈피와 갱신의 기제로 작동한다. 시적 화자가 “보조미러를 달고/ 두 눈 부릅뜨고/ 귀 활짝 열고” 그것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우리 삶의 활력과 생동감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상으로 김연종 시인의 신작 세계를 살펴보았다. 의사로서 시인은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러한 맥락이 조성되어 있기에 이번 신작들도 모두 그러한 인식틀로 접근하도록 한다. 시인이 상정하는 삶과 죽음, 혹은 건강한 삶과 그것의 조건들에 대한 탐색은 결코 가볍지 않다. 깊은 통찰과 사유가 빛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시인의 냉철하고 객관적인 관점인데, 의사로서 뭇 생명을 관찰하고 다양한 삶을 통찰한 경험에서 나오는 삶에 대한 이해와 사유가 감상에서 벗어나 있기에 더욱 실제에 육박하는 예리함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우리 시단을 풍요롭게 하고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부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