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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배(빌 길버트) 15
● 제7장 그 충격
헤이그 장군의 흥남철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는 2000년 4월 필자에게 말했다:
"그들은 모두 탈출했습니다. 그때 그것은 엄청나게 충격적인 일이었지요. 우리는 흥남 해안 안에서나 밖에서나 충분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고 무한정 거기 머물러 있으면서 적을 대량으로 분쇄할 수 있는 공군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철수하기로 결정을 한 것입니다. 거기엔 여러 가지 전략적으로 타당한 이유가 있었지요. 그곳에 그냥 앉아 있을 수는 없었지요."
그리고 장군은 가장 잊을 수 없는 그의 인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때 가장 충격을 준 것은 그 피난민들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차디찬 바닷물 속에 허리까지 잠그고 서서 구출해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그 장면입니다.'
그 젊은 육군대위는 함흥의 아몬드 장군 사령부로부터 지프차를 타고 그가 직접 책임지고 있는 장군의 통신차량, 무전기, 비밀장비 등을 가지고 다른 한 지프차의 호위를 받으며 내려왔다. 그 모든 장비는 아몬드 장군이 야전 10군단 사령관으로서 작전하는 데 절대 필요한 것들이었다.
헤이그의 말에 의하면, 피난민은 적국의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을 소개 시키려는 계획은 지휘계통의 최고위층까지 거슬러 올라가 결정된 것이다. 헤이그는 회고했다:
"아몬드 장군이 동경의 맥아더 총사령부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총사령부가 워싱턴도 움직여서 피난민 소개도 철수작전에 포함시키기로 한 것입니다. 그것을 반대하는 압력도 컸습니다. 그로 인해 군의 철수가 지연되면 위험하다는 우려 때문이었지요. 그러나 멀리서 세세하게 사태를 관리하려면 현장 사람들의 의견 청취가 늘 필요하듯이. 그들이 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들에게 영원히 남을 영광을 위하여!"
미래의 사성 장군의 회상은 계속되었다
"나는 끝까지 남아서 지켜봤습니다. 나는 아몬드 장군의 통신장비와 그의 지프차와 기타 물건을 화물선에 싣고 마지막으로 떠난 사람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전반적으로 큰 위험 없이 질서정연하게 진행된 철수였지요. 최종 결정은 맥아더 장군이나 그의 총사령부가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워싱턴에 그 큰 작전을 하기에 충분한 배들을 다 집결시켰다고 통보했을 겁니다. 그야말로 문제 치고는 너무나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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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살아남는다는 것 자체가 피난민들에게는 큰 문제였다. 그해 12월의 그 매서운 추위에 맨발로 집을 뛰쳐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더러는 홀껍데기 옷만 입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신문지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멀 스미스는 말했다: "네가 거기 서서 자문해 봐라. 도대체 몇 천 명이 그 뒤에 따라오고 있단 말인가? 이 일은 과연 언제 끝날 것인가?"
12월 23일 일지에는 작업이 언제 끝날지 그 끝이 보이지 않았음이 적혀 있다.
00:00 갑판의 승강구를 모두 열어 제치고 피난민 승선작업 계속 진행.・・・
03:30 2와 5선창 승선 완료.
-프란존(A. Frarzon), 3/0 기록
04:00-08:00 구름 덮임, 시계(視界) 양호, 전과 동일하게 1.3.4 선창을 채움.
05:00 4선창 완료.
07:00 1선창 완료.
-골름베스키 (4. W. Golembeski). 2/0 기록
11:10 피난민 승선 작업 완료 GI 등 모두 하선(THE).
-스미스(H.J.B.Smith.Jr.). 3/10 기록
사관들과 선원들이 피난민 승선 작업을 완료했을 때 메러디스 빅토리호에는 14,000명이 탄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 중에 17명이 부상을 당했다. 분만을 며칠 또는 몇 시간 앞둔 여자가 5명이었다.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들은 엄연히 다 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공간이 도저히 없었지만 그런 공간이 생긴 것이다."라고 라루 선장은 훗날 술회했다. 이윽고 12월 23일 해리(里)로 450마일 떨어진 안전한 항구 부산을 향해 출
발했다.
역전의 육군대령 애플먼(Appleman)은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한 최다(多)의 피난민을 LST와 화물선인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신속하게 수용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 <함정에서 탈출(Escaping The Trap)>이란 제목의 책을 냈다.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수천 명의 피난민들을 LST에 빽빽하게 태우고 무서운 추위에 열린 갑판에 노출시킨 채 3~4일간 남쪽으로 태우고 간 일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그때 그 처참한 광경을 평생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피난민들은 그런 육체적 고통과 형벌을 사투를 벌이며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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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본국에서 대서특필한 뉴스는 지엠(GM: General Motors) 자동차회사가 4일간의 동결을 해제하고 1951년 모델 자동차 시판을 개시했다는 것이었다. 연방정부의 압력을 받아 포드(Ford) 사의 예를 따라 차가격을 1950년 수준으로 되돌리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이제 고객들이 쉐보레(Chevrolets), 폰티액(Pontiacs), 캐딜락(Cadillacs) 등을 다시 살 수있게 되었다.
그날 한국 발 AP통신은 이렇게 보도했다
"중공과 북한 공산군 연합군이 지금까지 최대의 공세를 펴서 아군의 교두보를 궁지로 몰았으나, 아군의 결정적 반격으로 적을 분쇄한 결과 북한의 동북부 지역에는 정적(靜寂)만 감돌고 있다. 공산군의 최대 공세는 흥남 교두보 반격작전에 의해 완전히 분쇄되었다. 전투 후에 산간 지역의 전투장에 흩어져 있는 것은 흰색 민간인 옷을 입은 중공군과 인민군의 얼어붙은 시체들뿐이었다.
12월 15일 미 제1해병사단이 흥남에서 부산으로 떠나고 18일에는 남한의 1군단이 배를 타고 홍남 해변을 떠났다. 미 육군 제7보병사단은 21일에 떠났다. 미 제3보병사단은 "봉쇄 작전(blocking action)" 전투를 끝낸 그 다음날 홍남에 도착했다. 이것은 먼저 해병대가 제3보병사단의 홍남 진입을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12월 5일 작전 중 3사단의 임무는 해병대가 흥남 해변으로 후퇴하는 동안 그 후미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12월 22일 해병대가 배로 떠난 뒤에야 3사단은 흥남 해변으로 올 수 있었다. 그리하여 3사단은 연합군 중에서 해변의 방어선을 맨 마지막으로 지키고 홍남을 맨 마지막으로 떠난 전투부대가 되었다.
그때 33세의 리오 마이어(Leo Meyer)는 미 3사단에 복무하고 있었다.
2000년 5월 그의 회고에 따르면, 12월 22일 3사단이 철수할 때 홍남 해변에서의 전투가 치열할 수도 있었는데, 실은 3사단이 크리스마스이브에 출항할 때까지 적과의 교전이 별로 없었다"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내 생각에는 중공군 지휘부가 우리의 의도를 알아차렸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우리를 북한 땅에서 축출하는 것인데, 우리가 자발적으로 나가겠다는데 왜 우리를 추격하느라 자기네 병사들을 죽이느냐? 그거였어요. 22일 이후 그들이 추격을 멈춘 게 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22일 그가 속한 부대가 도착하여 크리스마스이브에 출항할 때까지 흥남 해변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한 편지에는, 미군들 사이에 참으로 특이한 경쟁이 벌어졌다는 마이어의 흥미로운 관찰이 적혀 있다.
"적군과의 최후 결전의 표시로서 미군부대 중 어느 부대가 마지막 철수의 영예를 차지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다. 누구나 '후미를 지킨 찰리 깡다구(rear-end Charlie)' (미군 속어-후퇴 때 맨 마지막까지 남아서 전우를 보호한 용사. 즉 전군(殿軍).-역자)의 영예를 차지하고 싶었다. 그런 이유로 사단으로부터 각 보병연대가 동시에 철수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각 연대는 같은 규모의 부대를 동시에 배로 보냈다. 즉, 대대별, 중대별, 소대별로 같은 규모의 부대를 동시에 보냈다. 그리하여 각 연대는 1개 소대씩만 해변에 남겨둔 후 그들이 맨 마지막으로 각 소속 연대로 동시에 찾아가도록 했다. 따라서 그 어느 연대도 자기들이 마지막으로 떠났다는 주장을 못하게 만들었다."
피난민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 호와 다른 배들이 바다로 떠나간 후에도 3사단은 그들이 "찰리 용사 방어선(Line Charlic)"을 지킴으로써 10만 명을 구출한 그 극적인 역사적 사건에 참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마이어는 회고하기를, "우리가 북한 피난민을 구출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지요. 피난민이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어요. 우리만 살아남은 줄 알았습니다."
그의 기억에 남은 것은 좋았던 조건들 --해변을 떠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배를 탄 후 호강한 일--과 샤워, 새 군복, 무엇보다도 푸짐한 크리스마스 음식 등이었다.
그가 구출된 후 마이어의 첫 반응은 자기 아버지를 새로 존경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12월 24일 오전 11시 30분에 궁둥이까지 잠기는 출렁이는 조류 속에 뛰어들어 배에 탔어요. 파카, 배낭, 카빈, 권총 등 물에 흠뻑 젖은 기억만 나요. 그때 아버지가 얼마나 현명하셨는지 생각나더군요. 나보고 육군에는 가지 마라. 해군에 지원하라고 충고하셨거든요."
마이어는 너무나 좋아서 말했다:
"아…. 그리고 나는 너무 좋아서 놀라 자빠질 뻔했습니다. 우리가 침상(bunk)으로 가는데 식사준비 대를 통과하다가 놀랐어요. 크리스마스이브 디너 테이블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더라고요. 식탁보, 사기접시와
해군용 접시 등이 등장하고……. 무엇보다도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아... 그 셀러리와 홍당무와 올리브를 섞은 샐러드 접시였어요! 11월 17일 이후 깡통만 따먹다가 이게 웬 떡이냐였지요." 그의 기억은 계속되었다
"내 침대로 가서 배낭과 무기를 내려놓고 배 안의 매점으로 향했습니다. 티셔츠와 속 팬츠(이해할 만하다) 2벌씩만 살 수 있었습니다. 샤워장으로 가서 볼일을 보고 일어나서는 그냥 걸어서 돌아다니는 거예요.
내의를 11월 17일 입고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나 벗었습니다. 땀 같은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도 않았어요. 우리는 모두 같은 배를 타고 있었는데, 그토록 추운 기온에서는 몸에서 나는 냄새를 아무도 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안전한 곳을 찾아 한국 남단으로 해상 여행을 한 셈이라고 하였다: "3일간의 그 여행은 우리에게는 호화판이었습니다."
2차대전 중에는 태평양 전투에 참전했고 월남전 때는 특전단의 멤버로 3번이나 복무한 마이어는 말했다: "부산 가는 배 속에서 나는 -- 누구나 다 썼지요-- 매일 집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신문에서 보도한 말들은 다 흘려버리라고 썼어요. 나는 오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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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한국전, 월남전을 통틀어 훈장을 가장 많이 받은 군인 중 한 사람은 흥남에서의 3사단에 속했던 존 미들마스(John Middlemas) 준위였다. 지금은 제대했지만 그때 그는 '충원이 부족했던 중대-A중대 소속이었다. A중대는 매우 위험한 임무를 띠고 있었다. 적정(敵情)을 살펴서 사전 경보를 할 수 있는 전방 위치에서 적의 침투방지 전투를 수행해야 하는 임무였다. A중대는 중공군 개입 후 2개월간의 혈투 끝에 홍남에 설치한 방어선 약 1000미터 전방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 부대는 미군 67명과 200명의 한국군 (ROKs)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미들마스 준위는 한국군은 장정들을 거리에서 마구 잡아 급속히 충원시킨 군대라고 했다:
"모병관들이 읍내로 들어가서 아무 청년이나 잡아 왔습니다. 이 새파란 신병들의 머리를 박박 깎고 군복을 지급하고 최소한 훈련을 시킨 다음 곧바로 전선으로 내보냈습니다. 한 사람은 아내의 약을 지으려고 시내에 나갔다가 붙잡혀 갔습니다. 그 부인은 남편을 1년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10월 중순부터 11월 중순까지 A중대는 처음으로 중공군과 혈전을 벌였고, 흥남까지 후퇴하는 과정에 큰 타격을 입었다. 12월 22일 홍남 주위의 방어선까지 오는 동안에 177명의 사상자를 내서 병력이 90명으로 줄었다.
전공으로 5개의 은성훈장. 불란서 십자훈장, 청동무공십자훈장 2개의 동성훈장, 3년 동안에 명예 상이기장을 수여받은 마들마스는 A중대의 최대 도전은 미 공군 조종사들이 말해준 홍남 외의 방어선 뒤 큰 산림지역에 1만여 명의 몽고 기마병이 포진하고 있다는 정보였다.
미들마스 준위는 정확한 숫자는 모를지라도 좌우간 중공군의 대병력임은 틀림없다고 했다. 다행히도 그들과 교전은 피했고, 가장 심했던 전투는 3사단이 철수하기 바로 전날인 12월 23일 야간에 A증대 척후병과 붙은 소규모 교전이었다.
A중대의 대부분의 교전은 북의 인민군이 미군 전초선을 찔러볼 때, 즉 적의 척후병들이 아군의 전초지를 침투하려고 할 때 일어났다. 우리의 전초기지 수비병이 없었더라면 그들이 찔러보다가 저항이 없자 그때에는 그들의 주력부대로 우리에게 쳐들어왔을 것이다. 이따금씩 그들이 박격포로 공격했지만 주로 밤에 더욱 맹렬히 쏘아댔다.
미들마스는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적들이 얼마나 우리와 근접해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우리 A중대 주력부대가 왜 현재의 위치를 수호하고 있는지 그 이유는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전투의 주력부대가 이미 철수한 이상, 제3보병사단의 임무는 공포에 질린 피난민들이 항구에서 대기 중인 미국 함선을 타려고 밀치고 뛰면서 몰려들 때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3사단이 다 철수할 때쯤엔 피난민들은 이미 다 떠나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우리들이 해야 할 남은 일은 폭파작업이었습니다."
필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물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미들마스에게 했다: "해변을 방어하여 피난민의 승선을 돕고 있는 군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들을 적의 포화에 노출시키기를 반대한 군인들이 있었습니까? 더욱이 그 피난민들이 적국의 시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답은 헤이그 장군의 대답이나 그 외의 인터뷰를 했던 사람들의 말과 동일했으며, 마찬가지로 단호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악의를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잘 단련된 군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반기를 드는 그런 군인들이 아니었습니다. 명령을 받으면 그대로 수행했지요. 명령이 하달될 때 '좀 회의를 열어 따져봅시다.' 그러지를 않았습니다. 그럴 시간 여유도 없었고요. 명령이 떨어지면 '예!' 하고 복창했을 뿐입니다. 서서 머뭇거리며 생각할 틈이 어디 있습니까. 고지 위로 돌격할 때 이 길로 갈까 저 길로 갈까 생각할 틈이 어디 있습니까? 그 개자식들이 총을 마구 쏘아대는데... 우리는 그때 사이곤 (Saigon)에서보다는 훨씬 잘 싸웠습니다.
미들마스는, 중공군은 미군이 철수하기 전 마지막 며칠간은 그들의 공세를 늦추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3사단의 방어가 너무나 철벽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말했다: "우리의 방어선에 허점이 있었더라면 그들이 더 세게 나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의 철수작전 마지막 며칠간 그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누그러뜨린 것은 자기들의 주목표를 달성했다'는 것, 즉 '북한에서의 미군 퇴출'이 이루어졌다. 그것이지요.'
흥남 철수에 관한 미들마스의 기억은 홍남 해변 전투를 상세히 묘사할 정도로 아주 명료했다. 그들이 견뎌낸 고통에 대한 이야기도 리오 마이어(Leo Meyer)의 이야기를 확인시킬 정도로 같았다. "우리가 배에 올라 처음 샤워를 할 때 우리의 손과 얼굴은 새까맣게 더러워져 있었는데, 우리 몸은 아주 새하얀 색깔이었어요. 한달 간 옷을 벗어 본 적이 없거든요. 아직도 양말이나 속 팬츠를 갈아 입을 때면 그때 생각이 납니다.
흥남 철수 후 4개월 될 때 중공군의 맹렬한 춘계(春季) 공세에 맞서 전투를 하다가 미들마스는 부상을 당했다. 곧 그의 무용이 인정되어 전장 현지임관(戰場現地任官)으로 육군중위로 진급했다. 그는 군에 더 복무하
다가 소령으로 제대했다.
수년 전 그의 17세 난 외손녀가 미들마스의 한국전 참전 경험에 대해 물었다: "외할아버지, 사람 죽인 일 있으세요?"
외할아버지가 대답했다: "내가 받은 무공훈장만도 10개가 되는데…아마 그랬을 거야."
외손녀가 말했다: "그거 너무 끔찍하지 않아요? 외할아버지가 차마 어떻게 그런 일을?"
외할아버지는 할 말이 있었다: "그래? 가만 있자... 너의 엄마의 아버지가 죽었다면 그게 더 좋았겠니?"
여학생 손녀가 짖궂게 물었다. "외할아버지가 그런 일을 꼭 하지 않았어도 되지 않았나요? 그렇지요?"
외할아버지가 말했다: "음. 내가 그럴 수도 있었지. 그런데 말이야. 상대방 그놈이 나를 봐주기 위해 내게 온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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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중장 휘하의 10군단과 유원(E.C.Ewin) 해군소장 휘하의 77해군 기동함대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인류 사상 위대하고 찬란한 페이지인 흥남 철수작전은 완전히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