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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으로 이룩한 축복
성경본문 : 잠언 20: 21
21.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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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갑준 목사
최근, 미국의 역대 큰 부자들의 순위가 보도된 적이 있습니다.
현재 세계 최고 부자인 빌 게이츠는 옛날 부자들과 견주어 볼 때 순위가 여섯 번 째 해당됩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최고 부자는 우리가 잘 아는 석유왕 록펠러이며, 강철왕인 카네기는 다섯 번째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거부들은 몇가지 면에서 서로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이 사람들은 한결같이 큰 돈을 벌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돈의 가치를 아주 소중히 했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일화로 록펠러가 큰 부자가 된 후 언젠가 은행창구에서 1센트짜리 동전을 실수로 떨어뜨리게 되었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별 신경도 안 쓸 것인데, 록펠러는 구르는 동전을 주을려고 객실을 이리저리 헤매며 소동을 피우더니, 동전이 탁자밑으로 들어가자 바닥에 무릎을 꿇고 들어가 주었다는 것입니다.
강철왕 카네기도 돈 쓰는데는 아주 엄격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손들에게 1주일에 1달러 이상 용돈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과거 아버지는 실직하고 어머니는 신발을 꿰메는 일을 하고 있었을 때, 자신은 13세의 어린 소년으로서 주급 1달러의 품팔이를 하여 가게를 도왔는데, 이것이 훗날 자신을 부자로 만드는 초석이 되었다고 생각해서 자식들에게 결코 큰 돈을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들은 너무 자식들을 나약하게, 세상을 너무 쉽게 살도록 키우고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또 미국 부자들의 한가지 특징은 자신들이 번 돈을 사회에 아낌없이 환원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미국의 5만명 이상 되는 도시에 가보면 록펠러나 카네기의 이름이 붙은 연구소나 병원, 공원, 학교, 복지시설을 쉽게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돈을 바르게 써야 돈이 다시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들은 나름대로 돈버는 철학이 분명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큰 물질로 축복해 주시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훗날 록펠러는 고백하기를 자기는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 돈을 벌었다 했습니다.
그리고 돈은 벌기보다 바르게 쓰기가 10배나 더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솔직하게 말해서 요즈음 살기가 참으로 힘드시지요.
그 흔하던 돈이 다 어디로 갔는지 요즈음은 돈 쓰기는 고사하고, 돈 구경하기도 참으로 힘듭니다.
실제로 은행이든, 투신사등 매일 들리는 소식은 망해서 문닫았다는 것 아닙니까?
여기에다가 폭우로 인해서 전국토가 엄청난 피해를 보았습니다.
아이엠 에프 하나만 극복하기도 우리의 힘이 버거운데, 여기에다가 자연재해까지 가세를 하니까 과연 우리 나라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다가 나라가 폭삭 주저앉지나 않는가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미래에 대해 불안해 하거나, 염려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형편이 어렵다고 절망해서도 안됩니다.
매일 매일의 삶이 고통스럽다고 삶을 포기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며, 우리의 미래를 시온의 대로로 활짝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무기가 어디 있습니까?
이것보다 더 든든한 약속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어떠한 절망의 상황에서도 더욱 큰 믿음을 가져야 하며, 넘어지더라도 오뚜기처럼 우뚝 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직전, 인간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제자들은 한결같이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곁을 다 떠났습니다.
그리고 견디기 어려운 십자가의 고난이 가슴깊이 엄습해 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장 희망이 넘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지혜자를 통해서 고통가운데 있는 우리들에게 귀한 위로의 말씀을 하십니다.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
현대인의 역본인 새번역 성경으로 이 말씀을 상고하면 의미가 더 쉽게 이해됩니다.
<처음부터 빨리 모은 재산은 행복하게 끝을 맺지 못한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저에게 남다른 위로를 주었고, 또한 제가 목회철학을 세우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해야 할 고등학교 2,3학년때 공부를 열심히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을 두 번이나 떨어졌고, 결국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또 취직하는데도 몇 번의 실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달은 뒤로는 별로 시험에 떨어져 보지 않았습니다.
준비가 부족했지만 신대원 시험, 대학원 시험, 목사고시, 그 밖의 여러 시험들 떨어지지 않고 다 합격했습니다.
그런데도 유독 보았다하면 떨어지는 시험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운전면허 시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응시원서 뒷면에 수입인지를 여러 장 붙였습니다.
필기시험 1번, 코스 3번, 주행 1번 등 무려 다섯 번이나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코스시험은 너무 느긋하게 하다가 시간초과로 떨어졌습니다.
교인들은 재미있어서 묻는지? 궁금해서 묻는지 모르지만, 좌우지간에 제가 떨어졌다고 하면 은혜받은 표정으로 웃습니다.
그래서 한번은 정말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오늘은 합격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도 여지 없이 떨어졌습니다.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떨어지다니 마음이 진정이 안됩니다.
기도도 안됩니다.
그런데 그 때 매일 잠언을 날짜대로 묵상을 하는데, 그날이 20일이었으니까 별뜻없이 잠언20장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오늘 본문의 말씀이 저의 눈에 쏙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일순간에 섭섭했던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화도 사그러 들었습니다.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지혜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 운전이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중요한 기술인데, 운전면허를 쉽게 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운전을 내가 바르게, 안전하게, 잘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서두르지 말자. 초초해 하지말자. 그리고 기초부터 바르게 운전을 배우자.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오히려 떨어진 것이 감사했습니다.
더 열심히 겸손히 운전을 배웠습니다.
그 결과 다음 번 시험에서 합격할 수 있었으며, 오늘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조그마한 접촉사고도 없이 안전 운전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엇을 이루는 것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저 발리 빨리 성공하기보다는, 정상적으로, 절차에 맞추어서 합법적으로 일을 해나가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과정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오늘 우리 모두가 고통스러워하는 우리나라의 총체적 부실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그래서 적당히, 대충 한 것이 오늘의 위기를 자초한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빨리만 하려고 하는 이 성급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 아닙니까?
그러기에 오늘의 이 총체적 위기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역설적으로 여유로운 마음입니다. 느긋한 마음입니다.
서두르지 말고, 당면한 문제를 실타래 풀 듯이 하나씩 하나씩 해결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지혜자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는 마음속에 깊이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
오늘 본문의 말씀을 깊이 음미해보면 세 가지 면에서 우리들에게 귀한 영적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단어를 뽑아보면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속히, 마침내 우리는 처음을 중요시 합니다.
첫 번째 끝내버릴려고 합니다.
첫 눈에 맘이 들면 생각도 안해보고 쉽게 결정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매사를 속히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마침내, 이 마지막이 중요합니다.
과거 저희들이 우리나라의 국민성을 배울 때 은근과 끈기라고 배웠는데, 이러한 정신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그리고 매사를 얼마나 빨리만 할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밥먹는 것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밥먹는 것입니까. 퍼넣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위장병이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진지하게 들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 세가지 메시지를 들려 주십니다.
첫째는, 지금 우리 눈앞에 좋은 것이 다 우리들에게 정말로 좋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좋다고 끝까지 좋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지금 즐겁다고 영원히 즐거운 것입니까?
지금 행복하다고 영원히 행복한 것입니까?
지금 잘산다고 영원히 잘사는 것입니까?
지금 잘나간다고 영원히 잘나가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보다는 내일이 더 중요합니다.
순간보다는 영원이 더 중요합니다.
시작보다는 마지막이 더 중요합니다.
세상보다는 하나님 나라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한 순간의 기쁨을 위해서 영원의 축복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오늘만을 그저 즐기다가 미래의 영원한 축복을 놓쳐버린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아는 대로 이솝우화의 개미와 베짱이, 개미는 추운 겨울을 위해서 여름에 땀흘려 일했습니다.
그러나 베짱이는 덥다고 베짱좋게 나무밑에서 노래나 부르면서 즐겁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땀흘려 일하는 개미를 비웃었습니다.
"놀아라 놀아. 지금 안놀면 언제 노냐?"
플레이 플레이 영 플레이, 올드 플레이 노 플레이.....
그런데 계절이 바뀌고 추운 겨울이 왔을 때 형편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베짱이의 마지막은 너무나 비참했지 않습니까?
오늘만을 생각하는 사람, 비참한 인생 결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진정한 인생 평가는 죽는 순간 비로소 내릴 수 있습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 나라에 가봐야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형편만 보고서 성공했느니, 실패했느니, 행복했느니, 불행했느니, 복받았느니 못받았느니 함부로 말할 것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겸손하게 매일매일의 우리의 삶을 신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내일의 소망을, 아니 영원한 세계를 꿈꾸며, 오늘을 희생하며 살아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진정한 성공의 원동력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현재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이것이 결코 불행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현재를 가장 민감하게 느끼기에 지금 좋으면 다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반대로 지금 어려우면 다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재의 상황에 우리의 삶이 좌우될 때가 많습니다.
더우면 덥다. 추우면 춥다. 비가 많이 오면 많이 온다, 비가 또 적게 오면 적게 온다고 난리입니다.
그러나 고난은 결코 저주도, 불행도 아닙니다.
다만 고난의 상황에 우리들이 어떻게 대처하고, 고난을 우리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는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김용기 장로님, 그 분은 일생동안 개척자의 길을 기쁜 마음으로 걸아가셨습니다.
보통사람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은 척박하고, 험한 땅, 쓸모 없는 땅을 사서 50년 가까이 피와 땀과 눈물로 개간하여 가나안 농군 학교를 건설하였습니다.
그 분은 평상시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교훈을 주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나은 육신의 자녀보다도 뜻을 함께하는 영혼의 자식이 곧 내 형제요, 자녀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앞에 크게 쓰임받았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대신 이전에 억울하게 팔려간 보디발의 노예였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지도자 이전에 미디안 광야의 외로운 목자였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 되기 전에 사울 왕의 핍박을 받은 정처 없는 망명자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고난을 불행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실패했다고 두려워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난을 하나님의 연단으로, 축복의 기회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험난한 인생길을 걸어가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욱 든든하게 서갔던 것입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눈앞에 있는 일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언젠가는 끝나버릴 이 세상만 보아서도 안됩니다.
인생의 마지막을 보아야 합니다.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사모해야 합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 주님과 기쁨을 나눌 그 감격스러운 시간을 생각하며 영적인 세계, 믿음이 세계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교 교수는 일에 매일 쫓겼습니다.
눈만 뜨면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병들어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자,
여기에서 인생의 참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내 생을 끝낼 것인가?
에델바이스는 아주 작은 꽃입니다.
그러나 생명력이 매우 강한 꽃입니다.
고산식물인 에델바이스는 아주 추운 겨울에 눈 속에서 탐스러운 꽃봉오리를 맺습니다.
그리고 훈훈한 봄바람에 눈이 녹으면 에델바이스는 그 청초하고 앙증스런 자태를 드러내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에델바이스를 시련을 극복해낸 인고(忍苦)의 꽃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꽃은 폭설과 강풍을 견뎌냈기 때문에 더욱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실제로 일교차와 추위가 심할수록 에델바이스는 더욱 신비로운 색을 발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엄청난 아픔을 주지만, 그것을 잘 이기고, 극복하게 되면 더욱더 향기나는 복된 삶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이올린을 만드는 명장들은 일부러 북풍을 맞아 남쪽으로 구부러진 나무를 재료로 선택한다고 합니다.
모진 북풍과 혹한의 밤을 견뎌낸 나무가 보통 나무보다 훨씬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역경은 곧 희망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러나 절망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신음입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따뜻한 봄이 옵니다.
우리 모두 희망을 가지고, 희망을 노래합시다.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